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기준으론…바보 의사랍니다
강남의 잘나가던 개업醫, 낮은 데로 병원 더 키우려고 인테리어 공사시간 남는 김에 복지병원 봉사 갔죠
얼마 후, 남아달라는 요청… 고민…아내의 한마디가 나를 바꿨다"돈 벌 것, 다 벌고 하면 무슨 봉사냐 젊고 힘 있을 때 남 돕는 게 진짜다"
1977년 봄 어느 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서울 청량리 동산병원 응급실에 한 살배기 아기 환자가 도착했다. 아기를 품에 안고 뛰어온 엄마는 "아이가 자꾸 숨이 멎어요. 살려주세요"라고 울먹였다. 이 병원 소아과 과장은 이제 막 수련의 생활을 시작한 인턴을 돌아봤다.
"박 선생이 좀 봐줘야겠어. 환자 옆에서 지키고 있다가 숨이 멎으면 입으로 공기를 불어넣어 주는 거야."
그는 침상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 아기 환자를 지켰다. 언제 숨이 멎을지 모르는 아기.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경험도 지식도 부족한 인턴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저 아기가 호흡을 멈출 때마다 입으로 숨을 불어넣어 줄 뿐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했을까. 어느새 밤이 지나고 동이 텄다. 꼬마는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소아과장이 아침에 출근해 응급실에 들어서자 함께 밤을 지새운 아기 엄마가 벌떡 일어서서 말했다.
"이 선생님이 우리 아이를 19번이나 살렸어요. 내 아기를…."
그제야 깨달았다. 아기는 밤새 19번이나 숨이 멎는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을. 이후 그 증세는 사라졌고 아기는 건강하게 퇴원했다.
며칠 후 소아과장이 그를 방으로 불렀다.
"오늘 그 꼬마 환자 엄마가 다녀갔네. 요구르트 두 병을 주고 갔어. 하나는 박 선생 것, 하나는 내 것."
과장이 요구르트 한 병을 내밀었다. 어쩐지 가난해 보였던 아기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막 의사의 길에 들어선 젊은 의사는 그때 깨달았다고 한다.
"세상엔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병들이 많다. 의사가 모든 걸 다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의사로서 충분한 실력과 자질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많다는 것을 그날 배웠다."
- 박용건 성가복지병원 내과 과장은 지난 2000년 말 서울 강남에서 운영하던 개인 병원을 접고, 수입이 10분의 1 수준인 지금의 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내가 가졌던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 이 길이 내 길이란 걸 의심해본 적도 없다”고 했다. /허영한 기자
지난 24일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 있는 병원에서 그를 만났다. 성가복지병원은 가톨릭 서울대교구 산하의 '성가소비녀회'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운영되는 곳이다.
박 과장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다. 인터뷰 중에도 "제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주인공은 이 병원이고 저는 그저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일 뿐"이라고 했다. 병원장인 이영순 수녀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인터뷰가 중단될 뻔했다.
◇강남 병원 닫고 시작한 새로운 삶
박용건 과장은 한때 서울 강남에서 '잘나가는 내과의사'였다. 경희대 의대를 졸업하고 지금은 없어진 영동병원에서 내과 과장을 하다가 1991년 11월 개업했다. 다행히 병원은 잘됐다. 하루 80명이 넘는 환자가 찾았다. 2000년 말 그는 병원을 더 키울 욕심으로 건물을 수리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개인병원을 더 잘해 보려고 시작한 그 인테리어 공사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 계기가 될 줄은 몰랐다.
―성가복지병원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병원 인테리어 공사가 두 달 걸린다고 했다. 마냥 놀 수는 없어서 봉사할 곳을 찾다가 성가복지병원에서 내과 의사를 찾는다는 말을 들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당장 와달라고 했다. 처음엔 두 달만 봉사하려고 했던 거다."
―그런데 어떻게 두 달 예정이었던 봉사가 '계속 근무'가 됐나.
