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쯔빙글리와 낙스

하마사 2006. 9. 16. 16:33

  

종교개혁시대의 설교 II (훌드리히 쯔빙글리, 쟌 낙스)

                                              

            

                                

Ⅰ. 서론

정장복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설교 상황을 “설교의 위기 상황”이라고 규정하면서, 한국강단을 침몰시키는 요소들로 “물량주의적이고 기복적인 교회상황, 설교 도용의 심감성, 설교 준비의 불성실, 텍스트를 떠난 설교의 범람, 설교내용과 설교자의 삶의 괴리현상, 목회의 수단과 방편이 된 설교”1) 등을 들고 있다.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나 설교의 위기, 교회의 위기는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위대한 설교가들 또한 있었다. 스위스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 훌드리히 쯔빙글리와 존 낙스는 타락한 사회와 세속화된 교회로 대표되는 암울했던 16세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며 설교를 회복시켰던 위대한 설교가들이다. 본 연구를 통해 쯔빙글리와 낙스 시대의 위기상황을 진단하고 그들이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고찰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Ⅱ. 본론


A. 울드리히 쯔빙글리


1. 시대적 배경

1517년 10월 7일 저녁-쯔빙글리가 취리히시로 부름 받기 한해 전-취리히 선박회원 조합의 선술집에 한 무리의 사람이 떠들썩하였다. 그 당시의 이런 풍경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용병과 외지에서 온 사람들을 상대로 벌어들인 돈이 있었으므로 사내들은 이 돈으로 술을 마셨고 놀음판을 벌였다. 그런데 이날 저녁 밧줄 제조업자인 한스 괴츠와 병원 담임신부인 한스 클링거 사이에 시비가 벌어져 클링거 신부가 칼을 빼들어 괴츠의 옆구리를 찔러 죽게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2)


쯔빙글리가 사역하던 시대에 스위스는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상황이었으며, 유럽 제국들 가운데 독특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스위스는 독일 또는 이탈리아 편으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소공화국들의 동맹을 통하여 어느 정도의 통일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주들은 “각자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각자를 위해”라는 구호를 모토로 하는 기치 아래 공동 동맹을 맺고 서로 관련을 갖고 있었다. 스위스의 독립정신은 교회문제들에도 적용되었다. 스위스에 있는 교회들은 로마의 교회당국에 의해서보다는 정부 당국에 의하여 통치를 받았다. 스위스 내의 로마 카톨릭교회는 많은 문제들을 지니고 있었다. 부패와 미신이 성직자들 가운데 성행하였다. 예를 들면 면죄부 판매자들이 스위스 전역에 걸쳐서 장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많은 사제들은 그들의 사제직의 의무를 감당할 만한 실력이 없는데다가 부도덕하였다.3) 또한 스위스의 젊은이들은 용병으로 유명했는데, 특히 프랑스와 교황들을 위한 용병이었다. 그러나 자국이 아닌 타국의 전쟁을 위해 용감한 스위스 병사들이 차출되어감으로 인해 국가의 도덕적 부패가 심화되고 있었다.4)


2. 생애5)

쯔빙글리는 독일어 사용권 스위스 개혁자들 가운데 초기의 주도적 인물로서 1484년 1월 1일 빌트하우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 지역의 법집행관이어서 안락한 삶을 영위하였다. 그는 루터(1483. 11. 10)보다 한 살 어렸다. 그는 바젤에서 인문주의자인 비텐바하의 가르침을 즐겨 받았는데, 그는 이 교수에게서 성경의 유일한 권위, 오직 속죄의 대가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으심, 면죄부의 무가치성 등에 대해서 배웠다. 이 같은 교육의 영향으로 쯔빙글리 자기 자신이 기독교 신앙의 최초와 초기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인문주의자가 되었고, 인문주의자들과 함께 당시 가톨릭 교회의 미신들을 비판하였다. 그는 루터처럼 죄에 대한 고민, 복음을 통한 은혜와 신앙에 의한 사죄를 깊이 경험하지 못했다. 그의 종교적 태도는 루터보다 지적이고 도덕적이고 좀더 과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석사학위를 받았던 1506년 글라루스의 교구사제로 임명되었다. 그는 나라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용병제도의 도덕적 악폐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억압으로 1516년 아인지델른의 유명한 순례지성당으로 옮겨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더욱 유명한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1518년 용병반대와 설교자 및 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어 뭔스터 대성당의 고위성직자회의에 의해 취리히시의 목사가 되었다. 그는 1월 1일 사제평의회에서, 그 다음날, 기존예배의 성무일과에 구애됨이 없이 마태복음 강해설교를 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신자들이 예수의 하신 일과 가르침을 직접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 마태복음서를 가지고 시작했다고 하였다. 그는 동일한 방식으로 사도행전, 갈라디아서, 디모데서, 베드로서신, 히브리서 등을 강해하였다. 그는 용병제도를 반대하는 설교를 계속한 결과 취리히시는 결국 1521년 5월에 이 악습을 폐지시켰다. 1522년, 쯔빙글리가 결정적으로 로마교황청과 단교하게 되었던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시민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오직 성경만의 권위를 주장하는 쯔빙글리의 말을 인용하여 사순절 금식을 지키지 않아 감독의 처벌을 받게 되는 상황에서 쯔빙글리는 이들을 옹호하는 설교를 하였고 이 설교를 출판하였다. 그의 주장을 계기로 시참사회는 1523년 1월 29일 취리히에서, 개혁자들과 그 반대자들 간에 문제가 되고 있는 제반 쟁점을 다루는 공식적 대토론회를 개최할 것을 발표하였다. 쯔빙글리는 이 공적인 신학논쟁을 위하여 67개 항목을 준비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복음의 권위가 교회에 달린 것이 아니고, 구원은 신앙에 의해서 일어나고, 미사의 희생 제사적 의미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며, 선행의 구원 조건적 성경해석, 수도원 입원서약의 구속력 및 연옥의 실재를 거부했다.

