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 20:1-9
찬송: 351장
제목: 바로 서는 생활
목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있는 생활을 하게 한다.
본시는 왕이 이방 나라와의 전쟁을 위하여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기에 앞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왕과 온 백성들이 함께 낭송하였기에 출정시로 불리고 있습니다. 또한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어떤 종류의 환난이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에 근거하여 부른 노래이기 때문에 장르상 신정시로 분류됩니다.
이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약속의 땅을 완전히 쟁취하고자 벌인 정복전쟁 중에서도 암몬과 아람연합군과의 전쟁을 위하여 출정할 때 지어진 것입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3절은 거룩한 전쟁에 출정하기 앞서 성전에서 드리는 왕의 제사가 열납 되기를 비는 회중의 기도입니다. 4-6절은 하나님께서 왕의 기도를 들으시고 도와주셔서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비는 회중의 기도입니다. 마지막으로 7-9절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왕의 승리를 구하는 최종적 기도입니다.
8절에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라는 구절에서 제목을 잡았습니다. 여기서 ‘바로 서도다’라는 단어는 ‘바로 서고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비틀거리며 엎드러지는 세상 사람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서고 승리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서는 생활은
1. 예배생활(1-3)
1-3절, 『[1]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3]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
일반적으로 전쟁에 승리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병사와 병사들의 높은 사기, 좋은 무기와 유리한 지형, 뛰어난 전략과 전술 등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믿고 있었기에 전장에 출정하기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회복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위한 제사와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선교사 파송예배와 비슷한 것입니다. 외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때 파송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생명을 내어놓고 하나님께 헌신한 선교사를 파송할 때 엄숙하듯이 전쟁에 출정하기 앞서 드리는 예배는 긴장되고 엄숙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드려졌을 것입니다.
환난 날에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성소에서 도와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성소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관계를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또한 시온에서 붙들어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온은 다윗이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빼앗은 성으로 그곳에 왕궁을 건축하였고 언약궤를 위하여 장막을 세웠던 거룩한 장소입니다.
환난 날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큰 전쟁을 앞두고 혼란과 공포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약속의 땅을 완전히 쟁취하고자 벌인 암몬과 아람연합군과의 전쟁을 의미합니다. 당시 수적인 면에서 이스라엘에 비하여 훨씬 우세하였습니다. 위기상황을 맞은 다윗은 출정하기에 앞서 성전에 가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제사를 드리며 기도하였습니다. 백성들도 나라의 운명이 걸린 전쟁에 출정하는 다윗을 위해 함께 기도하면서 성소에서 드렸던 예배생활을 기억하고 기쁘게 받아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소제란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번제를 드릴 때 부수적으로 수반되는 제사를 말합니다.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모든 소제’를 ‘모든 희생제물들’로 바꿀 수 있습니다. 복수로 되어 있는 모든 희생제물들은 전쟁에 출정하기 앞서서 드려진 제물뿐만 아니라 평상시에 왕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드린 모든 제물들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하나님께 드린 제물과 예배생활을 기억하시고 전쟁에서 승리케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지금 당장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수도 있는 중요한 전쟁에 출정하면서 드리는 예배도 중요하지만 평소에 하나님께 드렸던 예배생활을 기억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소에서 도와주시고 붙들어주심을 믿고 예배생활을 바르게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어디에나 계신 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전에 항상 임재하시고 예배를 받으십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기도하는 내용이 왕상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28] 그러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이 종이 오늘 주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왕상 8:27-30)
신약시대에는 성전이 우리의 몸이 되었습니다.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는 곳이 곧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 성령님이 임재하시는 곳이 곧 성전이고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예배하는 곳에 성령님이 임재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고 붙들어주십니다. 세상에서 흔들리고 상처받고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성전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붙들어주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예배를 통해 힘을 얻고 영적싸움의 현장인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속에서 쓰러지고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생활이 중요합니다. 예배가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하루 세끼 식사하는 것이 생활이듯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생활이어야 합니다. 형편이 넉넉하고 여유가 생길수록 예배생활에 소홀해집니다. 주일저녁예배가 오후예배로 대체됩니다. 오후예배마저 없어집니다. 결국 일주일에 주일예배 한 번으로 만족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배가 생활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외출할 때 잠깐 걸치는 장식품처럼 변해가고 있습니다.
