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은혜의 강물

하마사 2016. 10. 27. 13:40

본문: 겔 47:6~12

제목: 은혜의 강물

찬송: 309장, 304장

목표: 은혜의 강물에서 은혜를 누리며 살게 한다.

 

 

저는 여름휴가 때 물에서 놀기를 좋아합니다. 영월에 있는 서강, 주천강, 평창강 등 강원도에 있는 강들을 자주 찾습니다. 물놀이를 하거나 낚시를 하고 다슬기를 잡기도 합니다.

올해 여름에는 지은이와 함께 홍천에 있는 오션월드에 갔습니다. 구명조끼를 입고 파도풀장에서 신나게 놀았습니다. 2미터가 넘는 깊은 물에서도 자유롭게 수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인공파도가 밀려오면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면서 더욱 신이 났습니다.

물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우리 몸의 70%는 물로 되어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에 필요할 정도로 물은 아주 유익한 것입니다.

하지만 물이 사람에게 엄청난 피해를 줄 때도 있습니다. 얼마전 태풍 차바로 인해 제주, 부산 등 남부지역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제주지역의 피해액은 약 300억원을 넘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비바람을 몰고 와서 하천이 범람하고 도로가 끊어지고 농작물이 침수되는 등 많은 재산상의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물이 등장합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고 풍요와 번영, 그리고 회복과 생명을 주는 강물이 나옵니다. 이 강물을 은혜의 강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은혜의 강물이 흐르는 곳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행복한 변화, 기쁨의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은혜의 강물은

1. 성전강물입니다.(1절)

(겔 47: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에스겔이 본 환상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온 에스겔이 새성전에 대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이미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지만 하나님이 다시 세우실 성전을 보여주시면서 그 성전에서 강물이 흘러 온 땅을 적시고 주변을 풍요롭게 만드는 희망의 환상이었습니다.

성전 문지방 밑에서 스며 나온 물이 성전 동편으로 흐르면서 수심을 더하여 큰 강을 이루고 죽음의 바다까지 이르러 그곳을 소생시키며 많은 고기와 나무를 자라게 하여 사람들이 풍요와 기쁨을 누리게 되는 환상이었습니다. 이 환상은 37장에 나오는 마른 뼈가 살아나 큰 군대를 이루는 환상과 더불어 생동감 넘치고 희망찬 환상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는 천국환상을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생명수가 만국을 소성케 하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풍성케 하는 환상입니다. 절망에 사로잡힌 백성들에게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흘러나온 강물로 인해 놀라운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성전입니다.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떠나셨던 하나님께서 성전에 다시 임재하셨기에 생명수가 흘러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성전을 통해 우리는 변화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 사망가운데 있던 우리가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 영원한 생명을 누린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지적했듯이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케 할 수 없는 것처럼 악에 익숙한 우리는 결코 선한 것을 행할 수 없으며 불의와 거짓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셔서 광야와 사해와 같은 인생이 옥토와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축복된 인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런 은혜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런 은혜의 강물이 흘러나왔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은혜를 거부하고 우상을 섬기며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무시했습니다. 은혜의 강물을 거부하였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고갈되어 기갈이 찾아왔습니다. 결국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은혜가 사라진 생활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생활은 영적 기갈입니다. 성전에서 흐르는 영의 양식,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영혼이 시들고 병들어 영적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암 8: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양식과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육적으로 아무리 부유하고 풍요로워도 영적인 기갈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족이 없고 참된 기쁨과 행복을 맛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들려질 때 은혜와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 성전이 성전구실을 못하자 예수님은 안타까워하시며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야 할 성전에서 세상 이야기, 사람의 말이 들려지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시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끊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 성전답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시며 진노하셨습니다. 만민이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소통해야 할 성전이 장사하는 사람들의 이권 집합소가 된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야 할 성전이 은혜는 사라지고 시장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는 성전은 아름답고 화려한 건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지 않도록 보호하셨을 것입니다.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 군대가 처참하게 무너뜨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멈춘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면 더 이상 성전으로의 사명과 가치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야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보잘 것 없는 초라한 건물일지라도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는 곳이면 아름다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인이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요 2:19~21)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이 성전이십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그 곳이 어떤 곳이든 성전이지만 예수님이 떠나신 성전은 그냥 건물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튼튼한 성전이라도 예수님이 계시지 않고 은혜가 떠난 성전이라면 단지 건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의 강물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에서 흘러나옵니다. 유대민족의 죄악으로 인해 성전이 파괴되었지만 하나님은 다시 에스겔에게 새 성전의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성전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성전이었습니다. 다시 회복할 성전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나오는 성전이었습니다.

