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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베르사유궁 초대받아 개인展 여는 이우환

하마사 2013. 11. 30. 13:10

내년 베르사유궁 초대받아 개인展 여는 이우환

 

 돌 찾아 지구 한바퀴
영국 템스강부터 알프스 산맥
美 공사장까지 별의별 곳다 돌아다녀요
"외국 평단서 날 禪·동양적·한국적이라고 評하는 걸 가장 싫어해요"

서양서 국가 등 내걸면 안통해… 나에게 동양적이라고 하면
'잘 놀다 가세요'라는 뜻 그걸론 내가 망가지고 말아

돌에도 국적 있더라… 미국 돌은 어벙하고 듬직
일본 돌은 매끈한데 숨막혀 한국 건 다소 열려있는 느낌

미대 간 문학 청년
高2때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부문 가작으로 등단했지
점수 모자라 문리대 안써줘 하는 수 없이 미대 들어갔어

청년시절의 그림때문에 골치
일본서 고학하던 시절 그림 그려 파는 일 했는데
당시 작품들 많이 나와… 그때 그림 가지신 분들 빨리 내다 버려줬으면

[Why] [김신영 기자의 클로즈업(closeup)]
‘구도(求道)하는 작가’이우 환에게 돌은 무한한 자연, 외계와 연결된 타자를 상징한다. 지난 27일 서울 방배동의 한 조경 가게를 찾은 이우환이 돌 사이를 오가며 마음에 드는 돌을 찾는 모습. 그는 이렇게 찾은 돌을 철판과 마주하게 하거나 유리 위에 떨어뜨려 작품을 만든다. / 성형주 객원기자
    "돌이 없어. 돌이 하나도 없어." 거친 눈바람이 남기고 간 냉기(冷氣)가 매섭던 지난 27일. 머리가 허연 자그마한 남자가 서울 방배동 한 조경 가게에 언덕처럼 쌓인 돌무더기를 어지러이 오르내리며 눈을 번득였다. 그는 코트도 입지 않은 단출한 차림으로 돌을 만지고, 살피고, 뒤적였다. "이건 밑이 약해서 안 돼." "앞은 둥근데 뒤가 모가 났잖아, 안 돼."

스산한 겨울 오후, 무심하게 놓인 돌들에 주먹을 휘휘 흔들며 혹평을 퍼붓는 사람은 '구도(求道)하는 작가'로 불리는 이우환(77)이다.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은 그를 '회화와 조각의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확대한 철학자·예술가'라고 설명한다. 2011년 구겐하임미술관에서 동양인으로서 세 번째로 개인전을 가졌던 그는 얼마 전 '프랑스의 자존심' 베르사유궁 초대 작가로 선정돼 내년 6월 개인전을 갖는다. 지난 10월 한국 예술가에게 주는 최고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이우환의 작품엔 그가 경멸하는 말 '최고 경매가'도 종종 따라붙는다.

2006년부터 나온 그의 그림들은 흰 캔버스에 사라져가는 듯한 무채색 점이 몇 개 찍힌 게 전부다. 돌과 철판이 마주 보거나, 돌 두 개가 철판을 사이에 두고 놓였거나, 방석 위에 돌들이 가부좌 틀듯 앉은 설치·조각 작품들도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 2011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회고전 때 그의 돌과 철판 앞에서 눈물을 짓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반면 어떤 이들은 '점 하나 찍고 예술이라니'라며 혀를 차며 허탈해했다.

이우환은 돌무더기 사이를 빠르게 오가다 눈이 녹아 질퍽한 땅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맘에 드는 돌이 없으니, 참…. 돌 쪽에서 보면 그러겠지. '무슨 소리야. 웃기네!'"

◇"내가 쓸 수 있는 무기, 몸뿐이더라"
[Why] [김신영 기자의 클로즈업(closeup)]
2011년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린 이우환 회고전 ‘무한의 제시’에 전시된 작품 ‘대화’. 돌과 철판을 썼다. / 블룸버그

돌은 이우환의 작품 시리즈 '관계항(關係項)'에 무한한 자연, 외계와 연결된 타자에 대한 상징으로 쓰인다. 그는 이 돌을 문명의 상징인 철판과 마주 보게 하거나, 매끈한 유리 위에 떨어뜨려 균열을 일으키면서 이들 사이의 '울림'을 표현한다. 30분이 넘게 돌을 고른 이우환과 서울의 한 카페에 마주 앉았다.

―돌을 깎아 쓰면 안 되나요?

