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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교회 성령운동의 시작과 바른 성령론 이해

하마사 2006. 10. 13. 11:53
 

제목: 오순절교회 성령운동의 시작과 바른 성령론 이해


  

1. 로스엔젤레스에 임한 성령의 불길

1906년 4월 9일,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노스 보니브래 애비뉴(North Bonnie Brae Avenue) 214번지 목조 단층집에서 작은 무리를 지어 기도하고 있던 비참한 직업의 흑인들에게 하늘로부터 성령이 임하였다. 그들의 인도자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스스로 독학을 한 순회 설교가 윌리엄 조셉 시모어(William Joseph Seymour)였다.

그는 노예생활을 했던 부모 밑에서 1870년 태어났다. 그는 당시 미국 남부 지역에서 큰 호응을 받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신다는 ‘성결’에 대한 가르침을 강조하였다. 어린 시절의 그는 미국인들에게 새 예루살렘의 전망을 고취시킬 위대한 설교가가 될 만한 자질을 보이지 못했지만 무슨 일에든 지칠 줄 모르는 왕성한 의욕과 진취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외모는 키가 작고 땅딸막한 모습이었으며 어린시절 천연두에 걸려 한 쪽 눈을 잃었다.

그는 처음에 이단적으로 성경을 가르친다는 이유 때문에 격분한 어느 목사로부터 교회에서 쫓겨나 다른 교회로의 접근마저 금지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와 그의 작은 무리는 부엌과 같은 음습한 장소에서 끊임없이 만났으며, 자신들이 믿는 기독교가 공허한 성례와 따분한 교리, 강퍅한 인종 차별의 죄악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하나님께 갱신, 정화시켜 주실 것을 간구했다.

마침내 성령의 불길이 임했을 때, 감격의 외침과 기쁨의 춤결이 주변 이웃들에게 퍼져 나갔다. 그들은 1906년 4월 14일부터 애주사 스트리트 312번지 2층 목조건물(당시 마구간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임대하여 매일 집회를 갖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시작된 성령의 불길은 온 세계로 번져 나가 수억명을 그 열기로 사로잡게 되었다. 애주사 스트리트 부흥회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었는데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은 당시 백인주도의 미국사회에 알맞은 피부색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잘못된 인생 행로로 들어선 사람들이었다. 또한 부흥회에 참석한 백인들은 주로 문맹이거나 실업자 등 바닥인생들이었다. 성령의 불길이 내리고 그 불씨가 미국 전역과 바다 건너 해외로 번져 나갈 때조차 그들에 대한 냉소는 끊이지 않았다.

성령운동이 일어난 로스앤젤레스는 언제나 색다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각지에서 모여들었는데 도시의 창건자인 카톨릭 신부 후앙 크레스피에 의해 본래 천상의 아름다운 주권자에게 바쳐졌던 도시(‘천사들을 다스리는 여왕의 도시’라는 뜻)가 역사상 유례없는 탐욕과 소비와 대단한 구경거리로 절정을 이룬 도시가 되었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 오늘날 종교와 세속문화가 뒤엉킨 현상을 잘 예증하는 성령운동이 등장했다. 로스앤젤레스는 시모어 같은 사람의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것은 산업성장은 제자리  걸음하고 있었고 일자리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다음해 1907년에 접어들자 엄청난 경제 공황이 몰아닥쳤다. 또한 종교적인 의미에서 좌절과 환멸로 가득한 중남부 출신 이주자들이 넘치는 로스앤젤레스는 부흥사들, 경건주의자들에 의해 불길을 당길 준비가 되어 있는 곳이었으며 그 불길을 당긴 사람이 다름아닌 조셉 윌리엄 시모어였다.

그들 예배의 외부적 형태는 나사렛 교파 등의 예배와 별 차이가 없었다. 흑인 참석자들에게 그들의 예배는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그 예배는 찬양과 성경봉독, 즉흥적인 설교와 신앙권고 그리고 감격의 기쁨에 넘치는 외침과 눈물과 흐느낌으로 점철되는 기도로 구성되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집회를 인쇄매체를 통해 알리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지 못했다. 예배순서지도 인쇄하지 않았으며, 집회를 알리는 전단이나 포스터도 만들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교회의 벽이나 문 위에 집회에 대한 어떤 글귀나 그림을 부착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집회의 참석자들이 세속적 선전이나 광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에 따라 온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집회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신들의 의견을 말하기도 했으며, 특별히 성령의 임재를 느낀 사람 누구에게나 중앙의 강대상이 허용되었다. 헌금접시나 바구니를 돌리는 일은 없었으며 다만 출입구 옆에 교회 임대비용을 위해 사람들의 기부를 기다리는 작은 바구니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애주사 스트리트 부흥회로 몰려들게 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새로운 희망에 갈급해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지역의 미국인들처럼 절망과 실의에 빠진 빈곤한 대다수 로스앤젤레스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견뎌 나갈 힘을 제공하는 새로운 종말론적 희망이 필요했다. 시모어는 바로 그런 희망 중 하나를 그들에게 제공했다. 그는 일반 대중의 전망과는 전혀 다른 인류가 오래 꿈꾸어 오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하나님이 모든 민족과 인종의 사람들을 하나로 불러모으시고 그를 찬양케 할 것이며, 인종차별의 죄악에 빠진 미국을 구원키 위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시리라는 것이었다.

