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면서
교회사가인 라투렛(Latourette)은 19세기를 개신교의 ‘위대한 선교의 세기’(The Great Century)라고 하였다. 아마도 그 어느 세기보다도 선교에 대한 열정, 선교지의 확장 등이 활발하게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발제자는 라투렛의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며, 또한 19세기를 ‘위대한 설교 부흥의 시기’라고 덧붙이고자 싶다. 왜냐하면 19세기에는 참으로 설교사에 있어서 걸출한 설교자들이 배출되어 시대를 변화시키고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심에 챨스 하돈 스펄젼(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과 드와이트 라이만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가 있다고 발제자는 감히 생각하며 본 발제물을 통하여 그들의 생애와 설교신학을 살펴보고 그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의미들을 밝혀내고자 한다.
Ⅱ. 스펄젼의 시대 고찰
1. 시대적 상황1)
찰스 하돈 스펄젼(Charles Haddon Spurgeon)이 살았던 19세기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치와 일상생활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신적인 지주였다. 그녀의 통치기간 중에 영국은 그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고 괄목할 만한 경제번영을 이루었다. 런던에서는 말과 마차들, 짐마차들이 너무 많아서 교통이 자주 정체되었고, 교통규칙이라는 것도 없었다. 철도교통은 꾸준히 확장되고 있었고 영국이 이 방면에서 세계를 주도하고 있었지만, 기차여행은 느렸고 불편했으며 불결하기가 일쑤였다. 수돗물이 설치된 화장실은 부유한 가정이나 중산층의 몇몇 가정에 점차적으로 보급되고 있었다. 가난한 이들은 그것을 접할 수가 없었다. 난방은 석탄에 크게 의존했고, 조명은 기름과 가스램프에 의존했으나 빈민층은 여전히 촛불을 사용했다.
스펄젼이 살던 시대에는 의학적인 면에서 커다란 진보를 이루었다. 박테리아의 존재가 발견되었고 방부법(防腐法)이 개발되었다. 과학자들은 하수시설에 너무 가까이 위치한 식수가 오염될 수 있음을 깨달았고, 따라서 콜레라와 다른 질병들의 전염을 이해할 수 있었다. 1847년에 클로르포름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수술이 마취없이 시행되었다. 1860년에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영향으로 최초의 간호실습 기준이 세워졌다.
사회계급이 일반적으로 뚜렷해 있었다. 상류계층은 부를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계층이 가질 수 없는 특권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중산계층이 성장하고 있었으며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가 점차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빈민계층이 존재했고 그들에게는 무지와 질병, 생활고가 만연했다. 극도의 빈민들은 빈민구제소에 수용신청을 할 수 있었지만 그러한 곳의 주변환경은 너무 지저분했기 때문에 수용자들은 어떠한 형태라도 직업을 얻기 위하여 노력했고, 그래서 그 비참한 곳을 떠나려고 했다. 많은 고아들이 거리를 배회했고 좀도둑질만이 그들의 생계 방법이었다. 스펄젼이 후에 양로원이나 고아원을 설립하고 궁핍한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무료로 교육을 제공했던 것은 당시의 이러한 환경들 때문이었다.
기독교 안에서는 복음의 수호를 외치며 복음주의 부흥운동을 일으킨 설교사들은 전대에 없던 미증유의 설교를 양산하며 더욱 말씀의 필요를 이루어 나가기 시작하였다.2) 그리하여 19세기 초의 영국의 기독교는 복음주의적 부흥으로 인한 영적 각성에 의하여 지배될 수 있었다.3)
이처럼 종교적으로 비국교도 교파들-침례교, 조합교회, 감리교, 장로교-은 윗필드와 웨슬리의 부흥운동으로 상당한 성장을 이루었지만, 같은 시기에 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찰스 다아윈의 진화론의 영향 아래 19세기의 기독교 복음은 심각하게 위협받게 되었다.4) 특히 1859년에 발표된 찰스 다아윈의 「종의 기원」은 생명체가 신의 창조가 아닌 무작위의 기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함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뿌리째 흔들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고등비평(High Critism)'의 도전이 기독교의 기초를 흔들고 있었다. 신 신학(New Theology)라고도 불린 이러한 시도는 결국 성경의 기적들을 설명해 보려는 노력에 이르렀고, 영감의 말씀을 평범한 인간의 책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했다.5)
2. 스펄젼(Charles Haddon Spurgeon)의 생애
과학과 정치의 도전으로 인하여 기독교 복음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을 무렵에 스펄젼은 기독교에 복음주의 교회의 정착을 이루는 사명을 수행한 하나의 거성6)으로 나타났다.
스펄젼은 1834년 6월 19일 홀란드계 혈통으로 잉글랜드 에섹스(Essex)주 켈베돈(Kelveden)에서 아버지 존(John Spurgeon) 목사와 어머니 엘리사(Eliza)사이의 1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자유교회의 설교자들이었던 조부 및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꾸준히 종교적 지식을 섭취할 수 있었다.7) 특히 조부인 제임스 스펄젼(James Spurgeon)로부터 깊은 묵상과 다량의 독서 등 훗날에 자신을 설교의 왕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다가 그는 16세 되던 1850년 1월 6일, 눈보라치던 아침에 콜체스터(Colchester) 수구파 감리교회의 이름 모를 설교자의 감화를 받아 회심을 체험하게 되었다.8)
스펄젼의 회심체험은 요한 웨슬리(John Wesley)의 회심체험9)과 비슷한 면이 없지 않다. 그가 콜체스터 교회를 향해 가고 있던 중에 눈보라로 인하여서 잠시 옆길로 피해서 한 교회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이름 모를 한 남자가 성경 본문 이사야 45장 22절의 “땅 끝의 모든 백성들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10)라는 구절을 읽는 것을 듣게 되었고, 그순간 회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 그는 1850년 10월 12일 워터비치(Waterbeach)농촌교회에서 평신도 설교자로 첫 출발을 하게 되었고 거의 2년 반 동안 목회 사역을 감당하였다.11) 워터비치의 사역 이후에 그는 1854년 런던에 있는 뉴파크 스트리트(New Park Street)교회의 청빙을 받아 80명의 교인을 1년 만에 2만 명으로 부흥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일부의 중상과 비방 등의 시련을 극복하고 6천 석의 대성전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을 세운 스펄젼은 이후 30여 년 동안을 같은 교회에서 그 능력과 감화가 조금도 줄지 않은 위대한 설교를 계속하였다.12) 스펄젼의 회중 집회는 복음주의 설교로 일관해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의 복음주의자들에게 큰 감명을 준 것을 비롯, 통산 일천만 명의 사람들에게 설교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공중연설에 숙달되고, 분명하고 자연스러운 음성과 제스추어를 가진 그는 청중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천부적인 설교자였다.
