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오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1714-1770)
Ⅰ. 서 론
대중매체의 연예인들은 가공의 이야기(fiction)을 마치 사실인양 연출하면서 관객이나 시청자들에게 공감대를 자아내게 하며 심지어 눈물을 흘리면서 자연스럽게 사실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반면에 하나님으로 위탁받은 설교자는 역사적인 사실을 힘있게 증거하면서도 전혀 공감대를 형성시키지 못하여 회중들로 하여금 마치 가공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게 하고 있는실정이 아닌가? 설교는 위탁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전하는 것이라는 종래의 설교 정의는 이제 수정이 가해지고 있다. 진정한 설교는 언제 어디서나 위탁받은 메시지와 자신의 전체가 완전히 얽혀진 화신(化身.incarnation)적 설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1)
설교가 위대한 구원과 은혜의 방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 Donald Demaray는 휫필드의 설교정신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눈물을 흘림이 없이는 거의 설교를 끝맺지 못했다. 그의 눈물은 꾸밈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들을 위한 진실한 슬픔의 눈물이었다”.2)
교회의 역사 속에서 동일하게 증거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타락한 세상의 한 복판에서 언제나 변질되고 잠든 교회가 존재해 왔고 이런 교회는 언제나 화신적 선포를 잃어버린 강단이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한국강단에 말씀의 진정한 회복은 유창한 화술과 지식 속에서 만들여저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 자신 속에 말씀이 젖어내려 몸과 마음 전체로 회중들에게 전달되어져야 된다는 것이다. 영적각성의 불꽃을 일으키며 부흥을 이루었던
두 설교자의 생애와 그들의 설교를 살펴봄으로써 설교자의 중심(中心)에 불붙는 것 같은 말씀의 열정을 가져보고자 한다. 본 발제는 두 설교자의 시대 사상적 배경, 설교의 특징, 배경등을 설교신학과 연결하여 살펴보며, 어떻게 설교했는 가에 대해서도 언어사용과 함께 알아 보고자 한다.
Ⅱ.죠오지 휫필드 (George Whitefield)
1. 시대, 사상적 배경
18세기 잉글랜드(England)는 신앙과 도덕생활이 거의 대부분 절망적이었다. 정치의 부패가 만연했고 뻔뻔스러움과 가증함, 방종, 불경스러움, 술취함, 그리고 도박과 도색등의 악덕이 만연되어 있었다3). 이것은 18세기의 영국은 산업혁명기에 접어들어 많은 실업자들이 거리고 쏟아져 나오고 , 도시의 인구집중과 비대화,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면서 청교도적인 신앙전통이 사라지고 향략적인 영향이 감염되어 가고 있었다. 모든 학교에서는 이신론4)과 회의론 만연하였고 보링브, 로크, 5)흄(Hume), 그리고 깁본 등과 같은 철학적 작가들은 사변적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의 신앙을 멸시하게 만들었으며. 이것은 강단에서도 합리주의적 경향6)이 강조되고 교회는 논쟁에만 급급하여 영적인 메시지가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7).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대단히 부주의한 삶을 살았고 진리에의 헌신이 절실히 요구되었으며 하층민들에게서도 극심한 무지와 대단히 실제적인 이교주의가 팽배했다. 18세기의 계몽주의는 영국의 대부분의 사상가들 속에 침투해 들어갔고, 정통주의 자들까지도 기독교를 인간 안에 있는 도덕성에 대한 신적 재가 정도로 보았으며, 설교가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설교역시 덕목을 강조하는 수필에 불과 하였으며 정부의 지나친 법은 국민의 하잘 것 없는 범죄까지 심하게 다루었고 이같은 상황에서 백성들은 저열한 오락과 술취함에서 위로를 찾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지 않았는데 이것은 교회가 복음과 성령으로 저들을 힘있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의 대부분은 침체 속에 있었다. 이 시대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환경을 변화시키는 현재적 신앙,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 등 종교적 열정이 결여된 침체의 시대였다. 기성 영국 성공회의 교구제도의 구조는 무너졌고 경건주의로부터 힘을 얻은 감리교의 웨슬리 형제와 기타 복음주의 자들이 은혜의 복음을 전한 대상은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기존의 삶을 틀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8)
하지만 보다 밝은 측면도 없지 않았다. 고결한 신앙 인격이나 참된 기독교를 대표할 만한 헌신적인 인물이 겨우 몇 있었는데, 기독신앙 변증에 있어서 죠셉 버틀러가 그의 불후의 명작 「 변증학 ( Analogy)」을 저술하였고, 이신론자들(Deists)의 이론적 근거를 논파하였다.
한편 감정과 경건한 신비주의의 측면에서는 윌리암 로우(William Law),토마스 보스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역작들이 진리에 헌신적인 경향의 사람들 속에서 참된 경건을 키워 놓았다
그러나 18세기 잉글랜드(England) 의 위대한 구원의 형태는 대중적 설교자, 죠지 휫필드와 죤 웨슬레 아래서 이루어진 영적 부흥과 발전이었다. 이 운동은 중산층, 하층민 수천명 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상류층에게까지 급속히 확장되었다. 이 영적부흥은 그 당시 영국의 사상과 삶을 보다 높은 도덕성과 영적 신앙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18세기 말로 나아가면서 그 영적 부흥은 수십 년 전 독일 경건주의(Pietism)에 상응하는 복음적 운동을 낳았다.9)
2. 생 애
영국이 낳은 위대한 복음 전도자였던 조오지 휫필드 (Georre Whitefield)는 1714년 12월 16일 영국 글로우체스터(Gloucester)에서 그가 2 살 때 죽은 포도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술집을 경영하던 집안의 환경으로 말미암아 어린 시절의 그는 비행과 도벽, 못된 장난을 일삼었던 전형적인 문제아였다. 후에 그의 인생은 종교적 체험을 통해 변형되었다. 사탄과 싸우며 속박의 영으로부터 무수한 날 동안 시험을 겪은 후 7주간이 지나고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한다고 말한다10)
금식과 간절한 기도와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육체의 쇠잔함과 정신적인 고통뿐이었다. 마침내 휫필드는 1735년 부활절 이후 일골 번째 맞는 주간에 로마서 8장 15-16절을 통해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사단의 꾀임에 빠져 늘 죄의식에 시달리던 휫필드는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양자의 영을 받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체험한다. 그 후 부터 휫필드는 놀라운 영광과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했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11).
