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적자 내는 건 죄에요, 죄"
가구 회사 퍼시스의 회장실은 7층 한구석에 있다. '한구석'이란 표현이 과장은 아닌 것이, 자유로운 복장의 평사원들이 가득한 사무실 한쪽, 다른 회사 같으면 상무실이 있을 법한 곳에 회장실이 있었다. 지난 20일 서울 오금동 퍼시스 본사에서 만난 손동창(68)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저 친구들 내가 출근할 때 쳐다보지도 않아요."
정작 이 회사에서 가장 좋은 공간은 4층이었다. 4층 전체의 4분의 3가량을 테라스로 만들고 나머지 공간 역시 주방과 휴게실로 채운 휴식 공간이었다. 이 회사 오너의 경영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공간 배치였다.
손 회장은 지난 3월 정부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명문 경복중학교를 나와 일반고에 가지 않고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에 진학, 가구 일을 배우다가 35세이던 1983년 퍼시스를 창업한 그는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좋은 기업을 만들어보고 싶었고 그런 기업을 만들려다 보니 돈이 따라왔다"고 말했다. 퍼시스는 은행 빚이 단 한 푼도 없는 회사, 어음을 발행하지 않는 회사로 유명하다.
직원과 임원이 수평관계,
잃는 것도 있지만
얻는 것도 있어
직원 사무실 한쪽에 회장실
―회장님이 옆에 있으면 직원들이 불편해하지 않습니까.
"직원들이나 나나 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인데 대등한 입장이죠. 우리 회사에는 회장이라고 뭐 특별하고 그런 마인드가 전혀 없습니다. 잃는 게 있다면 얻는 것도 있겠죠. 자주 얼굴 보다 보면 대화할 기회도 많고 그만큼 배울 기회도 있을 테니까요. 우리 직원들 입사 면접을 굉장히 엄격하게 해서, 다들 아주 착합니다."
―면접을 어떻게 합니까.
"정기 채용 때 6000~8000명 정도 원서를 내는데 늘 '30명쯤 뽑자'고 해놓고 면접해보면 열댓 명 정도밖에 못 뽑아요. 최종 면접에 나 포함 네 명이 들어가는데 네 명 모두 '똥글뱅이(동그라미)'를 쳐야 합격합니다. 간혹 한 명이 삼각형 줘도 뽑히긴 하지만 엑스표가 하나라도 있으면 떨어집니다. 그러다 보니까 몇천 명에서 서른 명 뽑기가 쉽지 않습니다."
―면접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인성을 집중적으로 봅니다. 젊었을 때부터 면접을 많이 봐서 대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즘은 나이 들면서 다들 비슷비슷하게 보이는 걸 보니까 이제 면접관도 은퇴할 때가 된 것 같긴 하지만요. 하하하." 퍼시스는 최종 면접에 올라온 응시자들에게 고교생활기록부를 제출하게 해서 꼼꼼하게 보는 회사다.
―어떻게 해야 퍼시스 최종 면접을 통과할 수 있습니까.
"이력서에 있는 가족 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묻는데 이때 저는 인성을 집중적으로 봅니다. 가족 관계에 이른바 스펙이 좋으면 별로 묻지 않습니다. 스펙이 별로 안 좋으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묻는데, 부모 형제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보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 직업이 세상 잣대로 별로 좋지 않다고 해도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시켜줬으면 자랑스러워 해야 하는데, 대개는 잘 대답 못하고 감추려고 합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떠한 결과를 얻더라도
기본적으로 겸손해야
1948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손 회장은 한 살 때 부친이 작고한 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6·25전쟁 후 서울 돈암동에 삶터를 꾸린 그의 모친은 삯바느질로 생활비를 벌어 삼형제를 키웠다. 둘째 형을 병환으로 일찍 여읜 막내아들 손 회장은 일곱 살 위 큰형으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웠다. 광복 후 혼란기에 태어나 전쟁이 끝난 잿더미 위 편모슬하에서 자란 그는 "충남 천안공원묘지에 계신 어머니께 지금도 큰 변화나 고민이 있을 때마다 찾아가서 보고 드리고 또 기도도 올리곤 한다"고 말했다. 그 자신 스펙이라곤 없는 어린 시절을 겪고 자라났으나, 그 가족과 형제들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한 것처럼 보였다.
