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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州 고려인마을'의 代父 이천영 목사

하마사 2015. 7. 7. 17:25

[최보식이 만난 사람] "피범벅 된 외국인 노동자를 본 순간… 감추고 싶었던 내 과거 되살아나"

[초등학교 졸업·껌팔이·공돌이 출신… '光州 고려인마을'의 代父 이천영 목사]

"껌 팔러 식당에 들어갔다가 귀싸대기 맞고, 다리 밑에서 가마니 덮고 잔 적도 있어… 세상이 뒤집어졌으면 했어"

"국내 최초 多文化대안학교 설립… 고려인 아이들에게 '걱정 말고 가방만 들고 오라 학비도 무료고, 정규 졸업장도 준다'고 말해"

유니버시아드대회가 열리는 광주에 갔다. 내 용무는 달랐다. 고려인 3000여명이 모여 살고 있는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로 가서 이천영(56) 목사를 만나는 일이었다.

"서울에서 보면 광주는 변방(邊方)인데, 여기로 고려인들이 몰려드는 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고들 하죠. 호주를 안 가본 사람들이 그쪽 수도(首都)가 시드니인지 멜버른인지 모르듯이, 중앙아시아에 살던 고려인들이야 광주가 어디에 붙었고 서울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알겠어요. 좋다는 소문만 듣고 자기들끼리 찾아온다니까요."

허름한 신문보급소처럼 생긴 '고려인문화센터'에서 그는 만담(漫談)조로 얘기했다. 외양은 작고 취할 게 없어도 자신의 표현으로는 이 동네의 '숨은 왕초'다. 그는 "여기서 내가 모이라고 하면 시커멓게 모인다"고 농담했다.

이천영 목사는
이천영 목사는 "대책 없이 일을 벌이는 제가 딱 봐도 얼떨떨해 보이잖아요"라고 말했다. /김영근 기자

―대체 무슨 소문이 났기에 고려인들이 여기까지?

"여기에 오면 쉼터, 숙식, 통역, 송금 문제 등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결된다고 저네들끼리 입소문이 퍼진 거죠. 십몇 년 전부터 슬슬 몰려들기 시작했지요."

―하필 고려인들입니까? 중국 조선족도 있고 동남아 노동자들도 있는데.

"조선족이나 동남아 노동자들은 혼자 돈 벌러 옵니다. 하지만 '유랑민'인 고려인들은 달라요. 이들은 꼭 가족 단위로 3대(代)가 같이 들어옵니다. 자녀 교육 문제가 뒤따르는데, 국내 최초의 다문화(多文化)대안학교인 '새날학교'가 여기에 있어요. 정규 중·고교 과정으로 인정받은 거죠.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 사이에서 이미 소문이 쫙 퍼졌어요."

―중앙아시아에는 몇 번 다녀왔습니까?

"하하, 사실 나는 돈이 없어 가고 싶어도 한 번도 못 가봤어요. 외국에 나가 본 게 교사 시절 2박 3일간 중국 선양(瀋陽)에 가본 게 전부입니다."

고려인들은 약 50만명으로 추산된다. 1800년대 생활고로 두만강 국경을 넘어 러시아 극동의 연해주에 정착했던 동포들이다. 하지만 스탈린 치하(1937년)에서 일본군과 내통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이들을 열차에 태워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때 삶의 뿌리가 한 번 뽑혔다.

세월이 흘러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자리를 잡아가자 이번에는 소련의 해체로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이 독립했다. 이 국가들은 러시아어(語)가 아닌 자기 민족의 언어를 사용했고 소수민족인 고려인들은 배척 대상이었다. 고려인들은 또다시 밀려나 그중 일부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연어의 귀향처럼.

―하지만 동네 주민들은 고려인들의 러시를 달갑잖게 여기지 않나요?

"원래 변두리였는데 고려인들이 몰려와 집세가 올라 좋아하죠."

―동네가 지저분해지고 우범지역이 된다는 걱정이 있을 텐데요.