12살 때 글로우 체스터에 있는 세인트 메리 드 크립트( the school of saint Mary de crypt) 에 입학하였고, 이 때부터 후에 그의 설교의 기반이 된 수사학과 희곡에 관심을 가졌다. 19세 때인 1733년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 존 웨슬리, 챨스 웨슬리와 만난 후에 규칙적인(methodical) 종교생활을 영위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경건 생활에 힘쓰고 자선을 베풀며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돌보는 사회사업 단체인 「Holy Club」에 가입한다
여기서 그는 찰스 웨슬리가 빌려 준 헨리 스카우걸(Henry Scougal)의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Life of God in the son of man )을 읽고서 회심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들의 처소 (All Men's place)라는 설교에서 한 그의 고백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저는 저의 오랜 친구 챨스 웨슬리에게 고마움을 표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나에게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책을 주었습니다. 그 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제가 다시 태어나야한 하며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12)
1736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성공회의 부제(副祭)로서 서품 받는다
1739년 사제(Priest) 서품받고 1741년는 엘리자베스 마에스와 결혼하였고, 1743년에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함께 「칼빈주의적 감리회」를 세워서 활동했다
그는 성공회 신부였으나 감리교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고, 죽어서는 장로교 묘지에 묻혔다. 그는 평생 18,000편의 설교와 많은 편지를 남기며 왕성하게 활동하는데 그는 초교파적으로 활동하다,1770년 9월30일 천식으로 메사추세츠주 의 뉴베리(New bury)항구에서 사망하였다.13)
Ⅱ, 죠오지 휫필드의 신학적 배경
1. 칼빈주의적 성향
휫필드는 처음부터 칼빈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칼빈주의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영향으로 인하여 칼빈주의를 더욱 확실히 따르게 되었고, 결국은 그의 오랜친구였으며 알미니안주의자였던 웨슬리와 신학적 차이로 결별하게 된다.
그의 칼빈주의적인 요소는 기본적으로 청교도사상을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14)
휫필드의 칼빈주의적 신학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그의 사고의 틀이며 그의 삶을 지배한 원리였다. 그가 증거한 부흥 설교 속에 보면 칼빈 신학의 주제인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제한적인 구속, 전적인 타락, 무조건적인 선택등의 그의 설교 속에 나타난 신학사상이다. 설교를 듣는 개체 인격체 속에 말씀과 교리의 효율적인 적용의 능력이 있었다
그는 철저한 칼빈주의적 신학이 몸에 벤 사람이었지만 복음 전파에 있어서는 칼빈주의를 우선적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휫필드가 모든 교파나 전통의 장벽을 넘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교리나 제도가 아닌 회심의 체험이었다.15)
1736년 그가 미국을 떠나기 전 그로스터주 스톤하우스(Stone House)에서 로마서 8장 30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그는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그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는 알미니안과 은혜와 선택이 교리를 주장하는 칼빈주의자들 사이의 핵심적인 논쟁의 부분이다. 휫필드는 이 본문에 대한 주석적 설교를 통하여 칼빈주의적인 자신의 입장을 보여 주었는데 휫필드는 이것을 단순히 ‘은혜의 교리’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했다. 휫필드는 그의 설교에서 죄인이 회심 곧 거듭남을 특별히 강조하였으며 죄인의 회심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임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변함없이 가르쳤다. 그래서 휫필드는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는 말씀을 설교에서 즐겨 인용하였다.
그는 칼빈주의의 신학적 주제인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은혜와 선택의 교리를 믿고 잘 사용하였다16). 또한 그의 설교 ‘회개하고 돌이키라“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반대한 칼빈주의적 신학적 모습을 그의 설교를 통하여 살펴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의 원리체계에서 다른 원리 체계로 개종할는 지 모릅니다
예컨대 그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로 개종할는지 모릅니다. 모든 사람은 천성적으로 아르미니우스인입니다. 내가 칼빈주의가 옳다고 생각하는 하는 한 가지 이유는 교만한 본성은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칭의의 교리를 논박하는 것은 사람들 속에 패역함이 있어서입니다. 그들은 성결을 사랑하고 칼빈주의 자들을 성결에 대한 적이라고 비난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의가 참된 열매라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에 의한 칭의와 은헤의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의 의의 적용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성화의 적이라고 비난받을 수 있겠습니까?“
개종은 그들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도덕적 설득도 아닙니다“17)
휫필드는 또한 모든 복음 전도자들은 선포해야만 한다고 했다. 이같은 믿음에 의한 구원함을 얻은 진리를 경험해야하며 그리고 모든 곳에서 죄에 대해서 자유함을 얻었다고 어는 곳에서나 죄에 대해서 자유함을 얻었다고 선포해야만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세 가지의 확신 즉,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한 거듭남, 그리고 복음전도는 개신교 복음전파의 큰 경계선이 된다고 말한다
“ the bible is its authority, the new birth its hallmark, and evangelism its mission"18)
2. 영적 각성을 통한 회개의 신학
휫필드가 미국에서 신앙의 불길을 붙이던 때는 18세기 초엽이었다. 이 때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온 청교도들의 뜨거운 신앙의 열정은 점차 사라지고 종교는 형식에 그치고 조상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많은 이민자들이 세속주의에 물들어 가고 교회는 인간적인 사교 모임으로 전락해 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앙의 열정과 선교의 열의는 없었으며 오직 영적으로 죽은 껍데기만 남은 몰골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휫필드는 확신에 찬 신학으로 새로운 부흥의 불을 붙였던 것이다. 휫필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죄를 참회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의 설교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그의 설교 중에서 다음과 같이 회개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은 좋은 시기이기 때문에 아직 회심을 원치 않는다고 ” 합니다
당신은 지금 몇 살입니까? 당신이 열 네 살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당신은 아직 회심할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까? 여기에는 스물 살이 되었으나 아직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하지만 지난 밤에 17세 밖에 되지 않는 청년이 토텐헴 궁정에 매장 되었습니다
당신은 40세나 50세가 되었으면서도 아직 회심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까? 내일 아침에 교수형을 당할 불쌍한 죄수들에게도 회심할 시간이 없습니까? 그들에게도 시간이 있다면
당신에게도 시간이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들보다 더 먼저 죽을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2-3일 전 까지만 해도 충격적일 정도의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던 한 불쌍한 여자가 있어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사망하여 지금은 죽은 시체입니다. 여러 분들 중 그 어떤 사람에게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나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것을 방지하는 길은“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라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입니다19)
휫필드는 그의 설교를 통해 치유될 수 없는 인간의 죄악성과 원죄, 인간의 전적인 부패, 중생치 않은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 저주받기 쉬운 타락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참회에 대해 매우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죄악 가운데서 있는 자들은 반듯이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참회와 회개가 있어야만 살 아 갈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서 식민지인들의 영적,종교적 무관심과 무지를 깨우치기 위해서 부단이도 노력한 참회 신학의 대변자였다고 볼 수 있다.
Ⅲ.휫필드의 설교세계
1. 설교자 이해
휫필드에게 있어서 설교란 정장복 교수의 말처럼 “택함받은 설교자가 당대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회중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진리를 선포하고, 해석하고. 이 진리를 회중들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받드시 성령의 감화하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20) 는 말처럼 휫필드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정의가 그대로 드러나는 설교자이었다.
