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소녀' 그녀는 왜, 도시락을 들고 나타났나
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결혼→보험 설계사→수입車 딜러→주부→도시락 사업가로 변신한 임춘애
은퇴 대표선수들 자활 지원… 운동선수 사회생활 잘 몰라 생계 못잇는 경우 적잖아요… 협동조합으로 자립 도와요
'라면 소녀' 이제는 괜찮다… 사실 뱀탕에 개소주까지 잘 먹으며 운동했는데… 다들 불쌍하게만 바라봐 창피해서 지우고 싶었죠
후배 선수들 부럽더라 요즘 후배들 즐기면서 운동경기 끝나면 웃고 환호하고…아마 예전에 그랬으면 힘이 남냐며 혼났을거예요
커다란 눈망울은 여전했다. 세월이 세월인 만큼 어느 정도 나잇살도 붙었으려니 생각했건만, 긴 팔다리는 정말 타고나긴 했나 보다. 1986년 당시와 크게 변한 것도 없어 보였다. 선머슴 같은 모습만 찾기 힘들었을 뿐이다. '조근조근' 하는 말투에, 무슨 말만 꺼내면 "그러게요" 하며 배시시 웃는 모습에서 심지어 '소녀'가 비쳤다.
'라면 소녀' 임춘애.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육상 중·장거리 종목에서 한국 육상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 3개를 목에 걸며 '영웅'이 된 소녀. 깡말랐던 그 소녀가 "라면 먹고 뛰었다" "우유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고 전해지면서 '헝그리 정신'의 대명사가 됐다. '라면 소녀'란 별명도 붙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이야기가 싫었다. "라면, 우유 소리만 나와도 징글징글했어요. 사실이 아니니까. 숨어버리고 싶었죠."
평생을 따라다니던 '라면 소녀'를 인생에서 가장 지우고 싶었다던 그녀가, 임춘애란 이름이 사람들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던 그녀가 스스로에게 도전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임춘애 도시락'을 내놓은 것이다. 은퇴한 국가 대표 선수들의 자립과 자생을 목표로 한 '한국국가대표은퇴선수협동조합' 사업의 일환으로 88서울올림픽 복싱 헤비급 은메달리스트 백현만씨 등이 참여했다. 얼마 전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사무실에서 만난 임춘애(44)는 "평범하게 사는 것처럼 힘든 건 없더라"며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일하는 게 가장 행복한 것 같다"고 말했다.
- 그동안은 되도록 숨어 살고 싶어했다. 그랬던 임춘애가 자기 이름을 내건 도시락을 들고 사회에 나섰다. 그녀는 “‘인생 2막’을 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지호 객원기자
―왜 이 일을 하게 됐나요?
"국가 대표 출신 중에서 잘된 분도 있지만 생계도 제대로 못 잇는 분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거든요. 정해진 규칙대로만 살던 사람들이고, 성향 자체도 곧이곧대로, 나쁘게 말해 고지식해서 사회에 녹아드는 방법을 잘 몰라요."
―'임춘애'이름을 전면으로 내세웠어요.
"그러게요. 고민 많았어요. 이게 음식이다 보니 혹시라도 잘못되면 화살이 전부 저한테 날아오잖아요. 전 괜찮은데 혹시 저희 아들딸들이 욕을 먹을까 봐…. 그만큼 지금 책임감이 엄청나요. 사실 전 대인 기피증 같은 게 있었거든요. 너무 어린 나이에 주목받았잖아요."
임춘애도 대학 3학년 때 고관절 이상증과 피로 골절 등으로 은퇴했다. 극도로 운동하니까 선수 생명이 짧았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코치를 지망하며 일본 연수도 떠났지만 자리를 잡는 게 쉽지 않았다. 보험설계사, 트레이너, 외제차 딜러 등에 도전했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 반 정도 근무가 끝이었다.
"운동만 아니면 다 쉬워 보였죠.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참, 힘들더라고요."
―사회생활을 영업직으로 시작했네요. 대인 기피증도 심했다면서요.
"그러게요. 제가 말 많이 하는 걸 되게 힘들어하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 영업만 하게 되더라고요. 하하. 능력은 부족했지만 영업을 아주 못하진 않았어요. 운동선수 출신이라선지 '쟤는 나를 속이지는 않겠다' 그렇게 받아들이신 거 같아요. 영업에선 그런 신뢰와 정직 같은 게 굉장히 중요하더라고요. 그러다 상대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마음 트는 것도 배우고…."
―운동할 때와 사회에 나간 뒤 가장 큰 차이는요?
"운동은 열심히만 하면 달라져요. 노력한 만큼 보상이 오거든요. 경기장에서 얼굴만 보면 딱 알아요. 시달려 보이면 '무서운 애다' 하는 감이 딱 오거든요. 그런데 사회생활은 열심히 해도 아닌 게 많더라고요. 누가 준비된 사람인지 아닌지 딱 봐서 표가 나는 것도 아니고…."
―흔한 말로 '얼굴이 명함'이란 얘기가 있잖아요.
