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 운동시대와 종교개혁 이전
(탁발승들,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Ⅰ. 들어가면서
우리가 기독교 역사에서 배우는 것 중에 하나는 타락한 세상 한복판에는 잠든 교회가 있었고 잠든 교회 한 가운데는 선포를 잃어버린 강단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또 하나 배우게 되는 것은 그러한 시대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특별한 사명감에 불타는 진리의 종들을 세우셔서 어둡고 타락한 시대를 깨우셨다는 사실이다.
사명감에 불타는 그들은 또한 한결같이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하늘로부터 부어진 거룩한 열정과 세상을 향한 진지한 고민이 그들의 마음과 인격을 지배하였으며, 엄청난 핍박을 하찮게 여기고, 어리석은 사람들의 악의에 찬 비난에 늘 담대하였으며, 불의와 싸우면서도 그들의 내면은 늘 거룩한 강인함을 소유하고 있었다.
여기 소고에서 다루게 될 탁발승들이나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또한 예외는 아니리라.
이들이 설교사역을 감당했던 당시의 시대 상황과 더불어 그들이 행했던 설교의 제 형태들을 연구해 보는 것은 오늘날 설교자로 부름받고 있으면서 동시에 설교의 위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이 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Ⅱ. 탁발승들(Friars or mendicant orders)
13세기에 접어들면서 수도원 운동의 새로운 형태들이 나타났다. 이 새로운 운동은 분명히 수도원 운동의 흐름 속에 들어 있었고 또한 지난날의 깊은 혜택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많은 새로운 것을 그 속에 내포하고 있었다. 이 운동은 탁발 수도단(the friars) 또는 탁발수도승단(the mendicant orders)을 통해 나타났다.1)
A. 시대적 배경
탁발수도원들의 출현은 당시 사회가 처했던 도덕적, 영적 욕구에 대한 교회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겠다. 13세기 당시 신자들은 이단으로 말미암아 사분오열되었으며, 부와 권력에 집착한 지도자들의 잘못된 행태는 만연하였고, 성속(聖俗)을 막론하고 도덕적 타락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었으니 무언가 시급한 대책이 필요하였다.2)
십자군 원정으로 인하여 교역이 활발하게 되었고, 도시가 성장하였으며, 화폐 경제의 발전이 이루어졌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화폐경제는 보다 전문화된 생산을 통하여 부의 집중을 야기시킴으로써 상업거래를 비인간화시켰으며 이에 따라 빈부의 격차가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도시의 성장과 함께 발생인 인구 이동으로 말미암아 전통적 교구 목회는 도시를 향해 모여든 인구들의 종교적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미 수세기를 두고 뛰어난 적응력을 보여왔던 수도원 운동이 이와 같은 약점에 대응하여 대처해 나갔는데 이들이 곧 탁발 수도사들로서 그 의미는 구걸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3)
특별히 이 시대의 설교가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설교의 운동력을 이루는 사상과 생활의 경향들은 스콜라 철학적 경향과 대중적 경향과 신비적 경향들이었다. 이러한 경향들은 크건 작건 간에 이 시기의 모든 설교에 자유롭게 흘러들어가고 있었고 때때로 똑같은 사람이 그의 설교에서 이 요소들 중 두가지 혹은 세가지 모두를 결합시키기도 하였다. 스콜라철학 경향은 지적인 것을, 대중적인 경향은 실제적인 것을, 신비적인 경향은 신앙생활의 더 깊은 영적인 면들을 강조하였다.4)
B. 탁발수도승단의 특징
탁발 수도원의 특징은 사도적 청빈, 순결, 순종이라고 하는 수도원적 삶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공동체생활이요, 자신들의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설교였다.5)
초기 수도원이 대부분은 한적한 곳들을 택했었고 세상의 오염된 영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들을 중심지로 택했다. 하지만 탁발 수도 종단들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간들이 집결해 사는 곳들을 찾았으며 거기 있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하였다.
옛날의 수도원들은 광범위한 농촌적 봉건적 환경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탁발수도승단들은 급속히 성장해 가는 도시 인구들 사이에서 힘차게 성장해 나갔다6)
C. 탁발수도승들의 설교의 특징
첫째 탁발수도승들의 설교의 두드러진 특징은 선교적 혹은 대중적이라는 것이다.