변혁은 철저히 추진되었다. 미사는 완전히 철폐되었고, 감독의 법적 관할권이 박탈되었고, 예배를 독일어로 드려졌고, 예배의 중심은 설교가 되었고, 가톨릭적 예배 이론과 의식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에서 루터와 쯔빙글리는 15항목 중 14항목에 대해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나 성만찬에 대한 항목 중 오직 그리스도의 임재양태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다.

쯔빙글리는 개혁자들 가운데 정치적 수완이 가장 뛰어나 원대한 계획을 추진시켰으나 열매를 거두지는 못했다. 쯔빙글리는 취리히를 중심으로 스위스 내의 개혁파 주들을 규합하여 크리스천 시민동맹을 결성한다. 이에 대해 보수적 로마카톨릭계 주들은 기독교 연합을 결성하였다. 이 기독교연합은 1531년 10월 11일에 카펠 전투에서 취리히 사람들을 격파하였다. 이때 쯔빙글리도 전사하였다.   

 

3. 쯔빙글리의 신학사상6)

성경관에 있어, 쯔빙글리는 기독교 인문주의자로서 성경에 접근했다. 그가 성경으로 되돌아간 것은 인문주의운동의 특성을 나타내주는 ‘원천으로의 일반적인 되돌아감’이었다. 인문주의자로서 그는 기독교의 참 진리를 재발견하는 길은 성경의 메시지를 발견해서 기독교의 갱신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모기에게 물리는 것까지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해놓았다고 하는데, 이런 그의 섭리론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존속과 안녕을 위해서 계신다는 확신에 대한 재천명일 뿐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 일어난다고 믿는 주장인 것이다. 쯔빙글리는 이러한 시각에서 예정론을 보는데, “예정과 자유의지와 공로의 전반적인 운영은 섭리에 의존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절대적인 예정주의를 제외한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에 침해가 될 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예정론에 근거해서 구원을 행위에 의존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논박하고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이지 인간의 노력의 결과는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쯔빙글링의 율법과 복음이해는 루터와 같지 않다. 그는 율법이 영속적이며 복음과 위배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율법과 복음은 결국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 복음의 기능은 율법을 깨뜨린 결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서 다시금 율법에 복종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성례에 있어 그는 가톨릭주의자, 루터, 재세례파에 반대하여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성례란 징표 혹은 예전으로서, 이것에 의해 자신이 그리스도의 군사 혹은 군사가 되려고 함을 교회에게 증명해 보이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에게 알리기보다는 교회 전체에게 알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칼빈과 후대의 청교도 전통은 전체적으로 볼 때 쯔빙글리와 스위스의 종교개혁의 영향력을 루터에 못지 않게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하겠다. 


4. 쯔빙글리의 설교 세계

 그는 글라우스의 첫 사역에서부터 설교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 가슴 깊이 새겨주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삼았다. 설교의 형식과 방법 면에서 그는 스콜라주의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에 분석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다. 논리의 전개는 인문주의적 요소가 담겨 있으면서도 고전적 설교에 보다 가까웠다. 용어는 이해하기 쉬웠고 명쾌하며 감동적이었다.7)


a. 설교의 특징

쯔빙글리는 설교를 정의하면서 “내가 믿기로 설교는 가장 거룩한 사역이다. 온 민족 속에서 외쳐진 전도자나 감독의 설교사역은 믿음에 의해서 이룩되며 그 믿음은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며,8) 설교의 목적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한 많은 나의 양떼를 피조물에 대한 희망으로부터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과 그를 믿을 경우 결코 죽음이 없을 그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절대적으로 돌이키려는 것”이라고 하였다.9) 일반적으로 종교개혁 활동과 직접 관련지어 바라본 그의 설교의 목적은 회중들을 미신의 세계와 거짓 종교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유롭게 하려는데 있다고 분석되어 왔다.10) 그러면 이제 쯔빙글리의 설교의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쯔빙글리는 원고 없는 설교를 하였으며, 연속설교를 하였다. 그의 원고 없는 설교는 그의 설교형식에서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이 사실은 그가 설교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유롭게 자신의 청중들과 친밀하고도 즉각적인 접촉을 유지하며 일관된 사상의 전개를 추구하기를 원했다. 원고 없는 설교는 본질상 자신의 설교를 생동력 있고 적절하게 하려는 쯔빙글리의 시도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로 그의 방대한 설교 가운데 몇 편 정도만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쯔빙글리의 특징적 설교는 성경의 한 책에 대한 연속 설교였다. 그는 다음 성경책으로 넘어가기 이전에 한 책을 모두 설교하는 것이 관례였다.11) 그가 기존예배의 성무일과의 구애됨이 없이 직접 연쇄적인 마태복음 강해 설교를 시작한 이후로 그는 사도행전 강해, 갈라디아서와 디모데서, 베드로서신서, 히브리서 등을 강해하였다.12)  

둘째, 그의 설교는 성서 중심적이었다. 그는 성서가 믿음과 생활에 관하여 유일한 절대적 권위라는 것을 굳게 믿었으며 로마교회에서 성서와 전승을 동등히 여기는 것을 반대하고 그리스도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올바르고 유일한 권위는 성서뿐임을 확신하였다. 그의 설교는 철저히 성서에 입각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최대의 장점이다. 그는 성령께서 주시는 영감에 의지하여 진리의 원천인 성서로 돌아가고자 무척이나 노력한 설교자였다.13)  

셋째, 그의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적이었다. 쯔빙글리는 1522년 발표한 <Archeteles>에서 그의 그리스도 중심적 사상이 잘 드러난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심어 놓으신 것과는 다른 어떤 식물을 결코 심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심으신 것은 결코 뽑히어져서는 안된다”14)라고 하며, 정장복은 “회중들은 설교자의 설교 표본이 언제나 그리스도임을 깨달을 수 있으며”라고 기술하였다.15)

