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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의 신학

하마사 2006. 10. 13. 11:49
 

커뮤니케이션의 신학(Theology of Communication)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로버트 E.웨버/정장복역)의 요약-

                                 


<목 차>

Ⅰ.들어가는 말

Ⅱ.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사명

  1.복음과 문화적 관점

  2.커뮤니케이션의 과정

  3.신앙의 각성

Ⅲ.커뮤니케이션신학

  4.커뮤니케이션의 기초 : 하나님과 피조물

   1)하나님 : 커뮤니케이션의 궁극적 기초

   2)피조물 :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대상

  5.커뮤니케이션의 모형 : 역사, 언어, 그리고 환상

   1)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소통하신다

   2)하나님은 언어를 통해서 소통하신다

   3)하나님은 환상을 통해서 소통하신다

  6.커뮤니케이션의 모형 : 성육신

   1)성육신의 원칙과 그것이 암시하는 현대의 커뮤니케이션원리들

  7.커뮤니케이션의 붕괴 : 인간과 죄

  8.커뮤니케이션의 회복 :그리스도와 구원  

Ⅳ.현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함축된 의미들

  9.상징 사용의 재발견

   1)상징이 차지하는 위치

   2)교회안의 커뮤니케이션에의 함축된 의미들

   3)상징의 사용을 되찾는 길

   4)세례식, 성유식, 그리고 성찬식

 10.교회안에서의 성장의 재발견

   1)영적 성장이란?

   2)성장의 현장으로서의 교회

   3)교회안에서의 성장의 전달

 11.선교사명의 재발견

   1)세상의 의미

   2)세상안에 속한 교회

   3)교회는 세상의 영에 속한 것이 아니다

   4)그리스도안에 있는교회는 세상을 이긴다

 12.그리스도교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13개 성서원리

Ⅴ.나가는 말

   참고문헌

Ⅰ. 들어가는 말

  

    이 책은 그리스도교, 그것도 그리스도교를 유일한 세계관으로서 전제를 하고 저술해 나간다.  이 책의 목적은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의 맥락에서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견해를 기술하려는 것이다. 분명하게 말하면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조명을 한 책이다. 이 책의 성과는 충분한 신학적 조명과 함께 그리스도교전달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명쾌하게 듣고 응답하며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의 실천적 방향을 모색하도록 도와주었다는 데 있다.

    그리스도교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신념을 중심으로 삼는다. 그리스도교적 커뮤니케이션관의 배후에 있는 중요한 주관적 견해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그리고 “지금도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말씀하고 계시다는 말은 동적인 삶의 견해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은 지속적인 행동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계속 말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하신 것을 들으려면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고 계신 것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①피조물-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능동적으로 알리시는 훌륭한 수단이다. ②성서 -성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에 관해서 기록된 자료이기 때문에 지금도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③교회-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살아있는 음성이다- 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금도 말씀하고 계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전달수단(세계, 피조물)과, 하나님의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의 기록된 자료(성서)와, 그가 의사를 소통하는 음성(교회)를 인지하는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세 가지 관심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1-3장에서는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사명을 취급하며 커뮤니케이션신학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4-8장에서 그리스도 세계관에 기초한 성서적 커뮤니케이션을 전개한다.

9-11장에서 전달자로서의 교회의 역할을 연구한다.

12장에서 그리스도전달자를 위한 13가지 원칙을 수립한다.

9-12장에서는 지금까지의 그리스도교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신학적 조명하에서 현대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몇 가지 암시들을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이 책은 성서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손쉽게 접근하도록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의 신학적 정립을 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복음의 전달이라는 지상명령 앞에서 그리스도교 전파자들이 유일한 진리인 성서를 현 시대의 문화적 맥락에 맞도록 그 접촉점을 모색하며 효율적인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을 개발할 것을 생각하도록 안내한다.


Ⅱ.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에의 사명

  

  1.복음과 문화적관점

   

  그리스도교회의 과제는 그리스도를 현세계에 전파하는 일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교회의 과제를 정의할 때 ①그리스도란 누구신가? ②현세계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문제를 야기시킨다.

  첫째로 “그리스도란 누구인가?”에 대해 살펴보자. 그런데 그리스도에 관해 너무 인간화하거나 너무 신격화함으로써 그리스도에 관해 잘 못된 견해가 생겨난다. 또한 예수에 관한 견해중에서도 문화적환경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왜곡되게 표현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①서양의 그리스도-이 그리스도는 논리적이고 교양있고 세련되고 예의바른 누구나 좋아하는 대중예수이다. ②동양의 그리스도-다소 신비적이고 사적인 이미지를 따라 빚어진 그리스도상을 가지고 있다. 예수와 가까이 하려는 사람들은 특히 고행과 금욕적인 생활의 실천으로 예수님께 다가간다. ③제 3세계의 그리스도-혁명가 예수-를 언급할 수 있다. 이들은 그들의 문화적 상황에 성서적 그리스도를 꿰맞추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수많은 문화적 제약들을 넘어서서 성서적 그리스도를 더 분명히 나타내 보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성서적 그리스도는 제 2아담, 즉 그의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사탄의 권세를 파괴하고, 다시 오실 때 죄와 사망 권세를 그의 발 아래 놓으실 우주적 인물로서의 그리스도이다.


  둘째로 이 성서적 그리스도를 전파해야 하는 현 세계에 대해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효과적인 전달자들은 현대 세속사회가 굉장한 다양성하에서 그들 각각의 고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세계와 소통하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교회역사 속에서 복음이 다양한 세계관의 맥락에 맞추어져 왔음을 볼 수있다. 복음은 히브리적인 배경안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사고 양식과 실제는 히브리적인 고정관념에 맞게 되어 있다. 그러한 신앙이 로마문화권으로 옮겨감에 따라 그것은 점차 로마적 세계관의 실용적인 성격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또한 서양에서는 종교개혁시대 이래로, 개신교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변화하는 세계관에 연결시키기 위해서 계속 노력했다.


  그리스도전파자로서 현 세계와 소통하는 일이 보이는만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절망에 빠질 정도로 복잡한 것은 아니다. 레드필드에 의하면 문화의 거의 모든 양상을 분류할 수 있는 세 가지 중심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 자연, 하나님(또는 초자연)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교적 세계관도 역시 이런 관점에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소통하려 하는 곳에 이미 접촉점이 수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전파자의 과제가 성서적인 복음을 모든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복음이 여러 문화안에서 효율적으로 소통될 수 있도록 전달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2.커뮤니케이션의 과정

  

   현 세계에 그리스도를 소통하기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전파자와 그 청중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의 교량을 건설하는 일에 신중하고 지적인 고려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첫째,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커뮤니케이션은 메시지, 전달자, 수용자라는 세 가지 구성요소를 포함한다. 이 3구성요소는 분명히 필요한 것이지만1) 그러나 과정 그 자체는 수많은 변형된 요인들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 단순하지 않다. 즉 1)메시지자체의 문제로 성서와 그것이 최초로 나타난 문화적 맥락안에서의 그 메시지 이해의 문제이다. 전달자가 자료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문화와 역사, 언어, 그리고 신학적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것은 암호화과정으로(encoding) 전달자가 메시지의 자료와 함께 메시지를 향한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까지를 소통하는 것이다. 2)수용자는 그 자신의 사고그물을 통해서 전달자의 메시지 해석을 걸러내야 한다. 이것은 암호 해독과정으로 수용자가 자신의 문화적, 역사적, 언어적 ,그리고 신학적 개념들의 총체를 전달자의 메시지가 걸러지고 있는 자신의 사고그물에 투입시는 것이다.(렘 17:10) -1)과 2)에서 보듯이 우리는 암호화와 암호 해독의 역학이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휼륭한 전달자는 이 과정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커뮤니케이터들은 성서가 기록되었던 문화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3)메시지는 수용자의 문화적 맥락을 통해서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과정속에서 우리는 동적인 동질성이나 적응가능한 방향을 찾아내야 한다. 동적인 동질성이란 접촉점, 즉 상이한 문화사이의 폭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되는 것이다. 2) 