애주사 부흥집회로 사람들을 이끈 또 다른 동기가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지가 본의 아니게 그 집회를 광고해 주었다. 그 신문사 기자가 부흥회에 대해 회의를 품고 그곳을 방문한 후 다음날 신문에 “그 집회는 괴상하게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를 질러대는 아주 광적인 장면을 연출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외에도 다른 신문 <로스앤젤레스 레코드>지, <로스앤젤레스 데일리 타임스>지도 비웃거나 협박하는 논조로 애주사 부흥집회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가져와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매료되고 열광하였다.

자연현상도 애주사 부흥집회의 성장에 한몫 했다. 애주사 부흥집회가 시작된 지 4일 후인 1906년 4월 18일 엄청난 불길을 동반한 지진이 샌프란시스코를 거의 완벽하게 파괴했다. 그 지진은 미국이 경험한 최대의 자연재해였으며 그것을 통해 사람들은 종말을 상상할 수 있었다. 당시의 시대상황에 비추어 볼 때 애주사 부흥집회는 참석자들에게 마지막 때가 임박했으며 하나님의 성령이 인도할 장대한 최후의 드라마에서 그들이 주역을 담당하리라는 것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예언했던 형태의 최후 심판의 날이 오지 않자 외부 기성교회들로부터 격렬한 비난이 쏟아졌으며 심지어 시모어의 오랜 동료들에게도 반대의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같은 반발의 움직임은 한때 시모어의 휴스턴 시절 지도자였던 찰스 파햄의 애주사 스트리트 교회 방문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시모어의 초기 지지자였던 백인 목사 윌리엄 더햄(백인목사들은 흑인에 의해 지도를 받지 않는다는 원칙에서 출발하는 ‘하나님의 성회’라는 성령운동 교파를 조직하여 미국 내에서 큰 성장) 은 스트리트 부흥집회의 신학적 근거를 전적으로 부정하며 정면으로 도전했는데 이 논쟁은 시모어에게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그와 함께 신앙 안에서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의 신랄한 비난에 직면한 시모어는 지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집회의 참석자수가 줄어들었고 조롱과 비웃음은 극심해졌다.

그는 오랜 동료들의 배신으로 인한 상처 때문에 매우 상심하고 애통해했다. 그때부터 그는 방언이 유일한 성령의 은사가 아니며 때에 따라서는 전혀 은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의 교회 신도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시모어는 이제 방언과 신유의 은사보다 흑백인종 장벽의 제거가 하나님 나라 도래의 더 확실한 징조라고 믿게 되었다. 그것은 백인신도들의 이탈로 흑인 신도들만 남게 됨으로써 다시금 인종 차별의 장벽을 확인하게 되었고 시모어 자신도 점점 방어적 자세를 취하게 된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후계자는 반드시 유색인이어야 한다는 교회 강령을 만들었으며 점차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다. 마땅히 ‘성령운동의 아버지’라 불려야 할 목사 시모어는 1922년 그의 백인 동료에게는 한사람의 조문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하직하였다. 시모어가 죽은 뒤 그의 아내 제니가 그의 전도 사역을 계속 유지하려 했으나 교인들은 모두 흩어졌고 교회건물은 세금을 제대로 내지 못해 정부에 압류되었다가 팔렸다. 그러나 애주사 스트리트 성령운동의 기념물은 그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로 세계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새로운 미래에 대한 충격적인 비전을 제시하며 오늘날 세계의 거의 5억에 달하는 사람들을 강타한 영적 운동의 태풍이었다.


2.  성령운동의 확산

1906년 이후, 수년간 성령운동의 물결은 미국 전역을 휩쓸었으며 바다 건너 사람이 거하는 세계각처마다 거센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애주사 스트리트 부흥운동 이후 수년간 각지에서 일어난 성령운동의 각종 이적과 기사에 대한 기록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1907년 10월, 헤롤드모스라는 사람은 뉴욕시에서 개최된 심슨 성경장막회라는 부흥집회에서 젊은 여자가 5-6피트 정도 공중에 떠 있는 것을 보았다. 또한 음악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어느 여인이 성령에 이끌려 오르간으로 달려나가 아름다운 곡을 연주했다는 사실이나 인도의 다른 지역에 있는 기독교 선교사가 운영하던 소녀 고아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묘사하는 그림들이 고아원 벽에 나타나는 기적 등이 일어났다.

