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바울의 중보기도

하마사 2009. 1. 10. 09:46

본문: 엡 3:14-19

찬송: 483장

제목: 바울의 중보기도

목표: 바울의 기도처럼 살게한다.

 

 

본문은 모든 인간족속들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이름을 주시고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 바울이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중보기도 하는 내용입니다. 크게 세 가지로 에베소교회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1.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옵소서.(16)

16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사람은 보이는 겉 사람과 보이지 않는 속사람이 있습니다. 겉 사람과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이 진짜 건강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세월이 지나면서 후패하고 늙어가지만 속사람은 세월에 관계없이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 사람과 속사람이 함께 후패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겉 사람은 후패해도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속사람을 강하게 만들어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십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면 속사람이 건강하기 때문에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을 이길 수 있습니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인생의 마지막 강의’를 한 카네기멜론대학의 랜디 포시교수의 동영상을 소개합니다. 46세의 젊은 나이에 최장암 말기선고를 받고 퇴임이 예정된 상황에서 <마지막 강의>를 합니다. 10분의 영상이지만 한 인간의 삶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닮고 있습니다.

신앙과는 무관한 영상이지만 겉 사람은 죽어가지만 속사람이 건강한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물며 예수님을 믿고 성령이 함께 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은 겉 사람은 후패할지라도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동영상 시청]

 

2. 주님과 동행하게 하옵소서.(17상)

17절 상반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을 위해 두 번째로 중보기도를 하면서 주님께서 마음에 계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이 계시든지 아니면 내가 주인이 되든지 또 아니면 마귀가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면 내 뜻대로 살고, 마귀가 주인이 되면 마귀가 시키는 대로 살아갑니다.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우리는 죄와 허물로 인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내 뜻대로 사는 것도 하나님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우리 마음에 마귀가 주인이 되면 마귀의 종이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삶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거라사 지방에 귀신들린 사람이 등장합니다. 무덤 사이에 살면서 늘 소리를 지르면서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묻자 자기 이름 대신에 ‘군대’라고 대답했습니다. 자기의 존재는 없어지고 귀신들의 조종을 받고 귀신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자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졌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자기가 주인이 되거나 마귀가 주인이 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멀어지거나 대적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이 계셔야 기쁨과 감사로 행복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말씀합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에 계실 때 과실을 많이 맺을 수 있으며 반대로 주님이 계시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것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이란 좋은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갈 길이 아무리 멀어도 갈 수 있습니다.

눈이 오고 바람 불고 날이 어두워도 갈 수 있습니다.

바람 부는 들판도 지날 수 있고 위험한 강도 건널 수 있으며,

높은 산도 넘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갈 수 있습니다.

나 혼자가 아니고 누군가와 함께라면

손 내밀어 건져 주고, 몸으로 막아 주고,

마음으로 사랑하면 나의 갈 길 끝까지 잘 갈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혼자 살기에는 너무나 힘든 곳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단 한 사람의 손이라도 잡아야 합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믿어야 하며

단 한사람에게라도 나의 모든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동행의 기쁨이 있습니다.

동행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누군가의 동행에 감사하면서 눈을 감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험난한 인생길, 누군가와 손잡고 걸어갑시다.

우리의 위험한 날들도 서로 손잡고 건너갑시다.

손을 잡으면 마음까지 따뜻해집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하면 눈이 오고 바람 불고 날이 어두워도 갈 수 있고, 바람 부는 들판도 지날 수 있고 위험한 강도 건널 수 있으며 높은 산도 넘을 수 있습니다. 하물며 주님과 함께 라면 어떻겠습니까? 풍랑 일어나는 바다에 있어도 주님과 함께 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풍랑을 잔잔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라는 말씀처럼 믿음이 있을 때 주님이 우리 마음속에 계실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마음 문을 열 때 주님이 들어오셔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동행자가 되어 주십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살면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살면 주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 하셔서 나라의 경제적인 위기도 이길 수 있습니다. 교회의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 여러 어려움도 능히 이길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3. 사랑이 충만하게 하옵소서.(17하-19)

17절 하반절- 19절,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을 위해 세 번째로 중보기도를 합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을 덧입어 사랑이 충만케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계신 결과 성도들이 사랑 가운데 깊이 뿌리 내리고 견고한 기초를 소유하게 됩니다. 바울은 식물과 건물에 비유하면서 성도들의 바람직한 신앙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의 지식으로나 마음으로 온전히 깨달을 수 없는 사랑의 원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넓은 사랑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적용되는 것으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주님은 사랑을 베푸실 때 차별을 두고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더 큰 사랑을 나눠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넓고도 큽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조건없이 사랑한다 하면서도 이익을 따지면서 사랑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범위를 넓혀가야 합니다. 주님은 원수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넓은 사랑을 본받아 사랑의 넓이를 넓혀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은 긴 사랑입니다. 사랑하다가 싫증나서 중간에 시들해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다가 미워하며 헤어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한번 사랑하시면 끝까지 영원토록 사랑하시는 길고도 긴 사랑입니다. 잉태하기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은 지금도 사랑하시고 앞으로 영원토록 사랑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은 높은 사랑입니다. 가장 타락한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높고 숭고한 사랑입니다. 사랑할 만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높은 사랑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조롱하고 죽이라고 외치던 사람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못함이니이다.”(눅 23:34) 라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깊은 사랑입니다. 무한한 용서의 사랑입니다.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잘 표현해주는 말씀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무조건 용서해주시는 그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도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와 주님을 찾고 예배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주님의 완전한 사랑을 알고 체험한 우리들도 사랑으로 충만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바울은 중보기도를 하면서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넘치도록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중보기도를 마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했던 중보기도처럼 저와 여러분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주님의 완전한 사랑을 덧입어 사랑으로 충만한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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