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왕상 19:1-8
찬송: 471장, 363장
제목: 로뎀나무 아래 충전
목표: 쉼과 위로를 통하여 육체와 영혼의 재충전을 경험하게 한다.
제가 가지고 있는 애장품이 몇 종류 있습니다. 그중에 디지털 카메라가 있습니다. 저렴한 가격이지만 막내딸이 태어나면서 지은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담아두기 위해 구입한 카메라입니다. 그 카메라로 많은 사진을 찍어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구역회 위로회나 효도관광 때 어김없이 들고 다니는 사진기이기 때문에 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진을 많이 찍으면 건전지를 교체해야 하는데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충전용 건전지를 사용합니다. 얼마동안 사용하다가 밧데리가 소진되어 가면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와 건전지를 교체하라는 표시가 뜹니다. 그 때 다시 충전하여 사용하곤 합니다.
사람도 비슷합니다. 건전지 밧데리가 떨어지듯이 에너지가 소진될 때가 있습니다. 쉬면서 재충전을 받아 힘을 얻어야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로뎀나무 아래서 지쳐 쓰러졌다가 충전을 받아 다시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이번 주부터 다음 주까지 2주 동안 구역회가 방학을 합니다. 교회직원들과 목사님들도 휴가기간입니다. 저는 다음 주에 떠납니다. 목사님들이 휴가를 가느냐고 하시면 섭섭합니다. 목사님들이기에 재충전 시간이 더욱 필요합니다. 목사님들과 모든 성도들이 엘리야가 받았던 에너지 충전을 받아야 합니다.
로뎀나무 아래 충전은
1. 혼자만의 충전입니다(3-4).
3-4절,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엘리야는 홀로 바알과 아세라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승리하였습니다. 외롭게 영적싸움을 해왔던 사람이었습니다.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을 때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엘리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내일 이 맘 때에 죽을 것이라고 협박했습니다. 지금까지 혼자서 잘 싸워왔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교활한 왕비였습니다. 그렇게 당당하고 담대하던 엘리야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사환과 함께 급히 도망을 쳐서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도착했습니다. 엘리야는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하룻길 쯤 혼자서 광야로 걸어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하나님께 죽기를 청합니다. 로뎀나무는 사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콩과의 식물로 1~2m정도의 크기로 자라며 잔가지가 많아서 바람과 햇빛을 잘 막아주는 나무입니다. 엘리야는 많은 로뎀나무들 중에 있는 한 나무가 아닌 광야에 유일하게 서 있는 로뎀나무를 발견하고 그 그늘아래 앉아서 쉬었던 것입니다. 하룻길은 거리로 환산하면 32~40km정도의 거리를 뜻합니다. 80~100리나 되는 광야길을 걸어 홀로 서 있는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고 싶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로뎀나무가 어쩌면 자기신세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하고 나무 아래 누워서 잠이 들었습니다.
혼자서 광야로 들어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사환에게 자신의 나약하고 처참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선지자들을 비손시내로 끌고 가서 처단하던 위풍당당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쓰러져 있는 비참한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고 가족이라 할지라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 있습니다. 힘을 잃고 쓰러져있는 모습은 자신도 싫습니다. 여기까지만 감당하면 좋겠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계획한 일들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실망할 수 있습니다. 우울 할 때도 있습니다. 우울증은 여자들에게만 오는 증상이 아닙니다. 남자들도 우울 할 때가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 잘나가는 사람들도 우울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성공이후에 목표상실로 인해 찾아오는 우울증도 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에게도 이런 우울증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설교를 계획한대로 잘 못하고 강단을 내려왔을 때 찾아오는 초라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도 훌륭한 목사님들처럼 설교를 잘하고 싶습니다. 이처럼 남들과 비교하면 우울해지고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자식들 이야기하면 우울해질 수 있습니다. 다른 집 자식들은 공부도 잘하고 좋은 직장 다니고 결혼도 잘 하는데 우리 집 자식들은 왜 그 모양인지 비교하면 짜증나고 우울해집니다. 