넷째, 그의 설교는 복음적이며 예언적이었다. 그 당시 만연되고 있었던 재래의 설교가 이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것으로 페리콥이 정해주는 성구일람만을 충실히 답습한데 반해 그는 이 전통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새로운 교회를 위한 개혁적 내용을 담은 설교를 시작했다. 16) 그의 설교에서 발견되는 내용적 특성은 행함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유일하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 것이 강조된 신앙정신이다. 성자숭배와 미신적 행위를 철저히 금하고 숭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한다고 외친 그의 선포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복음적 바탕 위에 건설된 예언적 설교의 모범으로 손꼽힌다.17) 쯔빙글리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불링거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은 모든 이들의 유일한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는 불신, 미신, 위선적 대화를 공격하였다. 그는 기독교적 사랑과 신뢰뿐만 아니라 회개 즉 생활의 개혁을 강력하게 촉진시켰다”18)라고 한다. 


b. 성경해석과 성령이해

쯔빙글리의 설교 사역에서 성령의 역할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며, 그의 성경해석은 성령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그는 기존의 주석을 버리고 성서로 돌아가서 열심히 연구하고 깊이 명상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인도하시어 이해에 다다를 것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런 믿음대로 펜을 잡기보다는 깊은 명상에 잠겨 대부분의 설교준비시간을 보내었으며, 성서강해에 들어가 6년만에 신약 전부를 설교하였던 것이다.19) 그는 성령께서 주시는 영감에 의지하여 진리의 원천인 성서로 돌아가고자 무척이나 노력한 설교자였다.


c. 수사학적 기교

쯔빙글리는 설교에 있어서 연극조의, 그리고 대단히 수사적인 기법을 사용하는 것을 삼갔다. 그는 자신의 생도들에게 과장된 몸짓을 피할 것과 너무 빠르게도 느리게도 설교하지 말 것과 크게도 작게도 하지 말 것을 충고하였다. 그의 설교는 지리한 주해나 훈계는 결코 아니었다. 그의 설교에는 그의 인품과 유우머가 상당히 반영되었다. 카논 호프만은 쯔빙글리의 설교들이 진지함이 없다고 불평하기까지 하였다. 대성당에서 거룩한 웃음이 울려 퍼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20)


d. 청중에 대한 이해

청중과의 긴밀하고 친밀한 교통을 위해 원고 없이 설교하였다는 사실과, 유우머의 사용을 통해 청중들에게 거룩한 웃음을 선사하였다는 사실에서, 그가 청중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청중들은 그의 설교 듣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21) 


e. 설교의 분석을 통한 쯔빙글리의 설교이해

쯔빙글리의 몇 편의 설교 중 “선을 행함에 있어서의 확고함과 인내에 관하여”를 읽고 분석하였다. 

첫째, 성서를 많이 인용하고 있다. 모두 9곳의 성서본문을 인용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10:22)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예언자 에스겔을 통해서도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겔3:20)라고 가르치십니다.22)


둘째, 성서의 인물과 고대인물의 예를 들어 인내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주님 예수님께서도 말씀과 행동으로써 견인의 모범을 보여주시고 또 가르쳐주셨습니다.....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견인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모세만큼 견인의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묵묵히 백성들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모세의 침착한 의지를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14년 동안이나 떠돌이 생활을 했으며 헤브론에서 잠시 몇 년의 통치를 제외하고는 데대로 통치도 못했습니다....그렇게 함으로서 우리에게 견인의 좋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저 로마 사람 코넬리우스 스키피오는.......죽을 때까지 이러한 견인을 나타냈습니다.23)

     

셋째, 적대자의 논리를 먼저 제시한 후 이를 반박하고 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때맞지 않게 현명한 체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들은 “먼저 마음 속에 있는 우상을 제해 버리고, 그리고 나서 눈앞에 잇는 우상을 없애야 한다”고 외쳐댑니다. 이들은 절반은 옳습니다...............한편,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는 많은 대적자들이 있습니다........그러므로 그들이 그들 자신의 힘을 믿고 있는 한 우리는 언제나 승리할 수 있습니다.........이제 어떤 사람은 우리 조상 가운데 우리로 잘못을 범하게 한 사람이 없으므로 견인이 쉽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은총과 권능으로 모든 일이 선한 목적으로 인도되지 않는 일을 본적이 없습니다.24)


넷째, 권유체(-합시다, -바랍니다)를 사용하고 있다.


“.....깨닫으시기 바랍니다......분을 삼가십시오........귀를 기울이십시오..........자유 안에서 끝까지 견인합시다.........종의 멍에에 굴종시키지 맙시다........우리의 진정한 구속과 자유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25)


다섯째, 기도문 형식으로 설교를 마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참된 우정을 또한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 우리 뿐아니라 그들에게도 같은 은혜를 허락하소서! 아멘.”26)


f. 역사적 의의

다아간에 의하면 “설교가로서 쯔빙글리는 역사상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그의 사역은 설교가 중심이었고, 주로 설교에 의해 사람들을 얻고 지켰으며 개혁을 성취하였다”고 한다.27) 또한 그가 시도한 설교의 방법은 인류의 역사에 있어 가히 새롭고 혁명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생명을 상실한 일체의 의식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그 시기에 가장 필요하고 적절한 말씀을 선포한 개혁내용은, 오는 세대에 설교중심의 예배를 이루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가져왔다. 그로 인한 예전의 경시 사상이 개신교를 점유해버린 역사적인 책임은 쯔빙글리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기록임에 틀림없다. 분명 쯔빙글리는 중세의 형식적인 미사를 통하여 잃어버리고 있었던 말씀의 선포를 본래의 자리로 환원시켜 새로운 생명의 양식으로 수많은 영혼들을 일깨우려 전생을 바친 설교자이다. 지상의 교회들이 설교중심의 예배를 드리게 되는 길을 갈고 닦았던 신념에 찬 그 업적은 현저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28)         

B. 쟌 낙스


1. 시대적 배경29)

