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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갭·나이키 등 글로벌 브랜드 40여곳에 의류 수출… 한세실업 김동녕 회장

하마사 2016. 3. 12. 10:42

[송혜진 기자의 느낌]
자라·갭·나이키 등 글로벌 브랜드 40여곳에 의류 수출… 한세실업 김동녕 회장
"1등 기업 보다는… 직원 월급 잘 주는 회사가 더 중요"
"공장 돌리고, 투자도 해야하고…다른 데 돈 쓸일 더 많아 아직 건물 사들일 단계 아니다"

한세실업 김동녕(71) 회장 사무실엔 그 흔한 가죽 소파가 없다. 볕이 잘 드는 그 방에는 구입한 지 20년 넘었다는 사무용 책상과 의자가 전부였다. "일하고 책 읽기엔 이게 더 낫죠." 그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의류 회사인 한세실업에는 가죽 소파 말고도 없는 게 많다. 1982년 회사를 설립한 이후로 적자(赤字)를 내본 적이 없고 그런데도 국내에서 사들인 건물 한 채가 없다. 지금도 여의도 두 개 건물에서 몇 개 층을 임대해 사무실로 쓴다.

이 회사는 34년 전부터 지금까지 미국의 갭·나이키·아베크롬비앤피치·아메리칸이글, 유럽의 자라와 H&M, 미국 대형 유통 회사인 월마트와 타겟, 일본 무인양품(MUJI) 같은 전 세계 글로벌 의류 브랜드 40여곳의 상품을 생산해왔다. 작년에만 3억4900만장의 옷을 외국에 수출했다. "미국인 3명 중 1명이 한세실업 옷을 입는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아직도 만들 옷이 많습니다." 7일 서울 한세실업 사무실에서 만난 김동녕 회장은 줄자를 꺼내 들었다. 매년 3억4900만장의 옷을 만들어 전 세계로 수출하는 한세실업의 지휘자인 그의 뒤로 지금껏 만들어온 옷들이 응원군처럼 주르륵 서 있었다. / 이태경 기자

2003년엔 온라인 서점 '예스24'를 인수했고, 한세실업과 예스24를 주축으로 하는 한세예스24홀딩스라는 지주회사를 세웠다. 한세예스24홀딩스의 매출은 지난달 2조866억원을 기록했다.

인터뷰 사진을 찍기 위해 이웃 건물 회의실로 함께 걸어가는 길에 "왜 건물을 사지 않느냐"고 물었다. 김 회장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다른 데 돈 쓸 일이 더 많으니까요."

사옥 없는 알짜 회사

―다른 데라니요.

"많죠. 공장도 돌려야 하고, 직원들 월급도 잘 줘야 하고, 하도급 업체에도 돈 줘야 하고, 원자재도 사야 하고, 시설 투자도 해야 하고…. 언젠가는 살 수도 있겠지만 아직 건물을 사들일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직은 임대로도 지낼 만하고요."

한세실업은 김동녕 회장의 두 번째 회사다. 1972년 외국에 각종 물품을 수출하는 한세통상을 시작했지만 7년 만에 오일 쇼크를 맞으면서 부도가 났다. 그 후 3년 동안 빚을 갚고 난 뒤 지금의 한세실업을 시작했다.

―부도는 어떻게 났습니까.

"경험 부족이죠. 대학(서울대 경제학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스쿨에서 MBA 취득해서 돌아오니 다들 교수를 하라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전 수출을 해보고 싶었어요. 1970년대만 해도 나라 전체가 수출을 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시절이었죠. 당시 남대문 상공회의소 3층짜리 건물 꼭대기 전광판엔 매일 같이 '어제까지의 수출 실적'이 적혀 있었으니까요. 우리나라가 수입보다 수출이 많아진 게 1989년도예요. 1948년 건국 이후로 40년 동안 달러 기근이었던 거죠. 나라에 달러가 있어야 식량도 사고 석유도 살 것 아닙니까. 처음엔 별의별 것을 외국에 내다 팔았어요. 인조 섬유로 짠 부활절 바구니도 팔고 놀이공원에 놓는 동물 모형 옷가지도 만들어 팔았고요. 미국 쇼핑몰 시어스(Sears)나 K마트에도 옷을 납품했죠. 그러다 1978년 2차 오일 쇼크가 터졌어요. 원·달러 환율이 36.5%나 올랐죠. 납품 기일에 그래도 맞춰보려고 애쓰다가 부도가 났어요. 당시 은행 대출받아서 공장을 늘렸는데 그 빚도 컸고요."