그는 설교자로서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하였다. 스펄젼대학(Spurgeon's College)을 세워서 많은 설교자들을 키워내었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서 스톡웰(Stockwell) 고아원을 설립하였다. 또한 문서목회에서도 많은 관심을 쏟았는데, 속독의 솜씨만큼이나 다작이어서 230여종의 저서와 63권의 설교집, 그리고 그의 필생의 사역이었던 월간지「The Swore and the Trwoel」은 1865년 1월에 창간되어 성경, 교리, 행정, 의식 등을 수록하고 그 성가를 더욱 높였다.13)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 계속되는 회중설교, 독서와 출판, 그리고 벅찬 논쟁들이 드디어 50대의 목사를 쓰러지게 했다. 하루 18시간을 활동하던 스펄젼은 심한 통풍으로 인한 프랑스 전지 요양 중 58세 되던 1892년 1월 31일 주일 저녁에 세상을 떠났다.14)
Ⅲ. 스펄젼의 설교신학
1. 설교에 대하여
스펄젼에게 있어서 설교란 영혼들을 구원하며 그들을 회심케 하는 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물론 영혼들의 회심 여부에 상관없이 설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된다면, 설교자는 헛수고를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설교하도록 내 보내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사람들이 그 분과 화해하고 회심을 체험하도록 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설교자는 “사람들의 회심을 마음에 두고 그것을 기대하고 그것을 위해 준비하면서 사람들의 회심이 설교의 직접적인 결과가 되도록 하라”15)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설교는 회심을 위한 설교이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을 그는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 있다.
...대부분 설교라는 일은 듣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그 의도가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으뜸가는 목표라면 우리는 성도들을 양육하고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에 힘씀으로써 그 목표를 향해 매진해야겠다16)... 이 목표를 위해 우리는 복음의 가르침을 선명하게 제시하고, 우리의 중요한 체험, 그리스도인의 임무를 분명히 일러 주지 않으면 안 된다.17)
설교의 의의가 회심에 있다면, 회심사건들이 일어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일이 선행되어야만 하는데, 스펄젼은 그것을 그리스도, 그것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라고 하고 있다. 설교에 있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선포는 영혼들을 회심시켜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설교의 대주제는 영혼들로 하여금 회심을 체험케 하는 근원이 되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이었다.
2. 설교자에 대하여
스펄젼에게 있어서 설교자는 청중들이 주 예수님을 믿는 것을 눈으로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어야 하며 따라서 필요하다면 비통한 울음을 울면서라도 영혼을 회심시키기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영혼을 회심시키는 일을 위해서 설교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자질을 “전진”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말하는 설교자의 전진시켜야할 자질을 살펴보면18), 첫째는 설교자는 정신적인 학식에 있어서 전진을 보여야 한다고 말한다. 신학과 성경에 있어서 연구하고 학식을 갖춰야 하며 자연과학과 생물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들에서도 지식을 습득해야만 한다. 두 번째는 웅변의 자질에 있어서의 전진이며 세 번째는 도덕적 자질에 있어서의 전진, 네 번째는 영적인 자질의 전진, 다섯 번째는 실제적인 일에 있어서 전진, 여섯 번째는 행동 영역의 선택에 있어서의 전진이다.
3. 성경 해석
스펄젼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영해을 사용하는 것을 긍정하였고 권면하기까지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영해는 지루한 형식의 상투 수단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 중에 하나요 입에 맞지 않는 진리를 맛있게 하는 일종의 소금 역할을 하는 해석법이었다.19) 그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영해를 긍정하는 목소리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한계만 지킨다면... 영적인 해석을 내리거나 특이한 본문을 택하는 걸 겁내지 말라. 성경의 문단을 계속 파고 들면서, 우리의 마땅한 의무에 따라서, 거기에 담긴 평범한 의미를 파악할 뿐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까지도 캐도록 하라...이건 정말 진지하게 권하는 말이다. 일정한 한계와 선 안에서 영해를 사용하되...20)
실제로 그가 비유와 상징, 풍유를 포함하는 영해를 그의 설교에 적용한 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 이런 겨울 날씨에도 진지하게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들이 있습니다. 영혼의 정원에서는 여러분이 일년 내내 향기로운 꽃들을 볼 수 있겠죠. 영혼의 정원에도 다른 모든 정원에서처럼 겨울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본문에서는(아2:1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수선화와 백합이 피기 시작하자 겨울이 떠나가고, 여름이 웃으며 다가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정원에서는 여름이 와야만 수선화가 핍니다. 그러나 마음의 울타리 안에서는 수선화와 백합들이 피어야 여름이 다가옵니다. 나는 우리가 이 아침에 천상에 있는 명상의 밭에서 거닐 수 있는 은혜와, 그 뺨이 향침상과도 같고, 그 입술이 향기로운 몰약을 떨어뜨리는 백합화도 같으신 분의 비할 데 없는 매력에, 경탄케 되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본문의 정신을 표현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수선화라고요? 그분과 같이 그런 향기로운 꽃은 사론의 들에서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분이 백합화라고 한다면, 온 골짜기가 진한 향기로 진동할 것입니다.21)
스펄젼은 아가서 2장 1절을 본문으로 하는 위의 설교에서 수선화와 백합화를 예수님으로 영해하고 있다. 성도들이 수선화와 백합화 자체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실 때에, 수선화와 백합화의 향기가 사론과 골짜기를 가득 채우듯 예수님의 향기가 성도의 삶 속에 발하여진다고 해석했다.