    이러한 것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문화사이에 가교를 놓는 것에 신학적인 고려를 해야함을 간직해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교메시지의 내용은 초문화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사상의 기본내용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불가결한 것이며, 초문화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특징은 히브리적 문화에 속한 것이므로 없어도 되는 것이라고 처리해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창조사건, 타락, 계시, 성육신, 구속, 교회, 종말에 관한 교리를 포함하고 있다. 둘째, 그리스도교적 내용의 해석은 성서안에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성서적인 그리스도교를 전달하기 위해서 우리가 선포하는 교리의 성서적 해석을 전달해야 한다. 내용의 해석에 관해서 동의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님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교회 전통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와 그리스도교 학자들의 업적에 의존하게 된다(예-속죄교리의 해석, 바울의 롬 5장 12절말씀) 셋째로 그리스도교신앙은 성서의 확실한 가르침에 입각하면서도 이 진리가 알려지는 상대적인 방법을 인정하는 것이다.(예-속죄교리의 역사)

    이러한 신학적 고려에 함축된 의미들을 찾아 보면

  ①그리스도교신앙의 규범적인 내용과 해석을 구별할 수있다는 것이다. 즉 구속신학의 규범적인 내용은 분명히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으며 다시 사셨다”는 사실이며 그에 대한 성서적 해석은 승리자 그리스도 개념이다.

  ②성서적 해석이 더 낫다는 것이다. 

  ③성서적 해석이 구원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암시이다.


3.신앙의 각성

  

  그리스도교전파자로서 우리는 신앙을 일깨우는 것에 기여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신앙이 무엇이냐“하는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 기존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앙에 대한 견해(우리의 해석)과 성서적인 의미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신앙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게 한다.

  우리는 신앙에 대한 문화화된 견해를 통해서 신앙을 일깨워 보려고 하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에게 들려져야 할 진리를 밀려나게 하고 계속해서 곡해하게 되는 세 가지 사상의 범주가 있는데 ①합리주의 ②낭만주의 ③실존주의라는 근대사상이다. 이 학파들은 어느 것도 성서적 세계관을 이해하는데 참된 성서적 접근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 세 경우 모두 신앙의 개념이 “체계”나 “문화적 사고그물”을 통해서 여과되었음을 감지한다. 우리는 문화적 사고 그물을 통과하려는 기대와 성서적인 신앙인식을 파악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성서적 신앙개념을 연구하는 일에 착수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의 요지는 우리의 주가 되시며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신앙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리고 성서적 신앙관의 출발점은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의식속에서 진정한 앎이 될 때 그 앎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깊은 자각으로 삶을 향해서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도록 해준다. 이렇게 성서의 선포에 대해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내부에는 우리의 생활방법의 정당성을 확인해주는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난다. 바로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의 목표는 신앙을 통한 인간과 피조물 재방향 정립에 있다고 할 것이다.


Ⅲ. 커뮤니케이션신학

 

4.커뮤니케이션의 기초 : 하나님과 피조물

    이 장에서는 하나님이 존재하심과 그가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믿음이 인간의 커뮤니케이션문제를 어떻게 조명해 주는가를 밝히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하나님 : 커뮤니케이션의 궁극적 기초

  

    성서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다. 그런데 신약성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모두 하나님으로 지칭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선포하고 있다.(고전 8:6; 요20:17 ;골2:9; 마28:19) 1세기에 시작되어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의 전통은 언제나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성격을 긍정하였으며 이것은 또한 교회의 예배실제와 신조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세례에 대한 경전화되지 않은 최초의 진술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받음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최초의 그리스도교 예배의 묘사도 성부와 성령을 인정하였으며 최초의 신조도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긍정하였다.

   초대교회때부터 하나님의 본질적인 복수성을 거부하고 단일성을 강조함으로써 신성을 설명해 보려는 이단적인 움직임이 있었는데 ①삼위양식론자들(하나님은 세 가지 가면을 쓴 배우, 즉 세가지 다른 역을 맡은 한 사람과 같은 것이라는 주장)과 ②역동적 단일신론자들(양자설주장) ③아리우스의 주장(예수는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 있다. 신성의 복수적 성격을 부정하려는 이러한 시도들은 니케아회의(325 A.D)등 교회로부터 거짓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성서에는 신성의 복수성에 관한 논거가 신성의 위격들사이에 존재하는 친밀한 커뮤니케이션에서 설명되고 있다는 근거가 있다. 첫째로 성서는 신성의 위격들 사이에 있는 나 -너(I - thou)의 관계를 말해준다.(마17:5; 요16:28; 요16:13) 둘째는 성서가 증거하는 사랑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요3:35; 요15:10; 요 16:14) 셋째는 성자가 성부께 기도한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요17:5; 요14:16) 이와같이 성서적 증거를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은 관계의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그 본질상 커뮤니케이션에 의해서 특정지워지는 분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므로 커뮤니케이션의 능력은 인간이 고안한 어떤 것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의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신성안의 커뮤니케이션이 인격적이고 관계적이라면 모든 의미있는 커뮤니케이션은 마찬가지로 인격적이고 관계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또한 삼위일체의 커뮤니케이션은 인격적이며 관계적이고 그것이 항상 사랑을 통해서 표현된다는 사실을 볼 수있다. 이렇게 삼위일체의 커뮤니케이션은 우리로 하여금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2)피조물 :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대상

  

    창조교리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 피조물사이의 관계성을 입증하고 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행동의 결과로 생겨난 것으로 피조물은 자신의 존재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창조주에 의존하고 있다. 일시적이고 현실적인 존재의 의존적 성격을 인정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창조교리가 하나님과 그 피조물사이의 관계성을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있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함께 피조물을 통해서 소통하신다.

   ①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피조물

    세상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본성을 소통하는 표시로 보여진다. 그러므로 그 3형상들이 “외적 존재”로 나타나는 모양은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과 유지하시는 관계성의 표시인 것이다. 그 관계성의 표시의 첫째는 창의성이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내적 존재”안에 있는 창의성의 표시이다. 피조물은 그 자체의 고유한 내적인 역동성을 가졌다고 말할 수있다. 하나님께서 창조질서와 소통하신 방법은 그의 신적인 성질이 자신의 창의성의 산물이나 작품에 의해 부분적으로나마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었다.

    관계성의 표시의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의 진수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내적 본질”의 “외적인 활동”을 경험하게 된다. 성육신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세상과 소통하시고자 하셨다.

    관계성의 표시의 셋째로 성령의 열매를 들 수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속성이기 때문에    이 속성들이 경험될 때 하나님과 피조물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있다.

    바울도 만물은 하나님에 연결되었다고 증거했다.(롬11:36) 그러므로 만물은 창조주의 형상이라는 말할 수있다.

   ②사탄 -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자

    성서는 사탄이 피조물안에 사망권세를 수립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 결과로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은 많은 왜곡과 의미전도를 겪고 인간의 시야로부터 감추어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피조물을 통한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은 크게 손상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창조질서에 들어오신 것은 악의 권세와 능력을 쳐 부수고 창조질서를 완전하게 회복시키려는 것이었다.

   ③하나님은 피조물과 소통하신다.

    천지창조를 통해서 수립된 하나님과 그의 세상사이의 관계성은 타락을 통해서 단절되었지만   구속을 통해서 회복되었으며 종말에 완성될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목적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존재의 의미자체로 볼 때 그 자신과 또 그 피조물과 소통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교제하신다는 가르침은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소통하시는 휼륭한 매개수단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근거가 된다.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이 그의 피조물을 통해서 분명히 소통된다는 사실은 성서기자들에 의해서 입증되고 있다.(시19:1-4) 바울도 인간이 피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있다고 말하고 있다.(롬 1:19-20) 그러므로 피조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성안에서 발전되는 커뮤니케이션이어야 한다.