"이들은 의무교육 3시간을 이수해야 '외국인등록증'을 받습니다. 법무부 위임을 받아 그 교육을 저기 '고려인문화센터' 대표인 신조야씨가 담당하죠. 우즈베키스탄 출신으로 여기서 탈북자와 결혼했는데, 남자들을 휘어잡습니다(마침 그녀는 데스크에서 줄곧 통화 중이었는데 목소리가 워낙 쩌렁쩌렁해 인터뷰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천영 목사(오른쪽)

―어떤 내용의 교육을 시킵니까?

"법무부에서 요구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포함해 실생활에서 지켜야 할 사항을 알려주지요. '이마트나 홈플러스에 가서 판매원이 곁에 없다고 해서 물건을 집어들고 그냥 나오면 안 된다. 한국은 가게와 골목마다 CCTV가 있다. 모든 게 다 찍힌다. 여기서 범죄 사건이 터지면 우리 공동체가 전멸한다. 지금 살고 있는 우리도 못 산다. 만약 마약 같은 걸 하겠다면 당장 떠나라'며 기를 꺾어놓죠. 여기 고려인들끼리 '깔끔이 봉사단'을 조직해 일주일에 한 번씩 거리 청소를 하기도 합니다."

―영주권을 받은 고려인들은 드물지요?

"거의 없어요. 영주권 자격에는 한국어 능력 시험 3등급, 연소득 2000만원 이상 등이 있어요. 구(舊)소련에서 러시아어만 쓰도록 강요했기에 고려인 2세부터는 한국어를 못해요. 유랑하다보니 재산도 없고."

―불법 체류 문제가 발생하지 않나요?

"한 회사에서 2년 근속하면 '재외동포비자(F4)'를 받을 수 있어요. 이럴 경우 안 나가고 비자를 갱신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용역업체에서 일해요. 업체에서는 퇴직금을 안 주려고 2년이 되기 전에 폐업을 해버립니다. 임금도 떼먹고요."

―세상이 많이 바뀌었는데, 지금도 소위 '악덕 기업주'가 있습니까?

"대상이 외국인 노동자로 바뀐 거죠. 상황은 똑같아요. 지금도 체불 임금을 받아주러 공장에 찾아다니고 있어요. 제가 이 일을 시작한 게 1998년입니다. 여상(女商)에서 영어 교사를 할 때인데 우연히 알게 된 외국인 노동자로부터 도와달라는 전화를 받았어요. 임금을 달라고 하다가 사장에게 두들겨맞아 피범벅이 돼있었어요. 그 순간 내 과거가 되살아난 겁니다."

―과거라면?

"그전까지 무시당할까 봐 말 못 했는데 제가 공동묘지 산지기 아들이었어요. 겨우 초등학교을 졸업한 뒤 맏누이가 서울서 식모살이를 한다는 연고로 상경했어요. 껌 팔러 식당에 들어갔다가 귀싸대기도 맞고, 다리 밑에서 가마니 덮고 잔 적도 있고, 여러 공장을 전전했어요. 그때 어린 나이인데도 세상이 뒤집어졌으면 했어요.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사는 거잖아요."

그가 공장일을 하던 1978년 겨울 군대 신체검사를 받으러 내려갔다. 팬티 바람으로 섰는데 몸에 눌어붙은 때가 보였다. 그때까지 목욕탕을 가본 적이 없었다.

"제 몰골을 보고는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판정관이 '한자(漢字)로 네 이름이나 쓸 수 있나?'라고 물어요. 제가 가만히 있으니, '야 인마, 무슨 인생을 그렇게 살아'하며 욕을 했어요. 학력 미달로 군 면제가 됐어요. 남들은 면제되면 좋아했을지 모르나, '나는 군대도 못 가는 인생'이라는 자조감이 들었어요."

서울로 올라온 그는 문방구에 가서 '꼭 알아야 할 한자 500자(字)'가 적힌 책받침을 샀다. 그런 책받침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한자로 자기 이름도 못 쓴다고 욕먹은 게 맺혔어요. 공장일은 아침 7시부터 밤 10시에 끝나요. 한방에 여러 명이 자는데, 내가 한자 쓰기를 하면 '그걸로 판사가 될 거야 검사가 될 거야. 빨리 불 꺼'하며 발로 툭툭 찼지요. 나중에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플래시를 켜고 한자 공부를 했어요."

