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죽는 존재'임을 알면… 그 앞에선 지성과 명예, 재력도 無力할 뿐"
['한국 대표 知性' 이어령 선생 송년인터뷰]
"난 혼자서 눈비 맞는 '대나무' 사주… 외롭지 않은 작가란 있을 수 없어
남과 조화로우면 왜 글을 쓰겠나, 우리 작가들은 너무 사교적이지"
"내 정신세계가 높은 줄 알았는데 며칠을 굶고서 기껏 배고픔에 짐승처럼 되는 나에 대해 분노… 이런 정신적 오기가 날 만들었다"
다방면으로 놀라운 성취를 이룬 '한국 대표 지성(知性)'인 이어령 선생과 대담하는 것은 뭔가 내 밑천을 드러내는 기분이었다.
그는 얼마 전 '생명이 자본이다' 책 출간과 함께 팔순 잔치를 해서, 이렇게 질문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살아 보니 80년의 세월은 짧은가요, 긴가요?
"한국 작가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한 이상(李箱)은 27세에 죽었어요. 우리 때는 작가치고 '천재병'에 안 걸린 사람이 없었어요. 천재란 서른 살 안에 죽는 걸로 알았지, 늙는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어요. 내 나이 20대 후반 때, 안의섭(신문 연재만화 '두꺼비'를 그렸고 1994년 별세)씨가 '2000년에는 이렇게 될 것'이라며 해골처럼 바싹 마른 내 얼굴을 그려줬어요. 그때는 다들 웃었어요. 2000년에는 내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았지요."
―팔순 잔치는 하셨는데.
"서른이 지나 '흙속에 저 바람속에(1963년)'를 쓰고 논설위원을 하면서 '이게 아니구나'하며 인생 계획을 수정했어요. 그때 80세까지 계획을 세웠어요. 팔십까지 괜찮게 글을 쓴 사람을 찾아보니 괴테(독일의 대문호)가 있었어요."
그는 얼마 전 '생명이 자본이다' 책 출간과 함께 팔순 잔치를 해서, 이렇게 질문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살아 보니 80년의 세월은 짧은가요, 긴가요?
"한국 작가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한 이상(李箱)은 27세에 죽었어요. 우리 때는 작가치고 '천재병'에 안 걸린 사람이 없었어요. 천재란 서른 살 안에 죽는 걸로 알았지, 늙는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어요. 내 나이 20대 후반 때, 안의섭(신문 연재만화 '두꺼비'를 그렸고 1994년 별세)씨가 '2000년에는 이렇게 될 것'이라며 해골처럼 바싹 마른 내 얼굴을 그려줬어요. 그때는 다들 웃었어요. 2000년에는 내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았지요."
―팔순 잔치는 하셨는데.
"서른이 지나 '흙속에 저 바람속에(1963년)'를 쓰고 논설위원을 하면서 '이게 아니구나'하며 인생 계획을 수정했어요. 그때 80세까지 계획을 세웠어요. 팔십까지 괜찮게 글을 쓴 사람을 찾아보니 괴테(독일의 대문호)가 있었어요."
- 이어령 선생은“한때 글을 쓰면 빛나는 언어들이 내 앞에서 나비와 고추잠자리처럼
- 날아다녔다”고 말했다. /김지호 객원기자
"그전까지는 영원히 사는 것처럼 일을 했어요. 이제는 모든 게 '유언(遺言)'처럼 됩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무슨 일을 해도 내일이 없으니 전념하게 되죠. 오늘 대담도 그런 마음이죠. 다음에 다시 해볼 기회가 없어요. 붓글씨처럼 개칠이 안 되는 거죠."
―삶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바뀌었나요?
"그렇지요. 이번 책 '생명이 자본이다'의 키워드는 생명과 사랑입니다. 낯간지럽지요. 이제 와서 통속적인 단어인 생명과 사랑에 우리 앞날이 달렸다고 하니까, 세월이 만들어낸 조화죠."
―2007년 기독교에 귀의한 것도 이런 '노년(老年)'의 순응으로 설명됩니까?
"내 지적(知的)인 힘이 흔들렸다느니, 독자들을 배신했다느니 하는 소릴 들었어요. 처음에는 순전히 딸(작년에 숨진 이민아 목사) 때문에 한 거죠. 실명 위기에 처해 아버지가 기독교를 믿는 게 소원이라는데, 그 딸 앞에 섰을 때…."
―당대 최고의 지성(知性)도 그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나요?
