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끝에서 만나는 하나님

하마사 2015. 12. 27. 17:07

본문: 눅 2:25~29

제목: 끝에서 만나는 하나님

목표: 시므온처럼 예수님을 끝까지 기다리는 사람이 되게 한다.

 

 

2015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첫째 주일을 시작한 이후 52주를 숨 가쁘게 달려왔습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에벤에셀 하나님이 도와주심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에벤에셀은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돌의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하기 위해 미스바에 모였을 때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전쟁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지만 사무엘과 백성들이 합심하여 기도하자 하나님이 도우셔서 블레셋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이스라엘은 승리를 기념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도움의 돌)이라 부르며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와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포기하지 않고 오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교회적으로 고비를 넘어왔습니다. 여기가 끝인가 했더니 또 살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가정적으로 어려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일터는 만만합니까?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사업가는 사업가대로 각자 힘들고 어려운 고비들을 넘어왔습니다. 여기까지 내 힘으로 온 것 같지만 순간순간 보이지 않는 에벤에셀 하나님이 도와주셨음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지쳐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기다림은 정말 지루하고 힘든 일입니다. 기한도 없이 마냥 기다려야 할 때는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오늘 본문은 포기하지 않고 메시야를 기다리다 끝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난 시므온의 이야기입니다.

 

끝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1. 임마누엘의 하나님입니다.(25절)

25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임마누엘입니다.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새벽1부 찬양대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매일 새벽을 깨우며 찬양하는 찬양대원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시므온’이란 이름은 유대 사회에서 매우 보편적이고 흔한 이름입니다. 시므온은 평생을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으며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란 메시야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 받는 위로를 가리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영감 받은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랜 침묵의 시대에 살면서도 시므온은 메시야의 도래를 확신하며 끈기 있게 기다리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모범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언제일지는 몰라도 죽기 전에 반드시 메시야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몇 살 때라고 혹은 언제라고 정확한 날짜를 알려주시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성령의 지시를 받은 순간부터 메시야를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고 했으니 다윗의 혈통에서 아기가 태어날 때마다 기다렸을 것입니다.

이런 기다림의 끝에 드디어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평생의 소원이 응답되는 날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살았음을 고백했습니다. 성령의 약속을 믿고 기다려온 세월이 느껴지는 말입니다. 시므온은 인생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인생의 끝에서 만났지만 이미 그는 하나님과 늘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셨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성령이 함께 하셨고 성령의 감동을 받고 성령의 지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시므온이 살고 있던 시대는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이후로 하나님의 계시가 단절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영적 암흑시대에도 시므온과 같은 의인은 성령 충만하여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을 통해 만나주셨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는 성령을 통해 만나주십니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성령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역사하셨습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과 교통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시므온과 동행하셨으므로 그는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고 메시야를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시므온은 암흑의 시대에도 세상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나이가 많아 소망이 흐릿해질 때도 메시야를 끝까지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믿음이고 능력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기다릴 수 있고 끝까지 인내할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소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게 하십니다.

성경에는 기다리지 못하여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을 기다리는데 실패하여 여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은 후에 그와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여 가정에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그 역사적인 아픔이 오늘날도 이삭과 이스마엘 후손 사이에 지속되고 있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분쟁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무엘 선지자가 도착이 늦어지자 도망치는 백성들을 보고 조급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오직 제사장만이 드려야 하는 번제를 자기가 드리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이 도착했을 때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린 경위를 말했지만 사무엘은 기다리지 못한 사울에게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삼상13:14)”는 가혹한 말을 하고 떠났습니다. 사울에게는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결국 사울의 왕위는 오래 가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습니다.

