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콜라 시대의 설교(토마스 아퀴나스)
Ⅰ. 서론
1. 연구의 동기와 목적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 카톨릭의 위대한 신학자이며 철학자이다. 그는 1244년에 도미니크 수도회에 가입하였고,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retus Magnus)에게 배우고, 파리에서 가르쳤다. 그는 피터 롬바드(Peter Lombard), 보테투스(Boethius), 성경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에 대하여 주석을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을 저술한 신학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1) 그 결과 일반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의 스콜라 시대의 중흥을 이끈 위대한 신학자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3세기 스콜라 시대의 위대한 설교자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그는 신학자, 철학자, 저술가이면서 동시에 위대한 설교자였던 것이다. 스콜라 시대의 위대한 설교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를 연구하고 그의 설교를 분석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신학자가 아닌 설교자로서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본 연구를 시작하려고 한다. 본 연구는 설교자로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연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2. 연구 범위와 방법
먼저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애와 사상을 정리하려고 한다. 그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그가 살았던 시대적인 배경과 그의 사상적인 배경을 정리하고, 신학 사상과 주요저서들과 그것들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설교자로서의 토마스 아퀴나스를 연구하고자 한다. 그의 설교신학, 설교에 대한 이해, 성서 해석관 및 수사학적인 기교, 청중에 대한 이해 등을 연구 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설교의 내용을 정리하고, 설교의 특징을 평가하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콜라 시대의 설교자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정리하고자 한다.
자료에 한계가 있어서 좀더 깊은 연구를 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대부분의 자료들이 신학자, 철학자로서의 토마스 아퀴나스를 다루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설교자로서의 면모를 다룬 자료들은 적었다. 다행히 몇몇 원서들이 설교자로서의 토마스 아퀴나스를 간단 간단히 정리하고 있어서 이것들과 몇 권의 번역본들, 그리고 국내 저서들을 참고로 정리하였다.
Ⅱ.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애와 사상
1. 생애2)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5년경 로마와 나폴리 사이에 있는 아퀴노(Aquino)라는 조그만 도시의 로카세카(Roccasecca) 성에서 태어났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부계뿐만 아니라 모계 역시 독일 게르만족의 핏줄이다. 외가는 게르만의 일종인 노르만족이며, 그의 친가는 같은 노르만족이 아니면 역시 게르만족의 일종인 랑고바르덴족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태어나고 자란 곳의 사회적 환경은 독일 슈바벤 지방을 거점으로 하는 호헨슈타우펜 황제의 영향권에 들어 있었다.
형제들 가운데 막내둥이이던 다섯 살바기 토마스 아퀴나스는 일찍이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 수도원 학교에 보내졌다. 여기서 만 10년을 지낸 뒤, 나폴리로 ‘가게 된다’고 몇몇 전기들이 전해 주고 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당시 두 가지 탁발수도회 중에서 스페인 사람 도미니크가 설립한 탁발수도회에 들어가게 된다. 이는 물론 갑작스러운 결정이었으면서도 아무론 후회 없이 지속된, 그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서양의 절대적 대학이던 파리 대학교에 처음에는 학생으로 입학하지만 후일에는 그 대학교의 가장 위대한 한 스승이 된다. 토마스가 도착하던 1245년 파리에서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1193-1280)가 대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함께 독일 쾰른으로 가게되며, 알베르쿠스는 거기에서 수도원 대학을 세워야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스승 알베르투스를 통해 서양 세계관에서는 전혀 새로운 근본 세력인 신플라톤주의와 마주치게 된다.
겨우 스물 입곱이 된 토마스 아퀴나스는 쾰른에서 다시 파리로 소환되며, 우선 그곳의 생 자크 수도원에 있는 도미니크회 학교에서 활동하게 된다. 그 다음 파리대학교의 신학부 교수로 초빙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3년이 겨우 지난 1259년에 파리 대학교 교수직에서 물러난다. 이는 방랑의 삶을 위한 시작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방랑은 죽기까지 같은 장소나 직위에 이삼 년 이상을 머물지 못하게 한다. 그는 대학 학문의 편성과 관계되는 수도원의 소명을 받고 우선 이탈리아로 파견된다. 그 후 교황 우르반 4세(Urbanus Ⅳ)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3년 동안 자신의 오르비에또(Orvieto) 궁전에 머물도록 한다. 3년이 지나자(1276년) 그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진다. 그것은 로마의 산따 사비나(Santa Sabina)에 있는 수도원학교를 2년 동안 운영하는 것이었다. 다시 만 2년 후인 1269년에 그의 수도원은 또다시 토마스 아퀴나스를 파리대학교로 부르게 된다.
1272년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가 처음 성소를 선택하던 장소에 자신의 수도원 학교를 설립하려는 임무를 띠고 나폴리로 돌아오게 된다. 약 1년 뒤에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또다시 교황의 명령이 떨어지는데 이는 1274년 초 리옹에서 개최될 공의회에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리옹으로 가는 도중에 병이 들며, 이 병으로 곧장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 날이 바로 1274년 3월 7일이며, 그의 나이 채 오십도 되지 못한 때이다.
