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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폐쇄와 선교… 활동가 2인에게 듣는다

하마사 2016. 2. 20. 20:11

북측 인사 “기도하고 밥 먹자”… 북한 선교는 ‘봄’을 기다린다

 

[뉴스&이슈] 북측 인사 “기도하고 밥 먹자”… 북한 선교는 ‘봄’을 기다린다 기사의 사진
개성공단 중단 발표 직후인 지난 10일, 경기도 파주시 통일대교 앞에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돼 차량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유턴 표시는 거꾸로 가는 남북관계를 보여주는 듯 하다. 연합뉴스

 

 

     남북 평화의 유일한 통로였던 개성공단의 불이 꺼졌다. 2004년 12월 첫 제품이 생산된 지 12년만이다. 지난 10일 정부는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를 이유로 개성공단 가동 중단을 선언했다. 북한은 아예 폐쇄를 단행했다.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사건 때도 흔들리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래서 충격파는 컸다.

개성공단은 기적의 공간으로 불렸다. 남쪽과 북쪽 사람이 서로 만나 신뢰를 쌓으며 통일의 모퉁이돌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민간 차원에서 대북 사업을 펼쳐온 관계자들이 입을 열었다.

개성공단에서 2012년까지 8년간 ‘남북협력병원’ 운영… 정근 

지난 18일 부산시 부산진구 가야대로 정근안과병원에서 만난 (재)그린닥터스 정근(56·백양로교회 장로) 이사장은 10년 전 일을 떠올렸다.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 직후 개성공단 철수설이 나왔을 때다. 그는 당시 TV 인터뷰에서 “모두 철수하더라도 그린닥터스는 끝까지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수없이 개성공단을 다녀오며 북한 측과 신뢰를 쌓아왔던 그였다. 공단 폐쇄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북한 핵미사일에 대한 정부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개성공단은 제게 너무 많은 이야기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북한 사람들의 마음이 녹는 것을 봤습니다. 숱한 난관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어떤 일에도 중단 없이 한반도의 평화지대로 자리를 지켜왔지요.”  

그린닥터스는 2005년 1월 개성공단 안에 ‘그린닥터스 남북협력병원(개성병원)’을 개원하고 2012년 12월 말까지 운영했다. 8년간 30만명의 북한 근로자와 5만명의 남한 근로자들을 무료 진료했다. 또 20명이 넘는 북측 의료진의 월급 3000달러 등 매달 1000만원을 지원했고, 매년 5억∼8억원 상당의 의약품을 보내는 등 60억원을 지원했다.  

정 이사장은 그린닥터스 개성병원을 운영하면서 100여 차례에 걸쳐 개성공단을 방문했다. 병원 초기엔 한 달에 두세 번씩 다녀왔고 이후 매달 방문해 운영비 조달과 안과진료 등을 담당해 왔다. 그러면서 개성공단 근로자들의 변화를 목도했다.  

“북한 근로자들이 처음 공단에 들어오면 몸에서 악취도 많이 났습니다. 허기진 사람들의 독특한 체취인데요. 3∼4개월 지나면 살이 오르고 냄새도 없어졌어요. 병원 환자도 다양해서 손가락 잘린 환자부터 폐결핵 환자도 있었어요. 저는 렌즈나 안경 처방, 익상편 수술 등을 했고요.” 

그린닥터스 개성병원에는 일화가 많다. 2005년 개성 시내에 연탄가스 중독사고가 빈발했다. 한국에서 지원한 연탄을 개성 사람들이 처음 써보면서 사고가 났던 것이다. 어느 날 밤이었다. 개성병원 북측 관계자가 황급히 남측 의료진을 찾아와 개성시 인민위원회 고위 간부가 연탄가스에 중독됐으니 고압산소통을 빌려 달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북측 사람들은 그린닥터스 개성병원을 신뢰하지 않았다. 병원은 24시간 체제로 운영했는데 즉시 조치를 취했다. 다행히 당 간부는 극적으로 목숨을 구했고, 그때부터 북측 인사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제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싫어했지요. 그런데 연탄가스 사고 이후에 확 달라졌어요. 보통 남한 사람들이 식사를 대접했는데 이때부터는 북측에서도 밥을 샀고요. 식탁에서는 ‘기도하고 밥 먹자’는 말까지 하더라고요.”

8년간 병원을 운영하면서 부산의 후원 기업인과 각계 지도자 등 1000여명도 개성공단을 다녀갔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실상에 울컥했다. 편견도 벗겨졌다. 북한 사람들은 ‘괴물’이 아니었다. 우리와 똑같은 말과 마음을 지닌 동포였다. 정 이사장에 따르면 그린닥터스 개성병원은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 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2011년 김정일 위원장 사망 당시에도 병원 운영은 차질을 빚지 않았다. 그는 당분간은 남북관계가 경색될 수밖에 없지만 상호 신뢰와 평화를 향한 준비는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통일은 도적같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대한결핵협회 회장을 역임했던 그는 북한 주민의 결핵 퇴치에 관심이 많다. “북한은 두 개의 핵이 문제입니다. ‘핵무기’와 ‘결핵’인데요. 결핵 치료를 위한 의료 지원을 준비해야 합니다. 통일 이후 남북한 주민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결핵 퇴치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개성공단 폐쇄 사태에 기독교인은 어떤 기도를 드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 정 이사장은 그린닥터스 개성병원에서 사역했던 한 목회자의 기도를 소개했다. “복음통일에 대한 기대로 2005년 1월 8일 앰뷸런스를 몰고 개성공단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언젠가는 복음통일의 그루터기가 싹을 내고 줄기를 내어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부산=글·사진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젖염소보내기운동’ 방북 CCC 통일연구소장 이관우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본부에서 만난 이관우(53) CCC 통일연구소장은 좀처럼 풀릴 기미가 없는 남북관계에 답답함을 감추지 못했다.  