손 회장의 아들 손태희(36) 퍼시스 경영기획실장은 서울대 재료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MIT에서 물류공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 다니다가 2010년 퍼시스에 입사한 그는 아버지와 언쟁을 벌였던 일화를 들려줬다. "언젠가 아버지와 대화를 하다가 언쟁이 됐는데 제가 '그래도 저는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도 가지 않았습니까?'했다가 크게 혼났습니다. 아버지께서 '서울대 간 게 네가 잘나서 간 줄 아느냐. 네가 서울대 갈 만큼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됐으니까 간 것이다. 부모는 물론이고 이 사회가, 네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았다면 네가 서울대에 갔겠느냐'고 야단치셨지요."
―무서운 아버지이시군요.
"기본적으로 겸손해야 한다는 뜻이지만, 내 주변에서 나를 도와주는 것들에 늘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죠. 저 혼자 잘나서 되는 일이라는 건 없습니다. 저는 가정교육으로 인성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습니다." 인터뷰 전에 따로 만난 손태희 실장은 "아버지는 무서운 분이고 재미없는 분인 것이 사실"이라면서 "그러나 나이 먹을수록 그런 아버지를 더욱 깊게 존경하게 된다"고 말했다.
명문 중학교를 나왔지만
공업디자인 분야를 선택해
자존심 때문에 택한 전문대
―1976년 한샘에 입사했으니 올해 가구 인생 40주년이군요.
"그전에 이미 가구를 시작했습니다.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가 당시 5년제였는데 5학년 때 서울 신촌에 있는 가구 공장에 6개월간 실습생으로 나갔습니다. 졸업 후에도 6개월쯤 더 다녔는데 그때 이미 일 잘한다고 '공장장 직무대리'를 시켜줬지요. 허허."
―경복중을 나와 왜 전문학교를 갔습니까.
"저희 형님들 모두 경복고를 다니셨는데 저는 첫해 시험에서 경복고에 떨어졌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프라이드가 아주 강해서 '재수해서 후배들과 경복고에 다닐 순 없다'며 다른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때 경기공전은 꽤 인기 있는 국책학교였습니다."
―거기서 전공을 공예로 택한 겁니까.
"요즘 말로 공업디자인입니다. 저희 큰 형님이 당시 금성사(LG전자의 전신)에 다녔는데 그때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막 나올 때였어요. 앞으로 이쪽 분야가 유망할 것이라고 해서 기계·건축·토목·공예 중에서 공예를 택했지요. 제가 또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좋아서 초등학교 때 이미 어머니가 재봉틀 고장 났다고 하면 재봉틀을 뜯어서 고치고 다시 조립하고 할 정도였어요." 경기공전은 이후 2년제 전문대로 바뀌었다가 서울산업대를 거쳐 현재 서울과학기술대가 됐다. 손 회장은 군을 제대한 뒤 전자부품 사업을 시작한 맏형 일을 돕다가 28세에 한샘에 입사했다.
―한샘에서 오래 일하지는 않았죠.
"1년 6개월 있었습니다. 그전에 가구 공장에서 일을 했고 또 형님 공장 세팅을 제가 다 했기 때문에 경력 직원으로 면접을 봤습니다. 그런데 애초 생산과 주임으로 뽑으려고 하다가 면접이 끝나니까 생산과장을 맡아달라고 하더군요. 1년 반 뒤에 나올 때는 이사였습니다."
―한샘을 나올 때 조창걸 한샘 회장과 '한샘은 주방 가구, 퍼시스는 사무 가구를 만들어 서로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했다던데요.
"그런 약속은 없었습니다. 그때 한샘에서 주방 가구 스테인리스 부품을 납품해달라고 해서 한동안 '한샘공업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스테인리스 일을 했고 또 퍼시스 창업할 때 사명을 '한샘 퍼시스'라고 지었더니 생긴 오해예요. 한샘 영업사원들이 밖에 나가서 '퍼시스는 한샘 계열사'라고 하기도 했죠." 퍼시스는 1995년 사명에서 '한샘'을 떼어냈다.