설교자 휫필드는 설득력있는 말재간은 이미 타고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비록 연설하는데 천부적으로 재능을 타고났지만 그는 그 재능을 개발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연설의 기술들인 육성 사용법, 제스처의 역할, 말의 기능들을 연구하고 숙달하여 어는 곳에서나 -대학교에서, 느티나무 아래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즉석에서도 설교 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을 구비하였으며 온전한 준비를 한 설교자였다21). 또한 그의 천부적 재능 즉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그의 신비로운 능력 때문에 더욱 더 완벽한 설교자의 모습 그 자체이다라고 말 할 수 있다. 휫필드에게 있어서 설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세움을 받은 거룩한 사역이었다. 처음 설교를 준비 할 때부터 말씀의 권위에 의해 붙들린 바 되었고 자신의 영혼에 성령의 능력이 임하기를 기도하며 확신 가운데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휫필드는 설교를 통해서 한 말이 자신의 말이 아니라 성령이 하신 말씀이라는 확신 가운데서 설교함으로서 영적인 권위에 사로잡힌 설교자가 되었고,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열망으로 가득 찬 기도가 빠질 수 없었다. 휫필드는 자신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죽어가는 영혼들을 건져 낼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해서 더욱 강한 확신을 갖게 된 것은 설교자로서의 영적인 책임감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외에 어떤한 교훈과 연설도 영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 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죽어가는 영혼을 살 릴 수 있는 길은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 당시 회중들이 죄에 대해서 감각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던 수 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으로 그는 헌신했다
2. 휫필드의 설교 분석
a.분석설교의 유형
휫필드의 설교는 설교의 전반적인 흐름에 있어서 주제를 중심하여 내용을 전개해 나가는 분석 설교의 유형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의 처소”라는 설교에서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지옥과 천국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하나님과 동행”에서는 동행의 의미와 동행의 이유에 대하여 주제를 잘 정리하여 분석적으로 설교가 진행되어지고 있다. 또한 “회개하고 돌이키라”라는 설교에서는 회개에 대한 정의 및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의 설교는 설교의 대부분이 주제를 선정하여 본문과의 일치성을 추구하여 주제를 합리적으로 부상시키는 설교의 형태를 많이 띠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과 동행“ 이라는 그의 설교를 통하여 위에 언급한 내용을 확인 할 수 있다
오늘의 주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 나는 첫째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려고 노력할 것이다. 둘째로 신앙인들이 0계속해서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셋째로, 우리가 지금까지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해다고 한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 몇 가지 동기를 제공하고자 한다.이 각 사항마다 한 두 경우를 들어 적용을 시켜볼 작정이다.22)
두 번째로 휫필드는 주제의 선명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한가지 주제를 계속강조, 반복, 부연하여 설교를 진행시켰다. 그의 설교 “모든 사람의 처소”에서 천국이든지 지옥이든지 사람들은 모두 한 곳으로 간다는 주제를 한편의 설교에서 6번이나 강조하고 있다
본문의 지혜자는 ‘마침내 한 곳으로 돌아간다’ 는 말을 여러분에게 할 때 무슨 뜻을 가지고 했는지 아시겠습니까?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두말 할 나위없이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들은 죽으면 한 곳으로 갑니다... 오!얼마나 끔찍한 생각입니까? 그렇지만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한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또 한 아무리 멀리 서로서로 떨어져 있다 해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 한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오 주여, 죽음이후에는 아무런 헤엄짐도 없겠지요, 우리 모두 한 곳으로 갈 것입니다...23)
셋 째로 결론의 형태로서 정장복은 “설교요점의 반복, 경이적이고 충격적인 표현, 격려의 형식, 시의 사용, 은총의 선언형태, 명령적이고 교훈적인 형식”을 언급하고 있는데 휫필드의 설교에서는 대체로 교훈적 명령과 축복의 형태가 주를 이루고 있다
주께서 죄 안에서 죽은 여러분들을 깨우시기를!그리고 지옥의 절벽 위에서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구르는 것을 막아 주시기를! 여러분이 하나님의 불타는 떨기나무가 되기를!여러분이 이러한 사실들을 계속기억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떨기나무는 불타고 있으나 타 없어지지 않는다” 라고 말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기를 아멘!참으로 주는 예수 아멘!24)
b. 수사학적 언어 사용에서 본 설교
현재 설교학에서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지는 벌써 오래다. 그 이유는 기독교가 말씀의 종교이며, 설교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의 수단이며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사용해야 할 언어의 선택과 사용은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도구이다. 아무리 훌륭한 메시지가 준비되었다 하더라도 언어라는 매개체가 잘 못 선택되고, 잘못 사용되어 전달과정에 방해가 된다면 잘 준비된 그 메시지는 아무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25)
이에 전달 방법에 있어서 휫필드의 언어 사용은 뛰어남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로 휫필드는 설교시 대체로 평범하며 알기 쉬운 대중적인 단어들을 많이 사용하였다
적절한 성구, 적절한 설명, 타당한 예화 등을 사용했으며 그 결과 회중들은 그의 설교를
이해했었다. 그의 설교 ‘회개하고 돌이키라“에서 평범한 언어 사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도제로 있을 때는 직공이 되면 매우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직공으로 있을 때는 주인이 되면 매우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독신으로 있을 때는 결혼하면 매우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차를 가지게 되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입니다.”26)
벤쟈민 프랭클린에 의하면 휫필드는 크고 맑은 소리를 가졌으며, 단어와 문장을 완벽하게 발음했기 때문에, 그의 말소리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곳에서도 듣고 이해 할 수 있었다
모인 청중들 모두는 숨소리조차 내지않고 그의 말에 귀를 귀울였다27)
설교를 할 때에는 항상 단순하고 쉬운 말을 명확하게 전달 하고자 했다. 청중들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단순하게 전달하는 것이 최상의 것임을 알았기에 박식함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있었다.. 그의 설교는 귀족이나 평민, 가난한 자나 부자, 배운자와 못 배운자 등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부담없이 잘 전달되었다
두 번 째로 주제의 극적 표현이 뛰어났다
단순하고 명백한 표현은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대화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거기에다 탁월한 웅변력과 성령의 역사가 가미되어 수많은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원래 타고난 웅변가 기을 소유한 휫필드는 그의 설교 주제를 극화하는 데 뛰어났다. 청중들이 휫필드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마음 속에 한 폭의 그림을 그려주는 듯 하였다
휫필드가 그의 설교의 내용을 그림처럼 묘사했던 예가 있다. 휫필드는 어느 날 회개하지 않은 불쌍한 죄인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하여 어떤 거지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그가 상황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청중들은 마치 거지를 실제로 보는 듯했다. 마침내
거지가 벼랑에 떨어지는 장면을 묘사하자,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그 사람이 위험해요!” 라고 외치면서 밖으로 뛰어나갔다는 것이다28)
