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배우 50년, 내 갈증은 풀리지 않았다
'국민 성우' 배한성이 말하는 나의 삶, 나의 연기
“아마데우스·맥가이버 목소리, 연습 얼마나 한 줄 아나요”
"먼 길 오셨네요." 배한성(70)은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거실에서 인사를 건넸다. 경기 평촌에 있는 그의 아파트는 배한성의 얼굴처럼 조쌀하고 말끔했다. 거실 한가운데엔 JBL 메트로곤 스피커와 매킨토시 앰프가 켜져 있었다. 맞은편 벽엔 미국 건축가 구스타프 스티클리의 나무 소파가, 발코니엔 골동품 석등이 서 있었다.
집에 있는 물건들은 우아하고 맵시 넘쳤다. "근사하다"고 했더니 그는 특유의 쨍한 목소리로 "뭐, 꼭 그렇지도 않아요"라고 했다. "그러니까 뭐랄까. 갈증 같은 거예요. 오랫동안 내가 손에 넣고 싶었던 세계라고 해야 하나…." 그가 말끝을 흐렸다.
1966년 TBC 공채 성우로 일을 시작한 배한성은 올해 성우 인생 50주년을 맞았다. 사람들은 아직도 맥가이버를 떠올릴 때 미국 배우 리처드 딘 앤더슨의 얼굴과 배한성의 목소리를 동시에 기억하고, TV에서 더빙해 방영한 영화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를 배한성의 음성 연기로 떠올린다. 그는 언제나 원조(元祖)보다 또렷하고 원음만큼 생생한 목소리의 남자였다. 그는 "돌아보면 내겐 완벽했던 순간도, 완벽하게 행복했던 순간도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돌아보면 난 늘 초조했어요. 불안했고요."
지독하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배한성은 1946년 서울 돈암동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수재 소리를 듣고 서울대를 졸업했던 아버지는 그가 만 네 살 때이던 1950년 6·25 전쟁 때 이북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서울여상을 나온 어머니가 배한성과 남동생을 홀로 키웠다. 그러나 어머니는 경제활동을 전혀 할 줄 몰랐다. 거의 모든 한국인이 삯바느질을 하고 허드렛일을 하던 시절, 배한성의 어머니는 패물을 팔아 끼니를 해결하는 것 외엔 돈 버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배씨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엔 그나마 가진 패물도 다 떨어졌다. 배한성은 그렇게 소년 가장이 됐다고 말했다.
―그게 몇 살이었습니까.
"열세 살입니다. 제가 공부를 제법 하는 편이었어요. 초등학교 졸업하면서 선생님께 휘문중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거긴 너희 집에서 버스를 네 번 갈아타야 하는 곳인데 버스비는 있느냐. 그냥 걸어 다닐 수 있는 학교에 가라'고 하셨죠. 그래서 고명중학교에 1등으로 들어갔어요. 덕분에 6개월은 월사금을 안 내고 다녔지만, 그래도 학비와 쌀과 연탄값까지 다 제가 벌어야 했죠. 남대문 인력시장에 가서 지게꾼들 도와주면서 푼돈을 벌었고 과외선생도 했어요. 그렇게 번 돈으로 매일 연탄 두 덩이에 봉지 쌀이나 밀가루 한 줌 사서 집에 가면 어머니가 그걸로 죽을 끓이거나 수제비를 해줬죠.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내가 늘 초조했던 것 말이죠. '쌀이 떨어지면 어쩌지.' '연탄 살 돈을 못 벌면 어쩌지.' 어릴 때부터 늘 그런 불안을 안고 살았죠."
―신문 배달도 했다면서요.
"집에 알람시계도 하나 없었어요. 어머니도 절 깨워주지 않았으니 매일 긴장하고 잤죠. 보통 새벽 네 시에 깨서 나가야 하는데, 하루는 너무 긴장하고 자다가 새벽 두 시쯤 깨서 뛰어나갔어요. 통금이 있던 시절 아닙니까. 순찰 돌던 경찰이 날 도둑인 줄 알고 때렸어요. 제가 '신문 배달 학생이에요! 때리지 마세요!' 하고 소리치자 저를 경찰서 숙직실로 데려갔어요."
