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행 11:19-26
찬송: 357장
제목: 극복하는 복음의 능력
목표: 삶의 장벽을 극복케 하는 복음의 능력을 알고 힘을 얻게 한다.
스데반이 순교하자 흩어진 자들이 안디옥에 이르러 복음을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동시에 전하여 안디옥교회가 부흥하였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교회에서 바나바를 파송하여 안디옥교회를 돌보는 중에 바나바는 다소에 있던 사울을 불러 함께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갔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불어 닥친 고난과 위기가 오히려 복음을 세계적으로 증거하는 발판과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복음은 이처럼 위기를 극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의 불을 꺼치려했지만 기름을 붓듯 더욱 활활 타올라 안디옥에서 세계로 확산되어 갔습니다.
이 저녁에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퍼져나간 복음의 능력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복음의 능력은
1. 고난을 극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19절).
19절,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성령충만을 받은 초대교회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부흥하였습니다. 성도들의 수가 많아지자 사도들은 일곱 집사를 세워 교회의 일을 돕도록 했습니다. 그들 중에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며 교회를 부흥케 했습니다. 스데반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스데반을 모함하여 죽이는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교회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성도들은 핍박을 피해서 고향을 등지고 이사를 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멀리 안디옥까지 갔습니다. 정든 고향을 등져야 했습니다. 함께 믿음생활 하던 공동체를 떠나야 했습니다. 재산상의 손해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인간관계도 단절되는 아픔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는 박해의 손길이 유대땅이 아닌 다메섹까지 미쳤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박해의 범위가 이방지역으로까지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이 같은 일련의 박해로 예루살렘에만 모여 있던 성도들은 이방나라로까지 이주했을 것이며 그곳에서 전도를 하다가 박해의 손길이 그곳까지 미치게 되자 또 다시 점점 더 멀리 흩어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흩어졌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박해가 복음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이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역사합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스데반의 환난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위기에 처했지만 복음을 전 세계로 확장시키는 계기로 사용하셨습니다.
고난을 참고 이기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속에 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숨겨져 있습니다. 고난은 혼자 감당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던 성도들이 함께 흩어져서 여러 곳에 정착하였습니다. 고난과 환난을 당할 때 흩어지더라도 믿음으로 뭉쳐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혼자서는 쉽게 낙망할 수 있지만 힘을 합하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 힘을 낼 수 있습니다. 비록 예루살렘 모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몇 사람이라도 함께 붙어 있으면 힘을 낼 수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서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여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일으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혼자서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믿음의 동역자들이 함께 뭉쳐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아무리 활활 타는 장작불도 혼자 떨어지면 금방 불이 약해지고 나중에는 꺼지고 맙니다. 복음의 열정으로 가득한 성도들이 흩어졌지만 뿔뿔이 각자 흩어지지 않고 몇 몇이 모였을 때 고난을 이길 수 있었고 다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인하여 예루살렘교회가 위기를 만났습니다. 환난을 피해 이주하는 교인들로 인해 교인들의 숫자가 줄어들었습니다. 당장의 예루살렘교회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넓게 보면 교회가 세계적으로 성장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당장 눈앞의 일만을 생각합니다. 교회가 환난을 당하여 이제는 망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분란이 나서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이웃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여 하나님을 욕먹게 하는 안타까움으로 마음이 무거울 때도 있지만 교회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환난과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의 파워는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게 합니다. 죽음조차도 극복하게 합니다. 스데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 앞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 죽음을 본 성도들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고향과 삶의 터전을 떠나면서까지 복음을 지키려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파워가 아니겠습니까? 고난과 핍박이 복음을 방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복음을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복음은 고난을 극복하게 합니다. 죽음의 핍박과 고난마저도 극복하게 합니다. 스데반은 죽음으로 순교한 사람이지만 흩어진 사람들은 복음을 들고 이방 땅으로 이주한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고난과 핍박이 결코 그들의 길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복음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과 핍박이 있습니다. 복음 을 전하다가 욕을 먹기도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면박을 당할 수 있고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가족들과 친척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간증) 경북 의성의 배씨들이 사는 집성촌에 배세란이란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분이 어떤 사람의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을 했는데 배씨 문중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예수를 믿지 말라고 했지만 믿음생활을 계속하자 문중에서 배척을 했습니다. 농사철에 품앗이를 해주지 않고 따돌려서 도저히 함께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신앙의 자유를 찾아 만주로 가는 중에 경북 영주시 내매라는 마을에 내매교회가 있었는데 사정을 들은 교인들이 함께 살자고 하여 그곳에 정착하였습니다. 내매교회를 섬기면서 살다가 후에는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그분의 아들도 대를 이어 내매교회 장로님이 되셔서 평생을 섬기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배세란장로님의 손자는 내매교회를 섬기다가 강원도 원주로 이사한 후에 교회가 없던 그 마을에 신림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후에 신림교회 장로님이 되어 평생을 섬기다가 몇 년 전에 은퇴하셨습니다. 복음으로 인해 당한 핍박과 고난이 고향을 떠나게 했고 후에는 그분의 후손이 원주에 교회를 개척하여 오늘날도 복음의 열매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작은 시골교회인 신림교회에서 다섯 명의 목사가 배출되어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바로 접니다. 저의 증조할아버지 배세란장로님이 복음으로 인해 당한 핍박이 후에 강원도에 신림교회를 개척하고 그 토양에서 후손이 목사가 되어 여러분 앞에서 지금 복음을 증거하는 살아있는 간증이 된 것입니다.
