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델라의 '용서와 화해'가 오늘 이 땅에 던지는 메시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6일 95세로 타계한 넬슨 만델라 전(前)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에 대해 "만델라라는 사표(師表)가 없는 내 인생은 상상할 수도 없다"고 애도했다. 만델라가 인류의 사표가 된 것은 남아공의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흑백 분리정책)를 철폐시킨 공로 때문이 아니다. 그가 27년이나 감옥 생활을 하고서도 대통령에 올랐다는 입지전적인 삶 때문도 아니다.
만델라는 자신과 자신의 종족에게 가혹한 탄압을 가한 가해자들을 진심으로 껴안아 복수의 악순환에 빠지기 직전인 나라를 구하고, 국민 전체에 저주와 증오가 아닌 용서와 화해를 심었다. 전 세계가 이 기적에 감동했고, 인류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보았다. '인간에게는 선(善)한 본성이 있다'는 이 희망의 불씨는 만델라라는 이름과 함께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990년 감옥에서 나온 만델라 앞에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무력으로 백인 정권을 타도하자'는 ANC(아프리카 민족회의) 동료들의 요구였다. 만델라는 이 요구에 대해 "우리는 백인들이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해 이룩해 놓은 것에 감사를 표한다"고 공언하는 것으로 답했다.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엔 백인 가해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만델라는 이에 대해서도 '용서하되 잊지는 않는다'는 과거사 해결의 원칙으로 응했다. 이를 위해 설립한 법률의 이름도 '국민 통합 및 화해 촉진법'이었다. 이 법에 따라 6800명의 가해자가 진실을 고백하고 사면받았다. 만델라는 고백하지 않은 가해자들도 끝내 처벌하지 않았다.
만델라 대통령은 직전 백인 정권의 대통령을 부통령으로 임명했다. 흑인 탄압의 핵심이었던 정보책임자, 자신에게 종신형을 구형했던 검사를 자택으로 초대해 정중히 대접했다. 백인 교도관 세 명은 대통령 취임식장에 초대해 귀빈석에 앉혔다. 흑인 단체가 백인 문화를 대표하는 럭비 대표팀 해체를 요구하자 오히려 만델라는 흑인이 단 한 명뿐인 럭비대표팀을 찾아가 격려했다. 감동한 백인 선수들은 1995년 남아공에서 열린 럭비 월드컵에서 결사적으로 뛰어 예상을 깨고 우승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결승전이 끝나자 경기장에 모인 흑인과 백인이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넬~슨, 넬~슨"을 연호했다.
남아공은 흑·백 인종으로 갈라진 나라였다. 도저히 넘을 수 없을 듯한 이 강(江)도 타협과 화해라는 다리로 이어졌다. 남아공에 비하면 갈등의 근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우리 사회가 왜 이토록 갈라져 사사건건 대립하고 갈등하는지 답답할 따름이다.
만델라의 힘은 정권을 잡은 뒤 자기 세력의 이해관계에서 결연히 벗어나 국가와 대의(大義)의 편에 선 것에서 나왔다. 자신과 고난을 함께한 세력을 물리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힘을 가진 쪽이 희생하고 양보해야만 선의(善意)의 기운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만델라가 입증했다. 우리는 민주화에는 성공했으나 집권자가 끝내 '내 편'의 울타리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민주화 이후 정권이 계속 바뀌면서도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없었다. 그 결과 선의가 아닌 갈등의 악순환이 우리 사회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말았다. 만델라가 역사의 바다에 남긴 항해의 흔적은 너무나 크고도 깊다. 우리가 지금이라도 뱃머리를 돌려 그 항로를 따라간다면 우리 사회의 화해와 상생(相生)의 길이 열리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201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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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프리토리아 이성훈 특파원]
"그가 없는 이 나라 생각도 못해… 진정한 인류애 보여준 인물"
시민 수만명 거리 쏟아져 나와 남아공 국기 흔들며 애도
자택 앞에는 오전부터 추모객들이 가져다 놓은 꽃들이 쌓여 있었다. 아들 손을 잡고 온 오보안(42)씨는 "만델라가 가는 마지막 모습을 아이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주변에는 '잘 가요 만델라' '사랑해요'라고 적은 종이들을 벽에 붙이는 모습도 보였다. '우리는 당신을 사랑해요, 타타 마디바!'라는 글이 쓰여 있는 쪽지도 있었다. 현지어 타타(Tata)는 '아버지'를 뜻한다.
