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

하마사 2017. 2. 10. 16:25

본문: 히 3:12~14

제목: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

찬송: 436장

목표: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사람이 되게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라는 말이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함께 누리는 사람,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좋은 것을 누리는 사람을 뜻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누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구원을 받거나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천국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복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구원과 모든 좋은 것을 누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는

1. 조심하는 자(12절)

(히 3: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히브리서는 히브리 성도들을 위해 기록하였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 중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이 아닌 성도를 의미하고 히브리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이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입니다. 당시 많은 히브리 성도들이 핍박과 신앙적 혼란 등으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혹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동족으로부터 가해지는 박해와 로마 정부로부터 가해지는 박해가 있었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사회에서 불법종교였기 때문에 히브리 성도들은 핍박에 대한 두려움과 유대교 전통에 대한 상실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옛 생활로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배교자가 되는 것에 조심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믿지 않고 악한 마음을 품는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열매도 없고 생명도 없습니다. 포도나무 비유에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포도나무 되는 예수님과 분리되어서는 열매는 물론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배교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것이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경고는 핍박가운데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를 살피도록 경종을 울리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죄인들입니다. 말씀으로 자기를 절제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악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조심하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짓눌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마음이 둔하여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주님 재림하는 날이 덫과 같이 임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마음이 악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데, 구원에서 멀어지게 하는 마음을 품는 것 자체가 악하고 타락한 마음입니다. 그런 악한 마음이 결국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게 하는 마음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생명이 없는 우상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영원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과거에만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현재도 살아계시며 미래에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실 분입니다.

핍박과 박해의 현장에서도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침묵하고 계실 때 답답하고 죽은 하나님으로 생각됩니다. 현실을 변화시키고 당장 악을 몰아내고 박해를 멈추셔야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순교를 방관하실 때 하나님은 죽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갈등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어”라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교회와 국가, 가정과 일터에서 이런 의문을 갖게 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거야” 거짓과 악이 득세하고 승리하는 듯해도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드러내실 때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당시 히브리 성도들은 핍박과 박해로 인해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고 멀어지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만 그렇습니까? 여러 환경적 요인들로 인해 믿음생활에서 이탈하게 하는 악한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믿음을 저버릴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 수 있습니다. 나는 예외겠지 하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금은 잘 믿지만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는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늘 조심하는 사람입니다. 악한 사단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벌리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유혹의 손길을 보냅니다. 욕심을 갖게 하거나 상처를 안겨주기도 합니다. 낙심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방심과 교만은 금물입니다.

(예화)

언젠가 아내와 둘이서 식사를 하면서 ‘나는 너무 건강해서 탈’이라고 했는데 아내가 말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감기에 걸려서 몹시 고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수구 구멍위에 차를 세워두었더니 냄새가 차 안으로 들어와 온통 하수구 냄새로 진동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아무리 깨끗하게 세차하고 방향제를 뿌린다 해도 쓰레기차 옆에 있으면 쓰레기가 떨어지고 하수구 위에 주차하면 하수구 냄새가 스며들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처신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가지 말아야 할 장소와 앉지 않아야 할 자리에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동화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복음증거를 위해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환경에서 교제가 필요하지만 그들을 변화시키려다 오히려 자기가 동화되어 변질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죄의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말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시 1:1-2)라고 했습니다.

 

(예화)

항상 조심해야 하지만 특히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했습니다. 사단도 처음에는 천사장이었지만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다가 하늘에서 쫓겨나 공중권세를 잡은 마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교만은 자기존재를 키우는 대신에 하나님을 작게 만드는 오류를 범하게 만듭니다. 이런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도 겸손할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지만 교만이 싹트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자 버림받았습니다.