많은 군중들, 대중들의 열광, 약간의 광적이고 극단적인 요소들, 그러나 동일하게도 하나님께 회심하고 삶을 고치는 것 등등이 특징이자 열매였다.7)
중세 미사의 예배의식적 맥락(사제는 미사라는 엄숙한 맥락 안에서 그날의 성구를 주석해야 했다)은 설교를 제한하고 허약하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설교에다 별로 활기를 못 주게 되었는데 탁발수도승들은 왕왕 예배 의식이란 울타리 밖에서 설교를 하였다. 중세 후기 민중들의 삶에서 크게 인기를 얻고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설교는 정규적 형식의 설교라기 보다 탁발수도승들이 행했던 것과 같은 특별한 형태의 설교였다.8)
탁발수도승들은 어느 교구에서나 설교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대중적 설교의 부활이 서구 전역에서 일어났다. 많은 군중들이 수도승들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 들었으며 야외 설교가 정기적인 관례가 되었다.9)
두 번째 특징은 설교의 언어에 관한 한 그들은 주로 전부 다는 아니라 할찌라도 대부분 각 지역의 방언으로 설교되었다. 예화와 논증을 위해 모든 종류의 자료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전설과 이야기, 옛날의 우화와 새로운 우화들, 진짜 혹은 상상 속의 동물들의 습성들, 자연의 힘들, 당대의 관습들. 때대로는 광고와 효과를 위해 이상한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다. 속임수와 놀라게 하기, 인기를 얻기 위한 그리고 천한 예화들도 자주 사용되었다. 유우머도 자유롭게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종종 희화와 불경건한 것으로 타락하기도 했다.10)
세 번째 특징은 성경의 주석에 있어서 4중적 의미를 들 수 있다.
이들의 주석기법에는 삼중의미 즉 문자적 의미(literal meaning), 도덕적(moral) 또는 비유적(tropological) 의미, 그리고 은유적(allegorical)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 제4의 의미로 신비적(anagogical) 의미가 추가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은 문자적 의미로선 유대의 수도를 의미하였으나 도덕적으로나 비유적으로는 공동체 생활의 질서정연한 상태를 의미하였다. 은유적으로는 교회를, 신비적으로는 거룩한 도성 곧 영원한 생명을 뜻하였다.11)
네 번째 특징은 설교자들이 설교의 보조 자료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설교자들은 설명을 위한 일화를 좋아했고 이로 인해 예화나 기적사화 일화 등의 총서가 범람하게 되었다. 이 자료의 대부분은 하나의 수록집에서 다른 수록집으로 대부된 것이며 확실히 무수한 설교에 사용된 것으로 이교도와 고대 기독교, 양자로부터 차용한 것이다.12)
그렇기 때문에 탁발수도승들의 활동으로 생겨난 문헌은 방대하다. 이것들은 구분하면 설교기술에 대한 편람(hand book)과 예화집, 그리고 개요서가 그것이다.13)
특별히 Alan의 “Art of Preaching"는 첫 번째 설교 소책자이기도 한데 여기서 그는 성경에 기초하거나 바울의 방법을 기초하여 설교를 일상에서 행하는 것, 말하는 것까지 넓은 의미로 설명을 하였고 다양한 경우들을 위해서 47가지의 설교의 예를 제공하고 있다.14)
D. 주요 승단의 비교 (프란시스 승단과 도미니끄 승단)
주요 승단으로는 프란시스 승단, 도미니끄 승단, 카르멜 승단, 어거스틴 승단이 있으며 몇 개의 보다 작은 승단이 있는데 여기서는 1209년 이탈리아에서 일어나 당시의 수도원들의 부요함과 사치와 불결함에 반대하며, 도시지역에 새로운 교구를 세우는데 전념하는 개혁운동으로써 설립된 프란시스 승단과 1215년 남부 프랑스에서 진리를 전파함으로써 이교도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설립된 도미니끄 승단을 중심하여 연구해보려고 한다.15)
1. 프란시스 승단
당시 탁발수도 승단들 가운데 결과적으로 가장 커진 단체는 공식적으로 ‘작은 형제들의 승단'(the Order of Little Brothers)으로 불렸지만 통속적으로는 프란시스 승단이라고 알려진 그것이었다. 이 승단은 앗시시(Assisi)의 프란시스(Francis) 에 의해 시작됐을 뿐 아니라 그 창시자의 이념에 의해 끊임없이 촉구되어 왔다.16)
이 승단은 세기 전반부에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수도승들은 말씀을 전파하며 어디든지 갔다. 그들은 심지어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해외선교를 가기도 했다.17)
프란시스 수도승들은 일체의 교통기관을 사용하지 못한 채 걸어서 여행했으며 병자들을 돌보기 위한 헌금과 극심한 기후에 대비하기 위한 의복 외에는 아무것도 구제 받지 못하도록 되어있었다. 이들은 중노동 후에도 겨우 음식과 잠자리 등 최소한의 대가만을 받았다.18)
또한 이들은 처음부터 학문과 설교의 중요성을 부정하였으므로 그 전도의 방법은 교훈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범을 보여 주는 것이어야 했다
a. 프란시스의 연대기19)
1182 이탈리아의 움브리아 지방 앗시시에서 출생
1206 세상과 인연을 끊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봉사하기 시작
1208 앗시시 인근의 성당(성 다미안 성당)개축을 완료하고 포르티운클라에서 활동하기 시작
1209 설교자로서 소명을 받고 프란시스 승단을 창설
1210 승단의 수칙을 작성하고 교황 이노센트 3세로부터 새로운 수도회로서 인가를 받음
1219 마호멧 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시리아와 이집트를 여행
1226 10월3일에 포르티운클라에서 사망
1228 교황 그리고리우스 9세에 의하여 시성받음
b. 프란시스의 설교
프란시스는 1207년 예수님께서 열두명의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마 10:5-10)을 자신이 두 번째로 재건한 포르티운클라(Portiuncula)교회에서 예배드리면서 봉독하는 가운데 소명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따를 것을 결심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내어 버리고 자신의 신발과 지팡이도 모두 내어 던진 후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20)
그의 설교자로서의 삶의 신조는 “만약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당신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그 어느 곳에 간다할지라도 그것은 다 부질 없는 일이다”라고 한 말속에서 발견하듯이 그는 평생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온 생애를 바쳤다.21)
프란시스는 설교하면서 “우리나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 스스로 실천해야 하며 또한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단 한가지 소원은 내가 결코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모든 사람을 존경하기를 원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거룩한 계율에 복종함으로써 말로가 아니라 내 자신의 모범으로써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도록 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22)
이것이 그의 설교자로서의 자세였다.