복음의 파워는 고난을 극복하게 합니다. 당장의 고난과 핍박은 견디기 어렵지만 복음의 능력으로 이겨내면 놀라운 축복의 열매가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롬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
현재 복음으로 인해 고난당하는 분이 있습니까? 교회의 아픔으로 혼란스러운 분이 계십니까? 복음 안에 있지만 가족과 자녀들의 문제로 고난을 겪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성령님의 위로하심과 도우심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복음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이라면 참고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지금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영광이 장차 임하게 될 것임을 믿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 차별을 극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20, 25~26절).
20절,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5~26절,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예루살렘교회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하고 교회에 환난이 닥치자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이방인인 헬라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동안 이방인은 전도의 대상이 아니었고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들로 취급되었습니다. 유대인만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고 유대인들만 구원받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복음도 유대인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패러다임을 깨트렸습니다. 이방인인 헬라인도 전도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해야 한다는 새로운 지평이 열렸습니다. 신학의 일대 변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지옥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천국에 함께 가야할 사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마땅히 사형 받아야 할 사람으로 여겼던 사람을 용서해주고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할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원받아야 할 사람과 구원받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나누어진 장벽을 무너뜨리는 신앙의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바뀐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생각을 바꾸지 않습니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신격화하고 지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생각합니다. 한국전쟁 때 종군기자로 참전했다가 체포되어 34년간 감옥에서 복역했지만 전향하지 않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 리인모라는 사람은 그 사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믿고 있는 사상을 바꾸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이라는 선민사상은 수 천 년 이어져온 유대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그 신앙의 틀을 깨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함께 천국백성이 되고 선민의 반열에 동참시키는 것은 신학의 차별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이 복음은 차별을 극복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와서 차별을 많이 완화하거나 없앴습니다. 기독교는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었던 신분제 철폐와 초혼, 축첩 등 봉건적 악습 폐지에도 앞장섰으며 남녀평등 같은 혁신적 활동도 벌였습니다. 복음은 이처럼 잘못된 차별을 고치고 극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인한 환난으로 안디옥에 흩어진 성도들이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여 복음의 지경이 민족적인 범위를 넘어 세계적으로 확장되었다. 민족주의를 뛰어넘었습니다. 유대의 예루살렘 지역을 넘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으로 복음이 확장되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받은 바나바는 다소에 있던 사울을 데려와 동역자로 세워서 안디옥교회를 함께 섬겼습니다. 사울이 회심한 후에 예루살렘에서 다소로 가게 된 것은 환상 중에 받은 명령에 따른 것으로 사울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이 고향인 다소로 가서 머문 기간이 얼마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간 이유는 안디옥 교회를 바나바 혼자 이끌 수 없었고 이방인을 위해 부름 받은 사울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울이 아직도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에게 검증을 받지 못한 상태였지만 바나바는 복음을 위해 사울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주었습니다. 과거에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라는 선입견과 차별을 극복하고 안디옥교회의 동역자로 세워서 함께 복음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바울의 과거전력을 알았던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도 있었을 것입니다. 과거에 바나바는 사울을 예루살렘교회에 소개하였지만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하자 그의 고향인 다소로 피신시켰기 때문에 예루살렘교회가 어떻게 생각할지 눈치도 보였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그런 염려를 뒤로 하고 복음을 위해 사울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고 함께 안디옥교회를 섬겼습니다.
