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마음눈이 밝은 사람

하마사 2008. 10. 11. 17:27

본문: 엡 1:15-19

찬송: 485장

제목: 마음눈이 밝은 사람

목표: 마음눈이 밝은 사람으로 능력있게 살게한다.

 

 

사람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습니다. 깜깜한 밤에는 사물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같은 물체도 정확히 볼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헛깨비를 볼 수도 있습니다. 군대에서 야간에 보초를 설 때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어느 한곳을 집중해서 응시하면 없던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으로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적으로 알고 사격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한곳을 응시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처럼 눈으로 보는 것이 확실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개나 다른 동물들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눈이 불완전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마음눈을 말하고 있습니다. 국어사전에는 심안(心眼)으로 표기하고 ‘사물을 살펴 분별하는 능력, 또는 그런 작용’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마음에도 눈이 있다는 것이지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마음눈으로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일찍 눈을 뜬 사람만이 찬란한 새벽빛을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의 새벽빛, 사업의 새벽빛, 역사의 새벽빛... 일찍 눈을 뜨지 않으면 자기 인생에 새벽이 왔는지,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디로 굴러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 역사의 눈을 얼른 뜨지 않으면 시대를 잃고 역사도 잃어버립니다.”라고 하면서 마음의 눈과 역사의 눈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성도들에게 감사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성도들 상호간에 사랑한다는 소리를 듣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또한 성도들의 마음눈을 밝혀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음눈이 밝은 사람은

1. 부르심의 소망을 압니다.(18전)

18절 전반절,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이 소망이 무엇이며”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지혜로 되지 않습니다. 알고 싶다고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우리에게 주셔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알게 하시고 믿게 하셨고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소망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선택하여 자녀로 삼으신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기업이든 학교이든 어떤 단체가 사람을 뽑을 때는 목적을 가지고 선발합니다. 하물며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우주적인 목적과 뜻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눈을 가지고 환경을 바라볼 때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마음눈을 밝혀주시면 현실은 암담하고 참혹해도 부르심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르심 받은 사람은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안에서 부르심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위인들은 한결같이 소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며 소망을 간직하고 살다가 승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시편 71:5절과 14절에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의 소망이며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소망을 품고 하나님을 더욱 더욱 찬송하겠다고 합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찬송이 있습니다. 어떤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이 있는 사람은 굴복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다윗은 자기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자기를 죽이려는 환경 속에서도 어릴 때부터 늘 의지하던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최근에 유명 연예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으면서 온 국민들의 마음마저 울적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인기와 명예를 가진 사람들이 또한 돈까지 가진 사람들마저 왜 그렇게 끔찍한 선택을 하게 될까요?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면 그랬을까하고 그 마음과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원인은 소망이 끊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으면 오늘을 살 수 있는 에너지가 고갈됩니다. 희망과 소망이 오늘을 살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드는 발전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살기 힘들어도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저 천국의 소망까지 너무 멀게 느껴지면 오늘의 감사이유를 찾아서 감사하며 소망을 키워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믿음을 가지면 소망이 생깁니다. 그리고 가장 잘못되어도 우리는 천국이 보장되어 있는 사람들임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작년에 섬기고 있는 교구식구의 장례식을 치르고 고향친구가 간암으로 소천하여 같은 날에 장례식을 두 군데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어떤 집사님 어머님의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비록 헤어짐의 아픔과 슬픔은 있었지만 천국에 가셨음을 확신할 때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족들에게 소망으로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천국에서 기쁨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갔습니다. 영정 앞에는 제사음식이 차려져 있고 상가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마신 술병들로 가득했습니다. 유족들에게 위로의 말은 할 수 있었지만 천국의 소망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내일에 대한 희망보다는 불안심리가 더 큰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부르셨음을 확신할 때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눈을 밝히셔서 부르심의 소망을 알고 오늘을 딛고 내일을 향해 힘차게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눈이 밝은 사람은

