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상담

화 못 참는 한국인

하마사 2015. 10. 1. 10:22

'분노 호르몬'이 확 쏟아져 15초만에 최고 농도에 달해

의학적으로 분노 폭발은
분노 폭발 상태에서는 논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전두엽' 기능이 순간적으로 마비된다. 통합적인 조절을 통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뇌의 기능이 순간적으로 멈추는 것이다. 이때는 만취한 사람처럼 이성적인 설득이나 타협이 도저히 불가능하다. 화가 치밀어 오른 사람은 호흡이 빨라져 가쁜 숨을 몰아쉬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근육이 경직된다. 아드레날린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이 확 쏟아져 나와 15초 만에 최고 농도에 달하면서 분노가 폭발하는 상태다.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신영철 교수는 "이런 상태면 짧게는 30초에서 길게는 3분 정도 전두엽이 작동을 멈춘다"면서 "자신의 행동이 미칠 결과나 파장을 예측하거나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이성적 설득도 먹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간의 뇌 기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호흡·소화 배설 등 생존에 꼭 필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생존 중추(뇌간·소뇌)와 감정과 공격성, 성적 본능 등을 관장하는 감정 중추(변연계·기저핵), 그리고 논리와 판단 등 고차원적인 사고를 담당하는 고위 중추(전두엽을 비롯한 대뇌피질)다. 신 교수는 "감정 중추와 고위 중추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뤄야 분노 조절이 가능한데, 전두엽 기능이 순간적으로 마비되면 분노가 제어되지 않고 충동적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말했다.

다른 정신과적 질환 없이 이처럼 충동 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병적으로 반복되면 '충동조절장애'다. 이 가운데 공격성 충동이 억제되지 않아 심한 폭력이나 파괴적 행동이 발생하고, 이 때문에 가정·사회 생활에서 심각한 문제를 겪는 경우를 의학계에서는 '간헐적 폭발성 장애'로 본다. 상계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동우 교수는 "우리 주변의 '욱하는' 사람들이 모두 환자는 아니다"며 "성장 과정에서 감정을 다스리고 타인과 타협하는 교육이 부족한 데다, 지나치게 성취 지향적인 사회가 쉽게 열등감을 만들기 때문에 잦은 분노 폭발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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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것에 과도한 '폭발'

-젊은 남성들에게 뚜렷
분노조절 장애 증상 환자 중 20代가 28%, 30代가 18%
-누구나 피해자될 수 있어 심각
"홧김에 저질렀다"며 우발적 분노폭발 범죄 증가

서울시민의 민원을 접수하는 다산콜센터에 20대 여성이 전화를 걸었다. 민원인은 사는 곳에 소음이 심하다며 이미 신고를 한 바 있다. 그런데 전화 연결 상태가 좋지 않아 대화가 다소 어긋나자 이 여성은 "전화 응대를 그딴 식으로밖에 못 하느냐"며 다짜고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상담원이 "신고했던 번호가 어떻게 되는지요? 내용을 확인해보겠습니다"라고 하자, 민원인은 "장난해 지금?"이라며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민원 신고 넣은 지 얼마 안 돼 접수 이력이 조회되지 않는 상황이어서 서로 오해가 생긴 것이다. 상담원이 "지금 전화한 번호로는 신고 이력이 조회되지 않는다"고 하자, 민원인은 "무슨 개소리하고 자빠졌어, 지금 내가 또 얘기해야 돼? 병신아" 하며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과 폭언을 쏟아냈다.

지난 6월 서울 상봉역 인근에서 한 남성이 불법주차했다가 구청의 주차 단속에 걸렸다. 이 남성은 주차 단속하는 부서에 전화를 걸려다 번호를 잘못 눌러서 전화가 메르스 전담 상담원에게 넘어갔다. 상담원이 "메르스에 대한 문의냐"고 묻자, 다짜고짜 "야 이 X년아, 사람 돌게 하네, 이 X년아 메르스가 왜 나오냐"라고 욕설을 하며 분노를 폭발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갈등이나 불만 표출 상황 수준과 어울리지 않는 과도한 분노 폭발 사례가 잦다. 한국인 상당수가 마치 '쇼트 퓨즈'(폭탄과 연결된 전선이 짧아 불을 붙이면 금세 터지는 폭탄)인 것처럼 지내는 모양새다.

