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칼빈에 대하여
I.들어가는 말
중세의 긴암흑기를 넘어 동녘에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설교와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시작되었다. 이시대의 설교자들은 교회 뿐만 아니라 사회개혁운동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시대를 움직이는 정말로 살아 역사하는 설교였다. 루터와 칼빈은 설교할 시대와 청중을 분명히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말씀을 통하여 개혁하고자 하였다. 루터와 칼빈이 시대를 움직이는 힘이 무엇이며 권력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이 무엇인지 조명하여 이시대의 설교자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밝혀 보고자 한다.
II.사상적 시대적 배경
루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상적 역사적 흐름을 이해 하고자 한다.
A, 시대적 배경
1, 로마 가톨릭 전통
루터의 종교개혁은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동방교회 중심의 서방교회에서 일어났다 사실상 루터는 서방교회에서 일어났다. 사실상 루터는 서방교회의 수도원주의를 따르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서 훈련받았고, 문학사와 석사를 끝내고, 서방교회인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509년에는 서방교회의 표준 교의학에 속하는 피터 롬바르드의 교의학을 강의하였고, 1512년에는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 강의 하였다. 급기야 그는 로마 가톨릭 신부로서 비텐 베르크대학에서 강의하였다. 1)
2, 후기 중세기 스콜라 주의
피터 롬바르드의 교의학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교의학은 스콜라주의의 절정으로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신학이었다,. 이와 같은 신학전통은 대체로 보편주의적 실재로에 속하였다. “국가”라고 할 때 각 개인의 구성원들의 특수성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가라고 하는 보편적인, 객관적 실재가 더욱 중하다고 하는 철학이론이다. 말하자면<추상적인 개념들 (보편적인 것들=universals)이 (특수한 것들=particulars)와 관계없이 실존한다>고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둔스, 스코투스에 이어 오캄(W.of Ockham)은 유명론을 내세워 실재론에 반대하였다. 오캄은 인간이라고 할 때에 보편적인 인간일반의 추상개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김씨, 이씨, 박씨 개개인인의 특수성에서 인식되는 인간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보편 보다고 특수와 개별자가 인식 될 뿐이다.2)
3, 르네상스 인문주의
1350년에서 1500년 어간에 후기 중세주의 운동에 병행하여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부르크하르트 크리스텔러 바론 벌크 및 홈스등 르네상스 연구가들은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13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문화적 교육적 부흥 운동으로서 희랍 로마문화의 부활이었다.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탁월성을 강조하려는 운동이었다고 정의한다. 3)
4. 신비주의 운동
중세 말엽 로마 가톨릭교회가 계층 질서적 성직체제와 7가지 성례전(영세, 견신례, 결혼례, 고해성사, 서품, 종유성자)을 은총의 수단으로 하였었으나 성도들의 심령속에 생명력있는 은혜를 매개시키지 못하게 되자 유럽 도처에서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났다.4)
5, 민족국가주의 대두
교황 이노센트3세(InnocentIII :A.D1160-1216)는 “교황은 태양이고 왕은 달”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교황과 교황주의 교회의 절대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이 황금기에 돌입한 것을 바로 이 교황 절대주의 혹은 교회 절대주의 시대의 일이었다. 그러나 후기 중세기로 접어들면서 교황 중심적 획일주의에 대한 반대들이 일어났다.5)
후기 중세기의 민족국가주의적 왕정국가론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물결과 더불어 종교개혁 당시 스페인 불란서, 영국 독일 등과 같은 민족주의적 왕정국가들을 탄생시켰다. 그리하여 로마의 바티칸 중심의 한 나라는 와해되고 그 대신에 두 나라 교회와 국가가 생겨났다. 이처럼 중세적 교회 획일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국가와 모든 세속적 가치의 세계가 중세 교회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하였다. 6)
6, 과학문명의 여명과 세계확장
1498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는 희망봉을 발견하고 이미 1492년 콜럼버스(Columbus)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였다 이처럼 바다로 진출함으로서 세계에 대한 시야가 넓어졌고, 따라서 선교활동의 새로운 장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과학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망원경과 현미경, 나침반, 시계ㅡ 화약, 인쇄술들이 발명되기 시작했다. 1454년 구텐베르크는 인쇄술을 발명하여 종교개혁의 서적들을 유럽에 널리 확산시켰다. 1500년경에는 유럽에 1,000여 개의 인쇄소가 생겼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나라에 대학들이 많이 세워졌다. 7)
이와 같은 배경이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도덕적 부패는 말할 것 없고 루터의 종교개혁에 직접적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B. 독일의 국내상황
