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 8:18~22
제목: 나는 누구?
목표: 자신이 어떤 사람임을 깨닫게 하여 더 훌륭한 신앙인이 되게 한다.
미국의 유명한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이 어느 시골마을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그 동네에 ‘찰리 채플린 흉내내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장난기가 발동한 채플린은 그 대회에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영화에서 했던 것처럼 열심히 연기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연기했으니 당연히 1등이었겠지요? 그런데 3등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1등, 2등 두 사람이 자기보다 더 흉내를 잘 내었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일화이지만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자기를 보여주려 해도 남들이 몰라주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자기가 아닌 남의 흉내를 내면서 다른 사람처럼 살수도 있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 바르게 살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나’가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나’가 있습니다. 일터에서의 ‘나’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의 ‘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가 있습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어떤 성도입니까?
1. 훈련받은 제자입니까?(18)
18절,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군인은 잘 훈련받을수록 강군이 되고 정예군이 됩니다. 최정예 부대일수록 훈련의 강도가 강하기 마련입니다. 훈련의 땀방울을 많이 흘리면 흘릴수록 전쟁에서 피를 덜 흘리게 됩니다. 또한 정예군일수록 기강도 엄격하여 명령에 죽고 살 정도로 군기가 엄격합니다. 강한 훈련을 통하여 사기충천하고 전우애로 똘똘뭉쳐 공동체를 위해 생명까지 버릴 정도로 강한 부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훈련을 잘 받지 못한 군인은 주어진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없습니다. 전우대도 희박하여 공동체의 이익과 승리를 위해 한마음이 되지 못하는 오합지졸이 되어 많은 숫자가 있어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군대에 특수부대가 있습니다. 특수임무를 맡는 군인들은 별도의 훈련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죽음을 넘나드는 힘들고 위험한 훈련도 감수해야 합니다. 훈련을 마친 병사들은 자신감과 함께 일체감이 생깁니다.
(예화)
제가 장교로 임관하여 광주보병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공수부대로 자대배치를 받았습니다. 부대에 도착하여 얼룩무늬 군복을 입고 베레모를 쓰고 갔는데 부대원들이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공수훈련도 받지 않고 가짜로 베레모를 쓰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장교라도 인사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후에 혹독한 공수훈련과정을 마치고 가슴에 윙을 달고 부대에 복귀하자 모두가 인정해주면서 인사를 했습니다. 훈련받지 않은 사람은 자기들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나름대로의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잘 훈련받은 그리스도의 정병인가를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 싸움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나는 오합지졸의 무리 속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는지? 최정예 군사로 마귀와의 싸움에서 선봉장인지를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여러 지방을 다니시면서 각종 질병을 고치시는 이적을 행하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닙니다. 자기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 혹은 질병 고치시는 신기한 장면을 목격하기 위해 구경꾼으로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혹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 그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기적으로 만들어진 떡을 맛보기 위해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기적을 바라거나 자기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언제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따라다녔습니다. 이들은 믿음의 정예병들이 아니라 구경꾼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목적으로 쫓지 않고 자기들의 욕구와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고 따라다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숫자적으로는 많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정병으로 사용될 수 없는 오합지졸에 불과했습니다. 공동체 의식도 없었습니다.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따라다니다 그 욕구가 채워지면 미련없이 떠나버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 모두를 훈련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이런 무리들과 떼어놓으시려고 바다를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바다를 건너다 풍랑을 만나게 하셔서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고 주님의 능력을 확인하여 믿고 따르도록 제자훈련 과정을 신설하셨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구별되었기에 무리들이 당하지 않는 바다의 풍랑을 겪는 훈련도 받아야 했습니다. 후에는 순교의 제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무리 속에 섞여있으면 믿음의 정예병이 될 수 없기에 선발되어 별도의 훈련과정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무리 속에 섞여 함께 웅성거리는 구경꾼대신에 구별되어 풍랑이 넘실거리는 바다로 나가 어려운 훈련을 받기 원하는 제자들입니까? 일사불란한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나를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까? 최정예 부대는 팀별로 되어있습니다. 팀의 목표가 곧 나의 목표가 됩니다. 그 목표를 위해 내가 존재할 정도로 팀원들은 서로 연합하여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려 노력합니다.
마찬가지로 잘 훈련된 제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목표에 나를 맞추고 나아가야 합니다. 딤후 2:4에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나를 십자가의 군사로 모집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삶의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필요한 훈련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잘 받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 훈련을 위해 바다의 풍랑가운데 처하는 어려움도 겪었지만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확인하고 더욱 굳건한 믿음의 사람들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모진 세상의 풍랑에 시달리는 분들이 계십니까? 제자훈련 과정에 계심을 믿으시고 훈련을 잘 통과하셔서 믿음의 정병으로 더욱 굳세게 세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는 군중 속에 섞여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중의 한사람입니까? 아니면 구별되어 거친 풍랑 속에서도 은혜를 경험하고 있는 훈련받은 제자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2. 올바른 자세의 성도입니까?(19-20)
19-20절,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제가 한동안 허리가 아파서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형외과를 갔더니 의사선생님이 자세를 바로 하라고 했습니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똑바로 앉고 걷는 자세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자세가 나쁘면 육체의 건강도 나빠질 수 있었습니다.
