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의 신학
(Theology of Communication)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로버트 E.웨버/정장복역)의 요약-
<목 차>
▷▷▷▷서 문
1.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에의 사명 Ⅰ
1. 복음과 문화적 관점
1)그리스도는 누구인가?
2)현세계의 성격
2. 커뮤니케이션의 과정
1)학문으로서의 커뮤니케이션
2)신학적인 고려사항
3. 신앙의 각성
1)문화화된 신앙관
2)성서적 신앙관
Ⅲ커뮤니케이션신학ⅣⅣⅠ
4. 커뮤니케이션의 기초 : 하나님과 피조물
1)하나님 : 커뮤니케이션의 궁극적 기초
2)피조물 :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대상
5. 커뮤니케이션의 모형 : 역사, 언어, 그리고 환상
1)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소통하신다
2)하나님은 언어를 통해서 소통하신다
3)하나님은 환상을 통해서 소통하신다
6. 커뮤니케이션의 모형 : 성육신
1)성육신의 커뮤니케이션
2)성육신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원칙
3)성육신적 커뮤니케이션의 실제
7. 커뮤니케이션의 붕괴 : 인간과 죄
1)하나님의 형상안에 있는 인간성
2)커뮤니케이션의 붕괴
8. 커뮤니케이션의 회복 :그리스도와 구원
1)그리스도: 커뮤니케이션의 회복자
2)교회: 회복된 커뮤니케이션의 공동체
▷현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함축된 의미들
9. 상징 사용의 재발견
1)상징이 차지하는 위치
2)교회 안의 커뮤니케이션에의 함축된 의미들
3)상징의 사용을 되찾는 길
4)세례식, 성유식, 그리고 성찬식
10. 교회 안에서의 성장의 재발견
1)영적 성장이란?
2)성장의 현장으로서의 교회
3)교회 안에서의 성장의 전달
11. 선교사명의 재발견
1)세상의 의미
2)세상 안에 속한 교회
3)교회는 세상의 영에 속한 것이 아니다
4)그리스도안에 있는 교회는 세상을 이긴다
12. 그리스도교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13개 성서원리
참고문헌
서 문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견해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말씀하고 계시다”는 신념을 중심으로 삼는데 이 말은 그 이외의 사실, 즉 하나님께서 과거에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함축하는 말이기도 하다.
커뮤니케이션과 그리스도교적 세계관
불편부당하고 편견이 가미되지 않은 커뮤니케이션 견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커뮤니케이션 해석은 어느 정도 해석자의 주관에 의해서 결정되기 마련이다. 그리스도교적 커뮤니케이션관의 배후에 있는 중요한 주관적 견해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그리고 “지금도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말씀하고 계시다는 생각은 동적인 삶의 견해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은 지속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려면,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들어야 한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통하여 말씀하셨고, 지금도 말씀하고 계시다.
둘째, 하나님은 성서 안에서 말씀하셨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간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이 보전되고, 해석되고, 전수되는 현장으로서 교회를 만드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살아있는 음성이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말씀하고 계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전달 수단(물리적, 물질적 세계)과 하나님의 지속적 커뮤니케이션의 기록된 자료(성서)와 그가 의사를 소통하는 음성(교회)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들이 모두 그리스도교적 커뮤니케이션관에 있어서 필요한 부분들이다.
제1부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에의 사명
1. 복음과 문화적 관점
1)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거짓된 그리스도
교회는 항상 그리스도에 관한 이단적 견해와 맞서왔다. 그리스도에 관한 잘못된 견해는 그를 너무 인간화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신적인 예수를 가지지 못하게 하거나, 그를 너무 신격화함으로서 더 이상 인간 예수를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왜곡된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견해 중에서도 어느 정도 왜곡된 견해를 논하는 일은 더욱 어렵고 논쟁적인 일이다. 이 말은 어떠한 개인이나 어떠한 그리스도교 집단도 특정한 문화적, 철학적 선입견이 전혀 없는 그리스도관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서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백인이고, 앵글로 색슨족이며, 중산층에 속하는 그리스도교를 믿고 있다. 이 그리스도는 논리적이고 교양있고 세련되고 예의바른 누구나 좋아하는 대중 kk예수이다. 동방에서는 다소 신비적이고 사적인 이미지를 따라 빚어진 그리스도상을 가지고 있다. 제3세계의 그리스도는 혁명가로 나타난다. 성서적 그리스도를 문화적 환경에 맞추려는 일은 그 자체가 잘못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가 성서적 예수와 혼동될 때 그것은 그릇된 일이 되는 것이다. 성서적 그리스도를 더 분명히 나타내 보이게 하려면, 우리는 수많은 문화적 제약들을 넘어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성서적 그리스도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의 파멸이라는 곤경에 빠져 있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그 과업을 행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된 것은 인간이 선택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구원은 또 하나의 인간, 즉 하나님께로 향해 감으로써 삶과 창조 질서를 재생시키려는 또 하나의 인간의 선택이라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이 인간이 바로 그의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제1아담이 행한 것을 뒤엎고 인간과 피조물을 회복시키는 신-인, 곧 그리스도이시다.
2)현세계의 성격
불행하게도 복음 이해에만 관심을 둔 나머지, 이 복음이 선포되는 시대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시간을 소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들이 소통하는 세상에 대한 이해에 너무 많은 관심을 빼앗긴 나머지 복음에 대한 건전한 이해를 얻지 못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세속이해”에 대한 일반적 개념을 훌륭한 커뮤니케이션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으로 가정하고 효과적인 전달자들이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세가지 현대 세속사회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현세계의 다양성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복잡성은 오늘날 현존하는 세계관의 다양함을 살펴볼 때 뚜렷한 사실이 된다. 복음의 커뮤니케이션이 모든 시대와 모든 상황아래서 항상 똑같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것은 복음의 내용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복음이 여러 문화 안에서 효율적으로 소통되려면 받아들이는 문화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시며, 또한 굉징히 많은 수단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그는 결코 단조롭게 변화없이 말씀하지 않으신다. 래이필드에 의하면 세계관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세계관이란 특정 사회 속의 한 인간이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는 방법을 말한다. 그것은 자기와 구별되면서 또한 가지에 관계된 존재의 속성을 보는 방법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우주에 대한 인간의 개념이다. 그것은 “내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무엇사이에서 움직이는가? 이 사물과 나와의 관계는 무엇인가?”등의 질문에 대해서 그 사람에게 해답을 부여해주는 개념의 체계인 것이다.
교회역사를 살펴볼 때 우리는 복음이 여러번 다양한 세계관의 맥락에 맞추어져 왔음을 납득하게 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교 전파자의 과제가 성서적인 복음을 모든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를 전달하는 일의 복합적인 성격
레이필드에 의하면 문화의 거의 모든 양상을 분류할 수 있는 세가지 중심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 자연, 그리고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교적 세계관도 역시 이런 관점에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소통하려 하는 곳에 이미 접촉점이 수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넘어서 볼 때 그리스도를 소통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①커뮤니케이션은 기술상의 문제일 뿐이라고 믿는 것과 ②커뮤니케이션이란 단지 우리가 이해한 대로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라고 믿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과 그 복음이 왜곡되지 않은 해석이 들려질 수 있는 방법으로 이 일을 행해야만 한다.
결 론
우리는 정확하지 못한 그리스도 이미지를 전파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신격화된 그리스도, 즉 단순한 실존 개념만을 전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그냥 인간일 뿐인 예수도 또한 피해야한다. 거기에다 우리 고유의 문화적 사고 그물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해석하려 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는 서구 실용주의나 동양의 신비주의, 또는 제3세계의 국수주의의 사고 그물을 통해서 걸러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왜곡된 이미지를 뒤에 젖혀두고, 제2아담, 즉 그의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사탄의 권세를 파괴하고, 다시 오실 때 죄와 사망권세를 그의 발아래 놓으실 우주적 인물로서의 성서적 그리스도의 이미지에 되돌아가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왕국에 들어간다는 것이며, 이러한 소망 속에서 미래를 기대하며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가 당면한 과제의 두 번째 측면은 현 세계에 성서적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문화가 있고, 그 각각의 문화는 고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술에만 의존하는 것을 피하면서, 또한 말하는 대상들의 세계관과 문화적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가정하지도 않으면서 문화의 접촉점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요약하면, 성서가 우리에게 우리가 전파하려는 자료를 제공해 준다면, 현재에 대한 시각은 이 자료가 통과해야 하는 맥락을 제공해 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자료를 소통하는 것만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고, 우리는 복음의 청취자들이 살아있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구원하시는 행위를 체험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2. 커뮤니케이션의 과정
현 세계에 그리스도를 소통하려는 그리스도교인의 과제는, 전파자와 그 청중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의 교량을 건설하는 일에 신중하고 지적인 고려가 주어지지 않고서는 적절히 수행될 수 없다.
