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중세의 설교(설교의 암흑기)
I. 서론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설교의 진정한 목적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1) 이것은 모든 설교자들이 명심해야 할 명백한 언명이다. 그러나 설교의 역사에 있어서 참으로 안타까운 시대가 있었다. 한 시대의 설교들과 설교자들이 주어진 기능과 목적을 거의 수행하지 못한 시기였다. 교회사에서 초기중세가 바로 이 시기에 해당되며, 우리는 이 시기를 ‘설교의 암흑기’라고 부른다.
그런데 초기중세가 ‘설교의 암흑기’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당시에 설교가 행해지기 곤란했거나 금지되어져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당시에 많은 설교가들이 있었고, 많은 설교들이 행해질 수 있었다. 그 중에 크리솔로구스(Chrysologus, 황금의 연설)라고 불리는 피터(Peter, 451년 사망)는 크리소스톰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교회사는 무기력한 문장가에게 이름이 걸맞지 않았음을 다시금 확인해주고 있다.
우리는 설교가 풍부한 시대를 살고 있다. 언제든지 설교를 들을 수 있고, 원하는 설교자를 선택하여 들을 수 있다. 여러 교회에서 들려주신 말씀을 인터넷을 통하여 다시 들을 수도 있다. 또한 그 설교문 자체도 받아 볼 수 있다. 라디오와 케이블 TV에서는 예배 실황을 통해 설교를 그대로 전해주기도 한다. 한 개인이 ‘역사상 가장 많은 설교에 접할 수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초기중세 설교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많은 설교들이 있었고 많은 설교가들이 있었지만, ‘설교의 암흑기’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본 연구에서는 초기중세의 설교를 고찰하고자 한다. 먼저, 시대적인 배경을 살피고, 수도원과 교황제, 교리논쟁, 동․서 교회의 분열 등으로 대변되는 당시 교회의 상황을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는 ‘설교의 암흑기’에 행해졌던 설교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안타깝게도 당시 설교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 대부분 학자들의 간접적인 평가를 인용하게 될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고찰을 통하여 초기중세를 통해 오늘의 설교자가 인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논하고자 한다.
II. 초기중세의 배경
중세시대의 구분에 관하여 교회사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다. 이형기는2), 500년경~1500년경을 중세로 구분하고(500년경~950년경: 초기 암흑한 중세기, 950년~1350년경: 활력을 되찾은 중세기, 1350년~1500년경: 몰락하는 후기 중세기), 서던(R. W. Southern)3)은 700년경~1550년경을 중세시대로 구분하며(700년경~1050년경: 초기시대, 1050년경~1300년경: 성장의 시대, 1300년경~1550년경: 불안의 시대). 캐넌(William R. Cannon)4)은 로마의 멸망(476년)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의 멸망(1453년)까지의 시기를 중세로 구분하고 있다. 한편, 다아간(Edwin C. Dargan)은,『설교의 역사』에서 430년에서 1095년을 ‘초기 중세 암흑시대’로 나누고 있다. 그는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의 설교의 시대가 끝난 후부터 제 1차 십자군 원정에서의 은둔자 피터(Peter the Hermit)와 교황 우르반 2세(Pope Urban II)의 설교까지로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다.5) 그러기에 본 연구에서는 다아간의 시대 구분을 중심으로 한 ‘초기 중세’의 시대적 배경과 교회의 상황을 고찰하고자 한다.
A. 시대적 배경
1. 로마제국의 몰락
로마제국은 내부적인 부패와 외부적인 침략에 의하여 몰락해 갔다. 외부침략은 두 방향으로 이루어졌는데, ①하나는 북쪽과 북동쪽으로부터의 ‘야만인들’에 의한 남침이었다. 이들은 기독교를 수용하면서 희랍․로마 문명에 순응하였다. ②그러나 동남쪽으로부터 몰려온 침략자들은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이었다. 이들은 로마제국의 기독교 문화는 수용했지만, 이슬람교를 고수하였다. 이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교회의 수는 점점 줄었고, 기독교의 세력은 점점 거세되어 갔다. 476년에는 결국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게 된다. 476년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가 퇴위하고, 오도아케르(Herulian Odovacar or Odoacer)가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496년에는 프랑크족의 왕인 클로비스(Clovis)가 세례를 받았는데, 이는 침략자인 게르만족의 회심을 상징하며 장차 서방의 기독교가 로마제국이 아닌 게르만족의 통치자에 의해서 승계될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6)
1) 서로마제국의 몰락
동로마제국과 달리 서로마제국은 여러 민족들의 침입을 계속 겪게 된다. 이러한 침입은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지기까지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있게 된다.