    또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더욱 특별하고 특수하게 알려진다. 첫째로 시간과 공간의 계시적 성격이다. (시편 19편) 둘째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통해서 소통하시는 또 하나의 방법은 역사이다. 특별한 장소에서 특정시간에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하셨다. 예를 들면 출애굽은 지속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는 시간의 공간의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④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에게 소통하신다.

    신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유일무이한 사건, 즉 성육신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1세기에(시간) 팔레스틴(공간)에서 일어난 이 역사적 사건속에서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도교 예배의 주요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사실의 회상이다. 하나님은 1세기에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우리에게 기억가운데서 말씀하고 계신다.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목표는 그것의 재창조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타락이후에 그의 피조물안에서 그것의 재창조를 위한 활동을 개시하셨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과 역사안에서의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은 종말론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활동을 기념할 때, 그는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말씀하실 수있다는 것이다.


 5.케뮤니케이션의 모형 : 역사, 언어, 그리고 환상

 이 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과 소통하는 방법을 살펴보고 그로부터 오늘날 그리스도를 소통하는 과제를 위한 몇 가지 특별암시를 끌어내고자 한다. 

  

  1)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소통하신다.

  

     이 세상의 종교들과 그리스도교를 구별지으며 그리스도교를 유일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다른 세상의 종교와 신화들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데 비하여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구속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그것이 이 지구상의 인간의 삶과 관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른 신화들과 다르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자신에 대한 진리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그의 계시는 항상 인격적이고 관계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활동의 본질과 관계되어 있으며 그것을 출애굽과 성육신이라는 자비로운 구원의 행위로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케뮤니케이션이 가지는 특징을 살펴보면 1)역사의 사건들은 항상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계시를 약속한다는 것을 볼 수있다-출애굽사건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계히했고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냈으며 또한 이스라엘을 위한 미래의 약속을 제시한 사건이었다. 또한 성육신사건도 이 세상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그리고 예수의 재림때에 이루어질 만물의 궁극적인 회복과 교회의 완성을 바라보는 것이다-  2)하나님의 계시가 불가해하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를 신비라고 말하기를 좋아했으며 (엡 3:3) 그래서 그는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그리고 “부분적으로 안다”고 가르쳤다.(고전 13:12)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현대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암시를 찾아 본다면 ①우리의 케뮤니케이션은 역사적이 되어서 세속안의 인간의 삶을 언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②우리의 메시지의 주요 관심은 하나님의 케뮤니케이션 즉,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 ③우리는 우리가 행동으로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우리가 전달하는 내용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나아가서 우리의 행동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약속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2)하나님은 언어를 통해서 소통하신다.

  

    언어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수단으로서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언어사용에 대한 언급을 말하고 있다. (창 2:16; 창3:18; 창4:6 ; 창9:1) 점차 이스라엘역사안에서 언어를 통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케뮤니케이션은 줄어들었고 대신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기시작하셨다.(출 19:9; 예언서) 신약에서도 하나님은 언어를 사용하셔서 소통하셨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난 수태고지(눅1:216-38)는 언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최상의 예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인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언어를 통해서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서의 언어의 정당성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 진화의 산물이라는 강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관점에서 볼 때 언어가 존재로 화하게 되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커뮤니케이션수단으로서의 언어의 정당성에 대한 궁극적인 좌표점이 된다.

  문화 상호관의 커뮤니케이션시대인 현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언어사용을 통해서 말씀하신다고 생각할 때 우리가 마음에 간직해야 할 몇 가지 원칙들이 있다.

 ①우리의 언어는 그 맥락에 맞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성서적 문화와 현대문화라는 두 세계에 맞게 가교를 건설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②언어는 개인적인 경험에 연관되는 것이어야 한다. 현세에서 좋은 아버지를 가진 사람에게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과 아버지가 없거나 좋은 아버지와는 정반대인 아버지를 가진 사람에게 그 말을 사용하는 것은 더욱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③종교적 언어는 종교적 체험이라는 견지에서 개인적으로만 의미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확대된 커뮤니케이션이 완전히 실현되기 이전에 한 개인을 주와 구주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데려 오는 일이 우선 중요한 일인 것이다.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우리가 당면하는 한 가지 문제는 본질적 그리스도교의 언어를 보존하는 문제이다. 삼위일체나 그리스도의 신성, 대속, 성육신, 그리고 성서의 권위같은 단어 단어의 대부분은 신앙에 필수불가결한 진리들을 언급하는 것들로 성서적 계시의 구조안에서 학습되어야 하는 개념들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우리가 전달하고 있는 것이 성서적 진리라고 확신한다면 본질적인 그리스도교의 언어를 보존해야 한다.

   한편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진리를 상호 전달하는 유비와 실례를 만들기 위하여 성결된 상상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있다. 


 3)하나님은 환상을 통해서 소통하신다.

   

    성서에는 시각적 수단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내용이 많이 있다.( 민 12장) 꿈은 성서기록에서 긍정적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창 28:10-22; 창 41; 욜2:28)

   환상의 사용은 더 큰 위력과 중요성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서의 환상적 자료는 교회에서 폭넓게 사용되었고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형태로서 예배의식과 음악, 그리고 미술의 발전을 낳았다. 이사야의 환상(사6:1-3)은 요한의 환상(계4-5장)과 함께 수세기동안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지속적인 영감을 주었다. 이러한 천상에서의 예배의 환상은 지상 교회안에서 예배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그외에 에스겔(1-3;8-11장) 예레미야와 (13장) 다니엘과(1:17; 2:19 ; 7-10장) 아모스와(7-9 장) 요한(계)의 환상들은 교회에서 유사한 효력을 발생했다. 이러한 환상과 그림과 초상, 그리고 실물제시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감각을 통해서 인간에게 말을 거신다.


   하나님의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사용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현대의 커뮤니케이션에의 암시는 무엇인가?라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설명해야 할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의 원리들이 있다.

 ①근대사회심리학은 집단들이 수세기를 거쳐서 전수되고 보존해 온 이미지와 그림들, 그리고 기념의식을 통해서 그들의 의미와 주체성, 그리고 과거와의 연관을 찾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즉 사람들은 언어나 논리에 따라서라기보다는 의식을 통해서 더 많이 지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 유월절  ;  적용- 성만찬)

 ②시각적 영상을 통해서 자극된 상상력은 인간의 감정적인 측면에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성서의 시각적 상징 사용은 제한된 커뮤니케이션견해를 반대하고 시각적 상징이 서야 할 위치를 확인한다. (예-목사안수식에서 안수받은 자의 임무를 설명함에 있어서 연사가 언어와 시각을 통해서 소통함)

 ③시각적 상징의 사용은 수용자의 사회 문화적 현실과 무관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시각적 영상은 진실에 근거해야 하고 수용자의 경험에 부홥되는 상징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예 - 신약에 나타나는 메시야, 주님의 백성, 몸, 새 예루살렘, 바벨론, 소금, 빛 등의 이미지)


*의미 - 우리 시대는 텔레비젼이나 기타 시각 매체들을 통해서 점점 더 시각적인 상징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소통하는 수단으로서의 시각적 상징의 사용에 관해서 더욱 잘 인식해야 한다. 서양, 특히 개신교의 복음주의에서 우리는 합리적이고, 논설적이고 교리적인 것에 중독이 되어왔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일방적인 접근방법으 부족함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마술이나 사이비종교의 발흥이나 동양사상의 강조는 모두 삶의 한 가운데서 “내세”를 바라는 우리의 욕구가 표현된 결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언어에의 노예상태를 벗어나 폭발적인 상상력의 마개를 열어야 한다.