(간증)

몇 년 전 새신자부를 담당하고 있을 때 교사들과 윷놀이를 했습니다. 6명씩 팀을 나누어 윷놀이를 하는 중에 제가 연속으로 윷을 세 번이나 쳤습니다. 우리 팀원들이 너무 신나서 좋아하기에 흥분되어 네 번째 윷을 던졌는데 그만 낙판되고 말았습니다. 낙판되면 무효라는 규칙을 정했기에 그동안 세 번이나 윷이 나온 것도 함께 무효가 되고 말았습니다. 승리가 눈앞이었는데 그만 패하고 말았습니다. 네 번째 윷을 조심해서 던졌다면 낙판되지 않았을 것이고 승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친선게임이니 더 재미있기는 했지만 중요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잘 나갈 때 더욱 조심해야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다보면 세 번이나 연속하여 윷이 나오듯이 잘 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 다음 네 번째 던질 때 낙판될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모두 무효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잘 살고도 마무리 윷을 잘못 던져 전부 무효로 만들어버리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한해를 돌아보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악한 마음,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떨어지게 만들었던 타락한 마음을 버립시다. 또한 악한 마음이 자리하지 못하도록 끝까지 조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는

2. 권면하는 자(13절)

(히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서로 권면해야 합니다. ‘권면하여’란 단어는 ‘지속적으로 권면하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위로하다’, ‘격려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권면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라는 말입니다. 주일날 하루만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지속적으로 교제하면서 죄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권면하라고 명령합니다. 성도들끼리의 친밀한 교제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성도를 권면하는 일을 목회자만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성도들 서로 간에 피차 권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매일 피차 권면하지 않으면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완고하다’는 ‘굳어지다’, ‘뻣뻣하다’는 뜻입니다. 주인을 거역하는 소처럼 하나님에게서 돌아서서 금송아지를 숭배한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또한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려보내라는 모세의 말을 듣고 고집을 부릴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바로는 결국 열 가지 재앙을 받고야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죄 없는 애굽 백성의 모든 가정에 장자들이 죽는 재앙까지 당했습니다.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던 애굽의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키는 결과까지 초래했습니다. 한 사람의 고집과 완고함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는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고집을 부리게 만듭니다. 죄를 지었을 때 회개해야 하지만 고집을 부리면서 회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목이 뻣뻣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왕 바로와 같이 되지 않도록 피차간에 매일 끊임없이 권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백성은 어떻습니까? 출애굽 후 40년 동안 광양생활을 하면서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찼습니다. 물론 불평할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광야생활은 불편했습니다. 풍족하지 않고 결핍이 있었습니다. 자유가 제약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구름기둥을 바라보며 살아야 했습니다.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천막을 거두고 떠나야 하는 불안정한 생활이었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음식메뉴도 단조로워서 매일 만나를 먹어야 했습니다. 세끼만이라도 똑같은 밥에 똑 같은 반찬을 주면 투정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40년 동안 삼시세끼 같은 메뉴를 먹어야한다면 우리 중에도 원망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해가 될 만합니다. 물론 특별메뉴로 메추라기 고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불평을 잠재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물이 없다고 불평하고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하는 10명의 정탐꾼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밤새도록 통곡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모세에게 집단으로 항의했습니다. 마음이 완고하게 되면 누구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도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과 원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피차 권면해야 합니다. 스스로도 말씀과 기도로 노력해야 하지만 매일 서로 권면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서로 관심과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지체들이므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활방식을 버리고 서로를 권면하고 돌보아야 할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의 아들 되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써서 교훈하였습니다. “내가 이를 때가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3) 여기서 ‘권하는 것’은 연약한 자들과 시험에 빠진 자들을 격려하고 선도하는 것으로 ‘권면하고 위로하는 일’을 뜻합니다.

성도는 말씀으로 권면하고 위로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권하는 일의 근거는 성경입니다. 목회자는 설교를 통해 권면하고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정죄하고 야단치는 것도 회개를 위해 때로는 필요하지만 권면하고 위로하는 사역을 통해 사람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현대인은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가정과 일터에서 지쳐 있습니다. 경쟁사회에서 긴장하며 살기에 위로와 평안이 필요합니다. 물론 지나친 위로와 격려가 나약한 신앙인으로 만들 위험이 있지만, 그래도 교회에는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안식처를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또한 믿음이 약한 사람이나 시험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에게는 말씀으로 권면하여 세워주고 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권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죄인들입니다. 죄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우리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우리의 약점을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예수님도 성령에 이끌려 시험을 받았습니다.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시험이 배고픔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40일 금식하신 후에 배가 고픈 것을 알고 마귀는 돌을 가지고 떡이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시험은 천하만국이 보이는 곳에 올라가 자기에게 절하라고 했습니다. 절하기만 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가 우리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사람, 물질, 이성, 욕심, 자존심, 명예 등으로 시험합니다. 마귀의 시험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교활한 마귀는 우리의 약한 부분을 알고 약점을 최대한 공격합니다. 내가 가진 약점이 마귀의 공격대상임을 알고 대비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였고 광야에서 예수님도 시험하였습니다. 마귀가 시험하지 않는 장소는 없습니다. 방심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우리를 시험합니다. 미움과 분열을 조장하고 아픔과 상처를 주어 죄를 짓게 하여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듭니다.