성령운동의 급속한 확산은 어떤 새로운 이념의 전파와는 전혀 다른 현상이다. 그것은 전염성이 강한 세균의 확산과 같다. 처음에는 수천명, 다음에는 수십만명 그리고는 수천만명의 사람들이 성령의 내리침을 받았다. 성령운동이 그토록 급속히 확산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성령강림을 기다리고 간구한 때문이다. 역사학자 사무엘 모리슨에 따르면, 1890-1920년은 미국 흑인들에게 노예 해방이후 최악의 시기였다. 또한 성령운동에 적극 호응한 빈곤한 백인들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류층 사람의 대다수가 사랑과 인정이 결여된 교회에 큰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성령체험은 소수 교인들의 개별적 형태가 아니라 한 교회의 모든 성도들, 심지어 교단 내 온 교회 전체가 경험하는 집단적인 형태로도 일어났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같은 성령강림의 메시지나 설교자들을 환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기성교회들은 성령운동 교회 안에서 진행되는 일에 대해 당혹해 하거나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기성교회들은 주로 성령운동이 기독교 교회 전체의 이미지를 망쳐 놓았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운동을 반대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애주사 성령 부흥집회나 그 외의 부흥집회에서 개인적인 성령체험을 한 사람들이 각자 그들의 소속교회로 돌아가 때로는 무례한 언행으로 성령 체험을 내세우며 소동을 일으킨 때문이었다. 이처럼 성령운동 교인들은 기성 교회들로부터 미움을 샀다.

성령운동 교회 역사의 처음 10년은 외부로부터 신랄한 비난과 공격을 받은 기간이었다. 그 가운데 성령운동 교회에 대한 가장 통렬한 비난은 근본주의자들에게서 나왔다. 초창기시절에는 그들은 서로 앙숙이었다. 근본주의자들의 최대목표는 교리수호였던데 반해 성령운동 교인들의 진정한 적은 기존 종교의 냉랭함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감만 조장하는 기성교회의 설교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개인적인 하나님 경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그들은 근본주의자들보다는 당시 개신교 자유주의자들과 더 가까웠다.

또한 성령운동 교인들은 외부의 적대 세력뿐 아니라 내부의 반발 세력으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해야만 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내부의 분쟁이 더욱 심해져 갔다. 그들 분열의 결정적인 원인은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것인가 하는 논쟁이었다. 성령운동 교인들 중 어떤 이들은 전통적인 기독교 관례대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한 것처럼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최후의 심판 날에 대한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가진 문제였으므로 분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분열은 심화되어 끝이 없어 보였고, 그 분열을 막을 수 있는 해결사 또한 나타나지 않았다. 신앙교리에 대한 반발로 생긴 성령운동이 이제는 그 같은 교리논쟁에 휘말리고 그로 인해 계속적인 분열과 파벌형성을 거듭했다.

그러나 초기 성령운동이 가진 가장 경탄할 만한 사실은 끊임없는 분열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장을 거듭했다는 것이다. 논쟁과 다툼이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성령운동은 중단없이 확산되었다. 성령운동 교인들의 대립이 심해질수록 성령운동의 세력은 더 증대했다. 성령운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이 다른 종교 운동처럼 반대세력에 저항해 더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 분열 속에서도 급속히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성령운동의 물결이 닿는 곳마다 환희와 감사뿐 아니라 분노와 거부, 논쟁과 분열도 잇따랐다. 세월이 흐르면서, 성령운동 교인들은 기성 교회들로부터의 배척과 제명에 익숙해져 갔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그 같은 기성 교회들의 냉대는 더욱 견고한 성령운동의 발전과 성장을 야기했다. 성령운동에 있어 외부의 배척과 내부의 알력은 그 운동의 사멸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소생과 발전의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성령운동의 분열과 확산은 대략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급속하게 진전되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까지 그 같은 현상은 일시적으로 둔화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성령운동의 불길은 다시 거세게 타올랐으며 미국 도시의 흑인 빈민가와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의 도시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상당한 결실을 얻게 되었다.


