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사람

대한적십자사 총재 겸 성주그룹 회장 김성주

하마사 2015. 7. 18. 14:53

[강인선 LIVE] "당신은 한국 프레임에 맞지 않는 여자" 외국에서 먼저 주목받은 여성 리더 김성주

 

김성주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13일 인터뷰에서 "큰 키(176cm)와 짧은 헤어스타일 때문에 사람들이 처음 봤을 때 '강한 여자' 라는 인상을 받는 것 같지만 알고보면 싸울 줄도 모르고 정이 많은 성격"이라고 했다. 그는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숙명이라 여긴다"고도 했다. /이태경 기자, 그래픽=김성규 기자

 

기성세대 중 날 불편해하는 분들도

큰 키에 남다른 헤어스타일…
강하고 차가운 사람이라고 오해
난 아이 키우고 기업도 키우면서
그저 앞만 보고 달렸을 뿐인데

적십자사 총재로 무보수 봉사
기업인 출신 ‘호랑이 총재’ 등장에
직원들 입술이 다 부르틀 정도
총재실을 대회의실로 만들고
커다란 책상은 셀프 커피테이블로

김성주(59) 대한적십자사 총재 겸 성주그룹 회장은 명함을 두 개 갖고 다닌다. 이 명함엔 각각 ‘봉사장’과 ‘비전장’이란 특이한 직책이 써 있다. 둘 다 약어로는 ‘CVO’.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무보수 봉사를 한다는 뜻에서 ‘봉사장’(CVO:Chief Volunteer Officer)이란 표현을 썼고, 성주그룹에선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비전장’(CVO:Chief Visionary Officer)이라고 했어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지만 제 에너지의 60~70%는 적십자에, 나머지는 회사 일에 들어갑니다.”

지난 13일 서울 강남구의 성주그룹 사옥 14층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 그는 노란 셔츠, 감색 재킷, 검은 스키니진 차림이었다. 키는 176㎝, 카메라 앞에서의 움직임이 모델처럼 자연스러웠다. “돌려 말할 줄 모르고 복선(複線)을 모른다”더니, 말도 행동도 거침없이 시원시원했다.

김 총재는 재벌가의 막내딸이다. 고 김수근 대성그룹 회장과 고 여귀옥 여사 사이의 3남 3녀 중 막내다. 그는 귀여운 막내딸이 아니라 사고뭉치 막내였다.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한 후 아버지가 극구 반대하던 미국 유학을 감행하더니, 그것도 모자라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덜컥 해버렸다. 아버지가 “너는 내 자식 아니다”며 지원을 끊자, 그는 하던 공부를 접고 뉴욕의 블루밍데일 백화점에 취직해 밑바닥부터 일을 배웠다.

‘한국 프레임에 맞지 않는 여자’

미국서 배운 유통 일은 훗날 창업의 원동력이 됐다. 그는 귀국 후인 1990년 자신의 이름을 딴 성주인터내셔널을 창업했다. 처음엔 구찌 등 해외 명품을 수입하는 회사였지만 2005년엔 독일 명품 MCM 본사를 인수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동시에 국제적 명성도 쌓아갔다. 1997년 세계경제포럼(다보스 포럼)에서 ‘차세대 지도자 100인’에 선정된 이후, 기업인으로 여성 리더로 국내외에서 인정받았다. 2012년 대선 때는 새누리당 박근혜 당시 대선 후보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세상을 놀라게 하더니, 지난해 10월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면서 또 한 번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기성세대 중엔 저를 오해하거나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저 앞만 보고 달렸어요. 아이 키우면서 창업해 기업을 키우고 국제적으로 성공도 했지요. 외국에서 먼저 주목받았고요. 어느 날 제가 우연히 홈페이지에 있는 제 이력을 봤는데, 이것저것 한 일이 많아 저도 믿기 어렵더라고요. 누군가 제게 ‘당신은 한국의 프레임(frame)에 맞지 않는 여자다’라고 하더군요. 큰 키, 남다른 헤어스타일 때문인지 강하고 차가운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들을 하시는데 사실 저는 싸울 줄도 몰라요. 그저 소신대로 살아왔을 뿐입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취임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뭐였습니까.