또한 프란시스의 설교의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기쁨과 인간생활의 답답함을 비롯하여 회개의 필요성, 부(富)의 어리석음, 다가올 심판의 확실성에 대한 것들이었다.
프랜시스가 병석에 누워있을 때 직접 설교하지 못하고 그의 청중들에게 대신 보내어진 편지 속에서 그의 설교의 특징을 조망해 볼 수 있다.
"여러분의 원수인 육체, 세상, 그리고 마귀에 의해 속고 있는 소경된 여러분들이여, 보시오.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어떤 좋은 물건들을 결코 가지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즐기리라 생각하지만 여러분은 속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생각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그 날과 그 시간이 오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병들고 죽음은 다가오고 있습니다”23)
프란시스의 설교에 있어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설교의 용어는 “평화”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프란시스의 설교의 중요한 표적은 그 당시 도시들 간에 만연해 있던 불화와 반목이었다.24) 그래서 그는 설교를 행할 때마다 항상 시민들에게 상호 이해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며 그들의 마을을 끊임없는 분쟁 속으로 몰아 넣는 증오심과 시기심을 버릴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기독교 공동체의 영광과 형제애에 대하여 설교하였으며 백성들에게 당파심과 이기적인 마음을 버릴 것을 호소하였다.25)
이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의 시에서 엿볼 수 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그리고 프란시스가 남긴 설교는 “새들에게”라는 제목이 붙은 짧은 설교문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이 설교문으로는 그의 수사학적인 기교나 설교의 신학을 추론해 볼 수는 없고 다만 전해져 오는 바를 소개해보면 그는 학문적이기보다는 신비적이며 그의 소리는 선율적이며 쾌적했으며 풍부한 억양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즉 그는 청중들과 마찬가지로 감정이 풍부했으며, 얼굴표정과 몸짓으로 설교하는 다양성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가 사용한 말은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평이한 것이었으며 그는 결코 학문을 반대했기 때문에 지식인들이 사용하는 멋진 어휘를 사용하지 않았었다. 어떤 때는 극적인 생생함을 지닌 급진적인 말로서 자신의 경험에 따른 내용을 직설적으로 말하기도 하였다.26)
특히 프란시스 설교 중에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가 학문을 반대하였다는 것인데 그의 말속에 잘 나타나고 있다.
“나의 수도회에 속한 수도사들 중에서 학문에 대한 욕망을 지니고 있는 자들은 결국 환난의 날에 그들 자신의 손에 아무 것도 쥐어져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왜냐하면 환난의 때에는 지식이 아무런 소용도 없이 다만 밖에 버리우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27)
프란시스가 자신의 수도회 내부에서 가졌던 최종적인 논쟁과 좌절은 학문에 대한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프란시스는 이 논쟁에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2. 도미니끄 승단
도미니끄 승단도 프란시스 승단과 마찬가지로 한 개인의 정신과 인격의 산물이었다. 이 인물은 다름아닌 흔히 도미니끄(Dominic)라고 알려진 스페인 출신 도밍고 드 구쯔만 (Domingo de Guzmen)이라는 인물이다.28)
그리고 이 승단의 공식적인 명칭은 “설교자들의 승단”(Ordo Praedicatorum) 혹은 “설교하는 형제단”(Fratres Praedicatores)이었다.29)
a. 도미니끄의 연대기30)
1170 스페인의 카스틸(Castile) 에서 출생
1203 도미니끄는 주교 디에고 감독과 함께 남부 프랑스를 방문
1215 제4차 라테란공의회에서 교황 이노센트 3세로부터 수도회로서 인가를 받음
1218 로마에서 프란시스를 만남
1220 교황청 내 직원들의 영적교육을 담당
1221 8월6일 불로냐에서 사망
b. 도미니끄의 설교
1203년 도미니끄는 주교 디에고 감독과 함께 남부 프랑스를 방문한다. 그곳은 당시 이단으로 정죄 된 “알비파”(Albigenes)들이 한참 번창하고 있을 때였다. 도미니끄는 크게 충격을 받는다. 그것은 카톨릭이 알비파를 이단으로 몰아 무력으로 진압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알비파가 엄청난 세력을 확장되는 것을 본 것이다. 카톨릭이 알비파들을 무력으로 탄압하는데도 그토록 발전하는 이유가 당시 카톨릭이 정통교회라고 자부하면서 자만에 빠져서 대단히 안일하고 사치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반해 알비파들은 극단적 금욕생활로 생활자체가 모범이 된 것을 깨달았다.31)
여기서 도미니끄는 이단들을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서는 무력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정통신앙의 설교와 교훈이라고 믿었으며 이와 동시에 엄격한 수도 생활과 이단에 대항한 최선의 이론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열성있는 학문의 탐구를 첨가시켰다.32)
프란시스와는 달리 도미니끄 개인의 설교를 연구한 자료들이 희박하여 여기서는 승단 차원에서 연구되어 있는 자료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도미니끄 수도사들의 목적이란 곧 효과적인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개종시키는 것이었다.33)
또한 도미니끄 수도사들은 완벽한 고전적 수사학 원리에 입각한 최선의 설교 전통 수법으로 완전하게 훈련받았다.