이처럼 스펄젼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어느 정도 한계와 선을 그어놓은 상태에서 영해를 긍정하고 자신의 설교에 적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설교자들에게 있어서도 적절한 영해를 잘 사용한다면, 설교를 듣는 성도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며 그들의 눈을 초롱초롱하게 만들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4. 수사학적 기교
1) 감각적 호소
스펄젼은 자신의 설교에 있어서 사람의 오관에 호소하는 감각적인 요소들을 자주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청중들로 하여금 스펄젼의 설교를 즐겁게 경청하도록 하는 요인이 되었다. 스펄젼은 특히 감각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 이것은 명령이나 질문 형식으로 나타났는데, 상당히 권위적이며 어느 정도 독단주의적인 면이 있을 뿐 아니라, 현대 설교의 특징과는 다소 다른 용기와 담대함을 요구하였다.
실제로 스펄젼의 설교를 인용하면서 그가 어떻게 사람의 오관에 호소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우선 시각에의 호소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그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가난한 자들에게로 가십니다. 병원에 계신 그를 보시기 바랍니다... 수많은 소경과 절름발이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그 중에는...점점 생기를 잃어 가고 있는 사람들과 다른 이들이 기뻐하는 동안 괴로워하는 사람들... 한숨짓는 아픔에 지친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비를 베푸시며 이곳에 계셨습니다22)
위의 인용에서 볼 때, 스펄젼은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 말하면서 청중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청중들의 시각에 호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사람과 같은 사람이 오늘 우리 회중 속에 들어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구주께서 정신의 말짱하고 이성적인 사람들 앞에서 그를 소생시킬 때에야 비로소 그 사람을 봅니다... 그런 사람을 보신 적이 없습니까?... 또 귀신들린 사람이 최악의 상태에 있었음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복되신 우리 주께서 오래 전 더러운 귀신이 들렸던 그 사람에게 눈을 맞추시는 것을 보십시오.23)
위에서는 청중들이 귀신들린 사람의 비참한 상태를 그려보고 그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어 가고 있다.
스펄젼은 계속해서 청각에 대한 호소에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아마도 스펄젼의 음성이 천성적으로 우렁차고 컸던 것도 청각에 대한 호소에 큰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24) 다음의 인용은 “밤을 부르는 노래”라는 설교에서 가져온 것으로 스펄젼의 청각에 대한 호소가 잘 나타나 있다.
여러분들은 밤 바닷가에 서서 조약돌이 노래하는 것과 파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소리를 들어보신 일이 없으십니까? 아니면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밤의 노래소리를 들으신 일은 없으십니까? 무엇을 들으십니까? 적막-가끔 들리는 밤의 신음 소리를 제외한다면 달콤한 음악처럼 들릴 것입니다. 또한 하늘에서 울리는 하나님의 비파소리를 듣는 듯한 환상에 젖어보신 일은 없습니까? 저 멀리 보이는 별들이 마치 하나님의 눈처럼 여러분을 굽어 보면서 입을 벌려 노래하는 것처럼 느끼시지는 않았는지요. 하늘의 모든 별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면서 빛을 발하고 전능하신 창조주와 그 놀라운 우주의 법칙을 높이높이 찬양하는 듯합니다. 밤은 그 나름대로 노래가 있습니다. 밤의 노래소리를 듣고 밤의 찬미를 알기 위해서 시인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비록 귀에는 적게 들린다 해다 마음 속에는 큰 소리로 울려퍼지면 하늘의 장막을 두르시고 별들을 제 갈 길로 인도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25)
위 인용은 청중들로 하여금 노래를 듣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청각에 대한 호소가 뛰어나다. 이처럼 노래와 찬양소리가 들리는 듯한 스펄젼의 이와같은 설교를 듣는 청중은 누구나 스펄젼의 설교를 즐겁게 경청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스펄젼은 촉각적 호소도 사용하였는데, “손가락을 내미시오, 손가락을 내미시오. 믿음의 기도와 소망으로 주님을 만지기 전까지는 결코 멀리 떠나가지 마십시오.”26)에서 보듯이 청중들로 하여금 주님과 접촉한다는 느낌을 갖게 하였다.
스펄젼이 사용한 미각적 호소는 다음의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손에 꿀을 가지고 아직까지도 계속되는 연회를 위해 천국의 꿀맛을 보여 주시며 주위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27)
향기는 스펄젼이 즐겨 사용한 것으로 후각적 호소에 영향을 끼쳤다.
“복음의 아름다운 향기는 대기를 달콤하게 만들도록 퍼져 나아가야 합니다28)...그 곳은 죽음의 습기로 축축해져 있지 않은 곳이며 공기까지도 추한 냄새라고는 맡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무덤에는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지만... 그리스도의 무덤에는 오히려 아름다운 향기가 그윽합니다.”29)
2) 격언 및 속담의 사용
스펄젼은 그의 설교에서 자주 격언이나 속담을 사용하면서 그 속에서 긍정적 요소나 부정적 요소들을 발견해 내어 그것을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변화시켰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한 사람이 말을 물가로 데려갈 수는 있지만 스무 명의 사람이 말에게 물을 먹일 수는 없다. 이처럼 우리가 영혼을 약속으로 인도할 수는 있어도, 스무 명의 사람이 와도 그 영혼으로 하여금 그 약속을 받아들이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여호와의 영이 그에 대항해서 깃발을 세우리라. 그리고 고통 당하는 영혼들이여, 여러분의 경우에 그 깃발은 십자가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눈앞에 고통 당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세우실 것입니다.”30)
위의 속담을 통하여서 스펄젼은 말에게 억지로 물을 먹일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복음을 억지로 믿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에만 복음이 역사한다는 것을 설득하려고 하였다.