3. 오순절 운동의 성령론의 개요

개혁교회의 성령론과 오순절교회의 성령론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오순절교회의 성령론에 의하면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을 알게 하고, 죄를 인식시키고, 하나님의 의와 심판을 알게한다. 또한 성령의 사역을 통해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다. 성령의 칭의의 사역후에 성령은 신자들을 성화시키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한다. 또한 성령은 신자들을 보호하고 위로하며 성령의 사역을 맺게하고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승하도록 인도한다. 그러나 오순절교회의 성령론의 독특한 특징은 성령세례론에 있다. 오순절교회에 의하면 성령세례의 목적은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영적인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 교회에서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 온다. 일반적으로 성령세례를 받았을 때 나타나는 최초의 증거는 다른 증거들도 있을 수 있지만 방언이다. 성령세례를 받기위한 조건으로서는 회개, 구원에 대한 확신, 물세례, 완전한 복종, 사모하는 마음, 의심없는 믿음 등이다. 방언 이외의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신유의 교리이다. 오순절교회의 성령론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신유는 깊이 연결되어 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구약의 이사야 53장의 유명한 구속의 장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뿐아니라 우리의 질병까지 짊어지셨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순절교회의 성령론에서 육체적질병과 가난과 고통이 그리스도의 구속행위를 통해 해결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질병과 가난과 고통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따라서 성령의 능력은 우리를 모든 질병과 가난과 고통에서 해방시킨다.


4. 오순절 운동의 성령론의 특징

뉴비긴 감독은 이 운동을 교회의 제 3형태 곧 제3의 교회라고 했고, 반 듀젠은 이 운동을 안식교와 나사렛파, 여호와의 증인 등과 합해서 제3의 세력이라 불렀다. 뉴비긴 감독에 의하면 개신교가 믿음으로 복음을 듣는 것에 기초한 교회리고 카톨릭이 역사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교회에 예전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그 핵심인 교회라면, 오순절 운동은 성령을 받아들이고 성령안에 거하는 것이 특징인 제3의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 운동을 기독교의 제3의 형태로 지칭하는 것은 상당히 과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순절 운동은 개신교의 보수적 복음주의 운동과 그들이 주장하는 교의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오순절 운동은 성령론을 제외하고는 그 교의적 내용에 있어서 개신교 보수적 복음주의와 거의 일치한다. 사실 오순절 운동은 개신교 보수적 부흥운동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하나의 부흥운동적인 성령운동이다.

오순절 운동의 그 독특한 특징은 성령론에 있다. 특히 그들이 강조하는 성령세례론이 오순절운동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그런데 이 성령세례론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오순절운동만이 갖고있는 독특한 교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오순절운동과 개신교 부흥운동을 구별짓는 핵심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방언이라는 독특한 현상과 연결되어 있다. 오순절운동은 ‘방언하는 무리들’이라고 규정될 정도로, 방언이 이 운동의 독특한 특징이다. 오순절운동은 방언을 성령세례의 첫 증거로 규정하는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오순절운동의 성령론은 대체로 두 단계 이론으로 요약할 수 있다. 중생의 단계와 성령세례의 단계를 의미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두 단계의 체험을 하게 되는데 그 첫 단계는 중생이라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해서 거듭나게 되는 단계이고, 둘째 단계는 방언을 하게되는 성령세례의 단계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아직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봉사와 사역을 감당하기에는 적절치 못하다. 교회의 일꾼이 되려면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성령의 세례는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성령의 충만이 아니고 갑자기 초자연적으로 우리에게 임하는 초월적인 체험을 의미한다.


5. 오순절교회의 성령론의 장점

 1) 오순절 주의자들이 전통적교회의 영적인 무관심을 공격하고, 이점에 큰 도전을 준 것은 훌륭한 점이다. 성령론이 신학의 매우 중요한 영역이라는 점을 오순절주의자들이 강조한 것은 잘한 것이다. 오늘의 세계 여러교회에서 성령론이 발전하고 성령론의 중요성을 교회들이 인식한 것은 상당부분 오순절운동에 영향받은바 크다. 오순절운동이 전통적 교회가 성령의 폭발적인 능력을 재발견하도록 도와준 것이다.

 2)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으로 채워진 삶을 원한다. 성령으로 채워진 삶에 대한 욕구는 오순절성령운도의 상징적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오순절교회에는 생동감이 넘친다. 이 넘치는 생동감은 상당부분 성령으로 채워진 삶에 대한 오순절교회의 강조와 관련이 있다. 전통적인 개혁교회의 성령론은 칭의론과 성화론을 주로 성령의 활동과 관련해서 강조했을 뿐 성령으로 채워진 삶에 대한 충분한 강조는 없었다. 그러나 교회는 성령의 능력과 은사로 채워져야 한다. 오순절교회의 성령론으로 채워지는 삶에 대한 강조는 오순절교회의 성령론의 장점이다.