"봉사 시작한 지 한 달쯤 됐을 때 병원 수녀들이 '계속 맡아주지 않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가난하고 병든 환자를 위해 나의 안락한 삶을 포기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때는 약국을 하던 아버지가 사업에 손을 댔다가 큰 손해를 봐 집마저 날린 상황이었다. 한창 공부에 몰두해야 하는 두 딸은 어떻게 키울 것인지…. 쉽게 결론이 나질 않더라."
―그래도 최종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을 텐데.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집사람에게 기도를 통해 답을 얻어달라고 했다. 3일 철야기도를 갔다 온 집사람이 말했다. '의사는 어차피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당신도 그래야 하지 않겠나. 개업의가 돼서 돈 많이 모으고, 먹을 거 다 먹고, 집에 갖출 거 다 갖추고, 아이들 해줄 거 다 해주고 그런 다음에 머리 하얗게 돼서 이제 봉사 좀 해볼까 하는 건 봉사가 아니다. 젊고 힘 있을 때 남을 위해 일을 해야 진짜 봉사다'라고.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이 길로 오지 않았으면 누릴 수 있었던 많은 것을 포기했는데 후회하진 않았나.
"내가 가졌던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 가족들의 응원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딸들이 '아빠가 하는 일에 긍지를 느낀다'고 말해줘 더욱 힘을 얻는다."
강남 의사 시절과 비교하면 그의 수입은 10분의 1 이하로 줄었다. 하지만 "이 길이 내 길이란 걸 의심해본 적은 없다"고 했다.
◇노숙인 주치의
처음엔 겁나는 일도 많았다. 강남에서 병원 할 때 만났던 환자들과는 너무나 다른 환자들을 봐야 했다. 자신이 세상에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불쌍한 영혼들은 거칠고 폭력적이었다.
―적응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초기엔 환자의 70~80% 정도가 노숙인이었다. 그중엔 술에 찌든 알코올중독자들이 많았다.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붓거나 목발을 휘두르며 병원 직원들을 위협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렇다고 그들을 포기할 순 없다. 그들을 받아줄 곳은 우리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들은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이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자기 자신에게도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그는 "세상이 좋아진 건지 이젠 환자 중 노숙 알코올중독자가 절반도 되지 않는다"며 "요즘은 독거노인, 외국인 노동자, 저소득층 환자들의 비중이 조금 높아졌다"고 말했다.
그에겐 그런 거친 환자들을 다루는 '재주'가 있는 듯했다. 이영순 병원장은 "박 과장이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사람에게 '왜 또 술 먹고 왔어. 안 먹었으면 얼마나 좋아. 내일 다시 와서 진료받아. 알았지' 하고 다독이면 금세 순해지더라"고 말했다.
―거친 환자들의 마음을 여는 비결이라도 있나.
"모든 환자를 다 똑같이 대한다. 잘못하면 야단도 친다. 오랫동안 자주 만나다 보면 야단을 쳐도 진짜 나쁜 마음으로 야단치는 게 아니라는 걸 환자들이 잘 안다. 자신이 환자가 아니라 사람으로 존중받는다는 것을 아는 것 같다. 눈빛과 말투, 손길에서 그런 걸 느끼나 보다. 그들을 만져주고 안아주고 그런다. 환자들은 어리광도 부린다. 부성애 같은 걸 느끼는 것일까."
―환자들에게 자상하게 설명을 해준다고들 하던데.
"환자들이 납득할 때까지 설명해준다. 전문 용어나 영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설명한다. 환자 눈을 보면 내 말을 이해했는지 더 설명이 필요한지 알 수 있다. 물론 자기주장만 되풀이하는 환자도 있지만."
