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건과 신앙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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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정신 바탕 시장경제사상과 애국 귀감 |
청교도 정신 바탕 시장경제사상과 애국 귀감 철저한 자본주의 기업경영, 사후엔 전재산 사회 환원 서재필·이승만 도우며 미국에서 독립운동 드디어 하얀 봉투가 열렸다. 1971년 4월 8일, 한 달여 전에 노환으로 숨을 거둔 유일한 회장의 유서가 공개되다. 법학자 이종구 공증인이 유족과 회사 대표들 앞에서 유서를 읽어내려갔다.
“손녀 유일링에게는 대학까지의 학자금 1만 달러를 주고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내에 있는 묘소와 주변대지 5,000평을 상속한다. 그리고 유한양행의 주식 14만941주는 전부 유한공고 재단에 기증한다. 아들 유일선은 대학까지 공부시켰으니 자신의 길은 스스로 개척하라.”
이미 생전에 자신이 소유한 많은 주식을 공공기관에 기증했던 유 회장은 자신의 마지막 유산마저도 사회에 환원한 것이다. 일제와 건국 후 척박한 기업환경 속에서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며 재산을 축적했으면서도 자신은 청렴하게 살았던 그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는 모범을 보인 것이다. “넘치도록 선진문물을 배워오라” 유 회장의 이 같은 행동은 오랜 미국생황에서 몸에 밴 그리고 기독교 가풍에서 자라며 익힌 청교도적 윤리관에 기반하고 있다. 1895년 1월 평양에서 유 회장은 태어날 때부터 그의 부친(유기연)이 기독교인이었을 만큼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또 그가 자란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만큼 기독교가 크게 성행했던 도시였다. 서양 선교사들이 상주했었고 민족 지도자들이 신문화를 소개하며 청소년을 지도하고 있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 고당 조만식 선생을 비롯한 여러 애국자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던 곳이 1900년도 초의 평양이었다. 이곳에서 농산물, 건어물상을 시작으로 서구 신물품의 수입상을 했던 부친 유기연은 일찍이 서구문물을 접하고 기독교를 접하면서 민족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다음세대는 서구문물에 익숙해야 한다는 일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유기연은 아홉 살배기 그의 장남 유일한을 미국에 보내 선진문화를 배워오게 하였다. “넘치도록 선진문물을 배워오라”는 부친의 당부와 함께 1904년 박장현 순회공사를 따라 미국을 건너간 유일한은 내브레스카주 커시市의 침례교 신자의 집에서 자라게 됐다. 이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게 된 유일한은 그동안 신문판매, 구두닦이, 식당종업원 등 다양한 일을 통 해 근로의 습성을 키우면서 자본주의의 노동윤리를 몸소 체험했다. 가난과 질병의 민족 위해 제약사업 전개 1916년, 21세 되던 해 내브레스카주립대에 입학한 유일한은 그 후 앤 아버에 있는 미시간대학교로 옮겨 그곳에서 상과를 전공하게 된다. 대학생활 틈틈이 중국에서 수입되는 비단, 손수건, 카페트 등 특산물을 판매하는 일을 했던 유일한은 전공을 살려 GE에 입사해 회계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자기의 능력에 따라 할 일을 찾아 일하면서 경쟁하는 자본주의정신을 익힌 그는 1922년 ‘라초이’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숙주나물을 유통·공급하는 회사를 운영하게 됐다. 중국요리에 긴히 쓰이는 숙주나물은 특히 만두에 쓰이는 재료인데 숙주나물의 원료인 녹두를 미국에서는 구하기 어렵다는 데 착안해 통조림으로 만들어 판매한 것이 주효한 것이다. 유일한은 회사를 운영한 4년 동안 5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며 남다른 사업수완을 발휘했다. 그리고 1924년 녹두 구매차 동남아를 순방하던 중 들른 일제 치하 고국에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에비슨 학장의 권유로 영구 귀국을 결심하게 된다. 의사였던 중국인 부인 호미리 박사가 세브란스 병원 소아과 과장으로 영입되고 자신은 연희전문학교의 교수로 부임하는 조건으로 1926년 영구 귀국했으나 유일한은 계획을 바꿔 종로2가에 유한양행이란 상호로 제약회사를 설립했다. 유일한 회장이 제약업을 선택한 것에 대해 고범서 한림대 석좌교수는 “유 회장은 가난과 질병에 허덕였던 당시 민족의 삶을 보면서 제약회사를 통해 극복하게 하고 거기서 벌어들인 이익으로 교육사업을 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최초의 기업구상이 철저한 시장경제원칙 하에서 기업을 경영하면서도 나라와 민족을 우선하며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란 결과를 도출하게 했다는 것이 조 교수의 분석이다. 이렇게 시작된 유한양행은 일제치하와 건국, 6·25 등 험난한 기업환경을 극복하면서 성장해나갔고 1962년 국내 제약업체로는 처음으로 기업을 공개(公開)하고 주식을 상장했다. 그 과정에서 회사의 실제자산이 발행주식의 총 액면가 보다 6~7배나 많아 일부 임원진이 공개전 무상증자를 권유했으나 유 회장은 “증자를 하면 투자자들이 모두 손해를 본다”며 이를 거부했던 일화 또한 그가 정직한 자본주의의 행동의 모범을 보였다는 찬사를 듣게 하는 대목이다.