5. 설교 사역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할
스펄젼은 설교의 목적인 회심은 하나의 신령한 일이기에 설교자는 그의 설교 사역 전체에 있어서 전적으로 성령에 의존하여야 하며 인간들의 마음을 사는 힘을 달라고 그분을 붙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떠한 면에서 설교자는 성령의 도움을 구할 수 있는가? 스펄젼은 이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첫째는 성령은 지식의 영이다.31)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절실히 연구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이 있을 때에라야만 연구와 묵상은 하늘의 보화를 가져다 준다. 만일에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많은 연구들이 쓸모없게 될 것이다. 둘째는 성령은 지혜의 영이다.32) 지혜가 따르지 않는 지식은 위험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령의 지혜로 말미암아 아는 것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 또한 듣는 대상에 따라서 다르게 전하는 지혜도 성령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셋째는 설교자는 입에서 나오는 발언뿐 아니라 설교 전체의 전달에 있어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필요로 한다.33) 넷째는 설교자가 복음을 드러내고 그것의 효과를 보려면 전적으로 성령에 의존해야 한다.34) 올바른 종류의 효과, 성도들에게 보다 더 고상한 것을 일깨워 주는 것,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주님께 보다 더 밀착하게 되는 것, 의심에 빠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포에서 빠져 나올 때까지 위로하는 것, 죄인들의 회개, 죄인들이 당장 그리스도를 믿는 일, 이런 종류의 효과는 설교자가 성령의 능력을 알아차릴 때에 가능한 것이다. 다섯 번째, 간구의 영으로서 설교자는 성령을 요청한다.35) 영혼을 회심케 하는 진지한 설교에는 풍성한 기도가 따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6.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스펄젼은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전하는 설교학 강의에서 음성 몸짓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쩌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너무 지나치게 다룬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할 수 만 있다면 좋겠다. 나는 연사들이 그 하찮은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아 걸려 넘어지는 것을 수없이 보아 왔기 때문에 그 항목이 꼭 필요한 것으로 느끼는 사람이다. 연사가 어색하고 별난 행동으로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쏠리게 하지만 않는다면 그의 몸짓과 손짓이 별 문제가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주님의 메시지가 엉성하게 얘기되기 때문에 망쳐지는 것을 보거나, 전달자의 괴상한 태도 때문에 그 메시지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는 걸 보는 것은 슬프다.36)”
이처럼 스펄젼은 설교의 대주제인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그의 메시지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음성과 몸짓을 중요시하였다.
스펄젼은 설교자의 음성에 있어서 몇가지 주의해야할 점을 그의 설교학 강의에서 언급하였다.37) 먼저 설교자는 음성에 관한 것을 너무 중대시하지 않는 것이 좋다. 보다 마음으로부터 솟구치는 힘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는 사람의 음성이 남에게 받아들여지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율조가 복음 선교에 사용되도록 유념해야 한다. 또한 설교자는 설교자가 말하고 있는 사항에 적합한 것으로 자신의 음성을 만들어야 한다. 슬픈 사항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즐거운 기분으로 말해서는 안되고, 하늘의 천사들의 가락에 맞춰 춤이라도 춰야할 것 같은 기쁨에 찬 가벼운 발걸음을 옮겨야 할 장소에서 무거운 발을 질질 끌어서는 안될 것이다.
설교자의 몸짓에 대해서 스펄젼은 자연스런 것이 제일 좋다고 한다. 설교자의 몸짓은 늘 설교자 자신의 것이 되어야지 갈아서 만들어낸 거짓이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38) 설교자는 영혼을 얻기 위해서 파견되었고 청중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집중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이기에 그의 몸짓이 훌륭하게 표현되든지 또는 최악의 것으로 표현되든지 간에 훼방거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러운 몸짓은 청중들이 설교자보다는 메시지에 더욱 집중하도록 도울 것이다.
Ⅳ. 오늘의 한국 교회에 주는 의미
첫째, 스펄젼은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 광범위하고도 심도있는 준비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설교의 근원이 되는 성경을 깊이 묵상하였고 또한 자연과학 및 생물학 등을 비롯한 다방면의 독서를 하였다. 이러한 점은 그의 설교를 더욱 풍성하게 해 주었고, 다방면의 사람들에게 쉽게 복음을 들려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언젠가 대학선교단체 모임에 참석했다가 어느 강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강의 도중에 불쑥 “공부 안하는 목사님들 많잖아요! 그쵸? 모르나본데,많아요...”라는 말을 그분이 내뱉었는데, 그순간 화가 나기는커녕 얼굴이 달아오르는 부끄러움을 금치 못했다. 설교자는 설교자이기 위해서 성경 연구가가 되어야할 것이요, 신학자가 되어야 할 것이며 현대사회 모든 영역에 열린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는 학자적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다. 이런 면들을 오히려 우리의 양떼들은 기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스펄젼은 이런 점에서 훌륭한 모범이 된다.
둘째, 그의 설교의 목적은 회심이었다. 영혼을 구원하려는 열정 속에서 그의 설교는 존재할 수 있었다. 영혼을 회심케 하지 못하는 설교라면, 그것은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회심은 비단 스펄젼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설교자들에게 요청되는 우선순위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는 구령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설교만이 난무하고 있지는 않은지... 회심이냐, 양육이냐라는 질문 앞에서 통합적인 대안을 모색하지 못한채, 회심을 잊어버린 설교가 한국강단에서 흘러나오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스펄젼의 설교를 반드시 경청해야만 한다.
셋째, 스펄젼은 천부적인 설교자로서의 재능에도 불구하고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였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기에 그의 설교에는 흘러넘치는 기도가 있었다. 도대체 어떤 설교자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영혼을 구원하는 설교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신령한 일은 신령한 일로 말미암는다. 따라서, 한국강단의 설교자들은 설교자이기 이전에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스펄젼은 대학을 세우고 사람을 키웠다. 설교에 대한 자신의 영감과 방법 그리고 영향력들이 확대․재생산될 수 있도록 그는 사람을 키우는 일에 힘을 썼다. 후계자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반드시 혈통으로만 교회를 세워가려는 한국교회의 현실은 스펄젼을 너무나도 필요로 한다.
