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빛의 자녀답게 삽시다

하마사 2008. 11. 26. 09:39

본문: 엡 5:8-9

찬송: 259장

제목: 빛의 자녀답게 삽시다

목표: 소망으로 어둠을 밝히며 빛의 열매를 결실하는 빛의 자녀로 살게한다.

 

 

옛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환한 대낮에도 등불을 켜서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진실된 사람, 정직한 사람을 찾기 위함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디오게네스의 등불"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디오게네스가 찾던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1:9절에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하며 예수님을 참 빛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의 증거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8:12절에는 예수님 자신이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하시며 스스로 세상의 빛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따르면 어두움에 다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빛을 얻게 된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캄캄해도 그리고 죽을 일이 쌓여있어도 예수님을 따라가면 어둠을 이기고 생명의 빛을 누리며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참 빛이 되시는 주님 안에 있는 우리도 빛이라고 하면서 빛의 자녀들처럼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빛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8전)

8절 전반절, “저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얼마 전에 집에 있는 싱크대가 고장이 나서 기술자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고치시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주방에 형광등 불을 환하게 켜 놓았지만 작은 손전등을 켜서 싱크대 안을 비추며 일을 했습니다. 아무리 밝은 형광등 불빛이라도 어두운 구석은 비출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의 언저리에는 어두운 구석이 있기 마련입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싱크대가 막히듯이 삶의 장애물과 막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어두운 구석을 밝히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길 또한 있습니다. 그분은 한 참을 작업하시더니 싱크대 호스에 막힌 노폐물을 제거했습니다. 얼마나 꽉 차있던지 그것으로 인해 물이 내려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시 호스를 끼우고 물을 틀어보니 막히지 않고 잘 내려갔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노폐물이 혈관을 막아 여러 가지 위험한 질병을 일으키듯이 영적인 노폐물이 영혼의 건강을 해칠 수도 있겠다고 말입니다. 그 때 손전등처럼 어두운 부분을 밝힐 수 있는 빛과 노폐물을 제거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삶의 어두운 부분을 밝혀 장애물을 제거해주십니다. 진리와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빛이 되십니다. 출애굽기 10장에 보면 하나님이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 아홉 번째 재앙이 흑암의 재앙이었습니다. 여덟 번째 재앙까지 내렸지만 바로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자 하나님은 애굽 땅에 3일 동안 흑암재앙을 내려 암흑세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더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애굽 전역이 암흑천지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는 고센 땅에는 밝은 빛이 비추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할 때도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이 삶의 중심에 계시면 아무리 어둡고 캄캄한 환경에 처한다 해도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생명으로 인도해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빛으로 삼고 살아갈 때 절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감옥에서 찬송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들의 중심에 빛 되신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어둡고 캄캄한 감옥이라 할지라도 빛 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낙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빛은 어두움을 물리치고 주변을 밝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 속에서도 감사와 기쁨이 넘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다윗의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삼하 22:29,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하나님이 등불이 되시면 삶에 드리워지는 어떤 흑암이라도 밝혀주실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용기있게 현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화>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초원지대로 여행길을 떠났습니다. 날은 뜨겁고 길은 멀었습니다. 물도 떨어졌습니다. 아들은 목이 타고 피곤하다며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아버지는 머지않아 동네가 나타날 것이라며 참으라고 달랬습니다. 얼마쯤 가자 묘지가 나타났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안도하면서 이제 곧 목을 축일 수 있다며 아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사막이나 초원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묘지를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씁니다. 묘지는 동네가 가까이 있다는 표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무덤이 끝이나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과 희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은 실패와 절망처럼 보이지만 그의 빈 무덤은 영원한 소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난다’고 말입니다.(시 112:4) 아무리 어렵고 깜깜한 암흑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직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빛이 일어남을 믿고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우물에는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습니다. 퍼 올린 두레박에 고통의 그림자만 담겨 있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림자를 있게 한 빛줄기가 그 안에 함께 있습니다. 실패와 고통 속에 성공과 영광의 빛줄기가, 미움 안에 사랑이, 절망 중에 희망이, 눈물 속에 기쁨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강영우박사의 예화>