김 회장은 그 후 3년 동안 흩어진 납품 업체에 빚을 갚고 자산을 경매 처분하고 은행 빚을 갚는 데 골몰했다. 그때 그에게 큰 힘이 된 게 미국 쇼핑몰 회사 K마트였다고 했다.

―K마트가 어떻게 도움이 됐습니까.

"당시 K마트는 엄청나게 큰 거래처였거든요. 거기 수입 총괄책임자가 당시 대형 무역회사였던 대우실업에 전화를 해줬어요. 한세통상이 이번에 부도가 났는데 좀 도와달라고요. 자신들도 한세의 물건이 마침 필요하니 공장을 대신 돌려주면 좋겠다는 얘기였죠."

―그런 경우도 있나요.

"K마트와 꽤 오래 신뢰를 쌓은 덕이었던 것 같아요. 대우실업도 딴 데가 아닌 K마트이니 그 부탁을 들어줬겠죠. K마트가 우리에게 줄 신용장을 대우실업에 줬고 대우실업은 그걸 받아서 우리 대신 원·부자재를 사줬어요. 나머지 돈을 우리에게 주면 우리는 그걸로 하도급 공장을 돌려서 물건을 만들어 보냈죠. 그 덕에 쌓여 있던 원·부자재를 처분하고 하도급 공장과 납품 업체에 현금 줄 것들을 다 정리할 수 있었죠. 그래도 은행 빚은 고스란히 남았지만요. 와신상담 끝에 한세실업을 1982년에 세웠는데 은행 빚을 다 갚은 건 1985년쯤일 겁니다."

 

지난 2013년 9월 박근혜 대통령이 한세실업 베트남 공장을 방문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김 회장에게 “섬유산업은 부가가치가 낮은 사양산업으로 생각했는데 해외로 눈을 돌려 성장시켜줘 고맙다”고 말했다고 한다. / 한세실업 제공
김 회장은 이때 몇 가지 원칙을 세우게 됐다고 했다. '은행 갈 시간에 공장을 돌고 바이어를 만나자' '실력보다 한 걸음 늦게 가자' '일주일 내내 일에 매달리지 말고 주말에는 운동을 하면서 쉬자' 등이라고 했다.

―'한 걸음 늦게 가자'는 건 무슨 말입니까.

"내실부터 다지자는 거죠. 내실엔 여러 가지가 있어요. 위기 상황에도 견딜 자금이 충분한가, 직원들은 숙련돼 있는가, 조직은 안정적인가, 넓은 의미에서의 실력이 제대로 있나…. 무조건 목표점을 향해 달려가는 것보다는 차근차근 두들겨가면서 회사를 다져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 제가 아직 건물을 안 사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겁니다.(웃음)"

사람 마음부터 챙긴다

한세실업은 1986년 사이판에 공장을 지으면서 글로벌 생산을 시작했다. 그런데 첫 해외 공장을 짓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현지 주민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사이판 정부로부터 공장을 짓는 것을 허가받고 땅을 사들이고 나서도 2년 반이 지나서야 겨우 공장을 준공했다. 김 회장은 “아마 그때가 제겐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일 것”이라고 했다.

―주민들이 반대한 이유는 뭔가요.

“아무래도 자기들의 터전이 훼손될까 걱정했던 거죠. 반대가 워낙 극심해서 허가서를 내줬던 사이판 정부도 나중엔 말을 바꾸더라고요. 이미 공장 지으려고 H빔 철구조물을 다 사놓았는데 그것들을 써보지도 못하고 녹슬어버렸죠. 그러다가 우리가 하수도를 놔주겠다고 설득했더니 주민들이 비로소 찬성 쪽으로 바뀌었어요. 하수도를 어렵사리 놔주고 그제야 공장을 지을 수 있었죠. 그때 정말 많은 걸 배웠습니다. 특히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죠.”

―지금은 공장이 꽤 여러 곳에 있죠?