①407년 라인강을 도하한 반달족(Vandals)은 프랑스와 스페인 일대를 방랑하다가 429년 지브랄타(Gibralter) 해역을 건너 439년 카르타고를 함락시켰다. 이 때 이들은 이미 지브랄타 해역으로부터 북아프리카 해안 지방을 실질적으로 정복하였다. 그 후에 다시 바다를 건너 시실리(Sicily), 코르시카(Corsica), 그리고 사르디니아(Sardinia)를 점령하였다. 455년에는 로마시를 약탈하였는데, 당시의 참상은 45년전 고트족(Goths)의 침입 때보다 더욱 혹심하였다. 이들의 북아프리카 통치는 교회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이들은 아리우스주의였으므로 일반 신자들과 도나투스주의자들을 계속 박해하였다. 약 1세기 가량의 반달족의 통치가 끝난 후에야 이 지역은 비잔틴 제국의 벨리사리우스(Belisarius) 장군에 의해 평정되었다.7)
②378년 비시코트족(Visigoths)은 아드리아노플(Adrianople)에서 로마인들은 패퇴시키고 발칸반도 일대를 휩쓴 후 410년 로마를 점령했다. 415년에는 스페인에 침입하여 8세기 초 모슬렘들에게 정복되기까지 그곳을 통치하였다. 이들 역시 아리우스주의였으나 반달족만큼 자기들 영내의 정통주의자들을 박해하지는 않았다. 비시코트왕 리카드(Ricared)가 589년 톨레도에 회의를 소집하고 니케아 정통신앙을 받아들였다. 귀족들의 대부분은 왕을 쫓아 카톨릭으로 개종하였고, 얼마 안 되어 아리우스주의는 사라지게 되었다. 리카도의 개종 후, 교회는 비시고트 왕국을 위한 입법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시고트 왕국은 정치적으로 불안하였으며 폭력과 압제가 난무하였다. 결국 로데릭(Roderick, 710-711)왕 때에 모슬렘들이 스페인에 침입하여 비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다.8)
③5세기 대부분 동안 고울 지방은 아리우스파였던 부르군디족(Burgundians)과 아직도 이교도 신자들이던 프랑크족(Franks)에 의해 양분되었다. 부르군디족들은 북아프리카의 반달족과는 달리 정통 신자들을 핍박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들은 오히려 원주민들의 전통을 모방하였으며 얼마 안되어 많은 부르군디족들이 니케아적 정통신앙을 받아들였다. 516년 지기시문트(Sigismund) 왕은 정통 삼위일체 교리로 개종하였으며 국민들도 그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9)
④프랑크족(Franks)은 원래 독립된 부족들의 동맹형태였다. 그러다가 메로베우스(Meroveus)라는 인물이 나타나 메로빙가 왕조(Merovingian dynasty)를 이룩하여 국가적 통일 형태를 가져왔다. 메로베우스의 손자이며 메로빙가 왕조의 영웅인 크로비스(Clovis)는 기독교 신자였던 부르군디족의 공주와 결혼하였으며, 전쟁에 나아갈 때마다 만약 자기 아내의 신이 승리를 허락한다면 개종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결과 496년 그는 그의 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534년에는 부르군디족이 프랑크족에 의해 정복당함으로써 전 지역이 통일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메로빙가 왕조는 계속 나약한 왕들을 배출하여 7세기경에는 군신들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군신들 가운데 하나였던 챨스 마르텔(Charles Martel)이 스페인을 정복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의 심장부를 위협하던 모슬렘들을 대파하였다. 그의 아들이 피핀(Pepin)은 교황의 지시에 따라 보니파스(Boniface) 감독에 의해 국왕에 임명이 되었고, 피핀의 아들 샤를먀뉴(Charlemagne)는 중세 초기의 가장 뛰어난 통치자로 등장하게 된다.10)
⑤영국과 아일랜드는 로마제국의 통치에 완전히 부속된 적이 없었다. 하드리안 황제는 섬을 남북으로 양분하는 성벽을 건축하였는데, 그 남부는 로마제국의 일부였으며 북부는 픽트족(Picts)과 스콧트족(Scots)들이 그들의 독립을 유지하였다. 대륙에서 로마제국 영역이 위협을 받자 브리튼에 주둔하던 군단들이 철수하였으며 많은 주민들이 그들과 함께 이동하였다. 남아있던 자들은 곧 앵글족(Angles)과 색슨족(Saxon)에 의해 정복되었는데, 이들은 그 후 켄트(Kent), 에섹스(Essex), 써섹스(Sussex), 동 앵글리아(East Anglia), 웨섹스(Wessex), 노스움브리아(Northumbria), 그리고 메르시아(Mercia) 등 일곱 왕국을 설립하였다. 이들 칩입자들은 모두 이교도들이었다. 아일랜드는 로마제국에 예속된 적이 없었으나 기독교는 제국의 멸망이전 이미 그곳까지 퍼져있었다. 주로 아일랜드 선교는 패트릭(St. Patrick)의 공로라고 평가된다. 패트릭은 소년시절 아일랜드 약탈자들에 의해 브리튼에서 사로잡혀가서 아일랜드에서 노예생활을 하였다. 그는 목숨을 건 탈출 후에, 환상을 통해 이전에 자기를 포로로 잡아갔던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게 되었다. 아일랜드로 돌아간 그는 여러 가지 혼란을 겪었으나, 결국 큰 성공을 거두어 많은 주민들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얼마 안되어 수도원들이 설립되고 이곳들을 중심으로 고대의 학문이 전수되었다. 아일랜드는 당시 유럽을 휩쓸던 갖가지 침입과 약탈들을 모면할 수 있었으며, 이곳의 수도원들이 고대 로마제국의 문명과 문화를 보전하여 후대에 전수하는 소중한 역할을 담당하였다.11)
