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관련자료/신학자료

로이드존스, 본훼퍼

하마사 2006. 9. 16. 16:27

 

  Ⅰ. 들어가면서

   한사람의 목회자에게 있어 그가 가져야 할 많은 덕목이나 자질 중에서도 꼭 있어야 할 것이 있다면 덕목으로 본다면 정직함과 신실함이요, 자질로 본다면 설교의 능력이 아닌가 한다. ‘정직함과 신실함을 갖춘 능력있는 설교자’ 이것의 주의 종의 길을 가려는 많은 신학생들이나 현재의 목회자들이 생각하고 꿈꾸며 고민하는 명제가 아닌가 싶다. 현재 목회의 길을 걷고 있는 나 역시도 언제나 이것이 바라는 바요, 이루어야 할 끊임없는 고민의 명제임을 밝히고 싶다.

   그런데 이러한 설교의 능력과 정직함을 갖춘 두 사람의 설교자이면서 목회자를 대하게 된다. 한 사람은 영국이 낳은 위대한 설교자인 로이드 죤스목사이며 또 한사람은 나치의 죽음의 위협앞에서도 조국 독일의 신앙의 수호를 위해 조국으로 달려가 독일 자유교회의 강단을 지키며 결국 감옥에서 장엄한 죽음을 맞이한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이다. 

   일생을 하나님의 단을 지키며 살아야 할 그리고 많은 성도들의 눈과 입에 오르내리게 될 이 땅의 수 많은 목회자의 모습속에 정말 깊이 아로새겨져할 두 명의 거인의 일생을 비록 충분하지는 않지만 흉내라도 내는 심정으로 이 작은 글을 통해 잠시나마 살펴보려 한다. 


  Ⅱ. 마틴 로이드 죤스(D. Martin Lloyd-Jones)

  A. 시대적 배경

   20세기 초반 영국의 런던은 매우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었다. 로이드 죤스(D. Martin Lloyd-Jones)가 처음 목회를 시작했던 웨일즈 지역은 경제적 공황기였고 샌드필즈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실직 상태에 있었을 뿐만아니라 영적으로도 기아상태에 있었다. 1920년대 중반의 웨일즈 지방의 신학적인 기류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속에 더 이상 역사적인 칼빈주의가 아니었고 옛날의 낙천주의적 자유주의였다.1) 특히 로이드 존스가 웨스트민스트 교회에서 본격적으로 목회를 시작하던 시기는 영국이 2차대전의 전화로 무척이나 어려움에 처해있던 시기였다. 그 당시 런던은 나치 전투기의 폭격으로 인하여 날마다 많은 건물들이 파손되고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런던 시민들의 생활은 말로 다할 수 없이 어려운 처지에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폭격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쓰라린 슬픔을 겪고 있었다.2)


  B. 그의 생애와 사상

   1. 간추린 연대기3)

    1899 12월20일에 남부 웨일즈의 카디프에서 출생.

    1921 런던대학에서 M.B. 학위와 B.S. 학위 취득. 궁정의사인 호더 경의 수석            임상 보조의로서 의료업에 종사하기 시작.

    1923 런던 대학에서 M.D. 학위취득.

    1925 영국 왕립 의학대학(M.R.C.P)의 일원이 됨.

    1927 남부 웨일즈의 탈보트 항구에 있는 웨일즈 장로교회 목사가 됨.

    1938 G. 캠벌 모건이 담임목사로 있던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부목사가            됨.

    1943 웨스트민스트 교회의 담임목사가 됨.

    1968 목사직에서 은퇴.


   2. 그의 생애

   로이드 죤스는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인 1899년 12월 20일, 헨리 로이드 죠스와 마그달렌 로이드 죤스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웨일즈의 수도 카디프이지만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랭게이토(Langeitho)이다. 1913년은 로이드 존스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해이다. 하나는 그해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은 랭게이토에 있는 칼빈주의 감리교회의 여름 봉사단에 초청된 일이다. 이 집회는 다니엘 로랜즈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는 거기서 토마스 윌리엄스 박사와 존 윌리엄스 박사가 설교하는 것을 듣고 그들의 웅변적인 설교와 그들의 위엄에 찬 인품에 감동을 받았다. 이 집회는 그에게 칼빈주의 감리교신조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로이드 죤스는 16세에 성 바돌로뮤 병원 부속 의학교에 입학했다. 1921년 10월에 의학사 학위와 외과의 학위를 얻었는데 왕실 주치의였던 토마스 호더(Thomad Hoder)경 아래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호더에게서 철저하게 분석적으로 진단하는 진단법과 소크라테스의 문답식 교육방법을 배우게 된다.

   로이드 죤스는 바돌로뮤 병원 의학교를 다니면서 그가 전에 랭게이토에서 들은적이 있던 윌리엄스(T.C. Williams)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정기적으로 웨스트 민스트 교회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새로운 한 목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존 휴튼(John Hutton)이라는 사람으로 스코틀랜드 출신이었다. 휴튼의 설교는 사상이나 효과적인 면에서 한결같이 균형잡힌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해설교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로이드 죤스에게 큰 호소력이 있었고 그에게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 후 휴튼은 웨스트민스트 교회를 사임하고 브리티쉬 위클리(The British Weekly)의 편집인직을 맡게 되었는데 그에 대한 로이드 존스의 존경심도 대단해서 그도 웨스트민스트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그 신문의 정기 구독자가 되었다. 특히 그는 거기에 산발적으로 연재되는 청교도 관련기사는 모조리 다 읽었다. 그가 청교도들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이런 기회를 통해서였다.

   로이드 죤스의 영적 성장과 영적인 상태를 추적하려면 그가 1924년과 1925년에 채링 크로스 교회에서 했던 두 번의 연설을 살펴보면 될 것이다. 그는 문학과 토론을 위한 금요 집회에서 연설을 했는데, 1924년 3월에 한 연설은 원고로 남겨진 최초의 연설이었다. 사실 이러한 신앙적인 연설을 하는 과정에서 로이드 죤스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장래가 유망한 의사에서 설교자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베들레헴 전진 운동 교회(Bethlehem Forward Movement Church)의 초청으로 아베라본에서 첫 목회자로서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4)

   로이드 죤스는 남부 웨일즈의 탈보트 항구에 있는 웨일즈 장로교회에서 11년 반동안 목사로 재직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곧 설교자로서 뛰어난 명성을 얻었는데, 신학적인 면에 있어서 보수주의적이고 그 접근 방식에 있어서 성서적이었던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의 명성은 곧 널리 퍼져 나갔으며, 런던에 있던 캠벨 모간(Campbell Morgan)도 그의 명성을 듣게 되었다. 모건은 그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를 웨스트 민스트 교회의 부목사로 초빙하였으며, 그는 모건의 초빙을 수락하여 1938년에 런던으로 갔다.

   그는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웨스트민스트 교회의 부목사로 일하였다. 그는 런던에서도 설교자로서 뛰어난 명성을 얻었는데, 1943년에 모건이 목사직에서 은퇴하자 그는 모건의 뒤를 이어 웨스트민스트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로이드 죤스가 웨스트민스트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동안에 이 교회는 영국내에서 가장 많은 회중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그 곳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그곳으로 몰려 들었는데, 그는 휴가 기간을 제외하고는 그 곳에서 항상 금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과 밤에 설교를 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런던에서만 설교를 행한 것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영국의 모든 지역들을 순회하며 설교를 행하기도 했으며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보수주의 목사들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5)

   2차  대전이 발발후 많은 사람이 모이던 교회가 폭탄이 예배당으로 떨어지는 사건으로 150명까지 줄었다가 로이드 죤스가 담임하면서 전쟁이 끝난후 500명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고 1951년의 웨스트민스트 채플은 약2500명이 출석하는 영국 최대의 교회가 되었다. 로이드 죤스 목사는 1968년 목사직에서 은퇴하기까지 30년동안 그 교회에서 목회하였다.6)


   3. 로이드 죤스의 신학적 배경

   a. 웨일즈 칼빈주의 감리교7)

   18세기 웨일즈 부홍운동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인 호웰 해리스의 목회에 관한 소책자를 13세때 읽었는데 이것은 로이드 죤스에게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가 자라난 웨일즈 칼빈주의 감리교8)의 역사에 대한 이 첫 책은 역사에 관해서 평생 지속적인  관심을 일깨웠고 특히 위대한 부흥 시기의 교회사와 위대한 성도들과 설교자들의 전기에 대한 관심을 평생토록 갖게 했다. 로이드 존스는 그가 결정을 내릴 때 사용하는 두가지 원리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로, 성경에 대한 나의 이해와 둘째로, 18세기 칼빈주의적 감리교도의 부흥에 관      한 독서입니다. 이것들이 나를 지배했습니다. 어떤 것이든지 나에게 다가올 때에 만약       그것이 위의 틀에 맞지 않으면 나는 어렵게 붙들고 있지 않습니다. 감리교 선조들의 높      은 영성과 깊은 경건으로부터 판이한 어떤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을 따라야 할지 말아야      할지 오래 갈등하지 않습니다.9)


   b. 성경10)