누구나 힘든 상황에 처하면 기다리다 지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열악한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어떤 순간에도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함께 하십니다. 때로는 낙망하고 좌절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요셉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보여주었습니다. 요셉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형들이 구덩이에 던졌을 때도, 미디안 장사꾼에게 팔려갈 때도,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하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특히 감옥에 있을 때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여 주었을 때 복직되면 자기를 옥에서 건져달라고 부탁했지만 술 맡은 관원장은 감옥에서 나간 후 2년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습니다. 왕궁에 복직한 관원장에게 이제 히브리노예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사람은 잊었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잊지 않고 함께 하셨습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조차 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끝까지 기억하고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구덩이에 빠지고 노예로 팔려 종살이를 하고 옥에 갇혀 죄수로 산다할지라도 그 고통의 현장에 함께 하시고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든 실패하지 않습니다. 실패처럼 보여도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과거의 자기자리로 복직했지만, 요셉은 보디발의 가정총무로 복직한 것이 아니라 애굽의 총리로 완전히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지금의 내가 처한 자리와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임마누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

시므온은 영적인 암흑시대에도 임마누엘 하나님과 함께 하며 의롭고 경건했으며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런 시므온을 하나님은 마침내 끝에서 만나주시고 위로해주셨습니다.

2015년의 끝에 서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나온 시간 속에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이 침묵하셨습니까? 우리 교회를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실까?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가정의 기도제목이 응답되지 않고 또 한해를 넘겨서 안타까우십니까? 어려운 삶의 환경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으로 지쳐있습니까?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며 살아온 것이 은혜입니다.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기다리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시므온이 메시야를 기다리며 의롭고 경건하게 살다가 마침내 끝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났듯이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오늘도 함께 계심을 믿고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행복한 끝을 향해 오늘도 우리와 발걸음을 함께 하고 계심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2. 약속의 하나님입니다.(26절)

26절,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만남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약속과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기다림이란 약속이 있어야 하고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마냥 어딘가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일 것입니다. 약속이라 할지라도 믿을 수 없는 사람과의 약속을 믿고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상대방이 사기꾼임을 알면서 돈을 꾸어주고 기다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화)

이번 성탄절에 예쁜 교회달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2007년도에 교회달력 업무를 하면서 낭패를 본 경험이 있습니다. 제작비를 저렴하게 제시한 업체와 계약을 맺고 일을 진행했습니다. 예년보다 빨리 작업을 준비했기에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중간점검을 할 때마다 업체담당자는 잘 진행되고 있다며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데, 디자인 샘플을 가져오겠다는 날짜를 어겼습니다. 수정본을 가져오겠다는 날짜도 어겼습니다. 전화를 하면 그때서야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약속을 여러 번 어겼습니다. 결국 24일 입고하기로 약속했던 날도 트럭이 출발했다고 했지만 거짓말이었습니다. 얼마나 황당하던지 결국 교회달력이 입고되지 않아 성탄절 때 달력선물을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애를 먹이고도 다음해에 또 일을 맡겨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화>

프랑스 루이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민 혁명군에 포위되었을 때 궁전을 마지막까지 지킨 것은 프랑스군이 아니라 스위스 용병이었습니다. 수비대 모두 도망갔지만 스위스 용병 700여명은 남의 나라의 왕과 왕비를 위해 용맹하게 싸우다가 장열하게 최후를 맞았습니다.

시민 혁명군이 퇴각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도 스위스 용병은 계약 기간이 남았다는 이유로 그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당시 전사한 한 용병이 가족에게 보내려 했던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신용을 잃으면 후손들이 영원히 용병을 할 수 없기에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죽음으로 계약을 지키기로 했다.”

오늘날까지 스위스 용병이 로마 교황의 경비를 담당하는 전통의 배경입니다. 젊은 용병들이 목숨 바쳐 싸운 몸값을 송금한 돈은 결코 헛되지 않았고 스위스 용병의 신화는 스위스 은행의 신화로 다시 이어졌습니다. 용병들의 피 묻은 돈을 관리하는 스위스 은행의 금고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지켜야 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결과 스위스 은행은 안전과 신용의 대명사가 되어 이자는커녕 돈 보관료를 받아 가면서 세계 부호들의 자금을 관리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약속은 그 사람의 인격을 보여줌과 동시에 신용과 직결됩니다. 작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큰 약속도 잘 지킬 수 있지만 약속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약속한 대상도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하신 약속을 기록한 책입니다. 구약은 옛 약속이고 신약은 새로운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시므온은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볼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기에 그는 그 약속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노인이 되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약속이 흔들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은 믿음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을 때 기다릴 수 있습니다. 시므온이 메시야를 끝까지 기다릴 수 있었던 힘은 의롭고 경건한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었고 메시야가 오면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으므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메시야를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예화)