 6.커뮤니케이션의 모형: 성육신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절정은 성육신안에 나타난다. 낮아짐의 위대한 행위로서 그는 우리가운데서 하나가 되셨고 우리와 대면적인 관계로 소통하시게 되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형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인격적 커뮤니케이션안에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신약성서는 성육신의 역사적성격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를 가운데 놓고 천지창조-구속-종말을 일직선안에 모으고 있다. 신약의 강조점은 그 안에서, 그를 통해서, 만물이 인식되고 그 의미를 찾게 되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의미에 놓여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는 시간과 공간안에서 일어난다. 그리스도의 탄생이전의 시간은 줄어드는 시간은 줄어드는 숫자로, 탄생이후 시간은 늘어나는 숫자로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은 성육신의 시간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가 탄생한 장소(유대 땅 베들레헴), 그가 자라난 장소(나사레), 그가 가르친 장소(갈릴리) , 그가 죽으신 장소(예루살렘)에 관한 사실들은 그리스도의 공간적 위치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외 마5-7장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보존하기 위해서 기울인 관심들이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언어 사용의 예를 볼 수있으며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지금 여기에 계시다는 인식이(요 1:1,2,4,14,18) 하나님의 현존의 시각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하나님의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최고의 사건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형태가 형태화되는 사건이기도 한 것이다.

    성육신이 현대의 커뮤니케이션애 암시하는 내용에 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의미를 비교해 볼 수있다. 삼위일체는 커뮤니케이션의 존재론적 기반이라 할 수있다. 이것은 영원한 것으로서 시간이나 공간이나 역사에 의존하지 않는다. 반면에 성육신은 커뮤니케이션의 지상기반이다. 성육신의 실현이 시간, 공간, 그리고 역사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성육신은 커뮤니케이션의 지상적 기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성육신의 커뮤니케이션원칙과 그것이 암시하는 현대의 커뮤니케이션원리들  


   ①성육신사건은 주의를 끄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수태고지의 구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며 고대하던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후 점차적으로 예수님의 일생가운데 나타나는 색다른 사건들로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님께 고정되기 시작했다(12살때의 성전에서의 사건, 세례받으심, 물로 포도주만드신 사건등) 예수님은 색다른 행동을 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던 논쟁적인 인물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원칙은 우리가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전달하려 할 때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에 필수적인 전제조건이 수용자의 관심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천국과 그 요구조건을 설명하러 세상에 오셨는데 그의 천국묘사는 죄로 가득찬  문화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이미지를 조성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듣는 자의 주의를 끌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제시하는 것이 수용자가 기존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면 커뮤니케이션의 시도는 그 의미를 잃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전달하려 할 때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에 필수적인 전제조건이 수용자의 관심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에서 주의를 끄는 요소는 주로 천국-선포의 내용에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②성육신은 일체감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태어나셨다는 예수의 인성과 1세기의 사회적맥락속에서 동일한 인간이었다는 것, 즉 성육신은 커뮤니케이션의 완전한 모형임을 말해준다.성육신을 통해서 하나님은 커뮤니케이션의 표준을 수립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르신 것처럼(reach),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려(reach)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소통하려는 사람들의 삶자체와 사회적 맥락, 그리고 그들의 필요에 기꺼이 동화해야만 하는 것을 말해준다.

  ③성육신은 필요를 유발시킨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설교의 많은 부분은 그 청취자들 내부에 필요한 것을 유발시키려는 것이었다. 그의 접근방법은 간접적이었음에도 그리스도가 알기에 이미 거기 있었던 필요성에 역점을 두는 효과를 나타냈다. 예수님께서는 눅5장 중풍병자의 치료에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 필요인 “하나님의 용서”의 문제와 인간의 육체적 조건을 채워주신다. 그는 죄의 문제를 다룬 후에 바로 그 관심을 인간의 육체적 조건으로 옮겼다. 그의 관심은 완전한 인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것에서 우리는 효과적인 설교가 되려면, 그것은 듣는 자의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감정적 필요에 대한 감수성과, 이러한 필요를 채워주려는 의지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다.

  ④성육신의 커뮤니케이션은 필요성을 충족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예수의 가르침은 듣는 자가 자기 발견을 해 나가도록 방향이 정해져 있었다. 듣는 자가 자신의 틀과 이해력안에서 진리 인식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로써 휼륭한 커뮤니케이션의 전달자는 자기 발견을 야기시키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즉 듣는 자에게 질문을 되돌려야 하고 그들 스스로 결정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시각재료나, 비유나, 격언이나, 이야기들을 듣는 자가 전달되는 것을 이해하기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수단으로 두려움없이 사용하는 발견지향적형식의 커뮤니케이션이다.   


7. 커뮤니케이션의 붕괴 : 인간과 죄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며 , 왜 그다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명료해 보이는 것을 외면하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들이 이 장의 관심거리이다.


  성서는 인간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기”(시8:4) 때문에 소통의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그는 창조주의 모양을 본따서 만들어졌으므로 조물주와 마찬가지로 소통할 수있다. 과학주의는 인간의 커뮤니케이션능력을 인간이 자신의 기계와 같은 유기체를 발전시킨 복잡한 진화과정의 일부로 간주한다. 그러나 과학주의는 왜 인간이 소통할 수있는가하는 깊이 있는 문제에는 해답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성서는 인간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다고 선언하며 인간의 커뮤니케이션능력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혁명적인  개념안에 위치하게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과 똑같은 본질을 가졌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인간은 하나님의 반영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드러내고 그를 반영하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면

 ①현대 신학자 고든 카우프만은 인간의 역사적 본질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에 대해서 포괄적인 견해를 강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인간에 의한 문화창조는 인간의 역사적 성격에 고유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세계 창조를 형상화하는 한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형상’이란 인간의 영적인 면에만 국한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관계하는 모든 것의 핵심을 가리킨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역사를 구성하고 개인적이고 세계적인 사건의 결과를 결정할 능력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의 존재방법은 (죄는 제외하고) 유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가르키고 있다고 볼 수있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이 하나님에 유비되는 방법의 하나가 그의 소통하는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할 수있다.

 ②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을 향해서 취하는 또 하나의 접근방법은 그리스도론적 방법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관해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1:15)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완벽하게 반영하시는 분이시다. 이런 뜻에서 사도들은 크리스천들에게 예수를 본받으라고 권고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인간에 둠으로써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 하나님의 완전한 모습은 인간 예수안에서 발견됨으로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를 본받아 하나님의 실재를 드러내야 한다.

  ③성서는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열려진”, 그리고 역동적인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소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간의 신중심적 성격을 인정하지 않고는 해결될 수없다.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소통하는 관계에 있을 때 소통하는 존재로서 그가 활동하는 모든 영역이 균형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고 그가 활동하도록 지어진대로 활동을 전개할 때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삶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한 선택의 결과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했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형상은 왜곡되었다. 이러한 왜곡된 형상은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기 자신과,그의 동료와, 자연과의 -커뮤니케이션의 파괴를 초래했다. 그리하여 그 형상의 일부인 커뮤니케이션을 원래 의도된대로 수행할 수없게 되었다.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죄의 결과는 우주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간의 죄로 인한 타락은 하나님과 그의 전체 창조질서사이의 교제의 파괴라 할 수 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은 전체 우주 질서안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장벽을 허물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전달자는 현실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낙관주의자이다. 그리고 성서의 증거는 세상의 각 인간이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과, 자연과의 커뮤니케이션의 파괴작업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전달자는 커뮤니케이션의 파괴에 자 자신이 , 또한 그가 소통하고 있는 사람들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8. 커뮤니케이션의 회복: 그리스도와 구원

   커뮤니케이션의 파괴는 한 사람인 아담과 그의 죄가 과거와 현재에 걸쳐서 계속 온 인류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력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커뮤니케이션의 회복도 한 사람인 그리스도와 그가 온 인류에게 계속해서 미치고 있는 영향력에 초점을 둔다. 따라서 새로운 인간인 그리스도가 아담의 죄의 결과로 상실되어 버린 모든 것을 되찾았다는 것이 이 장의 첫째 요지이며 둘째로 파괴된 커뮤니케이션의 회복이 거기로부터 전세계에 퍼져 나아가게 되는 사회단위로서 회복된 백성의 공동체(교회)를 논하려고 한다.