병원에 계시는 어떤 권사님을 구역장님과 함께 심방하면서 감동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80세가 넘어 거동이 불편하셔서 요양시설에 계시는 분입니다. 권사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질문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였느냐? 고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지금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권사님은 의외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구역식구들과 함께 구역예배 드리러 다닐 때가 가장 행복했다는 것입니다.’ 구역예배 드리고 있는 분들은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계심을 알고 감사하며 더 열심히 구역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예배시간이 짧아지고, 예배가 없어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예배가 멀어지는 현상이 늘어날수록 백성들의 삶도 비틀거리게 될 것입니다. 예배생활이 멀어지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세상의 것을 의지하게 됩니다. 결국 이방인들처럼 비틀거리고 엎드러지는 길로 걸어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를 사모하고 예배를 생활화하는 것이 바로 서는 생활입니다.
바로 서는 생활은
2. 기도생활(4-6)
4-6절, 『[4]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5]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6]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 출정하는 왕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해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소원대로 모든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모여서 이스라엘과 다윗왕을 위하여 중보기도 하고 있습니다. 전쟁에 나가는 절박한 상황에서 백성들이 모여 함께 중보기도할 때 얼마나 힘이 되었겠습니까?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할 때 기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기도 받는 사람에게는 큰 격려와 용기가 주어집니다.
(예화)
암으로 고생하는 어떤 집사님께 들은 간증입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머리가 빠지고 기력이 쇠하여 힘들었지만 목사님이 심방을 오고 구역식구들과 여전도회원들이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줄 때 큰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기도는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고통 중에 있을 때 기도가 잘 안될 수 있습니다. 그 때 주변에서 위해서 격려하며 중보기도로 도울 때 힘을 얻게 됩니다.
또한 5절은 현재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과는 상반되는 모습입니다. 현재의 상황이라면 당연히 한숨이 나와야 하며 통곡과 애가가 흘러나와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왕의 승리를 기뻐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자신들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직 전쟁에 출정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기도하면서 이미 승리를 믿고 하나님께 찬양하고 있습니다. 믿고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응답해주실 줄 믿고 기도했습니다. 전쟁에 나가지도 않고 이미 승리해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적군이 쳐들어오는 상황입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암몬과 아람연합군입니다. 이런 와중에 승리를 확신하고 미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은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이런 믿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야고보는 기도하면서 의심하는 사람을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응답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6-8)
왕과 백성들이 합심하여 믿음으로 기도한 결과는 승리였습니다. 수적인 열세와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암몬을 지원했던 아람은 이스라엘에게 거듭 패함으로서 두 번 다시 암몬을 도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암몬도 나중에는 완전히 패하여 이스라엘에 복속되었습니다. 시편 21편은 이처럼 환난을 당하여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부른 감사의 개선가입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쟁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예화)
남유다의 4대왕인 여호사밧은 모압과 암몬 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위기에 처하자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당시 남유다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를 치러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나님은 이런 여호사밧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여호사밧은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찬양하게 하였습니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이미 승리를 거둔 것처럼 감사찬양을 드렸던 것입니다.
전쟁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도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복과 저주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성공과 실패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자녀들의 앞길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기도는 생활입니다. 일이 있을 때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비틀거리고 엎드러지는 중에도 바로 서는 생활을 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영적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험악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성이 야수로 변해갑니다. 사람의 목숨을 경시합니다. 인격이 마비됩니다. 사탄의 조정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면 세상으로 쓸려 들어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바로 설 수 없습니다. 기도가 생활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사람들이 줄어듭니다. 한국교회가 힘을 잃어가는 이유 중의 하나도 기도가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예화)
저는 신학교 때 시내산선교회라는 동아리 활동을 했습니다. 입학하고 첫 주에 어떤 선배님의 권유로 정오에 모여 기도하는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 밤마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광주기도원에서 모여 철야하며 찬양하고 나라와 민족, 한국교회, 장신대, 그리고 섬기는 교회를 위해 기도한 후에 산에 올라가 개인기도를 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꾸준히 참석했습니다. 강한 기도훈련을 받은 것이 돌이켜보면 참 감사합니다. 이 모임은 금년에 30년째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금요일 밤마다 철야기도하는 신학교 후배들이 없어서 더 이상 명맥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졸업하고 목회현장에 있는 전도사님들과 목사님들이 신학생들과 함께 모여 기도의 명맥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꾸준히 기도하는 것은 신학생들도 어렵습니다. 물론 철야기도회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하여 신학생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모양으로 열심히 기도할 것입니다.