죄는 우리를 완고하게 합니다. 자기고집을 부리면서 회개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권면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습니다. 완고하게 되어 하나님께로 돌아서기를 거부합니다. 결국 실패와 멸망으로 끝나도록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자기를 살피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지는 않는지, 자기고집을 부리고 있지는 않는지, 하나님 앞에서 목이 뻣뻣하지는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자기를 모르면 남의 권면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유연한 마음으로 자기를 살피고 상대방의 권면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된 성도가 있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기도하며 권면해야 합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위로하고 신앙적인 격려가 필요하면 따뜻한 격려로 권면해야 합니다. 기도가 필요하면 지속적으로 위해서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매일 서로 권면할 때 모두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서로 권면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는  

3. 확신하는 자(14절)

(히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이란 ‘처음 믿음’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처음 받아들였을 때에 가졌던 ‘확고한 믿음’을 말합니다. 이런 처음 믿음이 죄의 유혹과 핍박 등으로 약화될 수 있으므로 끝까지 견고히 붙잡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공동 상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고한 믿음을 확실히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처음 믿음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은 약속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와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 큰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통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자녀의 권세까지 누리게 됩니다.

과거에 동아건설이 중동의 리비아에서 대수로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사하라 사막아래에 지름 4m, 길이 7.5m, 무게 75톤의 시멘트 송수관을 7m 아래에 매설하여 물을 공급하는 공사였습니다. 사막으로 보이지만 그 아래에 송수관을 통해 물이 흘러갔습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의 송수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모두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사막과 같은 삶의 현장 아래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송수관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송수관에서 은혜의 생수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믿음입니다.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생수를 모두가 마실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수도꼭지를 틀어야 마실 수 있습니다. 우물을 파거나 수원지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송수관을 통해 물이 수도관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단지 수도꼭지를 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은혜로 주어진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가장 단순한 믿음, 처음 믿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당시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버리고 다시 옛 생활로 되돌아가 율법을 의지하고자 하는 유혹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처음 믿음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 것은 배교를 막는 확실한 예방책이 되었습니다.

(예화)

마태복음 9장에 12년 동안 혈루증 앓는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상의 방법을 모두 동원해보았지만 낫지 못한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낫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군중들의 틈을 비집고 겉옷을 잡았습니다. 그 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 믿음이 여인의 병을 낫게 하였습니다.

‘끝까지’라는 단어는 개인적인 죽음과 그리스도의 재림 모두를 나타냅니다. 구원이 완성되는 때까지를 의미합니다. 처음 믿음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라톤에선 42.195㎞를 완주해야 우승할 수 있지, 100m를 남겨두고 포기해버리면 지금까지 1등 해온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지막 골인지점까지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야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예화)

1986년 열린 뉴욕 마라톤 대회 때 이야기입니다. 행사 당일 저녁, 대회조직위원회는 대회 종료를 선언했습니다. 4일 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아직도 달리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확인해 보니 월남전에서 두 다리를 잃은 보브 윌랜드라는 사람이 여전히 달리고 있었습니다. 두 팔꿈치에 가죽 보호대를 하고 두 팔로 힘들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기록은 108시간 17분 18초였습니다. 4일하고도 반나절이 넘는 시간이었다. 그는 기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인생은 어디서 출발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생을 어느 곳에서 끝마쳤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은 어디에서 출발했습니까?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로 서로 다른 출발선에서 출발했을지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같은 믿음을 가지고 같은 장소에 있습니다. 지나온 길을 다시 갈 수 없습니다. 이제 앞으로 어느 곳에서 끝마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이 땅을 살면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누리며 사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리고 인생의 종착지에서 활짝 웃으면서 맞이하실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에 참여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는 조심하는 자, 권면하는 자, 확신하는 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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