- 박용건 과장은 병원에서 ‘환자들에게 아버지 같은 느낌을 주는 존재’라는 평가를 받는다. 언제나 환자 편을 들어주고, 환자들의 마음까지 감싸 안아준다고 했다. 사진은 박 과장이 중환자실 여성 환자와 손을 마주치며 환하게 웃는 모습. /허영한 기자
그는 1974년 의대를 졸업하자마자 군의관 복무를 시작했다. 그해 여름 몇 달간 진지구축 공사를 마치고 복귀하자 몸이 펄펄 끓었다. 체온이 40도까지 올랐고 구역질이 나고 허리가 아팠다. 치사율 10%인 유행성 출혈열이었다. 그때만 해도 원인을 몰라 '불명열'이라 불리던 병이었다. 다행히 수도통합병원에 후송된 지 한 달 만에 건강을 회복했다. 불명열 환자는 통상 6개월간 치료를 받는데 몸이 일찍 회복됐으니 5개월간 쉬어도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환자를 돌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의사라도 입원했는데, 환자가 환자를 돌보다니.
"공식적으론 환자지만 실제론 다른 환자를 돌보고 치료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닌데, 24시간 병실에 있는 군의관, 당직의사가 된 셈이었다. 남들은 미쳤다고 했지만 내겐 소중한 시간이었다. '여기 말고 언제 어디서 이런 병을 연구할 수 있겠나' 싶었다. 많을 땐 환자들이 200~300명에 달했다. 나를 좋게 본 소령 군의관이 레지던트 2년차는 돼야 배울 수 있는 투석 방법도 가르쳐줬다."
―그곳 군의관이 아닌데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느 날 새벽 2시에 병사 환자가 도착했다. 상태가 심각했다. 콩팥이 심하게 망가졌고 몸속 칼륨 수치가 한계에 도달해 심장마비가 우려됐다. 담당 군의관에게 전화할 시간도 없었다. 일단 살리고 보자는 생각에 미리 배워둔 복막투석을 실시했다."
―다음 날 군의관이 뭐라고 하던가.
"그는 '의사로 살아가는 동안 이 사람은 내가 아니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상황과 맞닥트리는 건 쉽지 않다. 나 아니어도 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상황이 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 중위는 바로 그런 상황을 만난 거네'라고 했다.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이 되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하게 깨달았다."
영동병원 내과 과장으로 있을 때도 심장이 멈춘 환자를 55분 심폐소생술을 시도한 끝에 살려낸 일이 있다.
"점심시간이었는데 40대 남자가 병원을 찾아왔다. 다른 의사들은 모두 밥 먹으러 나간 시간이었다. 나는 평소대로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으려는데 응급실 호출이 왔다."
남자는 처음엔 "체한 것 같다"고 했지만 잠시 후 의식을 잃었고 심장이 멈췄다. 박 과장은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선 통상 20분 이내에 숨이 돌아와야 살 수 있다. 하지만 남자는 20분이 지나도 심장이 뛰지 않았다. 식사하러 나갔던 의사들이 돌아왔고 병원장은 설명을 듣더니 가망이 없으니 포기하라는 눈짓을 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55분이 지났을 무렵 간호사가 비명을 질렀다.
"심장이 다시 뛰어요!"
하지만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 먹으며 일만 하는 성격 때문인지 그는 '사회성' 면에선 주변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그가 회식이나 술자리에 참석하는 일은 거의 없다. 한 성가복지병원 관계자는 "주변 사람과 워낙 교류가 없어 저녁 식사 한번 하자고 말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머리 깎는 게 얼마인지도 모르는 사람
그는 병원에서 환자 돌보는 일 이외의 것은 잘 모른다. 집도 병원에서 3분 거리에 있어 혼자 걸어다닌다. 이 병원 자원봉사자 안향춘씨는 "머리 깎는 게 얼만지도 모르는 분"이라고 했다. 결혼 후 한 번도 이발소에 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앞머리와 옆머리는 내가 자르고 뒷머리는 집사람이 손봐준다. 집에서 깎는 머리치고는 꽤 괜찮지 않으냐"며 웃었다.
그는 쉬는 날도 거의 없다. 방사선과 직원인 김수연씨는 "과장님이 휴가 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월요일은 병원이 공식적으로 쉬는 날이지만 입원 환자를 보려고 오전에 출근한다"며 오후에 만나자고 했다. "환자들이 이틀이나 담당 의사를 못 보면 얼마나 불안하겠나 싶어서…"라는 게 그가 병원 휴일에도 일하러 나오는 이유였다.
