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설교
-선교사, 초기교회를 중심으로-
Ⅰ. 들어가는 말
설교역사학자인 다간은 말하기를 “설교의 역사는 바로 교회의 역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즉 그 말의 뜻은 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된 설교를 보면 그 당시 교회의 사건과 신학과 신앙과 생활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없이는 구원의 역사도, 교회도 없다는 말이다.
교회가 참으로 교회 되어지는 기준이 바른 하나님의 말씀선포와 선교적인 사명에서 찾고자 할 때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교회의 설교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으며 그 설교가 민족의 가슴에 어떻게 뿌리내렸는가를 물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뜻에서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외쳤던 설교들은 바로 한국교회의 신학이며 신앙고백이며 사상이다.1)
뿌리없는 나무가 없듯이 역사를 무시한 민족과 교회는 있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의 뿌리를 공부하여 기초를 튼튼히 다지면서 줄기와 가지를 뻗어나가는 작업은 설교학에 있어서도 중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하나님은 이 민족을 깨우기 위해 말씀의 전달자로 선교사들을 보내주셨고 그들을 통하여 암흑의 터널로 들어가던 백성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소망을 불어넣어 그 터널의 끝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셨다. 선교사들의 설교가 언어장벽과 문화의 차이로 인하여 후에는 이 민족의 설교자들로 대치되지만 그 때까지 초기한국교회의 기초를 놓고 싹을 트게 만든 분들이었기에 그들의 신학사상과 설교는 초기교회를 이해하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하겠다.
그러므로 본 발제에서는 한국교회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초기교회의 모습과 그 시대 상황을 살펴보는 동시에, 선교사들에 의해 선포되었던 설교를 연구하여 설교가 이 민족에게 미친 영향을 알아보고, 몇 몇 선교사들의 생애와 신학사상 그리고 설교를 분석해봄으로서 우리 설교의 뿌리를 찾아보고 그들을 통하여 현재를 진단하며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발전적 미래상을 도출해보고자 한다.
Ⅱ. 시대적 배경
제1장 개화기의 시대상황
로마 카톨릭교회가 계속 박해를 받을 때에 한국은 세계 열강에 대하여 쇄국정책을 폈으나 국내외의 여러 여건이 문호를 개방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 수용의 필요성이 널리 인지되어 갔다.2)
1. 국내외의 정세
조선조는 국가의 국시로 ‘숭유배불’정책을 폈고, 왕조의 모든 분야에서 존화사대주의 사상(尊華事大主義 思想)과 은둔주의 사상이 뿌리를 내려 5백년의 역사를 이어 왔다. 열강들은 한국에 대한 그들의 확장 정책을 계속적으로 펴왔으며 특히 일본은 한국에 대해 개항의 압력을 가중시켜 1876년 2월 26일 운양호의 힘을 통하여 ‘강화도조약’이라는 한일수호조약을 체결케 하였다. 일본과의 조약을 필두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의 여러 서구 열강들과 수호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조정의 이러한 개항에 대하여 대정부 비판 역할을 하여온 재야 유림집단은 ‘척사위정’을 명분으로 하여 개항 정책을 비판하고 나왔다.
이러한 국내외의 사정 속에서도 개화의 물결이 사회 여러 분야에 스며들었고, ‘은자의 나라’에서 자의든 타의든 벗어날 수밖에 없는 실정이 되었으니, 이것이 개신교 선교 직전의 정세였다.3)
2. 개화사상의 대두
실학에서 시작된 현실에의 실제적 접근 방안은 개화사상을 통하여 구체화되었다. 서학의 물결과 함께 시작된 개화사상은 1870년대를 발생시기로 볼 수 있으며 그 후 30-40년 동안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전반을 지배하였다. 조선후기의 실학은 자유성, 과학성, 현실성으로 인하여 첫째로, 전근대의식에 대립하는 ‘근대의식’과 둘째로, 몰민족의식(沒民族意識)에 대립되는 ‘민족의식’으로 말미암아 개화자강계(開化自强系)에 의해서 재발견되었다.
이러한 바탕에 서학의 전래로 근대화의 걸음을 걷게 되었는데,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연관성 문제는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이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개방적 태도를 가졌고, 나아가 실학파 학자들이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연관점들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강조, 민족주의적 성격, 민권사상, 무역부국론. 전제개혁론, 영업자유론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4)
3. 개화파의 기독교 수용론
한말의 소장 혁신그룹들은 처음부터 정치적 비밀단체의 성격을 띠고 자신들을 개화당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김옥균을 중심으로 1878년 충의계(忠義契)형식으로 결성되었다. 개화파 인사들은 개화사상의 선각자 박규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들은 기독교 특히 개신교에 대하여 상당히 포용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개화파 안에도 온건과 급진그룹들이 있어 기독교 수용에 대한 견해차이가 있었다. 서양의 기술만 습득하고 동양사상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당면과제를 위해서는 서구문화를 효과적으로 받아들어야 했고, 서구문화의 핵심이 되는 기독교를 수용하게 되었다.
한국근대사에서 개화사상을 집대성하여 체계화한 사람은 유길준이다.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고 특히 「서유견문」에서 우리나라에 최초로 서구문명을 본격적으로 소개하였다. 유길준을 비롯하여 개화파들은 자주자강론(自主自强論)을 주장하면서 기독교를 수용하였고, 유길준 역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개화파들의 기독교수용의 양상 중 대표적인 사례는 1898년 1월 26일에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의 기사에서 볼 수 있다.
우리가 특별히 믿지 않는 동포들을 위하여 예수교가 나라문명 부강과 독립자주의 근본이 되는 줄을 깨닫게 하노라.
마치 교회신문이나 전도지의 문안 같은 기사가 일간지에 게재될 정도이니 개화파 인사들의 기독교에 대한 자세가 어떠했는지를 찾아볼 수 있다.5)
제2장 개신교의 전래과정
1. 조선에 처음 온 개신교 성직자들
1)칼 귀츨라프(Karl G. F. A. Gutzlaff)목사
선교의 문을 두드리며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개신교 선교사는 프러시아계 독일인으로 의사이며 목사였던 칼 귀츨라프(Karl G.F.A.Gutzlaff)이다. 그는 태국선교를 두 차례 시도했으나 성과가 별로 없는데다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실망하고, 본래 의도한 대로 중국으로 떠나갔다. 중국에서 그는 영국동인도회사의 군함 선장이었던 린제이와 친분이 있었는데 통역의 자격으로 승선하게 되어 1832년 7월 17일에 황해도 백령도에 상륙하게 된 것이 최초로 한국 땅을 밟게 된 동기이다. 그는 계속 남하하여 군산만 북쪽 창선도에 도착하여 그곳에 잠시 머무는 동안 한국교회사와 한국역사에 뜻깊은 일 두 가지를 하였는데, 주기도문을 우리나라말로 번역한 일과 감자씨를 주면서 그 심는 법과 재배방법을 가르쳐 준 일이었다.6)
2)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목사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본격적으로 선교하기 이전에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찾다가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로서 이 땅에 귀한 피를 뿌린 사람은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목사였다. 제너럴셔먼호가 중국에서 많은 물건을 싣고 한국에 상업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1866년 7월 그 배의 통역겸 안내자로 동승하여 한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배가 대동강에 좌초하자 강변으로 올라오다가 군사들의 칼에 죽음으로 그는 한국초기선교역사에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개신교 성직자 순교자가 되었다.7)
2. 외지에서 입교한 한국인들
1)만주에서 입교한 의주 청년들
반면에 외지에서 입교한 한국인들이 있었는데, 만주에서 입교한 의주 청년들이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은 중국산동성을 중심으로 선교하던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John Mcintyre)이다. 이 두 선교사들은 한국에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이전에 한국개신교선교에 혁혁한 공로를 남겨 놓은 인물들이다. 이들은 평안북도 의주의 청년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를 그들의 어학선생으로 삼고 복음을 전하여 3년이 지난 후에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으니 이것이 한국 개신교 신자가 된 첫 번째 사건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서상륜도 중국에 갔다가 병이 들어 선교부가 경영하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79년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 청년들의 도움으로 1882년 봄에 누가복음번역본이 51쪽 분량의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1887년에는 신약전체 번역이 완료되어「예수셩교젼셔」5천부가 간행되었다. 아직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외지에서 성경이 번역되어 출판된 일은 일찍이 세계 선교 역사에 별로 없는 기록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8)
2)권서인, 매서인의 활동
번역된 성경은 권서인 혹은 매서인의 활동으로 전도되기 시작하였는데 서상륜은 1882년 10월 영국성서공회에 의해 한국교회 사상 최초의 권서로 임명되었지만 관가의 체포명령에 의해 송천(솔내 또는 소래라고도 부름)으로 도피하여 거기서 전도하여 조그만 초가집을 예배당으로 정하고 예배를 드림으로서 한국 개신교회의 첫 번째 교회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외지에서 개신교의 신앙을 받아들인 선각자들이 성경번역을 도와 성경을 출판하였고, 또한 그 성경을 가지고 와서 전도하여 결신자를 내고 교회를 세우는, 그래서 선교사들에 의하지 않고 순전히 한국 사람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교회가 세워지는 위대한 일을 이루어 놓았다.9)
3)일본에서 입교한 이수정과 성경번역
이수정은 임오군란 때 왕후를 극적으로 구출한 일이 있었는데, 임오군란의 뒤처리를 위해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수신사로 갈 때에 비공식수행원으로 함께 가게 되었다. 그때 일본에 있으면서 성경공부를 하였고 신앙을 고백하고 미국인 선교사 녹스(G.W. Knox)에게서 1883년 4월 동경의 노월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로서 만주에 이어 일본에서도 개신교 신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수정은 성서번역의 필요성을 느끼고 한문성경에 토를 달아서 읽기와 이해를 쉽게 하는 소위 ‘현토성서(縣吐聖書)’라는 이름으로「신약성서 마가전」이 1884년 11월에 출판되었고, 계속해서 기타의 성경들이 출판되었다. 이후에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하여 1884년 4월에 완성하였는데 그 해에 언더우드가 이 성경을 들고 한국에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10)
3. 선교사들의 내한
1884년 9월 한국에 마침내 개신교 선교사가 처음으로 입국하였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처음으로 영세를 받은 후 꼭 100년이 지난 때였다. 개신교 첫 선교사의 영예를 얻은 사람은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의사 알렌(Horace N. Allen)이었다. 그는 미국 공사관의 의사로 임명되어 일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 중국, 일본 등 여러 공사관과 외국 거류민들의 의사로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극적으로 조선 왕실과 연결되는 사건이 1884년 12월에 일어났던 갑신정변이었다. 이 사건은 한국 개신교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고비가 되는 사건으로서 언더우드는 이것을 ‘거룩한 섭리’라고 술회하였다. 후에 그는 고종의 시의로 임명받게 되었고 1885년 4월 9일에 알렌은 ‘광혜원’이라는 진료소를 개설하였다(2주 후에 제중원이라고 이름 변경, 이 제중원이 후에 세브란스병원이 됨).11)
안수를 받은 목사 선교사로 1885년 4월 5일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은 언더우드였다.12)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부의 아펜젤러(H. G. Appenzeller)부부의 입국은 한국에서의 복음선교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였다. 언더우드의 뒤를 이어 1885년 6월 21일에는 헤론(Heron)의사 부부가 입국하였고, 1886년 7월 4일에는 여의사 엘러즈(A. Elers)가 입국하였으며, 계속하여 선교사들이 입국하였다.13)
미국인에 의해서 시작된 선교는 당시의 국제적인 정세로 보아서 무시 못할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는 한국인의 손에 의해서 그 때에는 벌써 괄목할 만한 단계로까지 발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로마카톨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트의 경우도, 한국은 그 교회창설의 대업을 스스로 착수하고 수행해나갔던 것이다.14)
제3장 선교신학과 선교활동
초기한국교회의 선교사들은 성경의 무오와 권위를 믿었고, 그들의 선교도 이러한 선교학적 배경에서 전개되었다.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공식적인 선교방법으로 ‘네비우스 방법’이 채택되었고 이것을 토대로 하여 선교전략들이 수립되었다.15)
이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보통 줄여서 3자정책(三自政策)이라고 부른다. 즉 자치(自治), 자립(自立), 자전(自傳)이다. 이 3자원칙은 원래 영국 런던의 ‘교회선교협회’의 선견지명이 있었던 총무 헨리 벤(Henry Venn)의 3자 정책 선교이론에 근거한 것으로,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교회를 운영한다는 것과, 원조 받지 않고 자기 교회를 운영한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 전도한다는 것으로 압축된다.16)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하는 일은 크게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복음화, 둘째는 문명화, 셋째는 근대화이다. 그들은 의료선교, 교육사업, 전도사역, 성경번역과 사경회, 찬송가의 출판과 문서사업, 여러 선교부들의 내한을 이끌어내는 활동을 하였다.