2. 시대적 배경
토마스 아퀴나스가 태어났던 13세기의 유럽은 기근과 재난으로 인해 불안한 시대였고 또한 100여 년을 끌어온 십자군 전쟁이 전혀 종식 될 기미를 보이지 않아 사람들은 지칠대로 지쳐있던 판국이었다. 이 십자군 전쟁은 모슬렘 세계의 여러 풍습과 철학을 서쪽으로 이동시켰으며 그 결과 유럽에는 사상과 인생의 새로운 면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의 대헌장(Magna Charta)에서 영향 받은 민중의 자유운동은 사람들에게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위해 투쟁할 계기를 마련해 주던 때였다.3)
교회 안에서도 역시 중요한 변화들이 속속 일어났다. 경건운동의 모델로서 프란시스와 도미니크 교단의 수도원들이 활기를 띠고 있었고 학문적으로는 그리이스 철학이 융성하여 교회에 침입해 들어오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들이 연구 대상으로 등장하자 여기에 대한 관심은 굉장했던 것 같다. 상당수의 비종교인들은 이 철학을 열렬히 환영하였으며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보다 우월하다고 단정지어 버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또한 교회 안에서는 경건한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공존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3. 사상적 배경
950-1350년 어간(400년)에는 신앙의 지리적 확장, 여러 형태의 수도원 등장, 카톨릭교회에 의해서 이단으로 정죄된 여러 운동들, 교황청 주도의 갱신 운동에 이어 신학적인 창의성이 눈에 두드러졌다. 이 기간동안에 기독교 신학 사상은 보통‘스콜라주의 신학’이라 불려진다. 라틴어 ‘schola'란 학교라는 뜻으로서, 스콜라주의(Scholasticism)는 학교 사람들(the school man)의 지적 성취를 말한다.4)
스콜라 주의신학자들은 기독교의 신앙내용을 이성으로 검증하는 등 신앙을 철학과 연결시켰다.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도달하는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는 기독교의 계시내용은 이성의 지식과 어떻게 관계되는가? 만약에 이 둘이 조화를 이룩할 수 있다면 이 둘 중 어느 것이 우위를 차지하는가? 신구약성경이 우월한가? 교회의 전통이 우월한가? 아니면 철학(이성)이 우월한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믿고 있는 내용을 이성은 참이라고 증명해 낼 수 있는가? 혹은 이성에 의해서 도달된 진리들만으로는 부족하고, 이 이성적 진리는 계시내용에 의해서 보충되어야 하는가? 바로 이 같은 물음들이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의 문제였다.5)
초기 스콜라주의로부터 제기되었고, 스콜라주의 신학전통을 통하여 계속 문제로 등장한 것은 실재론과 유명론 논쟁이었다. 실재론은 플라톤까지 소급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보편자(universals)는 사고하는 사람의 이성으로부터 독립해 있고 특수(particulars)로부터 떨어져 있다. 이 이론에 의하면 보편개념이 실재를 나타낸다. 종과 류는 이 종과 류 안에 있는 개별자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다른 한편, 유명론은 개별자들이 실재이고, 보편자들은 지성(intellect)에 의해서 날조된 이름 혹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6)
스콜라주의 신학의 전통은 안셀름의 존재론적 증명, 아벨라드, 성빅톨의 유고, 피터 롬바르드 등으로 이어지고, 12세기 후반과 13세기에 이르러 황금기를 맞이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도미니크 수도회에서 청빈한 삶과 교육과 훈련 그리고 교훈적인 설교의 열정을 배웠고, 당대 최고의 교수이자 설교자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4.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사상
학자로서 등장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이스 철학의 최상의 것들을 이용하여 기독교 신앙에 대한 문제를 논하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그는 곧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는 방편으로 그 철학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 결과 미묘한 결합으로 나타났다. 그가 평소에 관심을 갖고 연구에 몰두한 신학의 어거스틴과 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양면이 모두 나타나 보이는 것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거스틴과 아리스토텔레스 두 사람을 다 같이 그의 권위로 삼았다. 그의 신론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 개념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으며,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해서는 어거스틴의 견해를 전폭적으로 따르는 입장이다.7)
구원론은 안셀름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수난의 절대적 필요성을 부정하였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자유롭고 값없는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구원된 자로서 하나님의 은총이 가능하게 된 인간의 선행은 보상을 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구원관이다.