―당시 신문보급소 소장님을 찾고 싶다고 한 적이 있죠.
"그분이 절 아주 좋게 봐줬죠. 일을 그만두면 먹고살 수가 없었으니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비 오는 날에 신문을 던져넣으면 다 젖어서 항의가 많았어요. 꾀를 내서 남대문시장에서 빈 깡통을 잔뜩 얻어 왔어요. 거기에 신문을 끼워 투입구에 넣어두곤 했죠. 신문이 안 젖게요. 보급소 소장님이 '이 녀석 보게나' 했던 것 같아요. 나중엔 고대 주변 안암동 전체를 내게 맡겼어요. 신문 돌리고 수금하는 일도 하게 했던 거죠. 나중에 성우로 인기를 한창 얻을 무렵에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방송에서 연락이 와서 내가 그 보급소 소장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어요. (스튜디오) 문 앞에서 '소장님'을 여러 번 불러도 안 나와요. 알고 보니 그 몇 해 전에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네요. 그때 어찌나 눈물이 났는지 모릅니다."
배한성이 앉아 있는 흔들의자는 그가 수집하는 앤틱 브랜드 ‘스티클리’다. 그가 더빙을 한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에도 스티클리가 등장한다. 배한성은 이 의자에 앉아 영화 대사를 그대로 읊었다. “이것은 특급 비밀이야, 가구는 뭐로 바꿨는 줄 알아? 스티클리!” / 김지호 기자
“제 인생에 은인이 몇 명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당시 만난 동네 친구예요. 그렇게 하루종일 뛰었지만 늘 학비가 모자랐거든요. 중학교 졸업할 돈도 없었어요. 그 친구가 내 얘기를 동대문중학교 교감이던 자기 작은아버지에게 했나 봐요. ‘극빈자증명서를 떼어오라’고 해서 갖다줬더니 나를 동대문중학교로 옮겨줬어요. 그 덕에 학비 안 내고 졸업해서 덕수상고로 갔죠. 그렇지만 거기서도 등록금이 모자라서 1년 다니는 둥 마는 둥 하고 거의 학교를 못 나갔어요. 졸업증만 간신히 땄죠. 근데 그때 그 친구가 ‘대학에 가라’면서 제게 학비를 빌려주는 거예요. 지금으로 치면 400만원쯤 돼요. 그 돈으로 서라벌예술대학에 등록했죠.”
―그렇게 어려울 때도 영화는 빼놓지 않고 봤다면서요.
“맞아요.” 배한성은 몸을 소파에 기댔다. “일하느라 학교에 못 나가는 날이 많았어요. 시간이 잠깐 생기면 신문 배달하다 남은 신문을 들고 극장 근처를 서성였어요. 극장표 파는 아저씨에게 ‘신문 그냥 놔드릴 테니 표 한 장 달라’고 해서 들어갔어요. 온갖 외국 영화를 그때 다 봤죠. 난 교육은 제대로 못 받았지만 또래 친구들이 교과서 들여다보고 있을 때 시네마스코프로 세계를 봤어요. 베르사유 궁도 보고 로마 콜로세움도 보고 호주 시드니도 봤죠. 그 영화 속 멋진 장면들을 보면서 그때부터 생각했죠. ‘언젠간 저렇게 살겠다. 언젠간 나도 저런 걸 누려보겠다.’ 내가 말했던 ‘갈증’이 바로 거기서 시작된 거죠.”
인생을 바꿔놓은 작은 전설들
배한성은 대학생이던 1966년 TBC 2기 성우로 입사했다. 성우 첫 시험은 고등학생 때 치렀다고 했다. 영화에 한참 푹 빠졌던 시절, ‘내가 신성일처럼 잘생기진 못했으니 영화배우보다 성우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는 그 무렵이다. 지원 자격이 ‘고졸 이상’이어서 시험을 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그는 사촌형 고교 졸업장을 빌려 1962년에 동아방송 성우 시험에 응시했다.
―남의 이름으로 시험을 봤다고요?