   성경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있는 책으로 17세때 등장했다. 그에게 성경은 생명의 떡이요, 그의 영혼의 만나일뿐만 아니라 그를 형성하고 그가 살아가는데 지침서였다. 그는 성경을 여기저기 마음에 드는 구절만 읽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읽는 것을 신봉했다. 필요한 경우에는 어떤 구절을 깊이 연구했고 성경을 매일 읽었다. 그 생애에 적어도 신약 110번 구약 55번 이상 읽은 것으로 추정된다.


   c. 청교도와 조나단 에드워즈11)

   18세기 웨일즈 칼빈주의 감리교 역사를 읽을 때 그는 이 운동의 지도자들이 예외없이 청교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글을 부지런히 읽은 사실을 관찰했다. 그래서청교도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25년에 새로 출간된 리차드 백스터의 전기를 우연히 읽고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관심을 더욱 분발시킨 요인은 1929년에 두권으로 된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을 발견하고부터이다. 그는 이 전집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동일한 원천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에드워즈에게서 청교도주의의 절정과 극치를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청교도주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역에서 그 꽃을 활짝 피우게 됩니다.”12) 라고하며 “나는 나의 전 목회가 이것에 의해서 통제되어 왔다고 거침없이 고백합니다.”13) 라고 말한다.


   d. 워필드와 바울사상14)

   작고한, 프린스턴의 교수인 워필드의 전집은 1932년 그가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에 그의 생애에 들어오게 된다. 로이드 죤스는 워필드를 지난 70년동안 영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라고 평가했다. 워필드보다 현대 신학자로서 더 큰 영향을 그에게 끼친 사람은 없다. 로이드 죤스는 그의 신학에 심취했는데 그것은 그의 신학이 성경에 기초했고 주해적으로 정확했을 뿐 아니라 뜨거운 영성이 겸비되었기 때문이다. 워필드를 만나기 이전까지의 로이드 죤스에 대한 평가는 아무도 그를 신학자로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사상과 가르침에 바울적 요소는 빈약했다. 그러나 워필드는 교리적 가르침의 필요성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주었다. 워필드를 통해서 바울은 로이드 죤스의 교사로서의 모델이 되었다.

          

   4. 로이드 죤스의 설교의 특징

   로이드 죤스의 설교를 읽으려고 하면 무엇보다 그의 설교가 방대한 것에 놀라게 된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태산같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그 자신이 거대한 태산 같아서 어디서부터 올라가야 할지 막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를 대충 훓어보아도 몇가지 특징을 찾을 수 있다.

 

   a. 성경의 권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로이드 죤스가 성경에 접근하는 것은 모세가 불타는 가시떨기에 접근하던 것과 비슷하였다. 성경은 거룩한 계시이다. 로이드 죤스의 설교의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신뢰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설교를 시작할 때 성경을 읽고는 마치 시위를 떠난 활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경을 신뢰했고 성경에 의존하여 설교했다. 로이드 죤스는 그의 책 목사와 설교(Preaching & Preachers)에서 “설교자가 매일 정규적으로 성경을 읽어야 함은 분명합니다. ...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모든 설교자들은 최소한 일년에 한 번 정도는 전체 성경을 완전히 통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5) 라고 말하고 있음을 볼 때 그가 얼마나 성경에 대해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로이드 죤스는 모든 신성한 계시가 한 책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이 완벽한 것으로 성경의 완전함을 확신16)하고 있다. 또한 성경은 전적으로 신빙성이 있으며, 오류가 없는 모순이 없는 책17)이라는 원칙을 고수한다.


   b. 철저한 교리적 접근

   그의 설교를 대하면서 가장 놀라게 되는 부분중의 하나는 어떻게 로마서나 에베소서 같은 서신서로 수백 편이 넘는 설교를 할 수 있었으며, 무려 13년이 넘는 세월동안 연속으로 설교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철저하게 교리적으로 성경에 접근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그의 책 십자가와 구속(The Cross)에서 이렇게 말한다.

    

     ...... 자,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들 사도들이 바로 그 십자가를 전했다는 것과 십     자가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했다는 점입니다.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 결코 인기를 얻은 적은 없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이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고 철저하게 인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도들이 전했던 것은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 바로 그 점이 그들의 메시지의 중심과 핵심이 십자가 였다는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 18)

       

   이러한 그의 고집은 성경에 이렇게 교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게 성경을 해석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의 성경해석의 원칙을 몇가지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은 문맥속에서 해석하여야 한다. 둘째 신약이 구약을 제어하지 구약이 신약을 제어하지는 않는다. 셋째 성경은 전체적인 데서 구체적인 데로 움직여 나가면서 해석해야 한다. 넷째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난해한 구절들은 더 분명한 구절들과 나란히 놓아야 한다.19) 등이다.


   c. 교회사, 특히 청교도 역사에 대한 많은 의존

   크레독은 그의책 ‘설교’에서 설교자는 청중해석과 본문해석이라는 두가지의 같은 성격의 일을 하면서 그 둘 사이에 있는 거리에 대해서 늘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설교자가 그 거리를 조정하는 일이 설교하고 교육하는 일의 중심적인 문제20)라고 말한다. 로이드 죤스는 이 둘사이의 시간적, 문화적간격을 연결시킴에 있어서 교회사라는 다리를 많이 사용했다. 즉 성경과 현대사이의 교회사에 일어났던 수 많은 사례들을 통하여 성경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밝히기도 하고 과거에 잘못되었던 성경해석이나 오류를 피한다. 특히 이 방법이 유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설교가 철저한 교리적인 접근이었기 때문이었다.

   교리라고 하는 것은 한 순간에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긴 세월 역사적인 사건이나 논쟁을 통해서 하나씩 구체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청교도 목사들의 설교는 그야말로 교리의 보고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의 교리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단은 비단 우리 시대를 관찰하는데 기초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나간 세대의     교회 생할을 관찰하는데도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교회사를 읽어보고, 성령운동의 역사를     다시 읽어보고, 모든 시대에 있어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살펴보는 일보다 그리스도     인의 생활에 더 유익한 것은 없을 줄 압니다.21)


   d. 철저한 적용과 도전

   로이드 죤스는 단순히 본문에 대한 설명이나 진술로 끝내지 않는다. 그는 진술되어진 말씀을 철저하게 청중에게 적용을 한다. 그는 목사와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나의 세 번째 주장은 말씀증거나, 결신의 요청이 우리의 사고에서 분리되지 않아     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16세기에 시작된 개     혁주의(Reformed)의 교훈에서 강조된 하나의 큰 원리입니다. 즉 성례(Sacraments)가 말     씀증거와 결코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설교를 전할 때 그 설교내용을 언     제든지 적용시켜 나가야 하며 특별히 마지막 결론적인 적용이나 클라이맥스에 이를때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22)


   그는 또 팔복서론이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청중에게 도전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문해 보아야 할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소속되어 있는     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고 있는가? 예수는 우리의 왕이요, 주인가? 우리는 매     일의 생활에서 이런 자질을 나타내고 있는가? 우리가 이렇게 되도록 작정되어 있는 사실     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참으로 복된 자인가? 우리는 행복한가? 우리는 가득 채워져 있     는가? 우리는 평화를 얻었는가? 하는 것입니다.23) 


   로이드 죤스는 개인이 자기 생활을 비추어 볼 수 있도록 적용을 하며 설교의 끝부분에서만 적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지의 중간중간에도 적용을 하여 권면한다. 그의 이러한 적용의 방법은 구체적으로 항상 명령법앞에 직설법을 두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직설법에서 논지가 분명해진 다음에 명령법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특징적인 적용의 방법을 가리켜서 ‘연역적 적용’24)으로 부르기도 한다.