가구 대신 환경을 팔겠다
―퍼시스는 직접 지은 이름입니까.
"퍼니처(furniture)와 시스템(system)을 합친 뒤 줄인 말입니다. 창업하던 시절부터 우리는 '사무 가구가 아니라 사무 환경을 팔겠다'고 했었거든요. 하나의 시스템을 만들고 판다는 뜻입니다."
―보통 직장인이 1년 6개월 만에 이사 승진을 했다면 그 회사에 남아 있을 텐데요.
"어렸을 때부터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고 사람 모인 곳에서 제 뜻대로만 할 수도 없었지요. 하여튼 그때 직장 생활은 제가 하려던 것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하고 싶은 게 무엇이었습니까.
"대개 돈 벌려고 기업을 한다고 생각하잖습니까. 운동선수나 예술가들은 돈 벌려고 하지는 않죠. 그게 좋아서 열심히 하다 보니까 잘할 수 있게 돼서 돈을 버는 겁니다. 기업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아니라 어떤 기업을 만들고 싶어서 기업을 할 수도 있어요. 저는 돈 좇아서 기업 하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만들고 싶은 기업을 만들려고 하다 보니까 돈이 따라왔습니다."
노사문제가 없는 회사,
만들고 싶어
정상보단 1류가 되고 싶어
―그것을 '기업가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젊었을 때 읽은 스위스 철학자 칼 힐티 책에서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라는 문장이 뇌리에 콱 박혔어요. 그 이후 '내가 기업인이 돼서 노사문제 없는 회사를 만들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창업 후 내가 직원들에게 '좋은 기업을 만드는 것이 내 비전'이라고 말하니까 '좋은 기업'이 무슨 비전이냐고 웃더군요. 저는 1등이란 말을 절대 쓰지 않습니다. '정상(頂上)'이란 말도 쓰지 않습니다. 대신 일류가 되자고 합니다."
―그건 한샘이 국내 가구 업계 1위이기 때문입니까.
"저희가 사무 가구 회사로는 압도적인 1등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1등 해봐야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일류가 뭐냐, 학교에서 1등 하는 놈도 일류지만, 3등, 5등 하는 놈도 일류란 말이지요. 그 그룹에만 있으면 되는 겁니다. 세계 일류 기업이 되는 것이, 일류 그룹에 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퍼시스는 가구를 직접 제조하는 회사로는 국내 1위다. 손 회장은 중국을 비롯한 하도급 업체에서 제작한 가구를 국내 유통하는 다른 기업들과 달리 직접 모든 가구를 제조하는 가구 회사라는 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실제 가구 회사 중 퍼시스는 '제조업'으로 분류돼 있으나 다른 회사들은 '유통업'이나 '도매업'으로 분류돼 있는 경우가 많다.
퍼시스에는 노조가 없다. 2007년부터 노사문화 우수기업으로 네 차례 국무총리 또는 노동부 장관상을 받았다. 손 회장은 1993년 창립 10주년 때 10년 근속 사원들과 우수 대리점주에게 당시 '국민차'였던 티코를 한 대씩 선물해줬다. 당시 티코 가격은 한 대당 270만원이었다. "몇 년 주다 보니까 더 이상 티코를 좋아하지 않기에 현금 300만원을 대신 선물하는 것으로 바꿨다"고 손 회장은 말했다.
95년 부채상환 後
회사에서 은행대출은 없어
100년 이상 가려는 회사엔
규모 확장은 우선순위 아냐
―은행 돈은 왜 안 씁니까.
"초창기에야 썼지요. 은행 지점장 만나려고 1시간씩 기다리고…. 할 일이 태산인데 사장이 은행에서 아쉬운 소리 하고, 그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빚을 점점 줄이다 보니 1995년인가 빚이 '0원'이 됐습니다. 그 이후로는 우리 회사에 대출금이라고는 10원도 없습니다. 은행하고 친해져봐야 좋을 것 없습니다. 옛날 노래 식으로 '돈 없으면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하는 식인 거죠. 하하하."
―경영학 이론과는 다른 말씀입니다만.