성례전에 있어서 성례전을 집행하고자 하는 사제의 의도는 물론 성례전에 참여하는 교인의 믿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례전은 교인의 믿음과 관계없이 활동하는 객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중세교회의 교리로 관철되었다.8)
토마스 아퀴나스는 예리하고 종합적인 능력의 소유자로서 스콜라주의 방법을 신학에 적용하였고,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사용하여 로마 카톨릭의 표준 신학을 형성하였다. 그는 기독교 신학의 모든 주제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사용하여 반성적으로 숙고하였고 체계화시켰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있어서 자연과 초자연의 종합이 시도되는바 ‘자연’에 대한 지식은 이성에 의해서,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의해서 제공된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혜(초자연)는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완성한다.”는 명제가 성립한다.9)
토마스 아퀴나스의 교의학(Summa Theologia)은 스콜라주의의 절정으로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신학이었다. 이와 같은 신학 전통은 대체로 보편주의적 실재론(Realism)에 속하였다. 실재론은 개별적인 개인에 대한 특수 경험보다는 인간이라고 하는 보편적 추상개념이 우위를 차지하며 “국가”라고 할 때에도 역시 개개인의 구성원들의 특수성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가라고 하는 보편적, 객관적 실재가 더 중요하다고 하는 철학 이론이다. 말하자면 <추상적인 개념들(보편적인 것들=universal)이 개별자(특수한 것들=particular)와 관계없이 실존한다>(universals antervem)고 하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는 어느 정도 온건한 실재론(univeraslia in rebus)를 취했지만 이와 같은 실재론은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지식인 보편적 신 개념과 성서가 제시하는 하나님의 개념이 서로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는 신학적 실재론에 봉사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Nature)과 계시(성경=Supernature)는 서로 연결된다.10)
5. 주요저서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로 복잡다단한 시절,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요한 시민 문제와 교회 문제에 대하여 계속 조언해 주었다. 그리고 특별히 그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그에 대한 심한 토론이 종종 벌어지곤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혼란 속에서도 침착했고, 지칠 줄 모르고 저서를 많이 저술하였다. 약 백 권에 달하는 그의 저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e 위대한 신학적 종합이다. 그것은 1259년과 1264년 사이에 스페인에 살던 회교도, 유대인, 이단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설교하는 도미니칸 선교사들을 위하여 쓴 「대이교도 대전」(Summa contra gentiles), 그리고 1265년 신학 초심자들의 교과서로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다 끝내지 못한 작품이며 그의 천재성이 가장 두드러진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이다.(토마스 아퀴나스는 1273년 12월 6일 미사를 드리는 중에 신비 체험을 한 이후로 모든 저술 활동을 중지했다. 『신학대전』은 그의 비서 피페르노 레기날드(Reginald of Piperno) 수사의 감독에 따라 완성되었다.) 성체 성혈 대축일을 위하여 작성한 전례문과 그의 찬송, 기도, 설교에서 입증되듯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개인적으로 아주 겸손하고 경건한 사람이었다. 지적으로 그의 작품은 그를 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수들에 속하게 하는 명료성과 논리적 일관성과 폭넓은 표현들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11)
『신학대전』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남긴 가장 뛰어난 기독교 고전이다. 전3권으로 구성된 이 저작 중 제1권은 그가 산사노비에 있을 때 저술한 것으로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에 관하여, 제2권은 재차 파리대학 교수로 있을 때 반대하는 학파 교수들과 사우면서 신앙적으로 학문적으로 한층 순수함과 심도가 더해 졌을 때 집필하였다. 제3권은 나폴리에 거주하면서 시작은 했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제가 레기날드에 의해 보충되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로서의 그리스도에 관하여 제1권 8책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1책(문1-13)에는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 제2책(문14-26)에는 ‘하나님의 생명, 그 지혜와 의지에 관하여’, 제3책(문17-43)에는 ‘하나님 그 삼일성에 관하여’, 제4책(문44-64)에는 ‘창조와 천사의 세계에 대하여’, 제5책(문65-74)에는 ‘엿새 동안의 행위에 관하여’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제6책(문75-89)에는 ‘인간의 본질과 천부에 관하여’, 제7책(문90-102)에는 ‘인간의 창조와 원시 상태’가 거론되어 있어 “인간론”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제8책(문103-119)에는 ‘이 세상의 보존과 지배’가 거론되고 있다. 제2권의 제1부 내용은 1책(문1-21)에는 ‘인간의 목표와 행위’에 관하여, 2책(문22-48)에는 ‘인간의 정열’에 관하여, 3책(문49-70)에는 ‘인간 행위의 원리’, 4책(문71-89)에는 ‘죄’에 관하여, 5책(문90-105)에는 ‘율법’에 관하여, 6책(문106-114)에는 ‘새로운 약속과 은총’에 관하여 일반적인 윤리문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주목해야할 것은 6책이며, 그 중에 문114는 아주 중대하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근본사상은 “은총은 자연적 본성을 파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찬성한다”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다.12)
Ⅲ. 토마스 아퀴나스의 설교세계
1. 설교자 토마스 아퀴나스
중세의 설교가 회중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무미건조한 것이 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강단(pulpit)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모두 상실한 채 시대의 뒷전에서 힘없는 사역의 상징으로 나아 있었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설교를 듣던 청중들에게서 그러한 일반적인 현상과는 전혀 다른 경이적인 예외가 나타났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나폴리에서 수난절 설교를 했을 때 청중들이 너무나 감동하여 눈물바다를 이루는 바람에 설교를 중지 않을 수 없었던 일은 유명하다. 또한 그는 로마에 있는 성 마리아 메이저(Saint Mary Major)교회에서 사람들을 계속 울게 하는 일련의 설교를 했다. 그가 부활주일에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설교를 행했을 때 회중들은 그동안의 억제된 감정을 부수고 환희의 승리감을 넘치도록 나나냈던 일도 있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그토록 많은 일반 대중들과 지식층의 엘리뜨들이 몰려들었던 이유를 한마디로 대답할 는 없다. 아마 그의 높은 명성과 지식, 뛰어난 재능, 그의 위풍당당하고 조용한 용모 등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열성적인 경건심이 설교에 깊이 작용했을 것이 틀림없다. 특히 그의 계속된 신비적 체험은 설교 강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비적 경험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청중들 앞에서 온전히 감추어질 수는 없었다. 황홀경에 빠진 듯 하늘을 쳐다보면서 설교하는 시간이나 미사 집전시에 성체를 들어 올리는 순간들은 그의 경건 체험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설교시에 보여주는 이러한 모습이 청중들을 감동 속으로 몰아 넣었던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신비였다. 이러한 그의 설교는 전통적인 웅변술을 구사하지도 않고 격렬한 매너나 적극적인 제스쳐도 없을 뿐 아니라 번뜩이는 기지마저 결여된 상태에서도 드높은 효력을 발휘해 내였다. 사람들은 오직 토마스 아퀴나스의 열정적인 선포에 따라 회개와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자기 고장의 토착어를 사용하여 청중들의 호응을 받았다. 청중들은 자기네들의 말로 설교하는 그 심오한 신학자에게 뜨거운 반응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그는 로마 교황청에서나 파리대학에서 설교할 때에만 라틴어를 사용했다. 이 라틴어 설교도 학식 있는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기는 마찬가지였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심오한 신학자로서 너무나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설교는 그의 행적에 있어 지극히 부차적인 활동이 아니었을까 여기는 견해가 있는데 그것은 결코 옳지 않다. 그는 49년의 생애에 거작 신학대전을 비롯해서 철학, 성경주석, 변증 등 60여권이라는 경이적인 저술을 남겼던 바 이 가운데는 설교서적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그는 신학교수로서의 일뿐만 아니라 수도회의 설교자로서의 역할도 무척 열성적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추기경회의에서 행해진 성체 성사 때에 교황 우르반(Urban)과 추기경들 앞에서 세족 목요일 설교를 할 뿐 아니라 사순절 기간에 클레멘트(Clement) 4세 아래 있는 비테르보(Viterbo) 사람들에게도 설교를 했다. 또한 거의 같은 기간 동안에 로마에 있는 성 마리라 메이저 교회에서 계속 설교를 하여 그는 누구보다도 많은 회수의 설교를 했던 사람으로 꼽을 수 있다.