종교개혁 당시의 독일은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및 헝가리의 큰 부분을 포함했고, 스페인과 더불어 찰스 5세의 신성로마제국이었다. 그런데 독일 안에는 7선 제후가 있어 신성로마제국이 황제를 선출 할 수 있었고 이들 밑에는 각각 지방의 제후들이 있었으니 200개에 달하는 제국하의 소도시국가들이 난무하면서 모든 제후들이 집단적 이기주의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 불안과 종교적 부패를 야기 시켰고, 나아가서 제국의 통일을 위협하였다,당시 뉘른베르크, 마그데부르크, 프랑크푸르트, 울름, 아우크스부르크 미치 80개국의 기타 도시국가들은 찰스 5세의 영향권으로부터 독립했으며 로마 교회의 세력권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민족국가적 특징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특히 독일의 도시민들은 집권층과 영주들에 대립해 있었다. 그래서 이같은 상황에서 종교개혁의 불길은 마른 숲을 태우는 불길처럼 서유럽 전체로 확신되어 나갔다. 8)
사회계층의 밑바닥에는 독일의 농부들이 있었는데 이와 같은 상황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의 경우와 같다. 그래서 노동자와 농민이 가장 불만이 많은 계층으로서 이미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농민봉기가 있어 오던 중 1525년의 농민전쟁에서 절정에 달했다. 따라서 뭔처가 농민 전쟁의 지도자가 된 것은 종교개혁에 대한 반작용일 뿐만 아니라 농민 봉기의 운동사 혹은 사회사를 전제로 한 한운동이 있다. 이상의 독일의 상황에서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교황주의에 대한 증오였다. 더욱이 심각한 것은 당시 독일내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도덕성과 부패상이었다. 성직 매매, 성직자들의 특권, 수도승들의 타락, 특히 고위성직자들의 사치와 불륜들은 독일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교황청은 이태리 안에 있는 교황청의 비대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등 말 할 수 없는 사치와 안일에 빠졌다, 그래서 독일의 제후들은 가톨릭교회의 간섭에 항거했으며 귀족들이나 중산층 역시 교황청을 위해 세금내기를 거부하였다. 심지어 도시국가들은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법적으로 독립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열광적인 인기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9)
당시 독일의 지성계 역시 갈등상황을 경험했다. 이태리의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독일에 들어 온지 이미 1세대 이상이나 되었는바, 로히흘린을 둘러싼 새로운 배움을 옹호하는 르네상스 인문주의 계통의 무리들 때문에 지성인들 세계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 개종한 페러코른(johann Pfefferkorn:1469-1522)은 1509년에 황제 막시밀리안으로부터 유대교 서적들을 몰수하라는 명령 - 기독교를 불명예스럽게 한다는 이유에서-을 얻어 냈다.
로히흘린은 이단으로 고발되었고 호코슈트라텐에 의해서 재판을 받았다. 이 소송사건은 로마로 상소되었고, 1520년까지 끌다가 결국 로히흘린의 정죄로 끝났다. 그러나 이같은 과정에서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새로운 배움을 옹호하는 자들은 가톨릭의 처사를 학문에 대한 무식한 공격으로 보고 로히흘린을 지지하기 위해서 규합했다. 그리하여 로히흘린을 중심으로 야기된 폭풍의 결과로 독일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하나가 되었고 이들과 보수주의자들 사이에 큰 균열이 생겼던 것이다. 가톨릭교회에 대한 루터의 항거는 바로 이같은 갈등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일어났다. 바야흐로 1517년 10월 31일, 생긴 지도 얼마 안되었고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은 비텐베르크대학의 교수 루터의 95개 조항은 교회역사상 가장 거대한 혁명을 일으켰다. 10)
III,종교개혁의 여명
종교개혁은 15세기와 16세기에 찬란히 피어난 서구 기독교 문화 가운데 큰 주류를 이루는 운동이었다. 마치 천년 전에 고대사회를 벗어나듯이, 기독교 세계는 중세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전환점이 가져온 각각의 상황들은 너무나도 판이하였다. 전자가 몰락이었다면 후자는 부활이었다. 그때가 부패에서 혼란으로 이어지던 시대였다면 이제는 저급한 문화 고상한 문화로 탈바꿈하는 시기였다. 15,16세기는 희망으로 전율하는 시대였다.
시민계급이 세력을 얻게 되었다. 모국어 성경 번역, 11)
1517년 유명한 설교가로 상당한 재능을 가졌던 도미니칸 수도사, 요한 테쩰(Johan Tetzel)은 교회 최고의 당국으로부터 삭소니에서 설교를 하고 면죄부를 팔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이것으로부터 돈벌이를 삼았다. 그는 동전이 상자 안에 떨어져 쨍그랑 소리가 나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 말했다고 한다. 12)
마틴 루터는 이러한 테쩰이 행위에 분개하고, 면제부 파는 것을 정면으로 공격하였다. 근 95개조의 격문을 비텐베르그성 교회문 앞에 붙여서 공개적으로 논박하였다. 이격문이 널리 읽혀지게 되면서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은 시작되었다. 13)
95개 조항은 루터의 신학을 완전하게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당시의 교회적 남을 혁신 시킬수 있는 어떤 원리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교회의 진정한 보물은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이다. 14)
이때로부터 로마카톨릭과 개신교로 구분이 되기 시작했다. 개신교의 특징은 하나님이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그것에 기초하여 부패한 교회에 대항한 것이다.
IV.종교개혁과 설교와의 관계
종교개혁과 설교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위대한 혁명의 사건과 업적들은 대부분 설교가와 설교가 이루어 놓은 작품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믿고 사랑하고 가르쳤던 신실한 사람들의 사역을 통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역으로, 종교개혁의 사건들과 원칙 등은 설교에 영향을 미쳐, 설교 그 자체에 새로운 정신을 불어 넣고 , 새 힘과 새 형식 등을 주었다. 그래서 종교개혁과 설교의 관계를 간략히 말한다면 상호의존, 보완, 지침이라는 말로 축약할 수 있다.