세 번째로 휫필드는 무서울 정도로 진지하고 강렬하게 설교했다. 휫필드의 설교를 들은 어떤 사람은 “휫필드는 마치 사자가 포효하듯이 설교했다”고 증언했다. 이것은 휫필드가 얼마나 진지하고 강렬하게 설교했는지를 알려주는 증언이다. 그의 설교는 마치 대포 알이 날아 가듯이 힘있고 뜨거웠으며 , 마치 불같았고, 생명이 역사하는 힘이 있었다
휫필드는 거룩한 격렬함에 사로 잡혀서 폭풍처럼 무섭고 강렬하게 설교함으로써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진지하고 강렬한 설교자 앞에서 졸거나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네 번째로 휫필드의 설교에서는 일인칭 주어 사용의 모습이 있다 "회개하고 돌이키라“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마땅히 회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나는 회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는 지금이야 말로 회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증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d. 성경해석
현대 설교학에서 비춰서 휫필드의 설교를 분석해 볼 때 휫필드는 자연스럽게 교훈적인 색채를 띤 선포적인 설교가 주를 이루었으며 설교의 주제는 언제나 죄, 심판, 회개, 예수 그리스도 등으로 성경에서 제시하는 순수한 복음적 주제들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성경해석 방법은 청교도인이었던 매튜헨리(Mattew Henry)의 방식을 따른 것으로 헨리의 「구약과 신약 성경주해」를 평생 벗으로 삼았다29). 휫필드는 대체로 서론에서 본문에 대한 해석을 한 후 논리를 조직적으로 전개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의 설교 “하나님과 동행”의 서론에서 나타난 성경해석의 방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그리고 뒷부분은 이렇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 하였더라’ 그가 이 세상에 있지 않았다. 즉 그를 이 세상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평범하게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본문인 창세기 5장24절과 해석된 본문인 히브리서 11장5절을 비교 분석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한 절을 본문으로 삼아서 자유스럽게 영감에 의해서 해석하면서도 본문의 전후 문맥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고 서론 부분에서 말씀을 부각시키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3. 오늘의 한국강단에 주는 교훈
정장복 교수는 “ 이 땅의 역사는 사실상 설교자들이 움직여 왔다” 라고 평가했다
한국의 초기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의 교회는 말씀을 중심으로 한 미국 대각서 운동의 부흥의 물결을 남달리 환영하여 말씀위에서 출발하고 , 말씀으로 부흥하여 근대선교의 기적을 이룩한 교회임에는 틀림이 없다. 말씀과 복음에 대한 열정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성장하여 세계 교회사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하지만 총체적으로 한국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며 사회를 건전하게 함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행위가 설교라고 보건데, 한국강단이 변질되어가고
있음을 진단 할 수 있다. 교회에 설교하여 할 목사가 없음도 아니요, 들어줄 회중이 없음 또한 아니다. 여전히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학 있으며 회중 또한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사회에 영향력이 점점 약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적 자세를 가지고 앞 시대에 살았던 위대한 설교자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는 것은 강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다 줄 것이라 믿는다
첫 번째로 휫필드는 복음이 증거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 가는 열정있는 설교자 였다
그는 22세에 영국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25세에 신대륙에서 대각성운동을 일으켜 미국인의 80%이상이 그의 설교를 한 번 이상 들었고 1천만명 이상이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한국강단의 설교자는 때론 복음 전도자로서 삶을 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영혼에 대한 열정과 함께 복음을 위해서 어디든지 가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
교회 외에 야외에서 때를 따라 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의 모습이 필요하다, 두 번 째로는 휫필드의 설교준비를 들 수 있겠다. 휫필드는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 그는 광범위한 독서를 했다는 것이다.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 풍부한 메지지의 재료를 만들 수 있었다. 휫필드가 사람들에게 독서를 통해서 자기자신을 개발 할 것을 권면하면서 추천했거나 언급한 책들은 약 350여 권이나 될 정도였다.
이 외에도 휫필드는 끊임없는 기도를 통한 성령님의 도우심, 성경묵상 등 설교자가 기본적으로 충실히 해야할 것을 정말 충실히 해 나갔다. 휫필드의 능력있는 설교의 비밀은 ‘기도’와 깊이있는 ‘말씀’ 묵상으로 지속된 경건생활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Ⅲ.찰스 피니(Charles G. Finny) 1792-1875
1. 시대적 배경
19세기 미국의 종교생활에서 가장 광범위한 변혁 운동은 대각성운동( The Great Awakening)이었다. 이 부흥운동은 여러 국면을 거치면서 미국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회들의 지속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이것은 영국과 유럽대륙의 영적 각성운동을 직접 이어 받아서 경건주의, 복음주의 흐름이 강한 18세기의 제 1차 대각성운동에 영향을 받으면서 기독교에 입문하는 회심으로서의 의식적이고 감정적인 경험을 강조했으며 이전의 기독교 전파 방식이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고 합리주의와 문화적 혼란이 확산 될 때에 일어났다. 그래서 기독교의 삶에 큰 자극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신앙의 시작 내지 입문에 대한 개념에 일대 전환을 일으켰다30). 대각성 운동은 교회에 들어오는 규범적 방법으로 중생이 변화인 ‘회심’(conversion)을 강조했다. 교회론도 회심을 체험한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라는 의미가 강조되었다. 엄격한 도덕과 열정적인 경건이 이 운동의 전반적 특징이었다. 대각성 운동은 직접 영향을 받은 교회 뿐만 아니라 다른 교파에도 복음주의적인 신앙을 일깨웠다. 대각성 운동은 개신교가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는데 기여했으며 합리적 종교적의 도전에 맞서 새롭게 신앙을 변증했다. 이 운동의 영향아래 교육생활이 자극을 받았고 새로운 대학들이 건립되었다. 한편 대각성 운동은 식민지가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게 함으로써 직접 미국 혁명 즉 독립전쟁을 위한 길을 예비해 주었다31)
이 시기에 미국 종교계의 최대사건은 신앙의 자유의 성취였다. 이것은 혁명적 진보였으며 천년이상 서방문화를 특징지었던 획일성과 국교회(uniformity and establishment)의 원칙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난 것을 의미했으며 신앙의 자유를 국가원리로 수용한 점이다.
이처럼 부흥운동이나 선교조직, 또 자발적 단체들을 통해서 19세기 미국에는 기독교 신앙의
복음적이며 경건적인 적용32)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음주문제와 노예문제33)로 남북이 시끄러울 때 개인구원과 아울러 복음의 사회성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려 주었고, 변화를 체험하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변화의 중요성을 외치며,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회개운동과 신앙부흥운동을 일으킨 인물이다.
2. 생 애
피니는 1792년 8월29일에 커넥티컷트(Connecticut)주의 와렌(Warren)에서 태어났고, 두 살 되던 해에 뉴욕 주의 오네이다 카운티(Oneida County)로 이사하였다. 그런데 그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을 통해 글을 배웠는데 1812년 와렌으로 돌아와서 잠시 교육을 받았다. 그 후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아담스(Adams)에 가서 벤자민 라이트(Benjamin) 판사 a밑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
여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부모가 종교를 가지고 있기 않았기 때문에 교회에 대해서 명확하게 아는 것이 없었고 종교교육을 받아 본적 도 없었다. 그는 법률 공부를 하면서 지난 날의 법학 관계 저술가들이 모세의 율법을 자주 인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 조오지 게일(G.W. Gale)이 담임하고 있는 장로 교회에 처음 출석하기 시작한다.