다섯째는 스펄젼에게서 배우지 말아야할 점이다. 그가 설교에만 절대 치중함으로 인하여서 예배의식이 약화되었던 것을 우리는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은 오직 설교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을 위한 집회장소만으로 생각한 건물이었다는 평가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쏟아지는 질책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여섯 번째도 배우지 말아야할 점인데, 스펄젼이 고아원을 운영하고 나름대로 사회적 활동을 하려고 했지만, 부흥설교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대사회성 및 역사성이 부족하였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균형있게 자라야 한다. 그래야 건강할 것고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의 기지로서 사명을 감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들이 연합하여 고아원, 양로원, 무료병원, 복지관 등등을 교회의 주력 사업으로 삼는 것도 의미있을 것이다.
Ⅴ. 무디 시대의 고찰
1. 시대적 상황39)
남북전쟁 이후 19세기 후반 미국의 인구는 급증하게 되었다. 인구가 급증하게 된 주요인은 유럽 각지로부터 건너온 이민자들에게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급격했고 기존 질서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들은 유럽 각 지역에 살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각각의 문화와 풍습을 미국에 와서도 그대로 유지하였고 더욱이 신앙과 삶의 방식도 같은 기독교 안에서 매우 다양한 모습을 가졌다. 이로 말미암아 19세기 초까지 유지되고 있던 미국 개신교의 단일성은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이제부터 신앙의 다양성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서부 개척의 활성화도 인구 급증에 한 몫을 했다. 지역 개발과 인구 증가로 인해서 부가 증가되었고, 그 부는 다시 개발을 증진시키고 인구를 증가시켰다.
이미 유럽에서는 탈기독교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오히려 미국에서는 2차 대각성 운동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미구의 급증하는 인구와 부, 그리고 교회의 활기 등으로 기독교는 자연히 미국에서 크게 성장하였다. 그리고 유럽 교회를 돕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급속한 산업화와 때를 같이 하여 일어났다. 당시 미국에서는 토지, 삼림, 광산 등의 분야에 엄청난 천연 자원이 개발되었다. 또한 기계가 만들어지고 공장이 세워지고 수송 수단들이 개발되었다. 이러한 산업화는 도시의 성장을 가져온 동시에 농업 인구를 감소시켰다. 때문에 전도도 농촌 지역을 상대로 하던 방법에서 벗어나 산업화된 도시를 겨냥해야만 했다.
도시화에 덧붙여 지방색과 지역 간의 갈등은 남북 전쟁 이후 더 커지는 것 같아 보였다. 남부는 본래부터 거의 독립적인 문화를 가진 국가로 생각되었다. 1860년대까지 그곳은 노예 제도에 기초한 농업 경제지역이었다. 그러나 남부는 전쟁에 지고 노예도 잃으면서 무서운 공황에 빠지게 된다. 물론 노예들이 다시 값싼 노동력자로 바뀌지만 남부인들이 겪은 참담함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 있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급격한 다원화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것은 큰 문제였다. 또한 여러 가지 인종적인 복합성은 인디언, 흑인들의 문제를 넘어서 유럽의 여러 인종들 간에도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이것도 문제거리였다. 그 밖에도 동부는 안정되었지만 서부는 계속 개척되어야 하는 황무지요 불안정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신앙적으로 바른 각성을 주었다. 2차 대각성 운동이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서 미국 개신교는 개인의 영혼들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복음주의적 신앙40) 노선에 서 있었다.
불안한 사회 상황이 바른 신앙의 각성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단들의 토양이 되기도 하였다. 이단들은 더욱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하였는데 이 당시에 나타났던 주요 이단들을 살펴보면, 밀러(William Miller)의 시한부 종말론, 엘렌 하몬(Ellen Harmon)의 제 칠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러셀(Charles Russell)의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몰몬교 등이다.
2. 무디(D. L. Moody)의 생애
영국의 대설교자 스펄젼과 거의 비슷한 때인 1837년에 태어난 무디는 메사추세츠의 이스트 노스필드에 있는 가난한 노동자의 가정이 그의 고향이었으므로 우선 강단에 서는 꿈은 그만 두고 생존의 위기에서 허덕이는 삶을 지내야 했다. 열 일곱 살의 스펄젼이 벌써 말씀을 들고 강단에 섰던 반면, 열 일곱 살 되던 해의 무디는 지독한 가난을 견디다 못해 고향을 떠나 구둣방 점원이 되었다.41)
구두를 팔고 고치는 일 밖에 모르던 그에게 구원의 소식이 다가왔다. 주인인 삼촌이 무디에게 교회에 나갈 것을 권유했고 그는 거기서 주일학교 교사인 에드워드 킴볼(Edward Kimball) 선생을 만났다. 그 선생님께 감화받은 후로부터 믿음도 자라고 구둣방 일도 더욱 흥왕해져 갔다.42)
그후 시카고로 삶의 터전을 옮긴 그는 구두판매업계의 외판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어느 정도 재산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귀중한 사실은 그의 관심은 전도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주일학교까지 시작하게 되었다. 특히 구제 불능으로 보이는 아이들을 모았는데, 그들이 무디 밑에서 놀랍게 변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는 스스로 자기가 설립한 주일학교의 교장이 되어 1500명의 학생들을 지도했다. 덧붙여서 그는 YMCA일을 보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구두 판매 사업을 그만두고 여기에서 집행 위원으로 활동했다.43)
무디는 정식 군목은 될 수 없었지만 남북전쟁의 상처가 원한과 복수를 부르고 있는 자리에 스스로 달려갔다. 계속해서 무디는 그의 고향을 비롯 미국의 각 도시들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영국에까지 순회전도하였다. 특히 1867년에 방문했던 영국에서의 전도 활동은 대성공이었고 여기에서 죠지 뮬러와 찰스 스펄젼을 만나기도 하였다. 이후 무디는 수차례 영국을 방문하여 복음 전도 활동을 펼쳤다.