운동할 때 폼을 보면 그 사람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야구, 농구, 탁구, 테니스, 베드민턴 등 어떤 운동이든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서있는 자세나 걸음걸이 자세를 보고도 어느 정도 그 사람의 건강과 성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자세는 더 중요합니다. 색안경을 끼고 보면 안경의 색에 따라 모든 만물이 달라 보입니다.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긍정적이고 좋은 쪽을 바라보지만 부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매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밝은 면 보다는 어두운 쪽을 보게 됩니다. 마음의 자세 즉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상담학의 인지치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울증이나 각종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들을 치료할 때 그 사람의 환경이나 행동을 바꾸어줌으로 치료하는 행동치료방법이 있는가하면 반대로 먼저 환자의 생각을 바꾸어줌으로 환경을 이겨나가게 하는 인지치료 즉 생각 바꾸기를 통한 치료방법이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마음자세가 바뀌면 행동이 변화되고 질병까지 치료할 수 있습니다.
믿음생활도 마찬가지로 우선 자세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믿음의 자세가 잘못되면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은 버려두고 자기 열심과 자기 성취욕을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이용한 자기이익만을 위해서 교회에 출석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위해 존재하고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아야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나의 도구로만 이용하려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을 단지 돈 많이 벌어주는 도구로, 건강을 지켜주는 도구로, 자녀들 잘 되게 하는 도구로, 축복의 도구로만 이용하다가 신통치 않으면 버려버립니다.
예배할 때의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예배드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한 시간 때우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오지 않으면 왠지 불안하고 뒤가 켕기는 것 같아 억지로 왔지만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끝나는 시간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은 가족의 성화에 못 이겨 가정의 평화를 위해 선심 쓰듯 억지로 앉아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지각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바른 예배자는 바른 자세로 예배드릴 뿐만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삶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의 서기관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말을 하지만 주님은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말씀하십니다. 잠잘 때 머리 베는 베개 하나 없는 사람이니 너에게는 아무 줄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랑 많으신 주님이 어떻게 이렇게 가혹한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말은 잘하지만 그 중심이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있었고 그의 따름의 자세가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인데, 십자가는 지려하지 않고 영광만을 바라보며 따르려했습니다.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하여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한 자리 하겠다는 자기야망을 위해 따르려 했으므로 주님은 그의 따름을 거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는 누구입니까? 혹시 믿음의 자세가 잘못된 서기관과 같지는 않습니까? 나는 어떻습니까? 올바른 자세로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진정 십자가를 질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길은 분명 영원한 영광의 길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없는 부활,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반드시 골고다 언덕길을 거쳐야만 하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따를 수 있다면 올바른 자세의 성도임이 분명합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3. 오늘을 잘사는 사람입니까?(21-22)
21-22절,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제가 정한 저희 집의 가훈은 ‘오늘을 잘 살자’입니다. 오늘이 중요합니다. 내일은 오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일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을 잘 살아야 합니다.
‘시간을 파는 상점’이라는 책에서 작가는 시간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길면서도 가장 짧은 것,
가장 빠르면서도 가장 느린 것,
가장 작게 나눌 수 있으면서도 가장 길게 늘일 수 있는 것,
가장 하찮은 것 같으면서도 가장 회한을 많이 남기는 것,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사소한 것은 모두 집어삼키고,
위대한 것에는 생명과 영혼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라틴어 ‘카르페 디엠’은 ‘오늘을 붙잡으라’는 뜻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했던 존 키딩선생님은 한 장면에서 학생들을 이끌어 졸업생들의 사진을 전시해 놓은 트로피 진열장이 있는 학교 로비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 사진 속의 학생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실제로 자신들의 꿈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겠느냐며 큰 소리로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 다음 그를 둘러싼 학생들에게로 몸을 굽히며 키딩은 “카르페 디엠(Carpe Diem!), 즉 ”오늘을 붙잡으라!”고 속삭입니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잠잠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도전의 말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자 학생들은 꿈에 사로잡혀 오늘을 소중히 여기며 변하기 시작합니다.
진정한 내일은 없습니다. 오늘이 하루하루 쌓여서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을 놓치는 것은 곧 내일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이 없는 사람에게는 내일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잘 믿어야 하고 오늘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을 잘 사는 사람에게만이 미래와 천국의 소망이 있을 뿐입니다.
내일 혹은 모레로 점점 미루는 사람에게는 내일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연말이 되면 교구장들에게 일군을 임명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중에 하나입니다. 교회봉사를 권면하면 바빠서 안되고 몇 년 있다가 하겠답니다. 다음에 하겠다고 미루는 분들이 계십니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업하시는 어떤 분을 심방하여 교회출석을 권면했더니 한가하면 교회에 가겠다고 하십니다. 사업이 한가하면 망하는 것 아니겠어요. 사업이 망하고 난 다음에야 교회 출석하겠다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병원에서 수술해야 한다고 날짜를 잡으면 시간을 빼어 병원에 갑니다. 신앙생활은 남는 시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쁜 시간 중에 가장 소중한 시간을 떼어내어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님 우선 생활입니다.