브로아두스는 이 시대의 설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설교의 회복, (2)성경적 설교의 회복 (3) 논쟁적 설교의 회복 (4) 은혜의 교리에 대한 설교의 회복등을 이야기한다.15)
이 시대는 설교하지 않는 자들을 맹비난 하였다. 라티머는 설교하지 않고 안일을 즐기시는 성직자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영국 전역을 통틀어 가장 부지런하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위성지자는 누구입니까? ---- 영국을 통틀어 가장 부지런한 설교자요, 고위성직자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기를 원하십니까? 그는 바로 마귀입니다. 그야말로 가장 부지런한 설교자입니다. 그는 결코 그의 교구를 떠나지 않으며 목회를 중단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는 항상 교구민들 곁에 상주하고 있습니다. 항상 자기 자리를 지키며 궤도를 이탈한 법이 없어서 그를 부르면 항상 가까이'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전지역을 통해서 가장 부지런한 설교가로서 언제나 밭을 갈고 있습니다. 16)
V. 루터의 성장 배경
A, 마르틴 루터의 주요 일지17)
1483 11월10일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
1502 에르푸르트 대학교에서 문학사학위 수여 받음
1505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수여 받고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입회
1506 수사로 축성
1507 사제로 서품
1510 로마로 특별 여행할 기회를 부여받음
1512 에르푸르트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음, 베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성경강의 시작
1517 1031일 비텐베르크성 교회 정문에 95개 명제를 게시
1520 교황 칙서 소각
1521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보름스 의회에 출두, 그의 안전을 지켜 주려는 친구들에 게 의해 바르트부르크 서에 유폐
1525 카테리나 폰 보라와 결혼
1546 극심한 가슴앓이를 겪은 후 사망
B. 회심과 성장배경
젊은 루터는 성장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하늘나라, 지옥, 천사, 성자들, 악마 및 마귀들의 실재를 믿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무시무시한 심판자로 경험하였지만 동정녀 마리아와 사도들과 성직자들의 중보의 효과를 믿었다. 그는 주기도문, 십계명 및 사도신경을 배워 알고 있었다. 그는 그가 알고 있었던 가톨릭교회에 무조건 순응했다,18)
보통 농부보다 더 박력 있고 야심이 있었던 루터의 아버지는 루터가 출생한 지 몇 달이 언되어서 아이스레벤으로부터 만스펠트로 이사하였다. 그는 아들을 법조계로 진출시키기 위한 교육열에 불타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마스필트, 마그데부르크, 아제나하에서 준비교육을 받은 다음 1501년 에프푸프트대학에 들어갔다. 이곳에 프푸르트에는 이미 한 세대 이전부터 독일에 확산된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침투해 들어 와 있었다. 루터는 인문주의자들과 접촉을 했고 인문주의에 노출되어 있었으나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직접 배우지는 않았다. 확실한 것을 루터가 라틴 고전들을 폭넓게 읽었다는 사실이다.
루터는 깊은 죄의식을 경험했다. 바로 이것이 당시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적 대각성의 근본적 특징이었다. 또한 루터는 친구가 벼락에 맞자 갑자기 죽고 자신은 이 벼락으로부터 구사일생으로 빠져 나오는 경험을 한 다음 법학도의 꿈을 버리고 어거스틴 은둔자들의 수도원에 들어 갔다. 루터는 수도원 생활에서 빨리 인정을 받았다, 그는 1507년에 안수례를 통하여 사제가 되었다. 비텐베르크에서 1512년에 신학 박사학위를 얻었고 곧 바로 성경을 강의할 수있게 되었다. 그는 1513-1515년 사이에 시편을 강의했고 1515-1516년까지 로마서를, 그리고 이어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및 디도서를 강의하였다. 19)
C. 주요저서
1.독일 크리스천에게 고함(1520,8)20)
이 작품은 교황이 자신의 교권을 수호하고 있는 세 성벽을 무너뜨렸다. 첫째로, 이 작품은 모든 믿는 자들은 사제들이기 때문에 성직자 신분을 지닌 사람들과 일반 신자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있을 수 없다하여 성직 계층의 성벽을 붕괴시켰다. 이어서 이 만인제사장에 관한 진리는 교황만이 성경해석의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하는 두 번째 성벽을 분쇄시켰다. 세번째로, 본 작품은 교황만이 교회의 개혁 공의회를 소집할 권한을 갖는다고 하는 성벽을 깨뜨렸다.
2.교회의 바벨론 포로(1520,10)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인 성례들의 신학을 새롭게 전개하면서 로마 가톨릭의 성례론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공격하였다. 루터는 성경적 표준에 입각하여 두가지 성례, 즉 세례와 성만찬이 있을 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루터는 평신도에게 잔을 주어야한다고 주장했고, 화체설을 의심했고, 특히 성만찬이 하나님에 대한 희생제사라고 하는 사상을 배격했다. 루터는 이어서 견신례, 혼인성사, 서품성사, 종유성사, 같은 나머지 로마 가톨릭의 성례들이 결코 성경적 근거를 지닌 성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3,기독자의 자유에 관하여(1520,)
그는 차분한 확신으로 기독교인이 경험하는 역설을 제시했다. “ 한기독교인은 모든 사람과 모든 것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주인인 동시에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의 가장 충실한 종이요, 모든 것에 예속된다,”한 기독교인은 믿음으로 칭의를 얻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인격관계에 돌입하였고, 더 이상 행위의 율법에 매여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동시에 종인 까닭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영위하고 이웃을 도와주어야 할 사랑에 의해서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루터에 있어서 복음의 알맹이는 은혜와 신앙으로 일어나는 사죄이다.
