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예화

茶山 '하피첩'

하마사 2015. 9. 17. 13:37
고미술계에는 세상에서 영영 사라질 뻔한 문화재가 기적같이 구출된 이야기들이 전한다. 간송미술관 겸재(謙齋) 화첩이 그렇다. 1934년 무렵 한 골동상이 용인의 세도가 별장에 묵었다. 사랑방 아궁이 앞에 종이뭉치가 쌓여 있었다. 골동상은 비단으로 꾸민 책자 하나를 발견하고 아찔했다. 화성(畵聖) 정선이 금강산을 여행하고 그린 작품을 모은 화첩이었다. 골동상은 "어차피 불쏘시개 할 거니 내게 파시오" 했다. 값은 20원. 쌀 한 가마니가 15원 할 때였다. 화첩은 몇 배 거액에 문화재 수집가 전형필한테로 갔다.

▶요즘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2005년 수원 어느 모텔 주인이 건물을 고치려고 실내에 있던 파지(破紙)들을 마당에 내놓았다. 폐품 모으는 할머니가 지나가다 달라고 했다. 주인은 할머니 수레에 있던 이상한 책자에 눈이 갔다. 그는 책자와 파지를 맞바꿨다. 그러곤 혹시나 싶어 KBS '진품명품'에 내놓았다. 감정위원인 고미술 전문가 김영복은 책을 본 순간 "덜덜 떨렸다"고 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霞帔帖)'이었다. '진품명품'은 감정가 1억원을 매겼다.

[만물상] 茶山 '하피첩'

 

▶다산 '하피첩'이 그제 서울옥션 경매에서 7억5000만원을 받고 국립민속박물관에 팔렸다고 한다. 이 유물은 개인 수집가 손에 들어갔다가 2011년 부산저축은행 사건 때 압류되는 운명에 처했다. '하피'는 옛날 예복의 하나다. '붉은 노을빛 치마'란 뜻이 담겼다.

▶다산은 천주교를 믿었던 죄로 1801년 마흔 나이에 전남 강진으로 귀양을 갔다. 경기도 양수리 마재에 남았던 아내 홍씨는 남편 귀양 10년째 되는 해 자기가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를 남편에게 보냈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 홀로 떨어져 고생하는 남편을 애틋해하는 마음을 신혼 시절 색 바랜 다홍치마에 담았다. 그 치마에 다산이 아들 둘에게 주는 당부의 말을 쓰고 이를 재단해 책자처럼 만든 것이 '하피첩'이다. 다산은 치마 한 조각을 남겨 매화와 새를 그린 족자를 만들어 시집가는 딸에게도 주었다.

▶"부지런함(勤)과 검소함(儉),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 나은 것이니 한평생 써도 닳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 치마에 아버지가 따뜻한 사랑을 담아 쓴 글씨, 세상에서 이보다 값진 보물이 있을까. 19년 유배에서 돌아온 다산은 새색시를 맞은 지 꼭 60년 되는 날, 일흔다섯 나이에 아내 곁에서 눈을 감았다. 아내도 2년 뒤 남편 뒤를 따랐다. 국립박물관에 자리를 잡았으니 이제 다산 부부의 애절한 사랑을 담은 '하피첩'이 세상을 떠도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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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만물상, 2015/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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