1821년 10월8일과 9일 그는 자신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었지만 어떠한 해결이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틀을 고민가운데서 보낸 후 그 다음 날 자신의 사무실을 향해 가던 중 “너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냐?” 또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네 자신의 의를 쌓으려고 애쓰고 있느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바로 이 순간 그의 마음이 열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구원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결국 자신의 교만과 죄를 깨닫게 되면서 크게 울부짖으며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 순간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2-13)는 성경말씀이 떠오르면서 회심을 체험하게 된다34).
1822년 신학교에 들어가라는 권고를 거절하고 게일 목사의 지도로 공부를 시작하여 1823년 12월 29일 아담스에서 열린 노회로부터 복음사역에 참여 할 수 있는 자격을 허락 받았다
첫 집회는 에반스 밀스(Evans Mils)에서 시작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체험하는 역사가 일어나가 시작했으며 1832년 뉴옥시내에서 가장 부도덕하고 더러울 뿐 아니라 무법지대의 중심지였던 차담 스트리트 극장을 교회로 사용하자는 요청이 들어와서 그 청을 받아들여 「뉴옥 제2 자유장로 교회」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일곱 개의 자유 장로 교회가 세워졌다
원래 그의 신학은 칼빈주의 입장에 섰으나 후에는 장로교회에서 많은 비판을 받게되자
그는 교파를 회중교회(Congregational)로 바꾸고 말았다.
1824년에 리디아 앤드류스와 결혼하였으나 그녀는 1847년 사망하였다. 그래서 피니는 엘리자베스 아킨스와 재혼하였으나 그녀역시1963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레베카 레일과 다시 결혼하였다. 1835년 오벌린의 존 시퍼드 목사와 마한 목사가 오벌린(Oberlin) 대학의 신학과 주임교수로 와 달라고 그를 초빙하였다. 피니는 흑인에게고 학교를 개방한다는 조건하에 그청을 수락하였다. 그는 이곳에서의 활동을 통해 복음의 사회성에 대한 자신이 견해를 분명히 해 나가게 된다. 당시 미국은 노예제도 문제로 시끄러운 가운데 있었는데 피니는 복음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서로 나눌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공개적으로 노예제도의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이것이 뿌리뽑히지 않으면 전쟁과 파멸이 올 수 밖에 없다고 경고하였다. 따라서 그의 활동을 통해 오벌린은 반(反) 노예제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에 피니는 오벌린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하면서 「조직신학 개론」,「부흥강론」, 「신앙고백을 위한 강론」을 저술 하였으며 1851년에는 오벌린 대학의 학장이 되었다
피니의 부흥운동은 1858-59년에 일어난 대부흥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오랜 세월 동안 여러곳을 다니며 복음을 외치고 부흥의 불길을 당긴 피니는 1875년 8월16일 주일 이웃교회에 흘러 나오는 저녁 예배의 찬송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부인과 함께 산책하고 돌아와서 갑자기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동이 트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35)
2. 설교 신학적 배경
a. 회개와 구원의 신학
피니의 설교에 있어서 나타난 그의 신학적 배경은 그가 극적인 하나님의 대한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회심(conversion)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깨닫고 있었다.
그의 설교에서 줄곧 자신의 회심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끝없는 은혜를 선포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해방되었던 이야기들을 그의 설교에서 다루었고, 그의 자서전적인 부흥에 대한 이야기 Memoris 와 그의 글에서 더욱 더 이 입장은 공식적인 신학적 배경이 되었다36). 또한 그는 “나는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뜻에 의해 도덕적으로 부패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는 성령과 진리에 의한 마음의 철저한 변화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했다고”37) 그의 설교에서 말하고 있다.
1835년에 인쇄되어 나온 그의 설교 (Sermons on Various Subjets)에서 그는 이렇게 선포한다 “죄인들이 거의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의 귀에는 그가 아담스에서 젊은 변호사로 일하고 있을 때에 “ 진실은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급박한 죄악은 기독교인보다 악이 우리 곁에 더 가까이 있다는 겁니다“
라는 말이 메아리처럼 들려져 왔고, 그는 계속해서 경고하고 있다. “죄인들은 죄악 속에 있을 때 가장 큰 즐거움을 보여주며, 그들의 죄악들은 마치 혀 속에서 한 입 달콤한 사탕을 계속 구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38)
피니의 구원과 회개에 대한 신학적 배경은 근본적으로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이 재해석을 통하여 확실한 키-포인트를 잡고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죄인들이며, 그리고 우리 각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 에 대한 책임을 슬프게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39)
b. 부흥을 위한 신학
부흥설교는 설교자의 개인적 인격 속에서 흘러 나와야되며 설교의 전달방법 또한 설교자의인격에 다양하게 메시지를 포함한다. 그의 설교는 간결하면서 추구함이 있고, 조용하지만 확신이 있었으며,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처럼 때론 온화하며 점잖은 면도 있었다.
부흥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경중심과 교리였다. 피니는 자신의 영적인 경험과 사역이 자신의 설교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언급할 수 있는 서비스를 주었다고 한다40)
c. 부흥설교(REVIVAL PREACHING)의 특징41)
첫째. 모든 설교는 실제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그가 설교내용 중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교리의 언급이 적절한 끝맺음으로 실제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이 증거되지 않으면 그 교리는 실제적이 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며 성경이 주는 자료 만큼 실제적일 수 없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는 말씀에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둘째, 설교는 직접적이어야 한다. 복음은 인간들에게 설교되어져야 하며 그들의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들은 회중들의 삶의 주소를 알아야하며, 그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목회자들이 죄에 관해 설교는 하지만 죄에 빠진 당사자 죄인들에게는 설교를 하는 것을 기피한다. 하지만 이것은 비난받아야 한다.
셋째, 또 다른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는 모든 설교자들은 목회의 사역에 있어서 죄인들을 치리해야 하며, 또한 기독교인들은 그들 자신들이 죄악에 손을 뻗쳐 죄를 짖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며, 회중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목회의 돌봄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죄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에 대한 죄에 대해서 느끼게 해야 하며, 이로 인해 그들 자신이 불행한 사람이라는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인쇄된 책들은 죄에 대해서 언급하고 이 주제는 죄인들로 하여금 더 불행한 사람으로 가져가기 때문에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크게 잘못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 지은 것 때문에 그들 자신은 죄 그 자체에 얽매어 더욱 더 애통하게 되는 것이다. 죄인들은 반드시 자신이 행한 뭔가에 대해 후회하게 된다. 따라서 종교는 이들에게 뭔가를 해 주어야 한다. 그들을 그냥 나 두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한 사망이라는 위험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부흥을 진작시키는 데 필요 불가결한 조건으로 그는 기도를 강조한다.
