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脈황제'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
인맥 관리의 비결은?
사람은 미워해도
예술은 미워하지 않아
원한 쌓이고 결점 보여도
돕고 지지하는 게 내 의무
인간관계는 인과관계
"친해지겠다"가 아니라
"돕겠다"는 마음 가져야…
"죽어도 안 본다" 생각하고
꼭 필요한 동반자 되기도
'유혹'도 많았지
모금액 724억 몽땅 맡기면
1억 준다던 은행 간부도…
세상에는 눈이 많다
순간 욕심에 인생 무너져
"인간관계는 인과관계다."
지난달 21일 오후 7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을 메웠던 문화계 인사 700명은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을 현장으로 증명했다. 모철민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동호 문화융성위원장,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나경원 전 국회의원, 배우 손숙 신성일, 이해인 수녀, 안숙선 명창, 소리꾼 장사익…. 이름만 들으면 아는 인사들이 그를 위해 모였다. '공연계 대부(代父)', '예술 행정의 귀신', '문화예술계의 히딩크'로 불리는 이종덕(79) 충무아트홀 사장이다. 이날 행사는 그의 자전 에세이 '공연의 탄생' 출판기념회였다. 발간 축사를 쓴 이들도 화려하다. 강수진 국립발레단장, 김동호 위원장, 배우 문희와 박정자, 지휘자 정명훈이다.
정·관·예술계 유명인을 구름처럼 모으는 이 사장은 공연계에서 보기 드문 신화(神話)를 써왔다. 그는 1963년 문화공보부에서 시작해 서울예술단,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성남아트센터의 대표를 거쳤다. 그저 거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서울예술단의 제2창단을 이끌며 단원을 두 배로 늘렸고, 예술의전당 사장으로는 최초로 임기를 다 채우고 물러났다. 세종문화회관의 첫 민선 사장이었으며, 성남아트센터 초대 사장을 맡아 세 번을 연임했다. 2010년 은퇴를 선언하려는 그를 중구청장이 다급히 찾아왔다. 민주당 소속의 청장은 보수 성향의 이 사장에게 "충무아트홀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3년 임기를 마치고 은퇴하려 했으나 올해 초 임기가 연장됐다.
이쯤 되면 공연계 인사가 아니더라도 궁금할 법하다. 도대체 어떻게 그 많은 예술인과 친분을 유지하며 여러 공연장을 이끌어 왔을까, 하고.
- 자식처럼 아끼는 충무아트홀 대극장에 선 이종덕 사장은 “외아들로 자란 에고이스트였으나, 공연계 사람을 도와주다 껍질을 깨게 됐다”고 말했다. 의리와 인정으로 유명하지만 가슴에 묻어둔 서운한 기억도 몇 가지 있다. “그럼, 나도 삐친다니까.” / 허영한 기자
"사람은 미워도 예술은 미워하지 않는다는 신조를 지켜왔다. 인간적으로 서운한 일을 당하거나, 결점이 보여도 그가 예술로 국위 선양을 했으면 지지해줘야 한다. 그것이 국가적 예술을 가꿔가야 하는 문화인의 의무다."
―오랜 세월 지내다 보면 배신도 당했을 텐데.
"속으론 죽이고 싶은 사람도 있다. 내가 전폭적으로 지원해줬던 무용가 K는 결정적인 순간에 내 반대편에 섰다. 원한의 못이 박혔으나, 그가 공연 준비를 도와달라고 전화했을 때 지원했다. 수십년 지켜봐온 음악인 J는 오만하고, 음악인 K는 인간미가 없다. 그래도 도와준다. 어차피 만찬은 예술가의 몫이다. 뒤에서 땀 흘린 예술 기획자는 성공 뒤에 가리는 것이 운명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소통하는 젊은이들에게 인맥 형성은 어려운 과제다.
"인간관계는 인과관계다. 인연과 인연이 얽히고설켜 사람이라는 재산이 늘어가는 것이다. '저 사람하고 친해지겠다'가 아니라 '저 사람을 돕겠다'는 생각으로 사귀라. 돕다 보면 주변 사람도 만나고, 도우려는 나에 대한 호감이 알려져 끈끈한 인맥이 형성된다. 사람 관계는 의지와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 도움을 받으려고 했는데, 상대편 좋은 일만 생기기도 하고, 죽어도 안 보려고 했는데 꼭 필요한 동반자가 되기도 한다. 돌고 돈다. 끝이라는 말은 끝까지 하지 마라."