"내가 좋아하는 동글동글한 돌이 그렇게 흔치가 않아요. 그렇다고 돌을 깎으면 갑자기 돌이 확 이상해져요. 손댔다는 냄새가 확연히 나요. 사람 손이 그만큼 무서워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뛰어다니는 거예요. 템스강(영국)부터 알프스산 밑, 미국 빌딩 건설하는 데라든지 별의별 군데를 다 돌아다니면서 돌을 찾아요. 그러다 여러 번 넘어져 다치기도 했고….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지역의 돌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과 비슷해요. 미국 돌은 어벙하고 듬직한데 좀 뒷맛이 약하고, 일본 돌은 차돌같이 단단하고 매끈매끈한데 숨이 막혀 있는 느낌이고, 우리나라 돌은 약간은 열려 있는 그런 느낌이 있어요."

―전시 끝나면 돌은 어디로 가나요?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놓고 할 때가 많아요. '실례합니다' 하고 내가 잠깐 반짝이게 보이게 하고는 자연에 되돌려주는 작업이에요."

―제가 유리에 돌을 떨어뜨리면, 예술이 아닌가요.

"금이 간다는 것에서는 같아요. 그런데 유리가 산산조각이 난 '폭력'만 보인다거나, '무거운 것에 닿으면 깨진다'는 유리의 성격만 보인다거나 하면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어려워요. 누가 보아도 '근사하다'는 느낌이 들 수 있게 깨야 해요. 그게 예술가예요."

―예술가는 그러면 늘 성공합니까.

"아니죠. 무수히 잘못 깨지고, 그래서 다시 해야죠. 그런데 하도 많이 하다 보니까 이제는 어떻게 하면 유리가 어떻게 깨진다는 걸 대략 알아요. 재미있는 것은 유리도 변해요. 1970년대엔 유리에 불순물이 많아서 돌을 떨어뜨리면 곧장 깨지지 않고 굴곡이 져요. 요즘 유리는 순수성이 강해서 쫙 바로 나가버려요. 그래서 옛날식으로 만드는 데를 찾아다녀요. 모든 사고(思考)가 그래요. 약간의 불순물이 섞여야 해요. 순수하면 못 써요. 그래서 나는 생각이 잘 안 풀릴 때 찻집에 가요. 아주 약간의 불순한 소리가 있는 곳이 찻집이니까."

―허리가 안 좋아진 건, 직업병인가요?

"지난 2월에 허리 때문에 두어 달 입원을 했어요. 직업병일 수도 있지만 큰 상(賞)이자 벌(罰)이라고 생각해요. 돌을 수없이 매질하고, 돌이나 철판을 야단치고 한 데 대한 대가죠. 그러니까 작품은 내 삶의 일부의 파편이에요. 그래서 내 작품은 위작(僞作)이 별로 없어요."

―베끼기 쉬울 것 같은데….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같은 경우 한국에 위작 얘기가 많이 나돌아요. 그래서 많이 보러 다녔어요. 가짜는 없었어요. 내 나름의 호흡이나 인체의 리듬에서 나오는 것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이우환은 몸을 써서 일하는 자신을 "원시적으로 사는 사람이고 현대에 맞지 않는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무거운 돌을 직접 옮기며 작업을 한다. 점 몇 개 찍은 듯한 '대화' 같은 작품도 만드는 데 40~50일이 필요하다. 물감을 섞는 데 며칠이 걸리고 붓을 들어 한 번 칠하면 적어도 일주일 후에야 마른다. 마르고 나서 서너 번 덧칠을 해야 한 작품이 나온다.

◇"제 이상한 옛날 그림, 다 갖다 버리세요"            

[Why] [김신영 기자의 클로즈업(closeup)]
지난 25일 서울 사직동 한 카페에서 만난 현대미술 작가 이우환은 자신의 그림이 경매에서 가장 비싸게 팔렸다는 식의 이야기를 가장 싫어한다고 했다. 그는 "작품을 돈놀이 하는 도구로 쓰이게 하는 경매를 나는 용서할 수 없다. 이놈의 경매 때문에 사람들이 그림이 좋아서가 아니라 '이거 팔면 돈이 되겠다' 싶어 작품을 산다"고 말했다. / 김연정 객원기자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유교식 교육을 받은 이우환은 문인인 황동초 선생에게 시·서·화(詩·書·畵)를 배웠다. 그의 꿈은 문학이었다. 서울사대부고 2학년 때 조선일보에 동시 부문 가작으로 당선돼 등단도 했다. 그는 당선작 '산길'을 아직도 외우고 있다며 오른쪽 위로 시선을 살짝 띄우고 시를 읊었다. "가랑잎 우수수 산길 따라가면, 굴참나무 밑 옹달샘 하나, 목축이던 아기사슴 막 달아나고, 도토리 한 톨 퐁당 떨어지네…."