“제 명패를 만들지 말라고 했어요. 총재 사무실에 가보니 권위적인 책상과 근엄한 가죽 소파가 있더라고요. 저를 위해 1원도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커다란 책상은 한쪽으로 밀어 두고 각자 커피를 타 마실 수 있는 셀프 커피 테이블로 만들었습니다. 소파도 치우고 대신 2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회의 탁자를 부탁했어요. 총재실은 대회의실로 내놓고 사무총장 방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공동선대위원장을 할 때 정치는 안 하겠다고 했었지요. 적십자사 총재는 흔쾌히 받아들였습니까.

“처음에는 못하겠다고 거절했어요. 공동선대위원장을 할 때도 절대 정치는 안 한다는 조건으로 간 거였으니까요. 외국 출장 중에 하마평이 돌고 발표까지 났을 땐 난감했지만, 제가 지원했던 대통령에 대한 책임감도 있고 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 때문에 수락하게 됐어요. 저는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일생 해볼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선거지원 후 회사매출 타격
朴대통령과 핫라인
유세지원 후 다 버려
정직하고 원칙적인 분
지켜보고 도와드려야

―앞으론 어떤 일에 주력할 계획입니까.

“저는 적십자가 변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제적인 재난·구호·봉사단체에 걸맞게 변해야 하는 것이지요. 우선 적십자 아카데미에서 안전교육을 할 계획입니다. 이 사업을 위해 개인적으로 10억원을 기부할 예정입니다. 180개국에서 안전 관련 노하우를 다 받기로 했습니다. 그걸로 온라인·오프라인 교육 하고 안전요원 트레이닝도 할 생각이고요. 북한에 대해서도 국제 공조의 틀 안에서 지원을 늘려나갈 생각입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기업인 출신은 처음이라 문화적 충격이 있을 것 같은데요.

“처음으로 기업인 출신 호랑이 할머니가 왔으니 직원들 입술이 부르트지요. 이전엔 국장 이하 직원들이 총재 만날 일이 없었는데 요즘은 다 같이 참여하게 하는 제 방식에 재미있어 하는 것 같습니다. 내년부턴 현장을 더 많이 뛸 겁니다.”

“따돌림과 무시 자주 당했다”

―대선이 끝난 후 박 대통령과 만나거나 전화 통화를 할 기회는 있었습니까.

“유세 지원이 끝난 후엔 박 대통령과의 핫라인을 다 버렸어요. 대선 끝나고 바로 짐 싸서 나와 제 업무에 복귀했고요. 제가 박근혜 대통령 선거 캠프에 합류한 이후 저희 회사 매출이 30% 가까이 줄었어요. 그때 입은 타격은 지금도 그대로입니다.”

―박 대통령과는 어떤 인연으로 선대위에 합류하게 됐습니까.

“선거 때면 거의 모든 후보들로부터 캠프에 합류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어요. 하지만 저는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아버지는 정치는 절대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비행기 안에서 신문을 보다가 지금 한국이 구한말 같은 위기에 처해 있다고 쓴 글을 봤어요. 안정을 위해선 박근혜 대통령 같은 분이 당선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서울에 도착한 다음 날 뵙고 싶다고 연락을 드렸어요. 박 대통령은 그날 오후 일정을 취소하고 만나러 오셨어요. 그리고는 선대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하신 거죠. 저는 망설였지만 계속 찾아오셔서 결국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2012년 대선 때 김성주 총재가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의 공동선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조선일보DB
2012년 대선 때 김성주 총재가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의 공동선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조선일보DB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도 이제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잘하고 있다고 봅니까.