신학생 시절에 어떤 교수님이 시간에 대한 인상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질을 잃는 것은 작은 것을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은 것을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이렇게 소중한 시간을 쪼개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헌신입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잃는 것은 내 삶의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삶의 자리에서 주님 주신 소중한 시간인 오늘을 잘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보면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두 가지 일, 곧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마음과 자신의 의무를 등한히 하고 싶지 않은 마음 가운데서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앞의 서기관은 열정적이고 지나치게 자신의 믿음을 표현한 반면 이 사람은 매우 소심한 신앙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제자의 길을 차선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자의 길은 최선의 신앙으로써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전도의 걸음을 재촉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는 전도보다 먼저 자신의 아버지를 장사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1)연로한 아버지를 섬기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전도의 길을 따라나서겠다고 한 것이라는 학설과 (2)실제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잠시 가서 장례식에 참석하겠다는 뜻으로 보는 두 가지 학설이 대립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핵심은 그 어떤 경우라도 전도 사역보다 우선하는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즉 이 제자는 무엇이 더 급하고 중요한 문제인가를 혼동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율법의 의하면 부모에 대한 효성의 척도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제 5계명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자식된 자는 반드시 자기 부모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하는 것이 그 당시의 문화적 배경이었습니다(출 20:12; 신 27:16). 물론 나이든 부모를 노후에 봉양하는 것 역시 장례에 관계된 의무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개인적 효도보다 더 우선되는 인생의 최고 급선무는 복음사역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최우선으로 삼는 생명 살리는 일을 위해서는 자식의 의무까지도 무시하고 오늘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자식의 의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니라 우선순위에 있어 오늘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업과 직장의 일이, 자녀의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도 일터도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삶의 자리이기에 최선을 다해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생명 살리는 주님의 사역에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그만큼 전도가 중요하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내일로 미루는 사람, 나중으로 미루는 사람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똑 같이 하루에 24시간을 주셨습니다.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이 시간의 가치는 달라집니다. 오늘은 각자에게 주어진 최후의 시간입니다.
심방 중에 들었던 어떤 집사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왜 젊었을 때 신앙생활 열심히 하지 않았는지 요즘 후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봉사하고 싶어도 성경을 모르고 기도도 못해 할 수 없다며 부끄럽다고 했습니다. 이제 성경을 읽으려고 해도 눈이 어둡고 금방 잊어버린다고 하며 신앙생활도 젊을 때 열심히 할 걸 그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젊은 분들은 이분처럼 다시 후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생명 살리는 주님의 사역, 하나님 나라 확장사역에 부름 받을 때 오늘 당장 응답하여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회에서 그리고 가정과 일터에서 오늘을 잘사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문학자인 토마스 카알라일의 ‘오늘’이라는 시를 소개하겠습니다.
“여기 또 다른, 파란 새날이 터 온다.
생각하라, 그대 그 날을, 쓸모없이 흘려보내려는가?
영원으로부터 이 새날은 태어나, 영원으로 밤에는 돌아간다.
시간 앞에서 그것을 보나 아무도 그것을 본 일이 없고,
그것은 곧 모든 눈에 영원히 보이지 않게 된다.
여기 또 다른 파란 새날이 터온다.
생각하라, 그대 그 날을, 쓸모없이 흘려보내려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의 인물들 중에도 자기를 알고 살아간 사람들은 행복했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살았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음을 알았습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미디안장사꾼들에게 팔려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하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자기의 신분을 밝히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 45:5-8,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요셉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았기에 형들을 용서했고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다윗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잘 알고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삼하 5:12에서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더라.” 기록합니다. 자기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세워주셨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 이스라엘나라를 높이시고 강성케 하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왕이 되었고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았기에 그는 훌륭한 왕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고전 15:10에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옥에 잡아넣던 자기가 변화되어 예수님의 증인이 되고 사도의 직분을 감당케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딤전 1:12에서는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간증합니다.
종으로 팔려갔던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고, 목동 다윗을 왕이 되게 하시고 박해자 사울을 사도 바울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를 바로 알 때 감사가 있습니다. 죄인인 내가 변화되어 의인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알 때, 은혜에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겸손할 수 있습니다.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헌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어떤 성도입니까?”
무리입니까? 아니면 훈련받은 제자입니까?
믿음자세가 잘못되어 주님께 거부당한 서기관입니까?
아니면 올바른 자세의 성도입니까?
우선순위를 잘 몰랐던 제자중의 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오늘을 잘 사는 사람입니까?
자기를 진단하고 주님께 더욱 아름답게 쓰임 받는 오늘을 잘 사는 사람, 올바른 자세의 성도, 훈련받은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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