2. 기업의 영광을 압니다.(18후)

18절 후반절,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기업’이란 부모 혹은 근친으로부터 상속받은 토지 등의 재산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땅이라는 기업을 주셨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출애굽을 하고 많은 전쟁을 거쳤습니다. 그 땅을 얻고 지키기 위해 많은 생명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토록 중요한 것이 기업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업이란 천국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업으로 천국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이 세상을 떠나도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기만 하면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상급입니까? 그러므로 성도는 영광스러운 칭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직분은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하나님이 마음눈을 밝혀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기업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영광도 알 수 없고, 그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도 알 수 없습니다. 성도로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직분을 잘 감당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천국에서 누릴 영광은 세상의 그 어떤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가나안땅을 얻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생을 각오했듯이 우리도 그 기업을 얻기 위해 때로는 고난과 환난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영광은 현재 당하는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롬 8:17-18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것을 알았던 바울사도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을 때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6-8)

기업의 영광을 확신했기에 이방인의 사도로 사명을 위해 수많은 고난과 위협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게 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었기에 고난을 기쁨으로 이길 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보면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좋은지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던 둘째아들이 자기의 몫을 챙겨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 탕자처럼 살았습니다. 돈이 떨어지고 주변의 사람들이 떠나자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도 배를 채울 수 없게 되었을 때 풍족한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고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의 집은 그런 곳입니다. 풍족한 사랑과 은혜가 있는 곳입니다.

요즘같이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업의 영광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기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풍성함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극심한 기근과 가뭄 중에라도 하나님의 곡간은 풍성함을 믿어야 합니다. 마음눈이 밝으면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현재의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도중에 포기하면 후회와 시련만 남고 끝까지 가면 간증이 남는다."라고 말입니다. 물은 100도에 이르지 않으면 결코 끓지 않습니다. 증기기관차는 수증기 계기판이 212도를 가리켜야 움직입니다. 99도, 211도에서는 절대로 영광스러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작 1도 차이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마지막 1퍼센트의 인내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듯이 하나님의 기업의 영광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 앞에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며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눈이 밝은 사람은

3. 하나님의 능력을 압니다.(19)

19절,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성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비록 나는 힘이 약하고 능력이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힘차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눈을 밝히시면 하나님이 베푸신 지극히 크신 능력을 알고 그 힘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막내딸 지은이와 손을 잡고 길을 갈 때 고양이나 개가 있으면 무섭다고 하며 저의 뒤로 숨곤 합니다. 자기의 힘으로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품에 안고 고양이에게 ‘저리가’라고 소리치라고 하면 담대하게 호통을 칩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이길 수 없지만 아빠의 힘을 믿고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살아갑니다. 성경의 위인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신뢰하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홍해와 요단강이 갈라지고, 난치병에 걸렸던 사람이 살아나고, 광야에 샘이 터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사자굴과 풀무불에서 무사히 건짐 받고, 극심한 가뭄 중에 비가 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0:29-31절 말씀입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고 힘을 더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습니다. 달려가도 걸어가도 피곤치 않게 됩니다.

마 8:23-27절 까지를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다 위를 지나는데 큰 광풍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해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풍에는 아랑곳없으신 듯 배위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워 우리가 죽게 되었으니 구원해 달라고 소리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고 하시며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같은 배에 있었지만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높은 파도에 당황하고 두려워했듯이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않고 있다면 어려운 환경이 닥칠 때 두려워하거나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되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바다의 광풍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오히려 파도타기를 즐기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파도타기를 즐기는 사람이 높은 파도를 오히려 더 좋아하듯이, 우리 앞에 밀려오는 환경의 파도가 세차면 세찰수록 능력의 주님을 붙잡고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환경에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고 다스리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내게 능력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본문 19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베푸시는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마음눈이 밝은 사람은 부르심의 소망을 압니다. 기업의 영광을 압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압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눈을 밝혀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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