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6:1~13
제목: 예수님의 밥상공동체
찬송: 220장
목표: 행복한 예수님의 밥상공동체를 이루게 한다.
지난주에는 여전도회주최 인도 고아원 및 선교센터 후원을 위한 바자회가 있었습니다. 식사시간 때 바자회장을 가득 메운 모습은 옛날 시골동네 잔칫집을 연상시켰습니다. 이번 주 월요일에 있었던 전교인운동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넓은 운동장에 옹기종기 모여 교구별로 식사하는 모습 역시 예수님의 아름다운 밥상공동체를 보여주었습니다.
사람은 함께 식사하며 정이 들고 공동체성을 느끼게 됩니다. 친밀한 사이에는 밥상을 대하는 빈도가 많아집니다. 식구란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만큼 밥상을 함께 대하는 횟수가 많으니 친밀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함께 식사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며 공동체성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사역이 너무 바빠 식사할 겨를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막 6:31,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본문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은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될 정도로 예수님의 사역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말합니다. 넓은 들판에 오천 명이 둘러앉아 함께 식사하는 장면을 연상해보면 그야말로 장관입니다. 교회에서 어르신들을 모시고 효도관광을 가서 수백 명이 함께 식사하는 장면을 보는 것도 대단합니다. 한데, 여자들과 어린아이들까지 포함하여 만 명이 넘는 인원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식사를 한다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거대한 밥상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共同體)란 한자어는 ‘함께’ 공(共)과 ‘한 가지’ 동(同)과 ‘몸’ 체(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함께 한 몸을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밥상공동체란 밥상을 함께 하며 한 몸을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밥상을 차려주셨습니다. 주님은 그 밥상에서 직접 우리의 밥이 되시고 음료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면 주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밥상공동체는
1. 끼워주는 밥상공동체(10절)
1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를 비롯하여 청년과 어른들도 있었습니다. 건강한 사람과 질병을 가진 사람,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는 지역과 직업이 달랐습니다. 경제적 수준, 학벌도 달랐습니다. 그야말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 식사 때가 되었지만 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무리들의 끼니를 해결할 방법을 생각하셨습니다. 빌립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먹일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빌립은 난감해하면서 이백 데나리온으로도 부족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안드레가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남자들의 수가 오천 명쯤 되었습니다.
연령구분, 지역구분, 학벌구분, 직업구분 등 사람들을 차별하여 돌려보내지 않고 모두 앉게 했습니다. 밥상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을 구별하여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함께 식사할 수 있도록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누구나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끼워주는 밥상공동체였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요즈음 결혼식장에 가면 식권을 배부합니다. 식권이 있는 사람만이 연회장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축의금을 낸 사람만이 식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나 끼워주지 않습니다.
저는 운동을 좋아하는데 특히 테니스를 좋아합니다. 처음에 테니스를 배울 때는 시합에 끼워주지 않습니다. 초보가 끼면 재미없다고 하여 구경만 했습니다. 무척 서러웠습니다. 레슨을 받고 어느 정도 실력이 되자 시합에 낄 수 있었습니다. 옆에서 구경만 하다가 시합에 끼워주니 너무 감사했습니다. 저는 그 때의 설음을 알기에 초보자들과도 함께 시합을 잘 하고 있습니다. 운동클럽에 가입할 때도 실력을 평가받고 가입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 끼는 것이 이렇게 까다롭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를 잘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였고,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이제는 멀리 있던 너희가 가까워졌다고 했습니다. 엡 2:19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하셨습니다. 혈통으로는 유대인이 아니고 이스라엘 밖의 이방인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리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조건으로도 하나님의 권속이 될 수 없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이 우리를 끼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밥상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낄 수 없는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전적인 은혜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는 예수님이 오해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사람들은 귀신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반면 예수님이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자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욕을 했습니다.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비판합니다. 먹으면 먹는다고 욕하고, 먹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고 욕을 합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사람들이 상종하지 않던 세리와 죄인들을 밥상공동체에 끼워주었다고 해서 욕을 먹었습니다. 그들과 더불어 같은 밥상에서 먹고 마신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마 11:18~19)
오늘날 학교나 군대와 같은 공동체에 왕따와 관심사병 문제가 생겨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을 왕따 시키고 사람이 아닌 그림자취급을 합니다. 어릴 때의 왕따 경험은 이후 사회생활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예화)
2013년 3월 6일자 일간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A양은 자신의 노트에 "칼로 내 손목을 긋고 싶은 맘이 굴뚝같다. 내 이야기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왕따 시키는 것 같다. 나는 그저 눈물 흘리면서 마음을 달랜다"면서 괴로워했습니다. 당시 A양은 절친한 같은 반 친구 C양에게 어려움을 토로하고 울기도 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초등학교 때 왕따 경험이 있었던 A양이 친한 친구들이 자신과 멀어진 것에 대해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느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A양은 친한 친구 C양에게 카카오톡에 "죽고 싶은 마음에 눈물이 난다"는 내용을 남기며 그동안 겪었던 어려움을 털어놓았습니다. 거실에는 "죄송해요…또다시 외톨이가 될까 봐…"라는 간단한 메모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예화 2)
2012년 2월 16일자 일간신문에 보도된 내용입니다.