"에이, 왕년의 임춘애가 달리기만 할 줄 알았지 솔직히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어요. 다른 일 하면 소심해질 수밖에 없죠. 그래도 힘들고 그럴 때는 '다른 애들보다 잘 이겨내겠구나' 하는 생각은 있었어요. 독하게 운동했고, 다 견뎠잖아요."
- 86아시안게임 육상 3000m에서 우승한 뒤 환호하는 임춘애. /조선일보 DB
임춘애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운동을 시작했다. 유복한 환경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공사판에서, 어머니는 식당 일을 하며 아이를 키웠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국체전 3위를 한 뒤 소위 '꿈나무 관리'를 받게 됐다. 적지 않은 장학금도 들어왔다. '배고픔을 잊기 위해서'만 뛴 건 아니란 이야기다. "어휴, 무서워서 뛰었어요. 맞을까 봐. 그 당시 전 '공포'로 뛰었거든요."
―임춘애 하면 '헝그리'를 떠올리는데.
"남들은 못 먹어서 헝그리라 생각했다지만, 저로서는, 말하자면 기록에 대한 '헝그리'였던 거죠. 그 당시 변변한 육상 기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메달을 기대하지도 않는 분위기였거든요. '한번 해보자' 하는 그런 헝그리 정신은 상당했어요. 웃기는 얘긴데, 솔직히 말하면 못 먹고 뛰긴 했어요. 코치님께서 그렇게 보양식을 많이 해주셨는데도, 운동이 너무 힘들어서 먹을 수가 없었어요. 하하."
―그래도 '라면 소녀' '우유 소녀' 이야기는 당시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는데요.
"그게 저한테는 독이었어요. 뱀탕에 개소주까지 잘 먹고 운동했는데 불쌍하게만 바라보니까 어린 마음에 창피하기도 했고요. 대학 첫 미팅을 나갔는데 남자 쪽 첫마디가 '아직도 우유 마시고 싶으세요?'인 거예요. 그 얘기 듣자마자 뛰쳐나왔죠. 그 뒤로 한 번도 미팅한 적 없어요."
―이젠 '라면 소녀'를 받아들인다는 거군요.
"아니라고 해도, 이렇게 절 따라다니니 어쩌겠어요. 그냥 받아들여야죠. 하하. 평범하게 조용히 사는 게 꿈이었는데, 다들 잊은 줄 알았는데, 양학선 선수 때(2012년 올림픽 체조 금메달을 딴 뒤 선수 어머니가 '라면 끓여줄까?'라고 인터뷰한 일) 언론에 제 이름이 또 나오데요. 허, 참. 나이가 들어서 그만큼 사람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오랜 기간은 못 했지만 영업하면서 사람들 생각이 다를 수 있구나, 그런 것도 배운 것 같고…."
◇"적당히 사는 행복을 배우는 중"
세월 때문일까, 직접 부딪치며 사회에 대해 '조금'은 알았기 때문일까, 그녀 표현대로 이전처럼 '송곳' 같은 모습은 없어진 듯했다.
"얼마 전 동호회 마라톤 코치를 하게 됐거든요. 근데 마라톤하는 사람들이 운동이 즐겁다고 말하는 거예요. 난 운동이란 건 무조건 이겨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솔직히 저 어릴 땐, 요새 말로 학대받은 거잖아요. 요새 애들 경기하는 거 봐도 편하게 즐기는 거 같더라고요. 저희 땐 메달 따도 웃을 수 없었거든요. 경기 끝나고 웃고 좋아하면 '힘이 남느냐'며 혼이 났으니…. 그 뒤에 많은 게 바뀌었어요. 일단 즐기자, 좋아하는 걸 즐기면서 하자 마음먹었죠."
좋았던 시절을 되돌아봤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동치미 국물에 밥을 말아주셨는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가 저 어릴 때(초등학교 5학년) 돌아가셨잖아요. 아버지 사랑을 많이 못 받고 자라서 그런지 사회생활하다 힘들 때면 그 밥 생각이 그렇게 나는 거예요. 속상한 일 있을 때 아버지가 해준 대로 먹고 나면 어찌나 그렇게 속이 시원하던지…."
그렇게 먹었던 밥 한 끼, 소박하지만 가족끼리 나눴던 그 순간이 추억이자 영혼의 안식처라고 했다. 그런 밥을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싶다고 했다. 협동조합 사업으로 도시락을 선택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사회생활하면서 특별히 성공이란 건 해보지 못했지만, 재밌는 게, 제가 중거리 선수 출신이잖아요. 단거리처럼 폭발력 있지도 않고, 마라톤처럼 인내력이 끝내주는 것도 아니지만 적당히 인내하고 참아내는 성격은 타고난 것 같거든요.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참아내고, 적당히 살아가는 거, 그게 제일 어려운 것 같지만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또 아나요. 인생 결승선에 가선 제가 그때처럼 환호하고 있을지…."
- 최보윤 | 기자
- -조선일보, 201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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