무디의 일생에 있어서 중요한 두 사람이 있다. 그 한 사람은 아이라 생키(Ira Sankey)로 훌륭한 음악가이다. 무디의 집회 때마다 반주하며 노래하는 그의 모습은 말씀을 갈망하는 수많은 청중들의 마음을 이미 사로잡아 놓기에 충분했다. 또 한 사람의 동행자는 그의 부인으로서 무디는 마지막 순간에도 부인에게 실로 많은 유익을 얻었음을 말하였다.
무디와 생키는 조그마한 찬송가를 발간하였는데 20년쯤 지나서는 인세만 해도 125만 달러가 넘었다. 무디는 수익금으로 몇 개의 교육 기관을 세웠는데 노스필드 여자 신학교, 마운트 헬몬 고등학교, 시카고의 무디 성경학교 등이 그것으로서 설교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의 심령을 밝히는 등불의 역할을 수행케 하였다.
1892년 무디는 잠시 성지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런던으로 돌아가던 중 심장의 이상을 느끼게 되었다. 건강 문제로 그는 대중 집회를 사양하고 조용히 예배를 통하여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전에는 어떠한 장소이든, 어떠한 대상이든 몸을 아끼지 않고 외치던 그였다.44) 1899년 12월 22일 그는 생전에 확신있게 외친 대로 천국에서의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
Ⅵ. 무디의 설교신학
1. 설교에 대하여
무디는 설교를 복음전도와 동일한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가 주일 학교 집회나 부흥 집회에서, 성회에서, 자신이 설립한 학교에서 가졌던 질문과 답변에서 그의 이런 생각이 드러난다.
저는 일 년 52주 동안 매주 복음 전도 집회를 열겠습니다... 양들을 잘 먹여서 양들이 모두 설교자가 되면... 스무 곳에서 집회를 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목사가 자기 교인인 판사 한 분에게 부탁을 했답니다... 판사님, 제가 지금 학교 관사로 설교하러 갑니다... 저는 판사님에게 설교를 부탁하려고 하려고 하는데요... 자 이제 기도한 뒤에 성경 몇 구절을 읽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판사를 증인석에 세우고 심문할 것입니다. 목사는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고 판사는 질문에 답변하면서 설교를 한 셈이 되었답니다... 우리가 회중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강단에 서게 할 수만 있다면 이 나라를 복음화시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목회자들만의 힘으로는 결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45)
영국의 설교자 해리 무어하우스(Harry Moorhouse)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무디의 설교는 하나의 중심 메시지를 향해 달려갔는데 그것은 그의 일평생의 설교에 있어서 대주제가 되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여기에는 어떤 두려운 심정이나 갈등의 잔해가 남을 수 없는 교파와 지역의 모든 장벽을 뛰어넘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생을 두고 이 하나의 주제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고 자료를 모으고 또 나아가 설교하였다.46)
2. 설교자에 대하여
무디는 주일 학교 집회나 부흥 집회에서, 성회에서, 자신이 설립한 학교에서 가졌던 질문과 답변을 통하여 그가 이해하는 설교자를 말하고 있다.47) 첫째는 설교자는 청중들로 하여금 설교자가 설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얘기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설교자는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주제를 다룰 때의 어조로 신앙의 문제를 설교 즉 얘기해야 한다고 보았다. 둘째는 설교자는 청중들로 하여금 설교가로부터 눈을 돌려 설교하는 주제 자체에 관심을 갖도록 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로마의 위대한 웅변가 키케로(Cicero)와 그리스도의 웅변가 데모스데네스(Demosthenes)의 예를 들었다. 전자의 경우 사람들은 “정말 기가 막힌 연설이군! 대단한 웅변가야!”라고 말을 했지만 반면에 후자의 경우 사람들은 “나가서 빌립보와 싸우자!”라고 말했다. 따라서 설교자는 청중들이 설교자를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주제를 파악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설교자는 청중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그들의 마음을 얻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회중을 사로잡아서 예수께로 인도하려면 마음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3. 성경해석
무디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고 명철한 신학 사상을 가진 것도 아니었기에 신앙의 체계적 성장을 위한 설교나 성경해석방법은 비교적 간단하거나 없었다고 보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디 나름의 성경해석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은 한가지 주제나 단어, 예를 들면 ‘은혜’, ‘소망’, ‘양자됨’, ‘확신’, ‘사랑’ 등을 선택한다. 그 다음에는 색인이나 주제별 성경을 이용해서 선택된 주제와 연관이 있는 모든 구절들을 찾아낸다. 그리고나서 각 구절들에 강조점을 두면서 그것의 뜻을 명확하게 해줄 만한 몇 마디 말을 첨가하거나 적당한 예화를 들어 증명한다. 이 방법은 무디가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었다.48)
4. 설교준비
무디는 설교를 준비할 때에 다음의 방법들을 주로 사용하였다.49) 첫째는 큰 봉투를 준비한다. 그리고 이 봉투에 설교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해서 수시로 채워넣는다. 둘째는 성경에 백지를 끼워서 메모한다. 그는 설교준비에 쓸 성경을 우선 한 권 준비해서 그 여백에다 가득 설교준비를 위한 메모를 해 나간다. 그래도 부족하기 때문에 성경책의 매장 사이마다 백지를 한 장씩 끼워서 거기에다 메모를 했다. 셋째는 초고는 충분한 여백을 두고 써 나간다. 봉투에 모아진 자료와 성경에 메모한 자료들을 놓고 설교를 작성하는 단계로 들어간다. 무디는 매튜헨리의 주석을 부단히 상고하면서 설교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는 성경 주석을 참고하면서 서술해 나가기 시작한 그의 노트는 많은 여백을 두고 써 나가기 시작한다. 넷째로 모방을 피한다. 무디는 하나의 설교를 수십번 반복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그는 자신이 설교를 준비할 때 누가 사용했거나 또는 한 번이라도 사용했던 내용과는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독창적인 자기 설교를 만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다는 증거일 것이다. 다섯 번째 비평가들을 지조 없게 만들었다. 무디는 문법에서의 실수와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함에 대해서 비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기도와 명상과 성경 연구에 몰두하는 겸손한 설교 준비가였다. 하루에 3시간 이상을 성경공부에 열중했다. 무디가 죽은 이후 비평가들은 다른 각도에서 무디의 설교를 논의했다. 그가 적시적소에 사용했던 예화들은 모두 생생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풍부한 상상력과 단순한 문장으로 청중의 심리를 파고드는 데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비평가들의 논조를 변경시킬 만큼 무디는 설교 준비에 성실하고 최선을 다했다.