“나는 항상 무릎끊고 기도하는 중에 설교 주제를 얻는다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설교 주제를 받을 때는 마음에 너무나 큰 자극이 오기 때문에 떨면서 겨우 그것을 기록 할 수 있었다”42)
그의 부흥 방법은 ‘새 방법’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예배를 시도 때도 없이 드렸고, 집회시간을 마구 길게 하고 지나 말투는 열정적이었고 강도 높은 설교를 하였다. 그의 말은 거칠고 무례하고 토속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당시에는 설교 도중에 공개적으로 결단을 요구하지 않았는데 유독 피니는 교인들에게 결단을 요구할 때 즉각적인 회개를 요구하였고 공개적으로 고백하게 했다. 설교와 기도회 석상에서 특정 개인의 이름을 불렀으며 구도자 모임을 따로 가졌다43),
그리고 자신의 구원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상담할 수 있도록 설교단 가까운 곳에 좌석을 마련하였다. 지나친 감정주의와 사람들을 몰아세우는 것 때문에 피니의 공개적인 결단 요구를 불쾌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간혹 퇴장하기도 했다.
그가 첫 목회지에 가서 설교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그들의 마음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여러분 중에 이 시간 하나님과 화목하고자 그리스도 앞에서와 이 설교자 앞에서 서약하기로 준비되어 있는 분은 일어나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회중들은 꼼짝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잠시 회중을 둘러 본 후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의 태도는 결정되었고 여러분은 서약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복음을 배척하기로 말입니다”44)
그의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굉장한 감화를 불러 일으켰고 경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피니가 설교하고 있을 때 그를 죽이기 위해서 권총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 왔던 한 사람이 의자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나는 지옥으로 가라앉고 있구나’ 라고 울부 짖었을 정도였다45)
또한 그의 설교를 들은 어떤 양조업자는 자신의 창고 안에 가득쌓여 있던 술통을 모조리 부수고 길바닥에 술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d. 사회개혁을 위한 신학
대개 부흥사들의 메시지는 개인구원의 차원에 머물러 있지만 피니의 메시지를 보면 사회 개혁자적인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의 부흥사들은 술을 판매하는 사람들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하였다 피니의 설교 ‘범죄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도 이들에 대한 비판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의 죄악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으리라!하나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길로 돌진해 가는 것을 막으시려고 애쓰시는데 사람들을 유혹하는 술 판매업자( rumseller) 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친히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방해하려고 모든 짓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과 싸우셔야만 합니다”.46)
그러나 피니의 메시지는 음주에 대한 비판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당시의 큰 사회 문제였던
노예제도 대해 아주 강력한 비판을 하였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회의 병폐를 보고 침묵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도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책임질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교회 내에서 노예 소유자들을 과감하게 내 쫓았다
.
“많은 교회와 목사들이 교회와 국가안에 존재하는 이같은 혐오스러운 문제에 대해 증언하지 않고 자신들의 안녕 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증언하지 않고 침묵가운데 있다는 것은 그들이 노예제도를 죄악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상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200만 명의 노예들이 족쇄를 차고 피를 흘리며 그들이 손을 뻗어 하나님의 교회에 도움을 청하는 울부짖음을 보내고 있습니다...
도대체 교회가 고통과 절망의 목소리에 귀를 막아 버려셔야 되겠습니까?“47)
그의 설교 주제의 하나가 사회개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휘니는 부흥사들이 항상 강조하는 음주에 대한 각성과 반대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인권존중과 미국의 현실적 이익이 부딪히는 문제의 지점에 서서 하나님의 의를 불같이 강조하였다
“ 그것은 분명 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진리만을 말하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노예 제도에 대해 침묵을 지킬 수 있습니까?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고 변명 할 수 있는 일이라 봅니까? 노예제도 같은 일에 침묵을 지켜 외면한다는 것은 바로 죄를 범한 일입니다“48)
고통 당하는 사람이 있고 사회의 비평화적 요소가 존재하는 한 진정한 구원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복음의 정신과 사회개혁은 종이의 양면처럼 피니에게 작용하여 설교세계의 탄탄한 주제를 이루게 된다. 피니는 복음전도에 대한 관심과 사회에 대한 관심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자가 사회적 병폐 앞에서 또는 불신자를 보고서도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3. 설교 분석
a.설교자 이해
무엇보다도 피니는 하나님께 자기자신을 헌신하며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었다
그는 금식과 오랜 철야기도를 행하였던 경건주의자 적 경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성령에 의한 세례를 중시했으며 그러한 세례를 받아야 만 능력있는 사역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피니는 비록 정규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대단히 지적인 사람이었다. 법률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그의 설교들은 종종 놀라울 만큼 논리적이었다. 지식인들과 전문직업인들도 그의 설교에 감탄을 하곤 했었다. 피니는 육체적으로 강건하였고, 정열적이었으며 자신감에 넘쳐 있었으며 어떠한 상황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생애는 복음주의와 윤리
교육과 영적훈련, 개혁과 원숙함등의 조화를 이루어야 훌륭한 사역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b. 설교의 배경과, 수사학적 특징
생활 주변에 널려있는 여러직종의 사람들에게 일상적인 사례를 언급함으로써 그의 설교의 논지를 전개하였다. 나는 농부와 기계공등,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사건을 예화로삼았다. 나는 또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말하자면 평범한 사람들이 말로서 설교했다. 제한된 어휘를 사용해서 나의 모든 생각을 표현하려고 애썼으며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당시에 목사들 사이에 유행되고 있던 인식과는 정반대가 되는 방법이었다. 그들은 내 예화를 듣고는 “당신은 왜 옛날의 역사적 사건을 예로 들지 않고 왜 또 당신의 생각을 예증하는데 좀 위엄있는 방법을 택하지 않습니까?”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 한 그들은 내가 강단의 권위를 떨어뜨린다고 불평을 했다
내가 성직자들에 대한 불명예이며 법정에 선 변호사처럼 말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구어체로 설교하며, 죄와 죄인들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이라고 하지 않고“ 당신들”이라고 말하며 “지옥” 이라는 말을 쓸 뿐 아니라 그것도 아주 강한 어조로 말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말하기를 나는 마치 사람들이 곧 죽을 것처럼 윽박지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내가 사람들을 너무 꾸짖는다고 불평했으며 때로는 내가 설교를 반복하는 잘못을 범한다고 했다 49). 그의 설교 '죄인들에 변명에 대한 신성모독‘에서 보면 알 수 있다
“죄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첫 번째 큰 의무를 행하는데 얼즉, 그분에게 당신의 마음을 들이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립니까? 얼마나 긴 시간이 요구 됩니까?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자 결심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요구됩니까? 당신은 이러한 일이 한 순간에 이루어짐을 알지 못합니까? 당신이 자기자신에게 그것을 하도록 설득시키는데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합니까?”50)
나는 이런 말에 대해서 “나는 그들에게 나로서는 사람들이 내 설교를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나의 이러한 입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실히 말해 주었다” 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쉬운 언어를 사용하여 설교하였던 피니는 성경의 진리를 개인에게 적용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 범죄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평가」에서 그의 설교를 보면
“주님은 지금도 모든 죄인들이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저에게 반문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습니까? 그들은 유대인이 아닙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나 죄인인 여러분도 이 살인에 참여 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거기 있었다면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큰 소리로 그를십자가에 못 박으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고 외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항상 ‘우리에게 떠나 주십시오. 우리는 당신의 기를 알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 설교는 말의 끊임없는 반복과 적용을 통해 설교의 주제를 강조하고 있으며 특별히 훈계의 형식을 띠고 있다. 또한 법학을 공부한 설교자답게 법률적인 냄새를 풍기는 언어나 이야기가 제시되고 있기도 하다. 극적인 회심을 체험하고 부흥운동가로 인생의 진로를 바꾼 피니는 법률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설교의 진행이 논리적이었으며 재판정에서 법률가가 질문을 퍼붓듯이 집요하게 회중들에게 파고들었다.