“베트남·인도네시아·미얀마·과테말라·니카라과에 있어요. 외국 근로자들은 보통 그 지역 주민들이 다 같이 취업하는 경우가 많아요. 엄마와 딸이 함께 또는 가족 전체가 우리 공장 식구인 곳도 있죠. 그 사람들이 누군지, 결혼은 언제 하는지, 자식은 몇 명인지 다 알아야 공장이 제대로 돌아갑니다. 요즘엔 한 달에 한 번 정도 가지만, 한창땐 1년이면 스무 번 넘게 출장을 가서 연 200일 정도는 해외 공장에서 살았죠. 가끔은 일감이 없어 공장을 쉴 수밖에 없는 때가 있는데, 그럴 때도 우리는 직원들을 출근시켜 청소를 하게 하거나 강의를 듣게 하고 월급을 줍니다. 그런 기간이 길면 석 달쯤 이어질 때도 있어요. 그런 제도가 직원들에게 꽤 자랑거리가 되는 모양이에요. 그 덕에 지금까지 공장을 잘 움직일 수 있었던 것도 같고요.”

1989년 사이판 현지 공장 근로자들과 함께 야유회를 갔을 때 모습.
1989년 사이판 현지 공장 근로자들과 함께 야유회를 갔을 때 모습. 맨 왼쪽이 김동녕 회장이다. / 한세실업 제공

 

한세실업은 의류 회사 중에서도 월급을 잘 주는 회사로 소문이 나있다. 올해 신입사원 연봉은 4450만원(군필 기준)으로 의류 업계 1위 제일모직과 비슷하고 다른 경쟁사보다는 많다. “성과급이나 복지수당을 합친 총연봉은 5대 그룹 수준”이라는 말도 있다.


―한세실업 월급이 꽤 높다고 들었습니다.

“부도나고 다시 회사를 세울 때 몇 가지 결심한 게 있어요. 직원들 월급을 잘 줄 수 있는 회사가 되자, 하도급 업체엔 가능하면 현금을 주자. 1등 기업이 되는 것보다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돈 잘 주는 회사가 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2003년 적자였던 ‘예스24’를 인수했을 때도 비슷한 일을 했죠. 인수하자마자 직원들 월급부터 챙겼다던데요.

“그때나 지금이나 예스24는 1등 온라인 서점이예요. 시장점유율은 1등인데 적자에 허덕였던 이유가 뭘까. 알아보니 과당 경쟁 때문이더라고요. 다들 조금이라도 시장점유율을 늘리려고 엄청난 경쟁을 벌였고, 그러다 보니 모든 온라인 서점이 적자였던 거죠. 초창기에만 해도 다들 펀딩을 해서 그 적자를 겨우 메우며 회사를 돌렸는데 점차 온라인 서점에 시장성이 없다는 평이 나오면서 펀딩조차 어려운 상황이었고요. 그때 직원들에게 그랬어요. ‘1등도 좋지만 월급 받을 수 있는 구조부터 만들자’고요. 그때부터 출혈에 가까운 할인 행사를 접었죠. 당장 시장점유율은 떨어졌지만 덕분에 점차 흑자로 돌아섰고요.”

―2012년엔 전자도서관을 만들었지요.

“해외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많으니까요. 다들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을 고민했는데 답이 전자도서관이더라고요. 베스트셀러 위주로 2300권 정도 소장돼 있어요. 직원들이 보고 싶어하는 책을 설문을 받아 넣었습니다.”

―회사 내 어린이집 시설이 좋다던데요.

“우리 유아·아동복 회사인 ‘한세드림’에서 만든 캐릭터가 있어요. 토리아드라고 숲 속의 요정, 검은 고양이, 뭐 그런 것들인데 그 캐릭터로 꾸며놓았어요. 예쁘게 만들려고 꽤 노력했죠.(웃음) 그래도 집이 먼 워킹맘 직원들은 어린이집을 좋게 해놓아도 힘든 점이 많더라고요. 아침마다 잠든 아이를 둘러업고 출근해 어린이집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옷 입혀서 들여보낸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워킹맘들을 위해 어떤 복지를 해줘야 할까, 고민이 많죠.”