16세기의 사회는 변화와 확장을 거듭하고 있었으며, 혁명적인 성격까지도 지니고 있었다. 구 시대의 중세 봉건적 사고방식은 지식층 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반인, 상인, 공인 등 중산층에 의해 폐기되어가고 있었다. 이미 15세기에 개시되었던 상업, 공업, 정치적 사회조직 등의 진보와 개발은 낙스의 생애 전체를 통해 더욱 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대의 몇 가지 특징을 보면, 첫째 경제적 변화이다. 인구의 증가는 상품과 용역에 대한 수요를 급격히 증가시켰고, 그 결과 공업, 상업, 인플레 등이 확장되었다. 둘째, 부유한 유산계급들(bourgeoisie)이 상업의 증가, 공산품의 증가, 금융의 팽창 등을 힘입어 유럽사회에서 새로운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셋째, 도시생활의 발전이다. 인간 생활의 중심이 성과 궁정에서 주요 도시지역으로 옮겨진 것으로, 이는 즉 도시 거주민들이 이전 보다 사상, 행동방식 등에 더욱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넷째, 로마카톨릭 교회의 쇠퇴이다. 로마교회는 사상과 행실에 매우 보수적이고 경직된 경향을 보임으로써 점차 많은 사람들, 특히 도시의 신흥 유산계급들로부터 신망을 잃게 되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게 되었다.

스코틀랜드는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하였으나 이 모든 움직임과 변화에 관련을 맺고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주요한 위치에 놓여있지 못할 뿐 아니라, 이렇다할 자연자원도 지니지 못한 경제적으로 빈궁했던 왕국 스코틀랜드는 16세기에도 위대한 번영을 누리지 못했다. 스코틀랜드의 산업은 상대적으로 소규모적이요, 낙후된 상태여서 거의 모든 공산품은 대륙으로부터 수입되었다. 그러나 그런 공업적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16세기에는 상업에 종사하는 시민들이 점차 성숙하기 시작했다.

당시 교회의 상황은 도덕적으로 부패했고 성직자들은 세속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직자의 세속성보다도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자들이 민중들, 특히 교육받은 이들에게 필요한 영적 갈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스코틀랜드에는 1000개의 교회가 있었으나 이들 가운데 900개 이상이 수도원, 대성당, 대학에 부속된 교회로서 수입만 거둬들였을 뿐, 영혼을 구제하고 돌보는 목회는 별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영양실조에 빠져있는 대목들에게 맡기고 있었다.  


2. 생애30)

존 낙스는 1513(혹은 1505)년 에딘버러 부근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일찍이 사제 서품을 받았으나 1543년 경험한 영적 각성으로 말미암아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오류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복음주의적이고 개혁적인 교회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지니고 있던 그에게 설교자 위샤트가 화형 당한 일은 커다란 분노와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그는 로마교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사가 되어 그 무리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안드레성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에 잡혀 군함의 노를 젓는 노예로 끌려가게 된다. 그러나 머지 않아 그는 해방되었고 고국에서의 목회길이 열렸다. 그러나 카톨릭 정권의 득세로 개혁의 터전을 상실하고 유럽 땅을 전전하게 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낙스는 개혁의 제2의 본산지가 된 제네바에서 장래 개혁자로서의 발판을 다지어간다. 그는 칼빈의 제자가 되어 영어성경의 제네바 판의 출판을 위해 노력하면서 심오한 사상과 신학을 습득한다. 1559년 낙스는 스코틀랜드에 돌아와 프로테스탄트의 세력을 규합하였다. 이내 백성의 동조를 얻게 되자 프랑스가 당황하여 침공해 왔고 이에 맞서 영국이 낙스 편에서 원조했다. 이 국가적 시련을 이기고 그는 당당히 승리하였다. 낙스가 이끄는 개신교세력에 의해 1567년 메리 여왕은 결국 제거되고 스코틀랜드는 확고한 정치적 독립을 쟁취했으며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의 장로교가 최초로 그곳에서 조성되고 세계로 확산된 장로교의 고장이 되었다. 그러나 낙스 그의 눈물어린 정성의 결실들이 서서히 나타날 무렵인 1570년에 중풍에 걸리고 말았고, 1572년 11월 24일 에든버러에서 투병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3. 설교의 세계

a. 설교자 낙스

다른 유명한 종교 개혁자들에 비교해 볼 때 잔 낙스의 설교는 극히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그의 설교는 단 두 편에 불과하다. 그러나 낙스는 자신이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설교자임을 분명히 단언하였으며, 그 어떠한 것보다도 설교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고 여기에 전념하였다.31) 낙스는 설교가로서의 소명감이 분명하였다. 그는 스스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두 사람의 선지자 예레미야와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임무를 받은 것과 똑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시온산으로부터 나팔을 불어 사람들을 회개하고 믿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이자 주관자로 받아들이게 할 작정이었다. 이리하여 바로 이 “나팔수의 주제”는 그의 사상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32)

설교자로서의 낙스는 사명에 대한 두려움과 기쁨이 공존하고 있었다. 


“말씀 전달자의 사역이란 가장 존엄한 일이며 가장 골치 아프고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목사로, 설교자로 위임받은 사람들은 만일 양들을 전심전력으로 먹이지 않고 원수가 다가오는데도 경고하거나 훈계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교리적으로 말씀을 올바로 구분하지 않는다면, 이들 음식과 훈계와 교리가 부족하여 멸망 당한 자들의 피와 영혼이 부르짖어 원망할 것입니다.33)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을 가장 즐거운 마음으로 수행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나는 나를 귀족과 같은 주교로 세우시지 않으시고 그의 복음을 선포하는 고난의 종으로 세워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할 뿐입니다.34)


그는 고난의 설교자였다. 많은 설교자들이 고난을 두려워하고 설교를 가볍게 생각하는데 반해 그는 오직 설교만을 두려워하였다.35) 낙스는 복수를 맹세하는 메리 여왕의 앞에서 그의 설교의지를 꺽지 않았다. “그러나 제가 저 자신의 주인은 아닙니다. 저는 솔직하게 이야기하라고 명하시며 또한 땅에 사는 육체 앞에서 아첨의 말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36) 이처럼 낙스는 죽는 날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온 힘을 다기울였다. 레젠트 모턴은 낙스의 장례식 때에 “여기 사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가 잠들었노라”고 하였던 것이다. 37)


b. 설교의 특징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의 설교들을 자세히 고찰해 볼 때 우리는 그가 매우 조직적으로 잘 짜여진 설교를 행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비록 즉흥적인 방식으로 본문의 내용을 구분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설교의 형태는 그가 본문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행하고 이를 매우 조직적으로 구성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때로 산만하기까지 한 그의 논조의 임의적인 성격은 낙스가 때때로 자신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 설교의 내용을 전환시키기도 했었다는 사실을 예시해 주고 있다.38) 1571년 안드레 성의 한 생도로서 낙스의 설교를 모두 들었던 제임스 멜빌의 일기를 통해 그의 설교의 구조를 알 수 있다.