―시가 여전히 맘에 드시나 봐요.

"아주 날카로운 센스가 있었죠, 하하. 제가 당선됐을 때 단편소설은 나중에 '꺼삐딴리'를 쓴 전광용 선생이 당선됐고, 희곡 가작에 차범석 선생이 뽑혔어요. 시상식 날 차범석 선생이 '야, 이봐. 술 마셔!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새파란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술을 퍼 먹여 가지고 혼이 난 기억이 있어요." 이 '문학 소년'은 그러나 1956년 서울대 미대에 진학한다.

"내가 공부를 잘 못했거든요. 점수가 모자라니까 교장 선생님이 문리대 같은 데는 원서를 안 써주는 거예요. 그런데 담임 선생님이 '내가 찾아보니까 미대에 가도 문학할 수가 있더라'고 그래요."

이우환은 데생도 제대로 배우지 않고 미대 실기시험을 치르러 갔다. 어릴 때 동양화 배웠던 기억을 꺼내 목탄을 붓처럼 들고 스윽 석고상의 윤곽을 그리고는 말았다. 서울대 미대 학장이던 장발 선생이 호통을 쳤다. "이놈아, 이게 뭐야!" 이우환이 맞받아쳤다. "선생님은 서양 사람 흉내 내는 데생 얘기를 하는데, 저는 반대합니다. 김홍도나 정선이나 그런 데생 했습니까? 제가 하는 데생 같은 거 했어요. 선생님들이 하라는 건 말짱 가짜예요!" "이놈이? 나가!" 이우환은 약 60년 전 대학입시 면접 현장을 얼굴이 벌게지도록 생생하게 재연(再演)하며 소년으로 돌아간 듯 싱글벙글했다.

"미대 지망생치고는 학과 성적이 괜찮고 하니까 붙여줬을 것 같아요." 이우환은 1학년을 마치고 대학을 그만두었다. 일본 도쿄(東京)에 있는 작은아버지에게 한약재를 전해주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갔다가 일본에 눌러앉았다. 삼촌이 일본에서 공부를 해보라고 거듭 권한 영향이 컸다. 그는 니혼(日本)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그림을 안 하니 후련하던가요.

"그렇긴 한데 너무 외로웠고 먹고사는 것도 힘들었어요. 자갈 파기, 접시닦이, 구두닦이 하고 그러다가 그림까지 그려 팔게 된 거예요."

―철학과 고학생 그림을 누가 사주나요?

"당시 일본에 있는 한 교포 신문사가 저한테 전람회를 열어준다고 그림을 많이 그려오라고 그래요. 사실 일본 재계에 있는 교포들을 불러서 돈을 엄청 받아내고, 그림 하나씩을 기념품으로 주는 자금 모금 행사였어요. 수십 점 그리고 지금 돈으로 한 백만원쯤 받았어요. 지금 그때 그게 많이 나와서 죽을 지경이에요. 부탁하는데 그때 그림 가진 분들은 빨리 좀 내다버리세요."

그러다가 미술을 다시 시작한 이우환은 일본에 온 지 10년쯤 지난 1969년 미술 평론 '존재와 무를 넘어서-세키네 노부오론'을 발표했다. 일본의 전위예술 운동인 '모노하(物派)'의 시발점이라고도 불리는 이 글을 통해 이우환은 이름을 날렸다. 모노하는 회화나 조각에 손대는 것을 자제하고 최대한 있는 그대로 두자는 미술 사조다. 명성이 높아지자 '이우환이 일본 미술을 해체하려 한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생겼다. 반박하려는 이우환을 주변에서 뜯어말렸다. 한국인이 너무 나가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당시의 소외감 때문에 일본에 대한 오기가 생겼고, 유럽으로 활동 무대를 넓혔다"고 말했다.

◇"화가도 괜찮은 직업이란 생각 들어요"

이우환은 대학 졸업 후 재일교포 여학생 모임에서 한글을 가르치다가 만난 김성순씨와 1965년 결혼해 세 딸을 두고 있다. 예술가가 된 딸은 없다.

―자식에게 미술을 권하지 않으셨어요?

