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12:20-26 찬송:
제목: 예수의 사람
목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살게한다.
정치권에는 누구의 사람이라는 말이 일반화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YS사람, DJ사람 등 정치적 노선과 계보를 따라 어떤 정치인을 그렇게 부르곤 합니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하나님의 사람, 예수의 사람이란 단어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표현된 구약의 인물들은 모세,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다윗과 같은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과 신앙인이 있었지만 모두에게 하나님의 사람이란 단어를 쓰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사역을 능력있게 감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고, 왕이 없던 이스라엘에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우는가하면, 바알과 아세라선지자 850명과 싸워 승리함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었고, 외부의 적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였으며 통일왕국을 세워 가장 강력한 나라를 건설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디모데전후서에 2번(딤전 6:11, 딤후 3:17) 씌어져 있는데, 하나님의 종으로서 소명을 받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성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딤전 6:11-12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단어와 비교하여 ‘예수의 사람’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단 한번 기록되었는데 갈 5:24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과거의 습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더 이상 육체의 소욕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육체가 무엇입니까? 롬 8:5-8을 보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예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육신의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정을 못 박아야 합니다. ‘정’이란 ‘고난’ ‘괴로움’으로도 번역되는데 고난까지 감수하면서 스스로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려는 강한 욕망을 의미합니다. 상대방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정 즉 강한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욕심은 무엇입니까?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이 있듯이 욕심이 곧 죄의 뿌리입니다. 욕심은 말씀을 막아(막 4:19) 그리스도인으로 결실치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육체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롭게 거듭나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예수의 사람이라고 하며 그들에게는 어떤 은혜가 따르는지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예수의 사람은 사명중심의 사람입니다(20-23)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 몇 사람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 빌립에게 부탁하여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헬라인들을 만난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세상에 온 목적을 가르쳐 주심과 아울러 자신이 세상에 오신 사명을 이룰 때가 되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로 비유하시면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서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헬라사람 몇 명이 예수님을 찾아온 보잘 것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수십명 수백명 수천명도 아닌 몇 명이 찾아와 예수님을 만나자고 한 일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전혀 대소롭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23절에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는 예수님이 온 인류를 위한 대속적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을 얻는 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명을 생각하며 사셨기 때문에 작은 사건 속에서 사명성취의 때가 왔음을 아셨던 것입니다.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늘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과 사명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칼 힐티는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에서 행복의 원천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다”라고 말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케에르케고르는 22세 때 그의 일기에 “온 세계가 무너진다 해도 내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이념, 내가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명을 나는 찾아야한다”고 써 놓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각자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우리 각자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고유한 사명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그 사명이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했다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하여 그 사명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명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영적으로 민감하여 때를 분별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주님은 사명성취의 때를 분별하셨습니다. 때를 알고 행동하는 사람은 지혜롭습니다. 기도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둔감하여 기도하지 않다가 신앙에 큰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말씀으로 무장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말씀생활에 등한히 하고 있다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주어지는 작은 사건이 하나님의 사인일 수 있습니다. 사명중심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인을 잘 분별하며 살아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냥 지나쳐버리고 말기에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명중심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는 때를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 항상 하나님의 편에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2. 예수의 사람은 먼저 희생하는 사람입니다(24-25)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갈 5:24에서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이라고 했듯이 예수의 사람은 먼저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한 알의 밀처럼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밀은 흙 속에 파묻혀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땅 속에 파묻히지 않고는, 죽지 않고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요즘에 기업체든 공공기관이든 '윈윈전략'(Win-Win 戰略)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윈윈전략'이란 미국이 국지전에 대비해 1993년에 세운 군사전략으로 세계의 두 지역에서 동시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두 지역 모두에서 동시에 승리를 도모한다는 전략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군사전략용어가 대중용어화되어 경제활동영역에서 투자전략, 마케팅전략 등 경제전략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상생(相生) 즉 나도 살고 너도 살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살기위해서는 먼저 희생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죽은 후에야 열매가 있습니다. 내가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왜 위대합니까? 어머니라는 단어가 왜 우리를 감동시킵니까? 자식을 향한 희생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생명까지 버릴 수 있는 분이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예화>
썬다씽이 산길을 가다가 산불이 난 것을 보는데 마침내 불이 점점 크게 번져 그가 서있는 언덕아래의 큰 나무 가까이 까지 번져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 꼭대기에는 새둥지가 있었는데 어미 새가 파닥거리는 아기 새들의 둥지 위를 빙빙 돌며 안타까이 짹짹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불길이 그 나무 밑동에도 번져 거목의 꼭대기에 있는 둥지를 삼키려 하자 비명을 지르며 안타까이 돌던 그 어미 새는 불길이 둥지에 옮는 순간, 쏜살같이 내려와 양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덮쳐 안은 체 함께 타죽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자식이 죽는 순간 버리고 도망가지 않고 함께 죽을 수 있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세상에 부모님의 사랑보다 더 귀한 사랑은 없습니다. 하늘아래 이 보다 더 높은 사랑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노래는 언제나 감동적입니다.