이런 경향은 특히 젊은 남성들에게 뚜렷하다. 의학적 질병 분류에 분노 조절 장애는 없다. 과도한 분노 폭발은 간헐적 폭발성 행동 장애로 분류돼 행동 장애 범주에 속한다. 그런 인격 장애나 행동 장애로 진단된 환자의 나이 분포를 보면, 2014년 기준으로 20대는 전체의 28%로 가장 많다. 30대 18%, 10대 17% 순이다.

우발적 분노 폭발은 범죄로 이어져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점이 문제다. 지난 5월 20대 남성 최모씨는 자신의 차를 몰고 서울 마포구 공덕오거리 방향으로 가던 중 택시기사 조모씨가 갑자기 끼어들었다는 이유로 상향등을 켜고 경적을 계속 울리며 300m가량 뒤쫓아갔다. 자칫 대형 교통사고로 이어질 분노 폭발이었다. 그래도 분을 이기지 못한 최씨는 28㎝ 길이의 BB탄 총을 꺼내 다섯 발을 택시 운전기사에게 발사했고 그중 한 발이 왼쪽 얼굴에 맞았다.

지난 8월에는 아르바이트하던 PC방에서 해고됐다며 주택가에 불을 지른 박모(19)군이 방화와 재물손괴 혐의로 구속됐다. 박군은 용산구 효창동 주택가 골목 약 50m를 돌며 골목에 놓인 쓰레기봉투에 불을 붙이는 수법으로 3차례에 걸쳐 연속으로 방화했다. 박군은 경찰에 "범행 전날 저녁부터 친구들과 술을 마셨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가다 나를 해고한 PC방 관리자가 생각나 홧김에 불을 질렀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네이버 검색 창에서 '홧김에'라는 단어를 치면 이런 각종 우발적 분노 폭발 범죄 사례가 줄줄이 쏟아진다.

서남의대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현수 교수는 "분노를 폭발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문제"라며 "불만과 갈등 조절 기능이 약한 한국 사회가 점점 사소한 것에도 분노 폭발을 하는 분위기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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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석 연휴인 29일 밤 9시쯤 울산시 남구 장생포항에 정박 중인 8t 규모의 연안 통발 어선 명준호 조타실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 배에서 일했던 선원 성모(32)씨가 "추석 떡값이 적다"며 홧김에 불을 지른 것이다. 화재는 119 소방대에 의해 20분 만에 꺼졌다. 조타실이 전소하고 갑판 일부도 타서 1억원 상당의 재산 피해가 났다. 성씨는 방화 직후 주변을 서성거리다 해경에 잡혔다. 너무나 어설픈 순간적 우발 범죄였다. 성씨는 노동 강도가 센 것에 대해 선장에게 불만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추석 보너스까지 넉넉하게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술을 마신 상태였다. 해경은 "성씨가 추석 보너스로 50만~100만원을 요구했는데, 선장이 10만원만 줘서 모멸감을 느낀 것 같다"고 전했다.

이 사건은 전형적인 한국형 분노 폭발 범죄다. ①평소 불만 ②음주 상태 ③모멸감 등 삼박자가 겹치면서 분노 폭발이 범죄로 이어진 것이다. 정신의학 전문가들은 그 배경으로 ▲경제 양극화와 경쟁 과잉 사회 분위기에서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상대적 박탈감 ▲화가 나면 술부터 찾는 음주에 관대한 한국 문화 ▲자기가 무시당했다고 느끼는 멸시감과 열등감을 유난히 못 참는 국민 성향 등을 꼽는다.

이런 맥락 때문에 작은 갈등에도 분노가 폭발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벌어진다. 지난해 지나친 공격성이나 의심, 병적 방화·도박 등 인격 장애나 행동 장애로 진료를 받은 사람은 1만3000여명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2배 많은 상황에서 특히 20대 남성 진료 인원은 최근 5년 동안 계속 증가하고 있다.