개를 훈련할 때 가장 힘든 것이 기다리게 하는 훈련이라고 합니다. 군견이나 마약 등을 탐지하는 탐지견들을 훈련할 때 최종적으로 하는 훈련이 기다림의 훈련입니다.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령을 내리고 끝까지 기다리면 잘 훈련된 개라고 합니다. 또한 먹을 것을 주고 주인이 먹으라고 명령을 내릴 때까지 먹지 않고 기다리면 훈련이 잘 된 개입니다. 기다리는 훈련을 할 때 주인은 개가 믿도록 해야 합니다. ‘기다려’라는 명령을 내리고 주인이 다시 돌아가야 개가 주인을 믿고 다음에도 기다립니다. 이처럼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믿고 기다리는 것이 어렵습니다.

세상의 기다림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꿈을 가지고 준비한 계획과 기다림이 좋은 결과로 나타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시험을 쳤는데 실망스런 점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힘들게 입학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기다렸는데 환영하는 직장이 없습니다. 사랑하며 기다린 끝에 결혼을 했는데 실패하는 가정들이 늘고 있습니다. 기대를 가지고 자녀를 키웠지만 자식들은 부모를 버립니다. 사람의 약속을 믿고 세상에 기대를 걸고 살면 실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므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린 결과 기쁨을 누렸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습니다. 일 년의 계획 중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계획들이 있습니까? 성령의 지시를 받은 비전이라고 하면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하나님이 분명히 이루어 가십니다. 하지만 단순히 개인의 야망이라면 조용히 접으시고 하나님의 비전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꿈꾸던 일을 이루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기다림과 인내입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실패한 사람에게는 과거가 화려할수록 비참하고, 성공한 사람에게는 과거가 비참할수록 빛이 납니다.” 과거가 비참하다 할지라도 약속의 하나님을 믿은 기다림의 끝이 성공일 때 그 성공이 더욱 빛이 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다리는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기다리지 못해서 새치기하고, 운전할 때 급차선 변경을 합니다. 요리하는 시간마저도 못 기다려 인스턴트식품이 인기입니다. 약도 즉효(卽效)약을, 돈벌이도 한 탕으로, 벼슬도 벼락감투를 노립니다. 물론 이런 빨리빨리 문화가 성공의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약속의 하나님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조급하면 실수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약속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다렸던 인물들이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방주를 지으라는 말씀을 듣고 언제 임할지 모르는 홍수를 대비하여 100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려 홍수심판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이란 세월을 수일같이 여기며 기다렸습니다.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왕의 약속을 받고 모진 고난을 견디면서 기다리고 인내하여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고 기다리며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던 시므온에게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를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오늘까지 오신 여러분에게 약속의 하나님이 풍성한 은혜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3. 성취의 하나님입니다.(27~29절)

27~29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라는 말이 있습니다. 혹시나 하고 기다렸더니 역시나 오지 않았다, 혹시나 행운권 추첨에 당첨될 줄 알았더니 역시나 안 되었다와 같은 말에 쓰입니다. 세상일은 이럴 수가 있습니다. 혹시나 기대를 해보지만 역시나 기대가 무너지는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혹시나 하고 기다렸는데 역시나 안 오시는 하나님, 혹시나 하고 기도했는데 역시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믿으면 진짜로 됩니다. 믿으면 진짜로 이루어집니다. 믿고 기다리면 만나주십니다. 단지 그 시간과 방법이 우리와 다를 수 있습니다.

