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빌 2:5~11
제목: 마음을 비웁시다.
찬송: 91장
목표: 자기를 비우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게 한다.
백범 김구 선생이 청년 시절 과거시험에 응시했지만 낙방하고 좌절에 빠져있을 때 아버지는 그에게 관상쟁이가 될 것을 권했습니다. 백범은 ‘마의상서’라는 관상책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책에서 배운 대로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니 온갖 역마살이 다 끼어 있었습니다. ‘내 관상이 이 모양인데 도대체 누구의 관상을 보아준단 말인가’라며 한탄했습니다.
그런데 그 책 마지막 구절이 눈에 띄었습니다. ‘얼굴 잘생긴 관상(觀相)은 몸이 튼튼한 신상(身相)만 못하고, 몸이 좋은 신상은 마음씨 좋은 심상(心相)만 못하다. 심상이 좋으면 관상이나 신상이 좋은 것보다 낫다.’
이 구절에서 용기를 얻은 백범은 어떻게 하면 심상을 좋게 기를까 고심하다가 ‘이 나라에 태어났으니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자’고 결단했습니다. 그 이후 그는 나라의 터를 닦는 훌륭한 민족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외모지상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얼굴이나 외모를 고치는 데 돈과 시간을 들이기보다는 마음을 다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듬으면 새로운 인생이 펼쳐집니다. 마음을 다듬을 때 중요한 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자기로 가득한 마음을 비워야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마음을 비우면 겸손합니다.(5~7절)
5~7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본문은 예수님의 마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본받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마음을 비우고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고 마침내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구원자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버리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신분과 격이 다른 모습으로 낮아지셨습니다. 사람은 격에 어울리는 사람들과 활동하기를 원합니다.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듯이 끼리끼리 모입니다. 그런 만남이 서로 편하기 때문입니다.
한데, 하나님이 사람과 어울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만큼 낮아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능력을 지니신 분이 한계를 가진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입니다. 불편하고 견딜 수 없는 생활이었습니다. 영광만 받으시던 분이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도 받았습니다. 고난을 받지 않던 분이 십자가의 고통도 받아야 했습니다. 홍보영상을 찍듯이 잠시 동안 시늉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과거에 TV를 보면 대통령이 농번기에 농부들과 함께 모심기를 하는 장면을 방영하였습니다. 낮아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영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진짜 목수가 되신 것이었습니다. 목수의 시늉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목수가 되셔서 땀을 흘리며 목수의 일을 하셨습니다. 마음을 비우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마음을 비우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불만이었을 겁니다. 도저히 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고 불평하셨을 것입니다. 집, 옷, 음식 등 모든 것이 불편하셨습니다. 왕과 귀족, 유명인들만 상대하는 것도 마음에 차지 않을 텐데 가는 곳마다 병자들이 모였습니다. 때로는 일렁이는 고깃배 위에서 주무시기도 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 취급당하기도 했습니다. 먹기를 탐하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조롱을 당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취중에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친구이자 심복을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자신에게 직언을 했다는 이유로 마음속에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술김에 무기를 휘두른 것입니다. 술이 깨고 난 뒤 그는 대성통곡하며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지만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천하는 정복했을지라도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른 말을 해주는 충신의 말을 겸손하게 듣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당할 때 겸손하지 않았다면 알렉산더대왕처럼 분노하셨을 것입니다.
장신대 교회음악과 이 교수님은 결혼 후 15년이 되도록 임신을 하지 못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신학생들이 기도원에서 철야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신학생들과 함께 모여 기도제목을 나누고 잉태의 복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15년 만에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교수님은 2013년에 신학생 기도동아리 겨울수련회 때 기도응답의 선물인 8살 된 성권이를 데리고 와서 감사인사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밤을 새워 기도했던 교수님의 겸손한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해주셨습니다. 교수님이 신학생들과 함께 기도원에서 밤을 새우며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체면과 격식을 따지면 할 수 없지만 마음을 비우면 겸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의 기도에 응답해주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많은 갈등과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런 갈등의 대부분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울분이 생기고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자식들로부터 상처를 받습니다.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이렇게 할 수 있느냐며 자식에게 서운해 합니다. 부모가 어떻게 자식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며 부모님께 서운해 합니다. 목사님이 어떻게 교인들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며 목회자를 탓합니다. 목사님은 성도들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며 상처를 받습니다. 아직도 자기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마음을 비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교회분쟁으로 인해 많은 욕을 먹었습니다. 평생 먹은 욕보다 이곳에서 먹은 욕이 더 많을 듯합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험한 말을 들었습니다. 솔직히 아직도 마음에 깊은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참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마음을 비우면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 침 뱉음을 당했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겸손했기 때문에 참으셨습니다.