5. 수사학적 기교
1) 장엄한 문체
무디의 설교에서 비록 균형 잡힌 문장이나 세련된 기교나 수사법은 발견해 낼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의 설교에는 어떤 웅변가도 보여 주지 못하는 감흥과 장엄함이 들어있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청중들로 하여금 감동시키며 완전히 설득하는 것이다. 장엄함이 깃든 그의 설교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주위에 둘러선 적은 무리를 향하여 말씀하시던 모습을 그려 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하라.’ 이에 베드로는 ‘아니 주님, 지금 우리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주님을 죽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가서 나의 얼굴에 침 뱉던 자를 찾아내어 지금이라도 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해 주어라. 그래, 베드로야, 가서 그 잔혹한 가시 면류관을 만들어 내 이마에 씌운 사람을 찾아 그가 나의 왕국에 들어올 때 그를 위해 내가 면류관을 예비해 놓겠다고 말해 주어라. 가시면류관이 아닌 금 면류관을 주겠다고 말이다. 갈대를 취하여 가시관 위에 올려 놓아 내 이마를 찌르게 만든 사람도 찾아내어, 그가 나의 구원을 받아들인다면 내가 그의 손에 홀을 쥐어 주어서 온 나라를 다스리게 하겠다고 말하여라. 창으로 내 옆구리를 찌른 사람도 찾아내어, 창으로 내 옆구리를 찌르는 것보다 나의 품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길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어라. 내가 그를 조건 없이 용서했으니 그가 구원을 선물로 받아들인다면 그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50)
2) 상상력
무디는 성경의 이야기를 단순히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마치 청중들이 한편의 소설을 듣는 것처럼 설교하였다. 위에서 인용한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도 그가 발휘한 상상력이 풍부하게 담겨져 있다.
한편으로는 “하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설교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서 죽어가다가 놋뱀을 쳐다봄으로 고침을 받았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51), 여기에서도 무디는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하여서 마치 이야기하듯 설교를 하고 있다. 그의 설교 속에서 이러한 기법들을 발견하기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3) 예화
무디에게 있어서 예화의 사용은 설교의 창문의 수준이 아니었다. 이에 대해 정장복은 “예화가 계속 쏟아진다.”라고 표현하였는데, 그만큼 많은 예화를 무디는 자신의 설교에 사용하었다. 그러나, 그의 예화는 문학과 예술이 응용된 고도한 이야기란 거의 없었다. 진실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그래서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순수한 이야기들만이 살아 움직였다. 그 자신이 감동적으로 받아들이고 또 구원에 이르게 했던 바로 그 이야기가 설교로 이루어지는 현장에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셨던 것이다.52) 구체적으로 설교문을 통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러분에게 필라델피아의 한 어머니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다른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런던에 있었을 때 한 화랑에서 검은 색 옷을 차려 입은 한 숙녀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스코틀랜드의 던디에서 설교했을 때 한 어머니가 하나는 16세, 하나는 17세된 아들 둘을 데리고 왔습니다...친구들이시여,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53)
6. 설교사역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할
무디는 자유감리교회의 이름 모를 두 명의 여인으로부터 성령의 능력을 받을 필요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민하고 기도하던 중에 자신의 상태를 깨닫게 되었다. 무디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내가 의욕적이었던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설교한 게 아니라 나의 의욕을 위하여 설교했습니다. 내 마음에 들어 있는 모든 것들이 그 안에 있으면 안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4개월 동안 나 자신과의 씨름이 계속되었습니다. 나는 정말로 비참한 인간이었습니다.54)
이후에 무디는 회심의 순간에 성령의 내재와 그 후에 능력으로 충만한 것의 차이점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설교 사역에 있어서 특별히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져야한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쉽게 다가갈 수 있으며 어디서나 회심자들을 얻을 수 있다고 무디는 믿었기 때문이었다.
Ⅶ. 오늘의 한국 교회에 주는 의미
첫째, 무디는 평신도 설교자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평신도가 설교를 해도 되느냐에 대한 논쟁은 제쳐 두기로 한다. 무디는 평신도였지만 목회자들도 이뤄내기 힘든 엄청난 일들을 해 냈고 영향력을 끼쳤다. 이는 평신도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의 살아있는 예증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한국 교회에서 생겨나기 시작하는 평신도 개념은 무디의 경우에 의해서 지지될 수 있다. 평신도들이 설교권을 갖는 것에 대해서는 발제자는 반대한다. 다만 무디가 평신도 설교자였다는 사실은 평신도들을 목회에 있어서 동역자로 생각하고 함께 교회를 섬긴다는 측면에서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둘째, 무디는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도자로서, 설교자로서 쓰임받았다. 열정이 은사와 실력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예라고 하겠다. 물론 은사계발도 중요하고 적절한 은사배치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열정과 충성이다. 한 달란트 받았다고 해서 꼭 한 달란트만 일하라는 법이 어디에 있을까!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다섯 달란트 받은 종만큼 죽도록 충성하다가 정말 죽었을 때에...주님이 책망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은사와 실력을 뛰어넘는 무디의 열정과 충성을 우리는 진지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
셋째, 스펄젼에서 본 것처럼 무디의 설교에도 복음전도는 중심이었다.
넷째, 주일학교의 중요성을 무디는 일깨워 주었다. 무디를 무디 되도록 출발시킨 것도 사실은 주일학교였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크게 성장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 주일학교에서 사역을 경험해 보기 때문이다. 다만 무디가 가졌던 공격성만은 결여된 듯 하다. 무디는 자신에게 맡겨진 아이들이 없는 상태에서 아이들을 끌어모았다. 이러한 면을 배우는 주일학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무디의 이런 면이 우리들에게 부족한 것은 주일학교의 교과과정이 양육위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양육이 중요하다면 동일하게 회심도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깊이 생각하는 개교회들이 되어야할 것이다.