4.선행들에 관하여(1520,5)
모든 선행들 가운데 가장 고상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정의한 다음에 선행들을 교회에서의 기도나 금식이나 구제에 국한시키지 아니하고 직업의 현장과 삶의 모든 차원에서의 기독교적인 삶을 선행들로 보았다.
1521년 12월에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여 다음해 9월에 출판하였다.
VI.루터의 설교의 세계
A, 설교에 대한 열정과 특징
1)처음 루터는 설교하기를 꺼려하였고, 1515년 수도승이었을 때 선배 성직자의 부탁으로 설교한 적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설교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내면에 잘 배어 있던 웅변가의 본능이 깨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종종 하루에 4번씩 설교를 하였다. 그가 종교개혁자로 활동하고 있었을 때에는 그의 열성적인 설교는 그의 두드러지 특징 중의 하나가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1529년에 그는 일주일에 서너번씩 설교를 했다고 한다. 1541년에는 주일 네 번씩, 주중에 두세번 설교하고, 휴일에는 보통 두 번씩 말씀을 증거 했다, 그의 교리는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나왔다.
2) 루터는 설교를 기독교의 능력과 힘이라고 주장하였다. 제베와의 좌담(Table Talk)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강단에 올라가서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할 때마다 확신하는 것은 제가 말하는 것은 저의 말로써가 아니며, 시편 기자가 말했듯이 나의 혀는 항상 준비된 작가의 펜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루터는 이처럼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설교자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멧시지를 높였던 것이다.21)
3)루터는 그이 좌담에서 설교가의 언어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평이해야 하지만 지식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다음 구절이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설교는 논리가요 웅변가여야 합니다. 즉, 가르치고 훈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가 한 주제를 놓고 설교할 때, 우선 그것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 그는 그것을 정의하고 묘사하여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자기의 주장을 입증하여 설득력을 갖도록 성경 구절을 인용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 예를 들면서 설명하고 주장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섯째 비유를 들어 풀이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는 또 다시 이렇게 적고 있다. 젊은 신학도들은 히브리어를 공부해야 하며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단어들을 비교해서 그것들의 특징, 성질과 장점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22)
4)사람들의 설교는 주로 믿음의 오류들에 관한 것이므로 대부분 논쟁적이었고 교리에 관한 것이었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위클리프와 후스는 가톨릭 교도들의 비도덕적인 행동을 비판하지만 나는 주로 그들의 교리를 반대하고 대항합니다. 나는 그들이 진리를 선포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고도 분명하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나는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나는 거위의 목을 잡고 그 목에 칼을 대고 있습니다. 가톨릭교가 잘못됐다고 보여 줄 때, 그들의 생활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쉽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말씀이 변질되지 않고 순수하게 살아 있을 때 부족할지라도, 생활도 순수하고 건전하기 때문입니다.23)
B.성경중심의 설교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s)으로의 종교개혁의 원칙이 확립되었다.24)
1)25)
루터의 좌담에서 “신학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의 기초요 원천인 성경을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나의 반대자들을 당황하게 하고 그들의 입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성경지식으로 무장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성경 분문을 완전히 소화하고 있는 사람이 가장 영적인 사람입니다. 성경이야말로 모든 예술과 기술의 가장 아름다운 꽃입니다.
칼빈도 절대 권위에 둠 딤후3:16-17 설교 중에
주님께서는 진리의 말씀 속에서 참되 경전과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신의 교회에 주셨습니다. 은혜로운신 하나님과 그의 행하신 역사들 심판, 하나님의 뜻과 계명, 은혜로우신 그리스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믿음, 성결한 삶의 의무 등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모든 것을 부족함 없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다른 것에서 찾을 필요가 없으며,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부족하여 다른 것으로 메꾸어 보려는 인간의 노력도 필요 없습니다.
종교개혁 설교의 씨실과 날실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것은 명백하고 두드러진 사실이다. 라고 지적한다.
2).루터는 자신의 모든 천부적 재능과 지성을 동원하여 이러한 강해 설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위대한 성경 강해자 였으며, 이러한 설교법을 위대한 유산으로 후대에 물려주었다.26)
I.존 칼빈
존칼빈의 양력 27)
칼빈 (명설교전집)
1509 7월10일 프랑스 노용에서 출생
1523 파리대학교 입학
1528 법률 공부 시작 함
1531 부친 사망
1532 법률학 박사학위 취득 및 첫 번째 저술 발표
1533 개혁파와의 친분 때문에 파리로 망명
1534 종교적 회심을 경험함(칼빈은 자신이 이 경험을 하였던 시기를 명백히 밝히지 않고 있 기 때문에 이 연도는 추정 연도이다.)
1534 프랑스 전역을 여행하기 시작함
1536 <institutes>의 초판 발표 및 제네바에서 활동하기 시작함
1538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함
1540 이델레트 드 뷔르와 결혼
1541 9월13일 제네바로 돌아감
1553 세르베투스에 대한 사형 선고를 승인함
1555 제네바에서 자유사상가들이 실권함과 동시에 그 시에 대한 보다 더 확고한 권한을 얻 게 됨.