1990년 만델라가 27년간의 수감 생활을 끝내고 역사적 연설을 했던 요하네스버그 시청사 주변에도 추모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의 고향 쿠누에서도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오열했다. 이들은 "마디바(존경받는 어른·만델라의 존칭)"를 외치며 남아공 국기를 흔들었다. 현지 신문 '시티 프레스'는 만델라 서거 소식이 전해진 지난 5일 밤부터 수만명의 인파가 거리로 몰려나와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시민 만타시(23)는 "만델라 할아버지가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프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시민은 "만델라가 없는 남아공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198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데스먼드 투투 주교는 현지 언론에 발표한 기도문을 통해 "청렴과 화해, 헌신의 리더십을 펼쳤던 만델라를 잃은 데 대해 마음속 깊은 슬픔을 느낀다"고 밝혔다.
만델라를 떠나보낸 슬픔에는 흑백(黑白) 인종의 차이는 없었다. 추모 물결 속에는 백인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영국계 이주민 자손인 미셸(43)은 "만델라는 흑인과 백인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며 "진정한 인류애를 보여준 인물"이라고 말했다. 백인들이 주로 모여 사는 남부 케이프타운에서도 시민들이 거리에서 추모 행진을 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최근 경제 위기로 흑인 하층민의 생활고가 심화하고 있고, 만델라를 의식해 참고 있던 이들이 갑자기 불만을 터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흑인 밀집 지역인 소웨토 등에서는 약탈 등 범죄가 빈번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부정부패가 만연한 기성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도 극에 달해 있는 상황이다.
-조선일보, 201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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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줄잇는 만델라 친구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5일(현지 시각) 오후 만델라 서거 소식이 전해진 직후 백악관 브리핑룸에 나와 침통한 표정으로 추모 성명을 낭독했다. 오바마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 유명 인사들이 타계했을 때 빠짐없이 성명을 발표해 왔으나, 서면(書面)이 아닌 직접 발표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다. 오바마는 "만델라라는 사표(師表)가 없는 내 인생은 상상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그만큼 만델라는 오바마에게 '정신적 멘토(스승)'로서 의미가 각별했다는 것이다.
- 만델라의 오랜 친구들. 왼쪽 사진은 지난해 6월 힐러리 클린턴(오른쪽) 당시 미 국무장관이 남아공 쿠누에 있는 만델라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 오른쪽 사진은 2002년 요하네스버그를 방문한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오른쪽). /로이터 뉴시스
만델라와 오랜 기간 우정을 나눴던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도 이날 "만델라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 대변자이자 평화와 화해의 수호자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클린턴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방문한 첫 미국 대통령이다. 클린턴은 만델라와의 만남에 대해 "그는 오랜 수감 생활에도 사랑과 우정, 친절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화해의 정신 덕에 남아공은 과거를 딛고 공동의 미래를 구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각계의 추모도 이어졌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만델라는 정의로운 거인이었다"며 "만델라가 남긴 뜻을 이어받아 더 정의롭고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고 밝혔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메르켈 독일 총리,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도 추모 성명을 발표했다.
복싱 스타 무하마드 알리는 "어떠한 차별에도 꺾이지 않은 그의 영혼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추모했고,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창업자는 "그를 만날 때마다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는 만델라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2001년 만델라와 만나 그의 인생사를 듣고 감명해 남아공에 빈곤층을 위한 학교를 짓겠다고 약속했다. 윈프리는 2007년 그 약속을 지켰고, 이 학교 개교식에는 만델라가 직접 참석했다.