2001년부터 현재까지 미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로 있는 강영우박사는 중학교 3학년 때 축구시합 도중 사고로 실명을 한 이후 어머니와 누나마저 잃고, 가족들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던 아픔을 극복하고 현재 미국 5400만 장애인 정책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는 시력을 잃은 것이 오히려 인생의 성공요인이 됐다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력을 잃고 장애인 재활원을 전전하며 수년간 방황했으며 자살도 여러 차례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목사님의 도움을 받은 뒤 “갖지 못한 한 가지를 불평하기보다 가진 열 가지를 감사하자”며 마음을 고쳐먹고 믿음 안에서 소망을 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앙인이었던 아내 석은옥씨를 만났고 그의 노력과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가 어우러져 지금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시행정부의 종교 및 사회봉사 자문위원, 유엔 세계 장애위원회 부의장 등을 역임했고 96년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국제 장애인상 창설을 주도해서, 한국이 이 상의 첫 수상국이 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처럼 빛의 자녀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둠속에 머물러 있도록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돕는 사람을 만나게 해서라도 소망을 품게 하시고 좌절을 딛고 일어서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모르기 전에는 어두움에 다녔지만 이제는 빛의 자녀임을 믿습니까? 빛의 자녀는 캄캄한 어둠속을 걸어간다 할지라도 절망하지 말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감사하며,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감사하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실 하나님을 믿고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어둠을 밝혀야 합니다.(8하)

(8절 하반절),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자녀들은 어둠을 밝히면서 살아야 합니다. 딸 지은이는 잠이 들기 전에는 방에 불을 끄지 못하게 합니다. 안방의 불을 끄려면 거실에 불을 켜놓고 방문을 살짝 열어놓으라고 합니다. 어두움 속에 있는 것을 싫어하고 무서워합니다. 어린 아이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빛이 없는 암흑 속에 오래도록 혼자 있는 것은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제가 살던 시골에는 집에서 멀지않은 거리에 횃굴이라고 불렀던 동굴이 있습니다. 산 중턱에 있었는데 그리 깊지는 않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캄캄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횃불이나 랜턴을 준비하여 들어가곤 했었는데 굴속에는 박쥐가 있어서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짓궂은 친구가 굴 안에서 랜턴을 끄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빛이 없으면 나가는 길도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굴속에서 랜턴이 꺼지는 것처럼 암흑과 같은 환경이 엄습하여 공포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질병이나 가정의 어려움, 사업이나 직장의 어려움, 물질적 손해, 자녀들의 탈선이나 실패로 인해 절망 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일들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아무리 좋은 환경에 산다할지라도 스스로의 동굴에 갇혀 빛을 못보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거의 죄의식이나 잘못된 기억이나 오해로 인해 자기가 스스로를 동굴 속에 가두고 살아갑니다. 희망과 소망 없이 우울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동굴에 갇혀 사는 사람들은 어둠의 환경에 익숙해져 빛으로 나오기 싫어합니다. 나중에는 빛을 꺼리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싫어집니다. 매사가 귀찮습니다. 의욕이 없고 삶의 의미가 상실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각자의 동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동굴, 두려움의 동굴, 열등감의 동굴, 우울과 강박증의 동굴, 피해의식의 동굴, 절망의 동굴과 같은 각자의 동굴이 있습니다. 이 어둠의 동굴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스스로 나오지 못할 때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예화>

미국의 한 중환자 병동에 심한 화상을 입은 소년이 입원했습니다. 얼굴과 온 몸에 붕대를 감은 채 간신히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소년은 회생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대학생 한 명이 우연히 중환자실에 들어갔다가 소년을 보았습니다. 붕대로 온몸을 휘감고 있는 어린학생이 불쌍했던 청년은 그날부터 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환자기록을 보고 그 아이가 중학교 2학년임을 확인한 청년은 교과서를 읽어주고 영어 문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물론 아이는 아무런 대꾸도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청년은 매일매일 아이를 찾아왔습니다.

희미한 정신력으로 생을 이어가던 아이는 청년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을 보니 내가 나을 수 있나 보구나.” 그 날부터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회복세를 보였습니다. 차츰 청년이 묻는 말에 대답도 할 수 있게 되었고 함께 책을 읽는 일도 가능해졌습니다.

마지막 붕대를 푸는 날, 아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이 책을 읽어줄 때마다 나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생각을 했고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상상을 했어요. 학교에 가고 싶은 제 꿈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죠.”라고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죄로 인해 이 아이처럼 죽을 수밖에 없던 몸이었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어둠속에서 죽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참 빛 되신 주님을 만나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국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소망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안에서 빛으로 어둠을 밝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소망을 잃고 살아가던 어린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작은 일을 통해서 생명의 빛이 들어갔던 것처럼 내가 주님 안에서 받은 빛으로 어둠을 밝혀야 합니다.