“그런 거죠. ‘나중에 어떻게 될까’ 그런 계산도 없었어요. ‘이 시험 꼭 보고 싶다. 난 지금 성우가 돼야 한다’ 그것 외엔 머릿속에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시험에 똑 떨어졌죠. 절망하고 있는데 나중에 등록금 빌려줬던 그 친구가 그러대요. ‘너 그거 붙었으면 오히려 큰일 났어. 가짜로 시험 본 게 들통나면 괜찮다고 할 것 같냐. 다행인 줄 알아라.’ 그때 비로소 정신이 들었죠(웃음).”
성우가 되고 나서도 가난은 계속됐다. 집에 라디오가 없어서 자신이 연기한 라디오 드라마를 들을 수조차 없었다. 옆집 아주머니가 집 대들보에 라디오를 묶어놓고 틀어줘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했다.
―처음부터 돋보였던 건 아니었나 보죠?
“아니죠. 그땐 라디오 사극을 많이 녹음했는데, 늘 칼 맞아 죽거나 화살 맞아 죽는 병사 역할만 했죠. 화살에 맞아 죽는 병사는 그나마 길게 신음을 할 수 있으니 좋았죠(웃음). 그러다가 나중엔 웨이터 역할을 했어요. ‘6번 테이블에 맥주 세 병, 마른안주 하나요’ 하는 거였는데, 이것만 계속하니까 나중엔 좀 지겹더라고요. 그래서 하루는 미친 척하고 경상도 사투리로 연기했죠. ‘어서 오이소, 주문받겠심더’ 이러면서요. 연출가 선생님이 ‘미친놈’이라고 펄펄 뛰었는데 엔지니어들은 ‘재미있으니 놔두자’고 웃는 거예요. 그때부터 내가 이것저것 역할을 많이 하게 됐던 것 같아요.”
“남희준 선생님이라고 유명한 선배가 계셨는데 하루는 펑크를 내서 제가 대신 들어가게 됐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다들 (목소리를 굵고 낮게 내면서) ‘누나, 왜 이렇게 늦게 들어오냔 말이야. 누나가 늦게 들어오니까 집안이 시끄럽단 말이야’ 하고 좀 이상하게 연기하던 때였는데, 난 그때 (목소리를 경쾌하게 높이며) ‘누나! 대체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 누나가 이렇게 늦게까지 돌아다니니까 고3인 내가 공부가 안 되잖아!’라고 녹음을 했어요. 바로 ‘컷’ 소리가 나고 다들 얼어붙었어요. 나도 속으로 ‘아이코. 괜히 다르게 했다’고 후회했죠. 근데 밖에 계셨던 이청하라는 이북 출신 대선배님이 이러시는 거예요. ‘다들 잘 들으라우. 저 신인을 보라. 쟈는 말을 하지 않니? 제대로 말하지 않니? 너 이름이 뭐라고? 배한성이라고? 그래, 이제부턴 배한성이 시대가 열리갔구나!’ 그때부터 정말 거짓말처럼 모든 게 바뀌었죠(웃음).”
배한성의 인기는 금세 치솟았다. 곧 가장 인기 있는 성우로 등극했다. 오후 7시 20분, 8시 20분, 9시 20분에 차례로 방송되는 모든 라디오 드라마 주인공을 그가 한꺼번에 맡은 게 시작이었다. 라디오에서 텔레비전 시대로 바뀌고 외화가 본격적으로 방송이 되자 배한성은 더욱 바빠졌다. 알랭 들롱, 알 파치노 같은 유명 배우의 목소리는 다 배한성이 맡는 식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외화 더빙은 다 같이 오전 11시쯤 방송국에서 모여 시사를 한 번 하고, 오후 2시쯤 다시 모여 녹음을 하는 게 관행이었다. 배한성은 “미리 대본과 테이프를 달라”고 우겨서 며칠씩 영화와 대본을 보고 익힌 뒤 녹음에 들어갔다.
―왜 혼자 미리 보셨던 거죠.