Ⅲ.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의 설교
제1장 한국교회 설교사의 전이해
설교사는 교회사의 시작과 함께 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 설교의 역사는 한국교회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함이 옳겠다.
1884년 9월 20일 미국 북장로교 소속의 의료선교사 알렌이 서울에 입국해서 영국 및 미국 공사관과 서양공관의 부속의사의 신분으로서 선교사업을 시작한 것이 한국선교의 시작으로 본다면,17) 이듬해 언더우드목사와 아펜셀라목사 부부가 인천에 상륙함으로 본격적인 복음의 씨가 이 땅에 뿌려졌다고 할 수 있다.
교회를 설립한 후에 양떼들을 위해서 영적 양식을 공급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설교의 형태로 되어진 것이다. 그 후 속속 들어온 선교사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졌고 설교가 행하여졌으며 한국인 조사에 의해서도 설교가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후에 신학교에 들어가서 한국 초기의 목사들이 되었다. 한국 초창기 교회들에게 설교한 우리 목사들은 대개 다음과 같다. 새문안 교회의 차재명목사, 정동감리교회의 최병헌목사, 소래교회의 서경조목사,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목사 등이 있다.18)
제2장 초기선교사들의 신학과 신앙19)
한국교회 초기선교사들은 거의가 20대의 소명감에 불탔던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선교사로 헌신하였는데, 이들의 열정이 한국교회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들은 거의가 경건한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이들은 이 세상의 모든 직업 가운데 선교사역에 헌신하는 것이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였다. 선교사역이란 자기 희생을 필요로 하며,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하여 가족과 친구를 떠나 낯선 땅에 가는 것을 고귀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경건주의적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고, 당시의 신학교육이 칼빈주의적 특성이 강하였기에 신학사상도 그러한 범주에서 형성되어졌다.
1893년부터 1901년까지 40명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사역을 하였는데, 그 중 16명이 프린스톤신학교 출신이었고, 11명이 맥코믹신학교 출신이었다.20) 한국에 온 초대선교사들은 당시 미국에서 일어났던 대부흥운동의 영향을 직접 간접으로 받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신학적 자유주의나 성경비평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배격하였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A. J. Brown)은 한국 주재 선교사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그들은 성경비평이나 자유주의는 위험한 이단으로 간주한다. 미국이나 영국의 복음주의 교회는 대부분 보수파든 자유파든 평화롭게 공존하며 공동으로 일을 하기도 하였는데 한국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가진 사람은 어려운 길을 가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장로교회에 더욱 짙음을 본다.
초대교회 선교사들의 신학적 견해는 1907년 독노회(獨老會)에서 채택한 신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2개조항으로 된 장로회신조는 칼빈주의적 색채가 농후하였으며, 많은 이들이 그런 것으로 받아들인다.
일제의 통치하에 있던 한국에서의 선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선교사들은 일본 총독부와 마찰을 피하려 하였고, 정치적 사안에 대하여 언급을 피하려고 하였다. 클라크(C. A. Clark)는 선교사들의 정치에 대한 태도를 "교회는 정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우리는 믿는다. 교회는 영적 기관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서 현재의 정부나 그 어떤 정부에 대해서도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선교사들의 자세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경건적 피안신앙과 함께 비정치화 현상을 그 특성으로 가지게 하였다.
한국교회는 선교가 시작되던 때부터 1920년대 중엽까지는 보수적이며 복음적인 신학이 주축을 이루었고, 미국교회의 신학적 영향권 안에 있었는데, 미국 교회에서 신학논쟁이 일어나면 이것이 한국교회에도 비화되어 신학적 동요가 일어난 사실에서 그 실상을 찾아볼 수 있다. 선교사들의 신학사상이 한국 장로교회 신학사상 형성의 틀이 되었다.
제3장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의 설교(초기에서 1920년까지)
1. 개관
한국선교의 초기에 왔던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언어의 장벽으로 의사전달이 잘 안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설교의 내용은 퍽 단순하고 복음적이었음이 후일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들은 목회경험이 없었고 설교의 훈련이 안된 사람들이었다. 다만 당시의 미국에서 불붙은 선교열정을 가진 20대 젊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 온 것이다. 신학적 미흡뿐만 아니라 실제 경험이 부족하였다. 선교사들이 한국말을 배워서 띄엄띄엄 하는 설교의 내용은 1900년대 전후해서 미국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제목설교의 방법을 그대로 도입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선교사들의 제목설교의 방법이 한국교회의 강단에 그대로 이식됐고 한국교회의 강단에 결정적인 전통으로 굳어졌다. 뿐만 아니라 제목설교의 경향은 주로 많은 예화를 필요했던 만큼 처음부터 설교의 한 방법으로 예화를 많이 모으고 사용했다. 이와 같이 설교에 있어서 현상학적이고 경험적인 접근의 방법으로서의 예화사용은 선교초기에 접촉점을 얻기 위한 것으로는 공헌을 한 셈이다.21)
선교사들의 설교가 기록으로 남기 시작한 것은 주로 1920년대를 전후한 신학 잡지들에 선교사들의 설교가 실리면서부터이다. 물론 이들의 설교의 내용은 선교 초기부터의 메시지의 내용임에 틀림없다.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에서 출판된 “신학지남”(1918), 그리고 성결교의 “활천”(1924), 감리교의 “신학세계”(1916) 등에서 기록된 설교가 발표되기 시작했다,
특히 1920년에는 한국교회의 최초의 설교집 “백목강연(百牧講演)‘이 출판되었는데, 이 설교집은 당시 대영성서공회(大英聖書公會)의 시찰(視察)이었던 양익환씨가 편집을 맡았다.22)
이 설교집의 발행은 바로 한국교회의 성숙과 도약과 안정과 시그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021년 “종교강연집(宗敎講演集)”이 출판되었다. 결국 이것도 설교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설교집에서 몇몇 초기 선교사들의 설교들을 읽을 수 있다.23)
2. 초기 선교사들의 설교관
초기선교사들의 설교관은 매우 건전하고 복음적이었다. 당시 평양신학교의 교수였던 부두일(Dr. W. R. Foote)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설교는 기독교의 특성인 동시에 설교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그 말씀을 바로 해석해야 된다”고 하였다. 특히 본문(Text)과 상황(Context)의 조화를 강조한 것은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개 선교사들의 설교에는 이원론적인 요소를 보였으며 율법주의적인 요소도 많았다. 그들의 설교 중에는 단순히 상선벌악(償善罰惡)을 가르침으로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의 진리를 증거하는데 약했고 많은 부분에서 알레고리칼한 설교가 대종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선교사들이 우리들에게 들려준 것은 단순하고 순수한 십자가의 도를 증거하는 뜨거운 정열을 가졌었다는 사실이다.24)
한국교회의 초기에 일하던 선교사들 중에 평양신학교 교수였던 곽안련(郭安蓮)박사는 실천신학자로서 한국장로교회의 실제적인 방향과 방법을 제시한 사람이다. 곽안련박사와 당시 평양신학교 교수였던 부두일(富斗一)박사의 설교를 보는 관점은 다음과 같다. 설교는 기독교의 특성인 동시에 설교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하고 그 말씀을 바로 해석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 복된 방법은 설교를 통하여 되며 그 외에 논문이나 심방(尋訪)이나 성례(聖禮)로 복음 증거하는 것은 설교에 보조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25)
그리고 그는 실효있는 설교의 요소로서 다음 네 가지를 지적했는데, 즉 좋은 설교자가 되려면 경건, 재능, 학식, 숙련 등 네 가지로 나누었다. 이것은 칼빈주의 설교자 안드레스 겔하르트(Andreas Gerhard)26) 이후에 정통주의자들이 강조해 왔던 방법이기도 하다.
