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기 설교 1 (에드워즈, 웨슬리)
Ⅰ. 들어가면서
1703년은 미국의 죠나단 웨드워즈(Jonathan Edwards)가, 영국에 쟌 웨슬리(John Wesley)가 출생한 해이다. “하나님은 영국에 웨슬리를 미국에 에드워즈를 파송한 바 있다”고 할 정도로 그들은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지상에 태어난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영국과 미국에 새로운 영적 숨결을 불어넣었던 위대한 설교가들이었다. 정장복은 웨슬리를 “영적 위기를 구출한 설교자”, 에드워즈는“설교 사역의 위력을 알린 선포자”라고 명명하고 있다. 그 만큼 그들은 설교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본 논고에서는 이들 두 사람의 설교사역의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설교역사 속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자리를 확인해 보고, 오늘의 한국 강단에 그들의 설교 사역이 주는 교훈을 찾아보고자 한다.
Ⅱ.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A. 그의 시대적 배경
아메리카 신대륙에 청빈한 신앙의 기치를 들고 온 퓨리탄들의 불길은 100년이라는 한 세기가 지나자 서서히 꺼지기 시작했다. 선조들의 철저한 신앙은 그 후손들에 의하여 희미해져 갔고 사회적인 도덕성은 무너지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이라는 세계에 급진적으로 번져가기 시작하였고 중세기의 암흑기가 이 땅에 다시 도래할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우려가 신앙인들 사이에 번지고 있었다.1)
정치적으로는 영국의 식민지로 머물기를 거부하는 운동이 번지면서 자유와 독립의 쟁취를 향한 물결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치와 사회의 물결은 자칫 방종과 무질서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수반하는 징조를 보일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당시 위대한 정치가 조오지 워싱톤, 토마스 제퍼슨, 벤자민 프랭클린이 있었으며, 얼마 안되어 미국의 혁명이 일어났다.
경제적으로는 영국의 원료공급과 제품시장의 역할을 해야 했기에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넘쳐났다. 그 뿐만 아니라 영국과 불란서는 자신들의 영역을 미 대륙에서 좀더 넓혀보겠다고 싸움을 벌였으며 자신들의 고유한 영토를 빼앗긴 인디안들의 공격은 미국인들의 생활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었다. 이러한 내적인 요인들은 미 대륙의 미래를 밝게 점칠 수 없는 상황으로 끌고 갔었다.
B. 그의 생애와 사상
1. 간추린 연대기2)
1703 10월 5일에 코네티컷 주의 윈저 팜스에서 출생.
1716 코네티컷대학 (예일대학의 전신)에 입학.
1720 예일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 취득.
1722 8개월간 뉴욕에 있는 장로교회에서 시무.
1724 예일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함(1726년까지)
1727 사라 피에폰트와 결혼. 매사추세츠 주의 노오댐프턴에 있는 회중교회의 협동목사.
1729 노오댐프턴 교회의 담임목사가 됨.
1741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유명한 설교를 행함.
1751 매사추세츠 주의 스톡브리지에 있는 회중교회의 목사가 됨. 아메리카 인디언 선교.
1758 2월 16일 프린스턴 대학의 학장에 취임. 3월 22일에 사망.
2. 그의 생애
에드워즈는 1703년 코네티컷 주의 윈저에서 아버지 디모데 에드워즈와 어머니 에스더 스톳다드 에드워즈 사이의 열한 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회중교회의 목사였으며, 그의 어머니 또한 목사의 딸이었다. 그는 매우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그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코네티컷 대학(예일대학의 전신)에 입학하였고, 13세에 이미 라틴어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완전 습득하였다. 1720년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졸업 후에도 학교에 남아 신학을 공부하였고 1723년에는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에드워즈는 예일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그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종교적 경험을 하게 되었다. 즉 그는 성경을 읽는 중에 갑자기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현존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신비 경험은 그에게 있어서 다른 모든 경험들의 초점이 되는 핵심적인 것이었다.3)
그 후 에드워즈는 뉴욕의 어느 장로교회에서 8개월간 목회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뉴욕에서 예일로 돌아온 후 2년동안 강사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뒤에 외조부이며 목사인 솔로몬 스톳다드가 시무하는 노오댐프턴 교회의 요청을 수락하여 그를 도왔다. 그의 외조부가 사망한 뒤 에드워즈가 담임목사가 되었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목회생활을 매우 훌륭하고도 모범적을 이끌어 나갔다. 그는 학구열에 불타는 연구가로서, 자신의 설교를 준비하는데 매우 오랜 시간을 바쳤다.
에드워즈는 일반적으로 미국의 대각성 운동이라가 일컬어지고 있는 두 차례에 걸친 영적 부흥운동에 가담하였다. 그 첫 번째 부흥운동은 1734년(혹은 35년)에 일어났다. 그러나 종교적 열정이 가장 크게 고양된 부흥운동은 1740-41년에 일어났다. 이 각성운동은 뉴잉글랜드 주민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집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4)
이러한 새로운 역사의 장을 펼친 그의 목회의 현장은 에드워즈의 시대적 사명과 이 인물의 거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전임 목사와 같이 단순한 위로의 설교와 목양적 활동만을 요구하고 있었다. 23년간 목회하던 교회를 떠나, 1751년 매사츄세츠 주의 회중교회 목사로 부름받아 목양과 설교사역을 감당해 갔다. 1758년 프린스턴 신학교의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으나, 천연두 예방접종의 부작용으로 강단의 큰 별이 사라지고 말았다.
3. 그의 신학사상
첫째, 에드워즈가 설교에 적용하고 있던 기본적인 신학의 입장은 퓨리탄 신학이라고 불리우는 계약신학(the covenant theology)이었다. 그는 개인의 구원을 가져온 신앙 관계는 하나의 계약에서 이룩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 신앙관계에서 신실한 관계의 지속을 명령하고 지켜본 계시의 하나님이 바로 계약의 하나님이며 우리의 인간은 바로 계약된 피조물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칼빈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설교는 든는 회중들의 심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존재와 주권이 강조되었다.5) 그는 아르미니우스 주의에 대항하여 칼빈주의 편에 서 있었다.
