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이어 세계 2번째로 인터넷 기술 개발한 전길남 박사
'IT 코리아' 초석을 놓다
해외 과학자 유치에 부응해
NASA에서 가난한 조국으로
먼저 성공한 건 인터넷 연결
이어 컴퓨터 개발까지…
'청출어람' 제자들 키우다
카이스트의 호랑이 선생님
학문보다 벤처를 권했다
큰 스승 밑에서 자란 제자들
넥슨 김정주·리니지 송재경…
"제자들 공부만큼 山 타게 했지… 몸이 받쳐줘야 머리도 되니까"
美서 공부 재일교포의 한국行
NASA 동료들이 미쳤나며
모두 말렸지만…
제가 아는 걸 조국을 위해
쓸 때라고 생각했다
1982년, 인터넷 연결의 순간
전자기술硏~서울大 통할때
환호성 지르고 난리였지
해외 논문 실시간 받으며
인터넷의 眞價 드러나더라
인터넷의 빛과 그림자
악플 고통받던 최진실씨가
자살했을때 충격 받았죠
인터넷 도입 너무 빨랐나…
마음이 무거워질 때 많다
아내는 조한혜정 교수
인터넷 개발 자랑했을 때
사회학자인 아내가 묻더라
"우리 사회에 좋은 거예요?"
평생 저의 든든한 조언자
1982년 5월 15일 경북 구미 한국전자기술연구소의 한 연구실. 재일교포 출신의 한 과학자가 침을 '꿀꺽' 삼키고 컴퓨터 앞에 섰다. 연구실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서울에 있는 컴퓨터에 원격 로그인을 시도하려던 참이었다. 간헐적으로 컴퓨터에서 "삐익 삐이익" 날카로운 기계음이 흘러나오길 여러 번. '$ rlogin snucom' 구미 연구소 컴퓨터 모니터에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컴퓨터로 원격 접속됐음을 알리는 문구가 떴다. 독자 기술로 '정보통신 강국' 한국의 초석을 놓는 순간이었다.
지켜보던 연구원들은 서로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컴퓨터 앞에 서 있던 과학자는 감격에 겨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국 인터넷 역사의 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됐다.
세계에서 인터넷을 가장 먼저 개발한 나라는 미국이다. 1969년 미국은 UCLA와 스탠퍼드대학 등을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두 번째는 어느 나라일까. 놀랍게도 한국이다. 전길남(71)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이 그 주인공이었다. 한국 인터넷의 역사가 시작된 그날 이후 전길남은 '대한민국 인터넷의 대부(代父)'라 불린다.
- 지난달 26일 서울 홍은동의 한 호텔에서 만난 전길남 박사. 전 박사는 한국을 인터넷 강국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국가에 인터넷 기술을 전파하기 위해 애썼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인터넷 국제표준을 정하는 국제인터넷협회가 선정하는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 이태경 기자
전길남 박사는 1979년 2월 '해외 과학자 유치 프로그램'을 통해 귀국했다. 그는 귀국할 때 "한국형 알파넷(인터넷의 전신)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가 그에게 준 임무는 국산 컴퓨터 개발이었다. 그는 컴퓨터를 만드는 것보다 컴퓨터끼리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정부를 설득해보려 했다. 한국이 뒤늦게 컴퓨터 제조업에 뛰어들 바에야 인터넷 기술을 선도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이야 인터넷이 물 같고 공기 같은 존재지만 당시 한국에는 인터넷의 효시가 된 컴퓨터 네트워크에 관심을 가진 이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정부가 원하는 대로 컴퓨터 개발 작업을 하면서 인터넷 개발도 슬쩍 끼워넣었다.
"청와대에 가서 인터넷을 개발해야 한다고 우겼던 나도 지금처럼 인터넷 세상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올해로 한국에서 인터넷이 개통된 지 32년. 지난 30여년 한국 인터넷은 양과 질 모든 면에서 무섭게 성장했다. 이 인터넷 발전의 뒤엔 전길남이 있다.