⑥이탈리아 지역은 야만족들의 침입으로 무정부 상태에 있게 된다. 476년까지는 로마에 황제들이 존재하였으나 이들은 여러 게르만족 무장들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476년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가 퇴위하고 오도아케르(Odoacer)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와의 갈등이 생겨 황제는 오스트로고트족(Ostrogoths)에게 이탈리아를 침공하도록 회유하였다. 그런데 오스트로고트족은 아리우스주의였으므로 정통신앙을 쫓았던 이탈리아 주민들은 콘스탄티노플에 원조를 청했다. 이로 인하여 신앙적인 박해가 있게 된다. 로마교회는 보에티우스(Boethius), 심마쿠스(Symmachus), 존(John)등을 순교자로 추앙하였고, 원주민들과 오스트로고트족들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유스티니안 황제 치하의 비잔틴 제국은 벨리사리우스(Belisarius)를 보내어 이탈리아를 평정한다. 그 후 568년 북부 이탈리아에 롬바르드족(Lombards)이 침공하였다. 이곳은 롬바르드족과 비잔틴 제국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다. 유스티니안 황제 아래 강성했던 비잔틴 제국이 약화됨에 따라 롬바르드족이 반도를 석권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콘스탄티노플로부터 도움을 기대할 수 없던 교황들은 8세기 중반부터 북쪽에서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따라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 사이에 동맹이 발전하였으며 결국 샤를마뉴가 서방의 황제에 임명되었다.12)
2) 아랍의 동로마 침공13)
7세기 초에 고대 로마제국의 질서와 평화가 다시 회복되는 듯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로마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이 일반적으로 무시하고 있던 아라비아로부터 정복의 물결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몇 년 안되어 페르시아 제국이 사라졌으며, 옛 로마 영토의 대부분이 아랍인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슬람의 창시자 모하멧(Mohammed)은 622년 메디나로 도주하여 이들의 모슬렘 공동체를 창설하였다. 이곳에서는 예배 및 종교의식뿐만 아니라 일체의 정치제도와 세속생활까지도 그의 손에 의해 마련된 지침을 따르게 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이곳으로부터 군사적, 정치적 원정을 시작하여 632년 그가 사망할 당시에 아라비아의 대부분이 모슬렘의 수중에 들어 있었다.
아브 바크르(Abu Bakr)때에 아라비아 전역이 통일되었고, 오마르(Omar)때에 아랍인들이 시리아에 침입하였다. 635년 다마스커스를 638년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또 다른 일파는 이집트에 침입하여 카이로(Cairo)로 알려진 도시를 건설한 후 642년에는 알렉산드리아를 함락시켰다. 647년에는 아프리카 북부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651년이 되기 전에 아랍은 팔레스타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및 이집트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695년 카르타고가 함락되었고, 카톨릭, 도나투스파, 아리우스파, 비잔틴파 등 헤아릴 수 없는 기독교 분파에 시달리던 북아프리카 주민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711년에는 타리크(Tarik)가 지브랄타 해역을 건너 비시고트 왕국을 휩쓸어 버렸다. 715년에는 스페인의 대부분 이슬람의 지배아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732년 투르(Tour) 전투에서 챨스 마르텔에 의해 패하게 되어 이슬람의 확장은 1차적으로 중단되었다. 이러한 침략의 결과, 기독교의 옛 중심지들인 예루살렘, 안디옥, 다마스커스,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카르타고가 모슬렘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4)
비잔틴 제국은 현재의 터어키와 일부 유럽 영토를 유지하는 데 불과하게 되었다. 결국 전체 기독교의 지리적 형태가 근본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지중해 연안을 따라 발전해왔던 기독교의 중심 축은 북에서 남으로, 브리튼 제도와 프랑크 왕국, 그리고 이탈리아를 포함하여 성립하게 되었다. 아랍인들의 비잔틴 제국 정복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은 800년에 교황이 샤를마뉴를 서방 황제로 임명한 것은 이러한 맥락과 연결된다.
3) 카롤링 제국의 쇠퇴와 새로운 침입자들
샤를마뉴와 그의 후계자들은 게르만족들의 침입에 의해 발생한 혼란으로부터 서유럽을 구조한 듯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침략은 카롤링 제국의 쇠퇴와 함께 또 다시 시작되었다. 수세기에 걸쳐 유럽의 북반을 점령하고 있던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조선기술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탐험을 시작하였으며 이들은 노스맨(Norseman, Northman)이라고 불렸다. 노스맨들은 처음에는 단지 브리튼 제도와 북부 프랑스 해안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카롤링 제국이 분열 속에 쇠퇴함에 따라 이들은 마음놓고 수도원과 교회들을 무차별 공격하여 약탈하였다. 11세기 경 데인족(Danes)의 왕 카누트(Canute)는 덴마아크, 스웨덴, 노르웨이 그리고 잉글랜드 전체를 정복하였다. 프랑스의 경우 그들은 보르드(Bordeaux), 낭트(Nante)에 이어 845년에는 파리(Paris)까지 약탈하였다. 스페인에서는 모슬렘들의 도시 세빌(Seville)과 아울러 기독교의 성지들을 약탈했다. 또 이들은 지브랄타 해역을 건너 지중해에까지 진출하였다. 마침내 이들은 모슬렘들로부터 시실리를 탈환하고 남부 이탈리아 일대에 왕국을 건설하였다. 또 다른 일파는 북부 프랑스에 정착하였으니 이 지역은 이후에 노르망디(Normandy)라고 불리게 된다. 그러나 결국 노스맨들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들은 피정복자들의 신앙을 자연스럽게 채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스칸디나비아 일대와 멀리 아이슬랜드(Iceland)에 거주하던 자들까지도 기독교화된 통치자들에 의해 세례를 강요당했다. 11세기 초반 카누트의 시대에는 이미 거의 모든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세례를 받은 상태였다.