둘째, 개인의 신앙 체험을 중요시하였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얻어지는 종교적 체험이 없는 교인은 정상적인 교인이 될 수 없다고 선언을 하면서 “신앙의 차이란 오직 체험적 신앙의 유무에 있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러한 신앙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교회 출석은 허용 될 수 있으나 성례전의 참여는 허락할 수 없다는 강경한 노선을 걷고 있다.6)
셋째, 약속의 땅(Promised Land)에 대한 그의 기대가 설교에 묻어 나오고 있다. 그는 칼빈주의자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이 땅에”세워지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아래 공동의 번영과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신학사상은 그의 설교 내내 청중들의 삶의 문제를 깊이 있게 건드리는 이유였다.
C. 그의 설교신학적 특징
윌슨(Wilson)은 에드워즈의 설교의 특징을 몇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7)
첫째, 개인적 체험을 중요하게 여기고 설교하였다. 그것은 에드워즈 자신의 회심체험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에 기인한다고 설교하였다. 설교와 성례전 그리고 심지어 공포(terror)조차도 회개를 위해 성령께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둘째, 공동체의 질서와 훈련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청교도 설교가들은 그들의 설교에서 공동체의 번영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 대각성 기간동안에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징을 그들의 삶에서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시리즈로 설교하기도 했다.
셋째, 미국을 그리스도 통치와 세계구원의 시발점으로 여겼다. 노오탬프톤과 미국에서의 부흥은 그리스도 나라의 안내의 역할을 할 것이고, 전 세계에 평화와 정의, 박해의 종국을 가져 온다고 보았다.
넷째, 구원을 위한 5가지의 이미지 모델을 사용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활동들(actions)로서, “수레의 바퀴”의 회전(기계와 시계들), “큰 빌딩”의 건축(계획과 일군들), 자라는 나무(성장과 진행), 흐르는 강(교역, 무역, 진행), 전쟁의 수행(조직, 희생, 목적), 이상 5가지이다.
다섯째, 그의 설교는 전형적인 청교도의 “명료한 형태(Plain Style)"였다. 여기에는 주해(exposition) 그리고 교리, 적용의 내용으로 이어진다. 특히 적용은 전체 설교부분의 2/3에 해당할 정도로 긴 것이 특징이었다.
1. 설교에 대한 정의
에드워즈는 설교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될 때에 성도가 받는 축복에 대하여 감동적으로 증거 한다. 반면 용서받지 못할 죄의 위험성과 타락한 세상의 공포에 대하여 놀라울 정도로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설교의 주제는 개인의 회개에 제한되지 아니하고 당시의 사회적 퇴폐현상을 비롯하여 인디안들에 대한 착취행위까지 신랄하게 지적하는 폭 넓은 것이었다. 그는 설교를 통하여 선조들이 가졌던 신앙을 회복하고 침체된 미국을 새로운 민족으로 일으켜 세우려는 뜨거운 메시지를 선포하였던 것이다.
결국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설교는 참된 신앙의 회복과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강력한 힘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설교자 이해
에드워즈 자신이 보여준 설교자로서의 모습이 결국 그의 설교자 이해의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설교를 단순한 자기의 지식에 근거하기를 거부한 설교자였다. 깊은 사색과 신앙의 경험, 그리고 신학적 깊이를 말씀에 접목시키는 설교자의 본래적 사명을 다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설교자가 설교를 작성함에 있어서 언어 선택, 어구의 조정, 그리고 사고의 전개까지도 하나님이 인간의 지각을 통하여 사용하시며 해결해 준다는 메신저로서의 확신과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8) 이처럼 에드워즈는 설교자로서의 깊은 신학적 연구와 함께 설교의 구성에도 새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의 가장 유명한 설교 “하나님의 진노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에서 보여주듯이 그는 설교자로서 청중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있다. 설교자는 마치 수술하는 의사가 완벽하게 치료하기 위해 상처를 파내듯이 해야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9)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미 큰 공포아래 있는 사람에게 공포를 말하는 것에 대해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죄인들의 양심이 성령에 의해 완전히 깨어나야 빛 가운데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빛 가운데로 죄인들을 인도할 때, 그들이 비참하면 할수록 더욱 더 빛은 그들에게 기쁨이 되는 것이다. … 위로는 양심이 깨어난 죄인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위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주어지게 되고, 현재의 비참한 상태로부터 날아오르게 하는 것이다.10)
3. 성경해석
에드워즈는 성경을 연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바쳤다. 정부홍은 “에드워즈가 다른 경건한 사람들이 하는 것보다 더 많이 성경을 연구했고, 그처럼 성경을 샅샅이 연구했던 사람이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다.11) 그런데 그의 설교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에 대해서 비평가들은 너무나도 일방적인 하나님의 모습이 제시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이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절대로 돌아보시지 않는다는 주장이나 갈릴리의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다른 구약성서의 진노의 하나님만을 제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12) 그의 성서해석이 편향적이지 않느냐는 지적이다. 그러나 그의 또 다른 설교 “사랑과 그 열매”라는 고린도전서 13장에 대한 설교에서도 보여주듯이 그는 성경에 대한 완벽하고도 철저한 입장과 견해를 고수하는 성서해석을 하고 있다.13)
4. 수사학적 기교
에드워즈의 설교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에는 다양한 수사학적인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이미지와 비유14)의 사용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설교자의 상상력이 발휘된 걸작이다. 그의 설교에 나타난 여러 가지 표현법들을 살펴보자.
그들은 회오리바람 앞에 잔뜩 쌓여 있는 왕겨와 같은 존재요, 활활 타오르는 불 앞에 놓여 있는 마른 그루터기 더미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를 식은 죽 먹듯 밟아 뭉개버리고,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식은 죽 먹듯 끊어 버리거나 불에 태워 버릴 수 있듯이, 하나님 역시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그분의 원수들을 지옥으로 던져 버리실 수 있습니다.
… 악인들이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그 심령이 마치 하나님의 제지로 말미암아 갇혀 있는 불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 손길을 거두시는 날이면, 그 불이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 사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썩은 덮개로 가려진 지옥 구덩이 위를 걷고 있는 셈인데, 그 덮개가 너무 약해 언제 그 구덩이에 빠질지 모릅니다. 다만 그 썩은 곳들이 눈에 띄지 않을 뿐이지요. 사망의 화살은 대낮에라도 갑자기 날 아 올 수 있는데, 우리가 아무리 예리한 시력을 갖고 있다해도 그 화살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 여기 거미줄이 있다고 합시다. 그것이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절대 막지 못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의나 건강은 여러분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절대 막아주지 못할 것입니다.