특히 부두일은 설교자에게 요구되는 학식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자세히 알기 위해 여행하면서 연구하든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할 것이며 자기가 목회하는 구역내의 생활상태도 자세히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부두일은 이보다 수 년 앞서 1918년에 신학지남(神學指南)에 발표한 “취미있는 강도(講道)”에서 설교의 준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성경을 연구할 것, 둘째 신학을 연구할 것, 셋째 시대를 이용할 것, 넷째 각 개인의 정황을 잘 살펴 볼 것, 다섯째 우리가 생활하는 시대 형편을 잘 알 것, 여섯째는 자기를 알 것이라고 하였다.
또 신학을 연구한다는 말은 조직신학을 의미하는 것으로 못박았다. 또한 부두일의 강조하는 것은 설교에 있어서 상황을 매우 큰 비중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황을 너무 크게 볼 경우 text가 약화될 우려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가 성경과 신학의 중요성을 우선적으로 제시한 것은 옳았다.27)
3. 초기 선교사들의 설교의 특징
우선 초기 선교사들의 설교의 특징을 살펴 보면 1900년대 초에 미국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제목설교의 방법을 그대로 도입하였다. 제목설교의 경향은 많은 예화를 필요로 했던 만큼 예화를 많이 권장하기도 하였다.
제목설교와 예화에 관심이 많았던 이유로 말미암아 설교에 있어서 성경신학에 대한 이해는 별로 없고 조직신학적인 접근만 있었다. 초기 선교사들의 설교는 어떤 형식에 매이지는 아니한 반면에, 청교도적인 뜨거운 열심은 있었으나 신학적으로 부족했었다는 것을 저들의 설교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28)
정인교는 선교사들의 설교를 두 가지 범주로 특징지어 설명하고 있다.29)
첫째는 성도들의 신앙과 윤리가 주요 설교주제로 다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설교들을 통해 부각되는 강조점들은 첫째, 믿음에 대한 강조이다. 이러한 믿음의 강조는 라투렛이 지적한 것처럼 선교사들 대개의 성격이 순수한 복음전파를 목표로 한 복음주의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신학적 입장과 일치함과 동시에 주권상실로 야기된 한국의 절망적 상황과 재래종교의 기능마비가 가져온 정신적 진공상태에 처했던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기독교가 새로운 정신적 지주와 삶의 의미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단순한 종교교리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다른 특징은 성도들의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내용이 설교의 주요테마로 다루어졌다는 점이다. 선교사들은 철저한 회개를 바탕으로 엄격한 윤리적 삶을 강조하였는바, 이는 청교도적 경건을 생활화하고 있던 그들 입장의 자연스런 반영일뿐 아니라 마약과 아편, 투전과 축첩 등에 찌들어 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 일소를 위해서도 지극히 당연한 권면이라 볼 수 있다. 세 번째 특징은 종말과 경성된 삶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이런 내세에 대한 강조는 한편으로 선교사들의 시대인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여지는데, 일본의 침략이 빚어놓은 물리적 상황 하에서 어떠하든지 희망을 일깨워주려 했던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하겠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내세강조 속에는 현실적인 희망이 사라졌을 때 사람들의 관심을 차안(此岸)에 대한 경시와 피안(彼岸)에 대한 대망, 현실도피라는 신앙의 이분법 사고가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회개와 경건한 삶의 강조는 선교사들의 설교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용서라는 적극적 윤리와 맞물리게 되었는데,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는 교훈이 선교사들이 가르쳐야 했던 지극히 당연한 기독교의 기본진리이면서도 일본에 대한 감정의 정리가 결코 쉽지 않았던 그 당시의 정서를 감안하면 회중의 입장에서 수용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선교사들의 설교내용의 두 번째 범주는 ‘교리’에 대한 설교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순수한 교리설교는 신앙, 윤리를 다룬 설교에 비해 현저히 적은 편수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선교설교를 주로 해야했던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예외처럼 들릴 수 있으나 이방선교사에 의한 전도설교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기독교 진리에 대한 소개를 제외하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주제를 다루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는 인식에 기인한다고 보여진다. 이것은 동시에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나타난 선교대상을 보더라도 분명해진다. 그 선교정책에 나타난 선교대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상류계층보다 근로계층의 회심을 위해 노력하도록 한다. 둘째, 부녀자들의 회심과 기독 소녀들의 훈련은 하나의 특별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머니들은 장래 세대들에게 매우 중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도들의 삶과 교리를 두 축으로 하는 선교사들의 설교는 교회의 정착과 성장, 그리고 성도의 육성과 사고의 개선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30)
또한 선교사들의 설교특색은 대개가 성경본문에 얽매이지 않는 제목설교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설교본문을 1-2절에 국한시키는 한편 본문의 성구 가운데 한 단어 또는 한 구나 절에 설교 초점을 맞추고 설교를 전개해 나간다. 이런 형식의 설교전개는 대부분 성경본문의 내용과는 아무 연관성도 없이 문단이나 표현의 문자적 유사성에 착안된 경우가 많다.
제4장 초기 선교사들의 생애와 신학, 설교의 실제31)
1. 언더우드(Underwood, Horace Grant. 1859. 7. 19- 1916. 10. 12, 한국이름은 원두우)
1)생애
영국런던에서 존 언더우드의 6남매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겨우 다섯 살 되던 때에 어머님을 여의고 열세 살 때에 아버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갔다. 1877년 열하홉 살 때에 뉴욕대학에 입학했다. 집 살림이 몹시 가난하여 20여리 길을 걸어서 통학하면서 4년간의 학업을 마친 뒤 1881년에 그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졸업직후 다시 미국 개정교파의 뉴 부런스윅(New Brunswick)신학교에 입학 1884년에 졸업하여 목사가 됐다. 목사가 된 뒤 그는 뜻을 인도선교에 두고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으나, ‘왜 너는 한국으로 가지 않느냐?’라는 음성을 듣고 한국선교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32)
언더우드에게 신앙적 영향을 끼친 사람은 뉴 부런스윅에 있는 화란개혁교회의 이스턴(Eastern)목사였다. 그는 전도의 열정에 불탔고, 침체하고 오래된 교회에 부임하여 이 교회를 새롭게 변화시킨 사람이다. 그는 부흥회와 기도회 등을 통하여 교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고, 이러한 교회의 분위기가 언더우드에게 뜨거운 감동과 헌신의 바탕을 이루었다.33)
언더우드목사는 실로 한국교회의 아버지이며, 한국의 기독교 교육의 운동의 선각자이다. 그는 한국에 온 최초의 목사 선교사로서 이 땅에 기독교의 뿌리를 내린 효시이다. 그는 한국교회의 아버지로서 개척, 전도, 교육사업, 성경번역 사업 등 괄목할만한 사업을 했을 뿐 아니라 특히 수 차례 태평양을 넘나들며 미국과 구라파 교회에 한국교회를 소개하고 모금하고 장로교회와 호주 장로교회가 한국 선교사업을 하도록 추진했다. 특히 1887년 9월 27일에 14명의 신도가 정동자택 사랑에서 시작한 교회가 새문안교회였고 연세대학교와 경신학교를 창설하여 오늘에 이른 것은 한국교회에 영원히 남을 금자탑이다.34)
그는 한국말을 좀 익히게 되자 곧 거리나 사람들이 흔히 모여드는 큰 나무아래 같은 곳에 않아 성경을 펴놓고 읽으면서 모여든 사감들과 함께 말을 주고받으면서 성경의 진리를 설교했고, 얼마 후에는 큰 거리에서 이러한 형식으로 전도했고 심지어는 서울 근방의 촌에까지 가서 전도여행을 했다.
2)신학사상과 설교
언더우드의 설교에서 신학사상의 유형을 찾을 수 있는데, 그의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실 뿐 아니라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가 되신다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왕권을 제시하는 칼빈주의적 견해이다. 또 교회를 “만물이 창조하실 때부터 시작 된 것”이라는 교회론을 제시하고35) 교회와 세상은 분리된 영역임을 말하면서, 이것을 완전히 갈라놓는 이원론적 사상을 극복하였다.
언더우드는 교파주의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이것이 한국초대교회의 연합활동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고36) 현실문제에 대한 이해와 메시지를 전달하였다.37)
언더우드목사가 1921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에 총회장시의 설교를 보자.38)
그는 본문을 빌립보서 3:8-10을 읽고 제목을 “모든 것을 해로 여김” 이라고 했다. 그리고 요점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다. 즉 첫째, 속죄해 주시는 예수님, 둘째, 부활하시는 예수님, 셋째, 예수님과 고생하면 같이 즐거워한다, 등의 대지를 나누었으나 본문과 제목과 대지와 내용이 서로 연결이 없고 논리성이 부족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얼른 파악하기 곤란하다.
우선 설교만을 두고 볼 때 대개 초기 선교사들의 설교의 경향은 본문과는 무관한 설교가 많았으며 논리성이 희박해서 설교학적으로 미숙했던 점도 없지 않다. 그것은 피선교지로 오기 전에 목회에 대한 경험부족도 문제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설교의 내용을 살펴볼 때 신학적인 틀은 매우 건전하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속죄를 말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때 그리스도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은 옳게 본 것이다.
그의 설교를 통해 기독론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실 뿐 아니라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왕권을 제시하는 칼빈주의적 견해이다.
