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은 중년의 사랑을 그린 로맨틱 코미디다. 희끗한 머리, 눈가에 주름 자글한 여성 작가를 연기한 다이앤 키튼은 쉰일곱이었다. 젊고 잘생긴 키아누 리브스가 어머니뻘 키튼에게 "당신은 정말 섹시해요"라고 고백할 때 나이 든 여자들 가슴이 달아올랐다. 다 늙어 사랑에 빠진 자기가 믿기지 않아 미친 듯 울고 웃는 장면이 백미다. 영화에서뿐 아니다. 키튼은 나이 예순에 '로레알 파리' 모델이 됐다. '인공 아닌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덕분이다.
▶키튼은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다. 에바 가드너, 리즈 테일러 같은 절세미인만 각광받던 할리우드에서 오로지 연기로 승부를 걸어야 했다. 인형 같은 얼굴, 풍만한 가슴 대신 쿨하고 중성적인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갔다. 유머러스하고 지적인 키튼의 매력은 나이 들면서 빛을 봤다. 예순아홉인 지금도 로맨스극에 출연 제의를 받는다니, 메이크업계 대모 보비 브라운 말대로 "여성의 아름다움은 육감적 몸매에서만 나오는 게 아닌" 모양이다.
▶물론 거울 속 주름을 바라보는 여인의 마음이 즐거울 리 없다. 뭉개진 턱선, 성긴 머리숱, 팔뚝에 피어오른 검버섯에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한두 번인가. 그렇다고 나이를 거꾸로 먹는 여자가 예뻐 보이진 않는다. 목덜미는 쭈글쭈글한데 보톡스 맞아 양볼만 통통히 살 오른 중년들이 어색한 건, 나이에 걸맞은 아름다움이 따로 있다는 걸 뜻한다. 50대 배우 차화연이 20 대 수지보다 훨씬 그윽하고 섹시하지 않던가.
▶그런 점에서 전 휼렛패커드 CEO 칼리 피오리나는 지혜로웠다.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로 나선 도널드 트럼프가 그녀를 향해 "누가 저 얼굴에 투표하고 싶겠냐" 막말했지만 예순한 살 여장부는 느긋하게 응수했다. "내가 살아온 한 해 한 해와 모든 주름이 자랑스럽다." 지지율은 치솟았고 뉴욕타임스는 "트럼프와 맞설 당내 유일한 대항마로 떠올랐다"고 했다. 여자와 싸우다 말문이 막히면 주먹부터 내밀거나 "늙고 못생긴 게 입만 살아서"로 시작하는 마초들 못된 버릇을 한 방에 날린 셈이다.
▶은퇴한 어느 이탈리아 여배우가 사진관에 갔단다. 카메라 앞에서 그녀가 사진사에게 조용히 부탁했다. "절대 내 주름살을 지우거나 수정하지 마세요." 당황한 사진사에게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걸 얻는 데 평생 걸렸거든요." 그러고 보면 멋지게 나이 든 여성들이 공통으로 지닌 비장의 무기는 따로 있었다. 유머와 너그러움, 그리고 자신감. 나이 일흔에도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5/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