2015년 프로야그 MVP였던 NC구단의 4번타자 에릭 테임즈의 인터뷰 내용 중에 코치에게 들은 말이라며 소개했습니다. ‘교만한 선수는 다리가 두 개뿐인 의자에 앉아있는 것과 같다. 흔들흔들하다가 결국엔 자빠진다. 그렇지만 겸손하고 감사할 줄 아는 선수는 절대 넘어지지 않는다’. 다리가 네 개인 의자는 안전하지만 두 개인 의자는 불안합니다.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사는 교만한 사람의 모습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약 4:6). 여행을 갈 때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가면 즐겁지만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가면 불편합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이 세상에 여행 온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 편하게 함께 여행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이 물리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원하시면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를 비우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채우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이 복잡하고 힘드십니까? 울분과 분노가 가라앉지 않습니까? 아직도 마음을 비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일들이 많습니다. 지금의 우리교회 상황도 비슷합니다. 바른 길에 섰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결과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교인으로 교회에 협조했는데 법원에서는 손해배상을 물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와 마음이 혼란합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지만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조차 받아들이도록 마음을 비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디 교회문제 뿐이겠습니까? 마음을 비우고 살도록 요구하는 많은 상황들 앞에 봉착합니다. 그 때 자기를 비우신 예수님의 겸손을 생각하고 이겨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되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마음을 비우면 희생합니다.(8절)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희생하는 사람은 마음을 비우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은 희생하지 않습니다. 이해타산이 빠른 사람은 희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이해타산이 빨랐다면 절대 희생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희생의 길인 것을 알면서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과거에 성극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순교자 주기철목사님 역할을 했는데, 맨발로 못이 박힌 판자를 밟고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 배역을 하기 위해 나무판에 못을 박아 못 판을 만들었습니다. 관객들이 볼 때는 뾰족한 못 위를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못대가리 위를 걷는 것이었습니다. 별로 아프지 않았지만 굉장히 아픈 것처럼 연기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십자가 사건은 연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픈 표정을 억지로 연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픔과 고통을 못 느끼도록 미리 조치를 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당하는 처절한 고통과 아픔이었습니다.
사 53:5-7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의미를 가장 명백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를 위한 것이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의 예언대로 로마 병정들의 창과 가시관과 못에 찔려 몸과 마음이 상했습니다. 예수님의 찔림과 상함이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는 말씀처럼 주님이 친히 한 알의 밀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많은 생명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생명은 희생을 동반합니다. 한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모진 진통과 아픔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성장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의 순교의 피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원형극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기도 했고 카타콤 동굴에서 평생을 살면서 신앙을 지키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십자가 이후에 부활이 있듯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더욱 강력하게 일어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높은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희생하셨습니다. 주님의 희생으로 오늘 우리는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당당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누리는 평안은 예수님과 그 누군가의 희생의 결과입니다. 오늘 나의 감사는 예수님과 그 누군가의 눈물어린 희생의 산물입니다. 이제는 나의 희생을 통해 누군가가 생명을 얻고 기쁨을 누리며 살도록 희생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희생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희생하면서 마음을 완전히 비우셨습니다.
흰개미는 바퀴벌레의 사촌 격인 곤충입니다. 흰개미는 밖에는 나가지도 않은 채 나무속에서 내부 확장 공사를 하며 긁어낸 벽체를 먹고 사는 바람에 입주한 지 한참이 지나도록 모를 수 있습니다. 발각될 즈음이면 강제 퇴출이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일개미들이 구중궁궐에 고이 모시고 있는 여왕개미를 죽여야 박멸할 수 있습니다. 여왕을 색출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일개미들에게 독약을 먹여 그걸 여왕에게 전달하도록 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장금이’ 일개미들이 수라상에 오르는 음식을 먼저 시식하고 대신 죽어주는 바람에 속수무책입니다.