그는 미국에 이어 한국에서 인터넷을 개발했을 뿐 아니라 아시아 인터넷 기구를 설립해 인터넷 표준을 제정했다. 이뿐만 아니라 카이스트에서 26년간 교수로 일하면서 IT업계 인재들을 키워냈다. NXC(게임회사 넥슨의 지주회사)의 김정주 회장, 리니지를 만든 엑스엘게임즈 송재경 대표, 정철 전 삼보컴퓨터 사장, 허진호 전 아이네트 사장이 모두 그의 제자이다. '전길남 사단'이라 불리는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전길남 박사가 없었으면 오늘 우리나라의 인터넷 발전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최고의 인재, 최고의 대우
지난달 말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의 한 호텔에서 만난 전 박사는 스티브 잡스를 연상시키는 스웨터 차림이었다. 그가 입을 열자 영어와 일어 억양이 뒤섞인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한국과 미국·일본을 돌아다니며 산 그의 인생 역정이 발음에서 묻어났다.
전길남은 일본에서 태어나 오사카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가서 UCLA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곳에서 '인터넷의 창시자' 중 한 명인 과학자 빈튼 서프와 함께 통신 기술을 연구했다. 1979년 한국에 돌아오기 전까지 그는 나사 제트추진연구소에서 일했다.
―미국에서 공부한 재일교포가 왜 한국에 오게 됐나.
"재일교포였던 나는 성년이 될 때쯤 일본에 계속 살지 혹은 한국에 돌아갈지를 결정해야 했다. 아버지가 경남 거창 출신이니 한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왕 한국에 갈 거면 박사 학위를 받고 가자 생각했다."
―그 시절에 나사 근무를 포기하고 가난한 조국에 돌아오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당시 정부가 해외 과학자 귀국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하지만 귀국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 정치 사정이 굉장히 불안했다. 한국에 간다고 하면 주변에서 모두 '미쳤다'고 했다. 동료들은 내가 설사 한국에 간다 해도 몇달 못 버티고 돌아올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다. "
―그런 상황에서도 한국에 온 이유는.
"조국을 위해 기여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사는 인류 최고의 기술로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위대한 조직이다. 내가 없어도 그 조직은 문제없이 굴러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한국은 달랐다. 내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차이를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난 이제 배울 만큼 배웠으니 내가 아는 걸 조국을 위해 쓸 때라고 생각했다."
전 박사는 UCLA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직후 한국 유학생인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지난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에서 정년 퇴임한 조한혜정 교수다. 아내가 박사 학위를 마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한국 정부에서 귀국을 제의했다.
"조건이 상당히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다. 진짜 감동스러울 정도였다. 박사 학위 받은 지 몇년 안 된 나 같은 사람을 이렇게까지 대접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때 내 월급이 대통령 월급보다 많다고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운전기사 딸린 자동차에 집까지 줬다. 아이고, 운전은 내가 그냥 해도 되는데…."
한국 정부는 전 교수를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스카우트하면서 당시 서울대 교수가 받던 월급의 3배를 줬다.
- 게임회사 넥슨의 창업자 김정주(왼쪽). 온라인 게임 리니지를 만든 송재경.
전 박사는 KIST(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에서 독립한 한국전자기술연구소에서 '컴퓨터시스템개발실장'이란 직책을 받았다.
―연구소에서 국산 컴퓨터 개발 임무를 맡았나.
"그랬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컬러TV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자신감이 있던 때였다. 여세를 몰아 국산 컴퓨터를 개발해 수출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 일을 하라고 날 부른 것이다."
―그런데 왜 컴퓨터보다 인터넷에 관심을 가졌나.
"그때 컴퓨터 국산화를 하면 세계에서 20번째였다. 하지만 인터넷 개발은 세계에서 최초 아니면 두 번째가 될 것 같더라. 어떤 게 좋겠나. 게다가 인터넷이 성공하기만 하면 무궁무진한 기회가 열릴 거라고 봤다."