1)학문으로서의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의 모형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 모형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 세가지 구성요소는 메시지, 전달자, 수용자를 포함한다. 이 세가지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분명히 필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과정 그 자체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수많은 변형된 요인들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메시지 자체의 문제이다. 둘째로, 문제는 반대편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전달자는 수용자에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에 수용자는 그 자신의 사고 그물을 통해서 전달자의 메시지 해석을 걸러내야 한다.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터들이 가지고 있는 주된 문제점들의 하나는 성서가 기록되었던 그 문화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의 문제이다. 우리가 인정해야 할 또 한 가지의 요인은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전달자의 문화적 환경을 통해서 전달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을 통해서 크리스찬들은 셋째 요인, 즉 “메시지는 수용자의 문화적 맥락을 통해서 전달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커뮤니케이션 과정속에서 우리는 동적인 동질성이나 적응 가능한 방향을 찾아내야 한다. 동적인 동질성이란 진리가 항상 고정된 형식으로 소통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문화속에서 성서 이념에 부합하는 신화나 전설을 찾으려 한다. 문화간의 간격을 연결하는 두 번째 방법은 적응가능한 방향설정으로서 이 방법은 그리스도교 메시지는 그것이 수용되는 문화에 의해서 어느 정도 형성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우리가 문화사이에 가교를 건설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그 자체의 맥락안에서 정확하게 이해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 자신의 맥락 안에서 우리의 해석을 이해해야 하고, 또 다른 맥락에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2)신학적인 고려사항
문화 사이에 건설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 위험을 피하여 우리의 길을 수립해야 한다. 하나는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너무 쉽게 다른 환경에 적응시킴으로써, 문화 사이의 간격을 줄여보려는 유혹이며, 또 하나는 전통적 신앙 이해를 보존하려는 욕망이 너무 강한 나머지 접촉점을 찾으려는 모험을 두려워함으로써 그 결과 문화 사이의 간격이 커져서 적절한 커뮤니케이션의 가교가 세워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초문화적 내용
그리스도교를 전달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완전한 내용 이하의 것을 전달해서는 안 된다. 제2 아담이나 우주적 인물로서의 그리스도 이미지는 창조와 종말에 관한 교리와 분리되어 이해 될 수 없으며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는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되고, 그의 재림에서 궁극적이고, 최종적으로 회복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때에는 불안전하고 변형된 형태의 그리스도가 전달되는 셈이다. 창조와 종말을 제외한 그리스도관은 결코 본질적인 그리스도교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이다.
성서의 문화적 맥락
그리스도교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동의하는 일이 힘든 것만큼 내용의 해석에 관해서 동의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의 전통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와 그리스도교 학자들의 업적에 의존하게 된다.
성서적 내용과 해석에의 성실성
하나의 사상이 한 문화권에서 다른 문화권으로 옮겨 해석되는 것은 반드시 그 사상의 기원을 언급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한 문화권에서 다른 문화권으로 전달되고 문화는 변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 약간의 변화나 수정을 겪게 된다. 모든 지식은 해석을 통해서 어느 정도 수정된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꼭 상대주의에 승복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상대주의는 회의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확실한 가르침에 입각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진리가 알려지는 상대적인 방법을 인정하는 것이다.
신학적 고려에 함축된 의미들
이 원칙이 암시하는 첫째 의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규범적인 내용과 해석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두 번째 의미는 성서적 해석이 더 낫다는 것이다. 세 번째 성서적 해석이 구원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암시이다. 네 번째 의미는 우리가 놓은 다리는 항상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결 론
커뮤니케이션은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는데, 이 과정은 지각된 것이 여과되는 전달자의 문화적인 구조를 인정하면서 그 본래적인 맥락에서 메시지를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수용하는 문화와의 접촉점을 찾아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교 진리가 여러 수준으로 알려질 수 있다고 결론지었으며, 성서의 구조와 성서적인 해석, 그리고 우리의 성서적 해석의 수준을 구분했다.
3. 신앙의 각성
사도행전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선교 역사에 관해서 간단히 살펴보면, 교회의 중심적인 관심사가 사람들에게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것 이었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한 신앙의 각성을 통해서 세상에서 인간의 삶이 재구성되었던 것이다.
1)문화화된 신앙관
성서 종교의 본질적 특징은 말씀의 종교라는 것이다. 말씀은 들려지고 행해지고 그리고 순종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약은 응답을 요하는 선포이다. 참된 들음과 단순히 육체적 들음을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표적은 신앙이다. 신앙은 들려진 것의 능동적인 증거이다. 들려져야 할 진리가 밀려나게 되고 계속해서 곡해되는 세 가지 사상의 범주를 예로 들면 합리주의, 낭만주의, 그리고 실존주의라는 근대사상이다.
합리주의자들
그리스도교에의 합리주의적 접근은 정신에 그 지상권을 준다. 정신은 그리스도교 계시를 입증하는 수단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들음을 통해서 이해되는 것보다 증거를 통해서 더 잘 이해된다. 합리주의자들이 성서의 신빙성을 너무 과다하게 옹호하려는 나머지 살아있고 활동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는 일에 등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낭만주의자들
그리스도교에의 낭만주의적 접근은 감정에 그 지상권을 둔다. 그러므로 낭만주의가 강조하는 것은 신자의 주관적 열정이다. 주관주의 사상들의 주된 문제는 그 사상의 일방성이다. 합리주의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인간의 한 측면을 택하여 그것을 신격화한 것이다. 그리하여 성서 메시지는 인간의 감정적 필요를 채워주는 정밀하게 고안된 역할로 축소되었다.
실존주의자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진리는 그의 역사성과 무관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역사(사실)의 단계에서는 예수의 역사성이 문제시되고, 따라서 부적당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하더라도 구속사(해석)의 단계에서는 그리스도 이념의 진실성을 확신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비 평
합리주의, 낭만주의, 실존주의 어느 것도 성서적 세계관을 이해하는데 참된 성서적 접근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합리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대한 다른 진술의 주변에 있는 하나의 진술로 격하시켜서 다른 세계관이 증명되는 것과 똑 같은 방법으로 입증되어야 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주관주의는 그리스도교를 개인이 자신의 심방(深房)속에 가지고 있는 긍정적이고 따뜻한 감정으로 격하시켰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이해는 더 이상 전체 인간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실존적 접근은 그들이 긍정하는 것을 또한 부인한다.
2)성서적 신앙관
하나님 인식의 출발점은 개념적 사고나 경험이 아니라 우리가 그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말씀”이다. 여기서 말씀은 우리의 삶을 규제하는 신앙체계를 의미한다. 우리가 의지하여 살아가는 말씀이란 실제로 우리가 듣고 행하는 말씀이다.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자는 성서적 세계관의 맥락에서 사는 것이다. 즉 신앙이 일깨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된 들음 - 앎과 순종
우리의 의식 속에서 들음이 표현되는 형식은 앎과 순종을 통해서 이다. 앎이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내적인 감각을 낳는 들음의 특질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와 우리의 관계, 그리고 그의 세상과 우리의 관계를 알게 되면, 자연히 순종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게 된다.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은 말씀에의 순종 안에서 형성된다.
분석 이전의, 그리고 이론 이전의 들음
들음은 분석이전의 것이고 이론이전의 것이다. 다시 말해 신앙을 낳게 하는 들음은 합리적인 분석이나 이론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참된 들음은 일종의 모험이다. 즉 사람은 그가 들은 것이 진실이라는 사실에 자기의 삶을 거는 모험을 하는 것이다. 한편 신적인 입장에서 볼 때 들음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주어진 은사이다.