나는 그곳에서 그 해 여름과 겨울 동안 내내 그가 다니엘서를 강해하는 것을 들었다........그는 성경을 펴고 반 시간 가량 온건한 태도로 본문의 내용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강해한 내용을 실생활에 적용시키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너무나도 큰 감명을 받고 두려움에 떨려서 아무 것도 기록할 수가 없었다.39)


이를 종합해 볼 때 그의 설교는 충실한 본문강해로 시작되며 적용의 단계에 이르러 예언적 내용을 담은 구성을 골격으로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40)

위에서 말하였듯이, 낙스의 설교는 예언적이었다. 그의 설교를 가장 두려워하는 무리들은 종교 정치의 정상을 차지하고 있던 타락한 권력층이었다. 예언적 설교가 계속될 경우 군대를 동원하여 화형에 처할 것이라는 위협을 공공연히 가했던 대주교가 있었는가 하면 여왕과 귀족들의 노골적인 반감이 그를 협공해 왔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낙스의 설교에서는 칼빈주의적 설교의 전통인 주석적인 요소와 예언적 요소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41)


c. 설교문 분석을 통한 낙스의 설교이해

낙스의 설교 중  “그리스도의 첫 번째 시험”을 읽고 분석하고자 한다. 첫째, 낙스는 설교의 주제를 먼저 말한 후, 그 주제를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상세하게 설명한다.


시험을 잘 알고, 이해하고 또 잘 기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 라 고찰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시험의 의미는 무엇이며 성서에서는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둘째, 누가 시험을 받았으며 언제 이 시험이 있었는가? 셋째,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그리스도는 시험을 받았는가? 넷째, 왜 그리스도는 시험을 받으셔야 했는가? 그리고 시험의 결과 얻어진 열매는 무엇인가?42)


둘째, 낙스는 성서에 언급된 사건들을 예화로 사용하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그런 뜻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던 일이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셨다는 경우에는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어느 누가 욥이 그렇게도 많은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한 마다도 안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그것은 사단이 에덴동산에서 여인을 시험할 때나 다윗의 음행사건 같은 경우입니다. 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각종 방법으로 질문하고 괴롭힐 때입니다.43)


셋째, 낙스는 설교에서 상상력을 활용한다.


사단은 예수에게 말하기를 “너도 공중에서 들린 음성을 들었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가 너를 인 하 여 기뻐한다고’ 그러나 너 예수야, 이와 같은 헛된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미친 짓이야. 아니 골빈 바보같단 말이야. 너를 사랑한다고! 그러면 사랑의 표적은 어디있니? 너는 지금 모든 피조물이 누리는 안락함도 없지 않니? 너는 지금 야생동물보다 못하단 말이야....... .44)


d. 역사적 의의

역사적으로 낙스의 위업은 칼빈과 비교되어 일컬어지고 있다. 신학적으로 칼빈이 장로교회의 기초을 쌓아올린 사람이라면, 교단을 형성하고 행정의 내용과 방향을 확립시켜 멜빌과 같은 후계자들이 스코틀랜드에 장로교를 정착하게 했던 주역은 낙스였다. 칼빈과 낙스는 장로교의 신학과 조직이라는 면에서 지극히 동반자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역시 설교의 사역에 있어서도 뜻깊은 연관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칼빈이 하나님 말씀 중심의 설교 기반을 다져 그 근본을 철저히 해놓았다면 낙스는 자신의 고난을 통해 말씀의 선포 영역을 확대시킨 점을 높이 살 수 있다.45)


Ⅲ. 결론

(오늘의 설교자에게 주는 교훈)

지금까지 두 종교개혁자의 설교를 고찰해 보았다. 이들은 암울했던 위기의 시대를 살면서 목숨을 걸고 설교를 회복시켰고, 또한 그 설교를 통해 교회를 새롭게 하였다. 그러면 이들의 설교가 오늘의 설교가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첫째, 우리가 종교개혁자 쯔빙글리와 낙스의 설교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모두 성서적이요 복음적인 설교가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음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그들은 그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들의 생명을 걸었던 것이다.

둘째, 이들은 공히 설교가 그들 사역의 중심이었다. 종교개혁이라는 힘든 과정을 설교로 시작하여 설교로 마쳤던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였던 쯔빙글리는 설교 중심의 예배를 확립하였고, 하나님의 나팔 존 낙스는 설교를 위해 저술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비록 불가피하게 무력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사역의 중심은 설교였고, 그것이 종교개혁의 힘이 되었다. 오늘 교회 목회에서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고 모두 중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두 개혁자는 하나님의 말씀 사역, 즉 설교가 모든 목회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오늘도 역설하고 있는 듯 하다.  

셋째, 이들은(특히 낙스의 경우) 설교가로서의 소명이 분명하였고, 말씀사역에 대한 사명감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세상권력이 그의 설교권을 위협할 때, 조금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종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였다. 또한 낙스는 설교자로서의 두려움과 기쁨의 긴장 가운데 거하면서 늘 깨어 그 부르심에 충성하였다. 21세기에 말씀의 사역자로 부름받은 오늘의 설교가에게 이런 분명한 소명감, 불타는 사명감, 설교자로서의 두려움과 기쁨의 긴장이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참고도서


이형기, 『세계교회사(II)』.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정장복, 『설교학서설』.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2.

정장복, 『설교의 역사(중)』. 서울: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88.

