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들에게 말했다. “네가 어렸을 때 기억나니? 그날 차를 타고 어디로 가던 중이었는데 네가 무엇인가 잘못해서 아빠가 너보고 차에서 내리라고 했잖아. 그리고 집으로 걸어가라고 했어. 그땐 아빠가 잘못했다. 네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아빠가 너무 심하게 화를 냈어. 미안하다. 용서해 주렴.” 그러자 아들은 “네? 언제요? 그런 기억 없는데요.” 하며 기억이 안 난다고 끝까지 잡아떼었다. 정말 기억이 안 났을까? 아마도 계면쩍어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진심 어린 사과 덕분에 나는 아들과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혼자만의 행복한 착각일까?
몇 년 전 밀양이라는 영화가 화제였다. 주인공 신애는 아들 준이를 유괴당한다. 아들은 익사체로 발견된다. 아들을 잃고 고통당하던 신애는 기독교에 귀의하여 마음의 안정을 얻고자 노력한다. 나름 신앙이 깊어졌다고 여긴 신애는 아들을 유괴하여 죽인 범인을 용서하리라 결심하고 교도소로 찾아간다. 하지만 교도소에서 범인을 만난 신애는 경악한다. 기독교로 귀의한 범인이 신애에게 웃는 얼굴로, 신이 이미 그의 죄를 용서해 주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신애는 용서하지 않았는데 신이 이미 용서했다는 것이다. 충격을 받은 신애는 그만 정신이 이상해지고 만다. 얼마 후 신애는 야외 예배를 나온 교인들을 향해 확성기를 들이대고 노래를 틀어 놓는다.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다. 신애에게 기독교는 거짓이다. 신애는 고통 받고 망가진다. 한동안 정신 병원 신세를 진 신애는 퇴원 후 미용실로 향한다. 머리를 자르고 새롭게 살아가려던 신애는 미용사를 보는 순간 다시 고통에 빠진다. 어느덧 성장한 범인의 딸이 미용사가 된 것이다. 미용실을 뛰쳐나온 신애는 집으로 가 마당에서 거울을 들고 스스로 머리를 자른다. 늘 신애를 도와주던 카센터 주인이 나타나 거울을 들어 준다. 은총 같은 햇빛이 마당에 쏟아지고 있지만 신애는 여전히 괴롭다. 신애에게 쏟아지는 햇빛은 여전히 밀양(숨겨진 햇빛)인가? 거울을 들어 주는 순박한 카센터 주인이, 사랑을 외치는 교인들보다 훨씬 훈훈한 휴머니즘을 보여 준다.
이 영화에서 신애는 왜 고통당했을까? 용서의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범인이 사람의 용서 없이 신의 용서를 획득한 것이 문제다. 그가 진정 신의 용서를 받고 싶었다면 먼저 신애의 용서를 받았어야 했다. 그러고 나서 신의 용서를 받아야 했다. 순서가 바뀌었다. 사람의 용서 없는 신의 용서는 무효이다. 피해를 주었다면 당사자와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다. 사람에게 잘못해 놓고, 그 사람은 무시한 채 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종교가 있다면 누가 그런 종교를 진정한 종교로 인정하겠는가. 혹 그런 종교가 있다면 미신으로 오해받기 십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밀양이라는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기독교는 그렇게 저급한 종교인가. 그렇지 않다. 영화에 묘사된 종교는 왜곡된 모습일 뿐 건강한 기독교의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러한 잘못을 막기 위하여 유대인은 탈무드에 용서의 순서를 명시하였다. 신에게 용서받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사람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 이 순서를 어기면 용서가 불가능하다.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대속죄일'은 모든 사람이 신에게 용서받는 날이다. 그러나 모두가 신에게 용서받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이날 신에게 용서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일까? 사람에게 용서받지 못한 사람이다. 탈무드에 따르면 사람에게 용서받지 못한 사람은 신도 용서하지 못한다. 미쉬나(요마 8:9)에서는 신과 사람 사이의 죄는 대속죄일이 속하여 주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죄는 대속죄일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같은 텍스트에서 랍비 엘아자르 벤 아자리야도 사람의 동의를 얻기 전까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죄는 대속죄일도 속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신 앞에 서기 전에 먼저 사람을 찾아다니며 용서를 구한다. 사람에게 용서받지 못하면 신에게도 용서받지 못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1월 1일부터 10일까지 열흘의 기간을 '두려운 날들(야밈 노라임)'이라 부르며 사람과 신으로부터 용서받는 절기로 지킨다. 지난 일 년 동안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살펴보고 1월 1일부터 9일까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마지막 10일에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 왜 사람에게는 9일을, 신에게는 하루를 할애했을까? 신은 언제든지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사람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신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있는 그 자리에서 용서를 구할 수 있으나 사람에게는 전화하고 약속하고 찾아가는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은 언제나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사람은 거절도 하기 때문이다. 신과는 꼬일 이유가 없으나 사람과는 늘 꼬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문제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과 문제가 생겼는가? 먼저 사람을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신은 그 다음에 찾는 것이 순서다.
만일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빌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랍비 제이라는 그 사람 옆에 가서 얼쩡거리라고 가르친다. 얼쩡거리라는 것은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빌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라는 것이다. 어색하지 않도록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놓으라는 이야기다. 누구에게 잘못한 일이 있는가? 바로 용서를 구하자. 누군가 용서를 비는가? 부드러운 마음으로 용서하자. 누군가 용서를 빌지 않는가? 옆에 가서 얼쩡거리자. 아버지에게, 자식에게, 친구에게, 아내에게, 남편에게 그렇게 하자. 그러면 용서받고 용서하는 사회, 원망과 원한이 없는 건강한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다.
최명덕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이스라엘학회장, 한국이스라엘연구소장, 한국이스라엘친선협회 이사, 한국이스라엘문화원 이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역서로 《유대인 이야기》《지도로 보는 이스라엘 역사》《유대교의 기본진리》외 다수가 있다.
-좋은생각, 탈무드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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