그의 구체적인 설교 기술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우선 우리들의 머릿속에 속에는 완벽한 원고를 가지고 설교하는 매우 신중한 학자의 모습이 떠오르게 된다. 우리의 결정적인 추측을 말한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고 쓰는 능력이 탁월했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이야기 투의 전달을 통한 방법을 많이 사용했으리라 추정해 볼 수 있다.13)
2. 토마스 아퀴나스의 설교신학과 방법론
1) 설교와 설교자, 설교에 있어서 성령에 대한 이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책에서 설교에 관하여 자신의 주장에 대해 제기 될 수 있는 반론을 언급하고 그에 대한 답을 하는 형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신학대전 2부 두 번째 부분의 177문제 1항에서 ‘인간의 언어 안에 전적인 은혜가 있을 수 있는가?’(Where any gratuitous grace attaches to words?)라는 주제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그는 우선 언어 안에는 전적인 은혜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반론을 대변하여 소개한다. 전적인 은혜는 자연적인 이성의 힘을 뛰어넘는 것인데 인간 이성의 힘으로 고안된 수사학적 방법을 활용하는 인간 언어 안에 전적인 은혜가 있을 수 없다는 반론과 은혜는 인간의 장점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닌데 언어 전달은 인간의 자질과 능력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언어 안에는 전적인 은혜가 있을 수 없다는 반론과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4장 20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라고 하였던 것을 볼 때 모든 은혜는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된 것이지 인간의 언어와는 관계된 것이 아니라는 반론 등을 소개한다.14)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씀의 은사가 세 가지 목적으로 쓰일 수 있다고 하였다. 첫째, 식자를 가르치기 위함이다. 이 경우는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이다. 둘째는 사람들이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도록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기 위함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어떠한 이득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게 하기 위해서 청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함이다. 셋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는 내용을 기뻐하고 그것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청자들에게 강한 영향을 주고 그들에게 확실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통한 이러한 효과가 나타나도록 성령님께서 인간의 언어를 도구로 삼으신다. 일을 이루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시라고 그는 말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고 인간의 언어는 성령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성령님의 역할을 중시하고 설교자의 성실한 준비에 대해 소홀히 여기고 있는 것을 결코 아니다.
설교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여서 자연스레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되는 묵상과 연구 노력이 차고 넘쳤을 때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령님께서 말씀의 은사를 나타내실 때 그 자신이 장애가 되지 않고자, 쉬임 없이 기도하였고 편안한 휴식조차 포기하고 연구와 사색에 몰두하였다.15)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설교는 인간의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여서 전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이 말씀을 깨닫게 하는 도구인 것이다. 그리고 설교자는 성령님께서 사용하는 도구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고 설교자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연구를 해야 하는 것이다.
2) 성서 해석관
① 중세 초기의 성서해석
어거스틴 이후 약 1000년 동안 알레고리적 해석이 교회의 주된 해석 방법이 되었다. 중세는 창조적인 학문 활동을 하기보다는 초기 교부들의 작품을 연구하는데 주된 관심을 기울였다. 이 때의 성서해석은 전통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알레고리적 해석이 우세했다. 중세의 주된 성서해석의 경향은 성서본문이 네 가지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고 해석하는 것이었다. 이 네 가지 의미는 문자적 의미(하나님과 조상들이 한 일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알레고리적 의미(우리의 신앙이 감추어진 곳을 보여준다), 도덕적 의미(일상 생활의 법칙을 제공해 준다), 신비적 의미(투쟁의 끝낼 곳을 보여준다)이다. 예를 들면, 성서에 나오는 물을 해석할 때 문자적의미로는 보통 물이며, 알레고리적 의미는 세례의 교리이고, 도덕적 의미는 정결한 생활이며, 신비적 의미는 하늘 예루살렘의 생명수라고 해석한다. 중세의 성서해석 방법은 알레고리적 해석법이라 할 만큼 알레고리가 성행했다.16) 알레고리적 해석의 근거는 어거스틴의 전통에 따라서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입니다”(고후 3:6)는 구절이다.