남편과 아내는 또 어떻습니까? 다른 집과 비교하면 볼품도 없고 센스도 없고 돈도 없어 짜증나고 우울하게 합니다. 자신이 초라해질 때면 혼자 있고 싶어집니다. 학교 동창들을 만나고 오면 더 화가 납니다. 잘나가는 친구들에 비하면 세상적으로 초라한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혼자 있으면서 신세 한탄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 충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통해 재충전을 경험하라는 말씀입니다. 대중집회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골방에 홀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혼자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만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금년 초에 기도원에서 혼자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조용히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충전의 시간이었습니다. 따로 시간을 낼 수 없다면 집에서도 가능합니다. 모든 방송매체와 전화기를 끄고 하나님 앞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혼자 광야에 들어갔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과의 조용한 만남을 위해 사람이나 환경과의 단절이 필요합니다. 광야는 먹고 마실 것이 없는 척박한 땅입니다. 세상과 단절된 땅입니다. 사람과의 소통이 불가능한 곳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는 곳입니다. 엘리야는 이런 광야에 들어가 하룻길쯤 행했습니다. 어떤 목적지가 정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작정 하룻길쯤 걸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사역을 돌아보고 이세벨의 위협 앞에 도망친 초라하고 지친 모습으로 하나님을 그리면서 마냥 걸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자신만의 울분과 고뇌, 열등감, 증오 등을 마음속으로 새기면서 무작정 걷다가 로뎀나무를 발견했을 것입니다. 로뎀나무를 목표로 하고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을 걸은 것은 아니지만 결국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홀로 걸을 때 그리고 지쳐 쓰러질 때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고 만나주십니다.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께 접속하면 무한한 에너지를 충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너지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코드를 콘센트에 연결하면 충전이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타는 목마름으로 광야를 홀로 걷다 쓰러지면 로뎀나무 아래의 콘센트에 코드를 연결시켜 에너지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광야를 홀로 걷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아무리 걸어가도 로뎀나무 그늘이 보이지 않습니까? 타는 목마름과 간절함으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이 심어놓고 기다리시는 로뎀나무가 있음을 믿고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로뎀나무에 이르면 무한한 에너지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회복과 능력의 에너지를 충전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로뎀나무 아래 충전은
2. 육체적인 충전입니다(5-7).
5-7절,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서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영적인 능력이 뛰어난 엘리야선지자도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는 광야를 걸을 때 힘이 들고 지쳤습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계셨기 때문에 쉬셔야 했습니다. 풍랑이는 배위에서 주무시기도 했습니다. 영적인 일을 하는 목사님들은 피곤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더 피곤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서 잠을 자며 육체적인 휴식을 취했습니다. 육체도 피곤하면 쉬어주어야 합니다. 기계도 기름칠을 하고 쉴 때가 있듯이 사람의 육체도 피곤할 때 쉬어야 합니다. 철인경기에서 우승한 강인한 육체를 가진 철인이라 할지라도 쉼이 필요합니다. 엘리야는 몹시 피곤했습니다. 천사가 가져온 숯불에 구운 떡을 먹고 물 한 병을 마신 후에 다시 잠이 들어 천사가 다시 와서 깨울 정도로 지쳐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쓰러져 잠을 자고 음식을 먹은 후에 또 잠이 들었습니다. 육체적인 쉼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허기에 지쳐 누운 엘리야를 위해 친히 먹을 것과 물을 준비하여 주셨습니다. 이전에도 도피 중에 있는 엘리야의 일용할 양식을 까마귀를 통해서, 혹은 가난한 과부를 통해서 공급하신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천사를 보내셔서 직접 공급해 주셨습니다.