   5. 로이드 죤스의 설교신학

   a. 설교에 대하여

   로이드 죤스는 모든 것이 의문시 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과 그 가운데서 설교의 위치와 가치 그리고 목적이 의문시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설교에 대해서 이러한 심각한 공격이 행해지는 시대에 로이드 죤스는 교회의 기본적인 직무요, 목사의 기본적인 직무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설교는 교회의 고유직무인 동시에 교회만이 세상의 가장 큰 필요를 채울 수있고 그러므로 설교자만이 이것을 세상에 알릴 수가 있다고 말한다. 로이드 죤스에게 있어서 설교는 교회의 어떤 일보다도 앞서는 것이며 이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대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로이드 죤스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오늘날 기독교회의 가장 큰 필요는 참된 설교이며 교회의 가장 크고 가장 긴급한 필요는 참된 설교이며 교회의 가장 크고 가장 긴급한 필요인 만큼 세상 최대의 필요라는 것은 명백하다”25)라고 밝힌다. 궁극적으로 로이드 죤스는 설교가 하나님이 선택한 방법이며 교회는 설교에 의해서 항상 존재해 왔다고 믿는다.26)


   b. 설교자에 대하여27)

   로이드 죤스는 그의 책 목사와 설교에서 설교자를 정의하기를 일단 첫 번째 전제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을 하도록 되어있지 않는 특별한 소명을 필요로하는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 그는 그때 당시 논의되고 실제 행해지던 “평신도 설교”(lay-preaching)에 대해 기본적으로 반대입장을 취하면서 이 사역은 어떤 부업을 가지면서 시간제로 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전시간을 바쳐 헌신할 때 가능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소명에 대해 로이드 죤스는 단순히 개인적으로 책읽기나 좋아하고 시를 쓰기 좋아해서,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심령에 영적인 성령의 계시하심이 강권적으로 나타나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로이드 죤스는 설교자로서의 또 하나의 중대한 시금석이 될 수 있는 감각을 말한다. 이것은 목회자가 자신의 사역을 바라보며 내가 도저히 다른 일은 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고 한다. 그는 스펄젼의 말 “만일 여러분들이 목회를 안 하고도 견뎌낼 수 있으면 그렇게 하십시오.” 라는 말로 이것을 분명히 했다. 또한 그에게 있어 설교자는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설교하는 일에 더욱 주춤거린다는 말로 설교자의 책임감과 이에 대한 두려움을 말한다. 설교자는 더 나아가 그의 인품이 교회에 의해 점검되고 확증되어야하며 경건하고 지혜로우며 인내심을 소유한자라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사역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상의 자질은 로이드 죤스에게 있어 설교자의 기본자질이며 이것외에도 설교자는 인간본성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고 어느정도의 지적능력도 꼭 필요한 것이며, 말의재능에 있어서도 어느정도의 유능함이 요구된다고 설명한다. 더 나아가 설교자는 일반적인 세상의 삶에 대한 지식과 경험도 있어야, 폭넓은 인간이해를 바탕으로 성도들의 삶의 문제를 이해한 설교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로이드 죤스는 설교자가 그의 가슴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하나님을 위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진리를 안다면, 그안에 성령을 모시고 있다면 그는 설교할 수 있다고 정의한다. 이것에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c. 성경해석

   설교자는 반드시 성경의 해석자 이어야 한다. 로이드 죤스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엄밀히 두가지 과정을 포함한다. 그는 먼저 본문이 본래적인 청중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이해하고자했다. 그 다음에 본문이 신자들의 실존적 현재에 대해서 무엇을 의미하는 파악하고자 했다. 전자는 의미에 후자는 의의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로이드 죤스는 항상 이 원칙에 따라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다루고 나서 그 의의를 살피고자 했다. 그의 표현을 빌면 의미를 살핀 후에 본문의 ‘교리’ 혹은 ‘요점’에 관심을 갖는다고 했다.28)

   로이드 죤스에게 있어서 성경해석의 방법은 다양하다. 그는 본문을 이해하고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분석적 방법을 시도하고, 원본과 역본을 비교하고, 어휘론적, 구문론적, 형태론적인 고려를 통한 문법적 접근 방법도 동원하며, 문맥들간의 정황을 살펴보는 문맥적 접근 방법과 같은 실질적인 접근법을 시도하여 본문의 의미를 파악한 연후에 영적인 접근과 교리적 접근을 통하여 본문의 의의를 찾고자 한다.

   무엇보다 로이드 죤스에게 있어서 주해적 연구의 목표는 교리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는 교리적 접근의 마지막 절차로 한 특정 본문의 핵심을 발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우리가 취급하는 본문의 주요 메시지나 핵심에 도달하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     나칠수 없습니다. 그것으로 하여금 여러분을 인도하게 하고 여러분을 가르치게 하십시오.

   본문이 말하는 바를 듣고 무슨 의미인지 본문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런 다음에      여러분 설교의 핵이 되게 하십시오.29)


   그리고 본문의 주된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끊임없이 본문을 향해 질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로이드 죤스는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 이 작업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해당 본문의 메시지의 급소에 이르도록 합니다. 이     급소에 도달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택한 본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법을 배     워야 할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왜 그는 그렇게 말할까? 어째서 그     는 그것을 이런 독특한 방식으로 말했을까? 그는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 그의 목표와     목적은 무엇인가? 설교자가 맨처음 배워야 할 일 중 하나는 그의 본문과 얘기하는 것입     니다.30)


  이밖에 로이드 죤스의 성경 해석의 특징적인 원리를 두가지 꼽으라면 먼저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과 성경안에 있는 모든 말들은 그 문맥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해석원리를 제공하고 있다.


   d. 특징과 수사적기교

   1) 전편에 걸친 강해설교

   연속설교를 로이드 죤스 강해설교이 일반적인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산상설교집」처럼 마태복음의 한부분을 조직적으로 다루기도 하지만 대개 로마서나 에베소서같은 성경중의 한 권을 택해서 강해설교를 하는 것이 그의 특징적인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로이드 죤스는 이 방법은 그 자체가 타당한 방법일 뿐 아니라 다음에 설교할 본문을 찾아야 하는 설교자의 부담을 경감시켜준다고 믿는다. 또한 한사람의 설교에 강조점의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고 동시에 한 교리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을 피하고 하나님의 말씀전부를 살펴보게 한다고 생각했다.31)


   2) 세밀한 현미경적인 연구

   그는 전 성경을 망원경적으로 조명하는 것보다 성경의 한 부분을 세밀하게 현미경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더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본문이 특별하게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때나 우리의 삶에 중요한 의의를 지닐 때 그는 이 세밀하고도 현미경적인 연구 방법을 채택했다.


   3) 일반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그의 설교는 처음부터 곧바로 세부적인 문제로 뛰어드는 법이 없다. 그는 항상 전체적인 조망을 먼저하고 거기서 발견한 일반적인 원리를 가지고 세부적인 부분으로 하나씩 논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일례로 그의 「산상보훈설교 상권」스물여섯번째 설교에서 스물여덟번째 설교는 같은 본문 마태복음 5장38절-42절의 본문을 연속적으로 설교하면서 그 내용을 점점 심화시켜 나감을 알 수 있다.


     38절에서 42절을 대체로 살펴보고 이 도전적인 구절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     기에 앞서 반드시 생각해봐야 할 큰 원리들을 설정한 바가 있습니다. .... 우리는 이제      이것을 자세히 다루게 되었습니다. ... 이상은 이 원리의 대략적인 진술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우리는 이 진술을 정교화해야 하겠습니다.32)


   그는 본문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급하면 급할수록 천천히, 느리게, 충분히 다룸으로써 일반적인 원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사실 그는 연속된 본문설교를 시도할 때 첫 몇 개의 설교는 항상 전체적인 조망을 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33)


   4) 선 부정, 후 긍정(부정적인 진술에서 긍정적인 진술로)

   로이드 죤스의 또 하나의 특징적인 설명방법은 “부정 먼저 긍정 다음”으로 설명할 수 있다. 로이드 죤스는 잘못된 견해가 유행하기 때문에 몇몇 부정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는 성경에 나타난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바로 파악하는 것이 올바른 강해설교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새로운 용어가 사용되었을 때 바로 머리에 떠오르는 직관적인 생각으로 해석하지 않고 가장 확실히 아닌 것을 하나씩 부정해 가면서 가장 정확한 의미로 접근해 들어가는 진단법을 사용한다. 산상설교 강해의 여섯 번째 설교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설교인데 그는 여기서 ‘온유한 자’의 의미를 바로 알기 위하여 먼저 온유한 자가 아닌 것부터 열거하기 시작한다.34)


     온유는 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 온유는 무기력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 온유는     마음에 들고 친절한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 그러므로 온유는 싹싹하거나 친절한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사귀기 쉬운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온유는 인격이나 이     물됨의 연약성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타협 정신이나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평화를 얻는 것’을 말하지도 않습니다.35)


   로이드 죤스가 이런 부정적인 진술을 하는 이유는 ‘온유’라고 하는 것이 천성적 성질이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새로이 만들어진 것이며, 이것은 결코 약하거나 소극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서이다. 결국 그는 이러한 부정적인 진술을 통하여 ‘온유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태도와 행동에서 표현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평가’라는 결론을 유도한다.


