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서거 50주기] [1]下野 후 하와이에서 보낸 마지막 5년 2개월
옷 등 넣은 가방 4개만 들고 2~3주 쉴 생각에 하와이行
교민들이 생활비 보탰지만 독립운동 시절만큼 곤궁
정부 不許로 귀국 좌절되자 급격히 건강 나빠져 입원
병실 창문 밖 태평양 보며 "저쪽이 우리 韓人들 사는 곳"
이승만이 윌버트 최에게 이화장 소유권을 넘긴다는 위임장을 써준 때는 1962년 9월 11일. 하야 후 하와이에 온 지 2년 3개월이 지난 때였다. 하와이 생활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다. 1960년 5월 29일 서울을 떠날 때는 그저 2~3주 쉬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다. 부인 프란체스카(1900~1992) 여사가 "쉬고 오는 게 좋겠다"고 권했다. 짐이라곤 옷가지가 든 트렁크 2개, 평소 쓰던 타자기와 약품 등을 넣은 가방 2개가 전부였다. 여러 차례 돌아가려 했지만 한국 정부가 귀국을 막았다. 언제 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생활비를 대주는 윌버트 최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아버지는 순수한 마음에서 이승만 박사를 도왔습니다. 위임장 얘기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들은 적이 없어요." 윌버트 최의 아들 세드릭 최(67)씨는 지난 15일(현지 시각) 하와이 마키키 스트리트 2033번지 목조 주택 앞에서 "이곳이 이 박사 내외가 살던 집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한두 번 온 적이 있다"며 회상에 젖었다. 호놀룰루공항에서 H1 도로를 타고 남동쪽 시내 방향으로 20분 거리에 있다. 한적한 주택가 언덕에 있는 집은 한쪽에서 보면 단층, 다른 쪽에서 보면 2층 집이다.
이민 2세인 윌버트 최는 조경업으로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는 이승만이 하와이에 올 수 있도록 항공편도 마련했다. 1960년 5월 마지막 주 어느 날 밤이었다. 전화 벨이 울렸다. 이승만이었다. 하와이에서 잠시 머물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윌버트 최는 미국 민간 항공사 팬암(Pan Am) 하와이 지점장인 어니스트 올브라이트(Ernest Albright)에게 연락해 괌에 있는 CAT항공 DC-4 여객기를 서울 김포공항으로 가도록 주선했다. 하와이 동지회장 최백렬 등 교민들과 함께 비용을 마련했다.
이민 2세인 윌버트 최는 조경업으로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는 이승만이 하와이에 올 수 있도록 항공편도 마련했다. 1960년 5월 마지막 주 어느 날 밤이었다. 전화 벨이 울렸다. 이승만이었다. 하와이에서 잠시 머물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윌버트 최는 미국 민간 항공사 팬암(Pan Am) 하와이 지점장인 어니스트 올브라이트(Ernest Albright)에게 연락해 괌에 있는 CAT항공 DC-4 여객기를 서울 김포공항으로 가도록 주선했다. 하와이 동지회장 최백렬 등 교민들과 함께 비용을 마련했다.
이승만 내외는 당초 오아후섬 동북부 카할루 지역 미오미오 루프 47-259번지 윌버트 최의 바닷가 별장에 머물렀다. 16일 찾아간 집은 지금도 50여년 전 모습과 같았다. 정문에서 벨을 눌렀다. 한 미국인 남성이 문을 열었다. "플로리다에서 왔다"는 그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예약하고 며칠 휴가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여행객 상대 임대주택이 된 셈이다. 양해를 구하고 집에 들어서니 미국 방향 태평양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승만은 이 집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주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외신은 "이승만 박사는 기자들의 방문을 사절하고 바다를 바라보기만 했다"고 전했다.
마키키 주택으로 옮긴 때는 여섯 달 후인 1960년 12월이었다. 바닷가 별장은 시내에서 너무 멀었다. 직접 자동차로 달려보니 약 40분 거리. H1과 리케리케 고속도로를 지나 병풍처럼 생긴 높은 산을 넘어야 갈 수 있다. 매주 시내에 있는 교회(한인기독교회)에 나가기도 쉽지 않았다. 하와이 체류가 예기치 않게 길어지자 가까운 곳으로 옮긴 것이다. 마당 화초에 물을 주고 나무 손질을 하거나 집 부엌에서 10m쯤 떨어진 방까지 10차례 왕복운동을 하는 생활이 대부분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생전 회고록에서 '우리 생활은 단조로웠다. 나는 워싱턴에서의 독립운동 시절과 같이 살림을 꾸려 나갔다. 우리는 이런 생활이나마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썼다. 하와이 교민 단체인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숭모회' 김창원(87) 회장은 "마키키 집에 가끔 인사드리러 가면 프란체스카 여사가 과일가루를 물에 탄 주스와 오레오 과자 몇 개를 내주셨다. 모두 싼 것들이었다. 부부의 살림이 무척 곤궁했다"고 회고했다. 이승만은 "고국으로 돌아갈 여비를 마련해야 한다'며 5달러 이발비도 아꼈다.