합리적이고 경험적인 신앙내용
그리스도교 신앙은 합리적 내용을 가지고 있다. 성서의 내용은 실재와 일치하므로 합리적이다. 또한 신앙은 증거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앙은 경험을 포함한다. 따라서 성서적 진리에 따라 살 때 우리는 지속적인 신앙의 체험에 둘러싸이게 된다.
결 론
신앙에 있어서 서구의 크리스천들은 그들의 문화적인 사고 그물을 통해서 그 개념을 걸러냈다. 보다 더 일반적인 세 가지 사고 그물은 합리주의, 낭만주의, 실존주의이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의 신앙해석을 왜곡시키는 문화저인 계약을 가진 철학들이다.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의 요지는 우리의 주가 되시며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신앙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앎과 순종이란 단어에서 그 표현을 찾는다. 앎은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삶을 향한 새로운 방향을 설정해준다. 그러나 순종은 삶에 영향을 준다. 이제 삶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에 순종함으로 영위된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은 새로운 가치체계와 새로운 목표와 목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는 삶 전체에 연관되어 있으며 그리스도는 전체 피조물의 주이시므로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의 목표는 신앙을 통한 인간과 피조물의 재방향 정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제2부 커뮤니케이션의 신학
4. 커뮤니케이션의 기초: 하나님과 피조물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의 기본원칙은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그것 자체만으로 저절로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초자연적, 영적 실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 원칙은 인간의 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커뮤니케이션 신학에도 필수적인 원칙이 된다.
1)하나님: 커뮤니케이션의 궁극적 기초
1세기에 시작되어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의 전통은 언제나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성격을 긍정하였으며 이것은 또한 교회의 예배실제와 신조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성서는 신성의 위격들 사이에 있는 나-너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또한 신성안에 있는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두 번째 표현은 성서가 증거하고 있는 사랑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신성안에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세 번째 예는 성자가 성부께 기도한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이와같이 성서적 증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은 관계의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그 본질상 커뮤니케이션에 의해서 특정지워지는 분이시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2)피조물: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 대상
피조물은 하나님의 본질의 확장이 아닐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본성에 관여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것은 그 자신의 본질을 가진다고 말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은 자율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신학적으로 익숙한 용어를 쓰자면 피조물은 하나님에 의해서 보존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피조물
그리스도교의 창조관은 어떤 실재도 하나님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으며 하나님은 그의 의지대로 세상을 만드셨고 세상은 그 자체로서 또 그 본질에 있어서 엄연히 하나의 실재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본성을 소통하는 표시로 보여진다. 그러므로 그 형상들이 “외적존재”로 나타나는 모양은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과 유지하시는 관계성의 표시인 것이다. 그 표시가운데 하나가 창의성이다. 따라서 피조물의 존재는 하나님의 “내적 존재”안에 있는 창의성의 표시이다. 이 사실은 모든 창의성의 표시는 직접, 간접으로 “창조주의 형상들”이라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또 하나의 예는 사랑의 은사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사탄-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자
성서는 악마인 사탄이 피조물 안에 사망권세를 수립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세상 전체를 통하여 그들의 외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자연은 사탄이 그 자신과 그의 파괴욕을 드러내는 주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제 피조물은 흠이있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으며 충분하게 자기 운명을 완수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 결과로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은 많은 왜곡과 의미 전도를 겪고 인간의 시야로부터 감추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피조물을 통한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은 크게 손상되었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소통하신다.
창조-타락-구속-완성에 대한 신학은 창조질서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일종의 영적 교제에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 자신과 또 그 피조물과 소통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통해서 소통하신다.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이 그의 피조물을 통해서 분명히 소통된다는 사실은 성서기자들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성서는 시간과 공간의 계시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통해서 소통하시는 또 하나의 방법은 역사이다. 역사는 물론 시간과 공간의 일부이며 시간과 공간처럼 또한 계시적이다. 하나님께서 꿈과 환상을 통해서 또는 들리도록 말씀하심으로서 자기 자신을 직접 계시했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 방법은 특별한 장소에서 특정시간에 역사를 통한 방법이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에게 소통하신다.
신약의 하나님 계시는 성육신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사실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1 세기에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우리에게 기억 가운데서 말씀하고 계신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 11:26) 우리가 하나님의 활동을 기념할 때 그는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결 론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에는 두 가지 근거가 있는데 그 첫째는 존재론적 견해이다. 즉 하나님이 존재하시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은 그 자신과의 관계성 안에서 세상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세상은 그 창조주를 반영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은 중요한 것이 된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은 시간과 공간과 역사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통해서 일어난다. 이 사실이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소통될 수 있는 훌륭한 매개 수단이라는 원리를 수립해 주는 것이다.
5. 커뮤니케이션 모형: 역사, 언어, 그리고 환상
1)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소통하신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구속의 메시지이다. 성서의 중요한 관심은 인간이 어떻게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며, 완전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는 유일무이한 종교는 아니다. 다른 모든 종교들이 어떤 종류로든지 구원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유일무이하게 만드는 한가지 구별점은 다른 세상의 종교와 신화들이 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비하여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구속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성서종교는 다른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그것은 현세의 종교인 동시에 내세의 종교인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소통하신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하여 자신에 대한 진리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리고 그의 계시는 항상 인격적이고 관계적이다. 역사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의 첫 번째 특징은 역사의 사건들은 항상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 계시를 약속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 특징은 그것이 불가해하다는 사실이다.
함축된 의미들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현대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암시는 굉장히 많고 다양하다. 첫째로,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은 역사적이어야 한다. 즉 그것은 세속안의 인간의 삶을 언급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의 메시지의 주요 관심은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에 두어야 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가 행동으로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약속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2)하나님은 언어를 통해서 소통하신다.
언어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자신과 창조질서에 대한 그의 욕구를 소통하는 실제적인 전달 수단으로 언어를 사용하셔야 했던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언어: 하나님을 위한 전달 수단
성서는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언어사용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차 있다. 인류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인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언어를 통해서 알려지게 되었다. 또 언어는 예수에 관한 복된 소식이 처음으로 퍼지게 되는 수단이었다. 언어는 복음유포의 열쇠였다.
언어: 인간을 위한 전달 수단
레이몽드 채프맨은 “언어와 종교적 체험”이라는 글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정당성 문제를 논하고 있다. 그는 언어의 사용은 두 가지 전제조건에 근거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첫째,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되는 실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둘째, “초월적인 것과 내재적인 것 사이에는 일치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전제를 인정해야만 언어는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을 일으키는 수단으로서 받아들여지게 된다. 하나님은 언어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언어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다.
현대의 언어사용
그리스도교 학자들은 언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어려움을 인정하고 있다. 유진 니다는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은 항상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문화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 시대인 현대에서 우리의 언어사용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다고 할 때 우리가 마음에 간직해야 할 몇 가지 원칙들이 있다. 첫째, 우리의 언어는 그 맥락에 맞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언어는 개인적인 경험에 연관되는 것이어야 한다. 셋째로, 종교적 언어는 종교적 체험이라는 견지에서 개인적으로만 의미있는 것이다.
본질적 진리 보존의 문제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커뮤니케이션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언어의 학습을 포함하는 것이다. 반면에 성서적 그리스도교에 속하면서도 신앙의 커뮤니케이션에 본질적이 아닌 어휘들이 있다.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아들”과는 다른 수준에 있는 말이다. “어린 양”에 상응하는 말은 다른 수많은 문화들에서 발견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유일무이하고 초문화적이고 그리고 가르쳐야만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우리가 전달하고 있는 것이 성서적 진리라고 확신한다면 본질적인 그리스도교의 언어를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
3)하나님은 환상을 통해서 소통하신다.
성서에는 시각적 수단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는 하나님에 관한 내용이 많이 있다.