-조선일보, 201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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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의 '자유 향한 여정']
-족장 아들서 人權의 상징으로
인종차별 반대하다 대학 退學… 합법 투쟁위해 변호사 자격 따
1964년 반란죄로 종신형 선고… 교도소에서도 흑인 인권운동
1993년 노벨 평화상 수상… 이듬해 첫 흑인 대통령 당선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대통령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는 만델라와 가진 인터뷰에서 "어떻게 그런 비인간적인 감옥 생활을 하고 난 후 (백인에 대해) 복수심이 아닌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는가"라고 물었다. 만델라는 "내가 만약 감옥에 있지 않았다면 인생의 가장 어려운 과제, 즉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일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옥에 앉아서 생각할 기회는 바깥세상에서 가질 수 없는 기회였다"고 말했다.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
만델라는 1918년 남아공 남쪽 지역의 토착 템부족 족장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롤리라라'. '넬슨'이란 이름은 감리교 계열 학교에서 받은 영국식 이름이다. 그의 조국 남아공은 17세기 중반 네덜란드인이 이주하면서 백인 통치가 시작됐다. 네덜란드계 후손(보어인)들은 유럽과 기후가 비슷한 남쪽 케이프타운을 중심으로 터전을 마련했다. 19세기 들어 영국인들이 네덜란드와의 식민전쟁에서 승리하자 네덜란드계 후손들이 대거 내륙으로 이주했다. 이 과정에서 토착 흑인과 수많은 유혈 학살극을 벌였다. 일부 지배층이 와서 식민 통치를 하고 물러났던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달리, 남아공은 백인 이주민과 토착 부족 간에 갈등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사진이 영국 런던 의회 광장의 만델라 동상 앞에 6일(현지 시각) 놓여 있다. 시민들은‘아프리카의 아버지’라고 적힌 사진 주변에 조화를 놓았다. 전 세계에서 만델라 추모 열기가 일었다. /로이터 뉴시스
만델라는 1940년 인종차별 반대 시위를 주동하다 대학에서 쫓겨났다. 이때부터 일생을 건 흑인 인권운동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합법적인 투쟁을 위해 변호사 자격을 따고, 남아공 최초로 흑인 전용 법률상담소를 열어 조직적인 인권운동을 전개했다.
◇시민 불복종 운동 전개
합법적 평화 시위를 주도하던 만델라의 삶은 '샤프빌 학살 사건'을 계기로 바뀌게 된다. 백인 정권의 경찰은 1960년 3월 통행 차별법에 항의해 시위 중이던 흑인 69명을 사살했다. 만델라는 평화적 방법만으로는 인종 차별을 철폐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때부터 생산 현장 파업을 주도하고 대규모 시민 불복종 운동을 벌여나갔다. 백인 정권은 1964년 만델라를 반란죄로 체포하고 종신형을 선고했다.
만델라가 갇힌 곳은 바다 한가운데 있는 '로벤섬' 교도소의 5㎡(1.5평) 좁은 독방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모진 고문에 시달리며 강제 노역을 했다. 만델라는 수감 중에도 흑인 죄수들의 인권과 비인간적인 교도소 환경 개선을 위한 운동을 벌였다. 이런 활동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만델라 석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남아공 안팎에서 터져 나왔다. 인도는 만델라에게 1979년 네루 인권상을 수여했다.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도 그의 석방을 요구했다. 만델라는 세계 인권 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감옥에서 내가 걱정했던 것 중 하나는 내가 나도 모르게 바깥세상에서 투사한 허상, 내가 성인(聖人)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가장 위대한 무기는 평화
1980년대 남아공 백인 정부는 인종차별이 국제 문제로 떠오르면서 궁지에 몰렸다. 결국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 대통령은 1990년 만델라를 석방했다. 이듬해에는 아파르트헤이트의 핵심인 주민 차별법이 폐지됐다. 350년에 걸친 인종차별 정책이 막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만델라는 1993년 데 클레르크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4월 실시된 남아공 최초의 평등선거에서 첫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994년 대통령 취임 연설 메시지는 '억압의 종식'이었다. "이 아름다운 땅에서 다시는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합시다."
만델라는 남아있던 차별 정책을 모두 철폐하고 1999년 6월 퇴임 때까지 남아공 통합을 최우선 과제로 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어 인종차별 범죄의 진실을 밝히면서도, 백인들을 처벌하지 않고 용서와 화해를 구했다. 백인들은 기득권을 잃었지만 '피의 보복'을 막아 주는 지도자로 만델라를 받아들였다.