Dargan Edwin Charles, A History of Preaching, Vol. 2, 김남준 역, 『설교의 역사(II)』. 서울: 솔로몬, 1995.

Fant E. Clyde, Jr & Pinson M. William Jr., 20 Centuries Of Great Preaching An Encyclopedia of Preaching, Vol. II (LUTHER to Massillon 1483-1742) (Waco, Texas: Word Books, 1971), 신문구 역, 『세계명설교대전집 제2권』. 서울: 성서연구사, 1986.

Gonzalez L. Justo,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Vol III, 이형기, 차종순 역, 『기독교사상사(III)』.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88.

 Reid W. Stanford, Trumpeter of God, 서영일 역, 『존 낙스의 생애와 사상』.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4.

Widmer Sigmund, Herausgegeben vom Kirchenrat der evangelish-refomierten Landes kirrche des kautons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zürich, 1984), 한국기독교장로회신학연구소 편집부 역, 『개혁교회의 창시자 쯔빙글리』. 서울: 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1993.


1) 정장복, 『설교학서설』(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2), 21-38쪽.


 

2)  Sigmund Widmer, Herausgegeben vom Kirchenrat der evangelish-refomierten Landes kirrche des kautons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zürich, 1984), 한국기독교장로회신학연구소 편집부 역, 『개혁교회의 창시자 쯔빙글리』 (서울: 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1993), 11쪽.


 

3) Clyde E. Fant, Jr & William M. Pinson, Jr., 20 Centuries Of Great Preaching An Encyclopedia of Preaching, Vol. II (LUTHER to Massillon 1483-1742) (Waco, Texas: Word Books, 1971), 신문구 역, 『세계명설교대전집 제2권』(서울: 성서연구사, 1986), 144쪽


 

4) Edwin Charles Dargan, A History of Preaching, Vol. 2, 김남준 역, 『설교의 역사(II)』(서울: 솔로몬, 1995), 158쪽.


 

5) 이형기, 『세계교회사(II)』(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110-114쪽.


 

6) Justo L. Gonzalez,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Vol III, 이형기, 차종순 역, 『기독교사상사(III)』(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88), 102-118쪽.


 

7) 다아간, 『설교의 역사(II)』, 169쪽.


 

8) 정장복, 『설교의 역사(중)』(서울: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86) 195쪽.


 

9) Fant, & Pinson, 『세계명설교대전집 제2권』, 159쪽.


 

10) 위의책, 155쪽.


 

11) 위의책, 153-54쪽.


 

12) 다아간, 『설교의 역사(II)』, 164쪽.


 

13) 정장복, 『설교의 역사(중)』, 193쪽.


 

14) Fant, & Pinson, 『세계명설교대전집 제2권』,157쪽.


 

15) 정장복, 『설교의 역사(중)』, 202쪽.


 

16) 위의책, 193쪽.


 

17) 위의책, 194쪽.


 

18) Fant, & Pinson, 『세계명설교대전집 제2권』,155쪽.


 

19) 정장복, 『설교의 역사(중)』,193쪽.


 

20) Fant, & Pinson, 『세계명설교대전집 제2권』, 154쪽.


 

21) 다아간, 『설교의 역사(II)』, 169쪽.


 

22) Fant, & Pinson, 『세계명설교대전집 제2권』, 160-62쪽.


 

23) 위의책, 160-62쪽.


 

24) 위의책, 163-64쪽.


 

25) 위의책, 160-66쪽.


 

26) 위의책, 166쪽.


 

27) 다아간, 『설교의 역사(II)』, 169쪽.


 

28) 정장복, 『설교의 역사(중)』, 203쪽.


 

29) W. Stanford Reid, Trumpeter of God, 서영일 역, 『존 낙스의 생애와 사상』(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4), 11-21쪽.


 

30) 정장복, 『설교의 역사(중)』,228-30쪽.


 

31) Fant, & Pinson, 『세계명설교대전집 제2권』, 309-10쪽.


 

32) W. Stanford Reid, 『존 낙스의 생애와 사상』, 3쪽.


 

33) 정장복, 『설교의 역사(중)』, 240쪽.


 

34) Fant, & Pinson, 『세계명설교대전집 제2권』, 319쪽.


 

35) 정장복, 『설교의 역사(중)』, 253쪽.


 

36) 다아간, 『설교의 역사(II)』, 319쪽.


 

37) Fant, & Pinson, 『세계명설교대전집 제2권』, 319쪽.


 

38) 위의책, 318쪽.


 

39) 위의책, 319쪽.


 

40) 정장복, 『설교의 역사(중)』, 232쪽.


 

41) 위의책, 232-33쪽.


 

42) Fant, & Pinson, 『세계명설교대전집 제2권』, 321쪽.


 

43) 위의책, 321-22쪽.


 

44) 위의책, 333쪽.


 

45) 정장복, 『설교의 역사(중)』, 253쪽.


 

발제에 대한 논찬

 

 


먼저 발제자의 수고에 감사를 드린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목회현장에서 사역을 감당하며 학업을 계속이어 간다는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아래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혹이나 목회와 학업 둘 다 제대로 못하는 샌드위치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보완하며 더 나은 사역을 위한 준비의 과정이라 믿으며 나아가게 하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발제자는 이런 어려운 여건가운데서도 성실히 준비한 흔적이 역력하다. 좋은 글을 통하여 많은 도움을 준 발제자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며 몇 가지 부분에 대하여 응답을 하고자 한다.

쯔빙글리와 낙스 두 인물을 다루면서 시대적 배경을 먼저 기술한 것은 좋은 점이라 하겠다. 시대적 배경을 언급함으로서 두 인물이 종교개혁자로서 그리고 설교가로서 그 시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이유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생애와 사상을 언급한 후 설교의 세계로 나아간 것과 설교문을 직접 분석하여 그의 설교를 이해하려한 측면 그리고 역사적 의의를 발견하고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찾으려 노력한 것은 대단히 좋은 점이라 할 수 있겠다.