(롬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골 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 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예화)
과거에 어떤 권사님을 심방했을 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자기 아들이 처음 교회를 나왔을 때 정장 차림이 아니라 일하는 복장 그대로 왔는데 어떤 목사님이 악수를 하려다가 옷차림새를 보고 내밀었던 손을 다시 뒤로 거두어들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아들은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믿음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하시며 그 목사님의 이름을 거명하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물론 그 목사님이 고의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겠지만 권사님은 지금까지 그렇게 오해하고 계셨습니다. 사람을 차별하고 편애하는 것이 이런 큰 아픔과 상처를 남긴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지역, 신분, 성, 지위, 지식이나 부의 정도, 피부색, 연령, 건강상태 등 어떤 차별을 두고 구원의 대상자를 구분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 종이나 자유인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차별당하는 분이 계십니까? 지체장애로, 가난하여, 학력으로, 외모로, 신분으로, 지위로 세상에서 차별당하고 계십니까? 복음으로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가난하고 병든 자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과 죄인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4장에는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청한 비유가 나옵니다. 청첩장을 돌리고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보내서 많은 사람들을 청했습니다. 시간이 되어 종들을 보내어 잔치에 청했지만 여러 가지 바쁜 이유를 대면서 참석을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종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눅 14:21-23)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복음으로 모든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차별없이 청했지만 건강하고 잘 나가는 사람들은 바쁜 핑계를 대면서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청하여 하나님의 집을 채우도록 하셨습니다. 복음 안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사회적인 차별을 당하고 있는 분이 계시면 복음으로 예수님 안에서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는 복음 안에서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디옥교회가 유대인과 헬라인을 차별하지 않았고 과거의 이력으로 사울을 차별하지 않았듯이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화)
넬슨 만델라는 인종차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정의를 위하여, 백인과 흑인의 인종차별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싸우다가 무려 27년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와서 온 민족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 되고 나서 자기를 괴롭히던 그 많은 백인 정적들을 다 사면하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는 누구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괴롭힌 사람을 절대로 원수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대통령 기간의 직무를 마치고 아무 미련 없이 고향으로 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차별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누구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알았던 미국의 대통령 링컨은 백인과 흑인의 차별을 없애고 노예해방을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차별대우도 복음으로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어떤 차별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천하보다 귀중한 생명으로 대접받아야 합니다. 단지 대접받아야 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상대방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섬기는 자세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한계를 극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21절).
21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주님의 손이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의 유대인 몇 사람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주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손이 복음전도자들과 함께 하심으로 복음선포를 도우셨습니다. 고난과 핍박을 피해 도망쳤던 나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몇 사람만이 이방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지만 주의 손이 함께 하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회심하는 큰 열매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교의 자리에서 도망친 힘없고 부족하고 겁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의 손이 함께 하시면 한계를 극복하는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은 파워이고 능력입니다. 약한 자를 강하게 만듭니다. 병든 자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절망 중에 있는 사람에게 소망을 줍니다.
복음은 지역적인 한계를 극복합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있던 복음이 고난을 통해 지역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퍼져갔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소아시아와 유럽으로, 로마로, 세계로 확장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꺼리는 사마리아지역에 가셔서 수가성 여인을 변화시켰습니다. 복음은 한 지역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이웃마을로 전달됩니다. 사도행전 1:8절은 말씀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을 통한 복음의 역사는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이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지역과 국가를 넘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와 선교사님들이 계십니다. 카자흐스탄과 인도와 중국을 향하여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발생지였던 이스라엘 땅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복음을 역수출하고 있습니다.
또한 민족적인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만 전해지던 복음은 이방인으로 취급받던 헬라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복음의 세계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사도행전 8장은 빌립이 주의 사자의 지시를 받아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인종과 민족적인 한계를 넘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안디옥교회에서 파송 받은 바울은 후에 전 세계를 누비며 지역과 민족을 뛰어넘어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내면적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을 받아들여 교회의 일꾼으로 세웠습니다. 닫힌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경직된 신학의 틀을 유연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스데반도 자기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죽이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나 선지자를 통해 적대국의 수도 니느웨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선포되고 실현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서 도망친 종이었지만 바울은 복음의 능력으로 주인과 종의 관계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용서해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마음의 빗장을 풀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생명적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인간의 한계상황은 죽음입니다. 죽음을 극복한 사람은 예수님 이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석가도 공자도 로마의 황제도 죽었습니다. 세계인의 생활패턴을 바꾸었던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도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의술이 발달하고 생명공학이 발달하여 복제인간이 탄생할지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원형은 죽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순리입니다. 히브리서 9:27절은 선포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말씀합니다. 죽음과 심판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간이 가야할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음 이후에 복음으로 영생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이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한계를 극복하는 능력입니다. 지역적인 한계, 민족적인 한계, 내면적인 한계, 생명적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주는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는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믿으면 우리에게 닥치는 어떤 환난과 고난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어떤 차별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삶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해줍니다.
복음이 능력입니다. 복음이 장애물을 극복하는 파워입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모든 장벽들을 돌파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약하지만 내가 믿는 예수님은 강한 분이심을 믿고 고난과 차별과 한계를 극복해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다리면 됩니다 (0) | 2011.12.02 |
---|---|
지혜로운 사람 (0) | 2011.11.20 |
며칠같은 칠년의 사랑 (0) | 2011.08.19 |
로뎀나무 아래 충전 (0) | 2011.08.05 |
지혜로운 나그네 생활 (0) | 2011.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