한편 동쪽에서도 침입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마자르족(Magyars)으로, 로마인들은 이들은 헝가리인들(Hungarians)이라고 불렀는데, 일찍이 그곳을 침입했던 훈족(Huns, 흉노족)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늘날의 헝가리에 정착한 후 계속 독일 지방을 침입하였으며, 라인강을 수시로 넘나들었다. 933년과 955년 독일의 헨리 파울러(Henry the Fowler)와 그의 아들 오토 I세가 이들을 결정적으로 패퇴시킬 때까지 계속되었다.
B. 교회의 상황
1. 교회의 분열
로마 제국의 분열은 카톨릭교회의 분열을 가져왔다. 당시 서로마제국의 정복자들 사이에는 아리우스주의자 기독교인들이 있었고, 옛 이집트의 후손들인 콥트(Copts)족은 단성론(monophysitism)을 주장했으며, 네스토리우스주의는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다수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균열은 로마중심의 라틴계 카톨릭 교회와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비잔틴계 교회 사이에서 일어났다. 결국 1054년에 동․서 교회가 분리되었다.15)
교회의 최후의 분열은 몇 가지 단계를 거치게 된다. ①먼저, 교황과 샤를마뉴가 서방 제국을 설립하여 교황권에 특권을 부여했다. ②그리고 로마의 니콜라스와 콘스탄티노플의 야심에 찬 총주교 포티우스 사이에 분쟁이 9세기 중엽 상호 파문 선언으로 끝나고, ③로마의 레오 4세와 콘스탄티노플의 미카엘 세룰라리우스(Michael Cerularius) 사이의 최후 분쟁은 교리와 전례에 대한 다른 관점 문제를 포함해서 동유럽의 최근 개종자들에 대한 배심권을 주장했는데, 결국 1054년 상호파문으로 끝났다.
2. 서방교회의 수도원 운동16)
혼란한 이 시기에, 많은 이들이 완전한 헌신의 방도로 수도생활을 택하였다. 수도원 운동은 이집트와 여러 동방제국에서 강성하였으나, 서방의 수도원은 동방과는 달랐다. ①서방 수도원은 보다 실질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어 영혼과 아울러 육체를 훈련하여 세계를 복음화하는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②서방 수도원은 은둔생활을 이상적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공동체 생활을 추구하였다. ③또 서방 수도원 운동은 교회의 공식적인 계급제도와 계속적 갈등을 겪지도 않았다. 그래서 서방의 수도원은 교황들, 감독들, 그리고 기타 다른 교회 지도자들의 오른팔 역할을 수행하였다. 서방 수도원 운동의 형성기에 가장 중요한 인물은 480년경 오스트로고트족의 지배 아래서 누시아(Nursia)에서 태어난 베네딕트(Benedict)였다. 그의 자매 스콜라티스카(Scholastica)도 여인들을 위해 비슷한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베네딕트의 위대성은 그가 공동체를 위해 작성하였던 「규율집(the Rule)」에 있다. 베네딕트의 규율집은 극단적 금욕주의 대신에 엄격하지만 정도에 지나치지 않는 질서와 규범을 통한 지혜로운 수도생활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모든 수도사들에게 육체노동을 요구한다. 베네딕트는 수도생활의 핵심을 기도라고 생각하였고, 매일 개인 기도회와 경건회가 있었다. 낮에 일곱 번, 밤중에 한 번 있는 집회의 대부분 시간은 시편의 낭송과 다른 성경 강독으로 이루어졌다. 시편은 매 주마다 전체를 한 번씩 낭송할 수 있도록 배당되었고, 다른 성경 강독은 시간과 요일과 절기에 따라 결정되었다. 경건회를 거행하기 위해서는 서적들이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수도사들은 성경 및 기타 서적을 필사하는데 익숙해졌으며, 이것들은 후대를 위해 길이 보존되었다. 수도원은 또한 학문의 중심지가 되어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는 이곳에 맡겨진 어린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수도원은 병원이나 약국 혹은 여행길의 나그네를 위한 여관의 기능도 담당하였다.
3. 교황제도17)
수도원 운동과 아울러 중세의 통일성과 지속성을 제공했던 것은 교황제도였다. 교황(Pope)이란 단어는 초기에는 모든 중요하고 존경받는 감독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야만족들의 침임으로 교황의 권위가 크게 고양되었다. 동방은 그 후 1000년 가량 지속되었지만 서방은 법과 질서뿐만 아니라 고대 문명의 유산을 보호하는 역할을 교회가 담당하였다. 로마 감독이 침략자들에 의해 와해된 통일성을 회복하는 초점이 되었다.