… 하나님의 진노는 마치 큰 댐으로 막아 놓은 저수지와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댐으로 막혀 있는 물은 댐 밖으로 터져나갈 때까지 그 양이 계속 불어나며 수위가 높아 질 겁니다. … 그 수위가 계속 높아지고 있으며 그 물살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심판의 물결이 터져나오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뜻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진노의 활은 이미 시위에 걸렸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여러분의 가슴을 향해 겨냥한 채 시위를 당기고 있습니다. 그 화살이 여러분을 쏘지 못하도록 잠시라도 막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뜻, 진노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뜻뿐입니다.
… 하나님의 눈에는 여러분이 가장 혐오스러운 독사보다 더 가증스러운 존재로 보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그분을 불쾌하게 해 드리되, 이 세상에서 가장 완악한 반역자가 왕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 드리고 있습니다.15)
그의 이 설교에는 여러 가지 시각적 이미지들과 비유들이 동원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인 한편의 설교가 그의 모든 설교를 대변한다고 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설교가 가장 많이 선포되었고 가장 많이 알려진 설교라는 점에서 그의 설교가 이미지와 비유를 비중있게 사용한 것을 인정할 수 있다. 그는 단지 지성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 감성을 포함한 전인을 향하여 극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5. 청중에 대한 이해
에드워즈는 청중의 인기를 바라는 설교자가 아니었다. 과감하게 청중들의 죄악된 모습을 파헤치면서 그들을 새롭게 하려는데 열정을 가진 설교자였다. 당시 시대상이 말해주듯 그의 청중들은 선조들의 신앙적 전통과 사회적 도덕성이 무너져 가는 사회 한 가운데 있었다. 그러기에 에드워즈는 청중들을 영적으로 깨우려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의 설교를 행할 때 그는 청중을 향하여 직선적인 선포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 설교가 에드워즈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순간은 공포와 회개의 함성, 후회의 눈물로 뒤덮인 현장이 되었다. 에드워즈의 청중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날 선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과 접목되면서 영적 대각성의 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청교도적인 칼빈주의에 사로잡혀서 교회의 훈련을 너무 엄격하게 강조한 나머지 회중들의 배척을 받고서 노오탬프턴 교회에서 그의 직책을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다.16)
6. 성령의 역할
에드워즈는 특유한 전달(delivery)의 기술이나 화술을 수반하지 못한 설교자였다. 강단에서 제스처, 스타일, 웅변은 거의 없었다. 거의 부동자세로 설교하였다. 부드러움과 진지함이 섞여 있는 가냘픈 얼굴은 건물의 먼 지점을 향해 있거나 아니면 대개는 왼손에 들고 있는 원고를 향하고 있었다. 왼쪽 팔꿈치는 방석이나 성경 위에 걸치고 오른손은 거의 들지 않았으나 깨알 같아서 잘 읽을 수 없는 노트들을 뒤집는 데에만 사용하였다. 원고지를 넘길 때 겨우 청중을 한 번 정도 쳐다보는 그의 설교전달은 참으로 빈약한 것이었다.17) 그런데도 에드워즈의 설교가 어떻게 개인의 영혼을 일깨웠으며 그토록 새로운 파문을 일으켰는지 아무도 명쾌한 대답을 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정장복은 “오직 인간의 두뇌로 이해할 수 없는 성령의 뜨거운 역사였다는 단순한 대답만 남길 뿐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18)
에드워즈는 성령의 권능을 통해서 자기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믿음의 행동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랐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 교인들은 머리에 담아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감동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에드워즈는 설교자의 말씀이 하나님의 성령과 결합될 때, 단순한 은혜의 수단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 그와 같은 선포의 대표적인 경우가 여리고의 나팔소리였다. “그 소리는 복음 전도자의 설교에 의한 복음소리를 상징하며, 저주 받은 도시 여리고의 성벽은 사탄 나라의 벽을 상징하고 있다.” 성령이 마음 속에서 역사할 때 선포된 복음은 거룩한 진리로 받아들여지며, 사탄의 나라는 믿음앞에서 쓰러진다는 것이다.19)
7. 기타 설교분석을 통해 발견되는 것들
a. 질문을 통해 청중들을 그의 설교에 끌어들이고 있다. 적절한 질문법은 청중들로 하여금 단순한 청자에 머무르지 않고, 설교에 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러분이 지난 밤 지옥에 떨어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난 밤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가 오늘 아침 다시 눈을 뜨고 이 세상을 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 또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후 지금까지 지내면서 아직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역시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20)
b. 그는 청중들에게 직접적으로 적용시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것을 통해 그는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직접적인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그의 설교 “죄인들에게 임할, 피할 수도, 견딜 수도 없는 형벌”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교리는 바로 완고한 죄인이요 불쌍한 죄인인 여러분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 비참한 상태에 있는 여러분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설교한 이 무섭고 끔찍한 일들은 모두 다 여러분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 여전히 이방인이요 나그네로 남아있는 여러분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 여러분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 바로 여러분이 받게 될 저주요 사망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 지옥에 매달려 있으며 매순간 이 지옥에 떨어질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21)
c. 청중의 마음의 소리를 읽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설교중에 청중들이 보일 반응을 미리 예견하고 그 청중의 마음의 소리를 끄집어내어 그것에 대하여 말함으로써, 청중들로 하여금 그의 설교에 ‘예’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여러분이 아무리 속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과장된 이야기겠지. 설마 그렇게 끔찍한 일일 일어날라고’라고 생각하거나, 설사 그런일을 당한다 해도 피할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해도 아무 소용없습니다.22)
d. 철저한 죄에 대한 지적과 형벌의 엄중성을 애기하면서도 긍휼의 복음이 그의 설교의 맨 마지막에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결국 설교는 복음으로 청중들을 초대해야 함을 잘 보여준다.