  5) 반복되는 철저한 진술

   반복은 로이드 죤스의 또 하나의 특징적인 방법으로 말할 수 있다. 그는 참된 이해에 반복이 필수적이고 ‘좋은 가르침의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는 일단 청중이 본문이 제시하는 메시지를 포착했다고 생각되면 그 문제에 대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다 동원하여 철저하게 진술해 나간다. 그는 무엇을 설명할 때마다 서너 번씩 반복하여 강조하는데, 매번 똑같은 표현이 아니고 조금씩 다르다. 그는 온유한 자에 대하여 이렇게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결국 이 온유는 무엇입니까? 온유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온유는 본질     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태도와 행동에서 표현되는 자기에 대한 올바른 평가라고 하     겠습니다. 그러면 온유는 두가지입니다. 온유는 나 자신에 대한 태도인 동시에 다른 사람     들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나의 태도의 표현입니다. ... 더 나아가서 온유한 사람은 자기 자     신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이익을 언제나 실피지 않습니다. ... 그러     므로 저는 다시 온유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그에 대하여 생각하는 바를 고맙게 여기고 놀라워하는 사람입니        다.36)      

 

   6) 예화와 상상력의 사용

   로이드 죤스는 성경적인 실례, 찬송가, 교회사, 일상생활, 일반독서, 목회경험, 일화 그리고 개인생활로부터 예증거리를 찾는다. 어떤 예증은 한번 이상 사용하기도 한다. 그의 예증은 예외없이 짧은 것이 특징이다. 그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증을 사용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로이드 죤스는 상상력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는 상상력이 위험할 수도 있지만 설교의 설득력과 집중력을 위하여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상상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상상의 은사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시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 상상은 진리를 전파하는데 진정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37) 


     부흥이 일어나고 성령께서 당신의 역사를 행하실 때 도덕적인 전체조건이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지 않게 될 뿐 아니라 유흥가의 문이 닫혀지고 유흥사업이 망합니다.

   백여년 전 북아일랜드에서 한 술집 주인이 회심하였는데 그때 그러한 일이 실제 일어났     습니다. 그가 한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고객들이 다 그를 떠     났기 때문입니다....38)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과       의와 공의와 죄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가 보호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       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의 의미입니다.우리는 그것을 아우구스투스 토플래디(Augustus       Toplady)의 유명한 찬송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것을 아주 분명히 알았고 이       렇게 노래했습니다.

            만세 반석 나를 위해 열렸으니

            주 안에 나를 숨겨주소서 

            창에 찔린 허리로부터 흘러나오는 물과피로...39)


     ‘이것봐, 그런식으로 모래위에 집을 세운다면 아무 소용도 없어. 그 장소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가? 시냇가에 어떤 사태가 일어날른지 자네는 모르고 있어. 나는 이 시냇     물이 폭포처럼 된 것을 본 일이 있네. 아주 튼튼하게 지은 집을 넘어뜨리는 강풍이 이      곳을 습격한 일을 나는 알고 있네. 깊이 파는 것이 좋을 거야. 바위가 보일 때까지 깊이     파게’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사람은 이런 조언을 모두 물리치고 어디까지나     자기가 제일 좋다고 생각한 것을 그대로 밀고 나갈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로 말하면 그     는 교회사에서 교훈을 배우는데 무관심합니다. 그는 성경이 말한 것에 대해서 무관심합     니다. 그가 무엇인가  를 하려고는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방법으로 그것이 될 수 있을      줄로 생각합니다.40)   



  Ⅲ.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A. 시대적 배경

   격동하는 20세기 시작될 즈음 바야흐로 세계는 수 많은 변화와 전쟁의 상처가 끊이지 않는 시기였다. 본 회퍼의 조국 독일은 1차, 2차 세계대전의 중심에서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격변을 겪었으며, 특히나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를 중심으로한 유대인 말살정책으로 인하여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만행이 저질러지기도 하였다. 또한 히틀러와 그의 무리들은 전체주의 체재의 국가 사회주의를 내세우고 민중을 암살시키려 드는 한편 교회를 일원화하여 제국적 독일교회라는 기치아래 독일내에서 온전한 복음주의 교회와 목회자들을 말살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없이하려는 흐름속에서 20세기의 바울은 나타나게 된 것이다.41)  


  B. 그의 생애와 사상

   1. 간추린 연대기42)

    1906 2월4일에 독일의 브레슬라우에서 카알 본회퍼와 파울라의 아들로 출생.

    1923 튀빙겐 대학에서 수학.

    1924 로마와 북아프리카를 여행함.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하기 시작함.

    1927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하여 논문 <Communion of Saints>를 제출           함.

    1928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있는 독일어권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함.

    1930 베를린 대학의 교수직을 얻기 위하여 논문 <Acts and Being>을 제출함.           교환학생으로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뉴욕에 도착함.

    1931 칼 바르트와 만남. “교회를 통한 국제 우의증진 세계연맹”의 유럽지구 청           년간사로 임명됨. 북 베를린 지역에서 소년들에게 세례를 위한 교육을 실           시함.

    1933 히틀러의 종교정책에 반대하여 고백교회의 발전을 도와줌. 런던에 있는            독일인 교회의 목사가 됨.

    1935 고백교회 신학교의 학자으로 초빙됨.

    1937 게쉬타포에 의하여 신학교가 페쇄됨. <The Cost of Discipleship>을 출           간함.

    1941 독일 내의 레지스탕스 운동의 주요 인사가 됨.

    1943 4월 5일에 체포되어 군대 감옥에 수감됨.

    1945 4월 9일에 플로썬뷔르크에서 교수형을 당함.


   2. 그의 생애

   1906년에 저명한 정신의학자의 아들로 태어난 디트리히 본회퍼는 일찍이 자신의 생애를 그리스도에게 바쳐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가져다 준 비참속에서 평화를 희구하는 소년의 숭고한 결단이었으며 위기에 처한 교회를 건지려 하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는 20대를 신학공부를 위한 정진의 계기로 삼아 연구와 목회에 전념하였다. 튀빙겐과 베를린대학에서 수학하고 다시 뉴욕의 유니온신학대학에 유학한 그는 그 사이에 하르낙, 바르트, 니이버 등의 영향을 폭넓게 수용하게 되었다. 그는 23세 되던 1929년에 베를린대학의 교수자격시험을 통과했고 1931년부터 시간강가 겸 베를린공과대학 교목, 1935년에 들어서는 고백교회 신학교 학장으로 취임하여 활동하였다. 그 사이에 이미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목회를 시작했었고 런던에 있는 독일인 교회의 목사로서 설교를 멈춘적이 없었다.43)

   특히 1931년에, 본회퍼는 독일로 돌아온 후에 본에 있는 바르트의 집에서 삼 주간 동안 바르트와 함께 생활하였다. 본회퍼는 바르트와 함께 지내면서 바르트의 신학뿐만이 아니라 그에게 큰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나는 바르트의 저서들이 왜 그처럼 이해하기 힘든가 하는 것을 점점 이해하게 되었      다. 나는 그의 저서나 그의 강연들을 통해서 보다 그와의 개인적인 논의를 통하여 그의     신학을 한층 더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이와 같은 것을 전혀 본 적이 없으며      그러한 것이 가능하리라고 믿지도 않았었다.44)


   1933년 1월30일에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의 수상직에 올랐다. 본회퍼는 처음부터 이러한 히틀러의 정권에 반대하였다. 히틀러가 수상직에 오른지 이틀 후에 본회퍼는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직책에 권위를 부여하는 대신에 그 직책을 맡은 한 개인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우상숭배로 발전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는데, 그 라디오 방송은 그가 메시지를 끝맺기 전에 중단되고 말았다.45)

   히틀러는정권을 장악하자 곧 교회를 자신의 수중에 넣기 시작하였다. 본회퍼와 바르트등은 이러한 나치당의 정책에 항거하여 1934년 5월29일 바르멘(Barman)선언을 선포하고 전체주의적 교회지배를 강력하게 거부했다. 이것이 기초가 되어 발전한 고백교회는 독일에서 유일하고도 참된 복음교회로서의 근본을 지키고자 애썼으나 결국 엄청난 핍박을 받고 지도자 마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까지 체포되는 고난을 겪게 된다.

   1939년 라이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던 그는 자신이 죽도록 봉사해야 할 곳이 조국 독일임을 확신하였다. 그래서 그는 니이버에게 이런 서신을 남기고 죽음이 기다리는 땅 독일로 돌아와 버리고 만다.