 3) 복음의 세상성에 대한 강조는 오순절성령운동의 큰 장점이다. 오순절교회가 가난하고 병든자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복음의 세상성의 강조와 관련이 있다. 오순절주의는 세상속에서의 곤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이의 연관성를 발견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목사 조용기에 의하면 예수 십자가의 피는 도말 할뿐만 아니라 병과 가난의 도말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와 가난과 질병을 위해 죽으셨다. 오순절 주의에 의하면 세상속의 곤경과 그리스도의 구속사이의 기독론적 연관성이 있고 이것이 세상구원을 향한 오순절교회의 성령론의 확고한 기반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구원이 육체속에 나타난다는 것을 강조했다. 질병과 가난은 성령의 능력이 구체화되는 영역이다. 성령은 질병과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고 육체를 구원하고, 세상속에서 버려진 자들에게 희망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이 20세기에 오순절교회의 성장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4) 방언이 성령의 은사이고 오늘의 교회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가르친 점도 바른 가르침이다. 워필드나 후크마를 비롯한 수많은 개혁교회의 신학자들은 방언은 사도시대를 끝으로 사라졌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잘못이고 방언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도처의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다. 방언을 심리적인 혼란상태로 보는 것도 잘못이다. 방언을 하는 대다수의 성도들의 일상생활은 건강하다. 그들을 심리적인 비정상상태로 평가하는 것은 방언의 은사에 대한 부족한 인식에 기인한 것이다. 20세기의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 배후에는 방언도 상당한 기능을 했다.

 5) 기적과 신유에 대한 갈망은 오순절주의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믿고 있다. 그들은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고 있다.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18세기와 19세기에는 초자연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흐름이 강하게 있었다. 19세기 개혁주의의 신학도 이 영향속에서 매우 이성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20세기의 오순절주의의 등장과 발전은 기독교신앙의 초자연적 요소의 재발견이었다. 20세기의 오순절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신앙을 설교했다. 적극적 사고와 기적에 대한 설교가 좌절과 절망의 한 가운데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희망을 갖도로 만들었다. 한국의 대형교회의 다수의 지도자들도 적극적사고와 기적에 대한 믿음을 설교했다. 이 설교가 한국에서 대형교회를 만든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이다.


6. 오순절교회의 성령론의 문제점

 1) 오순절교회의 성령론의 첫째 문제점은 “소위 성령의 세례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는 다른, 그 이후에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 보는 오순절주의의 오해”에 있다. 이 오해는 행2:1-4, 8:14-17 및 19:2-7에 대한 오순절주의자들의 그릇된 주석 때문이다. 누가는 중생과 구별되는 둘째번 성령의 세례를 전혀 모르고 있다. 누가의 사도행전을 기록한 의도는 이방인까지 포함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있었다. 이 말의 뜻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에 이른다는 말이다. 누가의 이 의도는 사도행전 첫머리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성령의 세례는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를 주라 고배할 수 없다(고전12:3). 중생과 성령세례와의 일치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바울과 누가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성령의 세례는 중생의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성령의 세례를 중생과 분리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2) 방언에 대한 과대평가는 오순절교회의 성령론의 또 하나의 오류이다. 방언이 성령의 은사임은 확실하다. 바울 역시 방언이 성령의 은사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바울에 의하면 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지고한 은사도, 중심적 은사도, 첫째가는 은사도 아니다. 바울은 방언의 은사보다는 말씀의 은사를 반복해서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고전14:6).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해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9)”. 바울에 의하면 이성적인 말씀의 은사가 불분명한 방언의 은사보다 귀중하다. 이와같은 바울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가르치고 말씀을 강조한 개혁파 신학이 방언에 강조점을 둔 오순절주의 신학보다 더 성령의 사역에 깊이 밀접되어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오순절교회의 성령론이 방언을 높이 평가하고 성령받은 높은 수준의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못한 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표증으로까지 이해한 것은 큰 잘못이다. 방언은 단지 하나의 성령의 은사일뿐 없어서는 안될 중심적 높은 은사는 아니다. 미하일 밸커에 의하면 이와같은 오순절교회의 오해는 “하나님의 오순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특이한 감정과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오순절주의자들의 오해 때문에 오순절교회는 불가피하게 신비한 은사와 경험이 교회의 삶과 경건의 중심에 놓이게 되는 신비주의적 교회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3) 오순절운동 속에서는 소위 기적이 일어났다는 수많은 주장들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신뢰성에 관한 것이다. 오순절운동 속에서는 이따금씩 죽은자가 부활했다는 주장도 들을 수 있다. 한국에서도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죽은 소녀가 부활했다는 소녀부활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오순절교회에서는 수많은 기적이 보고되고 있지만 매우 의심스러운 것들이 많다. 20세기 한국에서의 오순절교회의 급격한 성장은 신유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신유와 기적에 대한 소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순절교회를 찾았다. 그러나 언론매체의 기자들이 신유와 기적의 사실성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이를 밝혔는데 그 결과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최근에 한국의 오순절교회의 성장은 멈추었다. 한국교회에 대한 불신이 한국인의 가슴속에 깊어지고 있다. 이 불신 때문에 전체 한국교회의 성장도 멈추어져 있다.