충남 서산의 공장 주차장에서 30대 남자가 옛 상사에게 수렵용 엽총을 난사해 숨지게 하고 2명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범인 성모(31·무직)씨는 경찰에서 “공장에 다니던 시절 나를 괴롭힌 직원들에게 보복하려고 총을 쐈다”고 말했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성씨는 이메일로 남긴 글에 “고3 때 왕따를 당한 고통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심각한 정신병을 13년 동안 안고 있었다. 술자리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하는 게 쉽지 않다”는 등 처지를 비관한 글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고등학교 때 왕따 당한 충격이 직장생활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외톨이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학교에서 왕따되고 군대에서 관심병사가 되어 소외되는 것이 죽는 것보다 싫은 것입니다.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공동체에 끼지 못하는 고통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왕따 될 존재였습니다. 감히 어떻게 예수님의 밥상공동체에 끼어 함께 교제할 수 있는 영예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도망갔던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기다렸습니다. 숯불을 피우고 그 위에 생선과 떡을 구워 조반을 차려주셨습니다.(요 21:9~13)
3년 동안 동고동락하던 제자들이 도망쳤을 때 얼마나 상심이 크셨을까요? 제자들로부터 왕따 당하고 외톨이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왕따 시켰던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 그들을 위해 밥상을 차려주셨습니다. 그들을 예수님의 밥상공동체에 다시 끼워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밥상공동체에 낄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만약에 잘못하였다고 예수님이 끼워주지 않으시면 영원히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1:5절에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유대인 공동체에 들 수 없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들의 모임에 낄 수 있었습니다. 자격이 있어서 끼워주신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은혜로 의인이 되어 예수님의 밥상공동체에 끼어 함께 교제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외에도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을 예수님의 밥상공동체에 끼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여인과 대화하는 것 자체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해주신 것이었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간 여인이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요 4:39) 그들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역에 머물기를 청하여 이틀 동안 그들과 더불어 밥상공동체를 이루며 교제하셨습니다. 아무도 상종하지 않는 왕따공동체 사마리아 사람들을 예수님의 밥상공동체에 끼워주시고 그들의 생명을 구원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성만찬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라고 하시면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서 교제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고 하셨습니다.(요 6:53) 즉 예수님의 밥상공동체는 생명을 공급하는 생명공동체이고 영생공동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밥상공동체 일원이 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밥상공동체에 낀 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무자격자들이지만 은혜로 끼워주신 것을 믿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저와 같은 목사도 자격이 있어 예수님의 밥상공동체에 낀 것이 아닙니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자격자이지만 은혜로 예수님의 밥상공동체 일원이 되었고 직분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을 예수님의 밥상공동체의 일원으로 끼워주고 그들을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2. 나누는 밥상공동체(9절~11절)
9절~11절,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안드레는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한 아이가 내놓은 도시락을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든 도시락이었습니다. 도시락을 받은 예수님은 사람들을 둘러앉게 하셨습니다. 오천 명쯤 되는 인원들이 앉자 예수님은 감사기도를 드린 후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 나누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제자들은 무리들에게 나눠드렸습니다. 무리들도 서로 나누었습니다. 나누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들판에서 말씀을 나누던 공동체가 음식도 함께 나누는 밥상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밥상공동체는 이처럼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나눔의 씨앗이 된 것은 어린아이의 작은 도시락이었습니다. 어린아이의 도시락이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의 밥상공동체는 나눔을 통해 기적을 만드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형제에게 손을 움켜쥐지 말고 넉넉히 꾸어주라고 하셨습니다.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펴라고 명령하셨습니다.(신 15:7~8). 넉넉한 사랑을 가지고 약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화) 우분투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류는 부족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왔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우분투(Ubuntu)’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곳 부족이 사용하는 인사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당신이 있으므로 내가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남아프리카 부족을 연구하던 어느 인류학자가 나무 옆에 싱싱하고 달콤한 딸기가 가득한 바구니를 놓고 누구든지 먼저 바구니까지 뛰어간 아이에게 과일을 모두 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 말이 통역돼 남아프리카 어린이에게 전달됐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바구니에 도착하여 딸기를 서로 나눠 먹으며 행복해했습니다. 가슴 뭉클한 이야기입니다.
