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지혜로운 나그네 생활

하마사 2011. 7. 27. 21:00

본문: 벧전 2:11-17

찬송: 494장

제목: 지혜로운 나그네 생활

목표: 지혜로운 나그네로 살게 한다.

 

 

휴가철이 되었습니다. 집을 떠나 산과 바다로 나갑니다. 휴가가 끝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휴가기간 동안의 나그네 생활은 잠시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잠시 살다가 지나가는 나그네와 행인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하늘을 못보고 땅만 바라보면 땅의 것이 최고인양 살기 때문입니다.

나그네세월을 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이 땅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나그네 생활은

 

1. 제어하는 생활(11)

11절,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최근에 중국에서 열차사고가 일어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사고의 원인이 있지만 전문가들에 따르면 자동멈춤장치 고장과 관제센터의 실수로 보고 있습니다. 6km이내에 다른 열차가 있으면 자동으로 멈추는 장치가 고장이 나서 멈춤기능이 정상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멈추어야 할 때 멈추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멈추지 않으면 사고가 발생합니다.

‘제어하라’는 말은 삼가라, 그만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육체의 정욕이란 ‘하나님 밖에서 만족을 얻으려하는 인간의 세속적인 욕구나 욕망들’을 의미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말은 하나님 밖에서 만족을 얻으려는 세속적인 욕구나 욕망들을 삼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끊임없이 육체의 정욕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육체란 단순한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한 본성을 의미합니다. 육체에서 비롯된 정욕은 영적인 삶을 어렵게 합니다. 거룩하게 살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옛 자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영혼을 거슬려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육체의 정욕은 영혼을 거슬러 싸우고, 영혼은 육체의 정욕을 거슬러 싸우므로 성도의 마음은 항상 영적 전쟁터와 같습니다. 불신자들이 갈등하지 않는 것을 성도들은 때로 갈등해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아가는데 성도들은 양심의 소리를 듣고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죄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믿지 않을 때 가졌던 죄악된 습성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죄가 마음속에서 싹터 자라기도 합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기위해 필요한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거슬리는 육체는 세상의 쾌락과 안락에 안주하도록 만듭니다. 육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자고 유혹합니다.

육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나그네는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체의 일을 하는 것이 쉽고 즐겁습니다. 문제는 영혼이 육체의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육체와 성령이 서로 대적하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육체의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육체의 소욕을 삼가며 살아가는 성령충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노력으로 육체의 정욕을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날 죄악의 물결은 너무 거세게 우리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대제국 로마가 야만족이었던 게르만 민족이 대거 몰려와서 무너졌듯이 오늘날 세속의 물결이 교회와 가정 안으로 넘쳐 들어옵니다. 현대인으로 살려다보면 어쩔 수 없다고 변명을 하면서 서서히 세속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2)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나그네가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보이는 것은 온통 땅의 것인데 어떻게 생각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하늘의 것은 보이지 않고 당장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육체의 정욕대로 살아가는데 본받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가랑비에 옷이 젖습니다. 본받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각 속에 들어와 어느새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게 되어 버립니다. 그렇다고 세상과 단절하고 기도원이나 수도원에 가서 생활할 수도 없습니다.

나쁜 습관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받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 하겠습니다. 퇴근하여 집에 들어가면 먼저 손과 발을 씻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고 성경책을 읽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얼마나 경건한 목사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일단 쉬고 싶습니다. 종종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들고 뉴스도 보고 동영상도 보고 메일도 확인하고 카페와 홈페이지에 들러 글도 확인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웃으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하는 행동을 지은이가 똑같이 따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빠처럼 침대에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을 한다는 것입니다. 웃고 넘어갔지만 마음이 찔렸습니다. 어떻게 좋은 것은 본받지 않고 나쁜 것은 그렇게 잘 따라하는지 모릅니다. 성경보고 기도하는 경건한 모습은 닮지 않고 이처럼 나쁜 것은 저절로 닮는지 말입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유혹은 어느 정도 이길 수 있지만 내면에서 일어나는 육체의 욕망을 제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가장 치열한 영적 전쟁은 인간 내면에서 일어난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을 따르는 생활과 육체의 정욕을 따르는 생활의 가장 치열한 접전지가 우리의 내면이라는 뜻입니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으며 넘어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금욕주의나 고행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한 태도를 겸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의지만으로는 땅의 것을 추구하는 육체의 정욕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이기려면 절대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6-8).