1559 <institutes>의 최종판 발행, 제네바 대학교 설립을 도움
1565 5월27일 제네바에서 사망
A.생애와 시대
비록 존칼빈은 가장 영향력 있던 개혁가로 종종 간주되고 있기야 하지만 그는 사실상 종교개혁을 일으키는데 있어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칼빈이 무대에 나타났던 시기는 이미 종교 개혁의 초기 전투들이 승리를 거둔 뒤였다. 칼빈이 1509년에 태어났을 때 루터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만족할 만한 해석을 위해 영적으로 고뇌하며 이미 4년을 보냈다. 칼빈이 독법을 배우고 있을 때 루터는 이미 비텐베르크에서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에 대한 그의 복음주의적 강의들을 하고 있었다. 칼빈은 루터가 교황의 면죄부 발행에 공개적으로 의문을 표기하기 시작할 때 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80년에, 즉 칼빈이 죽은 지 16년 뒤에 이미 세계는 다른 어떤 개혁가의 사상보다도 칼빈의 사상에 더 깊은 영향을 받았다.28)
존칼빈은 고대 도시 노용에서 1509년 7월10일에 출생하였다.
그의 부모인 게르하르드 칼빈과 젼느후랑크는 칼빈을 유아 세례주었다. 칼빈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교회의 품에 안겼다. 그의 부친은 교회법정에서 봉직하는 사무변호사였고, 감독을 돕는 재무대리인이었다. 칼빈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으며 (1515년) 그는 새어머니에 의하여 계속해서 후기 중세기 분위기 속에서 양육 받았다. 1521년(12세)경 칼빈은 사제를 도와 교회의 제단(로마가톨릭식)을 섬기면서 어느 정도 수입을 얻었다. 칼빈의 부친은 본래 칼빈이 사제가 되기를 원했다.
칼빈은 14세 정도에 파리대학소속 마르쉬 문과 대학에서 인문계 학생으로서 문과 계통을 배웠다. 대체로 당신의 유럽의 대학들은 문과대학을 거쳐야 신학부, 의학부, 그리고 법학부로 진출케 하였다. 그래서 칼빈은 문과대학에서 문과대학 학위를 위한 예비과정도 이수했다. 즉, 그는 라틴어문법과 라틴어시,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도 어느 정도 배웠다. 특히 꼬르디엘은 칼빈에게 라틴어와 불어를 가르쳐 주었다. 아마도 칼빈은 이미 이 과정에서 불란서에 들어 온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맛보기 시작했을 것이다. 1526년에 신학연구를 위하여 보다 유명한 몽떼규대학 (la College de Montaigu : Erasmus가 다녔던)으로 갔다. 칼빈은 이곳에서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반대하던 베다(Noel Beda)와 뗑페트(Pierre Tempete)에게서 토론기술을 배웠고 둔스 스코투스, 옥캄, 비엘등 후기 중세기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의 신학에도 접하였으며, 이곳에 롬발드의 조직신학도 배웠다. 이학교는 학생들로 하여금 죄와 허물을 여러사람 앞에서 자백케 하였고,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케 함으로서 엄격한 윤리생활을 강요하였고, 식사는 주로 빵이었고, 13분의 1파운드 정도의 뻐터와 익힌 열매와 채소 그리고 달걀 하나 정도였다. 29)종개사 P254
1528년에 그는 법률을 공부하였고, 프란시스 1세가 파리에 세운 왕립 대학에서 고대 언어들과 문학을 열심히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532년 그가 불과 23세였을 때 이미 그는 법률학 박사가 되었으며 첫 번째 저술을 발표하였다. 30)
어느날 칼빈은 그의 침대 곁으로 그 도시의 공의회원들을 소집하여 고별 인사를 하며 엄숙한 작별을 고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저에게서 들은 교리를 경솔함 없이,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가르쳤으며, 순수하고 신실하게 하나님께서 저에게 맡기신 책임을 따라 하나님이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 1564년 5월27일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갔다.
B,칼빈의 저서
1532년에 출판된 세네카이 관용론에 대한 주석이라고 하는 그의 첫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깊은 도덕적 가치를 제시하는 등 다분히 르네상스적 문필가위 자질을 나타내었으나 그 당시의 교회문제나 신학문제는 거의 관심하고 있지 않았다.31)
기독교강요 초판1536년 판을 거듭하여 1559년 최종판이 나왔다. 이미 초판에 종교개혁이 의도했던 신학과 기됵교적 삶에 관한 내용이 명쾌하고도 조직적으로 묘사되었다. 32) 이 책은 복음주의 자들을 오해하여 박해하는 불란서의 왕과 집권층을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조국의 복음주의자들을 위하여 쓰여졌는데, 중심내용은 기독교의 기본교리, 곧 경건한 삶의 총화와 구원론의 총화이다. 33)
가장 훌륭한 개신교 변호로 여겨질 수 있는 사를 레토에 대한 대답(Reply to Sadoleto)글을 썼다. 34)
C.회심과 소명
칼빈은 적어도 1529년 이전에 루터의 작품을 접하였고, 쯔빙글리의 성만찬 교리에 관하여도 루터의 그것과도 비교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마도 칼빈은 1529년에서 1532년 사이에 회심하지 않았나 추측되나, 그 정확한 일자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킬빈이 그의 <시편주석>(1557) 서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읽을 뿐이다.
“내가 이직 어렸을 때 나의 부친은 내가 신학을 연구 하도록 작정하셨다. 그러나 후에 나의 부친은 법조계로 진출하는 것이 잘 살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고 나를 법과 대학에 보내기로 마음을 변경 하셨다. 그래서 나는 문과 공부에서 법과공부로 바꾸었다. 이는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감추어진 섭리에 의하여 나는 다시 나의 방향을 변경시켰다. 나는 교황주의의 미신에 너무나 중독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깊은 늪에서 헤어나기 힘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갑작스러운 회심에 의하여 나의 마음을 녹여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 들일 수 있게 하였다.”