②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서해석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서해석의 특징은 욥기 주석서에서 볼 수 있다. 먼저 당시의 신학은 사실상 실천적 삶의 지혜로 유명하던 그레고리우스(Gregorious Magnus)의 욥기 주석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않된다. 그러나 이 주석서는 욥기의 해석으로서는 무리가 가득 찬, 하나의 순수한 비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욥의 일곱 아들은 처음에는 일곱 가지 덕목으로 비유되며, 그 다음에는 열두 사도를 의미한다. 어떻게 일곱 아들이 열두 사도를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칠은 3 더하기 4이며, 열둘은 3 곱하기 4라고 대답하는 것 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욥기를 인간의 운명과 하나님의 예정을 가르치는 교훈이라는 직접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특징에는 아직도 주의할 만한 것이 있다. 즉,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서가 의도하는 바를 알아들을 수 있기 위하여 자신의 정신적 능력을 위대할 정도로 남김없이 쏟아 붓는다. 그는 욥기 주석에서 아베로에스, 아비첸나, 포르피리우스, 플리니우스, 치체로, 플라톤을 인용하며,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많이 인용한다. 모든 자연적 현실성에 대한 인정이란, 자연적 인식 능력의 발견물 또한 그것이 어디에 있든 필연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17)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서해석은 상당히 복음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서해석은 알레고리적인 방법을 완전히 벗어난 것인지가 의문이다.
최흥진은 그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의 알레고리적인 해석의 경향을 바꾼 중요한 인물이다. 아퀴나스는 성 서해석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것은 성서를 계시의 일차적 자료로 여겼기 때문이다. 아퀴나 스는 성서의 문자적 의미를 강조하였고 알레고리적 해석을 극소화하였다. 사실 알레고리적 해석 은 성서 주석에 있어서 의미 있는 방법으로는 아퀴나스에 이르러 거의 종말에 이르게 되었다. 이 는 그가 알레고리를 철저히 배격했거나 그의 동시대적 및 그 이후의 성서해석이 결코 알레고리 화 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및 성서에 대한 고등비평이 대두 하면서 알레고리는 더 이상 교부시대나 중세 초기만큼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했음을 의미한 다.”18)
글쓴이는 그란트(R. Grant)의 책을 인용하고 있다. 그란트는 다소 애매하기는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서해석이 알레고리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알레고리적 해석에 대해서 더 분명한 의견을 제시하는 책도 있다.
정장복은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해석보다도 윤리적 교훈에 중점을 둔 설교 가 많이 나왔으며, 중세적 알레고리가 심하게 나타나고, 또 설교의 전개 과정에서 내용이 현저하 게 비약해 버리는 일이 많았음은 사실이다. 중세 설교에서 흔히 나타나는 결함이 토마스의 설교에 서도 곳곳에 발견되고 있는 것은 대신학자의 명성에 비추어 볼 때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19)
토마스 아퀴나스의 설교의 예에서도 나타나듯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알레고리적인 방법을 사용하여서 성서를 해석하고 설교를 한다. 그러나 그의 설교에 있어서 알레고리가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확인하려면 그의 설교문 모두를 분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는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하면서도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 이외의 것에 대하여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시대에 처한 다른 설교자들과 비교하였을 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상대적으로 알레고리적 해석을 적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Paul Scott Wilson은 그의 책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성을 강조하고 성경의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가장 중요시했다고 말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본문의 구체적인 의미를 얻을 수 있고 본문의 의미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문자적 그리고 역사적 의미’뿐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토마스 아퀴나스의 설교는 분명히 성경이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20) 토마스 아퀴나스가 설교에서 성경을 인용하는 것은 중세 초기의 설교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설교에 있어서 성경의 인용은 적절하지 않다. 설교의 예에서도 볼 수 있겠지만 그의 성경 인용은 원래의 본문의 의미와 맞지 않는 면이 많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계속적으로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성서의 말씀 위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려고 노력하였다.
3) 수사학적 기교
토마스 아퀴나스 시대의 대부분의 설교들은 이성에 호소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 순종, 감정, 이상에 호소하였고, 토마스 아퀴나스 보다 알레고리를 더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이성의 말씀을 강조하였고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성경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 시대의 수사학적 방법을 따른다. 당시의 수사학적인 기교는 세 개에서 다섯 개의 주요 주제를 제시하고 그 주제에 따라 자유롭게 설교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경 본문을 철저하게 따르면서도 그때그때 영적인 상황에 따라 논쟁적으로 주요 개념을 적용하였다.21)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제를 제시하고 말씀으로 강화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높음과 깊음’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우리는 주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신19:18).” 이런 방법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설교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와 같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설교에서 성경을 굉장히 많이 인용하여서 자신이 제시한 주제를 강화하고 있다.
4) 청중에 대한 이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시의 청중들에 대하여 상당히 배려를 하고 있다. 그들이 접하는 모든 문제와 갈등, 그리고 과학과 철학적인 문제들까지 하나님이 말씀에 비추어 설명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다양한 사람들이 접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하여 성경적인 답을 제시하려는 의도에서이다. 설교자가 청중들의 필요와 갈등, 그리고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이다.