―인맥을 만들 구체적인 방법이 있나?
"모임을 만들어서 활동하라. 만나자고 매번 전화하면 서로 부담스럽다. 정기적으로 모임에서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성품을 알게 된다. 나는 1990년대 중반부터 초하루회, 낭만파클럽, 광화문문화포럼 등 20여 모임에 나갔다. 지금도 7~8개 참여한다."
예술 행정은 물과 기름을 섞는 일이다. 예술은 결과가 중요하고, 행정은 과정이 우선이다. 이 사장은 물리학에서는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을 '사람'으로 섞어가며 50년을 지나왔다. 천운(天運)이 돌봐준 이력이었으나 샛길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유도와 레슬링으로 몸을 단련한 그는 연세대 재학 중 종로 일대의 주먹들과 어울렸다. 그러다 장충단공원의 활극에 휘말리며 쇠파이프에 오른쪽 이마를 맞아 응급실에 실려 갔다. 이 사장은 "움푹 들어간 이마의 상처를 볼 때마다 정도(正道)를 되새긴다"고 말했다.
참척(慘慽)의 고통도 있었다. 딸 넷을 낳고 어렵게 얻었던 3대 독자를 교통사고로 먼저 보냈다. 슬픔을 떨치기도 전에 구조조정으로 공직을 떠나게 됐다. 그러나 나락이라고 생각되던 그때 다시 일어섰다. 1983년 3월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상임이사로 옮긴 그의 아이디어로 조성된 것이 동숭로 마로니에 공연이다. 최원석 동아그룹 전 회장의 동생인 최원영씨가 잡지 객석을 창간하도록 도와주고 공사비 5000만원을 기부받았다.
―공연장 사장도 지냈으니 '유혹'이 많았을 텐데.
"1989년 북한 금강산댐에 대응해 평화의댐 모금 운동 벌일 때 추진위원회 사무총장이었다. 모금액이 724억원이나 됐다. 모 은행 간부가 찾아와 전체를 맡겨주면 1억원을 주겠다고 했다. 당연히 흔들렸다. 그러나 그 돈을 받으면 내 경력은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곧바로 13개 은행에 나눠서 저축했다. 예술의전당 재직할 때 오페라하우스 음식점이 결혼식 피로연으로 돈을 벌었다. 못하게 하려 했더니 음식점 사장이 집에다 과일 상자를 보냈다. 안에 '뭔가'가 있었다. 운전기사를 통해 사장에게 조용히 다시 전달했다. 세상에는 눈이 많다. 순간의 욕심에 인생이 무너질 수 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의리의 상사로 유명하다. 이번 기념회 때 추천사를 맡아 단상에 선 박정자씨는 '은밀한' 쪽지를 받았다. 이 사장이 "반드시 언급해달라"고 부탁한 이름 둘이 적혀 있었다. 임전일, 이재봉. 문공부 재직 시절 그를 모셨던 직원들이었다. "공개적으로 칭찬한 적이 없어서 꼭 해주고 싶었다. 나 혼자 잘나서 잘된 게 아니다."
―직원을 대할 때 어떤 점을 주로 보나?
"되든 안 되든 일에 달려들어야 한다. 일하다 그릇을 깨는 것은 용서하지만, 안 깨고 안전하게 가려는 직원은 필요 없다. 전적으로 맡기되, 보이지 않게 감시한다. 피부로 느껴진다. 노는지 하는지."
높은 자리를 많이 거쳤으나, 진정으로 원했던 한 곳을 못 맡아봤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몸담아 일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다. "내년에라도 기회가 오면 가고 싶으시냐"고 물었다. "이 나이에, 뭘" 하던 팔순 대부는 "사실 거긴 나이가 많은 사람이 가는 게 좋긴 좋은데…"라고 말을 흐렸다. 그러더니 서둘러 덧붙였다. "그러나 너무 지탄을 받을 정도는 안 하는 게 좋겠지."
- (시계 방향) 손숙·신성일·이해인·김동호·강수진·정명훈
1935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경복중·고등학교,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63년 문화공보부에서 예술 행정 업무를 시작했다. 예술의전당(1995~98), 세종문화회관(1999~2002), 성남아트센터(2004~2010) 대표를 지냈다. KBS교향악단 이사장, 라자로마을돕기회 회장, 광화문문화포럼 회장이다.
-조선일보, 201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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