     나는 나의 상황과 조국의 상황을 생각하며 기도하였으며 하나님의 뜻으로 나를 정화     시켜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나는 미국에 온 것이 잘못이었다고 여깁니다. 나는 내 조     국이 기독교인들과 함께 역사의 험난한 이 시기를 헤쳐나가야만 합니다. 내가 동포와 함     께 이 시험을 나눠 갖지 않는다면 전후 독일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재정립하는 일에 아     무런 권리도 갖지 못합니다.46)

 

   귀국한 본회퍼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남은 힘을 쏟아넣었다. 1940년에 들어 나치당은 본회퍼의 설교를 금지시켰고 그는 이제 더 이상 평화주의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마음의 갈등없이 히틀러의 암살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43년 4월5일 비밀경찰에 의하여 본회퍼 목사는 체포되고만다. 눈앞에 다가왔던 결혼계획, 탈고를 바라보던 저술<Ethics>, 열렬한 레지스탕스 운동은 모두 중지되었다. 그는 옥중에서도 위로의 설교를 계속했다. 그는 최후까지 옥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는 설교를 했으며, 투옥된 이들의 마음가짐과 사상과 결의의 정신을 올바르게 선포하였다. 능력과 용기를 겸비한 설교가를 두려워한 정권은 그의 선포를 막아보려고 1945년 4월9일 교수형에 처하고 즉시 화장해 버렸다.47)   


   3. 본회퍼의 신학적 배경

   a. “값싼은혜” , “값비싼 은혜”

   1948년 「제자도의 대가」(The Cost of Discipleship)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그의 첫 번째 작품에서 그는 복음주의적인 교회가 표명하였던 “값싼 은혜”에 관한 유명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는 루터의 이신칭의의 원리가 가리워 질 때에만, 신자들이 제자도의 의무를 덜 수 있을 뿐이라고 비난한다. 본회퍼는 이것과 구분되는 것은 제자도의 삶을 수반하는 “값비싼 은혜”라고 한다. 본회퍼는 “이런 은혜는 그것이 우리를 따라 오라고 요청하기 때문에 은혜이며, 인간에게 유일한 참 생명을 제공하기 때문에 은혜이다”48)고 적고 있다. 그는 이것이 루터가 말하고 있는 은혜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은혜의 문제가 이런 삶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의 설교와 그리고 삶에도 나타나는 기초가 된다고 보여진다.


   b. 신앙과 선행의 관계     

   본회퍼는 이 문제에 대하여 지금껏 표준이 되었던 개신교의 신조는 “믿는 자만이 순종한다”49)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본회퍼는 역으로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50)라고 대치하였다. 그러고 나서 ‘제자도’(discipleship)의 개념을 설명함에 있어서 제자도는 우리가 따르는 주님에 대한 ‘신앙’을 함의하며 이 동일하신 주님에 대한 순종을 함의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본회퍼는 산상보훈에 대한 기독론적인 해석을 제안한다. 즉 그의 요구 사항은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으로서 지금껏 교회는 예배하는 말씀으로서만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그는 이 요구들을 통하여 단순히 평범하고 문자적인 의미로서 해석하려는 모든 노력들을 거절한다. 예수의 말씀들은 ‘성실한 순종’을 요청한다. 제자도는 ‘세상의 직접성들과의 철저한 단절’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그의 제자도에 관한 해석은 훗날 그의 레지스탕스 운동의 관여와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51)


   c. 윤리학의 문제

   본회퍼는 진정으로 윤리적인 삶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예수님의 권고와 일치되게, 지혜와 단순함을 결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단순함은 하나님에 대한 성실한 전심전력에서 유래하지만, 지혜는 세상을 잘 알 것을 요청한다. 어떻게 이 두가지가 결합될 수 있는가?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던 하나님과 세상의 화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그는 본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쪽이 아니면 다른 한쪽에도 참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실재     와 세상의 실재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받는다. 하나님의 실재는 나를 전적으로     세상의 실재안에 둠으로서만 오직 자신을 드러내시며, 내가 세상의 실재를 만날 때 이것     은 언제나 이미 하나님의 실재 안에서 지탱되고 용납되며 화해된다.52)


   본회퍼는 기독교인들은 금지와 요구사항의 목록이 아닌 하나님의 계명에 의해서 살아가게 되는데 이 계명은 자유를 명령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법들과는 구별된다. 하나님의 계명은 실제로 “하나님 안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라는 허용”이외의 어떤 다른 것이 아니다. 결국 하나님안에서 인간은 자유로우며 그 속에서 인간은 온전할 수 있다는 것이 본회퍼의 견해이다.     


   d. 본회퍼의 교회론

   본회퍼의 성숙한 교회론은 그의 교회의 선포사역에 대한 언급에서 알 수 있다.


     교회는 고유한 공동체로서 ‘선포’라고 하는 하나님의 위탁 명령을 수행하는 봉사활동     을 한다. 그런데 교회는 이 대리 행동을 이중적인 방법으로 한다. 첫째로 이 고유한 공동     체는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선포하는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방향지워져     있으므로 이 교회 공동체는 다만 도구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두 번째로 이처럼     교회가 세상을 대신하여 일을 함에 있어서 선포라고 하는 하나님의 위탁명령이 시작 되     었고 그 목적이 달성되었으므로 이 수단과 공동체는 자기자신이 목적을 위한 수단과 도     구가 됨으로 세상과 더불어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행동의 목적과 수단이다.53)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사람들의 종교적 공동체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형태를 취하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이라 일컬어진다. 왜냐하면 인간     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의 몸안으로 용납되기 때문인데, 모든 인류가 그러하다. 그래서     교회란 모든 인류가 취해야 할 인류 본연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54)


     교회의 공간이란 이 세상으로부터 이 세상의 영토중 한 조각을 빼앗기 위해서 가지고     있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하여 교회자체도 세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          려는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에 의하여 사랑받고 화해된 세상이다.55)


   본회퍼에게 있어서 교회는 이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세상과 함께하는, 알곡도 존재하는 교회인 것이다.


   4. 본회퍼의 설교의 특징

   a. 성경을 우선함

   본회퍼는 성경을 올바르게 사용할 것을 강조하면서 목회자는 세가지 상황에서 성경과 대면하게 되는데 그 세가지 상황은 설교단에 설 때와 성경을 연구할 때와 기도할 때라고 말하였다. “연구와 기도에 있어 성경을 다루지 않는” 설교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설교단에서 성경을 올바로 적절하게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본회퍼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본회퍼는 “설교단에서 성경을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성경의 가장 적절한 사용이다.”56) 고 주장하였다. 성경은 그것이 회중들의 삶 속에 파고 들어갈 수 있도록 선포를 통하여 해석되어져야만 한다.

   그는 성경에 대한 충실성, 본분에 대한 충실성, 신앙고백에 대한 충실성, 회중에 대한 충실성을 언제나 우선적으로 지적함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우선한 설교자였음을 알게 해준다.    


   b. 위로의 설교자 

   본회퍼의 설교는 위로의 설교였다. 그는 바울과도 같이 옥중에서 주위의 많은 이들을 향하여 끝까지 편지와 설교를 쉬지 않았다. 그는 옥중에서 많은 설교들을 하였음은 물론이려니와 옥에 갖힌지 얼마되지 않아서는 간수와 위생병들과 좋은 만남을 유지하게 되고 장문의 편지와 짧은 편지들을 통해서 그의 명상과 기도와 신앙고백을 전한다. 그는 죽기 하루전 이송도중인 4월8일에도 바바리아인들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영국의 비밀첩보원이었던 페이 베스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본회퍼 목사는 예배를 개회하고 우리들 모두의 가슴에 와서 닿게끔 설교를 행하였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는 우리의 마음상태와 생각들을 매우 정확하고도 올바르게 지적하면    서 우리에게 위로의 설교를 행하였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기도를 행하고 있을 때 문    이 열리더니 평상복을 입은 험상궂게 생긴 두 사람이 들어와서 ‘죄수 본회퍼! 우리와 함    께 갈 준비를 하라!’고 말하였다.57)    


   본회퍼는 그의 고통과 어려움이 끊이지 않는 감옥에서 쓴 그의 옥중서신에서 새해를 맞이하며 다음과 같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새해도 역시 많은 걱정과 불안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전보다도 한     층 더 견고한 확신을 가지고 섣달 그믐날 저녁에 저 신년 찬미가를 부르고 또 기도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슬픔의 문을 통과시키고

            도처에서 피를 흘리게 할 지라도

              그 후에 즐거움의 흐름을 흐르게 하옵소서

                                                      1943년 12월31일58)

   본회퍼는 마지막까지 희망과 위로의 설교자였다.


