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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치 가장 잘 잡던 선장'… 김재철 동원그룹·한국투자금융지주 창업자

하마사 2016. 3. 8. 11:05

"참치 한 마리 더 잡는 게 愛國… 그때 우리는 달러 버는 '산업전사'" 

"요즘 젊은이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게 '우리는 네 나이 때 어떻게 했다'는 것이라는데…. 이 지루한 걸 누가 읽겠습니까."

김재철(82) 동원그룹·한국투자금융지주 창업자를 만난 것은 '김재철 평전(評傳)'이 출간됐기 때문이다. '다른 창업자들이 육지를 기반으로 제조·건설·유통업을 일으켰다면 그는 망망대해에서 시작했다'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신입사원들이 들어오면 모아놓고 내가 이런 말은 합니다. '뭘 하든 최고가 되겠다는 걸 하나 가져라. 그러면 푸대접을 안 받는다. 당신 회장은 무얼 가장 잘하는지 아느냐? 참치를 가장 잘 잡았다. 그걸로 창업할 수 있었다'라고요."

 

김재철 회장은 배우 강동원의 별명이 '강참치'라는 걸 아느냐는 질문에 "누구? 못들어봤다"고 답변했다.

/이태경 기자

 

일년 동안 無給에 고생돼도
원망 안 하고 죽어도 상관없다…
각서 쓰고 원양어선 타

김재철 창업자

그는 27세에 남태평양에 나가 참치를 잡는 원양어선 선장이 됐다.

"신입사원들을 보면 '저 나이에 나는 선원들을 이끌고 태평양으로 나갔는데'라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지요. 그 시대는 지금과 다르기도 하고. 정규 대학을 나온 내가 원양어선에 '무급(無給)'이라도 타겠다며 기어코 탄 것도 요즘 사고로는 이해가 안 될 거니까요."

그는 전남 강진의 농사짓는 집안 출신이었다. 11남매의 장남으로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했다. 그가 다닌 부산수산대 졸업생들은 실업고나 어업조합에서 밥벌이를 찾던 시절이었다. 졸업을 앞뒀을 때 그는 남태평양 사모아로 처음 출항하는 참치잡이 어선 '지남호'가 선원 18명을 모집한다는 신문 기사를 봤다.

"그때는 우리나라 연·근해에는 어족 자원의 씨가 말라 있었어요. 먹고사느냐의 문제였어요. 수산대 출신으로 원양어선을 타겠다는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지요. 하지만 조업 경험이 없다고 퇴짜를 맞았어요. 본사에서 내려온 임원의 여관방까지 찾아가 간청했어요. 그래서 '일년 동안 무급(無給)이고, 고생돼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며, 죽어도 상관없다'는 각서를 쓰고 뽑혔어요."

―무급이라면 요즘 인턴의 '열정 페이'보다 더 열악한 계약 조건이군요.

"내가 먼저 '무급' 제안을 했어요. 배에서 내가 먹을 식량도 가져오겠다고 했지요. 물론 밥은 먹여줬지만요. 당시 정원 18명에서 추가로 나를 받아준 겁니다. 그래서 내게 할당된 예산과 보급품이 없었어요. 장화와 우의는 다른 선원들이 신고 입던 것을 물려받았지요. 무엇보다 배 안에서 내 몫의 침대가 없었어요. 나만 접이식 군용 야전 침대에서 잤어요. 파도가 치면 침대와 함께 굴러 터지고 깨졌어요. 그게 가장 서러웠어요."

 

 

 

1960년대 원양어선 타던 시절의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위쪽), 1963년 동화 1호 선장을 맡은 김재철(앞줄 왼쪽에서 넷째) 동원그룹 회장이 남태평양 사모아 어장으로 출어하기 전 선원들과 촬영한 기념사진. /동원그룹 제공

 

―배에서는 어떤 역할을 맡았습니까?

"'갑종(甲種)항해사' 자격증을 갖고 있으니 내 역할이 컸지요. 지금은 GPS가 있지만, 그때는 수평선과 별의 각도로 항로를 결정하는 '천문 항해'를 했어요. 영어 해도(海圖)를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선장과 나뿐이었어요."

―그런데도 끝까지 무급이었습니까?

"그랬지요. 항구에 들어가면 선장이 안 돼 보였는지 5달러나 10달러씩 용돈을 줬어요. 지금 세상에는 믿기지 않는 얘기지요."