정장복은 그의 책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청중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토마스의 설교 속에는 세속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 교인들의 생활과 항상 밀접하게 연결되 었다. 그 설교의 주안점은 대개 널리 보급된 세속적 사실과 기독교 신앙을 잘 조화되도록 인도하 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들을 과학과 서로 관련시키는 일에 매료되었으며 과학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해했다. 그리고 희랍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하여 페르시아와 유태의 사상까지도 받아들여 신학적 논쟁점을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맞게 해석하고 설교에 원용하였다. 환언하면 그 의 해박한 신학과 철학의 지식은 합리적 신앙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의 가슴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 는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22)
3. 토마스 아퀴나스의 설교의 예(설교요약)
1) 높음과 깊음23)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합3:10).
본문을 통해서 도마에게 적용될 수 있는 두 가지의 주안점들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도마의 충성심 즉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선하심 즉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입니다.
① 도마는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바다’라고 불리워졌습니다.
첫째, 자기 이름의 의미 때문에 즉 도마의 뜻은 심연 혹은 “바다 깊은 곳”이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어원적인 의미 때문입니다. 즉 심연(Abyss)이라는 단어는 ‘없다’라는 뜻을 가진 ‘a’와 하얀 색 무명천 ‘byssus’이라는 도 글자가 합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신앙의 빛과 순수한 색이 없다는 의미에서 심연입니다.
셋째, 심연이라는 단어의 정의 때문입니다. 심연이란 물이 모이는 것입니다. 이 물이란 도마의 마음 속에 자리한 심오한 말을 가리킵니다.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잠18:4).
이 심연이 5중의 음성을 발했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
둘째는 의심의 음성입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욱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욱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20:25).
셋째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요20:28).
넷째는 순종의 음성입니다. “주여 주께서 원하시는 곳에 나를 보내소서”
다섯 번째로 정의의 음성입니다. 이 음성은 주께서 나를 때리는 자에게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외치실 때 말한 음성입니다.
도마는 여섯 번째의 음성을 발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 그리고 신랑과 신부에게 회개를 외칠 때 발한 음성입니다.
② 두 번째 제목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살펴봅시다. 즉,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손을 높이 드셔서” 도마에게 부활의 증거를 보여 주실 때입니다.
주 예수께서도 네 가지 목적으로 손을 높이 드셨습니다.
첫째, 십자가 위에서 온 세상을 위한 대속 제물로서 자신을 드리시면서 그랬습니다.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시141:2).
둘째, 축복하실 때에 그러했습니다.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눅24:50).
셋째, 권능을 나타내실 때 그랬습니다. “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신32:40).
넷째, 악한 자를 쳐부술 때입니다. “손을 들어 이방나라를 치리니”(지혜서36:5).
첫 번째 손을 드신데 대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두 번째에 대해서는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1:3).
세 번째에 대해서 우리는 주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네 번째에 대해서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신18:19).
그리스도께서 이상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소서.
2) 왕의 오심.24) 마21:5. 강림절 첫째 주.
① 오시는 그분의 품위.
a. 관대한 자비로운 왕(사16:5).
b. 심판하는 정의로운 왕(사34; 16:5).
c. 보상하시는 선한 왕.
d. 다스리시는 지혜로운 왕(시73:1).
e. 두려운 왕(렘23:5).
f. 전능한 왕(Est(선지서)13:9).
g. 영원한 왕(렘10:10; 눅1:33)
② 그분의 오심의 유익함. 7가지 면:
a. 세계의 계몽을 위하여(요8:12; 1:9).
b. 지옥의 파괴를 위하여(호13:14; 슥9:11).
c. 하늘의 보상을 위하여(엡1:10).
d. 죄의 파괴를 위하여(히2:14, 15).
e. 사단을 정복하기 위하여(롬6:6).
f. 하나님과 더불어 인간의 회복을 위하여(롬5:10).
g. 사람에게 복 주시기 위하여(요3:16).
③ 그분이 오시는 방법. 다음의 네 가지 이유 때문에 온유하게 오십니다.
a. 그분은 사악함을 더 쉽게 바로잡을 것입니다(시89:10(불가타)).
b. 그분은 그의 모든 낮아짐을 보여줄 것입니다(집회서3:19).
c. 그분은 양들을 스스로 돌보고, 사람들을 모을 것입니다(삼하22:36).
d. 그분은 온유함을 가르칠 것입니다(마11:29).
그래서 온유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다음의 네 가지 일을 하도록 명령하십니다.
a. 악을 멀리. b. 완벽한 은혜(잠3:34). c. 영혼을 보호. d.땅을 기업으로 받을 삶(마5:5).
3) 그 날이 가까이에(롬13:12) 분석25)
이 요약설교는 로마서 13장 12절을 본문으로 강림절 첫째 주에 행한 것이다.
이 ‘날’이라는 단어는 네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그 날이 가까이에”, 자비의 날, 은혜의 날, 정의의 날, 영광의 날입니다.(이것은 모두 그의 주제와 그의 분류을 나타낸다. 그의 첫 번째 분류는 ‘날’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신학과 성경의 ‘의미’에 따라서 네 개로 세분한다.) 저 태양은 강림을 이제 축하하는 주의 거룩한 교회에 사 중의 날을 만듭니다.
(세분 1) 자비의 날은 우리에게 떠오른 의로운 태양이신(요점-알레고리적 의미) 주님이 나신 날입니다(요점-문자적인 의미). 진실로 그분은 그 날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요점-발전 된 예언적 의미).
(세분 2) 은혜의 날은 은혜의 시간입니다(알레고리적 의미).