“정부 나름대로 현 상황에 대한 고민과 진단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답답했어요. 십수 년간 여러 사람이 공들인 개성공단이 이렇게 무너지나 싶어 허망하고 참담한 기분이 들었어요. 남북관계에 종지부를 찍은 것 같아 그저 아쉽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 소장은 2001년 CCC의 젖염소보내기운동에 동참하며 50여회 방북, 인도적 지원활동을 했다. 젖염소보내기운동은 CCC 설립자인 고(故) 김준곤 목사가 북한의 만성적인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시작했다. 젖염소는 산지가 많은 북한의 지형에 잘 적응하고 산양유를 얻을 수 있는 데다 번식이 용이해 경제적 도움도 줄 수 있어 북한의 식량난 해결에 안성맞춤이었다.  

CCC는 북한 190만7000호 농가에 한 마리 이상의 젖염소 보급을 목표로 모금 활동을 펼쳤으며 2001년 처음으로 젖염소 120두를 황해북도 봉산군 은정리 염소목장에 기증했다. 지금까지 CCC가 보낸 젖염소는 1760두. 젖염소 대부분이 임신한 상태로 보내져 출산한 염소까지 합치면 그 수가 두 배 정도 불어난다. 지원 규모로 따지면 27억원 정도의 물자를 보낸 셈이다.  

“90년대 당시 대북지원을 돈으로 할 수 없었어요. 북측에 지원금 보내면 군자금으로 전용된다는 시각이 팽배했거든요. 돈도 사람도 갈 수 없는 곳, 동물이라도 보내 동포의 배고픔을 덜어주자고 시작한 게 이 운동입니다. 새하얀 젖염소는 어린 양된 예수님을 상징하는 의미도 있었어요. 국토 통일 전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 마음의 통일을 먼저 이루자는 의도였죠. 당시 CCC 소속 대학생 등 여러 사람이 기도하는 심정으로 모금에 동참했습니다.”  

2001년부터 8년간 젖염소보내기운동 모금국장을 맡은 이 소장은 젖염소 인도와 사육기술·관리방안 전수를 위해 수시로 북한의 젖염소 농장을 방문했다. 수의사, 설비 기술자 등으로 구성된 방북단은 현대식 염소농장을 구축하기 위해 마을에 1주일가량 머물며 북한 관리위원장, 기술자들과 협력했다. 목장이 있는 은정리가 평양에서 100㎞ 떨어져 있어 오가며 숙식을 해결하기엔 어려움이 많아서다. 이 소장은 이때 북한 주민이 만든 밥을 먹고 마련해준 거처에서 지내며 정이 많이 들었다고 했다. 

“처음 젖염소를 싣고 배 위에서 경직된 군인들을 만났을 때 참 많이 긴장했어요. 그런데 첫 만남에서 북한 사람들이 농담을 건네더라고요. 젖염소가 임신한 상태라 인천항에서 북한으로 가는 중 젖염소 한 마리가 새끼 두 마리를 출산했는데 이를 보고 북측 민족화해협의회 관계자가 많이 좋아했어요. ‘남북 간 정상이 만나 문이 열려 동물이 왔는데 통일둥이가 왔다’고요. 이후 자주 북측 참사들과 만나 일하다 보니 자연스레 ‘누님’ ‘동생’ 하게 됐습니다. 목장 일이 아닌 다른 용무로 방북해도 ‘목사 선생 왔느냐. 와서 대표기도하고 밥 먹자’며 반겨주고요. 자주 교류하다 보니 기독교 문화나 용어가 친숙해진 모양이더군요.”

핵 실험이나 김정일 사망 등 남북 간 긴장 상황에도 북한 관계자들과의 교분은 계속 이어졌다. 정치, 종교 등 예민한 이야기는 가급적 서로 피하기도 했지만 신뢰관계가 있으면 믿어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항상 위기가 있었죠. 만났던 북측 관계자들은 ‘선생님 믿고 맡긴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같이 가지 않는 건 북남의 논리가 아니다’라며 모든 걸 미국 탓으로 돌리기도 했고요. 결국 신뢰관계가 중요했던 셈이죠.”

이 소장은 교회가 복음적인 평화통일을 위해 한목소리를 내고 기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남북한 강대강의 역할 중간자로 한국교회가 나섰으면 좋겠습니다. 국가와 사회에 ‘그럼에도 사랑으로 함께 가야 한다’는 한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어느 사회든 사랑을 외치는 일은 교회의 몫입니다. ‘기도만이 살길이다’라는 마음으로 만남의 장을 열고 피 흘림 없는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마음을 모아 기도했으면 합니다.”  

 

-국민일보, 2016/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