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도

하마사 2006. 10. 16. 07:46
 

본문: 눅 10:1-42                  찬송: 513장

제목: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도

목표: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로 살아가게 한다.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70인 전도대를 파송하는 내용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입니다.

이 아침에 세 가지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추수할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2절).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예수님이 70인 전도대를 파송하시면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추수해야 할 영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일꾼들이 부족하여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일꾼들을 찾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을 위해 추수할 일꾼들로 선택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도대를 파송하시면서 주님은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하십니다. 이리떼와 같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을 이용하고 양을 짓밟는 세상 속으로 들어갈 헌신자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희생하는 삶입니다. 어린양으로 이리들 이 우글거리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희생을 각오하고 가야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평안을 빌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평안을 위한 일꾼들입니다. 설령 이리들이 싸움을 걸어온다고 해도 참고 먼저 평화를 선포해야 합니다. 평안으로 축복해야 합니다. 평안으로 축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빈 평안이 우리들에게 다시 돌아오게 됨을 믿고 많이 축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도인들에게 특별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19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담대하게 나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어린양과 같이 연약하지만 전도하면 하나님이 권세를 주셔서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추수할 일꾼으로 부름 받았음을 믿고 주님의 권세를 의지하여 평안을 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2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율법에는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고 물으시자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대답을 들으신 주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말씀하십니다.

율법사이기 때문에 율법에 대하여는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행함을 요구하시며 행하면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는 것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알고 행치 않으면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기자는 행함있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알고 행치 않으면 변화가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힘이 없는 것은 행함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아는 것에 그치는 신앙인들만 있다고 하면 이 사회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숫자는 작지만 행함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날 때 이 사회는 변화할 것입니다.

율법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주님에게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그때 주님이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제사장이 모른 채 지나가고, 레위인도 그를 돌보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사람은 그를 불쌍히 여기고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주막 주인에게 돈까지 주며 보살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고 질문하십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택함 받은 사람들, 직분자들입니다. 그러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쳐버립니다.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율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랑의 실천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진짜 이웃이고 말씀의 실천자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얼마나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습니까? 성경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실천하지 않으면 죽은 믿음입니다. 허울 좋은 신앙인일지는 몰라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자는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3. 좋은 편을 택해야 합니다(41-42절)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인생은 선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택에 따라서 인생이 바뀝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를 잘못 선택하여 영혼의 파멸을 가져옵니다. 어떤 사람은 배우자를 잘못 선택하여 평생 불행한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듯 선택은 중요합니다.

신앙인은 좋은 편을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간입니다. 둘 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맛난 음식을 대접하며 사랑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음식보다는 예수님의 말씀 듣는 편을 선택하였습니다. 동생 마리아가 자기의 음식하는 것을 돕지 않는다고 마르다가 불만을 토로하자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우리들도 좋은 편을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선택의 기준은 언제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편이 어디인가입니다. 사람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것이냐? 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택해야 합니다. 돈이냐? 하나님이냐? 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을 택해야 합니다. 명예냐? 하나님이냐? 의 갈림길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택해야 합니다. 마리아처럼 언제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편을 택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는 추수할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좋은 편을 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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