흰개미도 종족보존을 위해 여왕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입니다. 한낱 곤충에 불과한 흰개미조차도 종족을 위해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희생하듯이 새 생명을 부여받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수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해야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희생은 자기를 비울 때 가능합니다. 마음을 완전히 비울 때 가능합니다.
엄마는 아빠보다 강하고 위대합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모성애 때문입니다.
지리산 반달곰의 야생 방목은 국민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습니다. 몇 년 전에 겨울잠을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반달곰 가족에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어미 반달곰이 탈진해 죽은 것입니다. 30% 정도의 체중 감소와 탈진이 주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달곰 곁에는 4마리의 새끼 곰이 살아있었습니다.
겨울나기가 힘겨운 겨울에 적은 양의 양식으로 어미 반달곰은 새끼들을 위해 아예 금식을 했습니다. 새끼를 낳고 기르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는 이 숭고한 모성애 때문이었습니다. “흉년이 되면 어미는 굶어죽고 자식은 배 터져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흉년에 어머니는 밥을 굶으면서 자식들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비울 때 희생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들은 나라를 위해 자기 마음을 비웠습니다.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은 예수님을 위해 자기를 비웠습니다. 이웃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의인들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 자기 마음을 비운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비우지 않고는 절대 희생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남을 죽이고 자기만 살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로는 세상이 아름답게 변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자기를 버리는 희생입니다. 희생은 마음을 비울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 마음을 비우셨기에 기꺼이 희생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가 살려면 마음이 복잡합니다. 하지만 마음을 비우고 죽기를 각오하면 홀가분합니다. 복잡한 마음을 비우면 예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가족을 위해 희생할 수 있습니다.
3. 마음을 비우면 높아집니다.(9~11절)
9~11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마음을 비우면 자기 것을 잃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잃는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비울수록 채워지고 마음을 비우면 높아지는 은혜가 있습니다. 샘은 퍼낼수록 새물이 솟아나지만 고이면 썩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의 샘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울수록 행복과 기쁨의 새물이 솟아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낮아지고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을 때 하나님은 지극히 높여주셨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모든 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주’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을 때 높아지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가장 멸시받고 흉악한 사형틀이 인류를 살리는 생명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성경적인 역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중에 관원들이 많았지만 바리새인들의 출교를 두려워하여 드러내놓고 믿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그들을 향하여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 12:43) 기록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사람 눈치를 보느라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사람을 더 두려워하고 의식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보다 보이는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위해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비우지 못하면 그렇습니다. 보이는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커 보입니다.
마음을 비우면 낮아지고 무시당할 것 같지만 반대입니다. 운동경기를 할 때도 마음을 비울 때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습니다. 욕심을 부리면 긴장이 되고 근육이 경직됩니다. 마음을 비우고 욕심이 사라지면 여유가 생겨 오히려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을 비우기가 어렵습니다. 무시당하고 손해 볼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시적으로 그렇다할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높여주십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으로 만들어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미국 미주리주 소도시 인디펜던스에는 독특한 표지판들이 서 있습니다. 중절모 쓰고 지팡이 짚은 노신사가 걷는 모습을 아무 설명 없이 실루엣으로 새겨놓았습니다. 표지판은 1953년 대통령에서 물러난 해리 트루먼이 고향에 돌아와 날마다 산책하던 길을 가리킵니다. 그는 육군연금 111달러(135,000원)를 받으며 ‘트루먼의 오두막집’에서 20년 여생을 보냈습니다. 테라스에 앉아 옛 친구들과 체스를 뒀고 트루먼 기념 도서관에서 봉사했습니다. 그는 퇴임 후 새롭게 평가와 존경을 받았습니다.
과거에 대통령이라는 직함에 사로잡혀 마음을 비우지 않았다면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마음을 비울 때 존경받는 노후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처럼 마음을 비웁시다. 마음을 비우면 겸손합니다. 마음을 비우면 희생합니다. 마음을 비우면 높아집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주님처럼 겸손하게, 희생하며 사셔서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 (0) | 2017.02.10 |
---|---|
은혜의 강물 (0) | 2016.10.27 |
풍성한 교회 (0) | 2016.01.02 |
끝에서 만나는 하나님 (0) | 2015.12.27 |
하나님의 선물 (0) | 2015.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