이승만은 늘 고국에 돌아가려고 했다. "내가 한국 땅을 밟고 죽기가 소원인데…,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해"라며 눈시울을 붉힌 때도 있었다. "걸어서라도 가겠다"며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서기도 했다. 귀국 기회도 있었다. 1962년 3월 17일 비행기 티켓을 마련해 한국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우리 서울에서 만나세." 전날 교민들과 작별 인사도 나눴다. 그러나 출발 당일 오전 9시 30분 정부 훈령을 받은 김세원 하와이 총영사가 마키키 집에 와서 귀국 불허 방침을 전했다. 이승만은 조용히 듣더니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내가 가는 것이 나라를 위해 나쁘다면 내가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참아야지. 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잘 하기 바라오…."
이승만은 귀국이 좌절된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그날 저녁 트리플러 육군병원에 입원했다가 3월 29일 마우나라니 요양 병원으로 옮긴다. 마우나라니병원 측은 이승만을 무료로 모시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1950년 개원한 마우나라니병원은 그때 모습 그대로 있다. 한국에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 했던 이승만은 이곳 202호실에서 마지막 날을 맞는다. 1965년 7월 19일 0시 35분(한국 시각 오후 7시 35분)이었다. 병실에서 창밖을 보니 한국 방향 태평양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승만은 생전 바다를 가리키며 "저쪽이 서편이야. 바로 저쪽이 우리 한인(韓人)들이 사는 데야"라며 고국을 그리워했다.
마키키 주택으로 옮긴 때는 여섯 달 후인 1960년 12월이었다. 바닷가 별장은 시내에서 너무 멀었다. 직접 자동차로 달려보니 약 40분 거리. H1과 리케리케 고속도로를 지나 병풍처럼 생긴 높은 산을 넘어야 갈 수 있다. 매주 시내에 있는 교회(한인기독교회)에 나가기도 쉽지 않았다. 하와이 체류가 예기치 않게 길어지자 가까운 곳으로 옮긴 것이다. 마당 화초에 물을 주고 나무 손질을 하거나 집 부엌에서 10m쯤 떨어진 방까지 10차례 왕복운동을 하는 생활이 대부분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생전 회고록에서 '우리 생활은 단조로웠다. 나는 워싱턴에서의 독립운동 시절과 같이 살림을 꾸려 나갔다. 우리는 이런 생활이나마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썼다. 하와이 교민 단체인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숭모회' 김창원(87) 회장은 "마키키 집에 가끔 인사드리러 가면 프란체스카 여사가 과일가루를 물에 탄 주스와 오레오 과자 몇 개를 내주셨다. 모두 싼 것들이었다. 부부의 살림이 무척 곤궁했다"고 회고했다. 이승만은 "고국으로 돌아갈 여비를 마련해야 한다'며 5달러 이발비도 아꼈다.
이승만은 늘 고국에 돌아가려고 했다. "내가 한국 땅을 밟고 죽기가 소원인데…,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해"라며 눈시울을 붉힌 때도 있었다. "걸어서라도 가겠다"며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서기도 했다. 귀국 기회도 있었다. 1962년 3월 17일 비행기 티켓을 마련해 한국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우리 서울에서 만나세." 전날 교민들과 작별 인사도 나눴다. 그러나 출발 당일 오전 9시 30분 정부 훈령을 받은 김세원 하와이 총영사가 마키키 집에 와서 귀국 불허 방침을 전했다. 이승만은 조용히 듣더니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내가 가는 것이 나라를 위해 나쁘다면 내가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참아야지. 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잘 하기 바라오…."