성서에 나타난 환상
꿈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끔 부정적으로 처리된다 하더라도 꿈은 성서기록에서 긍정적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서의 환상적 자료는 교회에서 폭넓게 사용되었고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로서 예배의식과 음악, 그리고 미술의 발전을 낳았다.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의 원리
사람들은 언어나 논리에 따라서라기보다는 의식을 통해서 더 많이 지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시각적 영상을 통해서 자극된 상상력은 인간의 감정적인 측면에 미치게 된다. 셋째로, 시각적 상징의 사용은 수용자의 사회 문화적 현실과 무관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함축된 의미들
우리시대는 텔레비전이나 기타 시각 매체들을 통해서 점점 더 시각적인 상징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소통하는 수단으로서의 시각적 상징의 사용에 관해서 더욱 잘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서 말씀에만 자신을 국한시키지 않으신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언어에의 노예 상태를 벗어나 폭발적인 상상력의 마개를 열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한번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 되는 십자가의 신비와 영광스러운 경험을 되찾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환상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더욱 면밀하게 시각적 수단을 통한 복음의 소통법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결 론
하나님께서는 역사와 언어, 그리고 환상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연구해 볼 때,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양태들이 하나님의 재가를 받은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된다. 커뮤니케이션 신학이 이러한 모형들의 중요성을 그 중 어떤 것이라도 경시하거나 훼손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그 모두를 훌륭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인치셨기 때문이다.
6. 커뮤니케이션의 모형: 성육신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을 역사나 언어, 환상 등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리셨지만, 그의 자기 계시의 절정은 성육신 안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낮아짐의 위대한 행위로서 그는 우리 가운데서 하나가 되셨고 우리와 대면적인 관계로 소통하게 되었다. 성육신을 설명하는데 있어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지간에, 중요한 사실은 크리스천들이(로마 카톨릭이건, 동방 정교이건, 개신교이건, 오순절 교회이건, 복음주의건 간에) 하나님이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성육신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성육신의 커뮤니케이션
인간과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의 초점은 성육신 사건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형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인격적 커뮤니케이션 안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최고의 사건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형태가 형태화되는 사건이기도 한 것이다.
함축된 의미들
성육신은 커뮤니케이션의 “지상”기반이다. 성육신에 대한 사상이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고, 삼위일체 사상에 부합되는 것이지만, 그 사상의 실현은 시간, 공간, 그리고 역사에 의존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육신은 커뮤니케이션의 지상적 기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모형
예수는 또한 커뮤니케이션의 모델이시다. 그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은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있어서 최종적인 지상의 준거점이 된다. 찰스 크래프트는 예수님의 커뮤니케이션에의 접근 방법에서 끌어낸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네 가지 원칙과 거의 흡사한데, “성육신과 문화를 가로지르는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이론”이라는 글에서 다음 네 가지 원칙을 말하고 있다. ① 정보가 정확히 전달되려면, 전달자와 수용자는 모두 똑 같은 준거의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 ② 준거의 틀 안에서 메시지의 예측도가 높을수록, 그 메시지의 효과는 적어지고, 반대로 예측도가 낮을수록 메시지의 효과는 커진다. ③ 자료가 제시되는 형식의 특수성이 클수록 메시지의 효과는 커진다. ④ 메시지가 수용자에 의해서 발견된 내용은 전달자에 의해서 전이해되고 일반화된 형식을 통해서 제시된 것보다 더 큰 효과를 나타낸다.
2)성육신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원칙
주의를 끄는 요소들
예수는 결코 괴상한 일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색다른 행동을 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던 논쟁적인 인물이었다.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에서 주의를 끄는 요소는 단순한 속임수가 아니라 주로 천국-선포의 내용에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과 일체가 되심
예수께서 우리와 동일하시다는 사실은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의미심장한 암시를 내포하고 있다. 즉 성육신은 커뮤니케이션의 완전한 모형이라는 것이다. 성육신을 통해서 하나님은 커뮤니케이션의 표준을 수립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르신 것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려 한다면, 우리가 소통하려는 사람들의 삶 자체와 사회적 맥락, 그리고 그들의 필요에 기꺼이 동화해야만 하는 것이다.
3)성육신적 커뮤니케이션의 실제
필요의 유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설교의 많은 부분은 그 청취자들 내부에 필요한 것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다. 그의 접근 방법은 직접적이기 보다는 주로 간접적이었음에도, 그리스도가 알기에 이미 거기 있었던 필요성에 역점을 두는 효과를 나타냈다. 훌륭한 커뮤니케이션은 듣는 자 안에서 필요를 불러일으키고 그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방법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메시지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 필요인 “하나님의 용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필요의 중추
영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예수의 전략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자기 발견을 향해 있다. 따라서 그는 보여주는 것만큼 말해주지 않았고. 보여줌에 있어서도 대부분 불확실한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에, 듣는 자가 자신의 준거의 틀과 이해력 안에서 진리 인식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었다. “비유”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 그 좋은 예이다. 훌륭한 커뮤니케이션은 항상 듣는 자의 역할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질문에 항상 대답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듣는 자에게 질문을 되돌려야 하고, 그들 스스로 결정하도록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각재료나, 비유나, 격언이나, 이야기들을 듣는 자가 전달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수단으로 두려움 없이 사용하는 발견지향적 형식의 커뮤니케이션이다.
결 론
1.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자신을 소통하신다.
-우리는 세속 속의 인간의 삶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파해야 한다.
-하나님은 행동을 통해서 전파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전달하는 내용 자체가 되어야 한다.
2. 하나님은 언어를 통해서 소통하신다.
-언어는 그 맥락에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
-언어는 개인의 경험에 관련되어야 한다,
-종교적 체험은 종교적 진리 이해의 전제 조건이다.
-본래적 종교 언어와 부차적 종교 언어는 구별되어야 한다.
3.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서 소통하신다.
-의미와 주체성은 이미지와 그림, 그리고 기념의식 등을 통해서 전수된다.
-시각적 영상은 “마음"에 전달된다.
-시각적 영상은 진리에 근거해야 하고 수용자의 경험에 부합되는 상징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4.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의 최종적 형태는 성육신이다.
-성육신은 주의를 끄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성육신은 일체감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성육신적 커뮤니케이션은 필요를 유발시킨다.
-성육신적 커뮤니케이션은 필요를 충족시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 그를 전파해야 할 책임을 주셨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고 계신다.
7. 커뮤니케이션의 붕괴 : 인간의 죄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게로 관심을 돌려서 그들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조사해 보기로 한다. 성서가 말하는 증거는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기에 의사소통 능력이 있으며 창조주의 모양을 본따서 만들어졌기에 조물부와 마찬가지로 소통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주의는 인생의 모든 측면이 자연과학에서 끌어낸 원칙에 의거하여 설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1)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인간성
구약에 나타난 형상의 의미는 “새기다”(to cut)는 뜻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에서 나왔는데, 그 단어의 원래 의미는 복사나 모방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첫째 우상을 만드는 것을 묘사하는데 쓰였고 우상숭배자들은 그들이 만든 신의 정확한 육체적 재현으로서 모양을 새겨보려고(to cut) 했다. 둘째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관계된 것으로 아들은 아버지의 살아있는 복사품인데 비해서 우상은 죽은 복사품이다. 그러나 주로 관심을 가지는 세 번째 사용법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즉 창 1:26 말씀의 요지는 인간이 하나님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어떤 형상을 만들어서 경배할 권리를 가지지 못하게 하셨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을 반영하도록 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에는 하나님의 상징인 인간이 있다. 그러나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고 반영할 것인가? 에 대한 의문의 여지는 남아있다.
형상에 대한 신학적 이해
모든 신학자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이며 성서에 나타난 형상이란 단어가 이러한 개념을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초대 동방교회의 교부인 이레네우스는 형상을 아담의 이성과 자유의지, 그리고 성령의 활동을 통한 초자연적 은사로서의 유사성으로 이해했다.
첫째로 신학자들은 광범위한 역사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논해보려고 했다. 니사(Nyssa)의 그레고리는 ■인간 창조에 관하여■(On the Creation of Man)라는 그의 논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반영으로서 인간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발견했다. “우리를 지으신 이는 또한 우리에게 사랑의 성격을 나누어 주셨다----. 사랑이 없으면 형상의 모든 요소가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현대 신학자 카우프만(Gordon Kaufman)은 인간의 역사적 본질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에 대해서 포괄적인 견해를 강구하고 있다. 둘째는 그리스도론적 방법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논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성서는 하나님이 “육신 되셨고” 그리하여, 성육신한 그리스도 안에 그의 형상을 담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인간이 됨을 보여주었다.