Agreement

쯔빙글리의 설교 특징을 네 가지로 언급하였는데(4-6쪽) 중요한 부분을 정확히 지적하면서 분류하였다고 생각한다. 발제자의 지적대로 그는 주로 원고없는 설교와 연속설교를 했으며 성경과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 그리고 복음적이고 예언적인 설교를 했다.

쯔빙글리의 설교를 몇 편 가지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그가 원고없는 설교를 했기 때문이며, 둘째는 칼빈이 했던 것 같은 속기사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쯔빙글리가 원고없이 하는 설교는 그의 설교 스타일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한가지 요소이었다. 이 말은 그가 준비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럽게 청중들과 친근하게 접근하고 싶기 때문이요 설교를 생동력있고 친근감있게 하려는 의도였다. 쯔빙글리는 펜을 들고 앉아서 설교를 준비하기 보다 명상을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하며 설교를 준비하였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그의 설교들은 설교 후에 기억하여 기록한 것과 대부분 원본 설교를 확대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설교가 많이 출판되지 못한 이유이다.

비록 쯔빙글리의 모든 설교가 본질적으로 성경적이라 할지라도, 두 가지 카테고리에 속한다. 그의 설교의 한가지 특성은 성경을 따라 계속 시리즈로 설교하는 것이었다. 성경을 하나씩 하나씩 직접 설교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특별히 보통 사람들이 쯔빙글리의 복음적인 설교를 들으려고 모여 들고 있었다. 그는 설교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했고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즉 유일한 구세주를 믿어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불신앙, 미신, 그리고 위선적인 말을 공격했다. 그는 크리스찬의 사랑과 믿음뿐만 아니라 회개와 삶의 개혁을 생동력있게 촉구했다.1)

또한 쯔빙글리의 성경해석과 성경이해에 대하여 성령의 역할을 중요시(6쪽)했다고 했는데 바른 지적이라 하겠다.

쯔빙글리가 쥬리히2) 사람들에게 했던 설교에 대해 마이코니우스가 받아들이는 면에서 이렇게 평가하였다.


“쯔빙글리는 가기 자신이 주석가로 입증되지 않을 것을 알고 결코 인간이성에 따라서 설교하려 하지 않았으며 성령의 뜻에 따라서 했다. 성경구절들을 열심히 대조하고 또한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기도함으로 자신이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의식하였다.”


그는 더 이상 그 날 주어진 본문에 의해서만 설교하거나 인간이 만든 주석의 빛 아래에서만 해석하지는 않았다. 그는 성령의 감동 위에서 참된 원천이 되는 성경으로 돌아갔으며 기본적인 주석들을 옆으로 밀어 놓았다.3)

그리고 낙스의 설교는 예언적이었으며 그의 설교를 두려워하는 무리들은 종교정치의 정상을 차지하고 있던 타락한 권력층이었다고 했는데(11쪽) 그의 설교 “그리스도의 첫 번째 시험”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교황청은 꿈과 환상에 사로잡혀 그리스도께서 40일동안 금식하셨다는 말씀가운데서 취해야 할 참되고 유익한 뜻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즉 왜 그리스도께서 40일동안 금식하셨는지를 파악해야 하는데, 이 내용을 알려고는 하지 않고 순수한 신도들의 마음에 미신을 집어넣어 타락시키고, 이 미신적인 요소들이 하나님의 지혜인양 가르치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적인 자만에 빠져있는 자들을 징계하실 것이며, 인간적인 지혜를 찬양하는 무리들의 지혜를 뒤엎을 것입니다.4)


낙스는 성서에 언급된 사건들을 예화로 사용하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고 했는데(12쪽), 구체적으로 성경의 사건과 인물들을 많이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한편의 설교문에 기록된 인물들은 아브라함, 욥, 하와, 다윗, 기드온, 솔로몬, 바울, 모세, 엘리야, 아벨, 가인, 요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자그마치 15명의 이름을 기술하면서 함께 사건까지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5)

발제자는 지면의 제한으로 인하여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생략한 부분들이 있는 듯 한데 발제자가 다루지 않은 몇 가지 점을 보충하여 보겠다.

먼저 쯔빙글리의 생애(2쪽)에서 그는 학생시절 음악가로서 연주와 노래를 잘 했으며 미술을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종교개혁가로서 투사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 있으나 정서적이고 섬세한 그의 일면을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그는 독서와 학문을 좋아했으나 스콜라적 은둔자가 결코 아니었으며, 또한 성무수행시의 사교적, 실무적 분주함으로 인해 학문연구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는 많은 책을 쌓아 놓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의 모든 연구의 왕좌와 핵은 성경이었다. 1531년에는 신약성서의 원문으로부터 직접적인 성경지식을 얻기 위해서 독학으로 헬라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성경연구의 당연한 결과로서 그의 설교에서 성경이 주제가 되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목회적, 사교적 생활에서도 적극적이었다. 천성이 쾌활하고 사교성이 있었던 그는 쉽게 친구를 사귀고 그 관계를 지속했다고 한다.6)

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에서 루터와 쯔빙글리 사이의 성만찬에 대한 의견차이(3쪽)가 좁혀지지 않아 결국 종교개혁의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 부분에 대하여 쯔빙글리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쯔빙글리는 자신의 견해가 건전하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함께 로마 당국과 싸울 수 있다면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양자의 논쟁은 일치점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으나, 쯔빙글리는 눈물겨운 형제애의 손길을 내밀며 성경을 받아들이고 카톨릭에 대항하는데 하나가 되었다면, 신학적으로는 중요하나 실제로는 부수족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에 서로의 견해차가 있을 뿐이라는데 인식을 같이 할 것을 희망하였다. 반면에 루터는 그와 같은 타협은 진리를 배반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포용성이 넓은 쯔빙글리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이는 가장 불행한 사건이었으나 루터보다 뛰어난 쯔빙글리의 미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7)

쯔빙글리의 설교세계(4쪽)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설하고 싶어했고 고대의 두 설교대가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을 자기의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8)