<어머니 노래> 나실재 괴롬움 다 잊으시고 기를재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고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내 그 무엇이 높다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그런데 이러한 부모님의 희생적 사랑보다도 더 큰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님의 사랑보다도 더 놀라운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있었기에 모든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은 누구나 먼저 희생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희생하는 것을 보고 감동은 받지만 자기가 먼저 희생하기는 주저합니다. 자기가 먼저 손해 보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사람은 먼저 희생해야 합니다.
희생할 때 다시 살고 많은 열매를 맺는 은혜가 있습니다.
3. 예수의 사람은 끝까지 따르는 사람입니다(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섬기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을 예배하기 원하십니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따르되 끝까지 따라야 합니다. 멀찍이 따라가지 말고 바싹 붙어 따라가야 합니다. 3년이나 가까이서 따른다고 자부했던 제자들조차 십자가의 길 앞에서 모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막 14:31)고 담대히 말했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끝까지 주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 받겠다고 혹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한자리 차지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예수의 사람은 고난을 무릅써야 합니다. 분명 영광의 길이지만 그 영광을 얻기까지는 고난 또한 반드시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따라가야 합니다.
<예화>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영화 가운데 [쿼바디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원래 폴란드의 작가인 센키비치(H. Sienkiewich)가 1895년에 쓴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온갖 삶의 풍상을 다 겪고 난 듯한 한 노인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노인은 지난 몇 년간의 일들을 회상하며 허탈함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터벅터벅 길을 걷고 있습니다. 모든 소망은 사라지고 슬픔을 가득 안고 은둔의 길로 떠나는 것입니다. 지난 3년간 그토록 의지하고 따랐던 그의 주님(Lord)께서 정말 허무하게도 십자가에서 처형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로마의 군인들은 그 처형된 예수를 추종하던 무리들을 발본색원하여 처형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 예수의 뒤를 따르던 자는 수만의 사람들이 운집한 그 광란의 콜롯세움(원형경기장)에서 굶주린 야수의 이빨에 뜯기거나 불타는 기둥에 묶여 모든 고통이 끝날 때까지 죽음을 구걸해야 했습니다. 다른 많은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살길을 찾아 로마를 뒤로한 채 은둔의 땅으로 낙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Domine quo vadis?"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다급하게 물어보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나는 네가 버리고 떠나는 저 로마의 백성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러 다시 가노라"
베드로는 자기의 가던 길을 돌이켜 로마로 향합니다. 그는 거기서 체포되어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처형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들 중에 혹시 예수님을 따라가던 길을 주저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던 거리를 점점 멀리하고 계신 분들은 없습니까? 아니 베드로처럼 자기의 살길을 찾아 세상으로 발걸음을 이미 옮기고 계신 분들은 없습니까? 내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네가 버리고 떠나는 나의 백성들을(교회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러 다시 가노라.” 이 외롭고 슬픈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발걸음을 추슬러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계신 영광의 자리에 함께 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귀히 여기시는 은혜가 있음을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26절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의 사람은 사명중심의 사람입니다. 예수의 사람은 먼저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사람은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사람에게는 주어지는 은혜가 있습니다. 때를 분별하는 은혜와 많은 열매를 맺는 은혜, 그리고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은혜를 함께 누리시는 예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