 

1) 그리스도: 커뮤니케이션의 회복자


   아담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전체 창조질서를 죄에 몰아넣고 말았다. 그러나 제 2 아담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 인간의 상황을 역전시켰다. 다시 말해 커뮤니케이션을 회복시켰던 것이다.  

 ①그리스도 : 새로운 인간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을 회복시키신 분이 인간이자 동시에 신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이 연구를 시작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사이시라...”(히 1:3)고 기록했다. 이 아들이신 아버지에 대한 관계는 니케아회의에서 논의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교회는 아버지와 아들이 일치함을 긍정하고 에수가 “참 하나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또한 예수는 인간이시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4복음서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가 인간의 혈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초대교회의 주요논쟁은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을 긍정하는 것으로 끝이 났는데 그 예로 칼케돈신조는 예수가 “인간이에 있어서 우리와 동질”이시라고 진술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인사에서 예수의 두 가지 본질을 한 데 모으고 있다. “...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 3-4).

    그러므로 예수는 커뮤니케이션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커뮤니케이션은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에 의하여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만이 완전한 신이요 인간이시다. 따라서 예수만이 커뮤니케이션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②그리스도는 옛 것을 반복하신다.

   바울은 제 1 아담이 죄와 죽음과 저주를 가져왔다면, 제 2 아담은 이것을 뒤집어 엎음으로써, 의로움과 생명과 정의를 가져왔다(롬 5:12-21). 또한 우리가 제 1 아담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제 2 아담의 형상을 지닐 수 있다. 이러한 제 1 아담과 제 2 아담 사이의 바울의 대조가 의미하는 것은 초대 교부들에 의해서 속죄와 반복의 신학 관계 안에서 이해되었다. 반복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며 동시에 인간의 형상이라는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근거한다. 여기에는 교부들에 의해 밝혀지게 된 두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는 원칙이며, 둘째는 인간의 모습을 가진 자만이 치유된다는 원칙이었다. 결국 제 2 아담이라는 단어는 예수의 인성을 언급하며 그것을 확인하는 말이다.

 ③예수의 사역의 우주적 의미

   최초의 인간의 죄는 인간과 전체 창조질서와의 관계를 파괴한 사건의 연쇄를 시작함으로써 우주적인 결말을 낳았다. 그러나 제 2아담의 의로운 복종은 그 사건의 질서를 역전시켜서 그러한 모든 부서진 관계에 회복의 가능성을 가져왔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의 우주적인 영향력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커뮤니케이션을 포함하여) 기뻐하심이라”(골 1: 19-20). 여기서 바울은 성육신을 창조와 구속에 연결시키고 있다. 따라서 바울이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이라고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④그리스도의 사역의 역사적 의미

   아담의 죄가 역사에 악영향을 주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역사 안에서 실현되는 사건의 연쇄를 움직이게 했다. 우리는 이미 인간이 그 본질에 있어서 역사적 존재임을 알았다. 따라서 인간의 구속은 역사안에서 하나님이 명하신 인간의 과제와 인간관계의 맥락안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구약 성서의 기본 주제는 화해의 역사적 성질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과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와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대변해 주는 모든 것으로 되돌아가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 첫 번째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두 번째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출애굽 사건이다. 이러한 인간 편에서의 움직임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역사의 절대적인 주로서 하나님을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미래 역사적 왕국에의 소망은 신약시대에도 계속 살아있었다. 예수는 오셔서 전파하시기를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 15)고 하셨고, 그 자신 안에서 천국이 시작되었음을 설명하셨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역사적 성육신인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죽으심과 부활 통하여 인간을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과 자연으로부터 분리시켰던 적대 세력들이 극복되었다는 것이다.

 

2)교회: 회복된 커뮤니케이션의 공동체


   천국의 모습이 발견되는 곳은 교회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가 회복되고 피조물 내부의 파괴된 커뮤니케이션이 잠재적으로 회복되는 원천도 바로 교회 안이다. 교회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들의 무리이다. 그리고 이들은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과 세계에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회복된 커뮤니케이션이 출발해야 하는 곳은 하나님에 속한 사람들의 장(場), 즉 교회라는 것이다.

 ①교회 안에서의 회복된 커뮤니케이션

   회복된 커뮤니케이션의 장소로서의 교회에 대한 강조는 지상에 회복된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실재를 경험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교회 안에서의 회복된 커뮤니케이션의 체험은 현재 있는 것과 앞으로 올 것 사이의 긴장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리고 지상에 있는 교회의 관점에서 회복된 커뮤니케이션을 알아보아야 한다.

    첫째로,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회복되고, 교회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세례와 성찬식이 열려야 한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통과 의식이며, 성찬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영적 교제에 대한 물질적인 상징인 동시에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이 회복된다는 상징이다.

    둘째로, 교회에서 커뮤니케이션이 회복되는 방법은 자기 수용을 통해서이다, 죄의 등장이 인간을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인간 내부에 바울이 묘사한 자기 파괴의 관습을 형성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는 개인의 자아 체험에 실질적인 치유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자기 가치는 그가 행한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구성되었다는 인식에서 나오게 된다. 또한 이 원칙은 교회안에서 서로에 대한 관용이 성장에 필요한 전제조건이라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셋째로 교회 안의 회복된 교제를 통해서 커뮤니케이션은 회복된다. 지가 우리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 장벽을 만들었다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화해하게 하신다.

   넷째로, 인간과 자연과의 커뮤니케이션은 교회 안에서 미리 나타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피조물의 회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 피조물의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 뿐 아니라 또한 곧 우리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입었으매...(롬 8:21-24). ”

  

   죄가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파괴했다면, 그리스도 역사는 피조물을 그 본래의 의도대로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장에서는 한 가지 요점을 강조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행한 것을 역전시킴으로써 세상을 재창조하셨으며 이 새로운 창조는 교회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 요점이 커뮤니케이션에 암시하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ㆍ지상에는 회복된 커뮤니케이션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 장소인 교회가 있다.

 ㆍ교회의 책임은 회복된 커뮤니케이션을 실현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성찬식은 항상 화해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제시하는 것이다.

 ㆍ현대의 소통자들이 회복된 커뮤니케이션의 메시지를 가장 잘 전달하려면 자신이 삶 속에서 그것을 경험한 입장으로부터 전달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 안의 커뮤니케이션의 실현과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의 그 경험이 매우 강조되는 것이다.   


Ⅳ.현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함축된 의미들

 

 9. 상징 사용의 재발견

   이 장과 다음장들에서 필자는 앞에서 전개한 신학적 이해에 기초하여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의 미래를 탐사하는 일에 관심을 집중하게 될 것이다.

   만약 교회가 회복된 공동체라고 한다면 문제는 교회가 그 자신의 삶속에서 어떻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화해를 소통시킬 수있는가? 라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장의 관심의 초점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부에서 화해의 복음이 소통될 수 있는 매체로서의 상징의 사용이다.

  1)상징이 차지하는 위치

    상징(symbol)은 그것자체를 넘어선 것을 지칭해 주면서 동시에 그것이 상징하는 것에 직접 관여하는 것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유진 니다(Eugene Nida)는 상징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고 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인습적이 상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형태로 볼 때, 예수가 죽임을 당한 형틀을 본 딴 것이므로 그 사건의 실제적인 특징을 다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사의식이나, 드라마나 그림 또는 건축물이나 춤들도, 그것들이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것이 나타내고자 하는 대상물의 실제적인 속성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습적인 것이다.3)


  ①상징의 중요성과 상징으로서의 교회

   교회는 천국의 상징이다. 그것은 천국 그 자체는 아니지만 천국을 가리키고 있으며, 천국에 관여하고 있다. 교회는 세상에 나타난 천국의 모습이며 회복된 커뮤니케이션의 가시적인 표현이다. 이 세상에서의 교회의 삶은 그 자신과 세상에 모두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상징이라는 사실은 상징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징의 기능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해와 전달 수단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단순히 심리학적이 창안물로서가 아니라 궁극적 실재의 형상으로 대우해야 한다.