◇상상도 못할 욕설을 듣고도…
25일 오전 성가복지병원 5층 중환자실. 그가 들어서자 86세 강옥이 할머니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남편이 죽은 후 쓰레기로 가득 찬 집에서 혼자 살던 할머니는 치매와 영양 부족으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병원으로 옮겨졌다. 한 달간 치료와 보살핌을 받으면서 살이 뽀얗게 오른 할머니는 다음 날 요양 시설로 떠날 예정이었다.
"다른 병원으로 간다고 속상해 우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좋은 곳으로 가는 거예요. 에이고, 울긴 왜 울어. 이따가 오후에 만날 때는 웃어야 해요."
박 과장은 할머니의 눈물을 손으로 연신 닦아주고 어깨를 다독거렸다. 할머니는 금세 기분이 좋아진 듯 방긋 웃었다. 알코올중독과 간경화로 입원한 배경준(48)씨는 "과장님은 환자 마음을 정말 편하게 해 준다. 저런 선생님을 만나서 우린 참 다행"이라고 말했다.
박 과장에게 환자들은 가족이나 다름없다. 자원봉사자 안향춘씨는 "과장님은 환자들의 집안 사정까지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며 "병 치료보다 먼저 마음을 위로해준다"고 말했다. 방사선과 직원 김수연씨는 "환자들이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고 상상도 못할 욕을 퍼부어도 '우리 병원이 원래 그런 병원이지 뭐. 소외되고 외로운 분이 활개치고 넋두리하고… 어디 가서 그럴 수 있겠어'라고 말하곤 한다"고 했다.
무료 병원의 노숙자 환자 주치의는 처방과 치료 방법도 달랐다. 영양사 임정수씨는 약 10년 전 이 병원 근무를 시작했을 때 당뇨병 환자 식사 문제로 박 과장과 부딪혔다. 병원 측은 당뇨병이 심한 환자에게 양이 적은 식사를 하루 6번 주자고 했다. 박 과장은 반대했다. "괜찮다. 밥 많이 주고, 더 먹고 싶어하면 더 주라"고 했다. 그는 "이곳 환자들은 하루에 한 끼도 못 먹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혈당이 급한 게 아니다. 우선 밥 잘 먹게 하고 건강을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 혈당은 약으로 조절해주면 된다"고 했다.
성가복지병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박 과장에 대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칭찬만 쏟아냈다. 병원 급식실에서 일하는 조 아나다시아 수녀는 "박 과장님은 일 년에 몇 번씩 원장 수녀님 모르게 수십만원이 든 봉투를 내밀고 간다"며 "그 돈으로 소뼈와 고기를 사다 도가니탕을 끓여내면 환자와 인근 배 곯는 사람들에게 푸짐한 식사를 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조소화 데레사 법인사무국장은 "박 과장님은 연말 정산 때 세금을 환급받으면 그 돈을 모두 내놓는다"며 "이번에 보령의료봉사상 수상으로 받은 상금 3000만원도 전액 병원에 기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환자들에게 언제나 너그러웠다.
한 노숙인이 추운 겨울 밤에 벤치에서 벌벌 떨며 잠자는 모습을 본 뒤 신혼 때 장만한 이불을 가져다주고, 할머니 환자가 "입은 조끼가 참 좋다"고 말하면 며칠 후 그 조끼를 세탁해서 봉투에 담아오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인터뷰가 끝날 때쯤엔 "난 의사니까 오직 환자만 보고 살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지난해 그가 '이원길 가톨릭 인본주의상'을 받을 때 갈멜수녀원 수녀들이 추천서를 썼다. 내용은 이랬다.
"아프리카에는 슈바이처와 이태석 신부님이, 요셉의원에는 선우경식 선생님이, 저희에게는 박용건 선생님이 계십니다. 이 말이 의사 박 선생님께 드리는 저희의 최대 존경의 표시입니다."
-조선일보, 2014/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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