이승만은 귀국이 좌절된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그날 저녁 트리플러 육군병원에 입원했다가 3월 29일 마우나라니 요양 병원으로 옮긴다. 마우나라니병원 측은 이승만을 무료로 모시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1950년 개원한 마우나라니병원은 그때 모습 그대로 있다. 한국에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 했던 이승만은 이곳 202호실에서 마지막 날을 맞는다. 1965년 7월 19일 0시 35분(한국 시각 오후 7시 35분)이었다. 병실에서 창밖을 보니 한국 방향 태평양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승만은 생전 바다를 가리키며 "저쪽이 서편이야. 바로 저쪽이 우리 한인(韓人)들이 사는 데야"라며 고국을 그리워했다.
-조선일보, 2015/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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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建國대통령 서거 50주기]
양자 이인수 박사 인터뷰
"아버님은 식사 전 늘 기도를 하셨어요.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제는 심신이 허약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축복해주소서'라고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84·전 명지대 교수·사진)씨는 50여년 전 일을 똑똑히 기억했다. 이씨는 1960년 11월 전주 이씨 대종회에서 이 대통령의 양자로 선택된 후 모두 세 차례 하와이를 찾아 아버지를 모셨다. 1960년 12월 13일부터 이듬해 3월 17일, 1964년 1월 28일부터 4월 2일, 다시 1965년 7월 4일 마우나라니 요양 병원으로 가서 7월 19일 임종을 지켰다.
이승만은 아들을 만나 한국의 근황을 물었다. 4·19때 희생된 학생들에 대해서는 "학생들이 장하다"고 말하곤 했다. "내가 맞을 총알을 그 아이들이 대신 맞았어"라고도 했다.
이씨는 이 전 대통령이 생전에 남긴 '유언'을 소개했다.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으니 굳게 서서 다시는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내용이다. "아버님은 '이 말이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이야. 반드시 자유를 지켜야 해'라고 하셨어요." 이 말은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옆에 1985년 세운 이승만 동상에 새겨져 있다.
이씨는 지금도 반(反)이승만 시대가 지속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최근 KBS에서 근거도 없이 아버님이 6·25전쟁 때 일본에 망명하려 했다고 보도했어요. 이승만을 폄훼하려는 의도일 뿐입니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대통령을 이렇게 짓밟고서 우리나라가 어디로 가려는지 가슴이 아픕니다." 이씨는 "현재 대한민국을 떠받치는 근간인 자유민주주의와 한·미 동맹은 이승만 대통령이 만든 것"이라며 "지금 우리가 '이승만 체제'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정당히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015/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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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훈 기파랑 대표 펴내
美 김남수 목사, 2만부 구입… 도서관·교회 등에 돌리기로
"United we stand, divided we fall(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1945년 10월 17일, 환국(還國) 환영회에 나선 이승만이 5만 군중 앞에서 강조한 대동단결의 연설 내용이 입으로 전해지면서 이 유명한 구호가 탄생했다. 도서출판 기파랑이 최근 출간한 영문 서적 'SYNGMAN RHEE: The Founding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이승만: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사진)'에 나오는 내용이다.
뉴욕 프라미스교회 김남수 담임목사는 다음 달 15일 현지에서 개최하는 광복 70주년 기념식에 앞서 이 책 2만부를 구입하기로 했다. 미주 지역 도서관과 교회, 상하원 의원, 주지사 등에게 돌려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의 진면목을 알리겠다는 것이다.
'SYNGMAN RHEE'는 올해 초 국내 청소년용으로 발간된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생애'를 재미교포 크리스 최가 영역한 것이다. 한국어판 원서를 쓰고 '편자(編者)'로 이름을 올린 사람은 언론인이자 출판인인 안병훈 기파랑 대표다. 안 대표는 평소 ▲우리 젊은 세대가 과연 자신이 태어나 자란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의도적인 편견이나 곡해가 빚어 올린 비뚤어진 역사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는 "좌(左)편향 교과서가 판을 치는 우리 교육 현장을 보고 '대한민국 현대사의 궤적을 올바르게 훑는 교본을 만들자'는 생각에 팔을 걷어붙였다"고 했다.
"이승만은 한국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현대사의 주역이다. 오랜 군주 전제정의 막을 내리고 새롭게 역사를 시작한 민주 공화정의 나라 대한민국을 만들어 그 첫 대통령이 되었다. 6·25 남침 전쟁에서 기적적으로 나라를 지켜냈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쟁취해 지난 60여년 동안 한반도에 평화를 지속하게 해 주었다." 또한 "(이승만의) 잘못을 내세워 더 큰 위업(偉業)에서 눈을 돌린 채 제자리걸음 해서는 진정한 발전은 꿈도 꾸지 못한다"고 했다.[이승만 서거 50주기] [1] 하와이의 마지막 5년
[이승만 建國대통령 서거 50주기]
뉴욕 프라미스교회 김남수 담임목사는 다음 달 15일 현지에서 개최하는 광복 70주년 기념식에 앞서 이 책 2만부를 구입하기로 했다. 미주 지역 도서관과 교회, 상하원 의원, 주지사 등에게 돌려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의 진면목을 알리겠다는 것이다.