  ②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의 필요성

   어떤 유한한 언어로도 초자연적 진리를 완전히, 그리고 충분하게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성서 종교와 역사 속의 교회는 항상 유한의 영역을 넘어서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서 상징에 의존해 왔다.4) 따라서 신앙의 언어는 상징의 수단이 되었다. 과거에는 일기와 쓰기가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인간이 커뮤니케이션의 시각적 수단에 의존하면 의존할수록, 읽기와 쓰기의 기술은 쇠퇴하게 되고 시각 자료의 영향력은 더욱 큰 비중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서 다시 한 번 상징을 사용하는 일이 특히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2)교회 안의 커뮤니케이션에 함축된 의미들

  교회는 상징적인 표현을 재발견해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개신교들 사이에 상징의 사용이 적어졌기 때문이다.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은 성서에서 입증되고 있는데, 성서는 환상과 꿈과 비유와 묵시적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둘째, 인간은 상징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인간의 뇌 기능이 좌우가 서로 다르다고 결론지었다. 즉 좌뇌는 언어 기능을 전문으로 하고 있고, 우뇌는 공간 지각과 다른 비언어적 기술을 주로 담당하고 있다고 하면서 인간이 상징적 동물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상징의 사용을 회복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상징이 삶 자체의 바로 중심에 있다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생일 축하나 기념식, 졸업식, 결혼식, 장례식 등은 언어만으로는 전달 할 수 없는 사물의 의미를 나타내주는 방법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뇌가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에 맞추어져 있는 존재라고 할 때 그리스도교의 커뮤니케이션은 교회의 안과 밖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상징적, 비언어적, 의례적인 수단을 경시해서는 안된다.

3)상징의 사용을 되찾는 길

 ①그리스도교 예배의 상징적 성격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라는 영어 단어는 가치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께 가치를 돌리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사야 6장과 계시록 4장에서는 피조물은 하나님이 존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치를 돌리고 있다. 이러한 환상에서 멋있는 점은 하나님의 보좌에 둘러서 있는 상징의 사용이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고”(사 6 :1-2) 있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요한 역시 그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를 하고 있다. 이러한 환상들의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궁극적인 본질을 말해주고 있는 시각적인 영상이다.

②예배에서의 상징의 상실

   많은 교회가 예배의 상징적 환상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원인은 교회의 자기 이해 안에 있는 균형의 부족에 있다. 즉, 교회는, 예배는 강조하여도 전도는 강조하지 않는다든지 교육은 강조해도 봉사는 강조하지 않을 수도 있고, 전도는 강조해도 예배는 강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개신교 복음주의 입장은 전도와(선교) 교육(학습)을 강조하고, 그 외의 다른 면, 특히 예배를 경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의 재발견을 통해서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③예배에서의 상징의 회복

   예배에 있어서 상징의 회복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어떤 원칙이 있어야 될까?

  첫째, 지상의 예배는 천상의 양식을 본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사야와 요한이 본 환상은 예배에서 상징을 사용할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 부정하고 있지 부정하고 있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금장식이나 화려한 장식들이 아니라 시간적, 상징적 환경을 통해서 예배자의 상상력과 영혼이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예배를 하나의 행동으로서 재발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예배 역사는 예배자가 행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강조해 왔다. 예배는 우리에게 되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어떤 것이다.

  셋째, 예배 요소로서의 시간과 공간과 역사를 무시할 수 없다.

  이사야와 요한이 묘사한 예배는 시간과 공간과 역사를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예배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 요소들이 영원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마지막 넷째로, 예배는 항상 배우는 기술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말아야 하다. 예배가 순간적이고 자발적이며, 자연적인 것이라는 생각은 실제적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자기 이해를 드러내고 있는 생각이다. 예배가 학습되어지는 것이라는 사실과 기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학습되는 과정은 역사적이 것이다.    

4)세례식, 성유식, 그리고 성찬식

   기원 220년에 히폴리투스(Hippolytus)가 쓴 「사도들의 전통」(The Apostolic Tradition)에 보면 세례식과 성유식, 그리고 성찬식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설명되어 나오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초대교회에서의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의 의미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즉 상징을 통해서 인간의 하나님과, 자신과, 동료와, 그리고 자연과의 화해의 전 복음이 소통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들은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언어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특히 성찬의 상징은  이 세상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과거와 미래를 한데 모음으로써, 역사의 의미와 역사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성찬은 인간을 세상에 보내어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화해의 지속적인 대리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공동체인 교회의 상징이다. 


이 장에서 말한 결론을 내리면 다음과 같다.

 ㆍ교회는 천국에 대한 지상적인 상징이다. 상징은 그것이 나타내고 있는 실제에 관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회복된 관계성의 표현이 나타나기를 기대할 수 있다.

 ㆍ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자신, 인간과 그의 동료,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새로워진 관계는 예배의 상징에서 선포된다.

 ㆍ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삶의 실재를 전파하려 한다면,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화해의 진리가 들려질 뿐만 아니라, 또한 촉각과 미각과 후각과 시각으로도 경험될 수 있는 상징을 재발견해야 한다.


10. 교회 안에서의 성장의 재발견 

   이 장의 관심은 그리스도안에서의 성장이 교회안에서 어떻게 소통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교회는 오순절사건과 종말사건사이에 위치하여 있기 때문에 늘 지금(now)와 아직도(not yet)의 상태에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구속을 입었지만 아직 그 구원이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교회의 소명은 그리스도안에서 성장하는 것인데 이것은 교회의 개개성원에게나 교회단체에게 모두 들어 맞는 말이다.


  1)영적 성장이란?

   영적 성장이란 지식 태도, 행동, 기술이라는 적어도 네 가지 영역에서 개인에게 일어나는 변화라고 인식되고 있다.5) 

  ①지식

   지금까지 교회는 항상 지식의 전달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성장을 단지 지식의 축적으로만 보려고 해서는 안된다. 때문에 교회의 목표는 이해와 지혜와 행동으로 이끌리는 지식이어야 한다. 이것이 곧 우리를 성장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②태도

   태도란 하나의 준거의 틀에 관련된 정신적인 자세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종종 참된 그리스도교적이고 보편적인 태도를 전파하는 대신에 편협하고 하위 문화적인 풍조를 전파하고 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위 문화적인 것이 아닌, 진정한 그리스도교적인의 삶에 대한 태도와 전망을 소통해야 한다.

  ③행동

    성장은 행동 영역에서도 일어난다.6) 따라서 그리스도교인은 구약에서처럼 삶의 방법을 최우선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교회를 괴롭히고 있는 문제는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 알리는 것은 망각한 채 행동을 오직 도덕적인 측면에서만 말하려고 하는 경향이다. 도덕주의는 그 자체가 한 개인이 택한 행동 기준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서를 교묘하게 왜곡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도덕적인 삶은 소통될 수는 있지만, 얕고 피상적이 사물의 인식에 기초한 것이 될 수 있다. 결국 도덕주의는 그것이 가르쳐주고자 하는 성장이나 안정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④기술

    오늘날 교회 안에 나타나는 문제점중의 하나는, 회중들은 구경만 하면서 목사님에게만 그리스도교 목회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세속 사회에서 교회가 살아남으려면 서로간에 있어서 기술의 발견과 시행이 우선되어야만 한다.

2)성장의 현장으로서의 교회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은 지금 떠나가지만 제자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고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이 성경 말씀은 성령의 사명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 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그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연합을 나누고자 하신다.