이것은 도미니끄 승단이 설립된지 약 30년후 당시의 수도회 원장이었던 훔베르트(Humbert)의 표현에 잘 나타나고 있는데 그는 말하기를 “설교의 재능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로 말미암아 얻지만 지혜로운 설교자는 자신의 본분을 다하며 바르게 설교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공부할 것이라”고 특별히 언급하였다.34)
도미니끄 승단은 학문을 기초로 한 중세 최초의 수도회였다. 이들이 세운 기숙사마다 최소한 1명의 박사가 배치되어 수하의 수도사들에게 말씀의 설교를 통해 기독교 진리를 인간들에게 전파하는 방법을 교훈하였다.35)
그리고 도미니끄 승단에서는 처음부터 가난을 단지 이단에 대항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했을 뿐이었다. 이들의 주된 목표와 목적은 설교, 교훈, 교육 그리고 신학의 탐구였다. 가난은 이러한 목적들에 도달하기 위한 여러 수단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 하였다. 따라서 상황의 변화와 함께 수도회가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에 이들은 별다른 저항없이 그렇게 하였으며 탁발에 의한 생활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36)
E. 영향 및 평가
탁발승단의 출현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이들은 기존 수도원운동에 전혀 새로운 원칙을 소개하였다. 과거 수도사들의 자기 부정은 자기 구원을 위해 수단화되었다. 수도사들은 세속 안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으므로 세상을 등진 것이었다. 즉 이들은 육체의 정욕과 세상의 욕망을 그 안에서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탁발수도승 들의 이상은 그 차원을 달리한 것이었다. 이들은 수도원 운동의 정신과 규율을 세상 한가운데로 다시 이끌어내었다. 이들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능동적이고 용기 있게 세상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든 것이다.37)
무엇보다 정장복 교수가 설교자론에서 설교자의 학문성에 대해서 “설교자가 학문을 즐기는 자세 속에서 오늘이 말씀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모자란 자신의 실력을 계속해서 연마해야 함은 회피할 수 없는 책임이요 의무이다”38)라고 하였듯이 오늘의 설교자로서 도미니끄 승단의 학문성을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며, 설교자의 인격에 대해서 “설교자가 그 메시지를 살아 있는 말씀으로 자신의 인격을 통하여 승화시킬 수 없을 때 이미 선포된 말씀은 아무런 메아리를 회중들로부터 가져올 수 없다는 점이다”39)고 하였듯이 오늘의 설교자로서 “나의 외치는 말보다 내 행동의 모범에 의하여 모든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기를 원한다”고 소망하면서 짧은 생애 44년을 그렇게 순결하고 정결한 삶으로 살았던 프란시스와 승단의 훌륭한 인격적인 삶의 모습을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다.