신약 시대에 성전은 예수님 자신 일뿐 아니라 우리가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성령이 계시는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계시면 생명과 평안을 주는 생각을 합니다. (롬 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우리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 되면 생명과 평안의 강물이 흘러 은혜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전이면 우리 속에서 은혜의 강물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나뿐 아니라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보내는 은혜의 수로가 되어야 합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성전은 오늘날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교회는 건축물에 불과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그 은혜를 흘려보내는 일을 감당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은혜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기에 은혜가 흘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의 강물은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성전강물입니다. 하나님이 내 속에 계셔서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보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나만 담아두지 않고 은혜가 필요한 곳으로 흘려보내는 은혜와 축복의 통로가 되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의 강물은

2. 자유강물입니다.(5절)

(겔 47:5) “다시 천 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성전 문지방에서 흐르는 물을 일천 척 곧 약 530m를 간격으로 하여 네 번 측량했습니다. 측량할 때마다 발목, 무릎, 허리까지 차고 나중에는 사람이 능히 건널 수 없는 큰 강이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시작된 물의 양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인생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죄악의 땅, 죽음의 땅으로 오셨습니다.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발목이나 무릎 깊이만한 은혜를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허리 깊이만큼만 은혜를 누리기도 합니다. 수영 못하는 사람은 발목이나 무릎, 허리정도 깊이의 물에서 놉니다. 뾰족한 돌이나 조개와 같은 것에 발바닥을 다칠 수도 있습니다. 물에서 놀면서도 장애물이 있습니다. 자유롭지 못합니다. 어린아이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신앙의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세상의 장애물에 걸려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도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막혀서 신앙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과 사랑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에 매이고, 염려와 걱정에 매이고, 세상 유혹에 넘어지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에 몸을 맡기지 못합니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물에 몸을 맡기고 자유를 만끽합니다. 제 동서는 어릴 때 물에빠져 죽다 살아난 경험이 있어서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여름에도 해수욕장이나 냇가에 가지 않습니다. 물에 발조차 담그려하지 않습니다. 물속에서 맛보는 자유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수영을 잘하거나 구명조끼를 입으면 깊은 물일수록 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거추장스런 장애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은혜의 강으로 들어가야 예수님 안에서 함께 헤엄치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은혜를 누립니다. 성령님이 이끄시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강물이 흘러 광야를 적시고 사해를 변화시켜 열매 맺는 옥토로 생명이 넘실거리는 풍부한 바다로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습니다.

(예화)

어느 수도원 원장이 수도원 마당에 커다란 원을 그려놓고 수도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저는 지금 마을을 다녀오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돌아왔을 때, 원 안에 있으면 오늘 하루 종일 굶어야만 합니다. 원 밖에 있으면 당장 수도원을 떠나야 합니다. 혹시 선 위에 서 있으면 하루 종일 맞을 것입니다.”  수도자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수도원을 나갈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원 안에 들어가 하루 종일 굶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요. 또 하루 종일 맞는 것도 견디기 힘드니까요. 그러면서 이런 문제를 낸 원장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우리에게 밥을 주기 싫어서 그런 것이라며 불평불만을 쏟아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한 수도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원을 과감하게 지웠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원이 없으니 원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원 밖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이 된 것이지요. 원이 없어지니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원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입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엡 2:14∼15) 우리를 온전히 자유하게 하신 분입니다.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죄의 원을 지우고, 인간세상의 낡은 굴레를 복음으로 새롭게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입니다. 들의 꽃처럼, 공중을 나는 새처럼 바람 따라 계절 따라 창조주의 은총을 만끽하며 사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본질이든 비본질이든 모든 것에는 사랑을” 멋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때로 본질적인 것에 불일치를 보이고, 비본질적인 것에 자유롭지 못하고 얽매여 살아갑니다. 본질이든 비본질이든 모든 것에는 사랑을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예화)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성전으로 돌아오시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율법에는 돌로 치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올무에 걸기위한 질문을 합니다.