레오(Leo the Great)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교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인물이었다. 당시에 신학논쟁은 주로 동방교회에서 발생하였으므로, 레오의 중재가 큰 영향을 미치기는 하였으나 황제로부터의 반대를 극복할 만큼 강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452년 훈족의 아틸라(Attila)가 이탈리아의 아퀴레이아(Aquileia)시를 점령하였을 때, 담판을 벌인 것은 바로 레오였다. 455년 반달족이 로마를 함락시켰을 때, 로마감독이었던 그는 로마가 방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달족의 지도자 젠세릭(Genseric)과의 협상을 주도하였다. 그가 이러한 능력을 발휘한 것은 개인적인 재능 때문이기도 하였으나 동시에 세속관리들의 능력이 거의 마비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476년 오도아케르가 서방의 황제를 강제 퇴위시킴으로 이탈리아는 장기간에 걸친 무정부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이론적으로는 이탈리아는 이제 동로마제국의 일부였다. 그러나 신학적 논쟁들로 인하여 교황들과 동로마제국 황제들 사이에는 갈등이 계속 존재하였다. 동방과 서방 사이에 장기적인 내부적 분열은 아리우스주의인 오스트로고트족의 이탈리아 침입으로 더욱 가열되었다. 498년에는 각각 오스트로고트족과 콘스탄티노플의 지지를 받고 있는 두 사람의 교황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여러 차례의 종교회의 후에야 이러한 갈등은 해소되었다. 로마는 다시 롬바르드족의 칩입을 받게 되고 565년 유스티니안의 사망 후 비잔틴 제국의 세력 약화로 로마에서는 교황들이 롬바르드족의 위협에 대항하여 도시를 보존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지원을 받을 수도 없고, 자력으로도 방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프랑크족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강력한 교황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레고리 I세였다. 540년 로마제국이 몰락하는 상황 중에 태어났다. 그는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시실리섬에 6개의 수도원을 세워 베네딕트 계통의 수도원적 삶을 실천하였다. 590년 그레고리는 성직자들과 시민들의 환호 속에 교황이 되었다. 그레고리는 연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홍수의 피해를 입은 로마 시민들과 전염병 환자를 구제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고, 이태리를 침공해 온 롬바르드족을 막아내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교황으로 재직하는 동안 교회생활과 교회행정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설교를 자주 했고, 예배 의식과 음악(그레고리안 성가)을 포함한 교회의 공적인 예배를 중요시했으며, 예배형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또한 수도원의 도덕적․영적 갱신에도 힘썼다. 당시 그레고리를 ‘하나님의 집정관’이라 칭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로마 정치인의 행정력에 방불하는 행정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는 신학자로서 두각을 나타냈고, 당시 널리 확산되었던 대중적 기독교를 많이 문서화시켰다. 18)
교황이 샤를마뉴(황제)에게 왕관을 씌울 정도로 권한을 소유한 듯하였으나, 로마 자체 내에는 무질서와 혼돈이 지배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직은 야심가들의 희생물이 되었다. 요한 8세의 집권기간 동안 교황청의 부패가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 교황은 자주 바뀌었는데, 로마 안에서와 알프스 너머에서 대립하는 여러 세력들이 교황보좌를 자기편으로 만들려 하여 교황청의 역사는 음모와 살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경우는 교황이 둘, 심지어는 셋도 되었다. 이들은 각각 자신이 성 베드로의 진정한 승계자라고 주장하였다.19)
III. 초기 중세 시대의 설교
A. 초기중세 설교의 특징
1. 설교의 암흑기20)
1) 설교의 특징
위에서 살펴본 중세의 시대적 상황은 교회의 위축과 혼란을 수반하였다. 수도원 운동과 교황권의 타락이 이를 잘 반영하는 것이라고 본다. 다아간은 중세 초기의 설교를 향하여 “모든 역사를 통하여 설교가 가장 낮은 상태에 있었으며... 그것은 병들었지만 죽지는 않았고, 질이 매우 안 좋았지만 완전히 썩은 것은 아니었다”라고 말한다.21)
밖으로는 야만 문화가 위협하는데, 내부에서는 교회 안팎의 부패로 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복음을 전하는 설교가들에게도 해로운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 설교가 거의 없었다든지 설교가 금지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시기는 ‘설교의 암흑기’라고 불려진다.
①이는 당시 설교자들이 교부들의 글에 지나치게 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교부들을 ‘의심할 여지가 없이 신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 580년 사망)의 표현에 잘 나타나 있다. “교부들의 방법과 화합하지 못하거나 불일치하면, 그것을 피하는 것으로 해결해야 한다.”22)
②당시의 설교의 특징은, 고대 교회로부터 받은 유산을 단편적으로 골라 모아 가지고 백성들에게 중계해 주는 정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결국 설교자는 라틴어로 된 교부들의 설교를 로만스어(Romance)나 게르만 민족어로 옮기는 번역가와 같은 일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설교 언어에 있어서 일찍 민중어의 흔적을 담게 되었다. 초기중세를 통해 성직자들은 불어나 게르만어로 말하면서도 자기 설교의 개요는 라틴어로 적어두는 관습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③또한, 이 시기의 설교는 간단히 말하자면 과거의 것을 모방․편집하거나 직접 베낀 것이었다. 692년 트룰로 공의회(Trullo Council)에서는, 설교가들이 그들 자신의 설교를 구성해서는 안 되며 크리소스톰과 두 명의 갑바도기안 신학자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와 바실(Basil)의 설교들을 모델로 삼을 것을 지시하기도 하였다.23)
결국 교회 안팎으로 침입과 혼란이 있는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갈급한 시기에, 설교가 새로운 음성을 들려주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설교의 형식
설교형식은 아주 짧았으며 뚜렷이 언급할 만한 문체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힘, 생명, 아름다움, 웅변도 없었다고 한다.24) 설교문은 무기교적 해석과 서투른 표현 양식으로 인해 단순하고 원시적인 특징을 나타내었다. 설교에 나타난 성경해석은 알레고리칼하거나 억지가 많았으며 유치하기도 하였다.