신 중심적 인간관
성서의 인간관은 분명히 신(神) 중심적인데, 에덴동산에서의 인간은 4단계로 소통하는 능력을 향유(enjoy)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곧 하나님과 자신과 동료들과 자연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소통하는 관계에 있을 때, 소통하는 존재로서 그가 활동하는 모든 영역이 균형을 이루게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함축된 의미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으며 창조주의 징표를 지니고 있다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커뮤니케이션 신학에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로, 인간은 하나님의 반영이다. 과학적 유물론이 제시하는 것처럼 진화하는 유기체의 외적 자극에 대한 순응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 그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신적 창조 행위에 근거한다. 둘째로, 커뮤니케이션의 참 의미는 인간이 하나님과 소통할 때 가장 잘 인식된다. 인간의 참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성취되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인간의 역할은, 그가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되도록 할 때 가장 잘 수행될 것이다. 셋째로,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필연적으로 인간이 세상에서 특수한 과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며, 예수의 이름과 권세로 세상의 양대 세력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넷째로, 마음에 새겨야 할 상황적 요인은, 인간의 하나님과의 교제는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죄가 이 세상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의 붕괴를 가져왔고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극복을 거부하는 인간의 행위가 커뮤니케이션의 장애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2)커뮤니케이션의 붕괴
창세기 기사는 에덴동산에서의 하나님과의 원래적 관계묘사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의 반역으로 옮겨진다. 창세기 3장은 인간이 자기 삶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한 사실의 종교적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사탄을 따르고 복종하는 편을 선택했다. 이 선택의 결과 인간은 - 자신에의 커뮤니케이션과 동료와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자연과의 커뮤니케이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상실하게 되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의 붕괴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주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창3:8). 그들의 죄는 그들이 하나님과 나누었던 영적인 교제를 파괴했으며 하나님과의 자리에 다른 것을 놓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서 숨기를 원하였다. 아담에게서 일어났던 일은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벌어진 틈은 인간의 육체적, 물질적 삶의 영역까지 영향을 미치는 영적인 틈이었다. 이 틈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에 영향을 미치는 세상의 삶 속에 일어나 연쇄적인 사건의 움직임을 주관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인간은 그가 창조된 형상을 외곡했고 훼손시켰으며, 그 형상의 일부인 커뮤니케이션을 원래 의도된 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자신과의 커뮤니케이션
인간의 하나님과 커뮤니케이션 파괴의 특수한 결과의 하나는 인간이 더 이상 자신과 참된 커뮤니케이션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예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은 “-- 너는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2)고 선고하였다. 피하며 유리하는 자는 자신의 외부의 사물로부터 분리된 사람일 뿐 아니라, 또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자이다. 곧 가인의 이야기는 쉼이 없는 삶과 방황과 의미 추구로 특징지어지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자기로부터 소외는 실제로 자기를 주장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관계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나 피조물의 어떤 형상을 신격화하도록 유도한다. 결론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의 붕괴는 인간 내부에서 일어난 것이므로 자신에 대한 참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없게 된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커뮤니케이션 붕괴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의 붕괴는 자신과의 커뮤니케이션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사람들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의 붕괴를 초래한다. 사회는 유리하며 방랑하는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이러한 집단적인 의미 탐색과 “하나님의 낯으로부터 멀어질 때” 그러한 탐색이 만들어 내는 집단적인 악을 반영하는 사회와 문화를 만들게 된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 활동은 파멸로 이어지었고 노아의 홍수를 경험하였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소외는 다음 말로써 설명할 수밖에 없는 사회를 낳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의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이와 같은 죄는 파괴적 움직임, 즉 사람만이 아니라 전체 사회, 심지어 인간성 전체를 삶의 원의미와 목표 -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한 세상에서의 인간의 과제와 역할 수행을 통한 하나님의 교제 - 로부터 분리시키는 동력을 만들어낸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의 붕괴
창세기 3장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에서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처음에 자연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려 하셨다. 따라서 자연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서 밝히 그리고 강력하게 전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사탄을 섬길 것을 선택한 인간으로 인해 결국 피조물까지 악한 세력에 봉사하지 않을 수없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피조물이 사탄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사탄이 인간에게 그의 권위를 행사하는 무대가 되었으며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죄의 의미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죄의 결과는 우주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삶의 바로 중심에는 피조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다시 연합될 때 해소되어야 하는 우주적 긴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과제는 항상 파괴된 커뮤니케이션의 궁극적인 화해의 빛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전달자는 현실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낙관주의자이다. 현실주의자로서 그는 커뮤니케이션의 장애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낙관주의자로서 그는 이미 그리스도가 자신 안에서 모든 대립적인 세력들을 연합시켰으며, 그것들이 결국 종말에 가서 해소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죄의 결과는 인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쪽으로 움직이려는 인간의 결점은 인간적인 것이다. 죄에 대한 개인주의적인 접근은 죄가 인간에게만 영향을 주었다고 가정한다. 그런데 성서의 증거는 세상의 각 인간이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과 자연과의 커뮤니케이션의 파괴 작업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화해 작업은 각 개인에게 인간적인 수준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전달자는 커뮤니케이션의 파괴에 자기 자신이 또한 그가 소통하고 있는 사람들이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결 론
이 장에서 우리는 인간과 파괴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했다. 다음의 내용들은 그 중요한 요점들이다.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세속적인 삶의 전체성 안에 반영되는 것이다. 그것은 영적인 특성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의 인간의 과제와 역할에 관계되어 있다. ∙세상에서의 인간의 목적은 인간이 자신의 영적인 특성과 자신의 세속적 과제와 역할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실현할 때 가장 잘 완성될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했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형상은 왜곡되었다. ∙이러한 왜곡된 형상은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 자기 자신과, 그의 동료와, 자연과의 - 커뮤니케이션의 파괴를 초래했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위한 인간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의 내용은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까지 미치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주 전체로 확장되고, 각 개인에 영향을 미치고 모든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다.
8. 커뮤니케이션의 회복 : 그리스도와 구원
이 장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의 회복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커뮤니케이션의 파괴는 한 사람인 아담과 그의 죄가 과거와 현재에 걸쳐서 계속 온 인류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력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커뮤니케이션의 회복도 한 사람인 그리스도와 그가 온 인류에게 계속해서 미치고 있는 영향력에 초점을 둔다.
1)그리스도 : 커뮤니케이션의 회복자
아담이 그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전체 창조 질서를 죄에 몰아넣은 것처럼 제2 아담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 인간의 상황을 역전시켰다.
그리스도 : 새로운 인간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론적인 신앙고백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자, 또한 인간의 완전한 형상이라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히 1:3)고 기록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신학은 아들이 아버지와 똑 같은 실체와 본질을 가진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시다. 또한 예수님은 인간이시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4복음서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가 인간의 혈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는 커뮤니케이션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커뮤니케이션은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에 의하여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옛 것을 반복하신다.
회복된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견해는 제1 아담과 제2 아담을 주제로 한 시적인 표현에 기초하고 있다. 제1 아담이 인류에게 무엇인가를 가져온 것처럼 제2 아담은 인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가져왔다. 제1 아담이 죄와 죽음과 저주를 가져왔다면, 제2 아담은 이것을 뒤집어 엎음으로써, 의로움과 생명과 정의를 가져왔다(롬5:12-21).