1958년 1월 지남호는 출항했다. 미국 수산시험장의 연구용으로 쓰던 230t 크기의 선박이었다. 일본 시모노세키항에 정박해 쌀 40가마, 8개월간 부식, 기름 등을 실었다. 남태평양 어장까지 가는 데만 한 달이 걸렸다.

―그것이 국내 최초 태평양 참치 조업이었던 것이지요?

"그때까지 우리 해군도 적도(赤道)를 넘은 적이 없었어요(해군은 1961년에 적도 통과). 역사적인 사건이었던 만큼 취재 기자도 한 명 승선했습니다. 선원들은 유서(遺書)를 쓰고 조국의 땅 냄새를 맡겠다며 흙 봉지를 갖고 탔어요. 개척자의 자부심이 넘쳤어요. 태평양으로 가는 선상에서 '참치'라는 이름도 지었어요. 본래 '다랑어'이지만 부르기가 안 좋아 바꾼 거지요. 우리 생선은 '치'로 끝나니 '참으로 좋은 치, 참치'로 하자고 했어요. 당시 신문에서 '참치'로 쓰면서 표준어처럼 됐어요."

―당시 신문 제목에는 '바다의 닭고기 참치잡이'로 보도됐더군요. 참치와 닭고기가 관계가 있는 겁니까?

"날개다랑어인 '알바코'의 흰색 살코기가 서양인들이 좋아하는 닭 맛이 났어요. 미국 참치캔의 상표가 '바다의 닭고기(Chicken of the Sea)'였지요. 그 시절엔 참치를 잡으면 통조림 회사에 넘겼어요. 일식집 횟감으로 최고로 치는 참다랑어(혼마구로)는 통조림을 하면 살코기가 시커멓다고 해서 당시에는 다 버렸어요."

―원양조업을 한 번 나가면 1년이나 걸렸다고 들었습니다.

"그 뒤로 1년 6개월, 3년까지 연장했어요. 기름값을 아껴야 했으니까요. 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연간 국민소득이 60달러였을 때 말단 선원의 월급이 100달러니 부산 남포동에는 원양어선을 타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어요. 그때는 원양어업이 외화 획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어요. 참치를 한 마리라도 더 잡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고, 우리는 달러를 버는 산업전사(戰士)라는 자긍심이 있었지요."

그는 '무급'의 조업에서 돌아온 뒤 일급항해사로 승진해 다시 출항했다. 1961년에는 27세의 나이로 원양어선의 선장이 됐다.

"당시 갑판장이 아버지 나이와 같았어요. 젊은 나를 선장에 앉힌 것은 회사로서는 모험이었지요. 하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겠지요. 나는 대학을 나온 데다 태평양까지 배를 몰고 간 경험이 있었으니까요."

 

최보식 선임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는 김재철 동원그룹 창업자. /이태경 기자

 

폭풍 만나 죽었을 수도…
살아있기에 '엑스트라 인생',
죽는 것보다 힘든 일 없으니
위기 때마다 정면 돌파

김재철 창업자

 

 ―요즘에는 27세 선장은 불가능할 겁니다.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기회를 안 주는 것일까요, 젊은이들이 그만한 실력을 안 갖춘 것일까요?

"젊은 날 내 수첩에는 '인생에 짊어진 짐은 무거울수록 좋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말이 적혀 있었어요. 젊은이들은 찾아서라도 도전하고 시련을 겪어야 합니다. 나는 이를 '토기·도기·자기'로 비유합니다. 토기는 불에 안 들어간 것이고, 도기는 1000도 미만, 자기는 1000~1200도에서 구워진 겁니다."

선장으로서의 첫 조업에서 참치 550t, 13만달러어치를 잡았다. 그때부터 그는 '참치를 가장 잘 잡는 선장'으로 소문났다. 동원산업을 창업하기 전까지 8년간 그는 이렇게 마도로스 생활을 했다.

―바닷속 생선을 많이 잡고 적게 잡는 것은 상당 부분 운(運)에 달린 게 아닙니까?

"운이 없을 수 없겠지만 몇 년간 계속 잘 잡는 것은 실력이지요. 당시 1400~ 2500개의 낚시를 매단 주낙을 던져 잡았지요. 주낙의 어디에 위치한 낚시에 참치가 물리는지, 잡힌 참치의 배를 갈라 무엇을 먹고 있는지, 수온이 어떤지를 일일이 기록했어요. 물고기는 색맹이지만 낚싯줄 굵기에는 민감해요. 다른 어선과 경쟁할 때는 가는 낚싯줄을 사용했지요."