지금 여러분은 아주 특별한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긍휼의 문을 활짝 열고 서서 큰 목소리로 불쌍한 죄인들을 부르시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몰려들어 하나님의 나라로 행진해 들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 우리 모두 소돔으로부터 도망하십시다.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창19:17)
Ⅲ. 쟌 웨슬리(John Wesley)
A. 그의 시대적 배경
청교도의 엄격주의가 사라지고 극단의 향락주의가 영국사회를 감염시키는 가운데 맞이한 18세기는 불안과 혼돈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신앙과 도덕 상황은 한마디로 절망적이었다. 정치의 부패가 만연했고, 뻔뻔스러움과 가증함, 방종, 불경스러움, 술취함, 그리고 도박과 도색 등의 악덕이 그 땅을 황폐화 시켰다. 18세기 산업혁명기에 접어들고 있던 영국은 많은 실직자들을 배출하였으며, 인구의 도시 집중(이들의 대부분은 일거리가 없는 실직자들이었다)을 초래하였을 뿐 아니라 빈부의 차를 더욱 심화시켰다. 모든 학교에는 이신론과 회의론이 만연하였다. 1736년 버틀러 주교는 그의『변증학(Anology)』에서 그 당시 기독교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기독교가 더 이상 주목할 대상이 아니라는 점과 결국 그 허구가 드러났다는 점은 이제 당연한 사실이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에 이르러 이같은 사실들은 마치 분별력 있는 모든 사람들 모두가 동의하는 점으로 인정되며 비웃음을 살 수 밖에 없는 원리적 주제들 외에 아무 것도 남은 바 없다.”23)
당시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대단히 부주의한 삶을 살았고, 진리에의 헌신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수 많은 목회자들도 완전히 무가치한 자들이었으며, 하층민들에게는 극심한 무지와 이교주의가 팽배했다.24) 교회는 합리주의의 이론에만 매달렸고, 심지어 강단에서 외쳐지는 설교마저도 주지적 논쟁에 급급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소생을 간절히 기다려 오던 교인들마저도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어 버린 영국 최대의 영적 위기가 도래했던 것이다.25)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중적 설교자, 쟌 웨슬리와 죠지 휫필드를 통해 이루어진 영적 부흥운동은 그 당시 영국의 사상과 삶을 보다 높은 도덕성과 영적 신앙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B. 그의 생애와 신학사상
1. 간추린 연대기26)
1703 6월 17일에 영국의 엡윗에서 출생.
1724 옥스퍼드 대학에서 학사 학위 취득.
1725 부제 서품.
1727 린컨 대학에서 석사학위 취득, 엡윗(Epworth)의 목사가 됨.
1729 옥스퍼드로 귀환.
1735 아메리카 선교를 떠남.
1738 영국으로 귀환. 엘더스게이트에서 열린 모라비안 교도들의 모임에서 회심체험.
1739 조오지 휫필드와 함께 노상 설교를 시작함.
1740 감리교를 인도하기 시작함.
1751 메리 바제일과 결혼
1784 감리교를 영국국교회로부터 분리시킴.
1791 3월 2일 런던의 시티로드에 있는 채플 하우스에서 사망.
2. 그의 생애
쟌 웨슬리는 사무엘과 수산나의 19자녀 중 15번째 아이로 태어났다.27) 그의 아버지 사무엘은 영국 성공회의 목사였으며, 어머니 수산나는 자녀들을 매우 엄격하고도 규칙적으로 교육하였다. 5살에 알파벳 교육, 성경 맨 처음 장 쓰기를 시작하여 6세에는 매일 6시간씩 기독교에 대한 교육을 할 정도였다. 10살에 학교 입학하여 라틴어와 헬라어 뿐만아니라 신학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후에 옥스퍼드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후 잠시동안 그의 아버지의 교회에서 목사로 봉직하였다. 그러나 목회에 흥미가 없음을 깨닫고 옥스퍼드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동생 찰스와 죠지 휫필드, 친구들과 함께 옥스퍼드 그룹, 일명 “거룩한 클럽(Holy Club)"이라 불리는 모임에 가담하였다. 이 모임은 규칙적인 종교생할과 훈련, 그리고 교도소와 노동자의 집을 방문하고, 자선을 베풀며 가난하고 병든자를 돌보는 사회사업들을 행하였다. 그는 외면적으로는 매우 경건하고 독실하였으나 내적으로는 공허감과 보다 나은 것을 향한 동경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웨슬리는 1735-37년까지 미국 조지아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나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깊은 좌절에 빠져 있었다. 1738년 5월 24일,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모라비안 형제들의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마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을 듣는 동안 가슴이 뜨거워짐을 경험하였고,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28)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에서 이러한 회심을 체험했을 때 조오지 휫필드는 이미 노방 설교를 행하고 있었다. 이 노방설교에 웨슬리가 합류하게 되었고, 1739년 4월 2일, 3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그해 6월에는 블랙힛(Blackheath)에서 14,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기도 했다.29)
1740년에는 웨슬리는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는 모라비안 교도들뿐 아니라 휫필드와도 관계를 끊었다. 그리고 웨슬리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모이게 되자, 그는 그들을 규합하여 하나의 종교 집단을 조직하였다. 웨슬리는 그의 나머지 생애를 이 감리회 모임을 발전시키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는 설교를 행하고 문필 활동을 하면서 이 감리회의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였다. 그의 생애동안 14만 명에 이르는 감리교인들이 550면의 순회 설교자들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웨슬리는 일년에 평균 800여 편의(일 주일에 15편 이상의) 설교를 행하였고, 60년 동안 영국 전역을 다니면서 노방설교를 하는 열심있는 목회자였다.
3. 그의 신학사상
웨슬리 설교의 신학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의 신학적 특징은 설교에서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웨슬리 신학의 중심은 구원론이며, 구원론의 핵심은 성결(성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다. 죄인이 칭의되고, 거듭날 뿐 아니라 성결한 신앙의 단계까지 성장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칭의와 중생이 1차적 변화라면 성결은 2차적 은총의 체험이요 변화라고 한다. 성결은 현세 구원의 완성이요. 궁극 구원의 가장 확실한 보장과 약속이라고 보는 것이다.30)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형식적 위선적 크리스천(Almost Christian)"이라는 웨슬리 설교 제2번에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서 웨슬리는 형식적인 크리스천과 참 크리스천을 구분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참 크리스천이라고 말한다.31) 또한 그의 설교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에서도 이러한 구분은 계속된다.