8세기의 성상논쟁이 있을 즈음, 교회의 상황은 설교를 형식주의로 악화시켰다. 성직자들까지 타락하여 신학적인 사유는 거의 없고, 성인들, 성상, 동정녀 마리아, 축일에 대한 장황한 말들이 하나님 말씀 대신에 설교의 자리를 차지했다.25)
수도원 설교의 경우에 주로 수사와 수녀들을 가르치고 권고하는 것이었다. 이 설교의 목적과 성격은 수도원적인 것이었다. 수도원 설교는 대개 그 조직을 맡은 성직자가 하거나 수사가 하기도 하였고, 내용은 훈시적이며 자주 신비적인 성격을 띄기도 하였다.26)
카롤링 왕조의 문예부흥은 8-9세기에 걸쳐 설교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 시기에는 설교만은 살아서 교회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게 되었다. 797년 오르레앙의 데오돌프(Theodulf of Orleans) 감독은 “성경을 아는 사람은 성경을 선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하였다.27) 그러나 설교의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는 편집과 재생산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목표는 민중에게 기독교적 교훈을 주는 데 있었지만, 그 내용은 언제나 교부들의 설교에서 가져온 것이었다.28)
3) 설교 암흑기의 원인29)
초기중세가 설교의 암흑기가 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①먼저, 이 시기에는 예전과 예배 양식이 성장하였다는 점이다. 예전과 예배 양식의 강조는 설교의 위상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설교가 예배형식보다 가치가 덜 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결국 초기중세에는 설교가 예전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②이와 맞물려 교회의 규율과 고백성사 강조를 들 수 있다. 설교는 은혜 그 자체보다는 은혜의 수단인 교회의 의무와 자선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③다음은, 교권의 위계(hierachy)의식이 성장하였다는 것이다. 야만인이라 불리는 여러 민족들의 서로마 침공은 계속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행정조직이나 로마제국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시대상황 속에서 교황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서방 교회에는 직접적이고 강렬한 야만족의 침공들이 있었다. 절망감, 무기력과 공포에 떠는 감정은 설교가 성장해 나갈 좋은 조건이 못되었다. 더구나 교황을 중심으로 한 성직자의 위계 질서는, 당시의 설교자가 자신을 예언자보다는 사제 개념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④당시의 격렬한 교리 논쟁이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431년 에베소 공의회, 451년 칼케돈, 553년 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로 이어지면서 교리의 민감한 부분에 대한 논쟁들이 있었다. 설교의 내용은 교리 논쟁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설교는 교리의 민감한 부분에 대하여 낮추어 말하거나 회피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하였다. 7세기에는 단의론(monothelete) 논쟁이 있었고, 8세기에는 성상논쟁이 있었다.
⑤동시에 교회의 다른 상황들은 설교를 악화시켰다. 광신주의와 미신이 만연했고, 천사와 성인들, 성상과 성물들이 예배의 대상이 되고, 동정녀 마리아 숭배가 지나치게 되었다. 또 축제와 성인들의 축일이 많아졌다. 다아간에 의하면, 이러한 상황들은 설교를 형식주의로 악화시켰다고 한다. 성직자들까지 타락하여 신학적인 사유는 사라지고 성인들, 성상, 동정녀 마리아, 축일에 대한 장황한 말들이 하나님 말씀 대신에 들어갔다고 한다.30)
B. 초기중세의 설교가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초기중세, ‘설교의 암흑기’에 많은 설교가들이 있었고 많은 설교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수사학이나 문학적인 면에서 뛰어나다고 인정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설교의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는 많은 단점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다아간은 초기 중세의 여러 설교가들을 지목하고 있다. 그는 5~6세기 설교가로는31) 시네시우스(Synesius), 테오도레(Theodore), 네스토리우스(Nestorius), 프로클루스(Proclus), 바실(Basil), 시릴(Cyril), 테오도레트(Theodoret), 파트리키우스(Patricius, St. Patrick), 피터(Peter), 튜린의 주교 막시무스(Maximus), 레오(Leo the Great), 그레고리(Gergory the Great) 등을, 7-8세기 설교가로는32) 소포리누스(Sophorinus), 비시디아의 게오르게(George of Pisidia), 안드류(Andrew), 다마스커스의 요한(John of Damascus), 스튜디데스(Theodore Studites), 스페니아드 일데폰소(Spaniard Ildefonso), 엘리지오(Eligius), 색슨족의 수사 베대(Bede), 콜롬반(Columabn), 가울(Gaul), 보니파스(Boniface)등을, 9-11세기의 설교가로서는33) 그레고리(Gregory), 게오르그(George), 포티우스(Photius), 테오파네스 세라메우스(Theopanes Cerameus), 안스가르(Ansgar), 마우르스(Maurus), 마인쯔의 대주교 아이스틀프(Aistulph), 하이모(Haymo), 풀베르트(Fulbert), 켄터베릭 대주교 알프릭(Alfrick), 요크 대주교 알프릭(Alfrick), 알프릭(Alfrick the Grammarian), 다미아니(Damiani), 신학자 안셀름(Anselm) 등을 열거하고 있다.
1. 레오(Leo the Great)
1) 설교가 레오34)
레오(Leo the Great)의 행정에 대한 관심, 로마 영해를 확장하려는 노력, 베드로의 교황권 우위에 대한 과감한 주장, 칼케돈에서 교리적 주도권을 쥔 성공적 주장, 침략자 아틸라와 겐세릭에 탄원한 노력, 이 모든 것들은 그가 위대한 지도력을 가진 성직자임을 보여 주지만, 설교가의 독특한 자질은 아니었다. 설교가로서 그가 주목받는 것은 로마의 주교로 설교를 남겨놓은 최초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2) 레오의 설교35)
다아간에 의하면, 그의 남아있는 96개의 설교들은 짧아서, 최대 20분 설교분량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제 설교보다는 짧게 기록된 것이라고 한다. 주로 축일, 사순절, 성인의 날과 다른 행사 때에 그의 설교가 행해졌고, 설교 내용은 교리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고, 사순절에 행하는 교회의 미덕, 자선, 고해성사 등을 권고하는 것이었다.