4) 오순절교회의 성령론은 성령의 능력에 주로 관심을 갖고있는 성령론이다. 능력전도나 능력목회 같은 표현은 오순절운동을 표현하는 상징적 표현이다. 그런데 오순절교회의 성령론은 성령의 능력에 대한 강조는 강하지만 성령의 최고의 은사인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 수많은 오순절주의자들은 사랑을 성령의 은사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그들의 성령론이 특이하고 신비한 어떤 것만을 은사로 보는 편향된 경향 때문이다. 바울에 의하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모두 성령의 은사인데 그 중에 제일가는 은사는 사랑이다. 사랑은 율법의 핵심적 정신이고 예언자들의 가르침의 정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의 기둥도 사랑이다. 사랑은 이웃에 대한 책임과 역사에0 대한 책임을 내포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 역시 사랑속에서 나타난다. 벨커에 의하면 사랑이 하나님의 능력이 현존하는 공적영역이다. 사랑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은 십자가 사랑의 무능속에 존재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사랑이 성령께서 걸어가는 길이고 성령의 가장 귀한 은사라는 점을 더 깊이 배워야 한다.

5) 오순절교회의 성령론은 방언, 신유, 예언과 같은 은사에 주로 집중하는 성령론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하나의 중요한 비판과 질문이 제기된다. 이 비판과 질문의 핵심은 오순절교회의 성령론의 역사성의 결여이다. 몰트만은 그의 1977년 출간된 최근의 성령론인 「생명의 샘」에서 다음과 같이 오순적교회의 성령론을 비판했다. “정치나 평화운동이나 환경운동같은 오늘의 일상의 삶 어디에 오순절주의자들이 존재하고 있는가? 왜 그들은 핵 미사일에 대항해서 싸우는 우리들 곁에 존재하고 있지 않는가?” 오순절운동은 구체적 역사적현실에서 개인적 종교적 희망의 세계로 도피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성령운동의 구체적 역사적 현실세계의 곤경을 해방하는 하나님의 해방운동과 관련을 맺지 못하면 그것은 사적 종교적 영역에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신앙은 비정치적, 사회적 종교로 변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성령의 활동과의 관계가 매우 약해지게 된다. 정치나 평화운동이나 환경운동 속에서 예수의 제자도를 실천하는 오순절주의자들은 보기가 매우 어렵다.


7. 성령론의 바른길

바른 성령론은 통전적 성령론이다. 여기에 통전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영혼을 육체로부터 분리시키지 않고, 개인을 사회로부터, 인간을 전세계와 분리시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론은 영적인 영역에만 제한되어서는 안되고 사회와 분리된 개인적 영역에만 제한되어서도 안된다. 성령은 영혼의 구원만이 아닌 인간전체의 구원을,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전체사회와 피조세계를 구원하는 영이기 때문이다. 통전적 성령론의 핵심은 성령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영이라는데 있다. 성령은 개인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전체 피조세계를 구원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한다. 바른 성령론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성령의 활동에 초점을 맞춘 성령론이다. 하나님 나라 건설에 초점을 두고 있는 성령론은 20세기 후반 몰트만에 의해 본격화 되었고, 벨커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1) 성령과 개인의 문제

성령은 개인을 구원하는 영이다. 그런데 개인구원 역시 통전적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개인의 영적 중생이나 성화에 초점을 두고 있는 전통적 개혁교회의 성령론의 폭은 넓혀져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구원하기 때문이다. 오순절교회의 성령론의 신유의 교리는 성령의 구원사역의 육체적 측면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개혁교회의 성령론에 비해 장점이 있다. 성령의 해방하는 능력은 육체의 징병의 영역속으로 파고든다. 이와같은 성령의 사역은 병든자들을 고친 예수의 사역과 깊이 연계되어 있다. 부활은 성령을 통한 육체적 구원을 표현하는 정점이다. 성령은 그의 능력으로 죽은 자들을 살려낼 것이다. 신약성경이 영혼의 불멸을 가르치고 있지 않고 육체의 부활을 가르치고 있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물트만에 의하면 병든자를 고치는 것은 미래에 일어날 부활의 선취적 사건이다. 질병은 죽음의 세력의 도구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음의 세력의 도구들이 파괴되는 장소에서 동터오른다. 성령은 심리적, 도덕적, 영적 질병에서뿐만 아니라 육체적 질병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건강한 인격을 만드는 영이다. 성령은 가난과 질병과 소외와 불안과 고통과 죽음에서부터 인간을 건지고 풍요로운 생명과 영원한 인간에게 선사하는 영이다.