저들을 율법에서 복음으로 인도하십시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시작하십시오. 믿는 자들을 위해 율법의 마지막이 되신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십시오. 과연,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다 된 것처럼 보일지라도(Almost Christian) 그들이 온전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이 아니면 그들은 결국 멸망의 자식이 될 것이며 마치 지옥의 밑바닥이 천당의 꼭대기에서 아주 먼 거리에 있는 것입니다.32)
둘째, 그의 중요한 신학사상은 예정론에 대한 반대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문제가 된 3가지 주제는 예정이 조건적인지 아니면 무조건적인지, 은총이 불가항력적인지, 그리고 성도의 견인에 관한 사항들이었다. 결국 문제가 된 주제는 예정에 관한 것이며, 나머지 둘은 예정에 수반되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영원한 구원과 관련해서 예정은 항상 조건적이며 개인의 신앙에 의존해 있다고 보았다. 무조건적 선택은 필연적으로 무조건적인 유기를 내포하게 되므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성경적 증언에 위배되므로 그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33) 이러한 신학사상은 당시 함께 사역하던 죠지 휫필드와 결별 하게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웨슬리는 부흥운동을 시작한 지 몇 주후부터 예정론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였으며, 그의 설교 110번 “값없이 주시는 은총(Free Grace)"은 모든 칼빈주의적인 형태의 예정론에 대한 전적인 거부로 나타났다. 예정의 교리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설교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교하였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설교하는 것이 모두다 헛된 일이 됩니다. 이미 택함받은 사람들에게는 설교가 필요 없습니다. 설교를 듣게 되건 아니건 간에 틀림없이 구원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설교의 목적이 그들에게는 공허한 것이 됩니다. 또한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설교가 소용없습니다. 그들이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듣게 되건 아니건 간에, 그들은 틀림없이 저주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설교의 목적이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공허한 것이 됩니다.34)
그렇다면 웨슬리는 어떻게 신앙의 최초의 시작이 인간 쪽에 있다는 주장을 피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펠라기우스주의라고 고소당하게 되거나, 하나님의 은총이 불필요하며 인간의 공로의 댓가로 보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에 대해 웨슬리는 선행적 은총을 이야기 하는데, 이것은 구원에 충분한 은총은 되지 못할지라도 ‘구원으로 인도하는 은총’이라고 한다.
셋째, 그의 설교신학적 배경은 복음적 신앙체험의 강조이다. 웨슬리의 신학이 단순한 경험주의 신학이라고만 이해되기도 하였듯이 웨슬리 신학은 경험을 강조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웨슬리의 체험강조는 그 자신의 영적 체험으로부터 기인한다. 당시 영국 성공회의 의식주의, 형식주의 신앙에 대하여 그는 ‘성령에 의한 경험’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또 하나 그의 설교 신학적 배경을 말한다면 사회적 성결의 강조에 있다. 웨슬리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종교이다. 기독교를 단지 종교적인 것으로만 만드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종교적인 견해와 사회 윤리에 대한 가르침을 결코 분리하지 않았다.35) 그의 산상수훈 설교 “세상의 빛과 소금”에서도 잘 나와 있다. “특히 여러분들이 가진 빛을 당신들의 선한 행실, 즉 경건과 자선적 활동으로 나타내도록 힘쓰십시오. …… 의식주 가구 등에 있어서 불필요한 사치성을 물리치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선물을 가치있게 활용하는 선한 재산 관리인이 되십시오”36)
C. 그의 설교신학적 특징
웨슬리의 설교는 탁월한 복음적 설교였으며, 대단히 대중적이면서도 성경적인 것이었다. 라일(Ryle)은 웨슬리와 영적부흥기의 설교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직접적으로 설교했습니다. 그들은 대단히 오랫동안 설교의 특징을 이루어 온 흐릿하고 냉냉하고 무겁고 생명 없는 전달 양태를 과감히 던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믿음의 말씀들을 선포했으며, 생명으로 생명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37) 웨슬리의 설교에 대한 다아간의 진술은 명료하다.
웨슬레의 설교는 그 인물의 뛰어난 특색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을 볼 때, 그것은 신학에 있어서 알미니안적이고, 교리에 있어서는 복음적이었으며 성경에 충실한 것이었다. 사상에 있어서 그것은 풍부하고 논리적이고 명료하고 힘찬 것이었고, 상상력이 떨어진 것이 아니었으나 특출나지도 않았다. 감정은 뜨거웠으나 열정적이지 않았고, 문체는 주목할 만한 웅변이나 열정보다는 명료하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그 시대의 일반적 방식처럼 지나친 과장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우리의 취향으로 볼 때 평이함이나 단순함이 부족하다. 전달할 때 그는 조용했으나, 숨겨진 강렬함이 있었고, 청중들을 강력하게 감동시키는 불길이 있었다.38)
정장복은 웨슬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웨슬리는 화려한 구술이나 웅변보다도 설교 속에 항상 진실함과 명료함이 두드러지게 빛나 오르던 설교자였다. 그 복음의 진실성이 음란과 무지와 술취함으로 캄캄하던 영국 사회에 빛를 밝혀 주었고 교회의 각성과 부흥을 불러 일으켰다.”39)
윌슨은 웨슬리의 설교가 힘이 있었던 이유를 몇 가지로 설명한다. 우선 웨슬리는 그의 긴 설교를 효과적으로 요약하고, 쉽게 설명하였다. 또한 그의 설교는 각 각의 청중들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갔다. 율법에 대한 메시지가 힘이 있었고, 간략한 복음 메시지는 값어치 있는 것이었다. 또한 강조할 대목은 강조하고, 내용 뿐 아니라 감정과 형식에서도 주의를 기울였으며, 문장은 짧고 리듬은 빨랐다고 기술하고 있다.40) 보다 자세히 그의 설교 신학적 특징을 다음 몇 가지 항목에 따라 살펴보기로 하자.
1. 설교에 대한 정의
웨슬리는 설교를 정의하기를 “사도들과 감독들과 전도자들의 최우선적인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말씀으로 양육시키는 최고의 방법”, “나의 주요한 임무”라고 했고, 조지아로 떠나면서 친구에게 “나의 혀는 하나의 바쳐진 도구(My tongue is a devoted thing)"이라고 했다.41) 웨슬리가 영국교회 감독들로부터 영국의 교구교회에서 설교를 금지했을 때 “내 직업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나는 어디를 가나 생의 공포, 절망에 몰려 죽음으로 가는 무리를 본다. 내가 사람에게 복종하랴 하나님께 복종하랴?”고 하였다. 앞에서 예정론에 대한 반대 설교 110번 “값없이 주시는 은총(Free Grace)”에서 그는 설교의 목적이 영혼을 구원하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설교를 최대의 사명이라고 했고, “You have nothing to do but to save souls, There fere and be spent in this work”라고 평신도 설교자들을 독려했다.42) 결국 웨슬리는 설교를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중요한 임무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경우에도 버릴 수 없는 것이요, 죄인들을 회개시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말씀으로 양육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여겼다고 할 수 있다.
2. 설교자 이해
설교자로서 웨슬리는 그의 시선을 한 곳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영적세계와 인간사회를 깊은 관심 속에 보았다. 설교자는 양자를 면밀히 살필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설교자의 태도에 대하여 후배 및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한 것을 볼 수 있다.