   영적 성장이란 단지 지식을 축적하거나 도덕주의적 법칙 체계를 채택하는 일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에 숙달되는 과정이다. 그런데 영적 성장이 일어나는 곳은 하나님과 마땅히 연합되어 있는 교회의 장이다. 또한 성령께서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각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또 그 성숙이 소통되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양육하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7) 우선 양육은 교회의 역사적 유산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두 번째로, 양육은 교회의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이루어진다. 교회는 사회 안에 있는 유형적이고 가시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각 지역 회중은 성도들이 양육될 수 있는 사회적인 맥락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양육은 미래에 대한 교회의 소망 안에서 이루어진다. 항상 교회 앞에 펼쳐져 있는 소망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다. 이러한 소망은 교회의 소망이자 교회의 목표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령은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의 성장으로 양육하는 순단이 되는 교회의 역사적, 사회적, 종말론적 모습 안에서 성령의 열매와 사역의 은사를 사용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대리자로서 행동하신다는 것이다.

3)교회 안에서의 성장의 전달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미는 세계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결코 완전하게 이해 될 수 없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Communication)하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행하신 일들을 재연할 수 있는 능력을 되찾아야 하는데, 이것은 출애굽 사건과 이스라엘의 삶이나, 성육신 사건과 초대교회의 삶뿐만 아니라, 2000년에 걸친 삶의 여로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이해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의 전체 역사를 통해서 성령이 교회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내용을 알아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미를 전수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안의 성장은 교회 안의 특수한 사역을 통해서 향상된다. 즉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활동 안에서, 또는 활동을 통해서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는 것이며 성도들이 신앙으로 이러한 활동에 참여할 때 그 결과로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배와 세례 등이 이러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교회의 성장에 관해서 논의해 볼 때,

  ㆍ교회의 목표는 지식이어야 하고, 그 지식은 이해와 지혜에 도달하는 것이어야 한다.

  ㆍ교회의 목표는 하위 문화적이거나 편협하지 않은 그리스도교적이고 보편적인 태도를 기르    는데 있다.

  ㆍ교회의 목표는 성서적 가치관을 따르는 행동 양식을 전달하는 것이어야 한다.

  ㆍ교회의 목표는 모든 성원들에게 부여된 그리스도교적 사역의 은사가 발휘될 수 있는 자유    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교인의 삶의 성장은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맥락 안에서 가장 잘 일어난다고 볼 때 교회는 성령과 분리 될 수 없는 연합 안에 있다. 따라서 성령의 과제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양육하는 공동체로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는데 각 지역 공동체는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살아있는 공동체의 현재적 사회 상황과 미래에 대한 소망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교회 안에서 어떻게 성장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ㆍ 우리는 신앙에 대한 사실만이 아닌,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관심을 가져       야 한다.

    ㆍ신앙의 의미는 신앙의 체험을 통해서 가장 잘 전달되는데 이러한 전달은 교회의 삶 속        에서,  특히 예배와 세례, 그리고 교회에 대한 봉사를 통해 일어나게 된다.


11.선교 사명의 재발견

  이제는 세상을 향한 교회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 주의를 돌려보기로 한다.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할 문제들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관계성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실제로 교회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들은 어떤 것인가?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세상과 소통할수있느냐가 아니라 신도들의 사회이자 협동적인 유기체로서의 교회가 세상안에 있는 그의 존재를 통해서 어떻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런데 세상에 대한 교회의 관계를 논하기에 앞서 세상이라는 말의 뜻을 정의해 보아야 한다. 성서에는 세상이라는 단어가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란 말의 의미를 조심해서 정확하게 진술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1)세상의 의미    

 세상이라는 말은 희랍어의 우주(cosmos)에서 온 말로서 여러 가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8) 세상이라는 말은 가끔 구원이 일어나는 장소를 가리킨다. 사도 바울과 요한은 그 말을 이런 뜻으로 이해하였다. 요한은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에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노니”(Ⅰ요4:14)라고 기록했는데 이러한 세상의 의미는 바울이 세상의 영과 하나님의 영을 비교한 데서 더 분명한 핵심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고전 2:12; 1:20-21). 이렇게 신약성서 기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반(反)명제로서의 세사의 의미를 만들어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적어도 세 단계가 필요하다. 첫째, 우리는 교회가 어떻게 세상의 일부분이 되는 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고, 둘째, 세상에 대한 교회의 자세를 찾아내야 하며, 셋째, 세상을 이기는데 있어서 교회가 담당해야 할 역할을 정의할 필요가 있다.9) 

2)세상 안에 속한 교회

①상호적인 관계

  교회는 세상(창조 질서)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상호적 관계의 형태로 세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교회는 세계적인 교회이건, 지역교회이건 간에 자연의 피조물과 사회 전반과 부인할 수 없는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다. 교회는 단순한 사회 기관처럼 됨으로써 활동의 덫에 빠지게 된다든지, 개인의 성결과 교인들의 도덕성에만 전념함으로써 눈 앞에 놓인 절박한 문제들로부터 멀리 물러서서 그것을 무시하는 두 극단에 흐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교회가 피조물과 사회 구조 안에서 구속적이 활동을 전개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구속받았음을 알려주는 방법으로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집단적 커뮤니케이션이 세상 안에서 힘있는 증거가 된다.

②무의식적 커뮤니케이션

  세상에 있는 교회의 존재는 무의식적 커뮤니케이션을 수립한다. 최근에 미국과 서구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난 사회의 세속화는 교회가 끼친 것보다 더 중요한 무의식적인 영향을 끼쳤다. 교회는 미술과 문학과 음악과 건축에서 어느 정도 뒤쳐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교회의 세상으로부터의 후퇴는 우주적 구속에 대한 무의식적 거부를 의미하게 도어 그 대신에 개인주의적이고 사적인 그리스도교가 출현하게 되었다. 구속적인 존재로서의 교회의 소명 완수라는 의미에서 교회가 살아있으며, 제대로 활동할 때 세상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은 불가피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에 대한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인정하고, 그 존재를 드러내는 일에 능동적으로 종사한다면 사회 구조에 대한 긍정적인 영향력은 비례적으로 증가하게 될 것이다.

3) 교회는 세상의 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 즉 악한 세력과, 탐욕과 미움과 폭력과 육욕을 부도덕과 살인의 세상은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신 세상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해석하여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5)고 쓰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교회의 자세는 매우 분명하다. 또한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 12:2)라고 우리들에게 촉구하고 있다. 신약 성서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분명한 것은 교회가 세상에 대항하고 악의 세력에 대항하는 능동적이 자세를 취하도록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이러한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전도와 예언자적인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마 28:19) 삼으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명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도 없고, 폐기될 수도 없는 것으로서 늘 복음을 전파하는 최우선의 방법이다.

   또한 교회가 세상 권세들에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려면 예언자적인 접근 자세가 필요하다. 예언자는 사회의 생활 구조 자체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시킬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예언자의 소리는 사회 속에 침투해 있는 악의 세력과 인가의 제도 안에 표현되는 악의 세력에 도전하는 것이다. 마치 아모스처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찌니라”(암 5: 24)고 외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

4)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는 세상을 이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만이 아니라, 전체 피조물까지 사망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러므로 인간의 창조 질서는 모두 더 이상 “세상 풍속”을 좇지 아니하고,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신 바”(엡 2:2-10)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피조물과 함께 “탄식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롬 8:23) 것이다.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의 또 한가지 측면은 역사 속에 있는 교회의 존재와 관련되어 있다. 교회는 부활과 종말 사이, 즉 오순절과 재림 사이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역사를 수행함으로써 세상을 이기는 그의 사명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교회가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전파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승리를 전파하는 가장 우선적이고 분명한 수단은 설교를 통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설교자와 설교에 관한 문제점은 메시지를 승리의 메시지로 보지 못하는 메시지에 대한 이해 부족과 선포의 방법을 알지 못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를 통하여 세상에 승리를 선포해야 한다.