'SYNGMAN RHEE'는 올해 초 국내 청소년용으로 발간된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생애'를 재미교포 크리스 최가 영역한 것이다. 한국어판 원서를 쓰고 '편자(編者)'로 이름을 올린 사람은 언론인이자 출판인인 안병훈 기파랑 대표다. 안 대표는 평소 ▲우리 젊은 세대가 과연 자신이 태어나 자란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의도적인 편견이나 곡해가 빚어 올린 비뚤어진 역사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는 "좌(左)편향 교과서가 판을 치는 우리 교육 현장을 보고 '대한민국 현대사의 궤적을 올바르게 훑는 교본을 만들자'는 생각에 팔을 걷어붙였다"고 했다.
"이승만은 한국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현대사의 주역이다. 오랜 군주 전제정의 막을 내리고 새롭게 역사를 시작한 민주 공화정의 나라 대한민국을 만들어 그 첫 대통령이 되었다. 6·25 남침 전쟁에서 기적적으로 나라를 지켜냈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쟁취해 지난 60여년 동안 한반도에 평화를 지속하게 해 주었다." 또한 "(이승만의) 잘못을 내세워 더 큰 위업(偉業)에서 눈을 돌린 채 제자리걸음 해서는 진정한 발전은 꿈도 꾸지 못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2015/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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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서거 50주기] [1] 하와이의 마지막 5년
교민 유족이 소장한 원본 공개 "하야 후 호화생활 주장은 낭설"
이승만(1875~1965) 전 대통령이 하야 후 하와이에서 거주할 당시 숙소와 생활비를 제공해 준 한 교민에게 사저인 서울 이화장의 소유권을 양도한 '위임장(Power of Attorney)'이 처음 공개됐다. 이승만은 4·19 혁명으로 하야한 직후인 1960년 5월 29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하와이로 떠나 1965년 7월 19일 서거할 때까지 5년 2개월간 머물렀다.
이화장 양도 위임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가 1962년 9월 11일자로 작성해 교민 윌버트 최(Wilbert Choi ·1914~1970)에게 준 것으로 하와이에서 47년째 살고 있는 이승만 연구자 이덕희(74)씨가 최근 입수해 공개했다. 이씨는 이 위임장을 이승만 서거 50주기(19일)에 맞춰 출간하는 책 '이승만의 하와이 30년'(북앤피플)에 싣는다.
하와이 이민 2세인 윌버트 최는 이승만이 하야한 후 하와이에서 생활할 때 숙소와 생활비 등을 제공했다. 이승만은 당초 2~3주 머물 생각으로 하와이로 떠났으나 정부의 귀국 불허 방침 때문에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이화장 양도 위임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가 1962년 9월 11일자로 작성해 교민 윌버트 최(Wilbert Choi ·1914~1970)에게 준 것으로 하와이에서 47년째 살고 있는 이승만 연구자 이덕희(74)씨가 최근 입수해 공개했다. 이씨는 이 위임장을 이승만 서거 50주기(19일)에 맞춰 출간하는 책 '이승만의 하와이 30년'(북앤피플)에 싣는다.
하와이 이민 2세인 윌버트 최는 이승만이 하야한 후 하와이에서 생활할 때 숙소와 생활비 등을 제공했다. 이승만은 당초 2~3주 머물 생각으로 하와이로 떠났으나 정부의 귀국 불허 방침 때문에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위임장'은 타자기 인쇄체 영문으로 작성된 2장짜리 문서다. 문서는 '이전에 대한민국에서 살았고 현재 하와이 호놀룰루 마키키 2033번지에 거주하는 이승만(Syngman Rhee)과 프란체스카 리(Francesca Rhee) 부부는 한국 서울 이화동 1번지 면적 1946평(6433㎡) 이화장의 토지와 시설물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플로라 최의 남편인 윌버트 최에게 양도한다'고 되어 있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사는 위임장 둘째 쪽에 각각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 그 아래에는 공증인(notary public)의 서명이 있다. 윌버트 최는 이화장 양도 위임장을 받았으나 이에 대해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1970년 8월 사망했다.