(세분 3) 정의의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도덕적 의미).
(세분 4) 영광의 날은 영원한 날입니다(예언적 의미).
요엘이 첫 번째 말합니다.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리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욜3:18상). 두 번째 관심은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4) ‘죄의 열병, 그리고 치유’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요4:52)
이 말씀에는 도덕적인 면과 관련 된 두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 죄인이 겪는 고통스러운 질병, 즉 “열병”입니다. 둘째, 치유를 위해 필요했던 것들입니다.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① 우선 죄인들은 일곱 가지 열병으로 고통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a. 죄인들은 계속되는 육욕의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저희가 행음하여도 수효가 더하지 못하니”(호4:10).
b. 죄인들은 날마다 탐욕이라는 열병을 앓으며 죄를 범합니다. “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사56:11-12).
c. 죄인들은 사흘마다 반복되어 심일 열이라 불리는 분노의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것은 격한 감정이 증가하여 발생하는 것입니다. “불리 나무를 태우며 번져 나가는 것과 같이 인간의 분노는 다툼을 일으키나니”(외경 집28:12).
d. 죄인들은 나흘마다 반복되어 사일 열이라 불리는 날카로운 비난의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울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쏘다 위에 초를 부음 같으니라”(잠25:20).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상한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케 할 것이라”(신28:22).
e. 죄인들은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다 퍼져 있는 재물에 대한 탐심이라는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것은 치유되기 어렵거나 치유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제롬(St. Jerome)은 ‘인간에게 있는 다른 악덕이 시들어 갈 때에도 이 재물에 대한 탐심은 늘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f. 죄인들은 간헐적으로 교만이라는 열병을 앓게 됩니다. 교만한 마음은 곧 파산해 버리고 맙니다. “그들이 높아졌을 때 당신이 그들을 밑으로 내리셨나이다. 그들이 높아져도 잠시간에 없어지나니 낮아져서 범인처럼 제함을 당하고 곡식 이삭 같이 베임을 입느니라”(욥24:24).
g. 죄인들은 부패의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14:30).
② 다음으로 사람들의 이러한 열병을 치유하는 일곱 가지 치료 방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a.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107:20).
b. 죄를 뉘우치는 것입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3).
c. 온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청하는 것입니다.“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게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시30:2).
d. 믿음을 불어 넣는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7:50). e.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또한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 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들을 보면 입히고 또 네 골육을 피하요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사58:7-8). f. 죄를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사30:15).
g. 죄를 완전히 통회하는 것입니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 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렘3:22-23).
이 때가 죄의 열병이 떠나는 제 ‘칠 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리에게 있는 모든 질병을 치유하는 신성한 약에서 효험을 얻는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방법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약은 곧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당하신 고난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도다”(벧전21:24)
4. 토마스 아퀴나스 설교의 특징
토마스 아퀴나스의 설교에서 세 가지 정도의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모든 세부사항은 성경으로부터 특별히 인용하여 지지하도록 구성하였다. 이것은 부분적인 사용이다. 성경의 한 구절을 가지고 시작하여서 그 구절의 주안점을 제시하고 다른 성경 구절을 사용하여서 그것들의 타당성을 입증한다. 둘째, 본문의 최초의 구절을 포함한 모든 인용은 그 본문의 상황과 상관이 없이 글자그대로의 완전한 진리를 나타낸다. 필요에 따라 다른 성경 구절을 사용하여 주안점에 대한 세부적인 논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셋째, 그는 초기의 설교자들 보다 알레고리를 덜 사용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설교들은 ‘대학 설교들’로 알려진 초기의 예를 보여준다. 그 이유는 다양하고 정교한 논점의 분배와 세분 때문이다. 그의 해석학적인 방법은 간단히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성경 한 구절로 시작하여서, 각각의 몇 가지 논점을 만들고, 다른 본문에서 논점을 지지 할만한 구절을 찾거나 처음 시작했던 성경 구절과 유사한 구절을 찾는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각각의 논점들을 순서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그 각각의 개념들을 명확하게 발전시켜 나간다. 그리고 그의 교의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전체의 모습을 만든다.26)
토마스 아퀴나스의 설교에서는 그가 쓴 책들과는 달리 교육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호소를 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설교의 뿌리를 성경에 두고 있다.27)
5. 토마스 아퀴나스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서방의 중세교회를 위하여 신학을 체계화시킨 토마스 아퀴나스는 스콜라 신학을 가장 높이 밝힌 공로자로 인정되고 있다. 모든 신학 연구의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의 기원, 운명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고, 이 지식의 일부는 이성에서 오나 이성만의 성취는 불완전하여 계시의 보충이 필요하다고 했다. 계시는 유일한 궁극적 권위의 성서에 들어 있으나 종교회의와 교회 해석에 비추어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여 점차 교황권의 신학적 근거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신학적 배경을 가진 토마스 아퀴나스가 강단에 서서 수많은 설교를 했을 때 역시 학문적 중심의 설교는 존재, 지식, 인간의 본질에 주된 관심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성과 식견으로만 일관하지 않고 경건과 신비적 은사를 더한 채 모국어를 사용하여 격정과 설득력 넘치는 설교를 행하는 그를 보고 청중들은 그만 감동에 넘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28)
토마스 아퀴나스는 비록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성경 중심의 해석과 적용을 하는 설교자였으며, 말씀을 듣는 청중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설교자였다. 성경 중심의 설교를 위하여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였음을 그의 설교 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이 정립하고 정리한 신학을 바탕으로 설교를 하였으며, 그의 신학은 설교를 통하여 그 의미가 규정되었다. 그는 신학자로서 그리고 설교자로서의 삶을 통하여 신학하는 자세와 설교자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신학 따로 설교 따로가 아니라 신학사상을 설교에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교황권 신학이 잘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신학을 설교에 적용하는 정신이 본받을 만 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연구하는 설교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 니콜라우스 성당에서 매일 밤늦게까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신비적 체험을 많이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체험은 설교에 나타났을 것이다. 말씀을 준비하는 그의 자세도 남다르다. 성령님을 의지하면서도 준비 없이는 사용될 수 없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지적인 부분과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 균형이 잡힌 설교자이다. 오늘날 강단에서 설교를 하는 설교자들이 닮아야 할 대상임에 틀림이 없다. 설교자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연구하고, 노력하는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현대의 설교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Ⅳ. 결론
한 사람의 위대한 신학자이며 설교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한 사람의 설교자가 얼마나 중요하고 또 하나님은 택한 자를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참된 설교자의 삶이 어떤 것인가?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지적인고 영적인 설교자,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는 설교자가 되는 것이다.