―낚싯줄 굵기까지…, 치밀하군요?

"5년 전에 참치를 잘 잡았다고 그 방식으로 지금 잘 잡지는 못해요. 수백만 개 낚시가 드리워 있는데 참치도 제 살길을 찾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연구를 계속 해야 합니다. 어군탐지기나 첨단장비만으로 해결되지 않아요. 똑같은 대형 선망선을 타고 나가 1만t을 잡는 선장이 있고, 3000t밖에 못 잡는 선장이 있어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바다에서 배웠다고 했더군요.

"아무리 큰 배도 망망대해에서는 일엽편주일 뿐이지요. 그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지요. 우주를 지배하는 어떤 절대적 힘이 존재하는 걸 실감하게 되지요."

 

 

 1964년 서른 살의 캡틴 김재철.

 

―치열하게 추구해야 하지만 불시에 마감될 수 있는 것이 인생(人生)이고, 배에서 죽었을 수도 있었지만 살아남았기에 '엑스트라 인생'이라고 했더군요.

"폭풍을 만나 몇 번 사선(死線)을 넘었어요. 남은 인생을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됐지요. 기업 하면서 위기 때마다 '죽는 것보다 힘든 일은 없다'는 마음으로 정면 돌파했어요."

―정직(正直)을 제일 중요한 덕목으로 여긴다고 했더군요. 이는 도덕군자가 할 소리지, 사업가가 이런 말을 하기에는?

"일본에서 중고 어선을 들여와 창업할 때도(1969년) 그동안 거래해오던 일본 측에서 나에 대한 신뢰만으로 밀어줬어요. 사업 위기 때마다 외국의 거래업체에서 먼저 도와줬어요. 자화자찬 같지만, 한국 정부나 은행이 발행하는 어음보다도 캡틴 김의 말이 더 신용 있다고들 했어요. 내가 100% 정직하게 살아왔다고는 할 수 없어도, 어떤 나쁜 의도를 갖고 거짓말한 적은 없었어요."

―젊은 날 선상에서 쓴 '남태평양에서' '바다의 보고(寶庫)' '거센 파도를 헤치고' 등은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지요?

"기록하는 걸 좋아했으니까요. 태평양을 오가는 배 안에서 책을 많이 읽었어요. 당시 국내에서는 금서(禁書)였던 모택동·레닌·마르크스 등을 일본 서점에서 구입해 읽었으니까요."

―여든이 넘었지만, 요즘도 손에서 책을 안 놓는다고 들었습니다.

"일주일에 한두 권은 봅니다. 내가 책을 안 읽으면서 자식과 임직원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면 안 되니까요. 임원들에게는 한 달에 추천도서 한 권을 읽고 독후감을 쓰도록 합니다. 자식 교육도 그렇게 시켰고요."

―기업이 교육기관은 아니지 않습니까?

"기업이란 환경 적응을 잘해야 살아남습니다. 돌아가는 세상과 현실을 기업 구성원들이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나는 임직원들에게 꼭 신문을 보라고 합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마다 세미나도 하지요. 기업가로서 나는 인재를 키울 책임도 있습니다."

그의 사업 약력(略歷)을 소개하면, 1982년 원양어선 한 척 값(80억원대)으로 한신증권을 인수했다. 참치를 많이 잡았을 때 선원들에게 배당을 더 나눠줬던 것처럼 금융권 최초로 성과급과 스톡옵션제를 도입했다. 그 뒤 이는 '한국투자금융지주'가 됐다. 다른 한편으로 1982년에는 통조림제조업에도 뛰어들어 간판 상표인 '동원 참치캔'을 내놓았다. 지금은 동원F&B라는 식음료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여성들에게 폭발적 인기가 있는 배우 강동원의 별명이 '강참치'라는 걸 압니까?

"누굴 말합니까? 난 못 들어봤어요. 영화는 일 년에 서너 편쯤, TV는 골프 채널이나 '동물의 세계'만 보니까요. 신문 가십란도 잘 안 읽고요."

배석한 그룹 참모들이 그 파장이 어떨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뭐, 꼭 알아야 될 의무라도 있는가.

 

-조선일보, 201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