예수님은 죄를 덮어주시는 구주시오, 죄를 이기시는 구주시오, 이 세상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구주요, 오늘날 우리와 같이 계신 구주이시다. 그런고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앞에 표준만 되실 뿐 아니라, 교회 위에 권세 능력이시며 교회 안에 계신 생명이시다.39)
본문 고린도후서 6:17-18 의 설교문에는 한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서의 교회관을 엿볼 수 있다.
이 교회는 예수 때에 시작한 것도 아니오, 모세 때에 시작한 것도 아니오, 아브라함 때 시작한 것도 아니다. 만물을 창조하실 때부터 시작된 거시라
하여 교회의 시작을 만물을 창조할 때부터라 하고 창세기 4:26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즉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는 말씀에서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교회의 설립으로 보는 것이었다.40) 특히 그는 요한복음 14:2을 본문으로 한 “후세상”이란 설교에서 뚜렷한 내세관을 설교하고 있다. 이 설교에서는 서론에서 언더우드 목사의 가정의 경험을 말하므로 설교의 도입으로 삼고 있다.41)
언더우드에 대한 사무엘 마펫의 인물평42)을 통하여 언더우드는 열정적인 설교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초기 언더우드는 모든 면에서 불요불굴의 지도자였다. 그의 메시지를 초자연적이 되게 한 그의 대단한 열정, 다함이 없는 에너지, 위대한 믿음과 깊은 신념이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었고, 선교의 모든 사업의 시작에서 그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일이 없었다.…한국의 복음화를 촉진하는 일에는 언제나 그가 선두에서 분투하였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것을 기대하라’는 캐리(Carey)의 믿음이 바로 그의 것이었다. 그의 호소력있고 쟁쟁 울리는 도전과 온몸을 격렬하게 움직이며 하던 설교와 그의 낙관적인 보고와 전진을 위한 적극적인 계획을 들은 사람 중에서 누가 그것을 잊을 사람이 있겠는가?
2. 곽안련(C.A. Clark)
1)생애
곽안련목사는 1878년 미네소타주 스프링 벨리에서 태어났고, 맥칼레스터대학과 맥코믹신학교를 졸업하였고, 후에 시카고대학교에서 석사학위와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43)
1920년에 미국의 북장로교 선교사로서 한국에 온 그는 평양 신학교의 교수로서 실천신학에 대한 여러 저서를 남겼다.
2)신학사상과 설교
그의 설교는 전형적인 보수주의자들의 표본이었다. 초대 선교사들이 흔히 쓰던 제목설교의 방법을 곽안련 박사는 거의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본문 설교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제목설교의 방향으로 밀고 나갔다. 이것은 한국교회 설교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것은 1900년대 초의 세계적인 경향이었다.
곽안련 박사의 설교에서 당시에 고난 받는 한국민족에게 어떤 결정적인 메시지보다는 순수한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야 할 것을 가르쳤다. 다만 그의 설교의 내용 중에는 당시의 사회상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거기서 뛰어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것을 권고하는 말들은 볼 수 있다.
사실 곽박사는 실천신학교수로서 설교학을 가르쳤지만 설교는 잘 못했다. 그는 너무 다양한 일을 이것저것 했기 때문에 다섯 사람의 일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회계사무, 건축법을 아는가하면 표준주석 원고도 쓰고 설교연습도 시키고 기독교 교육도 담당하고 신학지남 원고도 썼던, 신학교에서 중요한 존재였다.44)
40여 년간(1902-1941) 한국교회와 평양신학교를 섬기면서 51권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한 그는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형성에 큰 공헌을 하였다.45) 그의 신학사상을 박용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첫째, 그는 철저한 보수주의자였다. 그의 많은 책과 글들은 성경의 권위와 무오를 철저하게 변호하였다. 그는 핫지(A.A. Hodge)와 워필드(B. Warfield)의 글을 자주 인용하여 성경의 절대권위를 강력하게 변호하였다. 둘째, 그의 성경관은 완전 축자영감설이었다. 그는 부분영감을 거부하고 완전영감을 성경의 가르침으로 믿었다. 그것은 프린스톤 구학파의 신학적 입장을 그대로 따랐다. 셋째, 그는 프린스톤 전통을 따라 영감과 계시를 용어와 특성에서 구분하면서도 성경관에 있어서는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46)
그는 그의 책 『설교학』에서 설교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설교하는 직분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최고의 특권으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도를 전하여 영원히 죽을 인생을 영생의 길로 구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귀한 특권을 천사에게 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최선을 다하여 사명을 완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47)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제목을 선택함에 있어서 설교자는 항상 성령의 인도를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령은 청중의 마음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를 아신다. 설교자는 설교하는 동안 성령께서 같이 역사하실 것을 기대해야 한다. 만일 설교자가 자신이 하는 설교가 능력을 가진 설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 설교를 준비하기 시작할 때부터 성령께서 함께 동역하여 주시기를 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48)
고 하며 설교를 준비하기 시작할 때부터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의 책 끝에서 ‘영혼을 추구하는 설교’를 강조하고 있는데, 설교도 결국은 영혼을 살리기 위한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임을 말하고 있다.
“영혼을 추구하는 설교, 여러분은 물론 설교자로서 이 일 외에 다른 많은 일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앞날은 충만하고 더욱 활기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중심적 과업은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는 일’이며, 이 일을 이루는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방법의 하나는 ‘영혼을 추구하는 설교’를 하는 것이다. 뿌리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며 거두는 일도 역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으며 설교할 때 우리와 함께 역사하신다. ”영혼을 추구하는 설교를 자주 하여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의 말이다.”49)
그의 최초의 기록된 설교는 1918년 『신학지남』의 창간호에 언더우드목사의 설교와 나란히 실린 “예수의 평안과 사단의 평안을 비교함”이란 설교이다.50) 그는 이 설교의 서론에서 이 세상은 바로 사단이란 등식을 만들므로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예수와 사단이 평안을 주는 방법을 비교하고 있는데 평안을 주시는 예수의 인격을 만나도록 하는 것보다 설교 전체의 흐름은 양자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율법주의적인 요소가 많아 보인다.
사단은 진리를 버리므로 평안을 주고, 예수는 진리를 밝히 나타내므로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가 명백하게 가르치시기를 죄는 망하게 할 뿐이요, 조금도 이익이 없고 지옥으로 가는 것이니 신중히 행하라 하시고, 죄에서 구속을 받으라 하시고, 깨끗한 도리를 가지라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권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말씀을 믿고 평안함을 받는 것은, 사단이 진리를 숨기므로 평안을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예수의 평안입니다.
그는 지옥을 말하면서 피안의 세계를 계속 강조하고 있으나 예수의 평안을 가지고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구체적인 방법이 없다.51)
설교의 결말부분에 가서 예화를 통하여 예수의 평안과 사단의 평안을 비교한 후 설교본문인 요한복음 14:27절을 인용하여 설교를 맺고 있다.
몇 년 전에 경성에서 모 집사 부인이 진실하게 믿는데 피로가 겹쳐 운명이 임박했었습니다. 본 교회목사가 위문하러 가서 의사의 말을 전하고 묻기를, “죽음이 가까지 왔으니 무서워합니까?”하니 그 부인이 대답하기를 “무엇을 무서워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빨리 떠나 주 예수와 동거하기를 원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가 며칠 후에 다른 병들어 죽게 된 여인을 가서 보니 믿다가 그만 둔 사람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죽을 줄 알고 대성통록하여 “아버지여 살려주소서”라고 했으나 듣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부인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주야 이틀을 호소하다가 결국 사함을 받지 못하고 말았다하니, 그 부인은 마귀의 평안을 다 받았으나 죽을 때에는 답답한 마음으로 구원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으로도 예수의 평안과 사단의 평안이 다른 증거가 확실합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는 것은 이 세상이 주는 것과 같이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걱정도 없고 두려움도 없으나”하셨으니 우리는 이 말씀을 생각하고 주의 참된 평안을 받습니다.52)
3. 마펫(S.A. Moffett, 1864-1939, 한국이름은 마포삼열)
1)생애
마펫박사 전기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 한국의 예루살렘을 이룩한 마포삼열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잊을 수 없는 한국의 은인이요, 개척자요, 선각자이다. 비단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사에서도 위대한 공헌을 장식한 사람이다” 라고 썼다. 과연 그는 한국교회의 창설자요, 우리 교회에 공로자이며 우리 민족의 역사상에서 외국인으로 빼어놓을 수 없는 민족의 개혁자이다.
마펫목사는 1864년 1월 25일에 미국 인디아나주 메디슨시에서 출생하였고 1884년에는 하노바 대학에 이어 시카고의 멕코믹 신학교를 졸업, 1888년에는 다시 모교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얻었으며 1901년에는 37세의 나이로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얻었다. 1889년 12월에 정든 모국을 떠나 1890년 1월 25일에 한국에 도착했는데 이날 마펫목사의 26세 되는 날이었다.
그는 1936년 한국을 떠나기까지 46년간 일하면서 한국 땅에서 20여만의 성도와 1500여 교회가 선 것을 보았으니 이 참으로 한국인 영혼의 개척자이고 한국교회의 아버지가 된다. 그는 전도자일뿐 아니라 교육사업자로서 평양신학교를 위시해서 숭실전문학교, 경신학교 등을 세우고 평안도에만 교회가 세운 학교가 800이었으며 마 목사가 100여 개의 학교의 교장과 이사장으로 있었다. 마 펫목사가 배출시킨 목사는 365명, 평양신학교가 1939년 폐교 때까지 거의 절반 가량이 그의 제자였다고 하겠다.
그는 선교방법을 몇 가지 세웠다. 첫째는 사경회를 열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요, 둘째로 자선사업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요, 셋째는 각급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으로 지도자를 배출하고 간접전도에 주력했다.