회중 앞에서 여러분의 모든 태도를 신중히, 무게있게, 그리고 엄숙하게 하십시오. 항상 청중에게 여러분의 주제를 맞추도록 하십시오. 할 수 있는대로 가장 쉬운 본문을 선택하십시오. 두서없이 말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여러분의 몸짓이나 어휘나 발음에 있어서 어색하거나 충격적인 것을 피하고 여러분의 말씨나 복장에 있어서 우스꽝스러운 면모를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43)
또한 그는 평신도 설교자들에게 설교의 방법을 가르칠 때 목소리를 너무 크게도 너무 작게도 말고, 부드러우면서도 분명한 목소리를 내라고 하고, 적절히 감정적 기복을 주고 단조로움을 피하라고 했다. 너무 제스쳐나 쓸데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은 피하고 강단을 치지 말라고 했고, 눈은 청중을 향하고 몸의 자세를 바르게 하라고 했다.44)
3. 성경해석
그의 설교는 보통 한 절을 본문으로 택하였으며, 3절 이상을 본문으로 택하는 것은 드물었다. 성서본문에 대한 주석은 대개 서론에 포함시켰으며, 절을 따라서 주석하는 주석적 설교를 하지는 않았다.45) 오히려 주제 중심적 성격을 가지면서 주의 깊게 구상한 논리적 성경분해가 수반되는 설교였다.
그의 성경해석의 특징중의 하나는 율법과 복음을 신학적으로 이해하는데 있었다. 루터가 율법과 복음을 대조적으로 이해한데 반해, 웨슬리는 율법과 복음의 혼합(Mixing)을 말한다. 물론 이것이 구원의 질서에 혼동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루터가 율법을 죄인들을 회개케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웨슬리는 율법이 믿는자들에게 거룩함을 이룰 수 있도록 긴장감을 주는 밝은 측면에서 이해하였다. 그는 “설교의 일반적 방법”에서 설교는 “초대하여, 회개케 하고, 그리스도께 드리며, 자라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을 “자라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웨슬리는 율법을 복음을 봉사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46)
4. 수사학적 기교
웨슬리의 설교에는 비유와 이미지와 같은 수사학적 기법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초기에는 그가 결론부분에서 요약을 제공한다든지, 감정적인 호소를 한다든지 전통적인 수사학적 기법을 사용하긴 했었다. 그러나 1746년 이후 이러한 것들이 사라졌고, 말년에 10년 정도 수사학적인 관심이 다시 일어나는 정도였다.47) 윌슨은 “믿음에 의한 의롭다 하심”의 결론 부분을 웨슬리의 기교의 훌륭한 예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말씀을 듣고 또 읽는 여러분, 죄 많고 무력하며 비참한 죄인인 여러분, 나는 당신들에게 모든 사람의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명령합니다. 당신들의 모든 불경건을 가진 그대로 똑바르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당신들의 얼마간의 의를 주장함으로써 당신들의 영혼을 파멸시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의 산상수훈 중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부분에서 육체적인 굶주림과 갈증의 특징을 영적인 것과 유비시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48) 이러한 유비를 통해서 보다 깊이 있게 영적 갈증을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청중에 대한 이해
웨슬리는 그의 설교에서 청중의 상황을 직시하고 있다. 그의 산상수훈 중에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십시오”의 한 대목이다.
서로의 창자를 끄집어내며 서로를 불과 칼로 황폐시키고 있는 이 기독교 왕국들! … 기독교 군대들! 당이 다른 당들에 대하여, 파가 다른 파들에 대하여 일이키는 내전으로 불타고 있는 이 기독교 민족들! 사기와 횡령, 억압과 오류, 강도와 살인이 거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 기독교 도시들!…기독교 가정들! 그렇습니다. 정말 가장 무서운 것은, 가장 슬퍼할 만한 것은 다름 아닌 이 교회들! 교회들입니다.49)
이처럼 그는 청중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며 설교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웨슬리는 청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하여 다양한 상황을 가정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청중의 마음에 와 닿도록 여러 가지로 접근하였다. 그의 산상수훈 중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에서 ‘본다’고 하는 것을 8회에 걸쳐 말하고 있다.
그들은 하늘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시고, 가축에게 풀을 주시고…하시는 것을 봅니다. … 만물의 창조자를 봅니다. … 더 특별하게 하나님을 봅니다. … 그들 위에 드리워진 것을 봅니다. … 하나님의 계명에서 더 분명하게 하나님을 봅니다.…50)
6. 성령의 역할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에서의 회심을 경험한 후에도 그는 구원의 확신을 얻은 기쁨은 있었으나, 성령 충만의 경험을 계속하여 사모하였다. 또한 그는 자기의 설교에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음을 갈등하였다. 올더스게이트에서의 경험 이전에는 이인하는 (칭의의) 신앙을 체험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체험 이후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입히움 받는 것”이 갈급한 소원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성령의 능력이 임할 때 그의 설교 사역에 큰 능력이 뒤따랐다.51)
웨슬리는 성도의 삶에 성령의 증거가 있여야 함을 그의 두 번의 걸친 “성령의 증거”라는 설교에서 피력하고 있다. 설교에 있어서도 성령의 역할이 절실함을 말하고 있다. “나는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 하나님께 속한 깊은 일들을 설명한다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는 것을 여러해 전에 알았습니다.”
7. 그의 인격과 삶
정장복은 웨슬리의 설교세계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가 외친 메시지의 내용과 방법보다는 그가 어떤 인간이었느냐는 전 이해를 정확히 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웨슬리의 근면과 열정, 그리고 꺼질 줄 모르는 구령의 행진이 언제나 그의 설교 사역을 빛나게 했으며 수많은 회중들의 가슴을 울린 원동력이었다고 말하고 있다.52)
복음을 전하려는 웨슬리의 적극적인 노력은 “전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그의 슬로건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설교의 역사상 가장 근면한 설교자로 손꼽힌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교회든 거리든 벌판이든 광산이든 그 어디나 개의치 않고 찾아갔다. 심지어 공동묘지도 그의 설교의 장이었다. 그는 영국의 전역에 그리고 세계의 어느 곳이라도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의 사역을 위하여 멈출 줄 모르는 설교자였다. 그가 복음을 외친 52년 간의 기간에 매년 8,000마일의 여행을 했으며 한해에 설교를 일 천 번 이상을 해야 했었다. 늘 아침 4시에 일어났으며, 80이 되었을 때도 매일 2회의 설교만을 하게 된 것을 아쉽게 생각했다는 일기 기록이 있다. 이토록 말씀을 사랑하고 외치는 열정의 설교자였기에 말씀은 더욱 회중의 심층 깊이 파고 들어 갔으며, 그의 복음설교는 결국 강단의 기적을 불러 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아간은 웨슬리의 인격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 영혼의 순결성, 신적 은혜에 대한 심오한 체험,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헌신,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용기, 끈기, 인내, 흠 없는 완벽성, 뛰어난 자기 통제력, 정중함, 온순함, 마음과 태도의 세련됨, 그리고 일 처리에 있어서 그의 꼼꼼함과 뛰어난 의지와 함께 그의 매력있는 개성 등”53) 웨슬리는 설교자로서 인격과 삶의 모범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8. 기타 설교분석에서 드러난 사항.