처벌을 멈추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셈이 될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로마 사람들에게 반대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형의 판결권과 집행권은 로마 사람들에게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하신 행동이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신 후에 일어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님과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일어나 묻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여자가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그때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씀은 여인에게 자유를 준 말씀입니다. 그리고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의식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의 비중은 앞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 안에 거하면 자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유로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속박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말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들을 자유롭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속박할 뿐만 아니라 남들까지 속박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성경을 많이 알고 연구했으며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모두 613개 조항으로 구분했고 그 중에서도 248개 조항은 지켜야 할 중요한 것으로, 나머지 365개 조항은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분류했습니다. 율법을 분류한 것은 613개나 되는 조항을 전부 다 지킨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차선책으로 율법을 중요도에 따라 분류하여 중요한 조항만이라도 반드시 지키도록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은 추수와 타작에 해당해 안식일을 범한 것이라고 질책했습니다. 또한 안식일에는 병을 고치는 것, 즉 의료 행위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이라고 해서 이삭을 조금 잘라 먹은 것을 추수와 타작이라 부르거나, 눈앞의 아픈 사람을 치료하지 않는 행위는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계명의 원래 의도는 선하더라도 의식에만 얽매이면 결국 화석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질병을 고치고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회복과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오히려 귀신들렸다고 하며 훼방했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마 23:4) 하셨습니다. 또한 (마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노예가 되게 하고 짐을 지우는 일을 했습니다. 또한 “천국 문을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하시면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질책하셨습니다. 이 땅에 복음으로 자유를 주시러 오신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면서 오히려 율법으로 사람들을 속박하려는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과거에 매이고 죄에 매이고 율법에 매여 산다면 아직도 발목은혜, 무릎은혜, 허리은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강물에 잠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율법에 매이지 않습니다. 이미 율법을 초월하신 주님의 자유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십니다. 요 8:31-32에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자유를 누리는 신앙인입니다. 진리되신 예수님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유롭습니다. 성경을 많이 공부하고 알수록 자유로워야 합니다. 자유로운 사람이 상대방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과 속박가운데 있는 여인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자유를 주신 주님을 본받아 우리들도 주님 안에서 자유하고 상대방도 자유롭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은혜의 강물에서 자유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자유와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율법에 매여 하나님의 자유를 가두려고 합니다. 자유와 방종은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지 오해하여 방종에 빠지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의 강물은 자유의 강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 누릴수록 자유와 기쁨이 있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강물에서 거칠 것 없이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의 강물은

3. 생명강물입니다.(9절, 12절)

(겔 47: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겔 47: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은 계속 흘러 마침내 바다에 이르게 되었는데 죽음의 바다인 사해가 물고기들이 풍족한 바다로 변해 주변에 어촌을 형성하고 이 물이 닫는 강가는 옥토로 변하여 각종 과일나무가 자라서 많은 실과를 달마다 맺고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는 환상이었습니다.

강물이 죽은 바다를 어족 자원이 풍성한 살아있는 바다로 바꾸는 일차적인 자연현상의 변화뿐 아니라 살아난 바다에 어촌이 형성되고 어부들이 많은 고기로 말미암아 풍요롭게 살아가는 이차적인 사회적 변화까지 일으키는 사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강물이 강의 좌우편에 자리한 나무들에 잎과 나무들이 풍성하게 자라는 일차적인 자연현상의 변화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회복된 백성들이 그 나무의 열매를 식용으로 사용하고 그 나무의 잎을 약재로 사용하여 굶주리지 않고 병들지 않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이차적인 사회적 변화까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소에서 흘러나온 물은 인간의 죄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으로 피폐해졌던 자연현상을 회복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풍요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키실 때에 먼저 하나님과 교제할 성전을 지으시고 죽은 바다와 황폐해진 땅에 풍성한 어족자원과 나무들을 자라게 하신 뒤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자연 안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도록 하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강물은 생명을 살리는 강물입니다. 치유하는 강물입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죽은 땅을 살리고 죽은 바다를 살렸습니다. 어부들의 삶의 터전을 회복시켰습니다. 강이 흐르는 좌우 가에는 과실나무에서 열매가 맺히고 잎사귀는 치유하는 약재료가 되었습니다. 풍요와 회복을 주는 생명의 강물입니다.

생명이 얼마나 귀합니까? 세상에서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제 차 뒤에 ‘돈보다 생명입니다’ 라는 문구가 적힌 스티커가 있습니다. 돈이 생명보다 앞서는 물질만능주의시대에 살고 있지만 성경은 생명이 가장 귀하다고 말씀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리 값비싼 보석이라도 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단 한번 밖에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영생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모든 생명체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입니다. 모든 좋은 것을 가진다 해도 생명을 잃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사랑하십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자기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구원하여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생명에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습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을 때 장례행렬은 기쁨의 행렬이 되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을 때도, 백부장의 어린 딸이 살아났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행하시고 그 일에 협력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일입니다. 생명 살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하여 죄인이 의인되고 사망에서 영생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생명 살리는 일을 하듯이 우리도 생명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죄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억압과 속박, 가난과 고통, 실패와 소외감으로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강물 같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은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성전강물입니다. 죄의식과 속박에서 자유를 주는 자유강물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생명강물입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에서 자유와 생명을 누리며 그 은혜를 나누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갈릴리에서  (0) 2017.02.10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  (0) 2017.02.10
마음을 비웁시다  (0) 2016.01.28
풍성한 교회  (0) 2016.01.02
끝에서 만나는 하나님  (0) 2015.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