D,복음주의로 기울어짐
1533년(24세)경에야 완전히 종교개혁의 복음주의에로 기울어졌으나, 아직도 칼빈은 종교개혁운동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칼빈이 종교개혁에 직접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불란서 파리대학 총장이었던 코프(Cop)의 연설문을 작성해 주었다는 이유로 파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데에 기인한다. 파리대학 총장의 연설문에는 복음주의 색채가 농후하게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그의 말씀을 통하여 신앙과 소망과 사랑을 일깨워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은총에 의하여 우리를 자기에게로 이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사 복음을 믿게 하시고, 우리가 온 마음을 기울여 섬겨야 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있게 하신다.35) ”
II,사회개혁과 설교
1541년 제네바 시민들은 칼빈에게 교회로 돌아와 줄 것을 간청하여 제네바로 돌아왔다. 칼빈의 교회와 정부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종종 정치적 및 종교적 논쟁들이 하나의 논쟁으로 대두 되곤 하였다. 칼빈은 도덕적 법률위반 사항들을 조사하기 위한 일종의 스파이 제도를 마련하였다. 형벌과 벌금이 무도, 음주, 그의 설교에 대한 비난등과 같은 행위들에 대하여 주어졌다. 아울러 마귀나 지옥은 없다고 이야기하거나 교황은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행위, 이 단죄를 사형에 처하는 것에 반대하는 행위, 딸을 가톨릭교도에게 약혼시키는 행위들에 대하여 서도 형벌과 벌금이 주어졌다. 칼빈의 가장 큰 실수는 금주정책을 시도한 것이 었다 금주법은 너무도 큰 반대를 야기시켜기 때문에 결국은 페지 될 수밖에 없었다. 36)
그는 셜교자, 행정가, 신학교수, 교회 및 학교 감독관, 시위회 고문, 공중도덕 및 교회 전례감독자등으로서 하루에 열두 시간 내지 열 여덟 시간씩 일하였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그는<institutes>를 계속 증보하였으며 성서 주석들을 집필하였고, 수많은 편지들을 썼다.37)설
칼빈은 자신의 임무에도 용기있게 헌신하였다. 개인적으로 그는 명상과 학자적 삶을 갈망하였으나 그러한 생활을 하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그는 제네바의 무질서하고 방탕한 풍조에 맞서 소매를 걷어 올리고 모든 것을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결코 영적인 행복만을 강조하는 속세를 떠난 성인이 아니었다. 그는 제네바의 시민들의 삶 전체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제네바의 부도덕한 풍조를 없애고자한 그의 노력들로 인해 오히려 조소를 받았다. 그가 매음, 도박, 낭비등을 없애고자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공익을 위해 보다 폭넓은 개혁들을 성실하게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공중위생, 개혁, 화재방지, 어린이 추락사고를 막기 위한 난간 설치, 고용증대를 위한 제조업 도입등을 위한 법률이 채택되도록 하는데 영향력을 미쳤다. 그의 글과 삶에서 그는 가정 생활, 경제, 정치 그리고 인간 관계의 모든 면들 등에 대해 진실 된 관심을 보였다.38)
파렐의 간청으로 제네바에서 그의 사역을 하였다. 제네바는 정치적으로 변혁기에 놓여 있었다. 실제로 그곳은 독립된 공화국이 되었다.39)
그곳에서 칼빈은 설교와 가르침의 자기 임무만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교리문답과 신앙고백서를 입안하였고, 엄격한 교회 규율로써 도덕의 개혁에도 힘을 쏟았다. 제네바는 이러한 개혁을 위한 준비가 거의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개혁자들의 격렬한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다.40)
III.칼빈의 설교의 세계
A.설교의 열정
1). 칼빈은 항상 원고 없이 또 빈번히 특별한 준비도 없이 설교를 한 훌륭한 설교가였다. 칼빈은 천천히 주의 깊게 이야기하였으며 항상 즉석에서 즉각적으로 생각 해내어 이야기 하였다. 그의 설교는 논리적이었으며 설득력과 확신을 항상 갖고 있었다. 반면에 우리가 생각하는 그의 장점들, 즉 주의 깊은 연구와 신중한 논조는 그가 가장 혹독하게 비난을 받아 왔던 점들에 해당된다. 그의 설교들 중 많은 수는 전적으로 준비 없이 행하여졌으며, 그에게 그러한 점들이 부족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칼빈이 수많은 해 동안 거의 매일 같이 설교를 하였다는 점은 기억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비록 그의 일반적인 연구는 중단 없이 계속되었지만, 설교를 위하여 그가 특별히 준비를 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41)
2)칼빈은 주로 성경를 주석하고 강해하는 설교를 했다. 성경전체를 차례로 매주 주일 예배때에 강해하기도 하였다. 칼빈은 주일에는 두 번 설교 했고 매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설교했다. 1549년 이후로는 매일 설교하는 일도 있었다. 대체로 킬빈은 주일날에는 신약성서를 그리고 보통 다른 날에는 구약성서를 설교했다.42)
3)그의 설교사역에 관하여 브로아두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칼빈이 설교사역을 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제네바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때때로 800명)에게 강의를 하고, 그곳의 실질적인 지배자로서, 스위스 전역과 네덜란드, 영국, 스코틀랜드에 있는 종교개혁주의자들의 자문으로 일하고, 방대하고도 정치한 저술을 내면서도 매일 설교하였다. 예를 들면, 그는 신명기에 관해서 200회의 설교를 했다. 그는 일년이 넘게 평일에도 말씀을 전하고, 어떤 때는 4-5일 연속해서 말씀을 전하기도 했다 43)
4)그의 설교는 조용하고 느렸기 때문에 그의 설교 대부분은 청중들에 의해 기록이 보존 될 수 있었다. 44) 현재 남아있는 대부분의 설교는 드니 레그니에(비서)라고 불리우는 가난한 프랑스인 망명인 덕분에 주로 보존되었다.