시 쓰고 소설 읽는 회장님

―4·19 시절에 시를 쓰신 적도 있다죠. ‘4월 혁명 기념시 전집’이라는 책에 실리기도 했고요.

“(얼굴을 붉히며)그냥 어릴 때부터 소설이나 시집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했어요. 그 중 세 편인가가 실렸던데요. 하도 예전에 쓴 것이라서 저도 이젠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나중에 김 회장은 그중 하나를 이메일로 보내왔다. ‘샛별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시였다. ‘소년들은 타다 남은 별똥돌을 주워 들고/ 폭군 같은 해가 져 버린 뒤/ 하나, 둘/ 나타난 샛별의 이야기를 듣는다….’ 같은 구절이 눈에 띄었다.

―요즘엔 그럼 어떤 책을 보십니까.

“경영 서적은 잘 안 봐요. 여전히 소설이나 시를 좋아하는데, 젊은 작가들 작품을 일부러 찾아보죠. 머리가 굳으면 안 되거든요. 회사를 운영할 땐 상상력이 필요한데 저 같은 사람은 그걸 책이나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겨우 얻는 거죠. 바쁘다는 핑계로 많이는 못 읽고 1년에 30권 정도는 읽으려고 애써요. 요즘엔 김연수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백영옥의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 김사과의 ‘테러의 시’ 같은 걸 재밌게 읽었죠.”

1972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독일 여행 중에 아내 조영수(오른쪽)씨와 함께 찍은 사진. 

1972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독일 여행 중에 아내 조영수(오른쪽)씨와 함께 찍은 사진. 김동녕 회장에게 아내는 “여전히 제일 멋있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라고 했다. / 한세실업 제공

이야기를 나누면서 계속 의문이 들었다. 이 단정하고 조용조용한 망팔(望八)의 남자는 아무래도 학자가 더 어울렸을 것 같은데, 기업가로 살아온 걸 후회한 적이 없었을까. 김동녕 회장은 이 질문에 잠시 웃더니 “아….” 하고 감탄사를 뱉었다. 그리고 잠시 뒤 이런 대답을 들려줬다.

“부도가 났을 때도 후회하진 않았어요. 그땐 그저 이걸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죠. 이걸 성공시키면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고 또 우리 가족이 함께 미래를 꿈꿀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가끔 이 사업을 물려주기 위해 아들들과 같은 일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좀 안타까울 때가 있어요. 아무래도 내가 자식들을 조직 안에서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아이들을 좀 느긋하게 찬찬하게 키우고 싶었는데, 막상 같은 일을 함께하면서는 그게 잘 안 되니 미안할 때가 있습니다.”

―회사를 이만큼 키워놓으셨으니 그래도 꿈을 이루신 것 아닙니까.

“글쎄요. 내게 시간이 만약 20~30년 정도 더 있다면 제대로 된 글로벌 컴퍼니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남아 있긴 합니다. 코카콜라나 나이키 같은. 우리나라 패션계에서도 이제 그런 회사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OEM 비즈니스도 훌륭한 사업이고 이 회사를 잘 지탱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래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우리가 주도적으로 개발한 옷을 입히고 싶은 욕심은 아직 남아 있죠. 그걸 내가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어떤 모습으로 늙고 싶습니까.

김동녕 회장은 “하하” 하고 웃더니 “전 사실 옷에도 관심이 별로 없고 남들처럼 뭘 수집하는 것도 잘 안 합니다. 클래식 음악을 참 좋아하지만 그냥 오래된 CD 플레이어로 즐기는 게 전부고요. 대신 제게는 남들이 잘 모르는 허세가 하나 있습니다”고 했다. 김 회장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 허세는 말이지요. 평생을 아내에게만큼은 멋진 남자로 보이고 싶은 것이었어요. 아내 눈에 멋져 보이려고 책도 열심히 읽고 영화도 많이 보고 음악도 많이 들은 거고요. 아내 앞에서 무거운 것도 잘 들고 힘든 산길도 쉽게 올라가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매일 운동을 했지요. 바라는 게 있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그 허세를 잘 지키다가 떠나는 겁니다. 나이에 비해선 좀 거창한 꿈인가요?”

그가 만면에 주름 가득 미소 지었다. 청년의 미소였다.


-조선일보, 2016/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