Ⅲ.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
1496년 프로랜스의 광장에서는 산더미 같은 피라밋이 세워졌다. 그 아래에는 화약과 장작이 쌓였다. 시민들은 피라밋의 계단에 자신들의 허영들을 던져 놓았다. 모든 사치스러운 옷, 보석, 가발, 값비싼 구두 등이었다. 시민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찬양이 울려퍼지면서 불길은 하늘 높이 솟아 올랐다. 허영의 화형식(Burning of Vanities)이 진행된 것이다. 이 축제의 지도자는 철의 사나이로 묘사된 사보나롤라였다.40)
A. 시대적 배경
14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한마디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한다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는 종교개혁 전의 혼돈과 무질서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두 세기에 걸친 유럽의 정치는 전쟁, 야심, 억압, 잔인함, 음모, 부패의 시대였다.41)
사회 경제적으로는 사회적으로는 새로운 사회계급이 등장하게 되었다. 중산층 계급의 출현이 바로 그것이다. 전통적으로 이 시대까지 유럽사회는 나라를 다스리는 귀족들과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성직자들 그리고 농민들로 세 계층이 뚜렷하게 나뉘어져 있었는데 상업활동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 상인 계급이 등장하고 이들로 통하여 농업중심의 장원제 봉건 사회에서 상공업 경제 사회로 급속한 발전을 본 시기이다. 여러 가지 경제적인 번영으로 말미암아 그릇된 풍조들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사치와 방탕과 음란함이 전 이탈리아에 번져 있었고 교회는 이러한 모든 세속적인 부패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하였다42)
정신 문화적으로는 르네상스(Renaissance)라고 하는 문예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옛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위대한 역사의 추억, 고대의 명상과 원리주의 같은 것들로 이탈리아인들의 마음은 사로잡혀있었다. 이 같은 정신사조는 근본적으로 신적인 은총의 질서로 부터의 탈피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과격해지기 시작했고 사회는 무정부적인 상황을 향하고 있었다.43)
문예부흥이 사상적으로 보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인문주의 운동이 되지만 신앙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나려는 인간적인 욕망 운동이었다.44)
종교적으로 보면 14세기에 들어선 후 더욱 부패하기 시작한 로마교회는 교황권마저 크게 실추된 채 속된 권세만을 확장하는데 여념이 없었다.45)
성직자들의 무지와 무능력은 그들의 도덕적인 부적합성에 비추어 볼 때 상대적으로 작은 결점일 뿐이었다. 허욕과 사치, 탐욕과 야심, 성직매매와 착취가 더불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개적인 축첩이 있었으며 흐트러진 삶의 모습이 수도사들이나 수녀들조차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46)
당시의 설교는 12 - 13세기에 유행한 사상과 방법의 3가지 유형이 여전히 발견되고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은 현저하게 힘-학문적인, 대중적인, 신비적인-을 잃어가고 있었다.
13세기가 끝나가면서 학문적인 유형의 설교방식의 거장들은 사라졌다. 위대한 인물들의 모방자들이 점점 늘어나 학문적인 설교방식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심각한 분열상, 장황한 수식, 쓸데없는 구분 그리고 피상적인 천박성이 있을 뿐이다.47)
B. 기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연대기48)
1452 9월21일 이탈리아의 페라라에서 출생
1474 도미니끄 승단의 수도사가 됨
1481 전도자로 페라라에 파송됨. 그 후 플로랜스로 가서 가르침
1492 플로랜스의 정치적, 영적지도자가 됨
1495 설교금지 명령을 받음
1496 파문됨
1498 5월23일 플로랜스에서 화형됨
C. 설교자로서의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정장복교수는 그를 소개하기를 의로운 항거의 논리로 일관했던 삶이었다고 소개하면서 통렬하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조용한 영적 교제에 자신을 헌신하는 경건생활의 모범을 보여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소개하고 있다.49)
그는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성격 66권을 거의 외웠던 수도사였다. 그는 설교단에 등장한 이후로 늘 자신감이 넘치는 자세로 로마 교회의 부패와 죄악을 공격하며 조국 플로랜스의 패역을 눈물로 고발하였던 설교자였다.50)
그는 철저히 금식하며 소식 위주의 식사를 하였다. 음식을 통하여 기쁨을 얻는 것이 마음의 방탕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는 오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의 식사를 하였다. 그의 옷은 언제나 청결했지만 수도원에서 가장 낡고 조잡하고 천한 차림이었다.51)
그는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한 번 맺은 우정은 늘 따뜻하게 간직하였고, 설교뿐만아니라 개인적인 인격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인격을 감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52)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교황 알렉산더 6세가 설교자의 입을 다물게 할 목적으로 추기경의 빨간색 모자를 주겠다고 하였지만 그는 “내가 쓰고 싶은 단 하나의 모자는 나의 붉은 피로 물들인 순교자의 모자”라고 하면서 그것을 거절하였다.53)
또한 그는 학문연구야말로 필요한 개혁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지도아래 성 마가의 수도사들은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아랍어, 그리고 갈대아어 등을 공부하였다.54)
뿐만아니라 그는 성경의 권위를 확신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교회가 갱신되기를 갈망하며 설교한다. 나는 이 일에 있어서 오직 성경만을 나의 유일한 길잡이로 삼았다”고 하였다.55) 성경에 대한 그의 사랑과 본문에 대한 박식함은 실로 뛰어난 것이었다. 헬라어와 히브리어 원전을 자유롭게 읽었다.56)
D. 사보나롤라의 설교의 제 요소와 주제
사보나롤라의 설교의 기본적인 요소를 분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에게는 토미즘(Thomism)과 프랜시스적인 그리스도의 사랑, 요아킴(Joachim)의 묵시록 사상, 그리고 예언자적 소명의식이 융합되어 있다.57)
그는 무엇보다 그의 메시지를 구성하는 세가지의 예언을 찾아내었는데 첫째 교회는 채찍을 맞게 될 것이다. 둘째는 그리고 새로워질 것이다. 세째는 이 모든 것이 빨리 이루어질 것이다.58)
설교의 주제는 교회의 극심한 타락을 지적하고 갱신을 촉구하는 내용이 주제를 이루지만 그의 설교는 단지 교회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설교 속에서 설교를 듣는 청중을 교회와 성직자들과 교황, 심지어는 정치 지도자들과 일반 백성들까지로 확대시켰던 것이다. 왜냐하면 죄악은 곳곳에 만연되어 있었고 불경건한 풍습은 온 도시에 가득하였기 때문이다.59)
그의 설교의 주제들은 대게 네가지로 묶어 볼 수가 있는데 첫째는 신앙의 진리, 둘째는 기독교인의 삶의 단순성 셋째는 임박한 몇 가지 특별한 사건들에 대한 경고, 넷째는 플로랜스의 새로운 정부와 정치. 이러한 것들로 설교내용은 집중되었다.60)
그리고 그의 성경해석의 방법은 너무나 환상에 찼고 극단적이었으며 철학적 사색과 알레고리적 방법을 취한 것이 많았다. 그렇듯 본문을 유추적으로 해석하면서도 성서에 대한 그의 사랑은 너무나 깊어 긴 주해 설교를 사양하지 않았다. 그 속에서 자신이 행하는 존엄한 선포의 근거가 성서에 있음을 확신하기도 하였다.61)
사보나롤라는 연속 설교를 즐겼는데 크게 열 번 정도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 졌다고 한다. 그것을 나누어보면
1) 요한1서에 대한 설교 : 이 연속설교는 대체로 1491년경쯤에 행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2) 시편에 대한 설교 : 1493년의 강림절을 전후해서 설교하였다.