인류학자가 궁금해서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얘들아 일등한 사람에게 모두 주려고 했는데 왜 일등을 하지 않고 손을 잡고 함께 달렸느냐?”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아이들의 입에서 “우분투”라는 단어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나머지 아이들을 슬프게 하고 나만 행복해서는 안 된다는 정신이 바로 그들의 행복지수를 높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어린아이 도시락에서 비롯된 밥상공동체를 통해 나눔의 정신을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나눌 때 더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화)록펠러
록펠러는 43세에 미국의 최대 부자가 되었고,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55세에 그는 불치병으로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최후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갈 때, 병원 로비에 실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 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습니다.
조금 후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병원측은 병원비가 없어 입원이 안 된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는 입원시켜 달라고 울면서 사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는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고 누가 지불 했는지 모르게 했습니다. 얼마 후 은밀히 도운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룩펠러는 얼마나 기뻤던지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 때 그는 나눔의 삶을 작정합니다. 그와 동시에 신기하게 그의 병도 사라졌습니다. 그 뒤 그는 98세까지 살며 선한 일에 힘썼습니다. 나중에 그는 회고합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초대교회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성도들이 한마음이 되어 서로 교제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잘 받았습니다. 떡을 나누면서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모든 물건을 함께 나누어 사용했습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습니다.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했습니다.(행 2:42~47) 자주 모여 음식을 나누며 기도했습니다. 기도제목을 나누고 자기의 문제처럼 함께 중보하며 기도했습니다. 삶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예수님의 밥상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나누는 밥상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마음이 넓어집니다. 포용하고 나눌 수 있습니다. 벽이 허물어집니다. 방언을 통하여 언어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새 술에 취한 것처럼 마음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회개했습니다. 서로가 나누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밥상공동체는 나누는 밥상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밥상공동체 식구들은 성령충만을 받아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넉넉한 밥상공동체(12~13절)
12~13절,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들판에 모인 오천 명의 사람들이 만족하게 먹었습니다. 작은 도시락 한 개로 오천 명이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습니다. 예수님의 밥상공동체는 넉넉한 밥상공동체입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는 넉넉한 공동체입니다.
이사야 55장에는 하나님이 모든 목마른 자들을 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목마른 사람은 누구나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라고 했는데 ‘모든’은 빈부귀천이나 남녀노소,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목마른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오라고 했습니다. 물로 나아오면 생명을 주는 물 뿐만 아니라 활기와 영양을 공급하는 포도주와 우유까지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넉넉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포도주와 젖은 덤으로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넉넉한 사랑입니까?
옛날 시골 잔칫집은 동네 잔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 전체가 모여 음식을 장만하고 함께 먹었습니다. 지나가던 행인들과 거지들도 그 자리에 함께 낄 수 있었습니다. 넉넉한 인심으로 누구나 대접했습니다. 잔칫집 인심이 넉넉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천국을 잔칫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4:15-24절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했습니다. 시간이 되었지만 사람들이 오지 않자 초대한 사람들에게 종을 보냈습니다. 한 사람은 밭을 사서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샀는데 시험하러 가야한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장가들었으니 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종이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알리자 주인은 종에게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다니면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자리가 비어있자 길과 산 울타리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배설하신 천국잔칫집에 누구나 오라는 것입니다. 자리가 넉넉하기 때문에 오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푸짐한 밥상을 차려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지 말고 초청에 응하기만 하면 예수님의 밥상공동체에 동참하여 넉넉한 사랑의 밥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밥상공동체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처럼 돌아온 탕자를 위해 잔치를 배설해주는 넉넉한 사랑의 밥상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허물을 덮어주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이라고 기뻐하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어주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는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마포 옷을 입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성도들이 복이 있다고 천사가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의인된 성도들은 천국에서 예수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여 예수님이 차려주시는 푸짐한 밥상을 받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황홀한 예수님의 밥상이겠습니까? 그리던 사람들을 만나 기쁨을 영원히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밥상공동체에 동참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예수님의 밥상공동체는 자격이 없어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끼워주는 밥상공동체입니다. 움켜쥐지 않고 사랑의 손을 펴서 나누는 밥상공동체입니다. 부족함과 결핍이 없는 넉넉한 밥상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밥상공동체는 이 땅에서 뿐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서도 이어지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함께 교제하는 아름다운 생명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밥상공동체의 일원이 된 우리는 소외된 사람을 끼워주며 살아야 합니다. 움켜쥐지 말고 손을 펴서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잔칫집에 참석한 사람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밥상공동체의 가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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