“하나님을 정죄하는 죄인들의 변명”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데 이 설교는 또한 그의 강점뿐 만 아니라 약점들의 일부도 보여 준다. 이 설교에서 그의 언어는 낭비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몇몇 곳에서 그는 “오 이 얼마나 바보같은 넌센스 입니까!”.“ 그것은 ..불합리하고 터무니없는 넌센스입니까” 그러한 가르침을 쫓아 그 가르침이 나온 지옥의 구덩이로 꺼져 버리시오!“ 라는 말도 피니가 자신의 설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저는 제가 배심원들에게 이야기하였던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의 설교는 종종 반복적이었고 논쟁적이었고 심지어 적대적이기도 하였다.51)
또한 그는 대화체의 설교를 자주 사용했다. 이것은 그가 원고를 보고 설교를 하는 것을 싫어했고, 오벌린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즉흥적인 설교 방식을 취하라고 권고하기까지 했는 데
피니가 전적으로 즉흥적으로 설교하였다고 믿기란 불가능하다
설교의 핵심은 자유롭게 즉흥적으로 이야기되었으나, 수 많은 요점들은 미리 마련된 개요를 보고 설교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그의 설교 “죄 범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는 이와같이 설교한다52)
“죄인이여!이제 말해보십시오. 당신은 당신의 상속권을 파시겠습니까? 그럼 당신은 그 대가로 얼마나 받으시려 하십니까?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익의 대가로 얼마나 믿으시려 하십니까? 당신은 얼마나 받고 당신의 영혼을 팔고 당신의 그리스도를 팔려고 하십니까?.........당신은 은 삼십도 채 받지 않고 당신의 구주를 팔기 위해 흥정할 때가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은 삼십은커녕 지극히 하찮은 것을 받고도 당신은 당신의 구주를 판적이 있을 겁니다”
이처럼 피니는 회중들에게 반복적이며 논쟁적인 설교를 했기 때문에 그리고 회중인 당사자에게 직접적으로 파고 들었기 때문에 거부감도 일으키지만 그의 설교가 구체적이고 알기 쉬웠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다.
4. 오늘의 한국강단에 주는 교훈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반드시 개인의 변화뿐만 아니라 사회변혁이 일어났다. 그것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복음의 성격과 속성 그 자체가 바로 사회변혁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복음이 전파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찰스피니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기를 원하고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한 마디로 능력있는 설교자의 모습이었다. 먼저는 피니 자신이 극적인 회심과 변화의 체험을 하여 설교자로서의 기본적인 영적인 연단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생명과 생명의 만남을 연결시키는 선포의 수단인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다.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설교의 소명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언어 사용에 있어서 비판을 받았지만, 담대하고 자신있게 회중들 앞에서 선포했다
죄와 구원, 심판과 멸망, 지옥과 천국 등 복음의 원색적인 면을 그대로 증거했다 .
오늘 한국강단에서도 점점 죄인들을 통회하고 만들고 회심하게 만드는 능력있는 설교의 모습을 점점 잃어
버리고 수준높은 교양강좌에다 복음을 엷게 바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따라서 설교자는 먼저 하나님께 설교자로서의 신적인 소명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보겠다. 그리고 회중들의 눈치를 보아가며 설교하며 심지어 비유를 맞추는 듯한 설교도 지양되어야 한다. 설교자의 철저한 준비와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목자의 심장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Ⅳ.결 론
정장복 교수의 말처럼 이 시대는 상대적으로 시들어가는 설교 사역자의 고유한 정신(ethos)과 사려깊은 노력의 결핍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종으로서 그 고결한 땀과 눈물이 서서히 식어져 가고 , 이 시대의 혼탁한 물결에 휩싸이지 아니하려는 몸부림이 사라져가는 현실을 보면서 다시 한번 설교자로서 바로서야 한다고 본다.
한국교회 강단에 필요한 몇 가지를 제안하면은 화신적 설교의 열정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가 직업화 되어가는 듯한 일이 벌어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림이 없이
는 설교를 끝맺지 못하고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진 휫필드의 정열과 화신적 설교가 잠자고 타성에 빠진 교인들을 흔들어 깨울 수 있듯이 유창한 화술이나 지식의 전달이 아닌 몸과 마음을 묶어서 성령님께 의지해서 골수에 사무치는 불을 토하듯 말씀의 생기를 불어넣는 화신적 설교가 필요하다.