―그건 그만큼 더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란 얘긴데.
"한국에 왔더니 젊은 사람들이 너무 열심히 연구하더라. 조금 어려운 걸 시켜도 밤을 새우면서 매달리는 거다. 그게 신기했다. 미국에서도 그렇게 열심히 안 하는데 이 정도면 인터넷 연구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물론 그게 원래 내 전공 분야이기도 했고."
전 박사는 UCLA에서 컴퓨터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나사에서도 우주비행선과의 컴퓨터 통신 기술을 연구했다.
―그러면 정부에서 요구한 국산 컴퓨터 개발은 안 하고 '딴짓'을 한 건가.
"아니다. 딴짓이라니! 결국 국산 컴퓨터도 만들어냈다. 둘 다 성공한 거다. 대단하지 않은가. 하하. 아마 그때 국산 컴퓨터 개발에 성공하지 못했으면 지금의 PC 산업은 없었을 거다."
―어떻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나.
"우리가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뭐가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예산에 구애받지 않고 뭐든 다 구해줬다. 우리는 연구에만 집중하면 됐다. 청와대에서도 찾아와서 부족한 건 없는지 세세하게 챙겼다."
―박정희 대통령이 연구소로 직접 찾아온 일도 있나.
"대통령이 연구소에 와서 '우리나라, 이거 안 되면 큰일 난다'고 했다. 자주 올 땐 한 달에 한 번 왔다고 했다. 그러면 다들 밤을 새워가며 일했다. 국가의 운명이 우리에게 달렸다고 느꼈다. 지금 돌이켜봐도 정말 그때 최고의 인재들이 최고의 대우를 받으면서 연구에 몰두했다."
당시 전 박사가 몸담고 있던 한국전자기술연구소나 모체였던 KIST엔 대통령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는 연구진이 수두룩했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연구소로 몰렸다. 고등학생들이 책상 앞에 'KIST'라고 써 붙여놓고 머리 싸매고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최초의 인터넷 연결…그땐 이해 못 받아
- 1980년 3월 24일 카이스트 전길남 교수 연구실에서 하와이 대학으로 보낸 이메일. 우리나라에서 국외로 보낸 최초의 이메일이다. / 전길남 박사 제공
"연구실 식구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였다. 최신 논문에서만 겨우 보던 걸 우리가 실현해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생각해봐라. MIT 애들도 낑낑대는 걸 우리 힘으로 해낸 거다."
―주변에서 많이 놀랐을 것 같다.
"아니, 별로. 개발 초창기엔 그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연구소 안에서도. 다들 그렇게 굉장한 거라는 생각은 안 했을 거다. 전문가들도 몰랐으니 일반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럼 언제부터 그 개발의 진가를 인정받게 됐나.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했을 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어렴풋이 '그게 중요했구나' 하는 걸 알게 된다. 인터넷도 마찬가지였다. 해외 대학에서 논문을 다운로드 받아서 보기 시작했을 때쯤일까? 당대 최신의 연구 논문이 인터넷을 통해 공유됐다. 해외 학회에 나가면 MIT·UCLA·스탠퍼드대학 학자들이 '인터넷에 올려 뒀으니 가져가라'고 했다. 인터넷이 연결되자 귀한 선진 정보가 대한민국에 실시간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인터넷의 진가가 드러났다."
◇체력은 국력
전길남 박사는 1982년 한국전자기술연구소를 떠나 카이스트 전산학과에 둥지를 튼다. 연구소에서 그를 관리직으로 승진시키려 하자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학교로 옮겨간 것이다. 카이스트 교수로 일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인터넷 기술을 개발하며 제자들을 길러낸다.