   5. 본회펴의 설교신학

   a. 설교에 대하여

   본회퍼는 설교를 행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설교를 행할 때 수월하게 말하거나 유희적으로 말하지 않았으며 비록 그는 자신의 모든 일은 신속히 처리하였으나 설교를 준비하는데에는 여전히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우선 그는 설교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의 신학적 사상이 성경을 대하는 순간마다 강렬히 살아나 그것을 설교에 반영하고 싶은 유혹이 다가올때면 침착하고 신중하게 성경이 말씀하는 것만을 취하려는 노력을 거듭했다. 이를 위하여 본회퍼는 자신의 사상에 경도된 본문 선택의 위험성에서 탈피할 겸 성서일과의 사용을 시도했다.59)

   본회퍼는 설교문을 작성하기 전에 항상 기도로써 성경본문을 깊이 분석하고 연구하였다. 또한 그는 설교를 듣는 일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본회퍼가 인식학 있던 설교를 행함에 있어서 두가지 목적은 첫째 비기독교인들을 복음화시키는 것이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기독교인들을 교화시키는 것이었다.

   본회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신학을 이렇게 제시한다.


     선포된 말씀(Predigtwort)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선포된     말씀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성육신이 하나님이 외적인 양상의 극히 적은      일부분인 것과 마찬가지로 선포된 말씀도 역시 실재의 외적인 양상의 극히 적은 부분을     제시해 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선포된 그리스도는 역사적 그리     스도이시며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60)


   본회퍼는 설교의 가치를 평가하는 여덟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첫째, 성경에 대한 충실성, 둘째, 성경본문에 대한 충실성, 셋째, 교리에 대한 충실성, 넷째 회중들에 대한 충실성, 다섯째, 객관성, 여섯째, 주관성, 일곱째, 옛것과 새것과의 관계성, 여덟째, 율법과 복음의 관계성이다.61) 


   b. 설교자에 대하여

   본회퍼는 설교자가 설교를 행함에 있어서 자신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만 하는데, 이는 설교자와 회중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이는 설교자 자신이 아니라 바로 말씀(the Word)이시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회퍼는 설교를 행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쓴 서신을 읽는 것에 비유하였다.

   본회퍼는 또한 이 말씀선포를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이고 고차적인 섬김의 차원으로 이해한다. 본회퍼는 교회에게 위탁된 명령은 두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설교요 다른 하나는 고백 혹은 교회적 훈련이라고 한다.62)


     교회에게 주어진 위탁명령은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이 세상 끝날까지      반복적으로 말씀되고 해석되며 확산되기 위한 하나의 장소를 원하신다. ... 위에는 선포하     는 직책이 있고 밑에는 듣는 회중이 있다. 설교하는 직책의 소유자는 그의 선포를 가지     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회중앞에 서 있다. 설교자는 회중의 대변인이 아    니라, 하나님앞에서 하나님의 대변인이다.63)


   c. 성경해석

   본회퍼에게 있어서 설교는 구성의 문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성경본문이 그 자체로써 설교의 구조와 양식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만큼 성경본문 그 자체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본회퍼는 먼저 본문 말씀을 깊이 명상한 후에 구체적인 질문들을 하면서 본문을 분석한다.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관하여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본문은 우리에게 인간에 관하여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그것은 나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본문은 나의 회중에 관하여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

   본회퍼의 성경해석은 지나치게 교리적이지도, 제도적이지도 않는 것을 추구한다.

왜냐하면 그는 설교는 현실과 괴리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 나오나, 우리의 설교가 그들의 예수에 이르는 길을 막는 때문에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수가 적어진다. ... 인간적인 것, 제도적인 것,      교의적인 것이 지나치게 많이 그들과 예수 사이에 가로 놓여있다. ... 우리의 설교가 사실     지나치게 ‘교의적’이기는 하나 지나치게 ‘생활’을 무시하는지도 모른다.64)


   본회퍼는 성경본문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통하여 중심개념을 깨달은 후에 참다운 설교를 행할 수 있다고 봄으로써 언제나 본문을 우선한 성경해석의 원칙을 따랐다.

      

   d. 그의 설교적 특징

   1) 의미에 대한 성실한 해설

   본회퍼의 설교를 읽노라면 어떤 의미의 해설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로 자신이 하고 있는 설교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개념을 여러번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가 신학자라서기보다는 그의 중심에 흐르고 있는 사상의 배경이 단순히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신학을 거부하고 삶속에 실천되는 신앙을 원했기에 그의 설교를 듣는 이들이 자신의 말을 보다 잘 이해하고 실천하기를 바라서가 아닌가 한다.


     맹세란 도대체 무엇인가? 맹세는 다름이 아니라 지난 일에 대하여서나 또는 미래에 대     하여 자신을 주장할 때 신을 증인처럼 불러대는 일이다. ... 맹세는 무엇보다도 먼저 세상     에 속임이 있다는 증거라 하겠다. ... 맹세는 속임을 막는 최후의 제방이다. ... 맹세를 방     패로 감행하는 속임의 암살 행각은 두가지 형태로 나타난다....65)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자명한 것이 아닌 때문이다. 기도는 인정(人情)의 자연적     욕구이기는 하나 그대로는 아직 하나님앞에 아무런 자격도 없는 것이다. ... 기도의 정체     는 곧 신앙이요, 그리스도에 묶임이다... 옳은 기도는 행위도 훈련도 경건한 모양냄도 아     니다. 아버지의 마음에 호소하는 아이의 구(求)함이라 하겠다. ...기도는 철두철미 숨은 것     으로 여하한 경우에도 그것이 공개적일 수는 없다.66)    


   2) 상징과 비유        

   본회퍼는 그의 설교제목을 전체 설교내용의 상징으로 삼고 설교하기도 한다. ‘기드온’이라는 제목의 그의 사사기 설교는 기드온을 그 당시의 개신교회로 놓고 교회가 교회 다와야 하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는 백성을 구원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한다. 힘이없고 무력해진 교회를 향해 본회퍼는 기드온이라는 상지의 인물을 통해 이 땅에 교회를 향하여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다. 또한 여러번의 비유를 통하여서도 그 설교의 의미를 명확히 한다.


     기드온, 우리는 당신의 목소리가 어떤 것인지 잘 압니다. 당신이 그때에 했던 말을, 오     늘 우리가 똑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 부르심이 이 세상의 많은 다른 교

   회들중의 하나인 우리 개신교에게 들려옵니다. ‘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 교회, 아무     런 영향력도 없고 연약하고 그리고 구별되지도 못한 교회에게, 왜 이처럼 무거운 부르심     을 주시는 것입니까?.... 기드온 같은 교회여, 여러분은 듣고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말씀만이, 그의 성례만이, 그의 규율만이 여러분의 무기가 되게 하십시오...67) 


     ‘네 무기를 내려 놓아라. 내가 너의 무기니라. 너의 수천의 무기도 내 것 하나만 못하     느니라. 나로 하여금 너는 절대로 못하는 것을 하게 하라. ... 동일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교회는 명령하시는 그 분의 소리를 듣고 감지합니다. 말씀하시기를 힘과 명예를 버리고,     모든 계산을 중지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교회의 일을 하게 하라십니다....68)

   3) 예증의 사용

   본회퍼는 설교중에도 가끔씩은 역사적 사실을 들어 설명을 명확히하거나 시를 사용하기도 하는가 하면 기도문을 싣기도 한다.


     초대 교회에서 가장 널리 인정받은 해석은 맹세는 ‘완전한’ 교인에게 엄히 금하고 가     장 널리 인정받은 해석은 맹세는 ‘완전한’ 교인에게 엄히 금하고 약한 자들에게는 어는      한계 안에서 ‘허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거스틴 외에 몇몇 사람이 이 의견의 대표자     이다. 맹세에 대한 어거스틴의 이러한 견해는 플라톤이나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 그리고     스토아학파에 속하는 에피크테트나 마르스아우렐 같은 이방 철학자들의 의견과도 일치하     였다....69)


     그가 먹음으로 세상 재물의 사용이 깨끗하여졌다고 할 것이다. 소모품인 재물, 일용 필    수품, 육체적 생활의 먹을 것과 입을 것에 소용되는 재물을 제자는 감사하게 사용할 것이    다.

        나그네처럼 살아야 한다.

        탁 터져서, 장비없이, 빈 손으로,

        많이 모은 소유는 오직 우리 동작에, 발꿈치에 무거운 것,

        원하거든 쓰러지도록

        소유하라.

    

        우리는 버리고 가리라.

        적은 것을 만족하며

        부득이한 것만을

        한 손에 움켜쥐고.