“박 대통령은 정직하고 원칙적인 분이지요. 명석하고, 새로운 아이디어에 열린 마음을 갖고 있어요. 지켜보고 도와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해선 의식하지 않는 편입니까.

“사회가 두렵거나 남의 눈이 두려우면 원칙에 맞게 살 수 없어요. 세상에 빌붙으려고 하지요. 25년 전 사업을 시작한 후에도 탈세·비자금·뇌물 없는 회사 만들겠다고 뛰다가 업계에서 따돌림과 무시를 당했습니다. 사장이 된 후에도 남자들이 여자 밑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내 옆에 와서 일하랬지 언제 밑에 와서 일하라고 했느냐고요.”

150달러짜리 결혼식

―하버드 경영대학원 린다 힐 교수가 세계의 중소기업 CEO 11명을 분석한 걸 보면, 김 총재는 ‘비전’이 강한 리더로 나옵니다.

“중학교 때 같은 반에 정말 어렵게 사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자꾸 결석을 하자 선생님이 집에 가보라고 하셔서 주소를 들고 찾아나섰어요. 세 시간을 헤매다 집을 찾았는데 다 허물어져 가는 집 어두운 방에 친구가 거적 같은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죄책감을 느꼈어요. 우리는 똑같은 사람인데 저 아이는 왜 저렇게 고생을 하고, 나는 왜 이렇게 호사스럽게 사나. 그런 제 고민을 들으시고 어머니는 그렇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하고 번 걸 사회에 환원을 해야 하는 거라고 하셨어요. 그게 어린 제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봉사하기 위해 성공하는 것이고 남을 위해 일하는 겁니다. 더 가진 자로서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지요.”

―개인 연 수입의 10~30%는 기부하고, 그룹 수익의 10%는 좋은 목적에 쓴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는데.

“국내외 80개 비정부기구에 지원을 합니다. 여성 리더를 키우기 위한 프로그램도 지원하고요. 제가 미국 앰허스트대에 유학 가서 사회학을 전공하면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이란 책을 본 후 그게 제 인생의 교과서가 됐어요. 가진 자의 의무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고, 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는 것도 깨닫게 됐어요.”

 

 

재벌가 막내딸의 시련
유학중 반대하는 결혼 해
집안에서 지원 끊어
美 백화점 일하며 버텨
세상에 무서울 게 없더라

검소하셨던 어머니
생활비의 90%는
누군가를 돕는데 쓰셔
봉사하기 위해 성공해라
가진자의 의무 가르쳐


―재벌가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나름 고생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인생의 바닥을 맛봤다고 할 때가 언제였습니까.

“1985년 집안에서 원치 않는 결혼을 해서 집에서 쫓겨났어요. 당시 하버드대 유학 중인 캐나다 남학생과 가끔 데이트를 했는데, 그걸 알고 집에서 (다른 남자와) 약혼 날짜를 잡는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인권침해 아닙니까. 하하…. 제가 남자친구에게 먼저 프러포즈하고 결혼했어요. 그리곤 서울에 연락해서 ‘나는 결혼했으니 더 이상 약혼 날짜 같은 거 잡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어요. 부모님께선 ‘너는 더 이상 우리 가족이 아니다’라고 하셨어요. 돈도 끊고 연락도 끊으셨지요.”

―150달러짜리 작은 결혼식을 하셨다고요.

“교회의 작은 기도실을 빌려서 친구들을 초대해 결혼했어요. 오르간 연주자에게 40달러 주고, 저는 원피스 입고, 먹을 건 친구들이 가져오고, 신랑이 자동차를 렌트해 신혼여행을 갔어요.”

―막상 부모 지원이 끊기니 후회가 되지 않던가요.