 

-조선일보, 2015/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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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 중독'은 정신 질환
신경호르몬 분비 이상이 원인, 치료 않을 땐 재발 가능성 커

- 한국인 '홧김 자살' 많아
분노 조절 장애 치료하면 사회범죄·자살 줄일 수 있어
"정신건강 컨트롤타워 세워 국민 힐링 시스템 짜야"

 

올해 초 30세 남자가 여자친구의 옷에 휘발유를 뿌리고 라이터를 켜서 협박하다가 경찰에 잡혔다. 두 달가량 사귀던 여자친구로부터 헤어지자는 말을 듣고 관계 회복을 위해 설득하던 중에 벌어진 일이다. 그는 여자친구가 "나보고 어쩌라고!" 식으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화를 돋워 열을 받아 저질렀다고 경찰에게 말했다. 갈등 수준보다 과도하게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분노 폭발이다. 이런 행동이 이 남자에게는 처음이 아니다. 그는 운전 중 접촉 사고가 났을 때 사고 운전자와 멱살잡이를 하며 한 판 붙어 입건된 적이 있고, 술집에서 종업원과 시비가 붙어 폭행으로 처벌받기도 했다. 매사 충동적이고 공격적이다. 전형적인 간헐성 폭발성 행동 장애다. 경찰청에서 충동 조절 실패에 따른 '이상 범죄' 유형으로 꼽힌 사례다.

일종의 정신 질환으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재발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분노 조절 장애와 연관된 범죄자에게 치료 프로그램 이수 명령제도가 운용되지 않고 있다. 서남의대 명지병원 김현수 정신의학과장은 "알코올 중독이나 성범죄는 질병으로 보기에 치료 프로그램이 운용된다"며 "반복적인 분노 조절 장애는 단순히 욱하는 성향을 넘어 질병으로 인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신의학계에서는 반복적 분노 폭발이나 인격·행동 장애는 뇌 속 신경호르몬 분비 이상으로 남들보다 충동을 억제하는 능력이 생리학적 원인으로 적을 수 있기에 의학적 진단과 치료를 권한다.

분노 조절 장애 자가테스트 표
더욱이 조급함, 욱함, 예민 반응, 피해의식 등과 관련된 불안장애 환자는 지난해 50만2000명에 이른다(건강보험심사평가원). 이는 2010년 41만9000여 명에 비해 10만명가량 늘어난 수치다. 이런 배경에는 과도한 생존경쟁, 상대적 박탈감, 과잉보호, 공감 능력 키우는 교육 부족, 자극적인 게임, 드라마나 영화 속 폭력 장면 만연 등이 꼽힌다.

분노가 밖으로 향하면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지지만, 분노가 자기에게 향하면 자살로 이어진다. 그런 면에서 분노 폭발과 자살은 한 통속이다. 지난 4월 충북지방경찰청 고속도로순찰대는 부부싸움 뒤 홧김에 부인과 100일 된 아들을 강제로 차에 태우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30대 남성을 구조했다. 남편(33)은 부인(31)과 밤새 다투고 아침에 목숨을 끊겠다며 모자를 강제로 차에 태우고 나서 집을 나섰다. 딸에게 이 같은 상황을 전해 들은 친정아버지의 신고로 동반 자살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처럼 한국인은 자살도 충동적으로 홧김에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연구진이 전국 8개 대학병원을 대상으로 1년 동안 자살 시도로 응급실에 실려온 1805명의 환자를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일일이 면담하고 자살 시도 당시 정황과 주변인을 조사한 결과, 전체 자살의 78.5%가 충동적으로 이뤄졌다. 통상 미국·유럽 기준으로 쓰인 정신의학 교과서에는 자살의 70~80%가 미리 장소와 날짜, 방법 등을 생각한 계획 자살이다. 하지만 한국인은 반대로 홧김 자살, 충동 자살이 훨씬 더 많다. 이 때문에 서구인은 우울증이 자살 원인의 3분의 2 정도인데, 한국인은 3분의 1이다. 이는 한국인의 분노 조절과 관리가 사회 갈등과 묻지마 범죄도 줄이고, 자살률도 낮출 수 있다는 의미다. 자살예방협회 안용민(서울대 의대) 회장은 "이제는 개인 차원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국가 주도 정신건강 컨트롤타워를 세워서 한국인에게 맞는 국민 힐링 시스템을 짜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015/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