마태복음 5:14-16절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이사야 60:1절에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하시며 빛을 발하며 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은 밝혀야 빛입니다. 등대가 빛을 발하여 밤에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들의 항해를 인도하듯 활주로의 불빛들이 항공기의 이착륙을 돕듯이 빛은 밝혀야 빛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등불을 켜서 말과 되로 덮어두지 않고 등경위에 두어 어둠을 밝히듯이 빛의 자녀들도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합니다. 어둠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모든 이웃들에게 참 빛 되신 예수님을 전하여 어둠을 밝혀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결실해야 합니다.(9)

9절,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나무나 곡식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아버님이 과수원을 하셨기 때문에 이 원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품질이 좋은 과일을 수확하기 위해 봄에 퇴비나 비료 그리고 닭똥과 같은 거름을 나무 주위에 뿌리고 온갖 정성을 기울입니다. 열매가 맺히면 그 중에 좋은 것만 남기고 좋지 않은 열매는 속아 내는 접과 작업을 합니다. 나무와 잎사귀의 상태를 늘 점검하여 병충해가 있으면 소독을 합니다. 소독을 하지 않으면 벌레가 먹거나 병이 생겨 상품의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여름 내 땀을 흘리며 가을의 수확을 기대합니다. 탐스러운 열매로 영글어가는 과일들을 바라보며 기뻐합니다. 그런데 수확할 때 과일이 달리지 않은 나무나 좋은 품질의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 병든 나무는 베어버리고 그 옆에 묘목을 사다가 그 자리에 새로 심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처럼 빛의 자녀들도 열매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이 하시는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3년 동안 열매를 구했지만 얻지 못하자 과원지기에게 나무를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고 실망하며 이야기 합니다. 포도원에 포도나무 대신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더 좋은 수익을 기대하는 주인의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어떤 사람처럼 하나님이 최상품의 열매를 기대하며 우리를 빛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땅 끝에 버려진 인생들을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양육하시는 것은 아름다운 열매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그 열매가 무엇일까요? 본문 9절의 ‘빛의 열매’를 어떤 사본은 ‘성령의 열매’로 기록하였습니다. 빛의 열매나 성령의 열매는 좋은 열매를 의미합니다.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결실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좋은 상품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인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배와 말씀과 기도생활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뿌리는 거름의 영양분을 흡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줄기는 모진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버텨야 합니다. 가지는 많은 열매를 붙잡고 떨어뜨리지 않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잎사귀는 열심히 광합성 작용을 해야 합니다. 때로는 병충해와 싸워야만 합니다. 이런 땅방울이 어우러져 탐스러운 최상품의 실과가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열매 뒤에는 숨겨진 과정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속에 영롱하게 빛나는 믿음의 선조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하나님 보시기에 극상품의 열매가 되었습니다.

선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 쉽습니까? 모두가 그렇게 산다고 하면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은 어둠속에 묻혀 빛의 열매인 선과 의와 진실의 열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 13:11-14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현대인의 성경번역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잠에서 깰 때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거의 지나고 낮이 가까왔으니 이제는 악한 생활을 버리고 믿음으로 빛된 생활을 하십시오. 낮의 빛 가운데 사는 사람들처럼 단정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술 취하지 말고 음란과 방탕과 싸움과 시기하는 일을 버리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빛의 열매는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나무는 너무 어리거나 나이가 많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빛의 열매는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더욱 기품이 있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비유하면서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다는 것은 결실이 그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나이에 상관없이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시편 92편에는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잎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말씀합니다.

빛의 자녀는 어릴 때나 노인이 되어서나 결실이 그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열매의 종류가 다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빛의 자녀는 어떤 환경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17:7-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빛의 자녀들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복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더위와 가뭄에도 두려워 아니하고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결실이 그치지 않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믿음의 용기와 평안 그리고 결실의 축복을 누리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빛의 자녀 여러분! 별은 깜깜한 밤일수록 더욱 빛나 보입니다. 세상이 깜깜해진다고 우리까지 어두워져서야 되겠습니까?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이 옴을 믿고 빛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갑시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빛의 열매는 더욱 탐스럽고 영롱하게 빛나는 극상품이 되리라 믿습니다.

 

빛의 자녀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어둠을 밝히며 살아야 합니다. 결실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빛의 자녀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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