B.설교의 특징
1).칼빈의 설교에 있어서 종교개혁 설교자들의 강해식 방법이 동일하게 발견된다. 그의 주석들은 그의 설교와 강연이 열매들이었고, 그의 설교들은 주석들을 확장하여 적용시킨 것이었다.45) 그의 설교에는 설교자의 기교를 더함이 없이 , 성경의 표현으로 성경의 사상을 드러내는 데 날카로운 자각과 명확한 이해 표현력이 총동원되어있다. 설교양식은 명쾌하고 박력 있고 예리하며, 꾸밈이 없으면서도 순결하고 엄격한 우아함이 있고 따스함은 없지만 열정과 힘이 있는 설교였다.46)
2).두메르그는 칼빈의 설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의 설교는 “우리는 어제----을 보았습니다”, 또는 “우리는 오늘 아침----을 보았습니다”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설교의 끝은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요컨대 모세가 뜻한 바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내일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라는 말로 되어 있었습니다. 한 단락에서 다른 단락으로 넘어갈 때에는 반드시 서론이나 결론이 다음과 같은 말로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두 번째 사실입니다. “ ”이것이 우리가 이 구절에서 내려야할 결론입니다,“ 47)
3)칼빈은 농장, 포도주, 제조 요리, 도시생활 등에서부터 예화를 얻어내 사용하였다.48)
4).격언도 사용하였다. “빈수레가 요란하다” “병은 말을 타고 와서 갈 때에는 걸어서 간다” “탐욕스러운 자는 바다오 물고기들까지 마시고 싶어한다” 49)
C.칼빈의 설교에 대한 생각
칼빈의 설교 철학은 단순하였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 하였으며,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설교단에 서는 것이지, 그 자신의 생각들을 선포하기 위하여 설교단에 서는 것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그는 그러므로 우리가 연단에서 서게 될 때 우리의 꿈과 공상을 그곳에 가져가서는 안됩니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설교자는 그가 하나님으로 받은 것을 아무런 덧붙임이 없이 충실하게 전하여야만 한다. 성경에 논의되지 않은 것은 설교 단에서도 논의 되어져서는 안된다. 설교단에서 이야기 된 말들은 반드시 성경에 쓰여진 말씀들을 토대로 한 것이어야만 한다. 50)고 말하며 그러나 그의 설교 문으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고 그나마 남아 있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설교자로서의 그의 능력을 판단할 자료를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하였다.
D.말씀 중심의 설교
칼빈이 많이 설교를 했다는 사실은 그의 종교개혁이 단순히 제도의 변경과 새로운 직제의 선정 그리고 치리와 훈련등 외적인 요소들에만 의존했던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마음에 부닥쳐 오는 성령의 역사에 의존했음을 알 수 있다. 결코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 예정론 섭리, 그리고 치리”와 같은 논리적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한 것이 아니라 성서를 복음 중심으로 생생하게 설교하였던 것이다.51) 루터와 칼빈은 프로테스탄 교회는 말씀 설교를 교회의 생명으로 여겼다.
칼빈의 설교는 루터의 설교와 상이하였다. 장식이나 온화함, 대중적 열변은 덜했지만, 더욱 침착하고, 논리적 일관성이나, 엄정한 해석은 더욱 뛰어 났다. 칼빈 역시 한절 한절 씩 주석을 달았지만, 주제의 통일성에사상의 논리적 일관성이 두드러지게 부각되고 있다.
칼빈은 원고 없이 설교를 하였지만 그의 설교는 사려 깊은 내용이어서 듣는 사람들이 그의 언어를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52)
1.설교말씀과 성령
칼빈은 말씀을 강조한다 신구약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교회는 원초적으로 선포된 말씀의 피조물이다(종개 298)라고 하며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므로 시작되었으며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설교의 말씀은 성령을 통해서 듣는 사람들이 마음에 와 닿아야 함을 강조한다.
“설교를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다. 우리 속에 계시는 스승, 곧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세 길을 열어 주셔야 비로소 설교 말씀이 들린다. ---- 확실히 성령이 그의 놀라운 능력으로 우리의 귀를 열어 주셔야 들리고, 우리의 마음을 조명해 주셔야 이해가 가능하다. ” 라고 말하면 설교자와 회중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였다. 53)
2.기록된 말씀과 성령
칼빈은 성경이 기록될 때에 ‘성령의 조명과 인도’를 받는다고 한다. 칼빈은 성서(기록된 말씀)의 저자가 하나님 혹은 성령이라고 하고, 하나님이 이 성서를 통하여 친히 말씀하신다고 한다. 그래서 성서의 메시지가 파악되려면 성령이 내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54)
성경과 말씀이 성령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역동성이 있음을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이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며, 그의 뜻을 계시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성경은 살아있는 것이 된다.
3. 예수그리스도와 말씀55)
예수그리스도가 신구약 성경의 주제라고 한다. 칼빈은 그의 요한복음 5:39절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이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성경을 죽은 문자처럼 취급하는 사람들이 우매함을 고발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들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이들이 성경에서 생명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이 주어진 목적은 이 생명을 위해서이다.