육신의 생각은 사망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는 것이므로 제어하며 살아야 합니다. 육신의 정욕은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제어하지 않으면 끝없이 달려갑니다. 보이는 땅엣 것이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보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생각대로 하라고 가르칩니다. 상품광고에도 ‘생각대로 T’라는 광고가 있습니다. 생각하고 느끼는 대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육신의 정욕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잠시 이 땅에 월세로 살아가는 나그네입니다. 주인께서 나가라고 하면 떠나야 하는 나그네입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할 월세집에 너무 과잉투자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땅의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 수는 없지만 너무 집착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면서까지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살지는 말아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과 욕심을 제어해야 합니다. 단언하지만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안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야합니다.

성령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나그네 생활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지혜로운 나그네 생활은

 

2. 선행하는 생활(12)

12절,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예화> 장기려박사

장기려박사는 경성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이었지만 그는 평생을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무료진료를 했던 한국의 슈바이쩌라고 불리는 의사였습니다. 그는 경성의전에 들어갈 때 가난한 이웃을 돕는데 자신의 일생을 바치겠다고 했던 하나님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며 살았던 신앙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던 선행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생활은 제어하는 생활에 비해 적극적인 생활입니다. 제어하는 것은 브레이크와 같습니다. 행동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어하는 것만으로 나그네 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불신자들과 단절하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또한 그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들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방인들과 더불어 살면서 똑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불신자들은 성도들을 욕하고 비방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잘못을 하면 침소봉대합니다. 매스컴은 과장하여 교회의 잘못을 부풀립니다.

베드로전서가 쓰여질 당시에는 더욱 심각했습니다. 로마인들을 비롯한 헬라인들은 성도들끼리만 공동체를 이루어 성례전을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오해하여 끔찍한 행악자 집단이라고 비방하곤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남녀가 함께 모여 근친상간을 일삼으며, 사람의 고기를 먹고, 동물의 피를 먹는 집단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추행 때문에 미움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이라는 누명을 씌워 비난했던 일은 오늘날과 비슷합니다. 이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불신자들에게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선행을 보여줌으로서 그들의 비방이나 험담 또는 박해를 잠잠케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소유한 복음의 진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선한 행실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할 때 쓰는 용어 중에 ‘말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잘한다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말만 잘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말을 잘하고 말한대로 행동하면 이런 부정적인 단어로 사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말만 잘하는 사람은 신임을 받지 못합니다.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공감할지 몰라도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말은 힘을 잃게 됩니다.

입으로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 위에 불신자들에게 귀감을 보이는 선한 행동이 따를 때 더욱 효과적인 전도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한 행실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입으로 복음을 증거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전도방법 중에 관계전도가 있습니다. 선한 행실을 통해 아름다운 관계를 형성한 후에 전도를 하면 믿기로 결단하는 결신률이 높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방인들에게 비방을 받으면서도 선한 행실을 해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선한 행실을 통해 우리 자신들이 영광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칭찬받는 것도 결국 주님의 영광을 위함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직접 들었던 산상수훈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갖은 모욕과 수치를 당하고도 대적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선한 행실을 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불신자들은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여 세속에 물들지 않으면서 선한 행실을 해야 합니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고아, 과부는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불우한 사람들의 대명사입니다. 이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보는 것이 경건한 삶입니다. 성경의 근본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경건은 이 두 가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구제하고 돕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사58:6-7)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육적인 고아와 미망인 뿐 아니라 영적인 고아, 미망인은 더 많습니다. 죄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들, 마음의 공허함과 외로움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들, 인간관계가 얽혀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 이 모두가 영적 고아와 미망인들입니다.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인생의 근본 고민을 해결해 주는 일은 더 큰 사랑이고 구제입니다. 사랑의 봉사는 물질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도 할 수 있고 위로의 말로도 하고 기도로 봉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노라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거짓 믿음을 가진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방황하는 청소년들, 오갈 데 없고 남한에 와서도 잘 적응 못해 괴로워하는 탈북자들, 외국인 노동자들, 실업자, 노숙자들 등, 우리의 작은 손길이 필요한 곳은 어디나 있습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우리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은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지혜로운 나그네들이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노르웨이에서 발생한 테러사건으로 온 세계가 슬픔에 잠겼습니다. 100명에 가까운 죄없는 생명을 무참히 살해한 범인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입니다. 정치적 성향이 어떻든지 사람을 무참히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정치적 성향을 신앙보다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해야 할 그리스도인이 악행을 저지른다면 어떻게 불신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예화> 얼굴없는 천사의 선행