그의 선교 또한 설교의 현장은 사랑방 전도였다고 할 수 있다. 마펫목사와 다른 선교사와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과 한국인을 동일시하는 동일화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생김새나 눈과 코는 미국인이지만 그 감정과 마음과 생각과 말과 운명은 한국인의 것이기를 희구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삶 전체를 가지고 설교하려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는 작은 그룹과 그룹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복음을 증거한 것이다.53)
2)신학사상과 설교
마펫의 신학사상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있으나 그의 아들 사무엘 H. 마펫(Samuel Hugh Moffett)54)의 분석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첫째, 그는 영적인 것을 강조하였다. 마펫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영적이고 초월적인 성격을 무시하는 물질적 성공은 복음의 기본적 메시지를 왜곡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둘째, 그는 복음전도를 강조하였다. 마펫은 복음전도가 “교회의 선교”라고 생각하였고, 복음전도야말로 교회 이외의 다른 인간 단체들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교육, 치료, 원조, 문명화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복음전도는 교회만이 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복음전도는 하나님에 의하여 제정된 수단”이라고 하면서 “교육, 인간애, 문명은 복음전도의 목적이나 수단이 아니라 복음화의 결과”라고 하였다. 마펫은 교회가 세워질 때마다 그 옆에 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그 자신이 200개 이상의 각급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셋째, 그는 “거룩한 삶의 표준인 성경”을 강조하였다. 마펫은 “신앙과 행위의 무오류한 유일한 규범”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였다.55)
마펫은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최고의 권위라고 보는 성경관을 가졌다 그는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한국교회 지도자를 양성하였고, 신학교의 영적 성격을 옹호하면서 신학교를 통하여 보수신학을 지켜 나갔다. 1934년 한국선교 희년 기념예배에서 마펫은 “내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복음전도를 개시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결심한 바가 있다. 그것은 십자가의 도 이외에는 전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든지 죽든지 구원의 복음만을 전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는 바울이 복음만을 전한 것처럼 순수한 복음전파에 헌신하였다.
마펫의 경우, 특별한 저술이나 문헌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신학교육을 통한 인재양성, 노회와 총회를 통한 한국 장로교회의 방향제시 등으로 그의 복음적이고 보수적 사상이 한국교회에 전달되었다.56)
그가 남긴 설교 중에는 골로새서 2:8을 본문으로한 “조선교회에 기함”이란 제목의 설교가 있다.57) 이 설교는 설교학적인 입장에서의 평가보다는 그가 눈물과 땀과 피를 바친 한국교회를 향한 불같이 뜨거운 정열을 듣고 보고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그의 가슴속에 간직한 불붙는 복음의 열정을 느끼게 하며 새로운 신학과 복음의 변질을 경계하면서 바울이 전하고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전한 바로 그 복음의 순수성을 잘 간직하고 전파할 것을 설교하고 있다.
나는 조선에 와서 복음전도하기 전에 황주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심한 바 있었다. 이 결심은 내가 이 나라에 십자가의 도 외에는 전하지 않기로 오직 하나님의 그 뜻대로, 죽든지 살든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로 굳세게 결심하였다.
…근대에 있어 흔히 새 신학, 새복음을 전하려는 자는 누구며 그 결과는 무엇일까. 조심하자. 조선 모든 선교사가 다 죽고 다 가고 모든 것을 축소한다 할지라도 형제여! 40년 전에 전한 그 복음 그대로 전파하자. 나와 한석진목사가 평양에 전한 그 복음, 양전백씨가 선천에 전한 그 복음은 자기들의 지혜로 전한 것이 아니요, 그들이 성신의 감동을 받아 전한 복음을 변경치 말고 그대로 전파하자.
…형제여! 원로선교사, 원로목사들이 40년 동안 힘쓴 것인데 우리의 지혜가 아니요 바울에게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인데는 다른 복음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말할 기회 많지 않은데는 딴 복음을 전하지 말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는 정적인 인물이 아니라 한국 교회를 설립하고 평양신학교 등 기타 수많은 학교를 세운 다이나믹한 활동가였다. 이러한 그의 설교문은 과히 사도 바울이 그가 세운 초대교회 교인들과 지도자를 향하여 자기 고백적인 언사로 책망하기도 하고 용기와 확신을 주었던 것과 흡사한 동기였을 것이다.58)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천명하면서 사도 바울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우리의 처음 결심은 바울의 결심과 똑같은 결심을 하였다. 바울이 다른 복음을 전하지 않고 만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결심하였다. 나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외에는 다른 것은 전하지 아니하기로 결심하였다.“59)
고 하였다. 그는 순수한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사명이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한다는 것이었다.
마포삼열 목사! 그는 책 한 권을 쓴 일도 없고 설교문도 이 설교와 “나시르의 서약” 외에는 문헌으로 발견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가 전한 설교를 듣고 수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믿었으며, 목사양성을 위한 교육과 개척교회 설립, 한국교회의 방향설정을 위한 총회활동, 실로 그는 한국교회의 아버지였다. 그의 설교는 이 한 설교를 통해서 설교학적인 평가는 어렵고 다만 그의 설교의 사상만은 앞으로 두고 두고 간직해야 할 메시지라고 본다.60)
4. 게일(J.S. Gale, 1863-1937)
1)생애
게일 목사는 1853년 2월 19일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스코틀랜드에서 카나다로 이민온 농장 경영주이자 장로교회의 장로였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화란 사람이었다. 토론토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1884년 토론토대학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중 영국을 거쳐 프랑스 파리에서 연구하며 선교기관의 일을 보기도 하였다. 1986년 북미학생하령회에 참석하여 무디의 설교를 듣고 외지선교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1988년 토론토대학을 졸업하고 즉시 동대학 YMCA로부터 선교사로 임명받아 일본을 거쳐 부산에 도착한 것이 1988년 12월 15일이었다. 1900년부터 연동교회에 선교사로 임명받아 목회를 시작하였다. 1928년 은퇴하기까지 연동교회, 평양신학교, 피어선성서학원에서 교육에 힘쓰는 한편 왕립 아시아학회 한국부 간사로 일하였다. 그는 캐나다출신의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일하다 영국에서 숨을 거둔 범세계적인 인물이었다.61)
2)신학사상과 설교
게일의 신학은 지나칠 만큼 보수적이었다. 그런데 그가 교파적 배경이 다르다는 것과 교파신학교를 졸업하지 아니했다는 배타적 편견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의 인간관계로 말미암아 한 평생을 두고 자유주의적 또는 비장로교적 신학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오해를 받았다.62) 게일은 한국교회 초기에 있어서 신학교육과 성경번역사업과 한국문화를 서양에 알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선교사이다.
그가 남긴 설교 중에서 디모데후서 3:16의 “성경”이란 설교63)를 볼 때, 이 설교는 하나의 변증설교로서 수준 높은 설교이다.
대개 성경은 상고이래로 제왕후백(帝王候伯)이나 지식계급이나 하류사회를 막론하고 독일무이(獨一無二)하신 하나님의 도(道)를 인정치 않는 자 별로 없으니 그런즉 이 글은 세속의 글과는 특이한 줄 알 것이 올시다. 그 증명에 대하여 일곱 조목으로 밝히 증거하겠습니다.
…이상의 일곱가지를 보면 1조는 자고이래의 창조하신 조화의 명증이요, 2조는 독일무이하신 하나님이시로되 삼위일체도 되신다는 명증이요, 3조는 인류된 자는 무비죄악중(無非罪惡中) 침륜하였다는 명증이요, 4조는 40명이 저작한 언사가 일일이 관통하여 착오가 없는 명증이요, 5조는 예수의 초자연적 도덕은 세상의 어떠한 도덕이 이에 불급(不及)하는 명증이요, 6은 신구약예언이 일일이 응험(應驗)한 명증이요, 7은 예수의 자초지종의 행적을 명백히 기재할 뿐 아니라 장래사같이 일호(一豪)도 유루(遺漏)됨이 없는 밝은 증거올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도”이며 세속의 글과 다르다고 했으며 성경의 위대성과 사실성을 정확한 논리와 정확한 성경구절을 제시하며 7가지로 설명하면서 자신의 성경관을 일목요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게일목사가 한국교회의 신학과 신앙의 틀을 잡아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64)
Ⅳ. 초기 한국교회의 설교(1900-1920)
1. 기독교 상황
이 땅에 기독교는 19세기 말엽 나라의 운명이 다하였을 때, 곧 민족적으로는 너무나 불행한 시대에 들어왔다. 이때 기독교는 나라의 몰락과 외세의 침략으로 찌들고 텅 빈 한국인의 가슴을 메워 주는 가장 좋은 시기였다.
1896-1900 경에는 한국에서 열강들이 세력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였는데 한국 기독교인들은 자주의식을 고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1901년에 선교사들로 구성된 장로교공의회는 기독교를 정치적 소용돌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교회의 비정치화를 결의하게 됐다. 같은 해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가 개교되어 우리의 지도자들이 교육받기 시작했는가 하면 동시에 1901년에서 1905년까지는 한국 기독교는 사회의식이 크게 내면화되기도 했다.