“둘 다 학생이니까 제가 희생하기로 했어요. 과감하게 공부 때려치우고 블루밍데일 백화점의 회장 직속 기획팀에 말단으로 들어갔어요. 한 달에 1500달러를 벌었어요. 집세 내고 남편 학비 내면 남는 돈이 별로 없어서1센트라도 아끼려고 집 바로 옆에 있는 식품점을 못 가고 멀리 걸어가서 장을 보곤 했어요. 그때 몸이 많이 상했지요. 봉제 인형 수입해서 뉴저지에 있는 구멍가게에 가서 팔기도 했어요. 하지만 제가 선택한 일인 이상 후회하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블루밍데일에서 4~5년 버티니까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어요.”
유학 중 부모님 반대하는 결혼을 해 지원이 끊기자 백화점에서 일하며 버틴 김성주 총재. /이태경 기자
유학 중 부모님 반대하는 결혼을 해 지원이 끊기자 백화점에서 일하며 버틴 김성주 총재. /이태경 기자
세상에 당연한 일은 없더라

―아이를 낳은 후 일하는 싱글맘으로 사는 것도 그 시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엉터리 엄마였지요. 그래도 아이는 강하게 잘 자라주었어요. 아이가 15세 때부터 한 6년간 반항을 하는데 저를 반 죽여놓더라고요. 하지만 그때 딸이 반항 안 했으면 제게 딸이 있는 줄도 몰랐을 겁니다. 어느 날 딸과 둘이 앉아 얘기하다가 엄마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이야기에 부둥켜안고 울었어요.”

―딸이 아기 때 화상을 입어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심각했던 일도 있었다면서요.

“딸이 8개월 때 화상을 입었어요. 딸아이가 보행기를 타고 다니다가 물이 펄펄 끓고 있는 커피포트의 선을 잡아당겨 끓는 물을 뒤집어썼어요. 그날 저는 서울의 한 호텔에서 외국 손님을 만나고 있다가 응급실로 달려가보니 아이는 얼굴과 팔, 어깨 등 몸 25%에 3도 화상을 입어 숨이 넘어가는 상태였어요. 그게 1990년 6월 5일입니다. 저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요. 패혈증이 오고 아이는 코마 상태에 빠졌습니다. 의사는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면서 아기를 얼음침대 위에 올려놓고 ‘어머니,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라고 했어요. 저는 병원 바닥에서 통곡했습니다. 하나님께 차라리 저를 대신 데려가시라고 기도했습니다. 3~4일을 그렇게 지내고 나니 울 힘도, 잘 힘도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새벽 아이가 살아날 것이란 예감이 들어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간호사들은 ‘드디어 저 엄마가 미쳤구나’ 하는 눈으로 저를 바라봤어요. 그날 아침 7시 반에 아이가 깨어났어요.”

―다시 살아난 기분이었겠군요.

“죽는 것보다 더한 경험이었어요. 그후엔 매일매일이 기적이었지요. 저는 그때 이 세상에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도 되는 일은 없다는 걸 배웠습니다.”

 

 

여자도 군대 가야 한다고?

―여성들도 군대 가야 한다든지, 부잣집 여성들이 호텔 식당에서 한가하게 시간 보낸다고 비판한 발언으로 시끄러웠지요.

“여성들이 강인해져야 한다는 뜻에서 한 얘기입니다. 여성들이 리더가 되고 싶으면 극기해야 하고, 나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해요. 군대에 가면 각계각층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게 되니 자연스럽게 도움이 되지요.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군대가 여성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장이 될 수도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이었습니다. 또 호텔 식당 같은 데서 우연히 여유 있는 여성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시부모, 애들 학원, 옷, 생일 그런 이야기뿐이고 좋은 일 하자는 얘기는 없어요. 저는 지금도 여성들에게 자기 계발에 투자하고, 일하고, 봉사하라고 이야기해줍니다.”

―그런데 왜 핸드백 등 값비싼 해외 명품 수입과 명품 브랜드 인수에 주력하셨습니까.