육제적인 피로가 지속되면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휴식을 통한 재충전이 필요합니다. 배고프면 먹어야 합니다. 영적인 것으로 육체의 배고픔과 갈증은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육체는 육체적인 필요가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잠을 자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과거에 금욕주의자들은 육체를 학대해야만 영이 맑고 깨끗해진다고 생각하여 육체를 못살게 굴었습니다. 금식을 밥 먹듯이 하고 자기 몸을 억지로 괴롭혔습니다. 물론 자기절제를 통해 얻는 것도 있겠지만 영과 육체의 조화를 통해 온전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은혜도 영적인 쉼을 통한 재충전이 필요합니다. KTX를 타고 빨리 달릴 때 느끼는 희열도 있지만 자전거를 타거나 걸으면서 천천히 자연을 감상하는 기쁨도 필요합니다. 달리다가 잠시 쉬면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것들도 보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도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긴장과 이완이 필요합니다. 긴장한 후에는 반드시 이완을 해주어야 합니다. 고무줄이 계속 긴장해있으면 끊어지기 때문에 풀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영혼이 소중하듯이 육체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육체의 건강을 잘 챙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관리하듯이 성결하고 건강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육체를 잘 관리하다가 하나님이 비워달라고 하실 때 깨끗하게 비워드릴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탈진상태에 있던 엘리야에게 기운을 회복시켜 준 것은 음식과 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주신 음식과 잠이 다시 엘리야를 일으켰습니다. 40일 동안 걸어서 호렙산에 이르게 되는 힘을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체의 건강을 잘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건강해야 영적인 일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건강해야 봉사할 수 있습니다.
작년 12월에 어떤 신문에 실린 재미있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9988234 여행 붐이 일어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고 이틀 앓다 사흘째 죽는다."는 ‘9988234’ 여행은 일본의 유명사찰을 돌면서 불공을 드리는 노인대상 여행상품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했습니다. 다이이치(第一) 생명경제연구소가 2007년에 일본의 40~70대 남녀 735명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서는 75.9%가 '어느날 갑자기 심장병 등으로 죽고 싶다'고 응답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건강하게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죽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절에서 불공을 드리며 건강을 비는 사람들도 있는데 하나님이 주신 육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건강하게 사용하다가 이삼사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저와 여러분들도 골골하게 오래살기 보다 건강하고 팔팔하게 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미련없이 깨끗하게 가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건강관리가 중요합니다. 엘리야선지자도 하나님이 건강을 관리해주신 것입니다.
교구 구역회를 할 때 구역장 권찰님들께 건강관리를 위해 운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건강은 관리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건강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도 청소하고 관리하듯이 자신의 몸은 자신이 관리해야 합니다. 꾸준히 운동을 해야 합니다. 새벽기도도 꾸준히 하면 몸에 익숙해지듯이 운동도 익숙해지도록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금년 2월에 목사님들의 모임에 가서 은혜와 도전을 받았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주신다는 내용과 더불어 어떤 목사님의 건강관리에 대한 말씀을 듣고 도전을 받았습니다. 60세가 넘은 목사님이 꾸준히 아차산을 오르고 역기와 아령으로 만든 근육과 C자형 배를 보여주며 자랑하셨습니다. 목회자가 1년은 설교, 2년은 인격, 3년은 가정, 4년은 건강으로 목회를 한다는 말씀에도 공감이 갔습니다. 목회도 체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젊은 목사님들에게 운동을 꾸준히 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저도 아침에 테니스운동을 하지만 하체가 약하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단을 오르기로 결심하고 가능하면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건물계단을 걸어서 올라가고 있습니다. 몇 개월 사이에 얼마나 다리근력이 강해졌는지 모릅니다. 만져보실래요?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육체란 영혼을 지고 가는 당나귀"라고 했습니다. 영혼을 지고 가는 당나귀에게 음식과 쉼을 주지 않으면 언젠가 쓰러져서 영혼을 싣고 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건강하고 힘이 넘치는 영혼을 소유하고 있지만 육체가 약해지면 언젠가 영혼의 힘도 약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염세주의 철학자였던 쇼펜하우어가 ‘희망에 대하여’ 라는 책에서 건강에 대하여는 좋은 지적을 했습니다.
“행복은 건강이라는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라.
분노와 격정과 같은 격렬한 감정의 혼란을 피하고 정신적인 긴장이 계속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날마다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섭취하는 음식물에 대한 조절이 필요하다.