1904-5년의 노일전쟁 중에는 일본군의 행패와 관리들의 사회적 압박을 피해서 교회로 들어오는 사람이 많았고 뜻 있는 인사들이 1905년 이후에 기독교에 입교해서 그들의 비통한 감정을 승화시키고 민족의 소망을 기독교에서 찾으려고 했다. 또한 1905년 이후 일제의 한국 병합작업이 본격화되어 갈 즈음에 기독교인들도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고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한편 1905년 이후에는 교회 안에서 몇 다지 특기할만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즉 그것은 1907년의 대부흥운동, 교회 연합운동, 평양신학교 제 1회 졸업생이 배출되고 7인의 한국 목사가 배출되는가 하면 독노회가 조직되고 1912년에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1910년 경에 민족운동을 위한 조직은 모두가 해체되어 존재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 때 총회의 조직은 유일한 전국적인 조직체이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항일 민족운동의 온상으로서의 기독교와 그 지도자를 박멸하기 위한 음모가 나타나게 된다. 즉 그것이 105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일제의 고문과 조작으로 말미암은 교회 박해 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사실상 전국교회의 조직과 활동이 3. 1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3. 1 운동 이후 일제는 그들의 통치 방법을 표면적으로 무단통치에서 소위 문화통치로 바꾼다는 제스처를 썼다. 그러나 이것은 수탈, 식민정책의 위장이었다. 이때 기독교인 민족지도자들은 자주실력 배양을 주장하여 경제 및 교육방면의 자립운동으로서 1920년대의 조선물산 장려운동 등으로 나타났다.65)
2. 초기교회의 신앙형태
초기교회의 신앙을 감리교의 선교사 존스는 다음과 같이 열 가지로 분류, 정리하고 있었다. 곧 성서의 압도적 권위에 대한 부동(不動)의 신앙, 예민한 죄의식과 회개, 개인의 인격적 신앙, 부흥회적 열정, 교리문답식 성서교육, 기독자로서의 헌신과 봉사, 십일조, 헌금, 강렬한 주체적 신앙 때문에 겪는 환난, 그리고 선교의 열정, 이런 열 가지 신앙유형이었다.
이러한 내적이요 종교적인 차원의 신앙유형이 초대교회에 주도(周到)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반면에 개화지향을 동기로 해서 입교했던 사람들의 수 역시 적지 아니하였다.66)
3. 설교의 시작
한국교회 초기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설교의 메시지에는 한계가 있었다. 언어의 장벽도 그러하고 또 당시의 민족적 수난으로 말미암은 이 민족의 아픔을 선교사의 서투른 설교로서는 위로할 수가 없었다. 결국 한국인 전도사와 목사에 의한 구원의 진리가 선포되고 위로와 책망이 있어야 했다. 또한 한국인 지도자가 던지는 메시지는 더 큰 힘이 있었고 동감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1900년을 전후하여서 기독교인들은 국왕탄신일 등 애국충군적(愛國忠君的) 집회활동 사회단체의 결성 등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는데 대군중집회의 순서가 다 교회의 예배 의식을 그대로 옮긴 것과 같은 순서였다. 기도와 찬송, 주기도 등이 있고 연설이 있었는데 이 연설은 설교의 형식을 띤 것이 확실하다. 아직도 정식으로 목사로서 설교자가 없었던 때인지라 평신도 지도자 또는 전도사들이 전도집회 또는 이른바 “애국충군적 집회”에 참석해서 “종교적 강설”의 형식을 빌려서 설교한 것 같다. 이들의 설교는 선교사들의 그것과는 달라서, 믿는 자이건 믿지 않는 자이건 간에 훨씬 더 호소력이 있는 메시지가 되었다, 대부분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당시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 예컨대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등과 한석진, 방기창, 김종섭, 안창호 등 독립협회 소속의 기독교 지도자와 당시 선교사의 조사들은 한국 기독교회의 설교 운동의 선두 주자들이라고 함이 옳겠다.67)
4. 강단의 주역들
한국 교회의 초기의 강단의 주역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이 1907년의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7명의 목사인 서경조, 한석진, 양전백,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송인서 등을 위시해서 평신 출신의 목사와 감리교 협성신학교 출신의 최병헌, 김유연, 김종우, 그리고 전덕기, 또한 성결교의 이헌명, 이명직 등의 설교가들이었다.68)
5. 설교의 특징과 내용
설교에 대한 명칭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최병헌은 “설교”라 했고 양익환은 그의 서문에서 “강설” 또는 “강도” “강론”이라고 했다. 1921년 한석원이 편집한 강연집에도 “설교” 또는 “강설”로 같이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한국 초대교회의 설교의 유형은 어떠했는가? 우선 엄요섭은 그의 “한국교회 설교의 시대적 형태론 (상)”에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유형으로 대별하였다.69)
첫째로 유교사상에 젖어 있는 우리 민족에게 기독교를 가르침에 있어서 유교윤리를 기독교적으로 설명을 한 설교이다. 둘째로 일제시대에 식민지 정책에 항거 또는 독립사상을 고취, 그리고 민족의 개화사상을 강조하는 설교가 많았다. 셋째는 초대 한국 교회의 설교 유형은 순수한 복음전파의 설교라는 것이다.
설교는 그 당시의 신학의 틀이며 교화의 사상이다. 그리고 설교 그 자체는 정체된 이론적인 신학과는 달리 다이나믹하고 적극적이며, 공격적이고, 폭발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초기의 한국 교회의 설교들은 그들의 신학인 동시에 간증이요 역사이다. 동시에 그들의 인생관이며 우주관인 것이다. 일제와 싸우는 전투자로서의 모습을 엿볼 수 있고 민족의 아픔을 같이 하는 눈물의 호소들이다. 그것은 문화변혁주의자로서의 설교였으며 민족의 갈 길을 밝혀주는 설교이며 새로운 윤리의 표준으로서의 예수를 설교했으며 민족의 구원과 자각을 일깨우는 설교이기도 하였다.70)
1)민족의 구원과 자각을 일깨우는 설교
당시의 목사들은 이 민족의 가장 선두에 서서 대중들을 이끌어 가는 선각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목사들만이 세계정세에 밝았고 교회만이 가장 광범위한 조직체를 갖고 있었고 강단에서의 설교는 바로 이 민족에게 영적 기갈을 채워주었을 뿐 아니라 민족의 구원과 자각을 일깨우는 길잡이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미 기독교는 민족의 갈 길을 제시해주는 종교로 부각되었다. 그래서 당시의 설교들은 민족적 구원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초기 한국 교회의 설교는 민족구원을 소리높이 외쳤던 것이다.71)
2)민족의 갈 길을 밝혀주는 설교
목사나 기독교 교사는 언제나 시대를 앞질러 가는 사람들이었고 그 시대를 향한 소명감에 불타는 사람들이었다. 이미 그 당시에는 그 시대 자체가 기독교에게 그것을 기대했고 민족의 십자가를 지는 교회로 요청했던 것이다. 이 때의 설교 중에는 시사적인 내용이 많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앞서도 말했지만 목사들이 가장 시사성이 밝은 자들이었고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고 있었으며 서양학문을 가장 먼저 접한 선각자이기도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당시의 제 1 차 세계대전 이후의 소식이라든지 미국이나 구라파의 정치적인 상황도 퍽 많이 예화로 채워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엽의 철학이나 사상가들의 소개도 눈에 띄었다.
오늘날의 설교 신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어쩌면 설교라기보다는 오히려 종교강연 같은 인상이지만 그때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당시의 사람들은 영적인 갈증은 말할 것도 없고 지적인 갈증이 있었던 때였다. 그래서 당시의 설교의 내용도 대단히 풍성하고 수준높은 설교였던 것을 볼 수가 있다. 장로교의 목사보다는 감리교 목사들의 설교에서 더욱 시사적이고 국제적인 소개가 많이 나오고 있다. 민족의 갈 길을 밝혀주는 설교는 매우 계몽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 나라 초기교회는 애국충군(愛國忠君)의 교회인 동시에 반일 순국의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잠자는 민족을 깨워 민족의 갈 길을 제시하는 불을 튀기는 메시지로 충만했다고 할 수 있다.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는 와도 교회가 이 민족에 대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72)
3)새로운 윤리의 표준으로서의 예수를 설교
5백년 동안 유교의 형식윤리의 틀 가운데 있었던 이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확실히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이미 개화의 바람이 불어온 이후에 한국인 자신이 이러한 옛날의 윤리체제로서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변화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문화 변혁의 열쇠가 되었다.
당시의 원산부 남감리교회의 목사였던 신석구는 그의 설교 “기독교와 사명”에서 말하기를,
“…우리 조선으로 말하여도 오십여년전 까지도 방방곡곡에 공자의 도를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당하여는 공자의 도 즉 인의예지효제충신의 도덕이 어디 있습니까?73)
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새로운 윤리적 표준으로서,
“그런데 오늘 우리 조선에서 제군과 같이 이 나라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백성을 성결케 하기 위하여 힘을 다해야 할 것 같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적으로 되어야 하겠습니다.
고 했다. 기존 도덕의 몰락에 대한 새로운 종교로서의 대답이 곧 기독교의 복음이다. 기독교의 윤리와 기독교의 도덕이 사회의 전반에 걸쳐서 실현되어야 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소극적 윤리에서 적극적 윤리로, 이론적인 윤리에서 실천적 기독교 윤리를 제시했다.
이처럼 초기 한국교회의 설교가들은 자기들의 시대에 자기들의 사명을 다 감당하였다. 민족의 애환을 설교했는가 하면 민족구원의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했고 새로운 윤리의 기초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했다. 그들의 설교는 주기도문의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설교하였다.74)
Ⅴ. 초기 한국교회의 설교에 대한 설교학적 평가
1. 설교관
1910년대 말까지 목사들이 설교와 강연사이를 구분 못하고 있다가 1920년대 말에 와서 비로소 설교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고 설교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어진 것 같다. 한편 한국목사로서 개인 설교집을 가장 처음으로 펴냈다고 할 수 있는 길선주목사의 “강대보감”을 보면 평양신학교 10회 졸업생(1917)인 강규찬목사의 서문이 있는데 그 서문에서 당시의 설교관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길선주목사의 설교를 칭찬하면서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첫째로, 설교는 천국의 도리를 분명히 설명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설교의 근거는 성경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설교는 자기의 실력이나 상식으로 할 것이 아니고 성령의 도움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는, 설교의 목적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설교의 최후 최종적인 것은 사람이 구원받고 영생에 이르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입장은 설교학의 중요한 요점을 파악한 것이다.75)
2. 설교의 형식76)
초기 한국교회는 1900년대 전후의 미국교회에서 유행하던 제목설교와 본문설교가 그 주종을 이루었던 셈이다. 우선 제목설교는 곽안련박사의 지적처럼 통일을 갖기 쉬운 장점이 있다.77) 한국교회의 초기설교는 대개가 통일과 그 조직에 있어서 변화를 몹시 싫어한 것 같다.