전국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괴짜들이 모인다는 카이스트 내에서도 전 박사의 연구실은 "가장 특이하다"는 평을 받았다. 50%가 채 되지 않는 낮은 논문 통과율이 그랬고, 공부만큼이나 운동을 강조하는 연구실 분위기가 그랬다.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는 "전길남 교수 연구실에선 날이 좋으면 좋아서, 안 좋으면 안 좋다는 이유로 등산을 갔다"고 말했다. 송 대표는 "겨울이면 스키장으로 MT를 떠났고, 산에서 조깅하는 건 일상이었다. 카이스트의 어떤 연구실과도 분위기가 달랐다"고 말했다. 김정주 NXC 회장은 "전 교수는 모든 학생을 극한 상황에 몰아넣고 최대한의 역량을 끌어내려고 했다"고 말했다.
―당시 제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호랑이 선생님이었다는데.
"무서웠대? 하하. 완벽을 추구했다. 학생들에게 완벽을 요구했고, 기준도 아주 까다로웠다. 5년에 한 명씩 나와 비슷한 수준의 학자를 만들어 내겠단 목표가 있었다. 25년간 교수를 한다면 나 정도 되는 학생 5명만 나오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기준에 미달하면 무섭게 다그쳤다. 내가 지도한 학생 중 박사 학위는 절반 정도밖에 못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느슨하게 했어도 되지 않나 싶지만 그때는 모든 지원을 다 해주고 대신 내가 정한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학위는 없다고 했다."
전길남 박사는 26년간 박사 11명의 제자를 뒀다. 비슷한 기간 재직한 교수들에 비하면 3분의 2 수준이다.
―학생들에게 운동은 왜 그렇게 강조했나.
"몸이 건강해야 연구도 잘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유 때문이다. 카이스트대학원에선 머리를 극한까지 쓴다. 머리만 쓰게 된다. 그러면 안 된다. 연구는 20~30년 걸리는 장기전이다. 규칙적으로 운동해야 좋은 연구 결과도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다 잘된 것일까.
"제대로 운동한 제자들은 다 잘됐다. 나중엔 운동에 자신이 없으면 우리 연구실에 가면 안 된다는 말까지 나와서 몸 좋은 애들이 많이 들어왔다. 하하. 첫눈이 내리면 연구실 식구가 다 같이 북한산 정상에 꼭 갔다. 여름엔 설악산에 가서 반나절 만에 올라갔다 내려왔다. 상식으론 이해 안 되지만 어차피 기술 연구라는 게 그런 것이다. 상식적으로 되는 것은 연구가 아니다. 새로운 기술을 연구한다는 것, 벤처사업을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미친 짓에 가깝다.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수준에서 되는 일이 아니다. 운동을 통해 그 한계를 뚫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등산은 그런 멘털 게임에 크게 도움이 된다."
◇"내가 받은 것처럼 학생들에게 모든 걸 지원해"
1980년대 중반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컴퓨터가 몰려 있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전길남 박사 연구실이었다. 서울대 전산학과에서조차 공용 컴퓨터 한 대를 갖고 번갈아 쓰던 시절 전 박사 연구실에선 대학원생 한 명당 컴퓨터가 한 대씩 있었다. 총 40대였다.
―그 비용은 누가 댔나.
"프로젝트 6~7개 따서 받은 연구비와 사비를 몽땅 털어서 샀다. 당시 우리 석사 학생이 쓰던 컴퓨터가 기상청 컴퓨터보다 훨씬 좋았다. 그걸 한 대씩 배정해줬을 때 컴퓨터를 부여잡고 울던 녀석들도 있었다. 하하."
―왜 그렇게까지 했나.
"나는 국가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고 그 덕에 연구를 성사시켰다. 내 학생들에게도 그런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높은 기준을 적용하고 있었는데 그러려면 환경도 그 수준이어야 하지 않겠나. 'MIT·버클리 수준으로 잘하라'고 요구하려면 연구 환경도 MIT·버클리 수준이어야 한다. 그게 안 되는데 열심히 하라는 건 말도 안 되는 것이다."
―학생들을 해외로 자주 보낸 것도 같은 이유인가?