a. 오늘날 분석설교의 특징이 발견된다. 어떤 주제에 대하여 정의[What]를 내리는데 있어서 세 번 정도의 부정적 접근을 시도하다가 정의를 내리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방법이 웨슬리 설교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의 산상수훈에서 ‘애통하는 자’에 대해 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이 말씀은 명성이나 친구를 잃었을 때, 또는 재산에 손해가 생겼을 때처럼 세상적 환난이나 낙심 등의 이유로 해서 슬핌과 무거운 짐에 눌려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 약속이 아닙니다.… 세상 것들에 욕망으로 인해 마음이 아픈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이 약속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애통하는 자는 세상적인 이유와 전혀 다른 이유 때문에 슬피 우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느라 우는 것입니다.54)
또한 그의 설교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서는 믿음을 정의하면서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이란 이교도의 신앙과는 다릅니다. … 마귀의 믿음과도 다릅니다.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과도 다른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55)
b. 질문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질문법은 청중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하여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 그러면 누구에게 이것을 설교하지 말아야 합니까? 누가 제외될까요? 가난한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은 복음을 들을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식한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배우지 못하고 무식한 사람들에게 처음 나타내셨습니다. 어린이들일까요? 절대로 그럴수 없습니다. 그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죄인들일까요? 천만에 말씀입니다.56)
c. 어떤 주제에 대하여 차근 차근 분석해 가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그의 산상수훈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자”에 대하여 말하면서, ‘핍박받는 자가 누구인지, 왜 핍박을 받는지, 핍박하는 자는 누구인지, 어떻게 핍박하는지, 그리고 핍박받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논리적으로 차근 차근 설명해 나가고 있다. 그의 설교가 논리적으로 잘 구성된 설교였음을 보여준다.
d. 설교자는 1인칭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의 내용이 청중과 함께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1인칭의 사용은 청중들로 하여금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말씀 속으로 접어들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설교 2번 “형식적 위선적 크리스천”에 나온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 정도로 여러 해를 살아왔습니다. …나는 모든 악을 피하고 죄 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시간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 했고 모든 사람에게 대한 여러 가지의 선행의 기회를 전부 획득했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또는 조심스럽게 공적인 또는 사적인 은총의 수단을 다 사용했습니다. … 그러면서도 또 나 자신의 양심은 성령으로 이 기간 중에 내가 단지 “형식적 크리스천”에 불과했다고 나를 향해 증언하십니다.57)
e. 설교자료 및 예화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성경 속의 인물, 교회사적 자료, 최근 시대 인물이 나오고 있다. 그 외에도 광범위한 독서로부터 얻어진 헬라 문학과 라틴어 문학의 인용문들이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의 편재하심”에서는 두 세 편의 시들을 인용하고 있으며, “우리의 이웃을 위한 견책할 의무”에서는 리처드 박스터의 말을 인용하는 동시에, 그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술 취한 자의 예화를 사용하였다. 웨슬리의 설교자료는 편중되어 있지 않고 광범위했음을 알 수 있다.
Ⅳ. 에드워즈와 웨슬리가 한국 강단에 주는 교훈
설교자 에드워즈와 웨슬리가 오늘의 한국 강단에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미국과 영국에서 각각 위대한 부흥기를 주도했던 그들의 설교사역이 오히려 부흥기를 지나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선조들의 신앙이 희미해져가고 사회적인 도덕성이 무너져가고 있었던 당시와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에는 어딘가 상통하는 점이 있다 하겠다. 새로운 영적 부흥을 갈망하면서 설교강단의 갱신을 기대해 본다.
우선은 이 시대를 보며 고통스러워하는 설교자의 가슴을 배워야 한다. 에드워즈의 유명한 설교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은 설교자의 안타까움이 그대로 배여 나오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철저하게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 시대를 향한, 그의 청중을 향한 설교자의 열정이었다. “형식적인 크리스천이 아니라 참된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는 웨슬리의 간절한 호소 또한 그 시대를 보는 아픔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에드워즈와 웨슬리는 공히 그 시대와 공동체를 새롭게 하려는 열정, 한 영혼을 구원하려는 열정의 소유자였다. 이러한 설교자의 뜨거운 가슴이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다. 오늘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시대와 청중의 변화를 기대하면서 선포하는 설교가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한국 교회 많은 설교자들이 계속 되는 설교사역에 매몰되어 또 한편의 설교를 하는 정도에 그친다면 부흥의 불길은 요원할 것이다.
둘째, 한편의 설교를 위해 에드워즈나 웨슬리는 많은 시간을 성경을 연구하는데, 독서에 바쳤다. 한국 교회의 설교의 위기는 목사 자신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심적으로 성서연구에 충실하지 않는다. 독서와 사색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설교자로서의 근면성이 부족하다. 웨슬리는 설교역사상 가장 근면한 설교자로 손꼽힌다. 설교의 장소와 횟수에도 그렇거니와 그의 설교에 나오는 수많은 예증 자료들이 그의 광범위한 독서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에드워즈 또한 설교를 작성함에 있어서 언어 선택, 어구의 조정, 그리고 사고의 전개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는데, 설교자의 주의 깊은 노력을 반영하는 것이다.
