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사람

관동대지진의 후세

하마사 2009. 11. 25. 09:54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닥친 도쿄에서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고 일본인들을 습격한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일본인들은 죽창을 들고 조선인 수천명을 학살했다.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는 쫓기는 조선인 유학생들을 집에 숨겨줬다. 그는 "유언비어를 경찰이 퍼뜨렸다"며 당국에 항의했다. 후세는 1926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일본인으로서 정중히 사죄드리고 자책을 통감한다"는 사죄문을 투고했다.

▶후세는 1919년 2·8 독립선언으로 체포된 재일 유학생들을 변호하면서 독립투사들과 연을 맺었다. 1923년 일본 왕세자 결혼식에 폭탄을 터뜨리려 한 박열, 1924년 황궁 폭탄투척 사건의 김지섭도 변호했다. 그는 1923년 총독부 코앞 천도교당 강연에서 "조선 해방은 조선인만의 문제가 아닌 세계 평화를 위한 일"이라며 일제를 비판했다. 고등계 형사가 제지했지만 연설을 멈추지 않았다.

▶후세는 1926년 동양척식회사에 빼앗긴 땅 찾기에 나선 전남 나주 농민들 편에 서서 "합법적 사기사건"이라며 거세게 항의해 총독부와의 협상을 이끌어냈다. 그는 일제에 밉보여 두 번 옥고를 치렀고 변호사 자격도 세 번 박탈당했다. 그의 활동을 돕던 아들이 옥사하기도 했다. 1946년 후세는 '조선 건국헌법 초안'을 재일 독립운동가들에게 선물하며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후세는 명치법률학교를 다니다 의병운동을 다룬 논문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을 발표했다가 검찰 조사를 받았다. 1903년 검사가 됐지만 자식과 함께 자살하려다 실패한 어머니를 살인미수로 기소한 뒤 "검사는 호랑(虎狼·잔인한 사람)"이라며 사직했다. 1920년엔 '자기 혁명의 고백'이라는 글을 발표해 "사회운동에 투철한 변호사로 살아가겠다"고 선언했다.

▶1953년 타계한 후세는 잊혀졌다가 1999년 아들이 쓴 책 '어느 변호사의 일생'을 발굴한 정준영 역사교훈실천운동 대표에 의해 새롭게 알려졌다. 정부는 2004년에야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일본에선 전기 출간, 기념비 건립 등 후세를 추모하는 움직임이 계속돼왔다. 최근엔 일본 변호사들과 재일동포들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있다. 대한변협도 제작비를 보태기로 했다. 변협은 "같은 법률가로서 조국의 박해를 받으며 조선을 도운 후세의 정신을 받드는 데 동참하겠다"고 했다. 후세는 유대인을 도운 독일인 쉰들러보다 헌신적이었다. 그동안 우리가 은인을 기리는 일에 소홀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조선일보, 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