“대사만 녹음하면 안 되거든요. 호흡이라는 게 있어요. (입맛을 과장되게 쩝쩝 다셔 보이면서) ‘쓰읍’, ‘아아’ ‘후후’ 이런 게 제대로 들어가야 진짜 녹음인데, 이건 한 번만 봐선 몰라요. 대본을 여러 번 보고 테이프도 몇 번씩 돌려봐야 알아요. 이게 없는 더빙은 가짜이고 개떡인 거죠. 그래서 혼자 그렇게 부득부득 우겨서 대본과 테이프를 미리 받아서 보고 또 봤죠. 남들은 ‘성우니까 목을 많이 쓰겠다, 목이 잘 상하지 않느냐’고 묻는데 난 오히려 눈이 나빠요. 새벽까지 영화를 보고 또 보니까 눈이 안 좋아진 거죠. 그래서 내가 나중엔 백내장도 앓고 녹내장도 앓고 그랬죠.”
―영화 ‘아마데우스’도 그렇게 연기했던 건가요.
“명보극장에서만 세 번을 봤어요. 보는 순간부터 전율이 느껴져서 ‘저건 무조건 내가 한다!’ 이랬죠. 나중에 몇 년 있다가 더빙 제안이 들어왔는데, 웃음소리는 빼고 대사만 녹음을 하라는 겁니다. 주연배우 톰 헐스처럼 독특하게 웃긴 힘들 거라고요. ‘그럼 안 한다. 그건 가짜야’ 했죠. 나중에 ‘톰 헐스보다 더 리얼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혼자 속으로 그랬어요. ‘그럼, 내가 연습을 대체 얼마나 많이 했는데!’(웃음)”
배한성은 성우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1972년에 첫번째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두 딸을 낳았다. 큰딸은 현재 프랑스 패션회사에서일하고 있고, 둘째 딸은 프랑스에서 작가 겸 자유기고가로 활동한다. 그 아내가 교통사고로 1987년에 세상을 떠났고 1990년 배한성은 지금의 아내와 재혼해 아들을 낳았다. 그 막내아들은 지금 군대에 있다.
―월북한 아버지, 집안을 돌보지 않았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장으로서 더 잘하고 싶었습니까.
“그랬죠. 그렇지만 그렇게 잘 못했어요. 내겐 롤모델이 없었으니까요. 남편이 될 공부, 아빠가 될 공부를 제대로 못 해본 거죠. 돌아보면 후회가 많아요. 어릴 때부터 ‘쌀 한 봉지’를 위해서 달릴 줄은 알았는데 정작 행복을 위해 쉬어가는 법은 잘 몰랐죠.”
그의 자녀들은 “항상 자랑스러운 아버지였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예술적인 기질과 감성이 자녀들 인생에 큰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공부를 많이 하진 않았지만, 학력도 형편없는 아빠였지만, 적어도 문화적 결핍을 느끼면서 자라진 않게 하려고 애를 쓰긴 했어요. 영화 많이 보고, 음악 많이 듣고, 그림 많이 보고, 고미술품 모으고, 아이들 데리고 인사동도 자주 갔고요. 내 안의 불안과 초조함을 채워준 건 언제나 그런 것이었으니까요. 이런 것들만 있으면 가난해도 행복했으니까요.”
―아직도 어머니가 원망스럽습니까.
배한성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어머니가 물려준 결핍 덕에 지금까지 내가 달려왔으니 이젠 괜찮아요. 어머니는 돈 벌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흥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당신이 여고 시절에 봤다는 영화 이야기를 실감 나게 밤마다 들려주고, 가끔 귀신 영화 얘기를 할 때면 흥이 나서 소복을 입고 식칼까지 입에 물고 연기를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물려받은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알죠. 내 감성과 끼를 물려주신 건 그래도 어머니라는 걸.”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할 것 같은가요.
배한성의 눈이 붉어졌다. “어릴 땐 공산당이나 괴뢰군 이야기를 읽을 때면 ‘우 리 아버지는 대체 왜 그런 나라로 갔을까’ 하고 생각했죠. 북한이 판 땅굴사건이 터졌을 땐 ‘아버지라는 사람이 땅굴이라도 파서 우리를 보러 와야 하는 것 아닌가’ 했었고요.” 배한성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아버지를 만난다면 이렇게 얘기하고 싶어요. ‘아버지, 이젠 편히 쉬세요. 그동안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셨어요. 이제 전 괜찮아요.”
-조선일보, 20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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