작년까지 11년 사이 12차례 전주시 노송동 주민센터에 이어진 '얼굴 없는 천사'의 기부액은 모두 1억9720만4020원에 이릅니다. 2000년 4월 3일 초등 남학생이 '어른 심부름'이라며 58만4000원이 든 돼지저금통을 민원대에 놓고 간 다음 세밑만 되면 중·장년 남자의 전화가 주민센터에 걸려 왔습니다. 그때마다 동사무소 앞 공중전화 부스, 주차장 입구 화단 등엔 현금이 든 쇼핑백이나 종이상자가 놓여 있었습니다.

전주시는 노송동 주민센터 앞 도로를 '얼굴 없는 천사의 길'로 이름 짓고 주민센터 화단에 가로 1.2m, 세로 1m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시민의 뜻을 모아 '얼굴 없는 천사여, 당신은 어둠 속의 촛불처럼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만드는 참사람입니다. 사랑합니다.' 라는 글을 적었습니다.

얼굴없는 천사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나그네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한 행실을 통해 지혜로운 나그네 생활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지혜로운 나그네 생활은

 

3. 자유로운 생활(16)

16절,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예화>

우리나라 특수부대원들이 금년 1월 21일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21명의 삼호주얼리호 선원들을 무사히 구출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우리들도 죄로 인해 마귀의 인질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특수작전으로 구출되어 자유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걱정과 두려움 속에 마귀에게 끌려 다니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성령의 호위를 받으며 천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인생의 무거운 수하물을 싣고 항해하는 바다위에 갑자기 출몰하는 해적들처럼 시시각각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노리는 사단의 공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사단에게 인질로 잡히기도 하지만 최영함을 동원하여 해적을 물리치듯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단을 섬멸하고 천국항에 안전하게 입항하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은 삼호주얼리호 선원들처럼 두려움과 속박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 안에 거하면 자유함이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 나아온 많은 사람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 질병이 걸린 사람, 소외감으로 고통받는 사람, 죄를 짓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 등 귀신, 사람, 죄, 환경에 눌려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짐을 해결해주셨습니다. 억눌린 억압에서 해방을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예수님이 거라사인의 지방에 가셨을 때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실 때 귀신을 이천마리의 돼지 떼에게 보내어 바다에 몰사시키는 사건이 있습니다.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귀신의 조종을 받으며 자기를 상실하고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고향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 수도 없었습니다. 귀신이 그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를 귀신에게서 자유하게 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믿음으로 손을 대어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4) 말씀하셨습니다. 12년 동안 병에 매여 억압과 고통 중에 있는 여인이 병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요 8:31-32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말씀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자유를 누리는 신앙인입니다. 진리되신 예수님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공부하고 알수록 자유해야 합니다. 자유로운 사람이 상대방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에 비록 죄에게 종노릇하던 사람들이었을지라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유자가 되었으므로 이후로는 자유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기에 단서를 덧붙이는데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안에서 자유인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지대로 행동할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가 복음전도에 방해가 되는 악한 행동까지도 허용하는 방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 자유까지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죄와 율법에서 자유를 얻어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순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자유를 누리되 악을 위해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과 같이 자유해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자유가 있다할지라도 그 자유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자유라면 그것은 제한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도들의 자유는 타인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해주며 자유롭게 할 때 가치있는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권면하기를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 5:13) 고 했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방종의 수단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의 사소한 행동 하나는 믿음이 연약한 자로 하여금 실족하게 하거나 시험에 빠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신앙의 자유를 남용하지 않고 절제할 수 있는 미덕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반드시 기독교적 책임의식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자신에게 유익한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고 이웃에게 덕이 되지 않는다면 기꺼이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땅은 휴가철에 잠시 다녀오는 임시거처와 같습니다. 영원한 고향으로 착각하는 어리석은 나그네가 되지 말고 지혜로운 나그네 생활을 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나그네 생활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생활입니다. 선한 일을 실천하는 선행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종과 같이 주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로운 생활입니다.

이런 지혜로운 나그네 생활의 주인공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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