또한 그는 키가 크고 강건한 외모, 밝은 얼굴과 상냥한 태도를 지녔으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진실한 설교가에게 공통적인 사람을 끄는 힘을 지니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듣는 것을 좋아했고, 그의 말씀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9)

삶으로서도 그는 설교자의 모범을 보였는데, 1519년 흑사병이 쥬리히에 발생하여 무섭게 창궐하고 있을 때 쯔빙글리는 그곳에 없었으나 즉시 복귀하여 죽음과 맞서 싸우면서 헌신적으로 목사의 의무를 다했다. 친구들과 함께 생활했던 동생 앤드류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중병은 쯔빙글리의 영적인 삶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 위기의 시련기에 그가 보여준 용감하고도 헌신적인 봉사는 더욱 더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하였다.10)

낙스의 생애에서 그의 출생연대를 1513년(혹은 1505년)으로 잡고 있는데(9쪽) 그의 출생연도는 정확하지 않음으로 각주에 이에 관한 언급이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11)


낙스의 설교문 분석을 통하여 낙스의 설교를 이해하려 한 점(11쪽)은 대단히 좋은데 들어가면서 그의 설교문이 선포의 기록이 아니라 글월의 형식으로 문어체위주의 스타일임을 언급했으면 이해에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12)


Question

1. 쯔빙글리의 율법과 복음이해는 루터와 같지 않다고 했는데(4쪽)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2. 쯔빙글리는 원고없는 설교를 통해 자유롭게 자신의 청중들과 친밀하고도 즉각적인 접촉을 유지하며 일관된 사상의 전개를 추구하기를 원했다고 했는데(5쪽) 그러면 원고가 있으면 이런 부분들은 약화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일관된 사상의 전개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원고가 있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이 아닌지?

3. 쯔빙글리는 그가 설교한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일면을 볼 수 있는데, 앞에 언급했던 흑사병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그의 정치적인 이유도 내포되어 있지만 종교개혁을 주장하며 설교했던 그가 카톨릭과의 카펠전투에서 불가피한 패배를 예견하였지만 개혁편에 가담하여 싸우다가 칼을 손에 쥔 채로 쓰러져 죽은 것을 통해 그를 행동하는 설교자로 보고싶은데 바른 이해인지?



Suggestion

쯔빙글리가 깊은 명상을 통해 설교를 준비했던 것처럼(6쪽) 오늘의 설교자들에게도 성령을 의지하며 성경본문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는 태도를 교훈으로 첨가하면 어떨까?

쯔빙글리를 통해 설교자로서 학문연구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노력한 점과 성경연구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던 점(응답지, 2쪽)을 오늘의 설교자들에게 주는 교훈으로 첨가했으면 어떨지?

낙스가 청중의 언어로 설교하려고 노력하는 점을 통해 청중에 대한 배려를 하고 있다고 보는데 이것이 바른 견해라면13) 오늘의 설교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청중의 언어로 전달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낙스가 성경해석에 있어 본문에 충실하려 한 점14) 또한 좋은 교훈이 아닐까?


모두에게 유익한 좋은 발제를 해준 발제자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참고문헌


사무엘 최, “쯔빙글리 역사를 움직인 설교가,” 『현대종교』 137호 (1985. 4.)

정장목,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상권)』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1.

Dargan Edwin Charles, A History of Preaching, Vol.2, 김남준 역, 『설교의 역사(Ⅱ)』 서울: 솔로몬, 1995.

Yngve Brillioth, A Brief History of Preaching, 홍정수 역, 『설교사』 서울: 신망애출판사, 1987.

이형기, 『세계교회사(Ⅱ)』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1) 사무엘 최, “쯔빙글리 역사를 움직인 설교가,” 『현대종교』 137호 (1985. 4.): 205-06쪽.


2) 이후에 나오는 지명은 쥬리히로 통일하여 쓴다.


3) 위의책, 207-08쪽.


4) 정장목,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상권)』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1), 239쪽.


5) 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상권)』, 234-53쪽에 기록된 낙스의 설교문 “그리스도의 첫 번째 시험”을 읽고 정리.


6) Edwin Charles Dargan, A History of Preaching, Vol.2, 김남준 역, 『설교의 역사(Ⅱ)』 (서울: 솔로몬, 1995), 160-161쪽. 요약.


7) 위의책, 167-68쪽.


8) Yngve Brillioth, A Brief History of Preaching, 홍정수 역, 『설교사』 (서울: 신망애출판사, 1987), 224쪽.


9) Dargan, 『설교의 역사(Ⅱ)』, 169쪽. 정장복은 그의 책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상권)』 (서울: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91), 194쪽에서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설교자로서의 쯔빙글리에게 끝까지 따라다녔던 약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과감한 개혁적 설교를 단행해야 하는 선포자로서는 목소리가 연약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회중들은 그 불충분한 전달효과에도 불구하고 약 1시간에 이르는 그의 설교를 숙연히 경청하였다.”


10) 위의책, 164쪽.


11) Dargan, 『설교의 역사(Ⅱ)』, 310쪽. “존 녹스는 하딩톤(Haddington)근처의 동 로디안(East Lothian)주에서 중류층 가정의 존경할만한 부모 아래서 1505년에 출생하였다.” 또한 이형기도 『세계교회사(Ⅱ)』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132쪽에서 “녹스는 1505-1515년 사이에 헤딩톤 근처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12) 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상권)』, 233-34쪽. “이 설교의 말미를 통해 느낄 수 있는대로 본 설교문은 강단을 통해 외쳐진 선포의 기록이 아니라 낙스가 그으 청중들에게 정중히 써서 보내는 글월의 형식을 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설교는 낙스 특유의 불같은 힘의 발현보다는 정중하고 격조높은 분위기를 앞세운 문어체위주의 스타일을 보여준 것이 특징이다.”


13) 위의책, 249쪽. "여러분께서 그리스도께서 대답하신 내용을 보다 더 잘 이해하실 수 있도록 그 뜻을 다시 한번 자세히 해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4) 위의책, 245쪽. “나는 본문에 대한 해석을 성서에서 말하는 그대로 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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