3) 노아 방주에 관한 설교 : 주로 1494년 사순절기간 중에 행해졌다.
4) 학개에 관한 설교 : 1494년 1945년 사이에 설교되었다.
5) 시편에 대한 두 번째 설교 : 1495년에 행해졌다.
6) 욥기에 대한 설교 : 1495년 사순절 기간동안에 행해졌다.
7) 아모스와 스가랴에 대한 설교 : 1946년 사순절을 전후하여 행해졌다.
8) 룻기와 미가서에 대한 설교 : 1496년에 행해졌다.
9) 에스겔서에 대한 설교 : 1496년에서 1497년 사이에 행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10) 출애굽기에 대한 설교 : 1498년에 행해졌다.62)
E. 사보나롤라의 설교분석을 통한 설교이해
사보나롤라의 설교 중에서 여기서는 주로 공히 세계명설교 대전집(맹용길 역)과 인물로본 설교의 역사(정장복)와 기롤라모사보나롤라(김남준)에 함께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승천”(눅24:51)를 읽어가면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첫째 그는 설교할 때 성경본문과 그리고 증거하고자 하는 어떤 주제에 대하여 마치 신학자와 같은 엄밀함과 철학자와 같은 꼼꼼한 분석으로 설교를 진행해 나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세상의 지혜있는 자들은 피조물을 둘로 구분합니다. 한 종류는 본질적인 것이고 다른 종류는 우연적인 것입니다.. 본질이란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서...우연적인 것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고 어떤 것에 의존해서만 .... 우리의 지식이란 전적으로 감각을 통해서 이루어지고...감각을 통해서 우연적인 것에 대한 지식을 갖게 마련이다. ....이성은 상상력을 발휘해서 판단함으로써 본질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이성이 육체로부터 따로 독립해 가지고서는 그 빛을 잃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육체와 영혼을 결합시켜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지식은 영혼이 썩을 육체 속에 거하는 한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그러하기에 하나님 안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 놀랄 필요도 없으며 신앙의 진리에 대해서도 우리가 모든 것을 모르는 바와 같이 아직까지 증명할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빈약한 지식을 불쌍히 보셔서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시어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고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시고 ,완전한 사람의 삶을 마치신 후에 이 감각 세게를 벗어나서 그의 영원한 세계로 가셨습니다. ” 63)
그리스도의 승천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의 유한성으로는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신학자와 같은 엄밀함과 철학자와 같은 꼼꼼한 분석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종교개혁 전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의 행위 구원과는 달리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상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 세상사람들이여,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올라가신 그 길을 따라서 천국 낙원에 가고자 원한다면 당신들 인간적인 본성과, 은이나 금으로나 덕으로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저 낙원에 갈 수 없음을 명십하십시오. 그 길은 오로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p155)
"게으른 자들에게 좋은 위안이 되는 설교가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옷을 주고, 성당을 지으시고. 그러면 지옥에 갈 위험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따위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우리의 외부적인 행동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기적이나 예언도 상관 없습니다. 겸손과 사랑에 넘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만이 천국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64)
세 번째 그는 성경의 해박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구약성서의 발람의 사건을 인용하여 당시의 교회의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발락은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케 할 마귀였습니다. 발람은 귀족이고, 고위 성직자이고, 설교가 이고, 학식이 있지만 교만에 사로잡힌 전형적인 인물임을 압니다. 여기 등장하는 두 사람은 교만의 길을 가고, 교만을 섬기고, 우쭐대는 특히 게으른 성직자요 수도사입니다. 밖으로는 덕스러운 삶을 사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식에 사로잡혀 진실을 말하지 않는 무리입니다.”65)
네 번째는 정장복교수가 지적하듯이 예언적 선포의 근거를 자신의 양심과 예언자적 위탁의 확신에 둠으로 말미암아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라는 의식이 결여되었던 약점도 또한 발견할 수 있다.66)
“내가 이러한 말씀을 아무 뜻없이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진실임을 하늘과 땅을 두고 맹세합니다. 온 세상이 나를 반대한다 해도 나는 이 설교를 행할 것입니다...내가 거짓말쟁이라면 어떻게 거룩한 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믿어주십시오. 이것은 내가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입니다.”67))
“오 너희들 교만한 자들이여, 길을 돌이키고 진리로 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의 칼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 바라오. 오 이태리여, 전쟁과 기근이 너를 뒤집어 엎을까 적정이로다. 내가 이렇게 앞날을 예언하는 것은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도 꺼내지 않았을 것입니다.”68)
다섯 번째 그런 가운데 단편적이지만 알레고리적해석 방법을 취하고 있는 본문도 찾아볼 수 있다. 구약성서의 발람 사건가운데 등장하는 나귀에 대한 해석에서 볼 수 있다.