2) 성령과 하나님의 나라

 ①성령의 정의

눅4:18-19은 성령론을 위해 매우 중요한 본문이다. 이 본문은 성령의 사회적 차원을 우리에게 밝히 가르쳐주고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본문은 사61:1-2의 인용이다. 이 본문에서 주의 영은 눌린 자를 해방시키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영이다. 특히 본문에서 주의 은혜의 해가 희년을 의미한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희년은 종살이하던 자들이 해방되고, 토지를 상실했던 사람들이 다시 옛 조상들의 땅을 되찾는 사회적 해방의 해이다. 그러므로 이 해는 땅을 잃은 사랍들, 종살이하던 사람들과 같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문자 그대로 기쁨의 해이다. 여기에서 주의 영과 사회적, 경제적 해방과의 깊은 연관관계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령과 정의와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본문은 마12:18-21이다. 이 본문은 사42:1-4의 인용이다. 이 본문에서 성령이 임한 주의 종이 정의를 선포하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이 정의가 이방인들에게 희망임을 선언하고 있다. 또 하나의 성령과 정의와의 깊은 관계를 가르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본문은 사11:1-5이다. 여호와의 영은 땅에 정의를 수립하고 악을 없애고 가난한 자들에게 정당함을 돌려주는 영이다. 이 여호와의 영의 활동으로 마침내 세상은 평화와 정의로 가득차게 된다. 성령은 사회적 정의와 해방의 근거이고 원천이다. 성령은 세상 속에서 압제의 사슬을 끊고 불의를 몰아내고 공평과 정의로 빛나는 세계를 만들고자 한다. 개혁교회의 성령론과 오순절교회 성령론에 공히 정의에 관한 항목이 없다는 사실은 이 두 성령론 모두의 문제점이다. 몰트만가 벨커에 의하면 정의를 위한 성령의 해방하는 사역은 성령론이 핵심적 항목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마르틴 루터 킹목사와 로메로대주교 같은 사람들은 성령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교회는 정의를 위한 성령의 해방하는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 한국의 카톨릭교회의 최근의 성장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독재정권시절의 정의구현 사제단을 비롯한 카톨릭교회의 정의를 위한 노력과 장애인이나 가난한 자들을 위한 카톨릭교회를 신뢰하고 있다. 카톨릭교회가 신뢰를 얻은 것은 그 교회가 사랑과 정의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개신교회가 샤머니즘의 신앙과 이해하기 매우 힘드는 병 고치는 일들과 직통계시와 종말론과 이웃사랑의 결여와 분파적 싸움으로 국민적 신뢰를 상실하고 있는 동안 카톨릭교회는 사랑과 정의의 활동으로 국민적 신뢰를 얻은 것이다. 성령의 일을 바르게 행하는 바른 교회가 성장하고 생명력있는 교회가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②성령과 평화

성령의 열매는 평화이다. 평화를 위해 이라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얼컬음을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성령은 정의뿐만 아니라 땅위의 평화를 수립한다. 증오심과 전쟁과 살인과 죽음의 역사를 땅위에 몰고오는 마귀의 활동에 반하여, 성령은 생명과 사랑과 평화를 땅위에 수립하는 영이다. 성령의 사역을 오직 영적인 영역에서만 인식한다면, 정치적, 군사적 영역에서의 성령의 활동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고, 교회의 정치적, 군사적 책임의 실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세상에 평화를 수립하는 것은 성령의 활동에 매우 중요한 일이다. 성령의 활동을 내적 영적 세계로 제한시키면 안된다.

오순절교회의 성령론이 질병을 죽음의 세력으로 보고 질병과 죽음에서의 해방과 성령의 사역을 연결시킨 것은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 성령론의 핵심적인 문제점은 성령의 사역의 사회적 정치적 연관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 점이다. 오순절교회의 성령론은 성령의 사역을 개인적 차원속에서만 주로 이해했지 하나님의 나라라는 넓은 시각에서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영역으로 넓게 인식하지 못했다. 성령은 정치, 경제, 군사, 사회, 질병의 모든 영역에서 죽음의 구조를 파괴하고 평화와 생명의 질서를 만드는 영이다.

③창조의 영인 성령

창조의 영인 성령에 대해서는 신약성경보다 구약성경이 더 많이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창1:2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위에 운행하셨다.” 시33:6에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시104:30에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욥33:4에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고 언급되고 있다. 이 구절들을 통해서 개혁교회의 성령론은 성령을 세계를 보존하는 영으로 인식했다. 개혁교회의 성령론이 성령과 창조세계와의 관계성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 성령론의 장점이다. 칼빈을 비롯해서 아브라함 카이퍼같은 신학자들은 성령론이 우주적 측면을 인식했던 훌륭한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개혁주의 전통이 창조세계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일반 계시 영역에서 또한 창조세계의 보존이라는 관점에서만 인식한 것은 미흡한 이해였다. 이 경우 창조세계 성령의 활동은 성령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배경을 형성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1985년에 출간된 몰트만의 「창조안에 계신된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이해하는 전환점이 된 책이었다. 이 책에서 몰트만은 우주적 성령론을 발전시키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창조세계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배경만이 아니다. 오히려 전체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세계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인간의 구원역사는 전체 창조세계의 구원이 역사의 한 부분이다. 성령은 전체 창조세계를 죽음의 힘에서부터 해방시키기 원한다. 바울에 의하면 피조물이 허무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와 같은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원하고 있다. 전체 창조세계는 성령의 해방의 사역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성령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구원해서 하나님의 평화와 영광이 빛나는 세계를 만드는 영이다.