제목설교의 대표자는 이명직목사이다. 그는 잠언 18:24절의 “형제보다 친밀한 친구도 있나니라”한 성경구절을 읽고 제목은 “우리의 친구 예수”라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대지를 나누었다. ①예수는 죄인 괴수된 나의 친구(눅 7:13), ②예수는 동정이 깊으신 친구(히 2:18), ③예수는 변치 아니하시는 친구(마 28:20)라고 했다. 본문이 내용과는 무관하게 제목이 지향하는 방향대로 성경구절을 찾아 설교를 구성하는 것을 후일 한국교회 설교 중에 설교의 한 모델이 된 것이다.
둘째는 본문설교이다. 사실상 초기의 선교사들이 대개 다 제목설교의 경향을 가졌는데 반해서 도리어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본문설교를 즐겨 썼다는 사실이다.
정동교회의 김종우목사는 엡 1:17에서 “고상한 지혜”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①상제(上帝)를 참으로 아는 것이 고상한 지혜올시다. ②우리의 소망이 무엇임을 아는 것이 고상한 지혜이올시다. ③인생이 살 줄을 아는 것이 고상한 지혜이올시다. 라고 했다. 그는 여기서 본문에 나타난 내용을 따라서 그 뜻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대지로 나누어진 것을 얼마나 충실하게 성경을 해석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점으로 남는다.
3. 설교에 대한 신학적 평가
1)설교에 나타난 신관78)
초기 한국교회의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교리를 취급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가령 한국기독교 선교 100주년 대설교전집(1) (1884-1919)에 나타난 설교의 목차를 보면 141편의 설교 중에 하나님께 대한 설교는 고작 4편에 불과하다. 이렇게 두고 볼 때 결과적으로 초기교회는 하나님을 설교하는 것이 약했다고 볼 수 있다.
2)설교에 나타난 기독관79)
초기 한국교회의 설교 중에 기독관을 언급한 설교는 상당히 많다고 할 수 있다. 구속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뿐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의 인격을 따라야 할 것을 강조했다.
당시의 설교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형님이란 표현을 많이 쓰고 있다는 것은 특색이다. 당시 원산부 남감리교회의 신석구 목사는 “기독교와 사명”(마 16:16-20)이란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첫째가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올시다. 그리스도가 토대가 된 교회의 둘째가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로 믿고 나는 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고 믿는 것입니다. 셋째는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형님이시오 우리는 다 그의 동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 하는 형님에게 교도를 받는 형제자매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교회의 넷째가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에서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이가 있습니다. 아직 그리스도의 동생이 되지 못하고 방황하는 자가 있습니다.”
물론 초기 선교사 중에는 예수를 우리의 형님으로 표현한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형님이라는 이해는 기독론을 바로 취급하는 논법은 아니다.
이미 1920년대에 신학이나 설교에 있어서 잘못된 기독관을 설교하는 자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예수를 사회복음주의자와 같이 취급한 사람들의 설교도 많았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거짓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들이 상당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3) 설교에 나타난 성령관80)
초기 한국교회의 설교에 나타난 성령관은 1907년에 일어난 대부흥 운동과 무관하지 않다.
1907년 1월 6일부터 평양 장대현교회를 중심하여 선교사들과 시내의 한국인 신도들이 함께 모이는 대사경회가 개최되었다. 이 사경회는 10일간이나 계속 되었으며 대성황을 이루었다. 수천명이 모여서 부인들은 밖에서 자리를 만들었다. 집회는 성경공부에 주력했고 저녁에는 전도설교였다. 저녁부흥회 때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다. 그날 밤 길선주 전도사가 설교 도중에 “맛을 잃은 말라빠진 사람들아”라고 외쳤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큰 충격과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거기 모든 사람들은 세속적 유혹에 빠져 영적 기근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그 설교의 내용이 자기에 해당한 줄 알고 통회 자복하며 기도했다.
1907년의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한국교회는 드디어 틀을 잡아가게 되고, 한국교회는 자기다운 모습으로 바꾸어졌다고 할 수 있다. 탁사 최병헌 목사는 감리교가 낳은 당시 최대의 신학자요 설교가였다. 그는 “생사일판” (로마서 8 : 5-6)에서 다음과 같은 설교를 하였다.
“주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신의 그 마음속에 있고 또한 그리스도 속에 있어 죄를 정함이 없는 사람이니 성신의 일을 생각하며 성신으로 거듭난 신자들이라 아무리 믿는다 하며 회개하였다 할지라도 신으로 다시 나지 못한 자는 늘 예전 사람의 성질과 육신의 생각이 그대로 남아서 위급한 때에는 거짓말도 잘하며 혈기도 발할 것이올시다.”81)
라고 했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신”이라고 말한 점은 독특하다. 또 회개한다는 것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명백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초기 교회의 설교에 나타난 성령론은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매우 건전하게 이해되었다.
4)설교에 나타난 교회관82)
초기 성결교회의 거목인 이명직목사의 설교 중에 “전투의 교회”를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한다.
“혹 이 교회를 오해하여 일종의 정신수양의 장소로 여기나니 이것은 큰 잘못이다. 교회는 일개인의 정신수양이나 위하여 나무타불이라 부르는 사원이 아니다. 죄악에서 실제로 구원받은 무리 곧 그리스도의 정병들이 모여 싸움을 준비한 곳이다.”
라고 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교회에 대한 그릇된 오해가 있었다. 당시에 정신수양의 장소로서 또는 독립운동의 장소로만 생각하는 자들이 많던 때에 그는 이런 문제점을 꼬집고 전투적 교회로서의 모습을 설교했다. 또한 양주삼목사는 그의 “금후의 조선교회”란 설교에서 앞으로 한국교회가 걸어가야 할 방향을 설교했다.
“이렇듯 조선교회는 과거에 있어서 이상과 같은 개척사업을 행했는데 그러면 오늘에는 어떠한 사업을 행할 것인가? 교회는 세상의 부족을 보충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회의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첫째로 선이 부족하다.......그러므로 교인들의 선의 모범을 세인에게 나타내야 하겠다. 서울은 한국의 중심이다. 따라서 서울교회는 모범교회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세상에는 단결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결하여야 한다. 잘 단결하려면 사랑이 절대로 필요하다. 교회는 사랑으로 성립되었다.”
고 하였다. 교회는 한국 사회에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책임을 묻고 있다. 격동의 시기, 변화의 와중에 교회의 기초를 다지며 민족의 수난과 고통을 보면서 설교했던 초기교회의 설교자들은 그 시대에 자기들의 사명을 지키고 진리를 수호했다.
Ⅵ. 오늘의 한국교회 강단에 주는 교훈
오늘의 한국강단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뿌리를 찾아 들어가면 결국 선교사들의 설교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설교가 언어와 문화의 장벽으로 인해 청중들의 삶의 변화와 교회의 부흥 그리고 민족의 역사를 변혁시킬 정도로 강렬한 메시지였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국교회 설교의 출발은 그들로부터 태동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은 대부분 젊은 나이였으며 설교에 대한 전문가라거나 많은 목회경험을 통해 습득한 성숙한 설교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툰 면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 당시에 유행하던 제목설교가 주종을 이루었기 때문에 다양한 설교의 형태를 접할 수도 없었고 그들 대부분은 성경무오설과 같은 보수적인 신학을 근거로 했기 때문에 성서해석에 있어서도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한국교회의 신학과 신앙에 미친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 그들의 설교가 오늘의 한국강단에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첫째, 복음을 향한 설교자의 열정을 배울 수 있다.
선교사들의 설교는 대부분 제목설교였으며 그 논지도 잘 전개되지 않고 본문에서 벗어나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타올랐다. 특히 언더우드와 마펫이 복음전도를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로 강조하며 복음을 전했듯이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 복음의 위대성과 순수성을 간직하고 생명 살리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가 복음에 대한 열정이 없고 전도에 대한 소중함과 확신이 없을 때 교인들은 전도하지 않고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둘째, 성경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그들의 정신이다.
물론 성경이해에 있어 축자영감설과 같은 보수적인 신학사상으로 인하여 성경해석의 폭이 좁아지고 교회분열과 같은 부정적인 요소도 지니게 되지만 설교자의 뿌리는 결국 성경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리라. 성경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고 바른 해석을 통하여 성경이 말하게 하시는 말씀을 청중들에게 전하는 성경중심적 설교자의 자세와 정신을 오늘의 설교자들은 간직해야 하겠다.
셋째, 교회연합을 위해 노력하는 설교자의 자세이다.
언더우드가 교회연합을 위해 노력했듯이 오늘의 설교자들도 교회연합을 위한 정신이 말씀선포 속에 용해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분열된 한국교회가 다시 연합하여 이 나라와 민족의 분열을 치유하고 지역과 계층의 화합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넷째, 선교사들의 설교에 사회 정치적 주제나 관심이 도외시된 점은 보완되어야 하겠다.
당시의 사회, 정치적 상황이 그런 주제들을 다루기 어려웠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는 암울한 시대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둠을 밝힐 수 있어야 하겠다. 그들이 말씀을 통하여 이 민족에게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소망을 가져다 주었지만 한편으로 세상은 심판 받아야 할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현실을 도피케 하는 부작용도 가져올 수 있다. 설교자들은 하늘의 소망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고 시대를 일깨우는 적극적인 사회 개혁적 주제들도 다룰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런 면에서 초기의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이 민족의 구원과 자각을 일깨우고 민족의 갈 길을 밝혀주고 새로운 윤리의 표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한 것은 오늘날 이 민족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겪고 있는 여러 어려움들 과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 본받고 실천해야 할 설교의 주제가 아닐까 한다.
다섯째, 설교자는 언제나 청중의 삶과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아무리 뛰어난 학식과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어도 선교사들과 청중들의 삶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을 때 그리고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그들의 설교의 열정이 오히려 청중들로 하여금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던 것을 교훈 삼아 청중들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의 언어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하겠다.