<참고도서>
1. 국내도서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Ⅳ』(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3)
김희보, 『기독교 사상사 개설』(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1992)
이형기, 『종교개혁신학사상』(서울: 장로회신학대학 출판부, 1984)
이형기, 『세계교회사Ⅰ』(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4)
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 (상)』(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6)
황승룡, 『조직신학(상)』(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출판국, 1992)
2. 원서
Dargan E. Charles , A History of Preaching, (Kentucky: Baker Book House, 1974)
Donald K. McKim, Historical Handbook of Major Biblical Interpreters,
(England: InterVarsity Press, 1998)
Douglas J. D, The Concise Dictionary of the Christian Tradition,
(Michigan: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9)
Wilson P. Scott, A Concise History of Preaching, (Vashville: Abingdon Press, 1992)
3. 번역서
아나가키 요오스케, 정종휴 정종표 역, 『토마스 아퀴나스』(서울: 도서출판 새남, 1995)
Josef Pieper, Thomas Von Aquin, 신창석 역, 『토마스 아퀴나스 그는 누구인가』
(경북: 분도출판사, 1995)
Williston Walker,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송인설 역, 『기독교회사(상)』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3)
4. 논문
최흥진, “알레고리적 성서 해석 방법의 가능성”, 『신학이해』제 17권,
(광주: 장로회호남신학대학교 신학이해 편집부, 1992)
1) J. D. Douglas Walter A. Elwell Peter Toon, The Concise Dictionary of the Christian Tradition (Michigan: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9), p. 33.
2) Josef Pieper, Thomas Von Aquin, 신창석 역, 『토마스 아퀴나스 그는 누구인가』(경북: 분도출판사, 1995), 25-33쪽.
3) 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 (상)』(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6), 122쪽.
4) 이형기, 『세계교회사(Ⅰ)』(서울: 한국 장로교 출판사, 1994), 554쪽.
5) 이형기, 위의 책, 555쪽.
6) 이형기, 위의 책, 557쪽.
7) 정장복, 위의 책, 122-123쪽.
8)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 Ⅳ』(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3), 414쪽.
9) 이형기, 위의 책, 570쪽.
10) 이형기, 『종교개혁 신학사상』(서울: 장로회신학대학 출판부, 1984), 4쪽.
11) Williston Walker,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송인설 역, 『기독교회사 (상)』(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387쪽.
12) 김희보, 『기독교 사상사 개설』(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1992), 301쪽.
13) 정장복, 위의 책, 125-127쪽.
14) St.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e Vol 45 (Manchester: Blackfriars), pp. 129-131.
15) 아나가키 오요스케, 정종휴 정종표 역, 『토마스 아퀴나스』(서울: 도서출판 새남, 1995), 160쪽.
16) 최흥진, “알레고리적 성서 해석 방법의 가능성”, 『신학이해』제 17권, (장로회 호남신학대학교 신학이해 편집부, 1999), 351-352쪽.
17) Josef Pieper, 위의 책, 175-176쪽.
18) 최흥진, 위의 글, 352쪽.
19) 정장복, 위의 책, 127쪽.
20) Paul Scott Wilson, A Concise History of Preaching (Nashville: Abingdon Press, 1992), p. 81-84.
21) Donald K. McKim, Historical Handbook of Major Biblical Interpreters, (England: InterVarsity Press, 1998), p. 87.
22) 정장복, 위의 책, 126쪽.
23) 정장복, 위의 책, 128-129쪽
24) Edwin Chalres Dargan, A History of Preaching (Kentucky: Baker Book House, 1974), pp. 241-242.
25) Paul Scott Wilson, 위의 책, pp. 82-83. 여기에서는 Wilson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설교를 분석해 놓을 것을 옮겨 놓았다.
26) Paul Scott Wlison, 위의 책, p. 82.
27) 위의 책, p. 84.
28) 정장복, 위의 책, 130쪽.
'목회관련자료 > 신학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커뮤니케이션의 신학 (0) | 2006.10.13 |
---|---|
오리겐과 크리소스톰 (0) | 2006.09.16 |
탁발승과 사브나롤라 (0) | 2006.09.16 |
초기 중세의 설교 (0) | 2006.09.16 |
루터와 칼빈 (0) | 2006.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