                          - 테르스 테겐

     부득이한 것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재물은 주어졌지 모아두기 위한 것이 아니다.70)


     오! 주여! 우리는 결국 자신이 행하여야 할 바를 안 존재들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행하     여할 바를 알지 못하고 당신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에게 은총을 부여해 주신     사실을 알지 못한 존재들로서 당신을 바라보나이다. ... 우리가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주여! 우리가 당신을 바라 보나이다. 우리가 당신의 영원한 계명과 새로운 피조물들의 나    라와 견고한 기반을 지니고 있는 곳을 바라보나이다. ... 오! 하나님이시여! 이 세상에 속    한 우리가 당신앞에 서서 당신께 간구하나이다. ...71) 

 

   Ⅳ. 두 설교자 비교

   로이드 죤스와 본회퍼는 비슷한 시기 20세기의 격동기에 영국과 독일에서 저마다의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설교사역을 감당한 위대한 종들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이들의 처한 상황이 달라서 그리고 그들의 신앙관이 조금씩 다른관계로 사역의 내용은 다르게 표현되었지만 이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 신학자요, 설교자였다.

철저한 복음주의자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만을 부여잡고 전후 영국사회를 치유해나갔던 이가 로이드 죤스라면 전쟁중의 절망중에 있던 독일 국민에게 행동하는 양심으로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지 않는 위로자의 모습으로 본회퍼는 다가온다.

그들의 산상설교의 한 부분씩만이라도 비교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비교해보자. 동일한 본문의 설교를 일부분만 발췌해보았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이번에는 이것을 실제적인 면에서 살펴봅시다. 기독교인은 그가      ‘세상의 빛’이 된 것을 어떻게 보여줘야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빛의 기능     과 영향은 무엇인가? 빛은 어떤 작용을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귀착됩니다.... 기독교인들     은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빛’입니다. 이것은 전혀 불가피한 일입니다. 기독교인은 이 일     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인은 바로 기독교인이 됨으로써 다른 삶의 유형을 보여주     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세상에서 빛으로 옷입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즉가 생각하고 놀라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기독교인이 성스러워지면 성     스러워질수록 이런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한 마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72)


     너희들은 빛인 까닭에 너희들이 숨고 싶어도 도저히 숨을 수 없다는 말이다. 빛이 빛     나면 산 위에 성이 숨지 못한다. 산위의 성은 제자들의 교회다. 뒤를 따라 나선 자들에게     는 무엇을 하든 결단이 필요치 않다. 그들이 해야 할 단 하나의 결단은 이미 떨어졌다.      지금 그들은 그들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예수를 따르는 자가 아닐 따름이다. 따르는 자들     은 보이는 교회요 그들의 따름은 보이는 행함이어서 이 행함으로써 자신을 세상에 드러     내는 것이다.... 이 빛에서 제자들의 선한 업적이 드러나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가 말씀하     시는 것은 너희들 자신이 아니라 선한 업적을 세상이 보도록 하라는 것이다. ... 십자가      아래서 그들을 세상의 빛으로 만들었을 때, 그 자신이 그들에게서 지은 것- 빈곤, 이방     인의 외로움, 온유, 화평, 그리고 끝으로 핍박과 버림받는 것,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73)


   로이드 죤스와 본회퍼를 비교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외적, 내적환경의 차이가 그들의 비교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두사람은 자신들이 처한 환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종으로서의 최선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노력했다. 전쟁의 페허로 상처받은 영국국민들에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깨닫게 하고 그리고그 속에서 삶이 새로운 희망을 찾게 해주었다. 그는 여러 가지의 시대적 변화와 종교적 환경의 어려움은 과거 청교도운동을 통한 말씀의 회복과 부흥이 다시금 도래할 때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더 말씀을 통한 사역에 모든 것을 걸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로이드 죤스의 설교는 초기 그의 설교가 복음적이었던데(아베라본에서 목회할 초기)반해서 시간이 가면(런던의 웨스트민스트교회에서 목회할 시기)갈수록 지나치게 교리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도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이 설교는 전후 영국 사회의 정신적 기초를 놓느 귀한 밑거름의 역할을 했음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이에 반해 본회퍼는 2차 세계대전의 전화속에서 절망속에 있던 독일인들의 마지막 희망과도 같이 그의 일생을 살랐다. 그는 로이드 죤스와는 달리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만큼 그의 조국은 위급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의 설교도 행동과 열매를 요구한다. 그 역시도 그의 신학과 그의 삶 때문에 일부의 사람들로부터 구설수에 오르기는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을 당연한 결과로 생각한다. 그의 옥중서신을 통해서 그의 풍부한 감성과 따뜻함, 사람들을 배려하는 인간미가 깊이 느껴지는 것은 그의 삶을 통해서 느끼는 그것과 결코 틀리지 않는다. ‘나를 따르라’고 그의 책을 통해 주님의 값비싼 은혜를 말하는 본회퍼는 ‘십자가 없는 은혜’ ‘고난 없는 은혜’의 무익함을 피력하며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는 이 십자가의 고난의 은혜를 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위대한 말씀의 종은 시대를 밝히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Ⅴ. 한국 강단에 주는 교훈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강단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위의 두사람과 같은 헌신과 열정이 많이 사라져있음을 느낀다. 수많은 설교들이 책자를 통하여 매스컴을 통하여 범람하고 있지만 ‘정작 홍수때에 먹을 물이 없다’는 옛말처럼 고뇌하며 연구하고 기도하며 준비된 설교가 드문 것이 솔직한 사실이다. 로이드 죤스는 정말 두렵도록 일생을 진지하게 말씀하나만 붙든 주의 종이다. 이 사실이 오늘의 한국 강단에 들려져야 할 것이다. 많은 오늘의 목회자들이 수많을 교회의 일로 지쳐있다. 그래서 늦은시간 짬을 내어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쉽지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일을 핑계삼아 하나님말씀의 준비에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뼈를 깍는 노력과 열심히 설교자 자신이 말씀에 붙들린 종이 될 수 있도록 먼저 말씀을 가까이 하여야만 한다. 목회의 일로 기도시간이 줄고 말씀준비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아닌 핑계는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앞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설교자의 삶의 문제도 심각하다. 오늘처럼 복잡 다단한 사회에서 사회이 기준이 사라져 버린 시대에서 우리는 무언가 표준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열사람이 틀린 길로 가더라도 한 사람의 목회자는 바른 길로 가는 용기를 보여줄 때 우리 사회는 희망이 있으며 한국강단은 빛과 소금처럼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본회퍼는 이런점에서 바로 우리에게 큰 도전과 나아가야할 바를 제시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한국교회의 많은 문제들을 사람들이 얘기한다. 그러나 그 해결책을 뚜렷이 제시하는 이도 없다. 하나님이 말씀의 회복만이 그 대안임을 확신있게 말한다.


   Ⅵ. 나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고 그리고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쉬운일이 아님을 다시금 절감한다. 지금도 나름대로 애쓰고는 있지만 두분의 위대한 말씀의 종들을 대하면서 다시금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힘들게 목회의 길을 가면서도 답답할 때마다 부닥쳤던 숙제들을 이 작은 글을 준비하며 작은 희망의 길을 발견했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하나님말씀만 살아있으면 그 사회는 희망이 있고 다시금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희망의 선봉에 우리 말씀의 선포자들이 있다는 것을....  


   Ⅶ. 참고문헌

   김서택, “마틴 로이드 죤스 설교론” 『살아있는 말씀 살아있는 교회』, (서울: 성        서 유니온 선교회, 2000)

   이형기, 『교회와 사회』, (서울: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87)

   정근두, 『로이드 죤스의 설교론』, (서울: 여수룬, 1993)

   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하권)』, (서울: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90)

   

   D. 본회퍼, “믿음의 사람 기드온,” 『그말씀』 통권58호 (1997.5.)


  

   Bonhoeffer, Dietrich. WIEDERSTAND UND ERGEBUNG, 고범서역, 『옥중서     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7)

   Bonhoeffer, Dietrich. NACHFOLGE, 허혁역, 『나를따르라』, (서울: 대한기독교     서회, 1965)

   Craddock, Fred B.  Preaching, 김영일역, 『설교』 (서울: 컨콜디아사, 1989)

   Fant, E. Clyde & Pinon M. William, Jr. 20Centuries of Great Preaching.          Vol11., 김병웅역,『세계명설교대전집(제11권)』 (인천: 성서연구사, 1985)

   Fant, E. Clyde & Pinon M. William, Jr. 20Centuries of Great Preaching.          Vol12., 김마리아역,『세계명설교대전집(제12권)』 (인천: 성서연구사, 1985)

   Jones, D. Martin Lloyd. Preaching & Preachers, 서문강역,『목사와 설교』 (서     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Jones, D. Martin Lloyd. The Cross, 서문강 역, 『십자가와 구속』 (서울: 기독     교문서선교회, 2001)

   Jones, D. Martin Lloyd. Studies in the Sermon on the Mount, 문창수역,『로      이드 죤스의 산상설교집(상)』 (대전: 정경사, 1999)

   Jones, D. Martin Lloyd, Studies in the Sermon on the Mount, 문창수역,『로이     드 죤스의 산상설교집(하)』 (대전: 정경사, 1999)

   Jones, D. Martin Lloyd.  REVIVAL, 서문강역, 『부흥』,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8)

   Sargent, Tony. The Sacred Anointing, 황영철 역, 『위대한 설교자 로이드 죤     스』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6)

   Peerman, Dean G. & Marty, Martin E. A Handbook of Chrstian Theologians,     신경수역, 『현대신학자핸드북』,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3)



1) 정근두, 『로이드 죤스의 설교론』, (서울: 여수룬, 1993), 20쪽.