건강하면 모든 것이 기쁨의 원천이 된다.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건강하지 않으면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없다.“
저는 다음 주에 있을 휴가를 가족들과 함께 갔다가 혼자서 시간을 보낼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신나게 놀 생각입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고향을 찾아 어린 시절 뛰어놀던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을 계획입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으면 매운탕도 끓여 먹을 것입니다. 고향의 정취를 사진에도 담아올 생각입니다. 혼자서 조용히 나를 돌아보는 시간도 가질 예정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도 생각해 볼 것입니다. 영적인 일을 잠시 쉬고 육체적인 놀이와 쉼을 통해 얻는 재충전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좋은 분이십니다. 광야길을 걷다가 로뎀나무 아래 지쳐 쓰러져 죽기를 청하는 엘리야를 호통치거나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먼저 육체적인 쉼을 주셨습니다. 잠을 자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어루만지며 깨웠습니다. 흔들어 깨우지 않고 조심스럽게 위로하며 깨우는 표현입니다. 사랑스런 자녀가 지쳐 쓰러져 있을 때 애틋한 사랑과 안스러움으로 마지못해 깨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베어나는 모습입니다.
고린도후서 7:6절에 위로의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7:6)
지친 육체를 위해 떡과 물을 주시고 사랑으로 어루만져 깨우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통한 충전을 체험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뎀나무 아래 충전은
3. 사명의 충전입니다(8).
8절,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어제 아내와 지은이가 외출을 하는데 아내의 핸드폰에 밧데리가 얼마 없었습니다. 저녁에 충전하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약속 때문에 핸드폰이 꼭 필요하다며 사무실 제자리에서 충전을 부탁했습니다. 핸드폰을 받아 콘센트에 연결하고 충전이 되는줄로 알았습니다. 한참을 지나고 보았더니 밧데리 눈금이 더 줄어들어있었습니다. 확인했더니 콘센트에는 꼽았는데 콘센트를 꼽는 전원에 불이 꺼져 있었던 것입니다. 충전한다고 몇 시간을 꼽아놓아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밧데리만 더 소모되고 말았습니다. 전원을 공급하는 장치가 off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홀로 충전을 받겠다고 노력해도 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 전원을 공급해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은 의미가 없습니다. 홀로 광야로 들어간다고 힘을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있다고 힘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로뎀나무 그늘이 콘센트의 기능을 할지는 몰라도 콘센트에 전원이 공급되지 않으면 전혀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로뎀나무 아래 있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어루만지시면서 말로서 위로해주셨을 뿐 아니라 떡과 물을 주시면서 육체적인 기력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한 번의 어루만지심으로 일어나지 못하자 또 다시 천사를 보내어 깨우게 하셨습니다. 엘리야의 남은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두 번이나 깨우시고 음식을 공급하여 힘을 주신 이유는 엘리야가 감당해야 할 또 다른 사명을 위해서였습니다. 엘리야는 일어나 먹고 마시고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호렙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새 힘을 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적인 좌절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은 사명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서 지금 죽기를 청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힘을 주어 남은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더 이상 죽기를 간청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음식을 먹고 힘을 내어 40일이나 걸리는 힘든 광야길을 걸어서 호렙산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사명이 있는 한 지금 당장 죽고 싶다고 해도 죽지 않습니다. 지쳐 쓰러져도 하나님이 어루만지시고 필요한 음식을 공급하여 육체를 충전하신 후에 다시 사명을 받는 호렙산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온누리교회 하용조목사님이 소천하여 장례를 마쳤습니다. 그분에 대한 글을 보았더니 청년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고생하면서도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수술도 여러 번 받았지만 하나님의 사명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하나님이 살려주셨다가 사명이 다하여 하나님이 불러가셨습니다. 사명이 다 할 때까지는 죽지 않습니다.
엘리야처럼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쳐 로뎀나무 아래서 지금 죽고 싶다고 하나님께 하소연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이제는 도저히 더 이상 못가겠다고 현재의 자리에서 낙망하여 주저앉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세상적인 성공은 이루었는데 마음이 허전한 분이 계십니까? 누군가의 공격과 위협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로뎀나무 아래 엘리야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혼자서 광야를 걸어가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있을 때 하나님은 만나 주셨습니다. 잠들어 있는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위로하시고 음식과 물로 기력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쓰러진 엘리야를 다시 찾아오셔서 다시 위로하시고 음식을 먹게 하신 후에 새 힘을 주시고 남은 사명을 위해 호렙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인 새 힘을 충전받기 원하십니까? 홀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친 육체를 충전하는 건강관리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를 통한 사명의 충전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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