위임장은 이씨가 2008년 저술 각주에서 언급해 학계에 알려졌으나 원본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류석춘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은 "하야 후 거액의 외화를 유출해 호화 생활을 했다는 식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낭설임을 증명하는 문서"라고 말했다. 위임장은 현재 윌버트 최의 유족이 소장하고 있다. 아들 세드릭 최(67)씨는 15일(현지 시각) "아버지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수한 애국심에서 이승만 박사를 모셨다"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위임장을 발견했지만 권리를 주장할 생각을 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위임장은 이씨가 2008년 저술 각주에서 언급해 학계에 알려졌으나 원본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류석춘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은 "하야 후 거액의 외화를 유출해 호화 생활을 했다는 식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낭설임을 증명하는 문서"라고 말했다. 위임장은 현재 윌버트 최의 유족이 소장하고 있다. 아들 세드릭 최(67)씨는 15일(현지 시각) "아버지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수한 애국심에서 이승만 박사를 모셨다"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위임장을 발견했지만 권리를 주장할 생각을 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015/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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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建國대통령 서거 50주기]
'… 위국언론창달' 친필… 조선일보 뉴지엄에 전시
"風雨飄零之際(풍우표령지제) 爲國言論暢達(위국언론창달)."
1960년 3월 5일, 우남(雩南) 이승만 대통령은 조선일보 창간 40주년을 축하하며 친필 휘호를 선물했다. 유려하게 써내려간 12자 행서(行書) 글씨다. "비바람 휘몰아치듯 혼란한 시대, 국가를 위하는 언론을 창달하자"는 뜻을 담았다. 이 휘호는 지금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 '조선일보 뉴지엄'에 역대 대통령 친필과 함께 전시돼 있다. 조선일보 뉴지엄(NEWSEUM)은 조선일보 창간 이후 95년 역사의 자취를 보여주는 전시 공간이자 미디어 체험관이다.
당시 조선일보는 흥분 속에서 창간 40주년을 맞았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열흘 후 제4대 정·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로 얼룩져 조선일보는 다음날 석간에 사설 '護憲救國運動(호헌구국운동) 이외의 다른 方途(방도)는 없다'를 썼다. "4·19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 명논설"(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이다. 4월 19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대학생들의 궐기 상황을 조선일보는 국내 신문사상 가장 큰 제목 크기로 '全大學生(전대학생)이 總蹶起(총궐기)'라고 보도했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다.
13세부터 서예를 익힌 이승만 대통령 글씨는 현대 지도자는 물론 왕조시대 왕까지 포함해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서예 전문가들은 "부드러우면서도 대범하고 굳세 '뼈가 단단한 글씨'"라고 했다. 이 12자 휘호를 살핀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부장은 "유려하고 원만한 미감의 글씨로 활달자재(豁達自在)한 필획이 돋보인다"고 말했다.
1960년 3월 5일, 우남(雩南) 이승만 대통령은 조선일보 창간 40주년을 축하하며 친필 휘호를 선물했다. 유려하게 써내려간 12자 행서(行書) 글씨다. "비바람 휘몰아치듯 혼란한 시대, 국가를 위하는 언론을 창달하자"는 뜻을 담았다. 이 휘호는 지금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 '조선일보 뉴지엄'에 역대 대통령 친필과 함께 전시돼 있다. 조선일보 뉴지엄(NEWSEUM)은 조선일보 창간 이후 95년 역사의 자취를 보여주는 전시 공간이자 미디어 체험관이다.
당시 조선일보는 흥분 속에서 창간 40주년을 맞았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열흘 후 제4대 정·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로 얼룩져 조선일보는 다음날 석간에 사설 '護憲救國運動(호헌구국운동) 이외의 다른 方途(방도)는 없다'를 썼다. "4·19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 명논설"(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이다. 4월 19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대학생들의 궐기 상황을 조선일보는 국내 신문사상 가장 큰 제목 크기로 '全大學生(전대학생)이 總蹶起(총궐기)'라고 보도했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다.
13세부터 서예를 익힌 이승만 대통령 글씨는 현대 지도자는 물론 왕조시대 왕까지 포함해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서예 전문가들은 "부드러우면서도 대범하고 굳세 '뼈가 단단한 글씨'"라고 했다. 이 12자 휘호를 살핀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부장은 "유려하고 원만한 미감의 글씨로 활달자재(豁達自在)한 필획이 돋보인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015/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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