예수의 사역의 우주적 의미
제2 아담의 형상은 우주적 의미를 나타낸다. 최초의 인간의 죄는 인간과 전체 창조 질서와의 관계를 파괴한 사건의 열쇠를 시작함으로써, 우주적인 결말을 낳았다. 그러나 제2 아담의 의로운 복종은 그 사건의 질서를 역전시켜서 그러한 모든 부서진 관계에 회복의 가능성을 가져왔다. 곧 우주적인 현실은 창조주 자신이 피조물 안에 들어오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들의 타락을 규정짓고 있는 깨진 관계를 회복시키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역사적 의미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은 우주적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역사적 의미에서도 아담의 것과 대응이 된다. 아담의 죄가 역사에 악영향을 준 사건의 연쇄를 시작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역사 안에서 실현되는 사건의 연쇄를 움직이게 했다. 인간은 사회적 피조물이며, 또한 자신의 죄로 인하여 그 사회적 관계를 전도시켰기 때문에 인간의 구속은 역사 안에서 하나님이 명하신 인간의 과제와 인간관계의 맥락 안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곧, 인간의 파괴된 커뮤니케이션이 나타나는 곳이 삶 자체 안이기 때문에 인간의 회복된 커뮤니케이션이 표현되는 곳도 삶 자체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교회 : 회복된 커뮤니케이션의 공동체
파괴된 커뮤니케이션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속죄 교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신 결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삶을 지배하심으로써 삶의 모든 영역에서 커뮤니케이션의 파괴를 영속화시키고 있는 악의 권세를 쳐부셨다는 것과 또한 사람이 더 이상 죄의 멍에 아래 살지 않고, 하나님과 교회의 동료 신도들과의 진정한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있는 자유를 얻게 하셨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회복된 커뮤니케이션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교회 이미지의 이해는 새로운 인간이 자신의 회복된 커뮤니케이션을 표현하도록 부르심을 입게 되는 구체적인 장에 대한 더 분명한 상을 제시해 준다. 첫째로 교회를 만들고 존재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이다. 교회는 자의에 의해서 모인 백성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인 사람들을 그에게로 부르시거나 소환하신 것이다. 둘째는 교회는 정적인 기관이 아니라, 새로운 방법으로 서로 관계맺은 사람들의 역동적인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관계하는 새로운 방법은 제2의 교회 이미지, 즉 새로운 피조물에 포착된다. 곧 그리스도가 새로운 무엇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며 교회 안에서 창조가 다시 시작된다는 것이다. 천국이 시작되어, 이제 세상 전체에 확산되기 시작하고 있으며 타락한 피조물과의 새로운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시작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 절정에 이르게 될 사건의 연쇄를 설명해 준다.
결 론
이 시점에서 이 장의 내용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고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대한 가르침이 오늘날의 커뮤니케이션 문제에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이 장의 취지는 한 가지 요점을 강조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행한 것을 역전시킴으로써 세상을 재창조하셨으며 이 새로운 창조는 교회에서 발견된다”는 것이었다. 이 요점이 커뮤니케이션에 암시하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지상에는 회복된 커뮤니케이션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 장소인 교회가 있다. 이 관점은 현재 있는 것과 (죄의 지속적인 현존), 미래에 있을 것(종말에 있어서 구원의 성취)사이의 긴장 안에 있다고 보는 성서적 현실주의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교회의 책임은 회복된 커뮤니케이션을 실현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그의 실체 생활에서 성령에 따라 회복을 실현하려고 애쓰는 사회로 보여져야 한다. 성찬식은 항상 화해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제시하는 것이다.
∙현대의 소통자들이 회복된 커뮤니케이션의 메시지를 가장 잘 전달하려면 자신이 삶 속에서 그것을 경험한 입장으로부터 전달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 안의 커뮤니케이션의 실현과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의 그 경험이 매우 강조되는 것이다.
제 3 부 현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함축된 의미들
9. 상징 사용의 재발견
1)상징이 차지하는 위치
일반적으로 상징(symbol)은 그것 자체를 넘어선 것을 지칭해 주면서 동시에 그것이 상징하는 것에 직접 관여하는 것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일례로 유진 니다(Eugene Nida)는 상징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인습적인 상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형태로 볼 때, 예수가 죽임을 당한 형틀을 본 딴 것이므로 그 사건의 실제적인 특징을 다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사의식이나, 드라마나 그림 또는 건축물이나 춤들도, 그것들이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것이 나타내고자 하는 대상물의 실제적인 속성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습적인 것이다.
상징으로서의 교회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천국의 상징이며, 천국 그 자체는 아니면서도 천국을 가리키고 있으며, 천국에 관여하고 있다. 교회는 세상에 나타난 천국의 모습이며 회복된 커뮤니케이션의 가시적인 표현이다. 교회의 삶은 그 자신과 세상에 모두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상징의 중요성
교회가 상징이라는 사실은 상징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징의 기능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해와 전달 수단이라고 생각한다면 궁극적으로 실재의 형상으로 대우해야 한다.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의 필요성
신앙은 그 자체의 성격상 초자연적 개념을 가시적인 형상과 상징으로 변형시킬 것을 요구한다. 어떤 유한한 언어로도 초자연적 진리를 완전히, 그리고 충분하게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성서 종교와 역사 속의 교회는 항상 유한의 영역을 넘어서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서 상징에 의존해 왔다. 따라서 신앙의 언어는 상징의 언어가 되었다. 특히 읽기와 쓰기의 기술은 쇠퇴하게 되고 시작 자료의 영향력은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 교회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서 다시 한 번 상징을 사용하는 일이 특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교회 안의 커뮤니케이션의 함축된 의미들
첫째, 개신교도들 사이에 상징의 사용이 적어졌기 때문이다. 복음주의자들이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성서를 말씀의 책으로 보는 것이며, 우리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로 지각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깊은 커뮤니케이션의 또 하나의 차원은 상징의 사용이다.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은 성서에서 입증되고 있는데, 성서는 환상과 꿈과 비유와 묵시적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게다가 인간이 탁월한 언어적 동물이라는 가정은 인간의 감정적 측면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인간이 상징적 동물이라는 인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롤로 메이(Rollo May)는 상징을 잃어버렸음이 인간의 주된 어려움의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설명하고 확인할 수 있는 상징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의 삶의 위기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상징이 삶 자체의 바로 중심에 있다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생일축하나 기념식, 졸업식, 결혼식, 장례식 등은 언어만으로 전달할 수 없는 사물의 의미를 나타내주는 방법들이다.
이와 같이 성서에 나타나는 타락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의 인간의 회복에 이르기까지의 거대한 세상의 드라마도 언어로써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소통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를 전달하는 정당한 수단이 된다.
3)상징의 사용을 되찾는 길
여기서 피자는 예배를 통한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에만 국한시키려 한다.
그리스도교 예배의 상징적 성격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라는 영어 단어는 가치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께 가치를 돌리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사야 6장과 계시록 4장에서는 피조물이 하나님이 존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치를 돌리고 있다. 이러한 환상에서 멋있는 점은 하나님의 보좌에 둘러서 있는 상징의 사용인데,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궁극적인 본질을 말해주고 있는 시각적인 영상이다.
예배에서의 상징의 상실
개신교 복음주의의 입장은 전도와(선교) 교육(학습)을 강조하고, 그 외의 다른 면, 특히 예배를 경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배의 재발견을 통해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예배에서의 상징의 회복
신⋅구약 성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칭호는 그 원래 의미가 예배를 위해서 모인 백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찬양과 가치를 돌리기 위해서 함께 모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상징의 회복을 유도하려면 네 가지의 원칙이 필요하다.
첫째는 지상의 예배는 천상의 양식을 본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성단이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교회 건물은 그 자체로 천국을 상징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금장식이나 화려한 장식들이 아니라 시간적, 상징적 환경을 통해서 예배자의 상상력과 영혼이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예배를 하나의 행동으로서 재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예배 역사는 예배자가 행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강조해왔다. 카톨릭과 희랍정교의 전통을 보더라도 예배는 매우 능동적이다. 예배에 모든 사람의 참여를 강조하는 것은 그냥 앉아서 자극을 받고 채워지기를 기대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는 예배요소로서의 시간과 공간과 역사를 무시할 수 없다. 예배는 시간과 공간과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 요소들이 영원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인식한다. 예를 들면, 시간은 언제나 예수의 나심과 그의 생애와 역사, 그리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 성령의 도래, 예수의 재림과 관계성 속에서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역사적인 것으로서 교회의 예배의식 안에 한데 모이게 되고 상징적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넷째로 예배는 항상 배우는 기술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예배는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학습되는 것이라는 사실과 기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4)세례식, 성유식, 그리고 성찬식
세례의 상징적인 성격
기원 220년에 히폴리투스(Hippolytus)가 쓴 ■사도들의 전통■(The apostolic Tradition)에는 예배형식에 대한 특수한 통찰력과 복음의 메시지가 세례와 성유와 성찬에서 소통되는 상징적 요소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주고 있다.