“나귀를 통해서 우리는 천박한 사람을 알게 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는 생각도 없고, 의식적인 미사와, 고해성사와, 면죄부에만 정신이 팔려서 돈을 내거나 양초를 구입하는 것이 진정코 무슨 이익을 주는지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순히 사는데만 급급한 무리들입니다,”69)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결론에 가서 예언자적 설교가 답게 결국 새롭게 다가올 소망이 있는 미래적인 세상을 이야기하며 세상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겨나갈 힘을 하나님께 구할 것과 미래를 준비하며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결단을 촉구하면서 설교를 마치고 있다.70)
F. 영향 및 평가
『기롤라모 사보나롤라』를 쓴 김남준 교수는 중세시대 마지막에 선 이 설교자를 “중세의 세례요한”이라고 부르고 있다.71)
왜냐하면 비록 그의 신학은 여전히 카톨릭적이었고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어떤 때는 알레고리칼했으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증거한다는 설교자의 고유의 의식보다는 때때로 예언자적 신탁과 확신을 설교하는 자라는 자기도취의식에 빠지기도 하였지만 칠흑과 같은 중세의 영적 암흑기에 교회를 향하여 회개를 외치며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외쳤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 결코 미신적인 기부행위나 인간의 공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논리를 제시하였으며 시민생활과 지배계급의 부패와 탈선을 예언자적 설교로 시대의 개혁을 부르짖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김남준 교수는 “사보나롤라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성경말씀이 거의 없었으며 성경을 구석구석 거의 대부분 암송하고 있었다. 그는 설교할 때마다 성경속에서 끝없는 예증을끌어 들였으며 특이한 재능으로 성경본문을 해설하면서 이 책 저 책에서 여러구절들을 실타래처럼 끊임없이 끌어와서 이어주며 인용하곤 하였다.”고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다.72)
정장복 교수는 그의 저서 『설교사역론』에서 한국 교회 설교의 위기적 요소의 핵심들 중에 특별히 “예언자적 선포가 수반되지 못하는 지극히 안일적이고 도피적인 설교들, 말씀의 현장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하나의 독백적 설교로서의 끝맺음, 설교의 내용과 설교자의 삶 그리고 인격과 너무나 심한 거리감, 본문말씀을 떠난 설교의 범람”등을 들고 있다.73) 뿐만 아니라 설교자가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요소들을 제언하면서 “시대를 보는 역사의식과 현실적 사회의 관심, 예언자적 상상력과 분별력...”등을 이야기 하고 있다.74)
그런데 우리는 지금부터 500년전의 설교자인 사보나롤라를 통해서 이러한 사실들을 보고 있지 않은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세례요한은 신구약 중간의 암흑기에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중세의 마지막 예언자 사보나롤라는 타락하고 부패한 성속(聖俗)의 한복판에서 종교개혁의 길을 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Ⅳ. 나가면서.
지금까지 13세기 세로운 수도원 운동이었던 탁발승들의 설교사역과 그 중에서도 프란시스 승단과 도미니끄 승단의 설교사역에 대해서 또 15세기 이탈리아의 플로랜스의 설교가 사보나롤라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냉혹하고 물질주의적이며 냉소적인 시대에 관대한 마음을 지니고 사랑을 실천하고 평화를 선포하며 더 나은 세계를 소망하였던 탁발승들과 타락하고 부패한 성속의 한복판에서 예언자적 사명감으로 회개와 개혁을 부르짖었던 사보나롤라는 하나님께서 역시 그 시대에 세우신 특별한 사명감에 불타는 진리의 종들이었다는 사실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소고를 마치며 발제자도 이 시대에 하나님의 종으로 진리를 선포할 설교자로 부름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왠지 민망하고 부끄러워지는 것은 왜일까?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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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 『설교학』.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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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용길 편. 『세계명설교대전집』제1권. 인천: 성서연구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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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llioth, Yngve. A Brief History of Preaching. 홍정수 역. 『설교사』.서울: 목회신서.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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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S. Wilson, A Concise History of Preaching (Nashville: Abingdon Press, 1992)
1) Kenneth S. Latourette, History of Christianity, vol. 1, 윤두혁 역, 『기독교사』(상)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0), 639쪽.