다섯째, 목회자는 반드시 가슴을 뜨겁게 하되 날카로운 신학을 세워야 함을 평신도 설교자 무디가 보여주었다. 그의 복음전도에 대한 열정은 본받아야할 중요한 점이지만, 그는 세대주의 신학에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 그가 완전히 세대주의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영향을 받은 것만은 사실이다. 바른 신학이 건전하고 균형잡힌 교회를 세우며 또한 계속해서 확대․재생산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Ⅷ. 나오면서
스펄젼과 무디는 생전에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만남은 의례적이고도 형식적인 만남이 아니라 진실한 우정을 나누고 사역을 격려하는 만남이었다. 그들의 만남을 이처럼 진실된 우정으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국적도 달랐고 자라온 배경도 달랐다. 배움의 정도도 달랐고 사역의 배경도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하나로 묶었으며 평생토록 서로를 존경하고 그리워하게 만들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영혼에의 열정이었다. 영혼을 향한 눈물과 헌신의 끈이 이국만리 떨어진 이들을 하나되게 한 것이다.
영혼을 향한 눈물과 헌신의 삶을 살았기에 그들은 설교하였고 설교에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이 부어주신 천부적 재능과 은사들이 아름답게 열매맺게 된 것이다.
설교자로 부름받았고 설교자로서 살아가길 원하는 우리들은 스펄젼과 무디의 설교자로서의 출발점을 배워야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설교하도록 하였고 그것에 목숨을 걸게 만들었던 영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인 것이다. 이것을 우리의 마음에 담는다면, 스펄젼과 무디는 자신들의 친구로 우리들을 불러줄 것이다.
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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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하)』.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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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imore, Arnold. Spurgeon. 김동진. 『찰스 스펄젼』.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3.
Day, Richard. 『스펄젼의 생애』.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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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urgeon, C. H. Lectures to my students. 이종태.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서울: 생명의 말 씀사, 1982.
Sweeting, George and Donald. Sweeting. Lessons From the Life of Moody. 국백련. 『무디의 삶이 주는 교훈』.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1.
Wubbels, C. Lance. The Power of Christ's Miracles. 정정숙. 『그리스도의 이적의 능력』. 서 울: 예수전도단, 1996.
1) 이 부분은 주로 아놀드 A. 델리모어의 자료를 주로 인용하였다. 아놀드 A. 델리모어, 김동진 역『찰스 스펄젼』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3), 11-12쪽.
2) 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하)』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0), 57쪽
3) 이형기, 『세계교회사 Ⅱ』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4), 445쪽
4) 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하)』, 57쪽.
5) 아놀드 A. 델리모어, 『찰스 스펄젼』, 264쪽.
6) 위의 책.
7) 위의 책, 58쪽.
8) 위의 책.
9) 요한 웨슬리는 엘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모임’에서 어떤 이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을 읽는 것을 들으면서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10) Richard Day, 『스펄젼의 생애』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2), 62쪽.
11) 위의 책, 80쪽.
12) 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하)』, 58쪽. C. E. Fant, M. Pinson, 20 Centuries of Great Preaching Vol Ⅵ (Texas: Work Books, 1976), p. 4. 에서 “재인용.”
13) 위의 책, 59쪽.
14) 위의 책, 60쪽.
15) 찰스 스펄젼, 김병로 역, 『스펄젼의 설교학』 (서울: 신망애출판사, 1979), 76쪽.
16) 찰스 스펄젼, 이종태 역,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제2권』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2), 229쪽.
17) 위의 책, 230쪽.
18) 위의 책, 37-57쪽.
19) 찰스 스펄젼, 이종태 역,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제1권』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2), 142쪽.
20) 위의 책, 143쪽.
21) 문용식, 『스펄젼의 표현법』 (서울: 그리심, 2001), 45쪽.
22) 랜스 우벨스 편저, 정정숙 역, 『그리스도의 이적의 능력』 (서울: 예수전도단, 1996), 15-16쪽.
23) 위의 책, 46-49쪽.
24) 제이 애덤스, 박광철 역, 『설교연구』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0), 29쪽.
25) 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하)』, 64쪽.
26) 제이 애덤스, 『설교연구』, 35쪽.
27) 위의 책, 39쪽.
28) 위의 책.
29) 위의 책, 40쪽.
30) 문용식, 『스펄젼의 표현법』, 116쪽.
31) 챨스 스펄젼,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제2권』, 13쪽.
32) 위의 책, 15쪽.
33) 위의 책, 19쪽.
34) 위의 책, 22쪽.
35) 위의 책, 24쪽.
36) 위의 책, 4쪽.
37) 김병로 역, 『스펄젼의 설교학』, 225-243쪽.
38) 위의 책, 267쪽.
39) 이 부분의 내용은 주로 김기홍의 『이야기교회사(하)』를 참고하였다. 김기홍, 『이야기교회사(하)』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4), 254쪽.
40) 이형기, 『세계교회사 (Ⅱ)』, 466쪽.
41) 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하)』, 108쪽.
42) 위의 책, 109쪽.
43) 김기홍, 『이야기교회사(하)』, 259쪽.
44) 위의 책, 260쪽.
45) 윌리엄 R. 무디, 이상준 역, 『D. L. 무디(하)』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7), 158-159쪽.
46) 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하)』, 112쪽.
47) 윌리엄 R. 무디, 『D. L. 무디(하)』, 166-171쪽.
48) 위의 책, 144쪽.
49) 한문덕, “무디는 설교 준비를 이렇게 하였다,” 『월간목회』 통권3호 (1976.11.): 156-159쪽.
50) 윌리엄 R. 무디, 『D. L. 무디』, 140쪽.
51) D. L. 무디, 『무디 설교집』 (서울: 백합출판사, 1973), 261-265쪽.
52) 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하)』, 111쪽.
53) 위의 책, 116-119쪽.
54) George Sweeting and Donald Sweeting, 국백련 역, 『무디의 삶이 주는 교훈』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1), 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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