두 번 째로 설교자는 자신의 음성개발을 위해서 훈련하고 노력해야 한다
지금 이 시대는 불신과 자기 중심적이며 강퍅해진 시대이기에 설교가 직접적으로 자신과 관련이 없는 한 종교적이고 의례적인 것으로 간주해 버리기 때문에 설교가 설교로서 효과를 거둘 수가 없다. 3만명에게 설교할 수 있었던 휫필드 조차도 그의 끊임없는 훈련과 노력을 통하여 음성표현의 효과를 높였다
세 번째로 죄와 회개에 대한 설교의 필요성이다. 휫필드와 피니의 대부분의 설교 주제는 죄와 회개의 문제였다. 이를 통하여 많은 영혼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다
회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설교보다는 강단에서 정직하게 ‘죄와 회개’에 대해서 설교해야 한다
휫필드와 피니의 말씀이 다시 한번 설교자를 통하여 메아리 치는 이 땅의 강단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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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장복, 『설교 사역론』(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1992), 73쪽 2) Demaray, Donald. Pulpit Giants. 나용화 역『강단의 거성들』(서울:생명의 말씀사,1986),213쪽 3) 에드윈 C. 다아간 著, 김남준 譯. 『설교의 역사』(솔론몬, 1994). 369-370쪽 4) 윌리스턴 워커 저, 송인설 옮김 『기독 교회사』,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646쪽. 이성을 초월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모든 것은 실제로 증거없는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미신 제거는 자유이므로, 유일한 합리적 사상가는 자유로운 사상가이다. 인류의 최악의 원수는 사람들을 미신의 속박에 묶은 자들이고 그 주요한 예는 모든 종류의 ‘사제’ 들이다. 계속해서 가치있는 모든 것은 이미 자연적 합리적 종교 안에 제시되어 있다. 즉 기독교의 가치있는 모든 것은 “창조만큼 오랜된‘ 것이다 소위 ”“계시” 라는 하는 것 중에 애매하거나 이성위에 있는 모은 것은 미신 적이고 무가치한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해로운 것이다. 기적은 계시의 진정한 증거가 아니다. 5) 흄이 일으킨 가장 큰 충격은 당시 계시와 기독교를 방어하는 주요 수단이었던 기적을 비판한 것이었다. 기적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18세기가 그러하듯이, 기적을 기독교의 최고의 증거로 보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계시가 기적안에 신앙을 가져다 주는 것이지, 기적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기적을 인정하는 자들은 이제 주로 계시를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것으로 여겼고 글 결과 기적을 계시와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했다. 흄의 비판 이래, 기적 문제는 점점 더 골치 아픈 문제의 하나로 간주 되었다. 흄의 작품은 영국의 이신론 논쟁의 산물 중 가장 강력하게 표현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회의주의가 도래한 것이다. 6) 18세기 말 당시의 일반적 태도와 영국에서 정통적 기독교 진술마저 합리화되는 경향은 윌리암 팔리(William paley,1743-1805) 의 의해 나타나는데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시계로부터 제작자를 추론한다. 우리는 또한 인간의 몸, 눈, 손 근육의 놀라운 조화로부터 전능하신 설계자를 추론한다. 따라서 이런한 논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인간 행동의 규칙으로 만드시고 그것을 세상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존재가 증명된다. 계시의 목적은 “미래의 보상과 형벌을 받을 것을 증명하는 것” 이다. 이 계시가 그리스에 의해서 주어졌고, 이 계시의 최초의 제자들을 설득한 힘은 계시에 수반되는 기적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7) 『설교와 신학2,』 한국설교 아카데미, (바울, 1990), 62쪽 8) 이형기, 『세계 교회사 Ⅰ』(한국 장로교 출판사, 1996), 329-330쪽. 9) 에드윈 C. 다아간, 김남준 역. 앞의 책, 370-371쪽 10) E .C Dargan, A History of preaching, Vol.2.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54),309쪽 11) 송삼용, “옥스포드 광야 시절과 휫필드의 거듭남”, 「그 말씀」( 1997. 2), 220-221쪽. 12) 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 上』(장로회 신학대학교 출판부.1999), 340쪽 13) 『세계 명설교 대전집3』 박종구 옮김,(성지연구사, 1986), 187쪽. 14) Timothy L. Smith, Whitefield, Wesley on the New Birth (a zondervan publication 1986), 11쪽 15) 박명수, “휫필드와 18세기 복음주의”, 「그 말씀」, 통권27호 (1994.10),153-154쪽. 16) 오덕교 “조지 휫필드와 그의 설교” 「그 말씀」통권 27호 (1994.10), 115-116쪽. 17) 세계 명설교 대전집3, 232-233쪽 18) Timothy L, Smith, 앞의 책, 13-14쪽 19) 세계 명설교 대전집3, 243쪽 20) 정장복, 『설교학 서설』,(도서출판:엠마오. 1997), 58쪽 21) Donald Demary, Pulpit Giants, 나용화 역 『강단의 거성들』(서울:생명의 말씀사,1986) 209쪽 22) 위의 책, 249쪽 23) 위의 책, 197-198쪽 24) 위의 책, 229쪽 25) 정장복, 『설교 사역론』, 102쪽 26) 세계 명설교 대전집, 27) 오덕교, “죠지 휫필드와 그의 설교” 『그 말씀』통권 27호(1994.10), 119쪽 28) D.M 로이드 죤스 『죠지 휫필드』, 정영식 역(서울: 새순출판사, 1986), 40쪽 29) J. I 패커 “경이로운 청교도” 「그 말씀」통권 27호(1994. 10). 136쪽 30) 이형기, 『세계 교회사Ⅱ』, 465-466쪽 31) 윌리스턴 워커, 앞의 책, 673-674쪽 32) 부흥운동에 의해서 고무된 활력은 곧바로 자발적인 단체들로 스며 들어갔다. 단체의 지도자들은 선교의 정열을 감소 시키지 않으면서도 거대한 도덕적, 인도주의적 운동을 수행하여 사회를 개량하기 위해 자발적 단체의 유형을 활용하고자 했다. 부도덕, 방탕, 청소년 범죄,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 등이 없어지고 1826년 미국절제촉진협회가 음주자들을 개선시키는 효과를 보았고 1846년 메인에서는 금주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33) 미국 평화협회는 1828년에 조직되었고 가장 중요한 개혁운동은 노예제도 폐지 운동이었다. 19세기 초에는 노예제도에 대한 반감이 전국적으로 퍼져있었다. 그러나 플랜테이션 체제를 위한 산업인력의 필요, 노예폭동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윌리엄 개리슨과 같은 북부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의 완고한 공격에 대한 깊은 반감 때문에 남부에서는 1830년 경에나 큰 변화가 일어났다.하지만 북부에서는 노예제도폐지 운동이 자발적으로 일어났지만 남부에서는 수공업 중심이 산업이 특히, 목화밭 농장의 엄청난 노동력의 문제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더 컸다. 테오도르 드와이트 웰트가 복음주의 자들 사이에서 노예제도 폐지 정서를 퍼뜨리는 데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이었다. 북북 기독교인들의 노예제도 폐지 운동에 대한 관심이 점차 커져감에 따라서 북부와 남부 복음주의자들의 간격도 계속 벌어졌다 34) 『세계 명설교 대전집3』,486-487쪽 35) 한국 설교 아카데미,『설교와 신학』,69-79쪽 36) Charles E. Hambrick-Stowe, Charles G. Finney and the Sprit of American Evangelicalism. (EERMANS PUBLISHING COMPANY, 1996), 20쪽 37) 헬렌 웻셀 편(編), 양낙홍 역(譯) 『찰스 피니의 자서전』(서울 생명의 말씀사,1986),20쪽 38) Charles E Hambrick-Stowe, 앞의 책, 20쪽 39) 위의 책, 80쪽 40) Raymond Edman, FINNEY LIVES on, 94-95족 41) 위의 책, 98-103쪽 42) 헬렌 웻셀 양낙홍, 앞의 책, 80쪽 43) 이형기,『세계 교회사Ⅱ』,467쪽 44) 『설교와 신학3』, 한국설교 아카데미(바울: 1990), 71쪽 45) 위의 책,74쪽 46)『세계명설교 대전집3』, 515쪽. 47) 한국 설교 아카데미, 앞의 책, 75쪽 48) 정장복, 『설교의 역사』, 356쪽 49) 헬렌웨셀, 양낙홍 『찰스피니의 자서전』,74-75쪽 50) 『세계명설교 대전집3』, 524쪽 51) 세계 명설교 대전집3, 495-496쪽 52) 「세계 명설교 대전집3」, 494-4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