셋째, 무엇보다도 성령의 역사 하심 없이는 부흥은 불가능하다. 에드워즈나 웨슬리는 독특한 신앙 체험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러기에 성령의 역사 하심을 늘 갈망하였고, 기도하였다. 에드워즈의 경우, 설교의 전달에 특별한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중들은 변화되고 있었다. 이는 설교 속에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성령이 설교를 통하여 회중 사이를 걸을 때 비로소 그 설교는 힘있는 설교가 된다 하겠다. 오늘의 설교자는 철저히 성령 앞에 무릎 꿇어야 한다. 성령께서 하시도록 내어놓아야 한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부흥의 역사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넷째, 특히 에드워즈의 설교에서 볼 수 있었듯이 청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와 이미지”를 적절히 사용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말씀중심을 외치는 것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나, 자칫 지적이고,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설교, 지식전달의 설교가 되는 위험성이 있었다. 그러한 설교는 곧 식상해지고 건조해져서 교인들의 심정에 감동을 주지 못하는 설교가 되곤 한다. 오늘의 설교자는 에드워즈가 사용한 비유와 이미지 등을 사용할 수 있는 수사학적인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현대 청중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비유와 이미지의 사용이야 말로 청중들을 감동시켜 변화된 삶으로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Ⅴ. 나오면서
18세기 부흥기를 주도했던 두 설교가를 살펴보았다. 일찍이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주시고, 황폐한 시대를 일구는 일군으로 사용하셨다. 철저하게 연구되어지고, 분석되어진 그들의 설교를 접하노라면 경외감이 든다. 오늘 우리의 강단에 이 두 설교자의 모습이 재현되어질 때, 부흥의 역사 또한 재현되리라 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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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 E. Clyde & Pinson M. William, Jr. 20Centuries of Great Preaching. Vol.3., 박종구 역, 『세계명설교대전집(제3권)』. 인천: 성서연구사, 1986.
Gonzales, L. Justo.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Vol.3), 이형기, 차종순 역.『기독교사상사(Ⅲ)』. 서울: 장로회출판국,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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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드, 안보헌 역.『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8.
1) 정장복, 『인물로본 설교의역사(상권)』, (서울: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86), 277쪽. 2) Clyde E. Fant & William M. Pinson, Jr., 20Centuries of Great Preaching. Vol.3., 박종구 역, 『세계명설교대전집(제3권)』(인천: 성서연구사, 1986), 93쪽. 3) 위의 책, 94쪽. 4) 위의 책, 95쪽. 5) 정장복, 앞의 책, 285-86쪽. 6) 위의 책, 281쪽 7) Paul Scott Wilson, A Concise History of Preaching (Nashville: Abingdon Press, 1992), pp.124-26 8) 정장복, 앞의 책, 285쪽. 9) Richard Lischer ed., Theories of Preaching :Selected Reading in the Homilectical Tradition, (Durham: The Labyrinth Press, 1987), 100쪽. 10) 위의 책, 101-02쪽. 11) 정부홍, 『조나단 에드위즈의 생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58쪽. 12) Fant & Pinson, Jr., 앞의 책, 104쪽 13) 위의 책, 106쪽 14) 이미지는 인간의 감각기관에 따라 시각적, 청각적, 후각적, 촉각적, 미각적 이미지로 구분되며, 비유에는 직유, 은유, 상징, 의인, 제유, 환유와 같은 방법들이 있다. 15) 조나단 에드워드, 안보헌 역,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8), 7-43쪽. 16) Justo L. Gonzales,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Vol.3), 이형기, 차종순 역,『기독교사상사(Ⅲ)』(서울: 장로회출판국, 1988), 413쪽. 17) 정부홍, 앞의 책, 164쪽 18) 정장복, 앞의 책, 285쪽. 19) Conrad Cherry, The Theology Jonathan Edward, 주도홍 역, 『조나단 웨드워즈의 신학』, (서울: 도서출판 이레서원, 2000), 103-04쪽. 20) 안보헌 역, 앞의 책, 27쪽. 21) 위의 책, 72쪽. 22) 위의 책, 73쪽. 23) Edwin Charles Dargan, A History of Preaching(vol,Ⅲ), 김남준 역, 『설교의 역사(Ⅲ)』(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1994), 370쪽. 24) 위의 책, 370쪽 25) 정장복, 앞의 책, 255쪽. 26) Fant & Pinson. Jr., 앞의 책, 25쪽. 27) 위의 책, 26쪽. Wilson은 18번째 자녀로 소개하고 있다. 28) Wilson, p.131 29) 위의책, 130쪽 30) 한영태, “웨슬리 설교의 신학적 배경”『웨슬리 복음주의 총서Ⅱ』(서울: 도서출판 광림, 1994), 326쪽. 31) 죤 웨슬리, 김홍기 역, 『존 웨슬리의 설교』(서울: 땅에쓰신 글씨, 2000), 26-37쪽. 32) 위의 책, 24쪽. 33) Justo L. Gonzales, 앞의 책, 406-07쪽. 34) 존 웨슬리, 김홍기 역, 앞의 책, 184쪽. 35) 한영태, 앞의 글, 331-32쪽. 36) 존 웨슬리, 김홍기 역, 앞의 책, 226쪽. 37) Dargan, 앞의 책, 373쪽. 38) 위의 책, 414쪽 39) 정장복, 앞의 책, 275쪽. 40) Wilson, 앞의 책, 136쪽. 41) 김진두, “웨슬리의 표준설교 분석”, 『웨슬리 복음주의 총서Ⅱ』(서울: 도서출판 광림, 1994), 335쪽. 42) 위의 글, 342쪽. 43) Works of John Wesley, vol.7, pp.224-25, Fant & Pinson, Jr., 앞의 책, 40쪽에서 재인용. 44) 김진두, 앞의 글, 342쪽. 45) Wilson, 앞의 책, 134쪽 46) Richard Lisher ed., 앞의 책, 106 쪽. 47) Wilson, 앞의 책, 135 쪽. 48) 요한 웨슬리, 차동재 역, 『요한 웨슬리의 산상수훈』 (서울: 아가페출판사, 1999), 40-41쪽. 49) 위의 책, 53쪽. 50) 위의 책, 60쪽. 51) 최홍석, “웨슬리와 신앙체험” 『웨슬리 복음주의 총서Ⅱ』(서울: 도서출판광림, 1994), 118-23쪽. 52) 정장복, 앞의 책, 265쪽. 53) 다아간, 앞의 책, 413쪽. 54) 요한 웨슬리, 차동재 역, 앞의 책, 25-26쪽. 55) 죤 웨슬리, 김홍기 역, 앞의 책, 14-15쪽. 56) 위의 책, 23쪽. 57) 존 웨슬리, 김홍기 역, 앞의 책,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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