▪ 세례의 준비
세례를 받기 위해서 선별되어야 할 사람들은 먼저 그들의 생활상을 심사받은 후에 선별되어야 한다. 병든자를 돌아보았는지의 여부, 능동적으로 선행을 행했는지의 여부 등을 보증인들이 증거한 후에 그들은 복음에 관해서 듣게 된다. 이제 세례를 받기 위해서 선별된 자는 목욕하고 자신을 불결함에서 벗어나게 하고 목요일에 자신을 씻으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금요일에는 금식을 하고 토요일에는 감독이 그들을 모아서 꿇어앉아서 기도하게 한 다음, 그들 머리에 안수하여 사악한 영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이마와 귀와 코에 인을 치고 그들을 일으켜 세운다. 그들은 그날 밤을 새우면서 가르침을 듣고 읽는 데 보낸다.
▪ 세례식
새벽에 물 위에서 기도가 행해지고 옷을 벗고 어린아이들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다. 다음에는 남자가 세례를 받고 마지막에 여자가 세례를 받는다. 세례를 위해서 정해진 시간에 감독은 기름 위에 감사를 드리고 그것을 그릇 속에 담는다. 이것은 “감사유”(oil of thanksgiving)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리하며 그는 다른 기름을 가져다가 그것을 불제한다. 이것은 “불제유”(oil of exorcism)라고 불린다. 한 부제(deacon)가 불제유를 가져와서 장로의 왼편에 서고, 또 한 부제가 감사유를 가져와 각각 붙들고서, “사탄이여, 나는 당신을 그리고 당신의 모든 종들과 당신의 모든 역사를 부인한다”고 세례자가 말하면, 장로는 불제유를 그에게 바르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대로부터 모든 악한 영들이 떠날지어다”. 이러한 일이 끝난 후에 지원자들은 옷을 벗은 채 물 속에 서서, 세례를 주는 장로에게 자신을 맡기게 되는데, 부제 한 사람이 그들과 함께 동행하게 된다. 세례자는 머리 위에 안수하고 세 번 세례를 준다. 이렇게 행한 후에 그들은 몸을 말리고 곧 옷을 입고 교회 안으로 인도된다.
▪ 성유식
감독이 그들 위에 안수하고 그는 손에 감사유를 붓고 그들의 이마에 바른다. 그들의 이마 위에 성호를 그으면서 말한다.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실지어다”. 이에 성호를 받은 자는 “또한 당신의 영과 함께”라고 대답하게 될 것이다. 그들 각자가 모두 이와 같이 행하고 바로 다른 모든 사람들과 기도에 참예하게 되지만, 이러한 일이 모두 끝나기 전에는 신자들과 함께 기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가 끝날 무렵에 그들은 평화의 키스를 나누게 된다.
▪ 성찬식
부제에 의해서 감독에게로 봉헌물이 전달되면 그는 감사함으로 그 떡을 그리스도의 몸의 형상으로 만들고 또 그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신 피의 형상을 따라 물과 혼합된 포도주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생명(living soul)인 인간의 내면이 육신이 받아들이는 것과 똑 같은 것을 영접해들일 수 있도록 세정(laver)의 징표로서 봉헌물 안에 물을 붓는다. 그리고 떡을 떼어 그 조각들을 나누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늘 떡이니라”. 말하면 수찬자들은 “아멘”이라고 말한다. 그 다음에 장로들이 공손하고 겸손하게 잔을 들고 대기하게 되는데, 우선 물을 든 자가 다음에 젖을 가진 자가 마지막에 포도주를 자진 자가 대기하게 된다. 수찬자들은 각각 세 번씩 맛을 보게 된다. 이러한 일들이 끝난 후에 각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헌신하고 배운 것을 실천하고 하나님을 섬김에 성장하게 함으로써 서둘러 선한 일을 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올바르게 살도록 재촉하도록 한다.
함축된 의미들
이러한 사도들의 전통에 대한 간략한 연구가 초대교회에서의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의 의미를 보여주었다. 즉 상징을 통해서 인간의 하나님과 자신과 동료와, 그리고 자연과의 화해의 전 복음이 소통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언어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이런 사실이 오늘날의 예배에 의미하는 것이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교의 창조와 구속, 그리고 언약 공동체에 관한 견해들이 낭송의 기술을 통해서 표현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진리가 재연(rehearsal)될 수 있는 감각(sense)을 회복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10. 교회 안에서의 성장의 재발견
교회는 오순절 사건과 종말 사건 사이에 위치하여 있기 때문에, 늘 “지금”(now)과 “아직도”(not yet)의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교회의 소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것인데 이것은 교회의 개개 성원에게나 교회 단체에게 모두 들어맞는 말이다.
1)영적 성장이란?
영적 성장이란 지식, 태도, 행동, 기술이라는 네 가지 영역에서 개인에게 일어나는 변화라고 인식된다. 첫째로 교회는 항상 지식의 전달에 관심을 가져왔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내용을 가진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크리스천들은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행 17:2-3)하였던 데살로니가에서의 바울을 귀감으로 삼고 있다. 둘째로 태도란 하나의 준거의 틀(frame fo reference)에 관련된 정신적인 자세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현실관이 곧 하나의 준거의 틀인 것이므로 크리스천의 태도는 일반적으로 삶을 향한 개인의 자세(stance)라고 말할 수 있다. 셋째로 행동 영역으로 그리스도교인은 구약에서처럼 삶의 방법을 최우선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새로운 공동체는 새로운 삶의 관습을 붙이려는 의지로 구별되는 것이다.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른”(롬6:19)자라고 말하고 또 그들은 “육체의 욕심”에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을 좇아 행하는”것이며(갈5:16)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자”(골3:1-17)라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기술의 상호 교류에 관심을 가진다. 예수께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 안에 나타나는 문제점의 하나는 회중들은 구경만 하면서 목사님에게 그리스도교 목회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속 사회 속에서 교회가 살아남으려면 기술의 발견과 시행이 가장 우선도어야 한다.
2)성장의 현장으로서의 교회
성령은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그의 백성에게 나타나셨으며 또 언약의 궤안에 계시고 지성소에 그의 거처를 정하셨다. 신약에서 하나님께서 계심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 의인화되심으로써 새로운 성격을 띄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실제로 한 인격이 되시며 그 교제의 일부인 사람들의 공동체 안에서 살게 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 온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가 시작된 것이다. 교회는 곧 새 생활의 표현이며 그리스도는 성령을 선물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성령의 사명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그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연합을 나누고자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연합하게 되어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맺게 된다. 그런데 성령이 거하시는 처소는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 된 교회이며 이 전(temple)으로서의 각 그리스도교인들과 유기적인 연합을 이룬다.
성령은 우리와 그리스도를 연합하게 하신다.
성령의 특수한 임무는 우리의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소통자로서 그는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을 인간에게, 또 인간을 하나님께 연결지어 주는 것이다. 특히 성령의 역사는 우리의 삶 전체를 재구성하도록 하는 변화의 힘을 우리 안에 심어주는 것이며 하나님과 연합하는 신도들의 생활의 안팎을 형성하는 일이다.
양육 공동체로서의 교회
성령께서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각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또 그 성숙이 소통되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양육하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전체적인 삶은 양육이라는 관점에서 조망될 수 있으며, 양육은 교회의 역사적 유산과 그 사회적 맥락과 그 미래의 소망 안에서 이루어져야 된다.