"내가 예리한 지성으로 책을 수없이 썼고 명예·재력을 가졌어도, 아무것도 아니었죠. 말하자면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였어요. 딸을 통해 나도 눈이 멀고 똑같은 죽음의 체험을 한 것이지요."
―신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나요?
"젊어서부터 내 글에는 존재의 고민을 담고 있었어요. 사실 내가 참여문학과 거리를 둔 것은 이런 고민 때문이었지요. 절실한 정치·경제 문제를 해결해도 우리는 죽는다는 것,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문제도 굴복하고 만다는 것, 이런 '실존(實存)'에 대해 고민하면서 성경을 비판하고 절대자를 부정해왔지요. 하지만 그 부정(否定)은 관심의 시작이었던 거죠."
―신이 없다면 신을 만들어서라도 존재시킬 필요가 있다고 하지요.
"하기야 하인리히 하이네(독일 시인)도 만년에 루브르박물관 앞에 쓰러져 동상을 끌어안으며 '나를 어떻게 해달라. 더 강력한 신은 없느냐'고 울부짖었지요."
―종교를 받아들이면서 '일회성 존재'도 극복하고, 사후에 대한 확신을 얻었습니까?
"내게 종교는 죽으면 어떻게 달라지고 천당에 가는 것을 뜻하지 않아요.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답을 얻는 과정일 뿐이지요."
―때가 되면 맞게 될 죽음의 문제가 왜 중요하죠?
"어둠을 모르면 빛을 모르듯이. 이를 통해야만 생명이 보이기 때문이죠. 중세수도사들은 '메멘토 모리(죽음을 잊지 마라)'라고 서로 인사했지요. 요즘은 죽음을 잊어버린 시대입니다. '존재'가 아닌 '소유'에만 관심이 있지요. 우리가 죽는 존재임을 알면 결코 지금처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서로 극단적이 될 수가 없어요."
―매주 교회는 나갑니까?
"안 나가요. 대신 매달 한 분의 목사님과 토론하지요."
―선생님은 교수, 비평가, 에세이스트, 칼럼니스트, 소설가, 시인, 초대 문화부장관이었고, 88서울올림픽 행사 연출, 새천년준비위원장, 한·일 월드컵 총괄기획까지 했지요. 정작 본인은 무엇으로 규정되기를 원합니까?
"내 정체성은 '크리에이터(창조하는 사람)'이지요. 88올림픽 때 굴렁쇠를 굴리는 것이나, 새천년축제 때 아이가 태어나는 장면을 전 세계에 생중계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런 기쁨 때문에 좋아서 한 것이지요."
"88올림픽 행사를 앞두고 매일 새벽 3시까지 시나리오를 썼어요.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그때 나는 한 푼도 안 받고 일했어요."
―선생님은 먹고사는 것에 좌절 없이 늘 승승장구하셨으니까요.
"먼 데서 본 잔디밭은 파랗지만 가까이서 보면 별거 아니죠. 일제 치하와 6·25를 겪은 내 성장 과정에는 물질적 궁핍이 심했어요. 며칠을 굶었을 때, 내가 절망과 분노를 느낀 것은 배고픔 때문이 아니었어요. 나 자신이 정신적으로 높은 줄 알았는데, 기껏 배고픔에 짐승처럼 되는 나에 대해 참을 수 없었어요. 이런 정신적 오기가 나를 만들었어요."
―자본주의에서 우리 일은 대부분 돈으로 보상받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많은 요청이 있었지만 돈 받는 광고는 찍은 적이 없어요. 물론 글을 쓰면 원고료가 나오지요. 강연하면 강연료를 받아요. 강연이 목적이고 돈은 따르는 겁니다. 나는 우물을 파서 물이 나오면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시 다른 우물을 파러 떠났어요."
―한 우물을 파도 물이 제대로 안 나오는 우리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때 세계문학 전집을 다 읽었어요. 문학적 상상력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준 겁니다. 아이들에게 '나비야 나비야 이리 오너라'만 가르치고, 동화만 읽혀서는 안 됩니다. 명작과 고전을 읽혀야지요. 인간의 뇌(腦)는 어려운 것에 자극됩니다."
―선생님 기준에서만 보는 게 아닌가요?
"초등학교 때 세계문학 전집을 다 읽은 사람은 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존 러스킨(영국 미술평론가)은 여섯 살 때 시를 쓰고 여덟 살 때 라틴어로 신곡을 읽었어요. 제임스 조이스('율리시스'를 쓴 작가)도 그렇고. 우리가 늦는 겁니다."