“우리가 해외 명품 브랜드를 산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던 시절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일찍이 ‘구찌(Gucci)’란 브랜드를 수입하면서 브랜드파워가 뭔지를 깨달았어요. 똑같은 물건인데도 구찌라고 하면 돈을 엄청 받는데 한국산이라고 하면 헐값을 매겨요. 브랜드를 갖게 되면 제조는 어디서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브랜드 그 자체를 만들기는 어려워요.”

―여성들에게 핸드백은 명품을 소유한다는 것 이외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여자들에게 백은 단순히 가방이 아니라 정서적인 유대를 가진 무엇이에요. 하지만 이제는 핸즈프리(hands-free)의 시대입니다. 손을 자유롭게 해줘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백팩의 시대가 온 것이지요. 앞으론 웨어러블(wearable·옷처럼 입는)백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인생 최고의 멘토는 누구입니까.

“한때 저를 쫓아냈던 아버지시지요. 아버지는 자수성가하신, 투지와 강인함을 갖춘 분이셨어요. 아버지는 저를 보면 ‘호랑이가 호랑이를 키웠다’고 하셨지요. 만일 그때 아버지가 저를 집안에서 쫓아내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김성주는 없었을 겁니다. 신문에 제 기사가 크게 나면 아버지가 화를 내면서 ‘너 그렇게 잘난 놈 아닌 거 알지?’ 하셨어요. 아버지가 ‘어떻게 네가 내 사업가 피를 제일 많이 물려받았느냐’고 하셨는데, 그 말씀 하실 때 아버지와 진정 화해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 강남에 있는 성주그룹 사옥의 사무실에서 MCM 강아지 인형을 든 김총재. 배경에 보이는 사진은 1998년 외환 위기 직후 부도 위기를 간신히 막은 후 창고 건물을 사무실로 사용하던 시절의 모습. /이태경 기자
서울 강남에 있는 성주그룹 사옥의 사무실에서 MCM 강아지 인형을 든 김총재. 배경에 보이는 사진은 1998년 외환 위기 직후 부도 위기를 간신히 막은 후 창고 건물을 사무실로 사용하던 시절의 모습. /이태경 기자
계속 왕따로 살고 싶다

―어머니의 영향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어머니는 뇌출혈로 쓰러져 식물인간으로 8년을 누워 계셨어요. 병석에 계시는 동안 세상과의 인연은 대부분 끊어졌지요.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너무나 많은 분들이 찾아오셨어요. 무작정 상경했던 한 여성은 어머니가 보호해주며 기술 가르쳐준 덕에 살 수 있었다고 하고, 어느 목사는 깡패 똘마니로 살다가 어머니 덕에 다른 삶을 찾았다고 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받은 생활비 중 90%는 누군가를 돕는 데 쓰셨어요. 검소하게 사셨고 딸들도 검소하게 키웠어요. 늘 제 발보다 큰 신발을 사주셔서 발에 맞을 만하면 신발이 다 떨어지더라고요. 수수한 옷, 헌옷 많이 입었어요. 그래서 제가 패션 사업을 하게 됐는지도 모르지요. 하하….”

―‘나는 한국의 아름다운 왕따이고 싶다’란 제목의 책을 썼지요. 여전히 왕따로 살 생각입니까.

“저는 왕따를 자처해왔지요. 기존의 틀이나 형식에 사로잡혀 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또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여자로서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다 보니 왕따가 될 수밖에 없었어요. 저는 한국식 프레임에 잘 맞지 않아 왕따로 보이더라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언제 가장 행복합니까.

“딸이 해주는 밥을 먹을 때요. 딸과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어요.”

―앞으로 꿈은 뭡니까.

“더 큰 회사를 이루고, 좋은 일에 더 많은 돈을 쓰고 싶습니다. 인생은 어떤 가치를 좇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북한이 열릴 때 북한 어린이들과 여성들을 도울 겁니다. 국제적인 무대에서 국가에 기여하고 봉사하는 게 제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

 

-조선일보 강인선 LIVE, 2015/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