2) Clyde E. Fant & William M Pinson, Jr., 20Centuries of Great Preaching. Vol11., 김병웅역, 『세계명설교대전집(제11권)』 (인천: 성서연구사, 1985), 426쪽.


3) 위의 책, 425쪽.


4) 김서택, “마틴 로이드 죤스 설교론” 『살아있는 말씀 살아있는 교회』, (서울: 성서 유니온 선교회, 2000), 189-195쪽.


5) Fant & Prinson, Jr., 앞의 책, 426-427쪽.


6) 정근두, 앞의 책, 21-22쪽.


7) 정근두, 앞의 책, 29-30쪽.


8) 이 용어에 대한 정의를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싣는다. “칼빈주의 감리교”라는 용어는 많은 사람의 귀에 모순되는 용어처럼 들린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감리교라는 말을 싫어해서 칼빈주의와 전혀 관련짓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감리교는 본래 신학적인 개혁을 시도한 운동이 아니다. 신학적인 입장이나 태도의  차이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경험적인 종교와 삶의 방식을 강조한 운동이다. 감리교가 시작한 다음 역사적으로 두 부류로 나뉘어졌는데 칼빈주의적인 감리교와 알미니안적인 감리교이다. 웨일즈에는 모두 다 칼빈주의자였고 잉글랜드에는 모두가 다 칼빈주의자는 아니었다. 칼빈주의자 편에는 휫필드와 베릿지, 토플레디, 로메인, 로렌드 힐, 리챠드 힐 경 그리고 허팅턴 백작 부인등이 있고 알미니안 편에는 웨슬레 형제와 존 플레처, 토만 올리버 등이 있다.

  정근두, 앞의 책, 29쪽에서 재인용

  


9) 위의 책, 30쪽에서 재인용.


10) 위의 책, 30쪽.


11) 위의 책, 30-31쪽.


12) 위의 책, 31쪽에서 재인용.


13) 위의 책, 31쪽에서 재인용.


14) 위의 책, 31-32쪽.


15) D. Martin Lloyd Jones, Preaching & Preachers, 서문강 역, 『목사와 설교』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224쪽.


16) Tony Sargent, The Sacred Anointing, 황영철 역, 『위대한 설교자 로이드 죤스』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6), 315쪽.


17) 위의책, 316-318쪽.


18) D.Martin Lloyd Jones, The Cross, 서문강 역, 『십자가와 구속』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18쪽.


19) Sargent, 앞의책, 320-326쪽.


20) Fred B. Craddock, Preaching, 김영일역, 『설교』 (서울: 컨콜디아사, 1989), 149쪽.


21) 김서택, 앞의책, 211쪽에서 재인용.


22) D. Martin Lloyd Jones, 『목사와 설교』, 357-368쪽.


23) D. Martin Lloyd Jones, Studies in the Sermon on the Mount, 문창수역, 『로이드 죤스의 산상설교집(상)』 (대전: 정경사, 1999), 49쪽.


24) 정근두, 앞의책, 203쪽.


25) D. Martin Lloyd Jones, 『목사와 설교』, 11-12쪽.


26) 정근두, 앞의책, 47-49쪽.


27) 설교자에 대해서는 목사와 설교중 설교자부분을 요약해서 정리하였다. D. Martin Lloyd Jones, 『목사와 설교』, 131-158쪽.


28) 정근두, 앞의책, 85쪽.


29) D. Martin Lloyd Jones, 『목사와 설교』, 265-266쪽.


30) D. Martin Lloyd Jones, 『목사와 설교』, 263쪽.


31) 정근두, 앞의책, 175-176쪽.


32) 이상은 같은 본문을 두고 한 연속설교중 두 번째 설교로 로이드 죤스는 전편의 설교에 이어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을 공식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Jones, 『로이드 죤스의 산상설교집(상)』, 387-392쪽.


33) 김서택, 앞의책. 212쪽.


34) 위의책, 212-213쪽.


35) Jones, 『로이드 죤스의 산상설교집(상)』, 86-87쪽.


36) Jones, 『로이드 죤스의 산상설교집(상)』, 87-89쪽.


37) Jones, 『목사와 설교』, 308쪽.


38) 교회사를 인용하여 설교했다. D. Martin Lloyd Jones, REVIVAL, 서문강역, 『부흥』,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8), 272쪽.


39) 찬송가 188장의 가사를 인용했음, Jones, REVIVAL, 320쪽.


40) 누군가가 마음이 약한 건축가에 와서 그와 논쟁하는 것을 상상해서 내용을 이끌어감, Jones, 『로이드 죤스의 산상설교집(하)』, 422쪽.


41) 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하권)』, (서울: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90), 361쪽.


42) Clyde E. Fant & William M Pinson, Jr., 20Centuries of Great Preaching. Vol12., 김마리아역, 『세계명설교대전집(제12권)』 (인천: 성서연구사, 1985), 163쪽.


43) 정장복, 앞의책, 360쪽.


44) Fant & Pinson, Jr., 앞의책, 168쪽에서 재인용.


45) 위의책, 170쪽.


46) 정장복, 앞의책, 361쪽.


47) 위의책, 362쪽.


48) Dean G. Peerman & Martin E. Marty., A Handbook of Chrstian Theologians, 신경수역, 『현대신학자핸드북』,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3), 479-480쪽에서 재인용.


49) 즉, 신앙으로 말미암은 선행만이 진실로 선하다. 위의책, 480쪽.


50) 선행으로 표현된 신앙만이 진실한 신앙이다. 위의책, 480쪽.


51) 위의책, 480-481쪽.


52) 위의책, 489-490쪽에서 재인용.


53) 이형기, 『교회와 사회』, (서울: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87), 244-245쪽에서 재인용.


54) 위의책, 246쪽에서 재인용.


55) 위의책, 247쪽에서 재인용.


56) Fant & Pinson, Jr., 앞의책, 187쪽에서 재인용.


57) 위의책, 177쪽에서 재인용.


58) Dietrich Bonhoeffer, WIEDERSTAND UND ERGEBUNG, 고범서역, 『옥중서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7), 75쪽.


59) 정장복, 앞의책, 363쪽.


60) Fant & Pinson, Jr., 앞의책, 184쪽에서 재인용.


61) 위의책, 191-192쪽.


62) 이형기, 앞의책, 260쪽.


63) 이형기, 앞의책, 260쪽에서 재인용.


64) Dietrich Bonhoeffer, NACHFOLGE, 허혁역, 『나를따르라』,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5), 15-16쪽.


65) 산상보훈(마태복음 5:33-37), 성실이라는 제목의 설교중에서, Dietrich Bonhoeffer, 『나를따르라』, 121-122쪽.


66) 산상보훈(마태복음 6:5-8), 기도의 은밀성이라는 제목의 설교중에서, 위의책, 149-150쪽.


67) D. 본회퍼, “믿음의 사람 기드온,” 『그말씀』 통권58호 (1997.5.): 306-309쪽.


68) 위의책, 309-310쪽.


69) Dietrich Bonhoeffer, 『나를따르라』, 121쪽.


70) 위의책, 161-162쪽.


71) 본회퍼의 설교 주여, 들으소서!(대하20:12), Fant & Pinson, Jr., 앞의책, 201-202쪽에서 재인용


72) 로이드 죤스의 설교에서는 그의 특유의 설교흐름인 교리적이면서도 관념적인 느낌을 갖는다. Jones, 『로이드 죤스의 산상설교집(상)』, 224-225쪽.


73) 본회퍼의 설교에서는 역시 그의 사회참여적이고 열매를 맺길 원하는 사상이 보인다. Dietrich Bonhoeffer, 『나를따르라』, 102-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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