당시 그가 일하던 공장의 사장 아들이 대학 예비고사에서 세 번째 떨어졌다. 사장이 '다 때려치워라'며 수험서를 바깥으로 던져버렸다.

"국어책을 주워 펼쳐봤는데 '용비어천가'에 내가 익힌 한자가 몇 개 나오더라고요. 그때 정말 충격이 컸어요. 그 버려진 책들을 들고와 검정고시 공부를 하게 된 겁니다. 이듬해 4월 중등검정고시를 쳤어요. 옆에 앉은 수험생 답안지가 조금씩 보이더라고요(웃음). 육십몇 점에 합격했어요. 이건 기적이지요. 넉 달 뒤 고등검정고시를 봤을 때도 뭔가 씌인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평균 62점으로 합격했어요."

―한순간에 남들의 6년 중고등 과정을 해치워버린 셈인데, 천재가 아니고서야.

"두 달 뒤 막바로 예비고사를 보러 갔어요. 영어시험 답안을 채점해보니 50문항에서 두 개만 맞았어요. 찍었는데 답을 다 피해가며 두 개만 맞는 것도 기적이죠. 더 놀랍게도 그 예비고사에 붙은 겁니다."

―영어에서 두 개를 맞고도?

"340점 만점에 184점인가, 커트라인에 안 걸린 거죠. 그때만 해도 지방의 H대는 예비고사만 붙으면 들어갈 수 있었어요. 주위에서 영어 선생이 되면 좋을 거라고 권해 멋모르고 영어과에 지원했어요."

스물한 살 때 공부를 시작한 그가 1년 만에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대학까지 들어간 사실은 명백한데도 쉽게 납득이 안 됐다. 그는 즐기듯이 만담조로 얘기하고 있었다.

"근로장학금을 받아 대학을 다니기는 했지만 졸업할 때까지도 영어 지문은 해석이 안 됐어요. 국공립 교사가 될 수 있는 임용고시에도 떨어졌어요. 졸업해도 갈 데가 없어 교수님께 매달려 전남 하순에 있는 모 사립학교에 면접을 보러갔어요. 한 명 뽑는데 다섯 명이 왔어요. 이 중에서 가장 실력 없는 내가 뽑혔어요. 내가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 영어 실력으로 학생들은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중학교 2학년에 배정받았는데 못 가르치겠더라고요. 실력이 없다고 아이들의 반발이 심했어요. 싹싹 빌면서 3년을 버텼어요. 엄청나게 노력했어요. 그 뒤로는 꽤 가르친다는 소리를 들어 광주 시내 여상(女商)으로 옮겨올 수 있었지요."

우리는 동시대를 살아왔는데 딴나라 얘기 같았다. 어쨌든 그렇게 파란만장하게 자리 잡은 교사 시절에 그는 앞서 말한 한 외국인 노동자를 만났던 것이다.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과거와도 다시 만나게 됐던 것이다.

그는 공단(工團) 근방에 '외국인 근로자 문화센터'를 설립했고, 수업이 비는 시간에는 체불 임금을 대신 받아주러 다녔고, 산재(産災) 입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입원 보증을 서줬다.

"그때 고려인들을 알게 됐고 이들의 역사를 공부했어요. 서로 피[血]가 당길 수밖에 없잖아요. 이들 자녀의 교육 문제는 해결해줘야겠다고 2007년 다문화대안학교인 '새날학교'를 설립한 거죠. 고려인 아이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가방만 들고 오라. 학비도 무료고 정규 졸업장도 준다'고 말하지요. 이런 일을 자꾸 벌이면서 빚을 많이 졌어요. 빚도 갚고 목돈도 필요해 6년 전 교직에서 명예퇴직했어요."

―그런데 목사는 언제 된 겁니까?

"우리 어머니가 까막눈인데도 교회를 나갔어요. 어려서 어머니를 따라다니면서 늘 새벽기도를 하게 됐어요. 교사 시절에는 야간 신학대학원을 다녔어요. 교사가 될 자격이 없는 제가 교사가 된 것에는 어떤 '손길'이 있었을 겁니다. 대책 없이 이런 일을 벌이는 것에도 그 손길이 인도한 게 아닌가 싶고, 딱 봐도 제가 얼떨떨해 보이잖아요."

 

-조선일보, 2015/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