2) William R. Cannon, History of Christianity in the Middle Ages, 서영일 역, 『중세교회사』(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289-290쪽.
3) Justo L. Gonzalez, The Story of Christianity, 서영일 역, 『중세교회사』(서울: 은성, 1995), 132쪽.
4) Edwin C. Dargan, A History of Preaching, vol 1, 김남준 역, 『설교의 역사』(Ⅰ) (서울: 솔로몬, 1995), 312쪽.
5) 이형기, 『세계교회사』(1)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4), 497쪽.
6) Kenneth S. Latourette, 위의책, 640쪽.
7) Edwin C. Dargan, 위의책, 328쪽.
8) Yngve Brillioth, A Brief History of Preaching, 홍정수 역, 『설교사』(서울: 목회신서, 1992), 136쪽.
9) Dewitte T. Holland, The Preaching Trarition, 홍성훈 역, 『설교의 전통』(서울: 소망사, 1986), 46쪽.
10) Edwin C. Dargan, 위의책, 330쪽.
11) Yngve Brillioth, 위의책, 132쪽.
12) 위의책, 121쪽.
13) 위의책, 115쪽.
14) Paul S. Wilson, A Concise History of Preaching (Nashville: Abingdon Press, 1992), p. 70.
15) Dewitte T. Holland, 위의책, 45쪽.
16) Kenneth S. Latourette, 위의책, 641쪽.
17) Edwin C. Dargan, 위의책, 310쪽.
18) William R. Cannon, 위의책, 295쪽.
19) 맹용길 편, 『세계명설교대전집』제1권, (인천: 성서연구사, 1984), 277쪽.
20) 위의책, 281쪽.
21) 위의책, 287쪽.
22) 정성구, 『설교학』(서울: 총신대학출판부, 1994), 111쪽.
23) 정장복, 『인물로본 설교의 역사』상권 (서울: 장로회신학대학 출판부, 1991), 114쪽.
24) 정성구, 위의책, 112쪽.
25) 맹용길 편, 위의책, 291쪽.
26) 정성구, 위의책, 112쪽.
27) 맹용길, 위의책, 287쪽.
28) Kenneth S. Latourette, 위의책, 291쪽.
29) 이형기, 위의책, 506쪽.
30) 위의책, 506-508쪽에서 발췌.
31) 정수영, 『새교회사』 1 (서울: 규장, 1992), 297쪽.
32) Justo L. Gonzalez,위의책, 137쪽.
33) William R. Cannon, 위의책, 293쪽.
34) Dewitte T. Holland, 위의책, 47쪽.
35) William R. Cannon, 위의책, 294쪽.
36) Justo L. Gonzalez, 위의책, 138쪽.
37) William R. Cannon, 위의책, 298쪽.
38) 정장복, 『설교학서설』 (서울: 교회커뮤니케이션연구원, 1992), 61쪽.
39) 위의책, 58쪽.
40) 김기홍, 『이야기교회사』(일권) (서울: 두란노, 1992), 243쪽.
41) Edwin C. Dargan, A History of Preaching, vol 2, 김남준 역, 『설교의 역사』(Ⅱ) (서울: 솔로몬, 1995), 19쪽.
42) 김남준,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서울: 솔로몬, 1998), 21쪽.
43) 위의책, 20쪽.
물론 문예 부흥운동은 고전에 대한 탐구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성경을 원어로 읽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고 후일 개혁가들로 하여금 성경의 원문으로 돌아가서 로마 카톨릭의 비성경적인 교리들을 비판하고 성경의 조명을 통해 잊혀진 사도적 신앙을 회복하는데 커다란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44) 위의책, 26쪽.
45) 정장복, 『인물로본 설교의 역사』상권, 146쪽.
46) Edwin C. Dargan, A History of Preaching, vol 2, 26쪽.
47) 위의책, 29쪽.
48) 맹용길 편, 위의책, 403쪽.
49) 정장복, 『인물로본 설교의 역사』상권 , 147쪽.
50) 김남준,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11-12쪽.
51) 위의책, 55쪽.
52) Edwin C. Dargan, A History of Preaching, vol 2, 102쪽.
53) 정성구, 위의책, 125쪽.
54) Justo L. Gonzalez, 위의책, 218쪽.
55) 김남준,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94쪽.“재인용”.
56) 위의책, 93쪽.
57) Yngve Brillioth, 위의책, 146쪽.
58) 정성구, 위의책, 124쪽.
59) 김남준,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133쪽.
60) 위의책, 134쪽.
61) 정장복, 『인물로본 설교의 역사』상권, 151쪽.
62) 김남준,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135쪽.
63) 정장복, 『인물로본 설교의 역사』상권 , 153-154쪽.
64) 위의책, 159쪽.
65) 위의책, 158쪽.
66) 위의책, 152쪽.
67) 위의책, 159쪽.
68) 위의책, 162쪽.
69) 위의책, 158쪽.
70) 위의책, 167쪽.
71) 김남준,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12쪽.
72) 위의책, 143쪽.
73) 정장복, 『설교사역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 78쪽.
74) 위의책,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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