 두번째 방법은 성령의 역사 하심을 통하여 악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다. 특히 성찬식을 통해서 악을 이기신 승리를 전달하는 것이 좋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만찬을 단지 기념하는 행사로만 여긴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능력을 받아들이는 직접적인 은혜를 저버리는 셈이 된다. 성찬을 통한 성령의 역사 안에서 신앙으로 치유의 말씀을 듣는 자에게 나타나는 죄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특수한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는 것이다.


12. 그리스도교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13개의 성서 원리

이 장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의 그리스도교적인 이해를 끌어낼 수 있는 주요한 성서적인 주제들을 요약해 보려고 한다.


 효과적 커뮤니케이션의 소명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과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1)교회의 과제는 현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sun) 아래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을 통하여 커뮤니케이션을 이루어야 한다.

2)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문제는 그리스도와 세상의 문화 사이에 교량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은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3)그리스도교적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는 신앙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화화한 견해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적인 신앙 개념을 회복하여 비합리적인 왜곡에서 탈피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성서적 기초로서는 다음 7가지가 있다.

4)커뮤니케이션의 궁극적인 준거점은 삼위일체에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곧 하나님의 본질의 일부이며, 그는 스스로 커뮤니케이션의 원칙을 수립하시는 분이시다.

5)세상 안의 커뮤니케이션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적인 창조관은 어떠한 실재도 하나님 밖에서 존재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대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은 그 안에서, 또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실재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6)하나님은 계시를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신다. 그래서 역사와 언어와 시각과 성육신을 통해서 소통하시며, 결국 이러한 형식들이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의 모형들이다.   

7)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인간은 소통하는 능력을 포함한 모든 측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해야 하는 존재이며, 어느 정도 역사를 형성하고, 개인저이고 세계적인 사건의 결과를 결정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8)인간의 타락은 인간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 철저하게 악영향을 미친 것이다.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자신, 인간과 자연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붕괴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것을 하루빨리 회복하여야 한다.

9)그리스도는 인간의 새로운 형상이시다. 그 분은 제 2의 아담으로서 옛 피조물을 재창조하심으로 만물을 새롭게 하셨다. 이 분의 의로운 순종으로 모든 파괴된 관계성에 잠재적인 회복을 가져왔다.

10)교회는 새로운 질서의 장이다. 즉,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고 붕괴되었던 커뮤니케이션이 잠재적으로 회복되는 곳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교회와 현대의 커뮤니케이션에 관계하여 나머지 3가지를 살펴보자.

11)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이 회복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대담한 착상과 시각적 영상의 시대에는 이성적인 설교만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 자체의 성격이 초자연적인 개념을 가시적인 영상과 상징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그리고 신앙의 언어는 항상 상징의 언어임을 깨달아야 한다.


12)오늘날에는 양육 공동체로서 교회의 의미가 회복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의 성장이란 단순히 지식의 축적이나 도덕주의적 법칙 체계의 채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님에 따라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양육하는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13)교회는 교회 외부인 세상에 관해서 세 가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즉, 교회는 세상의 일부이면서, 세상과 대적하고 있으며, 또한 세상을 이기는 자의 입장에 서 있다. 

 이상과 같은 13가지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때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결론을 지어본다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글은 주로 커뮤니케이션 신학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 신학은 이론적 훈련만은 아니다. 즉, 커뮤니케이션 신학은 단순히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행동하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행동하시는 하나님, 즉 자기 자신을 알리시는 하나님, 인간사에 말려드는 모험을 불사하시는 하나님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 분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지금도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말씀하고 계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과 그 분의 메시지를 운반하는 운반자들이 아닐 수가 없고, 따라서 우리는 온 땅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윗쳐의 말을 인용함으로 끝을 맺고 싶다.


   “ 설교는 단순히 집단 앞에서, 집단에게 행해지는 한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상호적 과정이다. 설교자가 선포하는 말씀은 인간의 역동적인 의식 안에 있는 것이며, 도한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설교자의 자기 표현으로서 타인들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응답되어지는 말씀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인간의 행위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하고 계시며, 또한 그 말씀을 하나님의 생생한 자기 표현일 것이라고 (세상에)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다.”10) 


Ⅴ.나가는 말

   

   지금까지의 교회역사 속에서 복음이 활발히 전파되어 왔다. 이는 복음의 역동성 때문이다. 더불어 수많은 그리스도교사역자들의 헌신과 열정과 값진 피 덕분이라 할 수있다.

   그리스도교는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계속 전파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회의 과제가 그리스도를 현 세계에 전파해야 하는 일임을 생각할 때 효율적인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의 개발이 시급하다.

   성서적인 복음을 모든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전파할 때 복음이 모든 문화안에서 효율적으로 소통될 수 있도록 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더불어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음을 다시 한 번 자각해야 한다. 인간의 커뮤니케이션능력은 인간이 고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삼위일체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이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그리고 그것이 항상 사랑을 통해서 표현된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는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회복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육신의 위대한 낮아짐의 행위로서 우리와 하나가 되셨다. 하나님은 성육신을 통해 그 자신의 인격적  커뮤니케이션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이로써 현대의 커뮤니케이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처럼 우리가 소통하려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에 전체적인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삶에 온전히 동화해야 함을 깨닫게 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말씀하고 계신다. ” 훌륭한 매개수단인 우리 인간을 통해서 온 세상 모든 인류와 말씀하고 계신다. 그 음성은 그리스도전달자들을 통해서 들려져야 한다.


참고문헌 

  Robert E. Webber, God still speaks, 정장복 역,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6.



1)커뮤니케이션 과정의 좀 더 상세한 분석을 위해서는  James F. Engel, Contemporary Christian Communications(Nashville: Thomas Nelson,1979), ch. 2. 참조 . Robert E. Webber, God Still Speaks, 정장복역,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 (서울: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94), p 29에서 재인용


2)동적인 동질성의 좋은 예는 Don Richardson, Peace Child (Glendale, Calif.: Regal Books, 1974, & Lords of the Earth(Glendale, Calif.: Regal Books, 1977). Ibid. , p 33 재인용


3) Eugene Nida, Message and Mission (New York: Harper & Brothers, 1960), p. 65.  로버트 웨버 저, 정장복 역,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5), pp. 139-140. 재인용.


4) Jean Danielou, S. J., Primitive Christian Symbols (Baltimore: Helicon Press, 1964); and Gustav Aulen, The Drama and Symbol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0) 참조. 로버트 웨버, op. cit., p. 140에서 재인용.


5) 이런 영역들에 대한 개발을 위해서는 Benjamin Franklin Jackson, ed., Communication: Learning for Churchmen (Nashville: Abingdon Press, 1968) 참조. 로버트 웨버, op. cit., p. 161에서 재인용.


6) David Hesselgrave, Communicating Christ Cross-Culturally (Grand Rapid: Zondervan, 1978), chs. 30,31. 로버트 웨버, op. cit., p. 163에서 재인용.


7) Lawrence O. Richards, A Theology of Christian Education (Grand Rapids:  Zondervan, 1975), Robert E. Webber, op. cit., p. 167에서 재인용.


8) komos에 관한 상세한 검토를 위해서는 Gerhard Kittel, ed.,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astament, vol. 3 (Grand Rapids: Eerdmans, 1965) 참조를 하라. Webber, op. cit., p. 181에서 재인용.


9) 여기에 대한 비슷한 개론은 Hendrik Kraemer, The Communication of the Christian Faith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6), ch.2 (Communication in the History of the Church)에서 발견할 수 있다.  Webber, op. cit., p. 182에서 재인용.  


10) Switzer, Pastor, Preacher, Person (Nashville: Avingdon, 1979), p. 69. ; C. 페닝톤/ M. R. 차티어, 정장복 역「말씀의 커뮤니케이션」(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 p. 273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