 ④성령과 사랑과 생명의 세계

바울에 의하면 성령의 제일가는 은사는 사랑이다. 갈5:22에 의하면 성령의 열매 역시 사랑이다.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출발점이다. 가난하고 곤경속에 있는 자에 대한 긍휼은 사랑의 은사이다. 따라서 성령은 가난하고 곤경속에 있는 자에 대한 디아코니아를 일으킨다. 디아코니아는 성령에 의해 일으켜지는 성령의 역사로 교회의 본질적 과제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성령의 활동에 바르게 동참하기를 원한다면 디아코니아를 개인적인 동정이나 사적인 자비의 차원으로 제한시켜서는 안된다. 바른 디아코니아를 위해서는 정의와 자비의 법이 필요하다. 정의와 자비의 법을 제정하는 것은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들에 대한 구조적 보호없이는 결국 이들은 비인간화 될 수밖에 없다. 성령은 정의와 자비의 근원이다. 성령의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 대해 민감한 교회이고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것을 막는 교회이다. 성령은 정의와 자비의 세계를 세울 뿐만아니라 생명이 세계를 건설해나가는 영이다. 생명에 대한 사랑은 성령의 사역의 핵이다. 성령은 죽음의 모든 도구를 파괴시킨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의학의 발전은 성령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 암을 정복하고 에이즈를 정복하기 위한 의학자들의 연구와 고투는 성령의 사역과 관련이 있다. 병을 고치는 성령의 능력은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도 나타나지만 의학적인 발전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의사들은 생명의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성령의 중요한 도구들이고 바로 여기에 의사들의 하나님나라 앞에서의 소명이 있다. 생명의 성령은 땅위에 생명의 문화를 확장시킨다. 냉소주의 그리고 청소년들을 절망과 죽음으로 몰고가는 문학과 음악은 생명의 문화의 적이다. 청년들을 무의미한 혁명에 생명을 희생시키도록 만드는 이데올로기 역시 생명의 문화의 적이다. 생명의 문화는 영롱하고 찬란하고 기쁨이 넘친다. 생명의 문화는 영롱하고 찬란하고 의미있는 창조세계에 대한 감각과 정서와 관련이 있다. 생명의 문화는 삶의 기쁨을 풍요롭게 하는 문화이다.

⑤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및 하나님에 대한 지식

성령은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는 하나님게 대한 지식의 영이다. 사11:1-5에 따르면 성령은 정의를 세우고 악을 없애고 가난한 자를 돕고 하나님의 의가 가득찬 세계를 만든다. 하나님의 의의 세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깊이 서로 연계되어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의와 평화와 생명의 세계를 만든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여된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와는 아직 상당한 거리가 있다. 신약성경은 성령의 활동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놀랄만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진리의 영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실 것이라”(요15:26).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시작되는 삶이다. 성령의 활동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하는 사역이 깊이 뿌리박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속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하며 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참 하나님을 알게하는 영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자 그리스도의 영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알게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알게하는 공동체를 만들고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영이다. 성령의 사역의 종국의 목표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하는데 있다.

성령의 선교는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위한 선교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들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의 생명을 위한 선교이다. 개혁교회의 전통적 성령론과 오순절교회의 성령론은 이 성령의 활동을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너무 종교적이고 영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제한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우리는 종교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교회에서 세상으로, 자신에 대한 개인주의적 걱정에서 전체에 대한 희망으로 길을 선회해야 할 것이다.”성령의 선교는 죽음과 죽음을 일으키는 모든 도구와 세력들에 대항하는 선교이다. 이제 우리는 개인적이고 영적이고 종교적인 구원에 대한 희망에서 전체 세상과 우주에 대한 희망을,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발전시켜야 한다.




참고도서

김명용. 『열린신학 바른교회론』. 서울:장로회신학대학교, 1997.

김명용. “개혁교회의 성령론과 오순절교회의 성령론,” 『장신논단』, 1999.

H. Cox, 유지황 역, 『영성, 음악, 여성』, 서울:동연, 1998.

J. Moltmann, 이신건 역, 『생명의 샘』,  서울:대한기독교서회, 2000.

M. Welker, 김균진 역, 『하나님의 영』,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