그의 설교의 문체는 조금 야심적이고 찬란하며, 반명제와 재치있는 경구들이 많다. 사고가 특별히 심오하지도 않고 교훈적인 어조가 없는 반면, 십자가의 깊은 의미를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대로 전하는 설교의 방식을 택하고 있다.
3) 레오의 설교문 분석
설교의 일부분만 가지고 전체적인 설교를 논하는 데에 제한점이 있지만, 다아간의 『설교의 역사 (I)』에 나오는 레오의 설교문36)의 일부(십자가의 매력적인 힘을 말하는 부분)를 나름대로 분석하고자 한다.
①성경본문을 인용하고 있다. - 설교에서 성경말씀을 인용한다는 것은 오늘의 설교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초기중세에는, 말씀을 인용하지 않고 설교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고, 본문도 없이 설교를 행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짧은 설교 본문에서 네 곳의 직․간접 말씀 인용을 볼 수 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은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37)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38)
“그러므로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말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었다가 살아난 그 분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39)
“그리고 옛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기 때문에...”40)
②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설교이다.- 설교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 그의 대속적인 죽음, 부활하심을 전하고 있다.
③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윤리적인 설교이다. - 설교가 “진보”에 대한 교훈적인 내용으로 결론이 맺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옛날의 육적인 생활은 아무 것도 남기지 말고, 매일 진보하고 경건하게 성장해서 모든 것이 새롭게 되도록 합시다.”, “진보하지 않으면 후퇴하는 것이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뭔가를 잃은 것입니다.”
④설교가 권유하는 어조를 띈다.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고백합시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되도록 합시다”, “... 신앙의 계단을 뛰어오릅시다.”
⑤설교가 간단한 경구로 요약이 된다.- “악한 행동을 일삼는 옛 누룩 안이 아니라, 진실과 진리의 누룩없는 빵 안에서” (영문으로는 “not in the old leaven of malice and wickedness, but in the unleavened bread of sincerity and truth”)41)
2,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1) 설교가 그레고리42)
그레고리는 로마 주교였으며 590년부터 604년까지 교황을 지냈다. 그는 540년 로마 원로원 신분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이 사망하자, 자기 소유지 안에 6개의 수도원으로 만들어 엄격한 금욕생활을 추구하였다. 579년 그는 로마주교 펠라기우스 2세(Pelagius II)로부터 콘스탄티노플 법정에 사절단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외교와 행정에 재능이 있었다. 이태리를 침공해 온 롬바르드족을 막아내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교황으로 재직하는 동안 교회생활과 교회행정에 크게 공헌하였다.
설교가로서의 그레고리는 매우 성실했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주된 임무로 여겼다고 한다.
2) 그의 설교와 저서
그레고리의 작품가운데 「목회의 규칙」(Liber Regulae Pastoralis) 또는 「목회 규칙」(Pastoral Rule)이라는 목회직의 직분에 관한 유명한 글이 있다. 이는 그가 교황이 된 후 첫해에 세빌의 레안더(Leander)에게 보낸 것이다. 이 글은 모든 시대에 타당한 건전한 충고를 담고 있으며 사소한 내용까지 언급하고 있다. 설교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담은 것은 없고 설교 이론이나 규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의 일반적인 가르침이나 지침에서, 그가 목회의 설교 부분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가졌고 이를 높이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43)
그의 설교는 62개가 남아있는 데, 22개는 에스겔서에 관한 것이고, 40개는 복음서에 관한 것이며 그 날 지정된 구절에 기초를 둔 것이다. 그의 설교들은 대개 짧지만 몇 개는 상당히 길다. 설교의 구성은 대개 짧은 본문과 그것을 도덕적으로 응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설교의 구성이 특별히 가치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다아간에 의하면, 그의 설교는 설교로서 높은 단계에 있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한다. 설교의 문체는 가끔 저속하고 우아하지 못하였으며, 사고는 깊지도 풍부하지도 못하였으며, 성서해석은 알레고리로 가득하고 가끔은 유치하기도 하였다.
IV. 결론
지금까지 ‘설교의 암흑기’로 표현되는 초기중세의 시대적인 배경과 당시의 설교에 관하여 논하였다. 430년에서 1095년까지의 초기중세는 격변의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로마제국은 부패와 침략으로 몰락해 갔다. 서로마제국에서는 반달족, 비시코트족, 부르군디족, 프랑크족, 앵글족, 색슨족, 오스트로고트족, 롬바르드족 들이 여러 지역으로 계속적으로 칩입하여 들어왔고, 결국 476년에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국은 멸망하였지만 교황은 영향력이 있어 기독교 세계는 지탱되어 왔다. 그런데, 7세기에 와서는 모슬렘이 된 아랍인들이 로마제국 영토의 대부분에 침입해 들어오게 된다.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중심지들인 예루살렘, 안디옥, 다마스커스,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카르타고가 모슬렘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도 현재의 터어키와 일부 유럽 영토로 축소되어진다. 카롤링 왕가로 부흥하려던 제국은 다시 스칸디나비아인들과 마자르족(Magyars)의 침입을 받게 된다. 이러한 시대 속에 교회의 상황은 수도원, 교황제도, 교리논쟁, 교회의 분열 등으로 대변된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 수도원은, 신앙의 근간이 되면서, 로마제국의 잃어버린 유산들의 보관장소가 되었고, 학문의 중심지, 교육기관, 병원이나 약국, 여관의 기능까지 감당하였다. 교황들은 침입자들에 대항하거나 협상하는 역할까지 감당하면서 정치적인 입지가 생겨 샤를마뉴에게 왕관을 수여하기도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교황들의 부패로 이어져 혼란이 거듭되었고, 결국 동․서교회의 문화적, 언어적, 교리적 차이는 교회의 분열로 이어졌다.