뉴욕타임스가 '20세기 최고의 책'으로 선정한 만델라의 저서 제목은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1995)이다. 만델라는 이 책에서 "가장 위대한 무기는 평화다"라며 평화와 치유가 대립과 분열을 해결할 최종 열쇠임을 말했다.
만델라는 첫 번째, 두 번째 부인과는 정책 노선 차이 등을 이유로 이혼했다. 1998년 모잠비크 전 대통령 부인이었던 그라샤 마셸(67) 여사와 재혼해 여생을 보냈다. 2남 4녀를 뒀으며 현재 딸 셋이 생존해 있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분리·격리를 뜻하는 아프리칸스어(네덜란드어 계통의 아프리카어)로, 남아공의 소수 백인 지배층에 의한 인종차별 정책을 가리키는 말. 2차대전 이후 백인 기반의 국민당 정권에 의해 극단적인 정책으로 확립됐다. 비(非)백인의 직업·거주지 제한, 노조 결성·토지 소유 금지, 다른 인종 간 혼인 금지, 공공시설 사용 제한 등이 시행됐다.
-조선일보, 201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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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lson Mandela 1918~2013
만델라 남아공 첫 흑인 대통령 서거… 화합·용서로 350년 黑白갈등 끝내
-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이 포근한 미소를 이젠 볼 수 없다. 그는 백인 정권 아래서 27년간 옥고를 치르고도“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상황을 다시는 만들지 말자”며 대통합을 이뤄낸 진정한 용자(勇者)였다. 그가 세계인에게 용서와 화해의 가르침을 남긴 채 5일(현지 시각) 자유를 향한 긴 여정을 마쳤다. 사진은 1996년 7월 대통령 재임 시절 프랑스 파리에서 기자들과 만날 당시 모습이다. /AFP
그는 1990년 사면 후 백인 대통령 데클레르크와 인종차별 정책을 폐지하는 협상에 성공해 약 350년에 걸친 인종 분규를 종식했다. 그 공로로 1993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76세 때인 1994년 남아공 최초의 평등선거에서 대통령에 선출돼 5년간 재임했다.
남아공 국민은 만델라가 지난 6월 폐 감염증이 재발해 사경을 헤매면서 이별을 준비해왔다. 지난 9월 퇴원해 요하네스버그의 자택에서 치료를 받아온 만델라는 5일 오후 8시 50분쯤 숨을 거뒀다고 대통령실은 전했다. 제이컵 주마 대통령은 "오는 10일 영결식을 가진 뒤 15일에 장례식을 국장(國葬)으로 치를 것"이라고 발표했다. 만델라는 자신의 장례를 소박하게 치러달라고 당부했지만, 국민의 상실감을 고려한 조치로 보인다.
-조선일보, 201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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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옥·대통령 당선·노벨평화상… 김대중 前대통령 삶과 닮은 꼴
- 넬슨 만델라(왼쪽) 전 남아공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2011년 3월 청와대에서 건배하는 모습. /정양균 기자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은 한국과 인연이 각별했다. 만델라는 대통령에 취임한 지 1년 만인 1995년과 퇴임 후인 2001년 두 차례 한국을 찾았다.
1995년 7월 첫 방문 당시 그는 한국을 남아공이 배워야 할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모범 사례라고 말했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한국은 대단히 아름다운 나라다. 내가 남아공을 드릴 테니 한국을 내게 주십시오"라고 농담을 건넸다.
만델라는 국회 연설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보호가 경제발전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다. 한국은 두 가지를 동시에 성취했다"고 말했다.
만델라는 2001년 3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만나 "세계 유일의 냉전 지대이자 남북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DMZ)에 '평화공원'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만델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우의를 나눴다. 둘은 투옥 생활, 민주화 투쟁, 대통령 당선, 노벨 평화상 수상 등 같은 이력을 갖고 있다. 만델라는 2004년 만해대상을 수상했다. 건강 문제로 시상식에 불참해 영상 메시지를 대신 보내왔다.
-조선일보, 201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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