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4년 7월 16일. 로마교황 레오 9세가 파송한 추기경 훔베르트가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의 성소피아성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훔베르트는 성당 중앙의 제단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한 장의 보고문을 올려놓았다. ‘교황의 이름으로 이단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 그를 추종하는 모든 자들을 파문한다’는 내용이었다. 추기경은 성당을 나오며 발에서 먼지를 털었다. 동·서방교회의 ‘대분열(the great schism)’ 최종 장면이다.
지난 12일(현지시간) 로마가톨릭의 프란치스코 교황과 러시아정교회의 키릴 총대주교가 거의 1000년 만에 다시 만나면서 동·서방교회의 역사가 재조명되고 있다. 이들 수장들은 이날 30개 조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교회의 결속과 신앙의 결단, 박해받는 기독교인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로마가톨릭은 1965년 바티칸공의회(2차)에서 동방정교회에 대한 파문을 철회했다. 2006년 크리스토둘로스 총대주교가 그리스정교회 지도자로는 최초로 바티칸을 공식 방문한 바 있다. 하지만 교황이 정교회의 실세인 러시아정교회 수장을 만난 것은 대분열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교회 역사에서 동방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비잔틴제국 교회들을 일컫는다. 헬라어(그리스어)를 기반으로 아타나시우스와 카파도키아 교부 등이 신학을 발전시켰다. 서방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유럽 교회를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암브로시우스 등이 신학을 주도했으며 로마의 주교였던 교황이 지배력을 강화했다.
동·서방교회의 분열은 교회·정치적 갈등에서 비롯됐다. 서방교회가 사도 베드로의 수위권(首位權·으뜸 사도로서의 지위)을 강조하며 로마의 최우선적 지배권을 주장하자, 동방교회는 교황의 권위란 단지 명예일 뿐이라며 제국교회 교구들의 협의체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신학적으로는 성령의 발현 문제에서 논쟁이 격화됐다. 이후 동방교회는 동방정교회로, 서방교회는 로마가톨릭으로 굳어졌다. 개신교는 16세기 로마가톨릭에서 나왔다.
대분열 이전의 7개 에큐메니컬 공의회는 동·서방교회의 신학적 관심사를 보여준다. 정교회의 경우 성경 다음으로 이들 공의회 결정을 중시하며, 에베소와 칼케돈 니케아(2차) 공의회에서 그 독특성을 찾는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인정, 성상(icon) 보존 등이다.
러시아는 950년 올가 여왕이 개종하면서 정교회가 국가 종교가 됐다. 1240년 몽골 침입 시 ‘호국 교회’ 역할을 했으며,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 선언했다. ‘세계기도정보’(2010)에 따르면 신도수는 로마 가톨릭이 10억 8973만명, 정교회가 2억 4313만명에 이른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국민일보, 2016/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