"대출 이자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게 경영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건 돈 없는 사람들 이야기이고 내 회사에 돈이 있는데 왜 빌리겠어요. 나도 큰 회사 M&A하려면 돈 빌려야겠지요. 그걸 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걸 하지 않는 이유가….
"아까 '좋은 기업' 이야기를 했는데, 기업이란 게 종업원들의 직장 아닙니까. 이게 없어지거나 적자가 나면 안 됩니다. 기업이 적자 내는 것은 사회에 큰 죄악을 범하는 거예요. 기업이 100년, 200년 가려면 탄탄하게 토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서울에 우성아파트·장미아파트·한신아파트 많잖아요. 그 회사들 80년대에 돈 엄청나게 벌었죠. 그런데 다 망해서 없어졌습니다. 끊임없이 확장정책 하다가 그렇게 됐죠. 100년 이상 가려는 회사에 규모를 키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퍼시스는 1997년 IMF 외환 위기 때조차 빚이 한 푼도 없었다. 오히려 외국에서 달러로 받은 대금을 환율 피크 때 팔아 40억원가량의 시세차익을 냈다. 당시 내수가 크게 줄어 수익이 30억원으로 줄었으나 이 달러 차익 덕분에 총 수익은 70억원을 기록했다.
남다른 경제관
할부는 절대 안써
저축의 중요성 강조
IMF 때도 빚 한 푼 없던 회사
―요즘 세대들은 은행 빚 내서 집을 장만하잖습니까.
"나는 못마땅합니다. 늘 직원들에게 저축하라고 합니다. 공장 직원들에게도 '봉급 전부 아이들 학비에 쏟아부으면 정년퇴직 후에 어딜 가느냐. 정부에서 주는 것 먹고 살 거냐. 아이가 공부 잘하면 모르지만 아니면 빨리 기술 배워서 전문직으로 보내라'고 합니다. 저는 그런 얘기할 때 떳떳합니다. 내가 전문학교 출신이니까요. 내가 학력 짧아서 사업 못 하는 것도 아니고 또 내가 잘하면 경기공전이 유명해지는 것이죠. 나는 신용카드도 뒤늦게 썼습니다. 카드라는 게 다 25일짜리 빚입니다. 우리 집에는 할부라는 게 없습니다. 우리 집사람 딱 한 번 백화점에서 할부로 뭐 샀다가 난리 났습니다."
―환불하라고 했나요.
"아니죠. '당장 가서 카드 취소하고 현금으로 사라'고 했지요. 내가 늘 하는 말이 '제일 돈 아끼는 방법은 사지 않는 것'이라는 겁니다. 싸게 사려고 인터넷 뒤지지 말고 정말 싸게 사고 싶으면 사지 말라는 거죠. 그거 없다고 뭐 죽습니까. 하하하. 자기 분수에 맞게 살아야죠." 그는 휴일이면 아내 장미자(61)씨와 함께 서울 근교 산에 자주 가는데, 산 밑에서 헤어져 각자 속도대로 산에 오른 뒤 다시 산 밑에서 만나 집에 돌아온다고 했다. 그는 "산에 오를 때 정신을 집중할 수 있어 회사 전략을 산에 오르면서 구상하곤 했다"고 말했다. 아들 손씨가 어머니에게 "같이 가서 혼자 산에 오르는 아버지가 서운하지 않으냐"고 묻자 장씨는 "아버지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방해할 수 없지 않으냐"고 대답했다고 한다.
손 회장 집무실의 모든 가구는 퍼시스 제품이었는데 큰 책상 하나와 높낮이가 조절되는 작은 책상, 긴 회의 테이블이 전부였다. 높낮이 책상에는 컴퓨터와 전화기, 작은 탁상시계가 놓여 있었다. 회의 테이블은 폭이 110㎝로 좁은 편이었다. 책상 밑에는 낡은 슬리퍼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오래된 가전제품을 사용하는 이유
"아직 쓸만해서"
―저 슬리퍼 꽤 오래된 것 같습니다.