"나는 주변 사람이 물으면 절대 예술 못 하게 해요. 성공할 가능성이 하늘의 별 따기고, 사람이 비뚤어지기 쉬우니까. 화가가 원래 썩 자랑할 직업이 아니에요. 그런데요, 나이가 들어서 내가 하는 일을 합리화시키려는 건지 요즘은 '화가도 괜찮은 직업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림에 자신감이 붙은 건가요?

"그렇다기보다… 나는 늘 음악에 대한 환상이 있었어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사람을 울리고 설레게 하잖아요. 음악은 저 깊은 곳과 연결되는, 혼을 울리는 그런 게 있어요. 그림은 그게 좀 약해요. 그런데 얼마 전 그림도 음악처럼 사실은 보이는 척하면서 위대한 무엇을 가려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림도 의외로 재밌는 부분이 있고, 그러니까 화가도 괜찮은 직업이 아닐까 싶은…."

―좋아하는 음악은?

"바흐 곡을 좋아해요. 여백이 있어요."

―선생님 작품의 여백과 통하는 건가요.

"그런 면이 있죠. 내가 말하는 여백이라는 것은 빈 공간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작품을 봄으로써 주변의 공기가 울리고 공간이 열린다는 얘기예요. 종소리처럼요. 그것을 나는 '여백현상'이라고 하고, 그것이 내가 말하는 '무한'이에요."

―꼭 작품을 설치하고 싶은 '주변 공간'이 있나요.

"글쎄… 어느 이름 없는 행성에? 이름 없는 공간에 갑자기 작품이 있으면 '어, 이게 뭐야' 하고 감각으로 발견하는 그런 느낌이 강할 테니까…."

◇"대서사시 접어라, 하찮은 짓이 중요하다"

뉴욕타임스는 이우환의 구겐하임 회고전을 소개하면서 '선(禪) 미니멀리스트'란 표현을 썼다. 그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평가가 선, 동양적, 한국적이라는 말이에요. 나에게 '동양적'이라고 하면 그건 '당신은 동양사람들이니 잘 놀다 가세요'란 뜻이에요. 그걸 팔아서는 득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떡이 돼요."

―그래서 이름의 로마자 표기(Lee Ufan)도 한국 냄새 덜 나게 하신 건가요?

"그건 1970년 일본에 왔던 조셉 러브라는 신부 겸 미술비평가가 만들어줬어요. 원래는 'Lee Woo Whan' 이렇게 한국식으로 썼는데 '정말 촌스럽다'면서요. 그런데 나는 절대 'Ufan Lee'라고는 안 써요. 왜 우리가 서양식으로 이름을 뒤집어서 써야 해요? 백남준이 나를 보면 밤낮 그랬어요. '진작 얘기 좀 해주지. 나도 바이크(Baik)남준 하면 근사할 것 같은데'라고."

―죽음을 생각하기도 하나요.

"'나이 들었나 보다' 하는 그런 느낌은 받아요. 예전엔 한 해에 작품을 백 개도 했는데 요즘은 열 개 남짓이에요.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고 하던 것을 더 다지고 엄격히 한다는 것이 결국 나이와도 관계가 있지 않나 싶어요. 많은 화랑은 새로운 것을 원해요. 일부러 안 해요. 나는 자본주의와 대량생산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요. 비슷한 작품을 반복하는 것은 시대에 대한 저항감이에요. 이렇게 서서히, 서서히 나를 축소하고 줄이고 말리다가 살그머니 꺼질 수도 있고…."

―예술도 시대에 따라 바뀔까요.

"문학을 예로 들어 볼까요. 내 또래 친구 중에 하루키 욕하는 사람이 많아요. '조그마한 얘기를 장황하게 쓴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별 볼일 없는 이야기가 중요한 거예요. 문학에 영웅의 대서사시를 담아야 한다는 것은 톨스토이가 살던 19세기적 발상이에요. 사회가 지금처럼 안정됐을 때는 큰 변동이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별 하찮은 얘기로 소설을 써야 해요. 그림도 마찬가지예요."

두 시간 넘게 이야기를 풀어내던 이우환은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예술 이야기만 쓰라"고 했다. 어디까지가 예술 이야기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수필집 '시간의 여울'을 무심한 듯 카페 식탁 위로 스윽 밀면서 말했다. "예술? 대표적인 쓸데없는, 쓸 데 있는 짓이 예술이지, 뭐."

김신영 | 기자

 

-조선일보, 2013/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