"누구하고 경쟁하고 있는지 깨닫게 하려면 직접 보내는 수밖에 없다. 내가 만날 MIT, MIT 하는데 백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경험하고 오는 게 효과적이다. 그래서 원래 교수가 가야 하는 것도 학생들을 보냈다. MIT 학생 수준이 되려면 실제 MIT에 가서 하루라도 같이 부딪혀봐야 한다. 거기 가서 작업해야 거기 있는 사람들이 지금 어떤 환경에서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다녀오면 달라졌다. 와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 (위 사진) 2003년 1월 서울 남산의 국립중앙극장에서 열렸던 회갑연에서 전길남(오른쪽 아래) 박사가 제자들에 둘러싸인 채 환하게 웃고 있다. (아래 사진) 2008년 2월 대전 카이스트에서 열린 정년퇴임식에 참석한 전길남·조한혜정 부부. 전 박사는 카이스트에서 26년간 교수로 있으면서 정보통신 분야의 거물들을 길러냈다. / 조선일보 DB·카이스트 제공
부인 조한혜정 교수는 평생 남편의 든든한 조언자였다. 사회학자인 부인의 시각은 달랐다.
"인터넷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발했을 때 이공계는 '세계에서 두 번째입니다! 좋은 겁니다!' 그러면 된다. 집사람한테는 그게 안 통했다. '그거 우리 사회에 좋은 거예요?'라든지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너무 일찍 도입한 거 아니에요?'라고 묻곤 했다. 생각 못했던 부분을 많이 이야기해줘 항상 고마웠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터넷의 모습이 있다면?
"인터넷이 일상으로 들어오면서 문제점이 드러났다. 특히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과 같은 건 오프라인에서도 이미 사회문제였지만 인터넷과 결합하면서 문제가 더 커졌다."
―인터넷으로 인해 우리 사회가 겪는 부작용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나?
"책임도 느끼고 문제 해결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악플로 고통받던 최진실씨가 자살했을 때는 충격을 받아 인터넷을 개발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까지 했다. 내가 연구에 참여했든 하지 않았든 인터넷이 우리나라에 언젠가는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수준의 다른 나라들보다 우리가 10년 먼저 인터넷을 쓰기 시작한 데는 내 역할이 컸다. 그러니까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마음이 무겁다."
―인터넷 개발에 몰두했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개발을 포기할까.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돌아간다면 10년 앞당기는 일은 안 할 것 같다. 싱가포르와 홍콩 등은 이제 인터넷 도입 20년을 맞는다. 우리는 벌써 30년이 넘었는데…. 5년 정도만 앞당겼으면 딱 좋았을 텐데, 10년을 앞당겨서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능력 밖으로 기술이 폭주한 거 같다. 그게 위험한 거다."
―제자들에게 학문보다는 사업을 더 권했다는데.
"우리 연구실에선 교수가 되는 건 가장 마지막으로 생각하라고 했다. 교수는 면접 보면 될 수 있지만 벤처를 만드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제자들이 벤처사업을 하겠다고 하면 무조건 하라고 하고 최대한 도와줬다. 교수 한 명 더 키운다고 세상이 크게 달라지진 않지만 벤처는 큰 변화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벤처사업으로 성공했던 제자들에 대해 아쉽게 생각하는 점은 없나?
"왜 없겠나. 사회적 역할이 적은 것이 아쉽다. 그들이 쌓은 사회적 자산을 더 많은 후배가 얻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성공한 제자들과 함께 간다."
―그들은 인색한 것일까.
"제자에게 그렇게까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외부 활동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그들이 자랑스럽고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더욱 책임감을 느끼라고 말한다."
'대한민국 인터넷의 대부' 전길남은 카이스트 정년 퇴임 후 일본 게이오대 쇼난후지사와캠퍼스 정책미디어 연구과 특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8년 퇴임 후 게이오대와 중국 칭화대에서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하며 경쟁적으로 스카우트하려 했는데, 일본 제일의 정보통신 학과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자고 한 게이오 측에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런 매력적인 제안을 하며 그를 찾는 곳은 없었다고 한다.
-조선일보, 2014/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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