기도는 노동입니다. 힘듭니다. 생활화가 되어야 지속성이 있습니다. 그 때의 훈련을 통해 기도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 돌이켜보면 참 감사합니다. 그 힘으로 버티면서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늘까지 왔다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해야 바로 설 수 있습니다. 넘어졌다가 일어설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머리로 아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무릎 꿇는 생활화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서는 생활은 기도생활입니다.
바로 서는 생활은
3. 믿음생활(7-8)
7-8절, 『[7]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8]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의지의 대상을 찾습니다. 힘 있는 사람을 의지합니다. 우상을 만들어 섬깁니다. 돈을 의지합니다. 명예와 권력을 의지합니다. 부모나 자녀를 의지하기도 합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 간에도 서로 의지하기 위하여 연합체를 구성합니다. EU(유럽연합),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바르샤바조약기구,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기구) 등을 결성하여 서로의 이익을 위해 노력합니다. 혼자는 불안하기 때문에 서로를 의지하기 위함입니다.
7절에 나오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인들을 지칭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 그들이 가진 병거와 말을 의지하였습니다. 병거와 말은 고대 근동의 가장 강력한 전투무기로 군사력을 의미합니다. 이방 민족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무기와 군사력을 의지하고 자랑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고 노래합니다. ‘자랑하리로다’는 ‘기억할 것이다’, ‘부를 것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를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전쟁에 임하는 대적들과 이스라엘의 태도가 완전히 대조적입니다. 암몬은 자기들의 군사력만으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어서 아람으로부터 용병을 고용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제사를 드리고 기도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무모하게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병거와 말을 의지하는 그들은 비틀거리고 엎드러졌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던 이스라엘은 일어나 바로 섰습니다. 승리했습니다. 의지의 대상이 중요합니다. 누구를 의지하고, 무엇을 의지하느냐가 승패를 결정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은 골리앗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어린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갑옷도 입지 않았고 칼도 들지 않았습니다. 오직 손에는 물매만 들고 있었습니다. 그에 반하여 골리앗은 거구에 갑옷을 입었고 칼과 단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투경험도 풍부했습니다. 하지만 골리앗은 다윗에게 쓰러졌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삼상 17:45,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보면 매우 어리석어 보이지만 가장 큰 능력입니다. 다윗과 이스라엘 군대가 하나님이 이름을 의지하였을 때 대적을 쳐부수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예화)사파리월드 관람 소감
금년 봄에 에버랜드로 효도관광을 갔을 때 사파리월드를 구경했습니다. 큰 울타리 속에 맹수들을 풀어놓고 버스를 타고 가면서 구경할 수 있도록 한 시설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맹수들이 있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사자와 호랑이, 곰들이 축 늘어져 잠을 자거나 졸고 있었습니다. 야행성이라 저녁에 활동하고, 먹이를 위해 사냥할 필요가 없으므로 밤낮 잠을 자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곰은 사람들이 던져주는 건빵을 받아먹으며 버스 기사가 시키는 동작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건빵을 먹기 위해 길들여진 곰을 보면서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던져주는 먹이에 길들여져 흐릿한 눈동자를 가진 맹수는 더 이상 맹수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던져주는 고기와 건빵을 의지하면서 야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사자와 호랑이는 산과 들을 뛰면서 저돌적인 힘이 생기고 물러서지 않는 맹수의 용맹함도 길러집니다. 우리에 갇혀 손쉽게 먹이를 구하는 맹수들이 들판을 달리며 먹이를 구하는 맹수들에 비해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적인 의지의 대상이 이와 같습니다. 당장은 편하고 안락함을 주지만 결국 자기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사탄의 유혹도 마찬가지입니다. 먹이를 계속 던져주면서 자기를 잃게 만들고 사탄의 노예로 만들어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 할수록 강하게 됩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삼하 22:30)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시 27:3)
하나님을 의지하여 적진으로 달려가고 가로막힌 성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노래합니다. 군대가 진을 치고 대적해도 두렵지 않고 전쟁이 일어나도 태연하다고 고백합니다.
(예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해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플라시보 효과입니다. 플라시보란 실제로는 아무 효능이나 효과도 없는 설탕 등으로 만든 가짜약 따위를 말합니다. 환자에게 가짜약을 주면서 효과가 있다고 말하면 실제 약을 먹었을 때와 동일한 효과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마음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가짜약을 먹으면서도 효과가 있다고 믿고 먹으면 실제 약을 먹을 때와 같은 효과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고 기도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바로 서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서는 생활은 믿음으로 예배하는 생활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생활입니다.
예배생활, 기도생활, 믿음생활을 실천하여 비틀거리고 엎드러지는 세상 속에서 바로 서는 생활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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