"저것 1980년대 초에 성수동 시장에서 산 겁니다. 저런 슬리퍼도 30년 이상 신을 수 있습니다." 슬리퍼 한짝 바닥이 갈라져 있었으나 실내 전용이라 물 샐 일은 없어 보였다. 옆에 있던 이종태 퍼시스 사장이 "회장님 골프 퍼터도 20년 전 것을 아직도 쓰신다"고 말하니, 손 회장은 "20년 됐지만 성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손 회장은 중학생 시절 서울 국립의료원에 갔다가 그곳 북유럽 가구를 보고 가구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국립의료원은 북유럽 국가들의 원조 물자로 채운 곳이어서 멋진 디자인의 의자와 책상들이 많았다. 그것이 1960년대 초였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12년 퍼시스는 미국 가구 회사에 디자인을 수출하고 13년간 최소 650만달러를 받는 로열티 계약을 맺었다. 최근에는 이탈리아 가구 회사와도 디자인 수출 계약이 마무리 단계다.
"누가 날 뽑아주진 않았지만 저 스스로 국가대표라고 생각합니다. 내 개인적인 자존심도 있고 회사의 자존심도 있고 국가의 자존심도 있지요. 우리 회사를 반드시 세계 일류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대표선수 정신'이 있습니다. 내 세대에 되지 않으면 내 다음 세대에라도 꼭 글로벌 리딩 컴퍼니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바느질로 한복 만들 자신 있다"
―어머니는 무엇을 가르쳐 주셨습니까.
"사회가 주는 것을 받아먹기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프라이드가 된 것 같아요.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도와서 바느질 일을 했습니다. 지금도 한복 치마저고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예쁘게 만들기는 힘들겠지만요. 그렇게 자립심을 심어주신 분이 저희 어머니셨습니다."
―자수성가형 부자들은 오래된 가전제품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던데요.
"우리 집에 30년 넘은 금성사 선풍기가 있습니다. 아직 잘 돌아갑니다. 집 서재에 있는 의자는 30년 전에 우리 회사에서 만든 것을 아들한테 물려줬다가 아들이 결혼하면서 두고 간 걸 아직도 쓰고 있지요. 저는 사치나 허영이나 권위적인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아드님은 자립심이 떨어지지 않을까요.
"요즘 말로 금수저인데, 제가 회사에 들어오겠다는 것을 여러 번 말렸습니다. 기업 한다는 것이 영광의 길이 아니라 정말 힘든 길이다, 아버지가 석축 1m 쌓아놓은 위에 1m 더 쌓으려면 얼마나 힘들 줄 아느냐고요. 그래도 꼭 해보겠다고 해서 받아줬습니다."
가급적 작은 회사에서
많이 배워 창업해야,
큰 회사에선 부분만 배워
―일을 시켜보니 어떻습니까. 최종 면접에서 동그라미 받겠습니까.
"나는 삼각형 치겠습니다. 나머지 세 사람이야 동그라미 치겠지요. 하하하."
―일자리 없다고 아우성인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가급적이면 중소기업으로 가고 가급적이면 남들 안 하는 일을 하라는 겁니다. 그게 창업하기 좋습니다. 큰 회사 가면 작은 부분밖에 못 배웁니다. 작은 회사 가면 그 업(業) 전체를 이해하게 되니 창업할 수 있습니다. 다들 조금이라도 더 좋은 회사 가려고 하는데, 저는 조금이라도 더 낮춘 뒤 골라서 가라고 하고 싶습니다. 작은 회사를 키워서 임원이 되고 사장도 되면 좋지, 봉급 조금 더 준다고 왜 그렇게 큰 회사만 가려는지 모르겠어요."
―큰 회사가 안정적이지 않습니까.
"중매하는 분들이 하는 말 중에 '그 청년 직장도 튼튼하고…'하는 말이 있는데 그 말에 절대로 속으면 안 됩니다. 세상에 튼튼한 직장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만든 회사라면 모를까, 남 밑에 있는데 내가 일을 잘하면 튼튼한 것이고 못하면 언제든 쫓겨나는 거죠. 학교 선생님 튼튼한 직장이라고 다들 몰리는데 직장 튼튼하다고 다들 선생이 되면 교육은 뭐가 됩니까. 애들 가르치는 게 우선 보람 있고 월급도 주니까 먹고산다, 이런 정신으로 해야죠." 그가 말하는 "내가 원했던 기업을 만들다 보니 돈이 따라왔다"는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조선일보, 2016/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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