이 때 설교는 어떠했는가? 다아간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그것은 “가장 낮은 상태에 있었으며... 그것은 병들었지만 죽지는 않았고, 질이 매우 안 좋았지만 완전히 썩은 것은 아니었다.”44) 병들어 있는 상태 그대로였다. 수많은 설교가 행해지고, 많은 설교가들이 있었지만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설교자들은 ‘위대한’ 교부들의 글에 지나칠 정도로 매여 있었다. 설교는 새로운 음성을 발하지 못하고, 이전의 라틴설교들을 번역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방하고 편집하거나 베낀 설교들이었다. 그나마 성인들, 성상, 동정녀 마리아, 축일에 대한 장황한 말들이 설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초기중세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시대가 부패와 혼란으로 가득했던 것보다, 그 시대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설교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일이라 생각된다.
초기중세, ‘설교의 암흑기’는 오늘의 설교자에게 여러 가지 내용을 시사해준다고 생각된다.
①먼저, 우선적으로 설교자는 자신의 목적과 기능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초기중세 설교들은 ‘위대한’ 교부들의 설교를 번역하고, 인용하고, 모방하였지만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다. 설교자가 그 시대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지 못한 것이다.
②또한 오늘의 설교자는 풍부한 자료를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교부들의 원어로 된 ‘귀중한’ 설교들에 초기중세 설교자들이 매여 있었다. 오늘의 설교자들은, 교부들의 설교부터 지난 주일의 여러 교회들의 설교까지 방대한 자료와 예화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설교의 암흑기’를 통해서 볼 때, 설교자는 이러한 자료와 예화들에 결코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좋은 예화의 재인용과 좋은 설교의 모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③개인이 ‘역사상 가장 많은’ 설교에 접할 수 있는 오늘의 현실은, 역설적으로 초기중세의 상황을 연상하게 한다. 많은 설교와 설교자들이 있었지만 당시에 설교는 ‘암흑기’에 있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설교들”을 교인들에게 들려주는 것에 있지 않다. 인터넷으로 방송으로 설교들을 손쉽게 들려주는 것이, 설교의 근본적인 기능을 다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설교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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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gan, Edwin C. A History of Preaching : vol. 1. From the Apostolic Fathers to the Great Reformers. Michigan: Baker Book House,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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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omas G. Long(정장복․김운용 역), 『증언으로서의 설교』(서울 : 쿰란 출판사, 1998), 34-35쪽 2) 이형기, 『세계교회사 (I)』(서울 :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359쪽 3) R. W. Southern(이길상 역),『중세교회사』(서울 :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9), 21-50쪽 4) William R. Cannon, History of Christianity in the Middle Ages : From the Fall of Rome to the Fall of Constantinople(New York : Abingdon Press, 1960), 9-11쪽 5) 에드윈 C. 다아간, 『설교의 역사 (I)』,(서울 : 도서출판 솔로몬, 1995), 145쪽 6) 이형기, 『세계교회사 (I)』, 361-362쪽 7) Justo L. Gonzalez(서영일 역), 『중세교회사』(도서출판 은성, 1993), 14-15쪽 8) 위의 책, 15-17쪽 9) 위의 책, 17쪽 10) 위의 책, 17-18쪽 11) 위의 책, 19-20쪽 12) 위의 책, 23-24쪽 13) 위의 책, 42-45쪽 14) 이형기, 『세계교회사 (I)』, 364쪽 15) 위의 책, 367쪽 16) Justo L. Gonzalez(서영일 역), 『중세교회사』, 25-31쪽 17) 위의 책, 31-42쪽 18) 이형기, 『세계교회사 (I)』, 378-383쪽 19) 위의 책, 404-407쪽 20) Yngve Brillioth(홍정수 역), 『설교사』(서울 : 신망애 출판사), 102-109쪽 21) 에드윈 C. 다아간, 『설교의 역사 (I)』, 182쪽 22) Paul Scott Wilson, A Concise History of Preaching(Nashiville : Abingdon Press, 1992), 67-72쪽 23) 위의 책, 42쪽 24) 에드윈 C. 다아간, 『설교의 역사 (I)』, 186쪽 25) 위의 책, 180-181쪽 26) 위의 책, 184쪽 27) 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 (상권)』(서울 : 장신대 출판사, 1990), 19-22쪽 28) 에드윈 C. 다아간, 『설교의 역사 (I)』, 102-109쪽 29) 위의 책, 152-158쪽 30) 위의 책, 180-181쪽 31) 위의 책, 158-176쪽 32) 위의 책, 188-207쪽 33) 위의 책, 211-231쪽 34) 위의 책, 156쪽 35) 위의 책, 170-171쪽 36) 위의 책, 171쪽 37) 딤전 1:15 38) 호 13:14 39) 롬 14:8 간접인용 40) 고후 5:17 간접인용 41) Edwin C, Dargan, A History of Preaching : vol. 1. From the Apostolic Fathers to the Great Reformers(Michigan : Baker Book House, 1974), 125쪽 42) 에드윈 C. 다아간, 『설교의 역사 (I)』, 173-177쪽 43) 위의 책, 175쪽 44) 위의 책, 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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