Ⅶ. 나오는 말
19세기 말 복음이 들어왔을 무렵에는 이미 국운이 기울고 있던 시대였는데 하나님은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 들어가는 이 민족에게 복음의 밝은 빛을 던져주셨다. 하나님은 개인이 절망할 때도 찾아오시지만 민족의 아픔도 외면하지 않으시는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 역사뿐만 아니라 이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도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선교사들은 어두워져 가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향해 서로 달려왔다. 지원하였지만 오지 못한 선교사들도 많았다. 다른 선교지로 가려다 방향을 바꾸어 한국을 향하기도 했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한국을 선교지로 결정한 사람도 있었다.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사전에 준비작업을 하셔서 성경을 번역하는가 하면 외국에서 세례를 받게 하여 국내로 들어오게 하셨고 번역한 성경을 가지고 전도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하셨다. 앞에서 민경배가 지적했듯이83) 선교사들로 인하여 시작된 선교였지만 이미 그전에 한국인의 손에 의해서 한국교회는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준비된 토양에 선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의 씨를 뿌렸으니 옥토에 떨어진 씨앗처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된 것이리라. 선교사들은 복음의 열정으로 불타던 젊은이들로서 복음전도에 최선을 다하여 암울한 역사 속에 침잠되어 가던 이 민족 앞에 새로운 생명을 던져주었다. 그들의 설교가 비록 여러 가지 부족한 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여 민족의 아픔을 함께 신음하며 민족의 설움을 함께 달래며 말씀으로 민족을 깨우칠 한국의 설교자들을 길러내게 하셨다.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초기의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고 해석하던 단순한 외침이 결국 오늘의 한국교회를 만들었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청교도적이고 보수적인 설교의 틀이 오늘의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들이 바로 1900년에서 1920년까지 경향이었다.8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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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2.
부두일. “실효있는 강도의 요소”, 『신학지남』 제4권(1921).
성갑식.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설교』. 서울: 총회교육부,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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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1986.
정인교. “초기 선교사의 설교와 그 영향.” 『그말씀』. (199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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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동교회 80년사』. 서울: 연동교회, 1974.
1)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1986), 28쪽.
2) 김남식, 간하배, 『한국장로교 신학사상사』, (서울: 베다니, 1997), 42쪽.
3) 위의 책, 42-43쪽.
4) 위의 책, 43-44쪽.
5) 위의 책, 44-46쪽.
6) 김인수, 『한국기독교회의 역사』, (서울: 장로교신학대학교출판부, 1997), 96-100쪽.
7) 위의 책, 104-08쪽.
8) 위의 책, 109-13쪽.
9) 위의 책, 113-15쪽.
10) 위의 책, 115-19쪽.
11) 위의 책, 129-34쪽.
12) 위의 책, 134쪽.
13) 김남식, 간하배, 『한국장로교 신학사상사』, 63쪽.
14)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2), 164쪽.
15) 김남식, 간하배, 『한국장로교 신학사상사』, 145쪽.
16)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194쪽.
17)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149쪽.
18)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27-28쪽.
19) 김남식, 간하배, 『한국장로교 신학사상사』, 93-96쪽.
20) 나머지 13명은 안젤모신학교와 뉴욕의 유니온신학교에서 각각 3명 그리고 7명은 무디성경학교와 뉴욕성경신학교 출신이었다. 『그말씀』, 1994년 11월호, 96쪽.
21) 위의 책, 17-18쪽.
22) 이 설교집의 영문표기는 PAIKMOK KANGYUN Sermon by one Hundred Pastor & Teachers vol. I 이라 했다. 최병헌목사는 추천서에서 “…우리 조선반도에는 각종교가에서 발행하는 잡지 외에 별로히 저술한 책자가 없고 다만 홍비화나 공산명월 같은 소설 뿐이라 어찌 한심치 아니하뇨 양익환은 근본유지(根本有志)한 청년으로 예수교의 진리는 독신(篤信)하고 천국의 헌신한 성도인데....... 위선 백사람의 설교한 것을 수집하여 일책(一冊)을 편성하는 제왈(題曰) 백목강연이라” 2쪽. 재인용
23)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30쪽.
24) 위의 책, 18-19쪽.
25) 부두일, “실효있는 강도의 요소”, 『신학지남』 제4권(1921): 80-81쪽.
26) Andreas Gerhard는 16세기의 최초의 칼빈주의 설교학자였으며 그의 저서는 1553년에 발행된 “De Formendis Concionibus Sacris"가 있다.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33쪽에서 재인용.
27)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32-34쪽.
28) 위의 책, 31-32쪽.
29) 정인교, “초기 선교사의 설교와 그 영향”, 『그말씀』, (1994. 11): 97-101쪽.
30)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 당시의 한국 상황에서 선교사들의 공헌으로 여겨졌던 부분들은 후대의 평가에서는 오히려 아쉬운 부분으로 도치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즉 그들의 설교에서 사회, 정치적 주제나 관심, 한국의 상황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는데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이나 일본의 검열 등으로 그 원인을 돌릴 수 있겠으나 설교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이라는 상황 속으로 해석해 넣는 작업이라고 할 때, ‘상황’이 무시된 설교가 과연 올바른 설교이며 동시에 회중을 올바로 이끌 수 있었겠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정인교, “초기선교사의 설교와 그 영향‘, 『그말씀』, (1994. 11): 100쪽.
31) 선교사들의 설교를 분석함에 있어 기본적으로 갖게되는 난제들(가령 한편의 설교는 언제나 일정한 장소나 시간, 그리고 제한된 회중에게 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설교의 제한성과 설교 한편이 설교자가 가진 신학전체를 대변할 수 없다는 문제, 전해 내려온 설교편수의 제한, 그리고 당시에 선포된 설교와 기록되어 오늘에 읽혀지는 설교사이에 게재되어 있는 이해와 감동의 차이와 설교가 개인의 작업이기에 전체적인 성격으로 묶어 규명하는 데 있어서의 문제점 등)은 전제되어야 한다. 위의 책, 97쪽.
32) 전택부, 『이 땅에 묻히리라』, (서울: 홍성사, 1994), 42쪽.
33) 김남식, 간하배, 『한국장로교 신학사상사』, 97쪽.
34)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38쪽.
35) 원두우, 『원두우 강도취집』, (서울: 조선기독교서회, 1920), 2쪽.
36) 언더우드가 연합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찬송가 편찬이었다. 감리교의 죤스(George H. Jones)와 같이 책임을 맡았으나 죤스가 곧 미국으로 떠났으므로 언더우드가 주도적으로 편찬하였다. 그는 “하나님(Hananim)”과 “아버지”라는 용어를 채택하므로 한국인 고유의 “신” 이름을 활용하여, 신 개념의 이해를 쉽게 하였다. 김남식, 간하배, 『한국장로교 신학사상사』, 99쪽.
37) 김남식, 간하배, 『한국장로교 신학사상사』, 99-100쪽.
38) 성갑식,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설교』, (서울: 총회교육부, 1972), 13-21쪽. 또한 『대설교전집』(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 (서울: 박문출판사, 1974), 309-12쪽. 이 설교는 언더우드목사의 한국선교의 최후의 설교였다.
39) 『대설교전집』, 309쪽.
40) 원두우, 『원두우 강도취집』, (서울: 조선기독교서회, 1920), 4쪽.
41)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36-43쪽.
42) 김남식, 간하베, 『한국장로교 신학사상사』, 98쪽.
43) 위의 책, 115쪽.
44)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43-47쪽. 『장로회 신학대학 70년사』, (서울: 장로회신학대학, 1971), 107쪽. 곽안련박사는 선교초기에 승동교회를 목회했다.
45) 그의 저서 가운데 42권을 한글로, 나머지는 영문으로 저술하였다. 그 중 21권은 성경주석이다. 그의 저서 『설교학』, 『목회학』은 오늘날까지 신학교재로 애용되고 있을 정도이다.
46) 김남식, 간하배, 『한국장로교 신학사상사』, 115-16쪽.
47) 곽안련, 『설교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28쪽.
48) 위의 책, 129쪽.
49) 위의 책, 390쪽.
50) 대설교전집』(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기념), (서울: 박문출판사, 1974), 100-03쪽.
51)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44쪽.
52) 『대설교전집』, 103쪽.
53)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47-49쪽.
54) 한국이름으로 마삼락인 그는 평양에서 태어나 성장하였고, 한국선교사로서 오랫동안 사역하였고, 장로교 신학대학에서 교수하다가 귀국하여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교수로 봉직하였다.
55) 김남식, 간하배, 『한국장로교 신학사상사』, 102쪽.
56) 위의 책, 104쪽.
57) 『대설교전집』, 513쪽.
58)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50쪽.
59) 『대설교전집』, 514쪽.
60)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52쪽
61) 『기독교대백과사전』제1권, (서울: 기독교문사, 1983), 506-07쪽.
62) 『연동교회 80년사』, (서울: 연동교회, 1974), 25쪽.
63) 『대설교전집』(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 제1권, (서울: 박문출판사, 1974), 544-47쪽.
64)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57-59쪽.
65)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64-65쪽.
66)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189-90쪽.
67)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65-68쪽.
68) 위의 책, 68쪽.
69) 엄요섭, “한국교회설교의 시대적 형태론(상),” 『기독교사상』 제16권 (1972. 4.): 125쪽.
70)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70쪽.
71) 위의 책, 71-77쪽.
72)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77-84쪽.
73) 아래 인용설교문과 함께 고어(古語)로 되어 있는 문장을 현대어로 고쳐 적었음을 밝힌다.
74)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84-91쪽.
75)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97-98쪽.
76) 위의 책, 100-103쪽.
77) 곽안련, 『설교학』, 66쪽.
78)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104-05쪽.
79) 위의 책, 107-10쪽.
80) 위의 책, 110-16쪽.
81) 『대설교전집』(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 제1권, 553쪽.
82)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116-18쪽.
83) 발제물, 4쪽.
84)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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