―그건 특별한 사람들의 사례이지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똑같은 생각과 반복 교육이지요. 어릴 때 나는 이를 잘 안 닦았어요. '얼굴은 깨끗하게 생긴 게 왜 그러느냐'는 핀잔을 들었지만, 나는 아침마다 반복해 이를 닦는 게 바보 같았어요."
―물론 지금은 안 그러시겠지요?
"어릴 때는 호기심이 왕성했으니까요. 서당에서 '천지현황(天地玄黃·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을 배울 때, 내가 '하늘은 파란데 왜 까맣죠?'하고 물었어요. 훈장이 '밤에는 까맣지'라고 하자, '밤이라면 땅은 왜 누렇다고 해요?' 되물었어요. 그래서 혼났어요. 백남준은 처음 만났을 때 '난 학교에 갈 때 남이 안 가는 낯선 길로 가다가 개에게 물리기도 했지. 늘 같은 길로 가는 게 재미가 없었거든'이라고 했어요. 그 순간부터 그를 좋아했어요."
―어느 글에서 보니 선생님 입으로 "나는 대나무사주"라고 했더군요.
"혼자서 눈비 맞고 외로운 사주죠. 장차판검사나 장군이 된다고 했어요. 해석 나름이겠지만, 문학평론이 '문학 판검사'이고, 수십만명의 팬이 따르니 장군인 셈이죠."
―문단에서는 별로 평가를 못 받았죠. '장군의 수염' '환각의 다리' 같은 포스트모던류의 소설도 썼지만.
"문단인지 문당(文黨)인지…, 그때 소설이 하도 천편일률적이어서 소설은 이렇게 쓴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던 거죠. 내 입으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지만, 서른 살에 쓴 '흙속에 저 바람속에'는 50년 동안 절판되지 않은 채 계속 몇천 부씩 나가고 있어요. 이런 전무후무한 기록에 대해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어요."
―우리 같은 평범한 재능에게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일 수밖에 없죠.
"문단에 내 파(派)나 패거리가 어디 있나요. '장군의 수염'에서 소풍 간 학생들이 그룹끼리 사진을 찍는데, 주인공은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아. 혼자서 숲에 누워 공상에 빠져 잠들었어요. 전교생이 그를 부르며 찾자, 그때서야 그는 기뻐합니다. 주인공이 실제로는 나였지요."
―인간관계는 남을 위해 자기 시간과 노력을 바쳐야 하는데, 선생님은 술자리도 안 하고 이기적인 면도 많았으니 자업자득이지요.
"내 성정이 그렇고, 에고이스트지. 하지만 외롭지 않은 작가란 있을 수 없어요. 타인과 갈등이 있기 때문에 쓰는 것이고, 남과 조화로우면 왜 글을 쓰겠어. 말하자면 작가는 유배당한 사람이지요. 우리나라 작가들은 너무 사교적이고 세속적이어서 글이 안 나와. 나만 해도 그렇고."
―책에서 보니 어린 시절 별명이 '겐카도리(싸움닭)'이더군요.
"많이 싸웠죠. 서울대 강사가 돼서는 서울대 총장과 싸웠으니까. 당시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이 '저렇게 비(非)사교적이고 제 앞가림을 못하니'하면서 저를 이화여대로 데려간 거죠. 특례 중의 특례였어요. 다른 교수들과도 다툼이 많았지만 늘 보호해줬어요. 이제와서 이런 말을 하게 되니…."
그냥 놓아두면 그의 달변은 이리저리 이어지고 끊임없이 흘러갔다. 지금까지 내 질문은 늘 간신히 끼어든 것들이었다.
―선생님에게는 '문장가는 눌변'이라는 통념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말은 우리 집안 형제들이 모두 타고났어요. 글은 아니에요. 한때 글을 쓰면 빛나는 언어들이 내 앞에서 나비와 고추잠자리마냥 날아다녀 이를 포충망으로 낚아채듯 했지요. 하지만 이제 내 충복(忠僕)인 언어들이 산산이 흩어지고, 가끔씩 한 마리가 날아오지만 잡으려면 비켜가요."
―연초에는 새해 결심을 하지만, 연말에는 무얼 해야 합니까?
"열대우림의 나무에는 나이테가 없어요. 나이테는 추위를 겪어야 생기죠. 가장 어려웠던 순간을 떠올리면 자신의 삶에 나이테가 하나 생기게 되지요."
-조선일보, 2013/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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