더욱이 이 구절에 의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 원할 때에는 반드시 이 그리스도를 성경에서 찾아야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 이외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를 옳게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장해야 한다. 고하였다.
예수그리스도에 관하여 칼빈은 우리가 성경에서 우선 무엇을 찾아야 하고 성서의 내용을 어떤 목표를 맞추어야 하나?라는 질문에서 “예수그리스도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목표요 복음의 진수이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목표를 열망해서는 안 된다. 조금이라도 이 목표에서 빗나가면 우리는 길을 잃게 된다.
IV칼빈의 영향력56)
칼빈의 영향력은 제네바 국경 넘어 먼 곳까지 미쳤다.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의 개신교의 인상과 영국의 청교도의 이상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유일하게 국제적인 개혁자 였다는 지칭을 받을 만하였다.
V, 나오는 말
루터와 칼빈은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시대를 바라보는 영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 었다. 그가 그시대을 깨울 수 있는 설교의 힘은 무엇보다도 성경의 말씀의 연구이었다. 성경의 바른 해석을 통하여 시대에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이시대에 설교자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리라 생각한다. 깊은 영감이 넘치는 성경의 연구와 묵상을 통해서 쏟아내는 하나님의 말씀에 힘이 있음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말씀이 흘러 넘치는 이시대에 자료의 홍수시대에 설교하는 설교자들에게 무엇보다도 주님과 만나는 골방훈련이 절실히 필요하리라 본다.
또한 그들은 시대와 청중을 바로 아는 설교자였다. 시대의 부패를 방관 할 수 없었다. 사회를 개혁하고자하는 열정이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명임을 깨달았다. . 직업적인 설교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적인 입장에서 설교하는 열정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시도는 개혁자들의 모습에 많은 도전을 받는다. 이시대의 설교자들이 루터와 칼빈의 열정이 다시 한번 샘솟아 교회의 신선한 바람과 부흥의 불길이 다시 붙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정장복, 인물로본 설교의 역사 상권,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6
이형기, 세계교회사(II), 한국장로교출판사, 1994,
이형기, 종교개혁신학사상,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3
에드윈C, 다아간,저, 김남준역, 설교의 역사(II), 도서출판사 솔로몬, 1995,
세계명설교대전집, 설교대백과사전1433-1742, 성서연구사,1984
1) 이형기, 종교개혁신학사상,(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1993,3쪽
2) 위의책,5쪽
3) 위의책, 6쪽
4) 위의책, 8
5)위의책,9쪽
6) 위의책, 10쪽
7) 위의책, 11쪽
8) 이형기, 세계교회사(II),(한국장로교출판사,1994), 62쪽
9) 위의책, 63쪽
10) 위의책, 64쪽
11) 에드윈C, 다아간저, 김남준역, 설교의 역사(II), (도서출판사솔로몬),116쪽.
12) 위의책, 112
13) 위의책, 113쪽
14) 이형기, 세계교회사(II) (한국장로교출판사,1994), 69쪽
15) 다아간, 앞의책,116쪽
16) 위의책, 12-121
17) 세계명설교대전집,1433-1742,(성서연구사,1984), 27쪽
18) 이형기, 세계교회사(II), (한국장로교출판사,1994), 65쪽
19) 위의책, 66쪽
20) 위의책,73-77쪽
21) 다아간, 위의책 122쪽
22) 다아간, 위의책 125쪽
23) 다아간, 위의책, 126쪽
24) 이형기, 세계교회사(II) (한국장로교출판사,1994) 72쪽
25) 다아간, 위의책, 131쪽
26) 다아간, 위의책, 133쪽.
27) 세계명설교대전집, 위의책, 225쪽
28) 세계명설교전집, 위의책, 226쪽
29) 이형기,종교개혁신학사상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사,1993) 254쪽
30) 세계명설교대전집, 위의책, 227쪽
31) 이형기, 세계교회사(II),위의책, 119쪽
32) 이형기, 위의책, 121쪽
33) 이형기, 종교개혁신학사상, 위의책, 263쪽
34) 이형기, 세계교회사 위의책, 126쪽
35) 이형기, 종교개혁신학사상, 258쪽
36) 세계명설교대전집, 위의책, 229쪽
37) 세계명설교전집, 위의 책, 231쪽
38) 위의책, 232쪽
39) 다아간, 위의책, 218쪽
40) 다아간, 위의책, 219쪽
41) 세계명설교대전집, 위의책, 234쪽
42) 이형기, 종교개혁신학사상, 위의책, 280쪽
43) 다아간, 위의책, 121쪽
44) 명설교대전집, 위의책, 235쪽.
45) 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상권(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사,1996), 223쪽
46) 위의책, 223쪽
47) 명설교대전집, 앞의책, 236쪽
48) 세계명설교대전집, 위의책, 237쪽
49) 세계명설교대전집, 위의책, 237쪽,
50) 세계명설교대전집, 위의책, 239-240쪽
51) 이형기, 종교개혁신학사상, 위의책, 280쪽
52) 다아간, 위의책, 133쪽
53) 이형기, 종교개혁신학사상, 위의책, 298쪽
54) 이형기, 종교개혁신학사상, 위의책, 300쪽
55) 이형기, 종교개혁의신학사상, 위의책, 302쪽
56) 이형기, 세계교회사(II), 위의책, 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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