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결의문 낭독 유일한 회장의 일화를 소개할 때 간과하기 쉬운 대목은 그가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자였다는 점이다. 미국으로 갈 당시 부친의 당부가 “선진문물을 배워오라”는 것임을 잘 알고 있던 유일한은 14세 되던 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박용만 선생이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에 다니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을 보태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가 대학을 다니던 1910년대 후반에는 고국에서는 일제의 침탈과 억압이 심하게 전개되던 때였다. 그리고 때마침 터진 1919년 3·1운동은 해외에 있는 한민족의 의거에 불을 지폈다. 미국에서도 각지에서 한국인의 독립집회가 연이었다. 그 중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는 그 규모와 성격 면에서 미국에서의 민족운동의 한 획을 긋는 큰 행사로 기록되고 있다. 서재필, 이승만, 장적수, 김도연, 이대위, 정한경 등 민족지도자들이 총망라된 이날 행사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미국 국민, 일본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와 결의문이 채택됐다. 바로 이 결의문 작성에 유일한이 관여한 것이다. 특히 이날 행사에서 결의문을 선포한 3인의 학생 중 유일한이 포함돼 있었다는 것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를 계기로 유일한은 비로소 많은 한국 청년들을 사귀며 애국지도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데 서재필 박사와의 각별한 인연도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유일한은 서 박사를 아버지처럼 모시며 제반 일을 상의하고 존경해왔다. 1924년 류한주식회사를 설립했을 때 서재필 박사를 사장으로 추대했던 유일한은 1926년 고국으로 영구귀국할 때 서 박사로부터 ‘버들표 목각품’을 선물받았는데 그것이 유한양행의 심벌이 됐다. “애국심과 신앙 빼면 남는 게 없는 인물” 유일한 회장의 말없는 애국심 못지않게 그의 내면생활을 이끌어준 또 하나의 인생관은 기독교적 신앙심이었다. 스스로 신앙인이나 크리스천이란 말을 아껴 흔한 간증집이나 기도문을 찾기 어렵지만 그가 기독교에 정신적 기반을 두고 행동했던 것 만큼은 확실하다. 유 회장의 조카인 유승흠 연세대 보건대학원장은 “유 회장이 늘 성경을 가까이 하고 기독교적인 기준을 가지고 행동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또 전 평생을 같이 했던 딸 유재라 여사 역시 생전에 “부친은 애국심과 기독교신앙을 제외하면 남는 게 없는 사람” 이라며 “많은 크리스천이 아버지 같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미 어린시절부터 기독교적인 가풍에서 자랐고 그가 미국으로 떠났을 때도 그는 침례교 신자의 집에서 자랐으며 그의 미국 생활 중에도 그의 가족들은 그를 위한 기도를 늘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신실한 기독인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이라는 것은 故 김명선 박사의 증언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유한공고 재단이사장을 지낸 김 박사는 “유일한 회장이 임종을 앞둔 며칠 전 나에게 영어로 된 성경책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해 가져다 준 적이 있다”며 “그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말씀을 읽고 성경을 곁에 두고 싶어했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 유일한 회장이 평생 보여준 청교도윤리에 입각한 기업가정신과 애국심은 결국 기독교적 사상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조선 말 실학자들에 의해 주창된 신상(紳商) 또는 사상(士商)정신이 있다. 선비들이 실업계에 진출해 나라를 부강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같은 정신은 구한말 나라를 부강하게 해야 한다는 일부 뜻있는 상인들에게 전수됐고 해방 후에도 올바른 기업풍토 조성에 앞장섰던 부류가 바로 신상그룹이다. 오늘날 청렴한 생활과 애국심, 신실한 신앙으로 한 평생을 살다간 유일한 회장의 행보가 바로 신상의 모범으로 추앙받고 있다. 학술원 회원이기도 한 조기준 고려대 명예교수는 “시장경제의 본고장 미국에서 성장하면서 시장경제의 참 정신을 배우고 외국 땅에서 독립운동에 힘쓴 서재필 등 선배동지들을 접하면 나라사랑의 뜻을 키우고 귀국 후 기업활동에서 나라사랑을 실천한 그는 말그대로 신상이었다”고 평가했다. 또 차중근(車重根)유한양행 사장은 “진취적인 기업가이며 애국애족의 독립운동가, 헌신적인 사회사업가요 교육자였던 유일한 회장의 유지는 지금도 유한양행에 기업정신으로 흐르고 있다”며 “선대회장의 이 같은 뜻을 기려 구로구 온수동에서 부천에 이르는 길이 ‘유일한로(路)’로 명명됐는데 이 분의 뜻에 누가 되지 않도록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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