시므온은 어느 날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성전에 들어갔는데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결례의 날 정결의식을 행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았던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성전으로 들어오자 그 아기가 바로 그토록 바라던 메시야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보았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고 감사하여 아기 예수님을 안고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찬송을 했습니다. 일생을 기다리던 아기 예수님 이스라엘의 위로인 메시야를 만난 감격을 찬양으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한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직접 목격한 시므온은 모든 것으로부터 평안함과 자유를 누렸습니다.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었습니다. 기다림의 끝에서 찾아온 무한한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눈으로 보았으니 여한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사명을 완수했을 때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까? 2015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여한이 없이 사셨습니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그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습니까? 믿으면 기다려야 합니다. 시므온에게 하셨던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은 우리 교회와의 약속과 가정과 개인에게 하신 약속도 반드시 성취하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수렁에 빠지기도 하고 광야를 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시편 40편은 다윗의 간증과 기도입니다. 다윗이 과거에 만났던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면서 현재에 당하는 고난에서 건져주실 것을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다윗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체험한 다윗은 또 다른 어려움에서도 건져주실 것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 40:1~2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며 기다렸더니 하나님이 삶의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져주셨다는 간증입니다.

(예화)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몇 년 전에 처가 식구들과 함께 다슬기를 잡으러 영월부근에 있는 서강을 갔습니다. 차를 몰고 강가로 갔습니다. 자갈밭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자동차 바퀴자국이 있어 자동차를 몰고 들어갔습니다. 차가 헛바퀴를 돌기 시작했습니다. 엑셀을 밟자 땅만 파이고 바퀴는 더 깊이 모래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근처에 있는 비닐하우스에서 삽을 빌려와 모래를 파고 자갈을 바퀴 밑에 깔았습니다. 후진했다가 앞으로 가보았지만 점점 바퀴는 모래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둑해지기 시작하자 당황했습니다. 장인어른과 함께 뒤에서 차를 밀어보았지만 바퀴는 점점 빠져갈 뿐이었습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처제가 보험회사에 연락하여 레커차(견인차)를 불러보라고 했습니다. 당황하니까 그 생각도 못했습니다. 보험회사에 연락하니 차를 보내준다고 하면서 20~30분 기다리라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안심이 되고 소망이 생겼습니다. 드디어 견인차가 왔습니다. 견인차를 제 차 앞에 대고 밧줄을 걸어 끌자 모래에 박혀 있던 차가 빠져나왔습니다. 그 때 견인차가 오지 않았다면 지금도 모래밭에서 삽질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수렁에 빠졌을 때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빠져갑니다. 더 깊은 절망으로 떨어집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초조해집니다. 끝이 다가오면 포기합니다. 그 때 보험이 능력을 발휘하듯이 평소에 하나님께 믿음의 보험을 들어야 합니다. 기도로 구원의 견인차를 요청하면 급히 달려와 약속을 이루시는 성취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그의 믿음과 소망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시므온은 400년 동안 영적인 암흑시대에 주변의 경건한 사람들마저도 메시야가 오리라는 기대를 저버리고 세속에 물든 생활을 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외치며 무기를 가지고 로마에 대항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림에 지쳤지만 시므온은 메시야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15년의 끝에서 기다리다가 지치지는 않았습니까? 해결되리라 믿었던 교회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가정과 자녀들을 위한 기도제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답답하고 착잡한 심정으로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계십니까?

저의 간증입니다. 제가 교회를 위해 금식기도하고 받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시편 121편 1~2절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법원의 재판결과에 따라 낙심이 될 때도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을까?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인도하실까?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천지를 지으신 능력의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도와주실지 그 방법과 결과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하신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시므온처럼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우리들은 시므온보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든지 읽을 수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일주일에도 몇 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무 때나 교회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소망을 품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던 시므온처럼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기다림의 사람들입니다. 시므온이 끝에서 하나님을 만났듯이 우리의 기다림 역시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 성취의 하나님을 체험한 시므온은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안고 찬송했습니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감격에 겨워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끝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기다림의 끝이 찬양으로 마칠 수 있도록 은혜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끝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믿음과 소망으로 끝까지 기다리는 사람의 입술에서 감격의 찬양이 터지게 하실 줄 믿습니다. 험한 세파 속에서도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선물하시는 약속의 하나님,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성취의 하나님을 믿고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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