3)교회 안에서의 성장의 전달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미전달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미는 세계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 대한 이해 속에서 완전히 이해 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행하신 출애굽 사건과 이스라엘의 삶이나, 성육신 사건과 초대교회의 삶뿐만 아니라, 2000년에 걸친 삶의 여로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이해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성령은 단지 성서만을 통해서 말씀하실 수 있으나 교회와 불가불 연합되어 있으므로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교 신앙 체험의 전달
신앙의 체험을 전달하고 그리하여 그 성원들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교회가 사용할 수 있는 영적인 수단은 어떤 것일까? 이 문제 대한 해답은 교회를 교회의 의미가 유래되었던 사건 등을 재연하는 공동체로 인식하려는 방향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교회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며, 성령의 능력에 따라 그 사건의 반복을 통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체험이 전해 내려오게 된다는 것이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한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육신이 되신 말씀을 보내셨으며, 예수는 그의 육체적인 모습과 그의 말씀과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을 드러내셨다. 그리스도는 또한 그를 대신하여 그의 교회가 교회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도록 가르치셨다. 이 일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며, 이를 위해서 예수는 성령을 보내어 우리에게 능히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주게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재연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신도들과 세상에게 계속해서 전파되고 있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11. 선교 사명의 재발견
이제 우리는 세계를 향한 교회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눈을 돌려 볼 때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물어야 한다. 즉 세상에 대한 교회의 관계성은 어떤 것인가? 실제로 교회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들은 어떤 것인가?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신도들의 사회이자 협동적인 유기체로서의 교회가 세상안에 있는 그의 존재를 통해서 어떻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1)세상의 의미
세상이라는 말은 희랍어의 우주(comos)에서 온 말로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구약성서는 “하늘과 땅”의 동의어로 사용되는데 이것은 넓은 의미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곳이라는 공간적 의미를 나타낸다. 좁은 의미로는 물리적 세계, 즉 땅을 의미한다. 또한 단어의 의미를 좀더 좁혀보면 인류라는 의미에 이르게 되고 세상이라는 말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물리적 또는 물질적 세계가 아니라 세상의 영을 가리키며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이기셨고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권세로부터 지금 해방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영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2)세상 안에 속한 교회
교회가 세상에 속하거나 세상과 관계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세상은 교회의 활동영역인 것이다. 예수는 교회가 악의 권세가 사납게 날뛰며 그 파괴적인 목적을 수행해가고 있는 세상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끊임없이 적의 존재와 접촉하고 관계 맺고 영향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므로 항상 악을 묵인하거나 그 세력과 결탁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두 번째 방법은 첫 번째와 상당히 다른 것으로서 교회는 세상과 (창조 질서) 구속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교회와 피조물이 모두 구속을 받았다는 성서적인 개념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 경우에 있어서 세상에 있어서 교회의 관계는 우주적 구속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상호적인 관계
교회는 세상(창조 질서)안에 있기에 상호적 관계의 형태로 세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교회는 세계적인 교회이건, 지역교회건 간에 자연의 피조물과 사회 전반과 부인할 수 없는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가 특정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든지, 긍정적이든지, 부정적이든지 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이다. 교회는 세속화된 사회활동으로도, 무관심으로도 부름받지 않았으며 교회의 메시지는 새창조의 메시지, 즉 우주적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시작이 일어났다는 메시지이어야 한다.
무의식적인 커뮤니케이션
세상 안에 있는 교회의 존재는 무의식적 커뮤니케이션을 수립한다. 교회가 세상안에 있는 그 존재를 통해서 세상과 소통한다고 본다. 가끔 교회는 의식적인 노력없이도 사회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며 사회 경제학적 영향을 미치곤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에 대한 교회의 선교사명을 인정하고 그 존재를 드러내는 일에 능동적으로 종사한다면 사회 구조에 대한 긍정적인 영향력은 비례적으로 증가하게 될 것이다.
3)교회는 세상의 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신약 성서에 의하면 교회는 세상에 대항하고 악의 세력 대항하는 능동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부르심을 입었다. 즉 악한 세력과 탐욕과 미움과 폭력과 육욕과 부도덕과 살인의 세상은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신 세상이다. 이렇기에 교회는 세상 것이 아니다.
전도
교회는 거대한 사명(commission)을 완수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행1:8절 말씀대로 또한 마28:19절 말씀대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삼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따라서 교회의 책임은 화해의 말씀을 전파하고 악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죄와의 관계를 끊고 교회안에서 예수를 따르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이 사명은 늘 복음을 전파하는 최우선의 방법이다.
예언적인 자세
교회가 실제로 세상권세들에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파하려면 예언자적 자세의 접근방법이 필요하다. 예언자의 소리는 사회속에 침투해 있는 악의 세력과 인간의 제도 안에 표현되는 악의 세력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 소리만이 아니라 생활방법으로 나타난다. 교회는 세상의 것과 뚜렷이 대조되는 생활 방법에 모범을 둔 인간관계의 새로운 구조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유기체인 것이다. 교회의 힘은 봉사의 힘이 지배하는 힘이 아니다.
교회 문답법
교회는 교리문답의 교육을 통해서 도덕을 가르쳐 세상을 대적한다. 곧 “육체의 일”이라고 부르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내미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다”(갈 5:19-21) 열거하고 이러한 것들이 교회가 대적해야 할 것들의 예이다.
4)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는 세상을 이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권세는 인간과 창조질서를 분열시키는 힘을 파괴했다. 곧 자연 안에 있는 죄의 결과와 인간을 지배하는 죄의 권세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뿐만 아니라 전체 피조물까지 사망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 또한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지금 행사하도록 부르심을 입은 것이다.
설교
그리스도의 승리를 전파하는 가장 우선적이고 분명한 수단은 설교를 통하는 것이다. 설교는 교시(amouncement)와 선포이다. 교회는 세상에 알릴 기쁜 소식, 즉 인간과 창조 질서가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있다.
성령의 능력
악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전파하는 두 번째 방법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악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다. 곧 죄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는 성찬에서 선포되고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서 체험되었다.
결 론
이 장의 요점은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전달자로서 협동적 교회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특히 개신교도들 가운데서 우리는 흔히 1대 1의 대인 커뮤니케이션이나 전기 매체를 통한 대중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사회 안에 있는 한 집단의 존재만으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시정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경향은 연합된 단체가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전체적인 영향력을 경시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일방적인 견해는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기보다, 개인들의 집합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좀더 연합된 의미로서의 교회로 돌아감으로써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신학은 새로운 차원을 얻고 그 깊이를 더하게 될 것이다.
12. 그리스도교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13개 성서 원리
효과적 커뮤니케이션의 소명
1. 교회의 과제는 현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달하는 것이다.
2.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문제는 그리스도와 세상의 문화 사이에 교량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3. 그리스도교적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는 신앙을 일깨우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성서적 기초
4. 커뮤니케이션의 궁극적인 준거점은 삼위일체에 있다.
5. 세상 안의 커뮤니케이션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6. 하나님은 계시를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신다.
7.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인간은 소통하는 능력을 포함한 모든 측면에서 하 나님의 형상을 반영해야 하는 존재이다.
8. 인간의 타락은 인간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 철저하게 악영향을 미친 것이다.
9. 그리스도는 인간의 새로운 형상이다. 제2 아담으로서 그는 옛 피조물을 재창조하심으로써 만물을 새롭게 하셨다.
10.교회는 새로운 질서의 장이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고 붕괴되었던 커뮤니케이션이 잠재적으 로 회복되는 곳이 바로 여기 교회인 것이다.
교회와 현대의 커뮤니케이션
11.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이 회복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대담한 착상과 시각적 영상의 시대에는 이성적인 설교만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12.오늘날에는 양육공동체로서 교회의 의미가 회복될 필요가 있다.
13.교회는 교회 외부인 세상에 관해서 세 가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즉 교회는 세상의 일부이면서 세 상에 대적하고 있으며 또한 세상을 이기는 자의 입장에 서 있다.
결 론
이 책의 주목적은 커뮤니케이션 신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취급하고 있는 문제는 우리가 사고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행동하는(do) 어떤 것이라는 사실이다. 커뮤니케이션 신학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행동(action)이다. 그것은 행동하시는 하나님, 즉 자기 자신을 알리시는 하나님, 인간사에 말려드는 모험을 불사하시는 하나님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기에 커뮤니케이션은 신 중심적인 기초에서 보아야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말씀하고 계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과 그의 메시지의 운반자들이다.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 효과적인 하나님의 음성이 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Webber, Robert E., God Still Speaks, 정장복 역, 그리스도교 커뮤니케이션,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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